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회의에 걸 맞는 회의와 회의비 지출이 되어야 한다.

▲ 오세택 목사 두레교회 담임
본 교단 소속 모든 목사들은 복음전파와 목양이라는 고유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 고유의 사역을 원활히 하기 위한 각종 활동에도 참여해야 한다. 각종 활동이라 함은 개체 교회의 제반 사역뿐만 아니라 노회나 총회, 기타 지역과 지상의 모든 교회와 연대, 연합하는 일등이다.  

이런 일을 위해 가장 빈번하고 기초적인 작업이 회의이다. 하나의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기 위해서는 적게는 수 차례, 많게는 수십 번의 회의가 필요하다. 현대 사회의 특성상, 개체 교회나 개체 교단이 홀로 복음전파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비효율적이며 역부족이다. 시계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이 다수와 다양한 개체교회들과 교단들이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이 연대와 연합을 위해서는 긴밀한 대화 체제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 대화의 장이 회의이다. 사회소통 구조가 발달해서 다양한 회의 수단이 있다고 하지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토론뿐만 아니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루어가야기에 직접 대면하는 회의가 불가피하다.  

이처럼 정치나 권력이 아닌 선교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적극적 의미의 회의를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구비되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경비문제이다. 소의 회의의 소집과 참여를 위한 경비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행되고 있는 것이 회의비 제도이다. 회의에 원활히 참여토록 하기 위해 지불되는 경비가 회의비이다. 

지상의 모든 일이 거의 다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순수한 동기나 의도를 가진 회의비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절되고 왜곡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서울 시내, 특히 노회 단위의 회의는 참여하기 위해 이동하는 시간이나 경비의 소유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소속한 노회는 공식적으로 사 만원의 회의비를 지불한다.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다.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인상(?)된 것이다. 한 때 회의비가 부담이 돼서 없앤 적이 있다. 그런데 일 년이 못되어서 다시 시행되고 있다. 명분은 회의비가 없으면 모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모여야 회의가 진행되고 보다 권위 있는 결정이 되는데 모이질 않으니 회의비를 지불해야 한다는 입장이 설득력이 있어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어쩌다가 중복해서 회의에 참석하게 되면 회의비를 두 번 받는 경우도 있다. 같은 장소에서 약간의 시간을 두고 모인 회의임에도 불구하고 두 소집부서로부터 각각 회의비를 받는 샘이다.  

앞서 말했듯이 회의를 위해서는 반드시 경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적정 회의비 이상을 지불하거나 수령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목회와 선교 활동 가운데 발생하는 회의이기게 시간은 회의비로 환산하지 않는듯하다. 그렇다면 오고 가는 경비로서 회의비가 책정된다는 뜻이다. 실지로 왕래 수단은 대중교통 수단을 제외하고 교회용 승용, 승합차를 이용할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회용 교통 수단은 이미 교회가 지불하고 있다. 교회가 지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통비 명분으로 회의비를 받는다면 이는 분명한 모순이다. 이런 경우는 교회에 회의비를 반납하든가 아니면 회의비를 받지 않아야 한다. 지역을 벗어나는 장거리 회의에 참석하는 경우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게 된다. 이때는 실비로 지불하는 것이 옳다. 여행 중 식사를 해야 할 경우에 식사비를 포함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회의비 지출이 실비 위주로 철저하게 시행되어야 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회의비로 지출되는 재원이 헌금이기 때문이다. 헌금은 장사하여 남긴 이익을 모금하는 것으로 그 목적은 가난한 성도를 돕기 위함이다. 헌금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형식을 갖고 있지만 실제 사용은 교회 내에 물질적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돕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다.(고전16:1-3, 고후8-9장) 나중에는 전임 전도인들을 위한 생계비를 보증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었지만 원래 헌금의 목적은 물질적 평균을 이루는 것이다. 좀 여유 있는 자가 그 여유분을 헌금의 형식으로 모으고 그 모은 돈으로 구제하고 나누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생계의 위협을 당하지 않도록 하며 그로 인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회의비 지출이란 항목보다 더 크게 교회 재정의 지출 내용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아무튼 같은 지역 내에서 회집되는 회의에 사 만원이나 지급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모순이다. 필자가 소속한 노회만 해도 일 년에 약 천 만원이란 예산이 회의비로 지출된다. 이 예산이라면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의 생계 지원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각 노회 마다 나름대로의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을 돕는 예산들이 있겠지만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천 만원의 예산이라면 큰 힘이 된다. 이렇게 회의비를 재고하게 되면 다른 항목에서도 많은 부분 수정이 가능하며 이런 작은 돌아봄이 예산 전체에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약 십 년 전 회의비 삭감을 위한 대안을 찾으면서 전체 예산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개척 기금을 모으게 되었고 지금 이억 원 이상의 예산이 준비되어 새로운 교회가 태동하기 직전에 와 있다.  

교단 전체에 수많은 조직과 그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회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으로 안다. 각 회의에 비용이 얼마로 책정되었으며 일 년 예산 가운데 회의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실태 조사가 시급하다. 작은 회의비 절감이 전체 예산뿐만이 아니라 노회나 총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재고하는 기대치 않았던 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둘째로 회의비 지출에 대한 검증은 회의를 위한 회의를 줄일 수 있게 된다. 사실 한 번 회의로 많은 것을 결정하고 시행할 수 있다. 그러나 회의비의 지출은 회의를 위한 회의를 유발시킬 수 있다. 설마 옹졸한 짓을 하겠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오늘 노회나 총회의 현실이다. 회의를 위한 회의, 선교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지 않는 어떤 회의도 물질을 떠나서 권력에의 욕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교단의 실상이기도 하다. 일전에 어떤 이사회 이사 선출이 있었다. 비록 회의비를 지출하는 정식적인 회의는 아니었지만 이사 입후보자들이 결정되고 최종 선출 때까지 수많은 사적인 회의, 이를 흥정이라고 말하는 것을 옳은 것이지만 회의가 오간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 수 대화와 회의가 후보의 자질과 정책을 듣고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인 흥정이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후보의 적합성은 논해지지 않고 결국 계파간의 균형 싸움이었음이 그들의 입을 통해 들어났다. 이처럼 회의가 돈과 권력의 수단으로 전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일단 회의비를 삭감하거나 삭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회의비뿐만 아니다. 이번 논의에서 더 나간다고 보지만 설교나 강의 사례비도 너무 과다하게 지불된다. 오늘 우리 교단과 한국 교회의 실정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이 무색해졌다.  

필자가 신학교 시절의 이야기다. 미국의 할아버지 선교사 한 분을 성경공부에 초청해서 특강을 들었다. 학생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작은 돈이 든 봉투를 여비라며 내밀었다. 그랬더니 그 할아버지께서 부스럭 부스럭 호주머리를 한 참 뒤지더니 토큰 하나를 꺼내 튕기시고는 '난 이것만 있으면 집에 갈 수 있어!'라면서 환한 미소로 거절하셨다. 함께 말씀을 나누는 것만으로 본인은 충분히 대접과 보상을 받았다고 말하고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종종 걸음으로 사라지셨다. 그의 자그마한 행동이 큰 감동으로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내가 아닌 너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거룩한 회의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할 수 있는 그 날을 사모하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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