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중국인노동자와 함께 살아가는 두레교회 담임

5백명 넘으면 교회 분가시키고

목사 부목사 가족수만큼만 월급받고

대부분 빈자 돕는 교회 만든 장본인

 

그의 멘토는 

새마을운동 원조이면서

유신반대하고

박정희, 전경환에게도 굴하지 않았던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

 


▲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오세택 목사 사진 조현

“왜 당신은 교회의 치부를 밖으로 드러내 교회를 욕보이기만 하는 겁니까.

한국 교회에서 ‘누워서 침 뱉는 목회자’로 비난 받는 오세택(57·서울 당산동 두레교회 담임)목사를 만났다. 서울 영등포구 영신로 뒷골목 허름한 상가건물 2층 사무실 한 켠에서다. 이곳이 바로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실이다. 그는 백종국 경상대 교수, 박종운 변호사, 정은숙 전 녹색미래 간사 등과 함께 이 단체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현직 목사로선 그가 유일하다

 


▲ 사무국장 남오성 목사(왼쪽)와 이야기중인 오세택 목사 사진 조현

그는 소속 교단에서도, 전체 개신교에서도 찍힐 대로 찍혔다. 보수성이 강한 고신교단 소속인 그는 먼저 “한 가지 슬픔과 한 가지 기쁨”을 말했다. “여전히 교회개혁연대가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한국 기독교의 상황이 슬픔이죠. 하지만 교회개혁연대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게 기쁨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교회개혁실천연대가 타깃으로 삼은 인물과 교회는 ‘한국 교회의 상징들’이었다. 이 단체는 지난 2002년 출범 이후 금란교회와 왕성교회 등 대형교회 세습반대 운동,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비호 반대,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사퇴와 제자교회 정삼지 목사 재정 비리 의혹 제기,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냉전 숭미 집회’ 반대, 사랑의교회 건축반대 운동, 한기총 해체운동을 주도했다. 여신도 성폭행 혐의로 삼일교회에서 2010년 사임한 뒤 올해 홍대새교회를 개척해 목회에 나선 전병욱 목사를 예장합동교단의 소속노회에 징계안을 올리도록 이끈 것도 교회개혁실천연대다.

 


▲ 남오성 사무국장(아래) 등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 실무자 4인방 사진 조현

대형교회 목사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한국 개신교의 현실에서 이렇게 대형교회와 힘있는 목사들을 건드리고도 살아 남았다는 게 기적적인 것이다

 

대체 얼마나 간이 크길래 그럴까. 아니다. 그는 1997년 구제금융 사태 발생 뒤 노숙자가 급증하자 자신의 교회에 20여명의 노숙자들을 아예 ‘거주’하도록 했고, 휴일에도 갈 데 없는 중국동포들을 위해 쉼터를 만들어준 ‘착한’ 목사다. 그리고 신자가 500명이 넘자 수유리로, 김포로 완전히 분립시켰고, 6년마다 담임목사가 신자로부터 중간평가를 받으며, 담임목사이건 부목사이건 직위가 아니라 가족수만큼 사례비(급료)를 받고 있다. 대형교회도 못 만들고, 헌금이란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는 것이지 목사에게 주라거나 호화로운 건물 지으라는 돈이 아니라며 월급도 몇푼 못 받고, 낡디낡은 교회건물로 버티는 ‘간 작은’ 목사다

 


▲ 전 한기총 대표회장인 길자연 목사의 왕성교회 세습 반대 시위 사진 교회개혁실천연대 제공

그가 처음부터 ‘칼’을 들이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기 목사가 자발적으로 물러나 존경받는 원로로 남기를 간절히 원했고, 전병욱 목사에게 빨리 피해자들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피해 보상과 회개를 통해 한국 교회의 재목으로 남아주기를 바랐다고 했다.

 

 “죄 안 짓고 사는 사람 있나요? 마음으로 짓는 죄도 다 죄인데요.

 


▲ 여의도순복음교회 관련 기자회견을 하는 교회개혁실천연대 박득훈 방인성 목사 등 간부들 사진 교회개혁실천연대 제공

그런데도 그의 바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교만과 탐욕으로 두려움마저 잃어버린 목회자가 달라지지 않고는 교회가 달라질 수 없다는 현실을 늘 깨닫는 것은 현직 목회자로서 두려움이자 괴로움이었다.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주도하는 건 목회자가 마음대로 전횡을 일삼는 주먹구구 목회가 아니라 ‘법’에 따르도록 교회마다 정관을 만들고, 회계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교회 민주화다. 건건마다 가부장적 목회자에겐 마뜩치 않은 것들이다.

 


▲ 한국교회의 회개와 갱신을 촉구하는 오세택 목사 사진 한국교회개혁실천연대 제공

그는 어떻게 이처럼 ‘소신’을 밀어붙이는 힘을 갖게 됐을까? 그의 멘토는 가나안농군학교를 만든 김용기(1909~88) 장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김 장로의 강연을 듣고 감명받은 그는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4년간 가나안농군학교에서 교목으로 일했다.

 

“박정희 대통령 때 김 장로를 초청한 청와대에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오라고 하자, 나는 그런 옷도 넥타이도 없으니 안 가겠다고 하고, 군사쿠데타 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이 찾아왔는데 만나주지 않은 분이 김 장로님이었지요. 동베를린간첩단조작사건이 난 1968년에 ‘아이부터 노인까지 연령대별로 4천명이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가면 김일성이 절대 쏴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김 장로님을 존경해 직원들을 모두 농군학교에 연수 보냈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소떼 방북을 보면서 김 장로님의 아이디어를 실행한 것으로 생각했지요.

 


▲ 새마을운동의 원조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인 가나안농군학교 창립자 일가 김용기 장로 사진 <한겨레> 자료

그는 또 김 장로가 유신헌법이 반포되자 <운명의 개척자>라는 책을 펴내 유신에 반대한 통에 그 책이 금서가 됐다는 비화도 공개했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자’며 평생 작업복을 입고 가장 밑바닥에서 섬기며 김 장로가 몸으로 산 그리스도 정신과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오직 이기적 탐욕에만 사로잡힌 게 한국 교회와 목회자의 문제이자 개혁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최근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적그리스도가 바로 자본주의라고 규정했지요. 우리가 결국 직면하고 이겨내야 하는 것도 교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탐욕이지요.

 

교회개혁실천연대는 오는 25일 오후 7~930분 서울 숭실대 한경직기념관에서 10돌 기념행사를 연다. 이 자리에선 오병이어밥상과 축하공연에 이어 ‘한국교회의 회개와 갱신을 위한 선언문’이 발표된다.

(출처: 한겨레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