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교회 성장의 명암과 전망 -

개혁신학 전통에서 본 한국 교회1)

1)이 글은 필자의 「한국 교회사」(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09)서 논한 ‘한국교회의 현실과 전망’을 보완한 것임을 밝히며 양해를 구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 성장의 명암은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다. 칼빈이 정의한 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신자의 모임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관이지만, 교회가 불완전한 사람들의 모임이어서도 그렇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부족하거나 잘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초부터 교회에는 명암이 있었다. 예수님의 비유와 가르침에서 이미 이에 대한 경고를 볼 수 있으며, 사도행전과 고린도전후서를 비롯한 여러 서신서에도 그런 경고가 있고, 결과가 반영되어 있다. 교회의 어두운 부분은 교회의 밝은 부분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인 반면에, 교회의 밝은 부분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람직한 교회상이다. 사도 시대의 예루살렘교회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쓴 일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심으로 교회가 성장하게 된 것은 지상의 모든 교회가 따라야 할 교회의 밝은 부분이다(행 2:37~47).

신학의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변증하며 설명하고 실천을 독려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복음 전파의 결과로 이룩된 교회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반성하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설립되어 성장해 온 과정을 역사에서 관찰하면, 늘 말씀에 반응하는 실천 혹은 사건이 먼저 있고, 그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나 반성 혹은 정리, 즉 신앙고백이나 교의 형성은 실천이나 사건을 오랜 시일 후에 뒤따랐음을 발견한다.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인격과 기능, 성만찬의 의미 등은 오랜 논의와 논쟁을 거쳐 신앙고백과 교의로 결정되었다. 교회에 대한 철저한 반성은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시행되었다. 그들은 교회에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부정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성경 말씀을 따라 반성함과 동시에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나섰다.

우리가 종교개혁을 기념하면서 한국 교회를, 특히 한국 장로교회를 되돌아보며 유의해야 할 점은 종교개혁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현재 한국 교회가 처해 있는 역사적 상황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속해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는 오랜 세월을 거쳐 기독교화된 서방 세계에서 사회와 문화를 지배하는 권세를 향유해 오던 교황주의 교회였다. 문예부흥 이후 교황과 교회의 권세는 쇠퇴하기 시작했으나 아직도 정치 권세와 밀착된 막강한 권세를 가진 통일적인 거대한 기구를 형성하고 있는 교회였다. 종교개혁자들의 과제는 이러한 기독교화된 세계에서 성경의 진리를 밝히며,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리를 개혁하는 일과 자신들을 제3의 신령주의적 급진주의자들과 구별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교파와 교단으로 분열된 교회로 다종교사회에서 타종교와 공존하는 가운데 개혁주의 전통을 밝히며 전도와 선교에 힘쓰는 가운데, 성경을 비평하며 전통적인 신앙을 외면할 뿐 아니라, 종교다원주의로까지 발전하게 된 자유주의 신학을 경계하는 한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만 급진적인 신앙에 속하는 신령주의, 세대주의, 근본주의와의 차이를 인식하는 등 더 다양하고 복잡한 과제들을 목전에 두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교회 성장의 명암은 따로 언제나 선명히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니고, 가라지 또는 그물 비유의 말씀(마 13:24~30, 47~50)에서처럼 서로 교차되어 있거나 때로는 하나로 뒤엉켜 있음을 발견한다.

1. 한국 교회 성장, 1950대까지

1870년대 후반부터 만주에서 활동한 선교사와 한국 동역자들을 통하여 복음을 받기 시작한 한국 교회는 1894/5년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으로 선교가 시작되어 교회가 서기 시작하였다. 이후 개신교 선교사상(宣敎史上)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히 성장해 왔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병행하여 의료, 교육, 사회사업, 한글의 발굴과 보급,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분 평등화 운동 등 여러 방면으로 구한말의 개화에 이바지하였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선교지 분담 협정을 통하여 교세 확장의 경쟁으로 인한 불필요한 소모를 피하고 교회가 건전하게 발전해 가도록 했으며, 장로교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 방법을 적용하여 한국 장로교회가 처음부터 재정적으로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하도록 배려하였다. 감리교와 다른 교파에서도 대동소이한 선교 정책을 폈다. 성경 공부를 통하여 성경 지식을 갖춘 교회로 성장하게 했으며, 또한 교회를 돌볼 전도자를 육성하였다.

감리교회에서는 1901년부터 한두 사람씩 목사로 먼저 장립부터 하다가 1907년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장로교회의 경우에는 1901년에 신학교를 설립했으며, 1907년에 한국인 목사를 안수함과 동시에 독노회(獨老會)를 조직하였다. 한국 교회는 이때 이미 큰 교세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 교회는 1903년경부터 성령의 각성 운동이 일어나 1907년을 전후로 부흥을 경험하였으며, 많은 교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 경건한 생활에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1904년부터는 각처에 인재를 양성하는 많은 기독교 학교들이 서게 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교회는 일제의 핍박을 받으며 성장해 오다가 1919년의 3·1 운동 때에는 기독교인들이 민족의 독립을 절규하는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한국 교회가 한민족의 지체인 교회임을 과시하였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농촌 진흥을 위한 계몽과 교육에 힘을 기울임으로써, 교회는 영적인 삶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이민족의 강점 아래서 신음하는 우리네 민족의 생활고를 해결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였다. 이 시점까지 교회는 영적이며 도덕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사회에 공헌하고 사회를 이끌어 가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초기 한국 교회의 밝은 부분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한국 교회는 큰 시련을 겪음과 동시에 어두운 부분을 안게 되거나 노출하게 되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박탈하였으며, 민족과 교회를 신도(神道)와 군국주의의 노예로 만들려고 하였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경우 개별적인 저항 운동은 있었으나 공적으로 교회는 이에 굴종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경건과 생기를 상실하였다.

또한 1920년대부터 자유주의 신학이 소개되어 1930년대 중반에 한국 교회에 신학적인 문제로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당시 교회가 직면한 신사참배라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하여 보수 측과 자유주의 측은 서로 달리 대응하였다. 일제의 탄압 하에서 보수적인 지도자들이 옥살이를 하거나 망명하는 사이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교를 세우고 신학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에 굴종한 치욕적인 과거를 회개함으로써 정리해야 했는데도, 쓰라린 과거를 들추지 않고 잊어버리려고만 하였다. 이런 것이 바로 일제하에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들이 한국 교회에 남긴 상흔이다.

1930년대에 있었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성령으로 인한 대 부흥을 따라 일어난, 성령을 빙자한 신비주의적인 이단 운동이었다. 그 운동들은 1950년대 이후에 생긴 박태선, 문선명 등 이단 운동(異端運動)의 모체였다. 193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선교사들은 이제 한국 교회의 기틀이 충분히 잡혔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퇴진할 시기를 논의하고 있을 즈음, 1940년대 초에 일제 정부에게 강제로 출국을 당하였다. 그리고 여러 교파 교회는 강제로 통합되어 일본 기독교 교단에 편입되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강제로 통합된 교단은 본래의 교파 교회로 환원했으나 신사참배 문제의 후유증으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다 같이 교회 분열의 아픔을 경험하였다. 장로교회는 회개와 교회의 쇄신을 주창하는 고신측이 1952년 분립한 데 이어서, 1953년 신학의 자유를 구가하는 기장 측의 분립으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최초의 분열이 유감스럽게도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이 진행되는 6·25 전쟁 중에 일어났다. 그 후 장로교회는 1959년에 남은 큰 둥치가 다시 WCC 가입 여부 문제로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분열하였다. 그 이후에도 장로교회의 분열은 계속되어 제가끔 총회를 가진 수많은 장로교회 교단들이 생겼다.

2. 한국 교회의 성장, 1960년대 이후

1964년에 300명의 천주교를 포함하는 각 교단 대표들이 모여 한국 선교 80주년이 되는 1965년에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하는 표어를 내걸고 소위 민족 복음화 운동을 벌였다. 한국 교회가 여러 교파와 교단으로 나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화 운동을 범 교단적으로 연합하여 추진한 것은 참으로 뜻있는 일이다. 그것은 여러 교회들이 모두 교회의 목적과 시대적인 사명을 인식하고 공감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것은 또한 여러 교회가 하나가 되어 전통적인 경건주의적 전도 정신과 열정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임을 과시한 것이었다. 교회들은 소극적인 토착화 신학과 같은 이론에 구애 받지 않고 과감하게 전도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것은 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 1915년의 박람회의 기회를 포착하여 추진한 전도 운동, 1920년의 전도 운동, 1930년에 시작한 3년간의 전도 운동 등 한국 교회가 수시로 시도한 전도 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복음화’ 운동이다.

그 이후 1973년의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1974년의 ‘엑스플로 74’, 1977년의 한국부흥사협회 주최로 열린 전도집회, 1980년의 ‘80 세계 복음화 대회’ 등 연달아 대형 집회가 열렸다. 15일간 열린 마지막 대회에는 연인원 1천 700만이 참석하였으며, 70만의 결신자를 얻었다. 대형 집회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비판적 견해도 없지 않았으나, 기독교 지도자들과 동역하고 협조한 이들의 수고와 수많은 사람들의 호응으로 수백만이 운집한 대형 집회가 열리게 된 것만도 기적적인 일일뿐더러, 1980년의 집회에서 70만의 결신자를 얻은 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즉 성령의 역사로 된 일이다. 많은 결신자를 얻은 것을 교회는 마땅히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열정과 노력 및 여러 요인들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는 1970대와 80대에 수적으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 운동과 급속한 성장에는 어두운 측면도 교차되어 있다.

3. 한국 교회의 분열

한국 교회가 급속한 성장을 이룬 사실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한국 교회는 많은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사에 유례없는 극심한 교회 분열이다. 누가 뭐라고 변명하든지 간에 먼저 지적되어야 하는 것은 빈번한 교회 분열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는 병폐이다. 교회 분열이 교단 간의 교세 확장을 위한 경쟁을 유발하여 급속한 교회 성장을 이룩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하나, 교회 분열로 야기된 부정적인 결과가 그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의 분열이 주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적인 장로교회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신앙의 보수(保守)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교회 지도자들의 독선적인 사고 때문이기도 하며,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분하는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을 역사적으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기도 하다. 즉,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만 교회사적인 안목을 가지지 못하고 성경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신령주의적 교회관 때문이다. 일본어를 해독하는 많은 선배들이 무교회주의자인 우찌무라(內村鑑三)와 구로자키(黑崎)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교회 분열로 말미암아 초래된 문제점들 중 하나는 교회들의 개교회주의화 경향이다. 개교회주의 경향은 교회 분열로 인한 노회와 총회의 치리에 대한 불신과 교단 간의 경쟁적인 교세 확장에서 초래되었다. 감독교회인 감리교회는 물론이고 장로교회도 교구 제도적인 교회로 발전해 왔는데, 그것이 교회 분열과 경쟁적인 교세 확장으로 인하여 와해되었다. 여기에는 이북에 적을 둔 교직자들의 무지역노회의 형성과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도 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지역교회가 시찰회의 감독과 지원하에 전도소를 설치하여 그것이 교회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전도자가 독자적으로 투자하거나 혹은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네비우스의 선교 방법이 이러한 교회 자립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으나, 자본주의 기업의 생리를 닮게 된 교회는 생존을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했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교회는 비록 노회에 가입을 한다고 하더라도 노회에 대한 인식과 자세가 처음부터 노회의 감독과 보호 아래 전도소에서부터 성장한 교회의 것과는 다르다. 교회 분열 이후 대체로 개교회주의적인 의식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들이 많다.

한국 장로교회의 경우에는 오래 전부터 영세한 교회를 전전하며 목회한 목사를 위해서는 아무런 노후 보장이 없으나,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목회한 목사는 원로목사로 추대하여 노후 보장을 받도록 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개교회 단위의 노후 보장 제도나마 갖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일이지만, 이러한 제도는 많은 부작용을 낳을 뿐 아니라, 역시 개교회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고 교권주의와 개교회주의를 조장할 수 있는 제도이다. 개교회주의 교회는 대교회를 지향하며, 대교회는 개교회주의 성향을 갖게 마련이다. 노회가 할 수 있는 모든 사업을 개교회가 독자적으로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교회들은 교황을 중심하는 교계제도(敎階制度, hierarchy)의 치리 형태를 거부하면서 제각기 새로운 교회 치리 형태를 갖게 되었다. 중세 교회의 제도를 약간 개선한 감독제도, 중세 교회의 제도와는 상반되는 개교회주의적인 독립교회 제도, 그리고 양자의 절충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로교 제도 등이다. 개교회주의 교회는 중세적인 교회 제도를 가장 철저히 배제하는 교회 제도라고 하지만 가장 중세적인 교회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개교회주의 성향의 대교회는 보다 큰 치리회의 제재를 받지 않고 그 자체가 최종 권위를 가지며, 그 교회의 목회자는 대체로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추앙을 받으며, 작은 교황이 될 수 있다. 조직을 갖춘 교황청의 교황과는 달리 얼마든지 독재할 수 있고, 부패할 수 있으며,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소지를 안게 된다. 한국 교회에서 유행병처럼 번져 가고 있는 대교회 목사직의 세습은 개교회주의로 인한 쓴 열매이다. 서방교회가 5, 6세기에 목사의 독신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한 가장 큰 동기는 교회 재산의 사유화와 세습을 막기 위해서였다.2) 개교회주의 교회들이 많으면 교계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며, 노회는 지역교회에 분쟁이 있어도 조정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지역 교회 제도의 붕괴로 교인들은 쉽게 교회를 옮기고 이동하는 교인이 되면서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옳게 하지 못한다. 교인 각자가 서로 돕고 의지하는 공동체의 책임 있는 지체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중 속에서 묻히어 자유로운 개인으로 지내기를 좋아하는 교인이 늘어난다. 스스로 숨어 지내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진다면, 기독교 윤리는 그만큼 퇴보할 수밖에 없다.

2)김영재, 「기독교 교회사」 (수원: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4), 246.

4. 은사 운동과 기복 신앙

1970년대부터 국가의 경제 성장과 함께 대교회를 지향하는 많은 교회들이 재정의 풍요를 누리면서부터 1950년대 이전과는 달리 한층 더 각종 헌금을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비롯하여 초대 교회가 힘써 온 과업이 선교와 구제였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선교만을 지상 과업으로 생각하고 거기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바람에 교회의 확장을 위한 일은 모두 정당하게 여겨 왔다. 더 많은 사람을 인도하기 위해서 교회당을 크게 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느라 구제에는 인색한, 균형을 잃은 교회로 자라 왔다. 그러므로 사회의 눈에는 교회가 막대한 예산을 집행하면서도 사회에 환원할 줄 모르고, 자기 비대화만을 추구하는 종교 집단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예배에서 헌금을 바친 사람을 광고하거나 그를 위하여 복을 빌며 기도하는 일은 한국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기이한 광경이다. 1950년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풍습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복을 갈구하는 대중의 기복적인 종교심을 만족시켜 준다는 목회적인 배려에서 생긴 관행인데,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예배에는 전혀 맞지 않을뿐더러, 회중들이 하나님을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장차 영원한 나라에서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고, 물질을 바치는 데 따라 복을 내린다는 저급한 샤먼의 신 이해에 머물게 하는 쇄신되어야 할 풍조이다.

1970년대부터 오순절 교회가 성령의 은사 운동을 주도하면서 그 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한편, 한국 교회에 성령에 대한 신학적인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켰으나, 물질적인 축복을 강조하고 기복신앙을 조장함으로써 한국 교회에 예배와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 교회가 개교회주의 성향을 띠고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경향이었으므로 기복신앙의 영향은 더 극대화 되었다. 초기 한국 교회가 경험한 대부흥은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에 힘쓰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부음 받아 일어난 불가항력적인 회개 운동이었다.

한국 교회사상(敎會史上) 부흥사들 가운데 병 고치는 기적을 행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다른 선교 교회에서도 경험하는 일이다. 초기 한국 교회의 대부흥 때와 그 이후에 활동한 길선주 목사, 1920년대와 30년대에 부흥사로 활동한 김익두 목사, 그리고 해방 후에 활약한 감리교회의 박재봉 목사가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에게 병 고치는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을 얻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강조하며 배려하였다. 그들은 집회의 목적을 항상 말씀 선포에 두었다. 그것은 신약 성경에 나타난 사도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사도들은 이따금 사람들의 병 고치는 능력을 행하였으나, 사도들이 받은 병 고치는 은사는 복음 전파를 위한 부수적인 은사로서, 천국의 임하심과 구체적인 구원의 징표로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과는 구별된다.

그러나 오늘의 은사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은 회중들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의 말씀보다는 방언과 병의 치유 등 감각적인 경험과 현세적인 안녕과 복에 더 관심을 갖게 한다. 동조자를 얻어 조직을 형성하고, 많은 사람을 동원하기 위하여 광고 매체를 통하여 선전하며, 대형 집회를 열어 병 고치는 일을 주요 행사로 삼고 이를 과시한다.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께서 각기 다른 은사를 부어 주셨으므로 각기 받은 은사로 교회에 덕을 세우기를 힘쓰고, 각기 남의 은사를 존중하라는 말씀(고전 12장)을 무시하고,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가 곧 성령의 은사를 대표하는 것인 양 주장한다. 개중에는 방언하는 것이나 혹은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것을 가르치거나 전수한다는 경우가 있는데, 성경에는 그렇게 가르치는 예가 없으며, 신학적으로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여하튼 이러한 은사 운동은 초자연적인 세계와 기적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을 유발하거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기복 신앙을 부추기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올바른 예배와 윤리적인 삶에는 무관심하게 만든다. 은사 운동을 하는 이들이 참으로 능력을 행하더라도 배타적으로 자기가 받은 은사만을 내세우며, 스스로 교만해져서 능력을 행하는 지도자로 군림하면서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이단의 길로 가기가 쉽다. 결국 많은 사람을 미혹하며 부를 축적하는 적그리스도적인 교주가 되는 것이 통례임을 관찰할 수 있다.

기복 신앙은 종교적인 신앙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를 용인하셨다. 그러나 그것을 조장하시지는 않으셨다.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나님을 찾는 신앙이 천지를 지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기복 신앙을 참 신앙으로 승화되도록 순화시키기는커녕 이를 방치하거나 오히려 조장하는 경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좇으며, 그것이 곧 종교적인 신앙 체험의 전부이거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윤리적이며 거룩한 성화(聖化)의 삶을 힘쓰는 데 미흡한 교인들로 머문다. 그리고 선교만 강조하고 구제 봉사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다시 말해서, 영혼 구원만을 강조하고 육적인 생명과 실제적인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신자들을 윤리의식이 결여된 사람이 되게 한다.

5. 교회의 치리 제도

우리는 교회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일을 ‘교회 정치’라고 하여 세속의 ‘정치’와 용어를 분별하지 않고 있어서 그렇게 의식화되는 위험을 늘 안고 있다. 영어로는 소위 ‘교회 정치’를 세속의 정치(politics)와 구별하여 치리(polity)라고 한다. 치리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제정된 교회 헌법을 따라 교회를 돌보고 다스린다는 뜻이다. 한국 장로교회 헌법의 제3장 ‘교회 정치’는 미국 장로교 헌법에는 ‘Form of Government’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치’보다는 ‘교회행정’이 옳은 번역이고 치리의 개념에도 맞는 말이다.

장로교회는 목사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감독 치리 제도와 회중교회 치리 제도의 중간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중세적인 교권주의 교회나 회중교회적인 개교회주의 교회로 기울어질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다. 특히 한국 교회는 구약 성경의 문자적인 이해와 샤먼이 신과 인간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무속 종교에 익숙하기 때문에 목사를 제사장으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여 교권주의가 자랄 수 있는 소지가 있다. 교권주의를 조장할 수 있는 소지는 헌법의 치리 부분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에 따르면, 목회자로 초빙된 목사는 1~2년간 임시목사로 있다가 재신임을 받아 위임목사가 된다. 임시목사와 위임목사의 구분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도 많지만, 위임목사는 종신토록 시무하는 목사로 그 의미가 왜곡되고 있다. 모 교단에서는 놀랍게도 헌법에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 위임목사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다. 노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목사에게 교회를 목회하도록 맡기는 행위가 위임이고, 이 임무를 맡은 목사가 위임목사이다. 노회는 처음부터 목사를 위임하여 목회자로 세워야 노회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장로나 중요한 기관장(신학교 등)을 선출할 경우 2/3의 찬성표를 요구하는 불합리한 법은 고쳐야 한다. 2/3의 다수결의는 실은 1/3의 반대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소극적인 소수결의이다. 그것은 물밑 정치를 유발하고 부패와 편법과 교권주의를 조장하는 비합리적인 장치이다. 3)

이미 지적한 대로 교회의 난립을 통하여 교구 제도적인 지역교회 제도가 와해됨으로 말미암아 장로교회는 실질적으로 회중교회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장로교인들의 의식이나 신학적인 이해 역시 회중교회적인 개교회주의 교회관에 머물게 되었다. 장로교회 제도가 개교회주의 제도와 감독교회 제도의 절충이라고 하지만, 개교회주의 제도보다는 감독교회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영미의 장로교회보다 유럽의 개혁교회는 노회장을 ‘superintendent’라고 하고 4~5년의 임기 동안 시무하도록 하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목사와 지역교회를 돌아보는 역할을 다하는 것이 감독인데, 장로교회에서는 노회가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다. 노회는 1년에 한 번 모여 회의가 끝나면 파회하는 총회와는 달리 지역교회를 직접 돌보고 감독하는 상임기관이다. 지역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들이 노회를 중심으로 서로 형제에게 순복함으로써 치리하는 교권을 세우는 것이 장로교회의 원리다.

감독 치리를 표방하는 한국의 감리교회가 장로교화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본래 감리교회에는 장로직이 없는데 장로직을 제정한 일 때문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감독의 임기를 2년으로 단축함으로써 감독의 권위를 저하시키고 그 권한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감리교회가 감독교회의 특성을 잃고 장로교화됨으로써 장로교회의 개교회화 현상을 반성할 아무런 인식의 근거도 제공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감리교의 장로교화는 자체 교회 내의 개교회주의화를 촉진하는 결과를 낳는다. 개교회주의화가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기 때문에 감리교회마저 변형을 감행함으로써 그 특성을 잃고 한국 교회를 위하여 맡은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교회가 어떠한 치리 제도를 가지느냐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존재하는 국가와 사회 환경에 영향을 받은 사실을 교회 역사에서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강력한 왕국과 제후의 나라를 배경으로 한 앵글리칸교회(성공회)와 루터파 교회는 감독 치리 제도를 택했으나, 민주화된 자유시(自由市)를 배경으로 한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 교회는 장로교회 제도를 택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그들이 전한 복음이 전도자들과 목회자들의 설교를 통하여 계속 전파되게 하시며, 교회가 서고 존속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감독 치리 제도의 교회로 발전하게 된 데에는 교회 외적인 배경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으나 교회 내적인 이유가 더 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반드시 사회의 정치 제도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왕정(王政)하에서도 장로교로 발전했으며, 유럽의 민주주의 나라의 교회에서도 감독 치리 제도를 잘 운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정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라면, 교회는 의식적으로라도 세상의 정치 형태를 수용하거나 모방해서는 안 된다. 민주 정치에서는 백성이 정치의 주체지만, 교회에서는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교화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세속의 정치 형태가 곧 교회의 치리 형태가 될 수는 없다. 교회는 교권주의로 인하여 부패했다면 마땅히 쇄신돼야 하고 개혁돼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이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직분에 대한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이해마저 흐리게 만드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교회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형태의 교회 치리 제도를 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종교개혁은 국왕이나 제후 혹은 자유시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면서, 유럽의 국가들을 초월하여 모든 지역교회를 통제하는 교황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 교회는 출발에서부터 민족이나 국가 혹은 지역을 단위로 하는 분립된 교회로 발전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상호의 신학적인 견해 차이를 좁혀서 하나의 개신교회를 이루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개신교의 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욕과 노력은 교회를 획일적으로 통제하는 교황주의를 반대한 개신교 교회들의 본래의 의도와는 상치된다. 개신교 본래의 원리에 충실하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룩하는 길은 획일적인 통합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는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한국 교회 초기에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은 두 교회를 통합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의 모국 교회들이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교회의 제도나 조직의 차이보다는 신학의 차이 때문에 어렵다고 본 것이다. 신학자들 중에 한국 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성취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으나,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 온 오늘의 교회 현실을 보면 그러한 통합이 별로 의미를 주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감독교회가 감독교회답고 장로교회가 장로교회다울 때 개교회주의 교회도 나름대로 전체의 교회를 위하여 공헌할 수 있으며, 한국 교회가 무정부적인 치리 부재의 교회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그것은 교파들의 신학을 두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느 교파 교회의 신학도 완전한 것은 없다. 인간의 논리로 체계화한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 말씀을 더 옳게 이해하기 위하여, 즉 성경에서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파악하기 위하여 부단히 자신을 살피고 끊임없이 신학하며 개혁해야 한다. 교파 교회마다 각자가 특이하게 주장하고 강조하는 점이 있다. 교파 교회들은 그런 점들을 상호간에 수용하든 않든 결과적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교회는 더 온전함을 지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회가 세 자리 수의 교단으로 분열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정당화될 수가 없다. 분립의 명분을 찾아야 하는, 다시 말하여 뚜렷한 명분 없이 분립하는 장로교회의 교단들은 개혁신학의 전통을 찾고, 신앙고백을 같이하는 가운데 통합을 모색해야 한다. 통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면 연합이라도 해야 하며 개혁신학을 공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3) 2/3의 찬성표의 요청은 헌법 또는 단체의 정관 등 기본법을 쉽게 수정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다수결의가 아니고 1/3의 소수를 존중하는 부정적인 소수결의다. 소수가 반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적 장치이다. 장로는 교회를 봉사할 일꾼을 세우기 위한 것인데 2/3 득표라는 부정적인 결의를 적용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교회의 상황이 1930년대의 상황과는 판이한 것을 감안해야 한다. 교인 수가 많은 도시 교회에서 유능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당선의 확률은 낮아진다. 기관장 선출의 경우 정족수 미달로 기관장의 자리를 공석으로 두고 공전을 거듭하게 된다. 찬반의 세가 백중지세일 경우 정족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물밑 흥정과 치열한 정치력이 동원된다.

6. 한국 교회 예배 대한 반성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의 개혁을 우선적으로 단행하였다. 예배는 신앙의 표현이요, 신자들의 생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기독교의 예배 전통에 참여해 왔다. 한국 교회가 무속 신앙이나 불교 등 타종교의 종교 의식을 모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 중심주의를 말하는 개혁신학의 전통을 표방하는 장로교회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수용하는 여러 교파교회의 예배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수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주일 오전 예배를 ‘공예배’(혹은 대예배)라고 하는데, 그것은 흔하게 쓰는 ‘예배’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공예배는 우리가 임의로 행하는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정하신 날에 온 교인이 모여 행하는 예배를 가리키는 말이다.4) 공예배에 경배와 찬양식 예배를 도입하거나 아직 검증을 거쳐 찬송가로 공인되지 않은 복음송을 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5) 교회가 주중 어느 날이든 편리한 대로 한 날을 주일을 대신하여 예배하는 날로 정하는 것 역시 공예배의 뜻에 어긋난다. 십계명은 예배 계명이므로 전통을 따라 공예배에서 늘, 아니면 자주, 약식으로 말고 온전히 교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축도에서 설교한 것을 요약 반복하며 말씀을 따라 살려는 성도들을 위하여 복을 비는 축도는 신령주의적 축도이지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는 축도는 아니다. 목회의 대상이 잘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듯이, 축도의 대상 역시 선별된 사람이 아니고, 예배에 참석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다. 바울의 축도의 대상은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 교인이었으며, 아론의 경우는 이스라엘 자손이었다(고후 13:13, 민 6:23~27).

4) 독일어의 ‘Gottesdienst’는 주일 예배를 가리키는 말이고, 그 밖에 임의로 행하는 예배는 ‘Andacht’라고 한다. ‘Gottesdienst’에 해당하는 영어는 ‘worship’이다.

5) 좋은 내용의 복음송도 많으나 ‘고통 중에 계신 주님···’, ‘다시 태어나도 주님을 섬기리···’ 등의 비신학적인 내용을 가진 것도 많기 때문이다.

7. 한국 장로교회와 신학

선교가 시작되던 해로부터 1920년대 중엽까지는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신학이 한국 장로교회에서 지배적인 신학이었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보수적인 장로교회는 자유주의와 현대신학의 성경관에 대항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을 변증하는 일에 많은 정력을 쏟았다. 1934년에 감리교에서 자유주의 성향을 띤 「아빙돈주석」 번역판을 내놓자, 장로교에서는 「표준성경주석」 편찬에 착수하였다. 1935년에 나온 박형룡 교수의 「기독교현대신학난제선평」은 정통신학의 변증서이다. 보수적인 장로교회는 신학의 전제인 올바른 성경관을 변증하는 일에 많은 정력을 쏟았다. 일제의 핍박, 6·25 동란과 교회의 분열과 ‘교회정치’에 대한 관심 등이 내용 있는 개혁신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종교개혁에서 주류를 이룬 두 교회와 신학적인 전통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이다. 청교도 운동에서 비롯된 장로교회는 유럽의 개혁교회와 개혁신학 전통의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6) 청교도 운동은 16세기 중반에 영국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제도를 개혁하자는 데서 일어난 운동인 반면에,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 후반에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중생과 회개 및 경건 생활을 강조하는 데서 일어난 운동이다. 청교도들은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등의 교회를 조직함으로써 교회 제도와 함께 칼빈주의 신학과 교회 전통을 수립한 반면에, 구원을 강조한 경건주의는 18세기 이후의 부흥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 혹은 선교 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교파를 초월하는 신앙 운동을 유발하였다.

한국의 장로교회의 보수적인 신앙에는 루터교회에 뿌리를 둔 경건주의, 그것에서 파생된 부흥주의 혹은 복음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근본주의, 그리고 세대주의 등 여러 유형의 신앙이 뒤섞여 용해되어 있다. 이러한 신앙들이 자유주의 성경관에 반대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강조한다는 공통성 때문에 개혁주의 신앙과 별 구별 없이 수용된 것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경향과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한 종말론에 대한 편중된 관심,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사의 중심으로 보지 못하고 세속의 이스라엘 국가에 구속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등 잘못된 세대주의적 역사관과 구원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및 통일성에 대한 이해의 결여,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양태론적 이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한 객관적인 교리에 대한 설교와 체험과 열심을 다하는 교회 봉사 생활을 강조하는 설교의 불균형, 율법주의 경향과 반율법주의(antinomianism) 경향, 일반은총에 대한 이해 부족, 반지성주의 경향, 사회와 문화에 대한 관심의 결여 등은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점들이다.

자유주의적이며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1960년대 초반에 복음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토착화 신학을 말하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기독교의 비종교화를 말하면서 교회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함의하는 세속화 신학을 주창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대화를 통하여 그들 가운데서 복음을 발견하도록 함으로써 선교를 달성한다는, WCC가 정책화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수용하였다.

1970년대부터 이들은 정치신학과 해방신학을 소개함과 동시에 민중신학을 주창하였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가난한 자, 소외당한 자, 억눌림을 당하는 피지배자로 보고 신학의 관심과 출발을 이들의 해방에 두는 상황신학이다. 상황신학은 이러한 주제를 성경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와 문학에서 찾음으로써 성경을 민중신학을 위해 필요하고 유익한 문서의 하나로 상대화하며, 민중을 교회의 주체로, 역사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투쟁사로 보는 관점에서 기독교 역사를 재해석한다. 민주화 운동과 사회 운동에 신학적인 동기를 부여하려는 의도는 좋으나, 그것이 우리 삶의 문제의 전부가 아닌데도 신학이 그 일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식으로, 교회의 역사와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모두 부정하거나 가치를 전도하여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세계정세와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의 변동으로 민중신학의 역할과 의미가 퇴색하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대화를 논의하고, WCC의 선교신학의 경향과 함께 기독교 자체를 상대화하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초에 이르러 30년 전에 토착화 신학의 논의를 주도했던 이들은 토착화 신학의 귀착점이 결국 종교다원주의임을 시인한다.7) 신학의 자유를 구가하는 신학자들의 신학이 급진적이고 과격한 신학으로 발전하는 정도가 아니라 종교혼합주의로, 탈기독교적인 종교 이론으로까지 치닫게 되어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보수하는 입장에서는 대화의 접촉점마저 찾을 수 없을뿐더러 대화의 흥미조차 잃게 된다.

기독교적 사회 윤리를 논하고 문화와 정치, 사회에의 참여를 주창해 온 사람들이 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으므로, 보수적인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주제 역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은 배격하더라도 그들이 다루는 주제까지 외면하면서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두는 편협한 세계관 속으로 움츠릴 이유는 없다. 그것은 신령주의적 세계관이지 개혁주의적 세계관은 아니다.

1980년대에는 보수적이며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복음주의협의회에서 문화와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북한 동포 돕기 운동 등을 적극 전개하였다. 구제 봉사에 많은 예산을 할애하는 교회도 생겼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의식과 실천은 더 널리 확산되어야 한다.

6) 김영재, 「기독교 신앙고백」 (영음출판사, 2011), 27쪽 이하 참조.

7) ‘한국 토착화 신학 논쟁의 평가와 전망’, 「基督敎 思想」 (1991. 6), 78-100; (1991. 7), 75-94. 참가자는 유동식, 안병무, 변선환, 서광선, 김경재, 박종천이다; 김영재, 「한국 교회사」, 350.

8. 한국 교회 역성장의 현실과 극복

성장 일로에 있던 한국 교회가 1990년대 이후 성장의 둔화 아닌 역성장의 추세를 보이고 있는 현실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의 우려하는 관심사였다. 1960년대 초반에 남한의 총인구의 85%에 달하는 사람들이 종교를 갖지 않았는데, 1988년의 통계에 의하면, 국민 모두 종교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가 지나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에는 1970년대와 1980년대와 같은 많은 개종자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면, 군종 제도만 하더라도 옛날에는 군종 업무를 기독교 목사가 거의 다 관장했으나 이제는 불교의 세력이 만만치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일정한 총인구 중에서 결신자의 수가 산술급수적인 비율이나 기하급수적인 비율로 계속 성장할 수는 없다.

그뿐 아니라 사회적인 상황도 달라졌다. 1960년대 이후 군사 정부의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를 좇아 욕구불만 가운데서 부와 안정을 추구하던 시기는 지났다. 군사 정부 아래서의 정치적인 욕구불만과 불안 의식도 많이 해소되었다. 물질적인 부에 대한 욕구불만도 채워져서 많은 국민이 여가를 즐기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각 세대가 차를 한 대씩 소유할 정도에 이르렀으므로 사람들의 일반 생활양식도 달라져 ‘레저’를 즐기는 문화로 진입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의 와중에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해졌으나, 1980년대 이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것이다. 서양의 경우에 비추어 말하면, 사람들이 교회 출석을 게을리 하고,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는 사회적 환경이 우리 한국에도 조성되고 있다.

교회는 어떠한 사회적인 상황에 처하든지 자신을 반성하고 개혁에 힘쓰면서 교회 역사에서 늘 그래 왔듯이 열심히 전도를 해야 한다.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전도는 기본이며 필수적인 요건이다. 교회는 열심히 전도를 해야 성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성장을 멈추거나 쇠퇴한다. 그러나 교회의 성장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므로 전도의 노력에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성장은 사회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사회가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는 사람들이 안정되지 못한 사회 여건 속에서 종교를 갈구하던 시기였으므로 교회가 종교적인 것만 내세워도 전도가 잘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사회적 여건이 달라졌다. 1997년 경제 위기를 당했을 때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복음 전도를 받아들이는 듯이 보였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사회적인 위기 상황은 일시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 상황과는 관계없이 교회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제 교회가 종교만 강조하는 것으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교회는 늘 영적인 충만을 갈구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 눈에 띄게 부족한 것은 사회성과 윤리성이다. 사회성과 윤리성을 갖추지 못한 교회에 대하여 사람들은 실망하고 외면한다. 복음서에 보면 메시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관심을 끄는, 말하자면 ‘센세이셔널’한 것이었다. 이러한 ‘센세이셔널’한 복음을 예수님께서는 12제자와 70인의 제자에게 전하도록 맡기셔서 전파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임하셔서 교회가 규모 있게 출발하면서부터, 복음 전파는 사도들이나 전도자의 몫만은 아니었다. 삼천 명씩 또 오천 명씩 회개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변화함을 받아 이룬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복음 전파의 큰 몫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바람직한 교회상을 보여 준 예루살렘교회처럼,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신앙 공동체로서 본래의 가치를 회복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한다.

9. 영적 각성과 윤리성의 회복

기독교에서는 종교와 윤리가 하나인데, 교회가 윤리성을 상실하면 교회가 내세우는 종교성마저도 무력하게 되고 만다. 교회가 종교성은 뒤로하고 윤리성을 지나치게 강조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어서 교회는 교회다움을 상실하게 된다. 교회가 영적인 생동성을 상실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윤리도 갖추지 못한 채 이데올로기를 좇는 집단이 된다. 영적으로 각성한 교회다운 교회는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모든 사람이 영위해야 할 윤리적인 삶이 곧 성화의 삶은 아니지만, 성화의 삶은 윤리적인 삶을 포괄하므로 윤리적인 삶이 없으면 성화의 삶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성화의 삶과 윤리적인 삶이 하나이다.

초기의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에 많은 것으로 기여한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교회는 나라를 잃은 백성에게 애국과 애족의 요람이 되었으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로 기능을 다하였다. 위에서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선교사들과 복음을 받아들인 믿음의 선배들은 복음을 전함과 동시에 교육, 의료, 한글의 개발과 보급을 통한 계몽, 여성 해방운동, 청년 운동, 신분 평등화 운동 등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였다. 장로교회에는 청년면려회가, 감리교회에는 엡워스청년회가 있었으며, 연합 청년 운동 기관으로는 YMCA와 YWCA가 있었다. YMCA는 다양한 사업을 벌여 한국 사회에 기여하였다.

1919년에 기독교인들이 거의 모두 3·1 독립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일과 1930년대에 교회가 농촌 진흥 운동을 한 사실을 볼 때, 교회는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표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한국 교회가 1919년의 3.1운동에 대거 참여한 일과 1930년대의 농촌 진흥운동을 적극 추진한 일을 두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것은 신령주의 신앙인의 평가이지 개혁신학과 신앙을 가진 이의 평가는 아니다.

1930년대 후반에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에 굴함으로써 교회다움을 상실하였다. 해방 이후 교회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철저히 회개했어야 했으나 그러지를 못했다. 교회의 지도적인 인물들이 친일파가 그대로 득세하는 사회 풍조에 편승하였으므로 교회는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교회는 사회의 중추적인 양심으로 기능을 다할 수 없었다.

정치와의 관계에서 보더라도, 남한의 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대통령 이승만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정부와 여당을 무조건 지지하였다. 그러다가 부정선거로 4·19 학생의거가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교회는 한때 할 말을 잃었다. 1960년대 이후, 교회는 자유주의적인 교회와 보수적인 교회로 나뉘어 군사 정부에 각기 달리 대응하였다. 자유주의적인 소수의 교회는 군사 정부에 반대하여 민주화를 촉구하는 운동을 벌인 반면에, 보수적인 교회는 침묵했지만, 실상은 타협하거나 굴종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독재에 항거한 교회들의 그러한 행위는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겠으나, 대체로 그런 교회들이 영적인 면을 소홀히 하는 교회인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국 사회가 산업 사회로 발전하는 중에 농촌 인구의 도시로의 이동, 서울 강남 지역과 신도시 개발로 인한 인구 이동이 대교회 출현을 촉진하였다. 대부분의 도시 교회들이 회중교회의 유형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지역 사회와는 격리된 교회가 되었다. 많은 교회들이 지역 공동체에 관심을 두고 봉사하는 지역 교회(community church)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위치한 지역사회와는 연고가 없는 교인들이 멀리서 와서 모였다가 흩어진다. 흩어진 교인들은 거주지에서 소속 교회를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이웃해서 살지만, 지역사회에 대하여는 결속력이 없는 개별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 뿐이다.

교회 분열로 인한 교회 간의 분쟁이나 지나친 경쟁은 그 자체가 비윤리적인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는 교세 확장의 경쟁 속에서 권징을 시행하지 못하는 교회, 즉 교인들을 윤리적으로 지도하는 일을 포기한 교회가 되었다. 교회는 교회답게 자라야 한다. 경쟁 관계에서 교회 성장을 도모하는 교회는 전 국민을 전도의 대상으로 하는 교회일 수는 없다.

한국 교회의 성장에 기여한 것으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큰 교회들은 철저하게 개교회주의 증후를 나타내고 있다. 교회의 예배, 선교 등, 여러 행사나 사업을 시행하거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적용하거나 개발할 경우, 교회의 보편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한국 교회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교인들의 수평적인 이동도 성장으로 간주하며 자기 교회의 성장과 존립만을 염두에 두고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

10. 천주교의 성장에 대한 분석

1990년대에 이르러 개신교는 마이너스 성장을 한 반면에 천주교의 교인 수는 불어난다. 상당수의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1961년부터 1980년대까지 정권을 장악해 온 군사 정부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국민, 특히 젊은 층의 신뢰를 얻게 된 것도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개교회주의에 함몰되어 대교회를 지향하며 서로 경쟁하는 개신교 교회, 부유한 대교회와 수많은 영세한 작은 교회들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개신교 교회보다는, 하나의 교회 체제로 교구 제도 속에서 질서 있고 의젓하게 포교하고, 거의 교회마다 예배 형식을 달리하는 개신교 교회와는 달리 경건하게 예배하며, 봉사하는 천주교를 사람들은 더 선호하게 된 것이다. 많은 개신교 교회들의 개신교 교회가 대체로 천주교에 관하여 옳게 교육하지 못한 것도 원인 가운데 하나다. 즉,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동질적인 면은 별로 언급하지 않고 이질적인 면만을 가르쳐 왔기 때문에, 교인들 스스로가 양 교회의 동질적인 것을 경험하게 되면, 이질적인 것만을 배운 교육 내용을 신뢰하지 않게 되므로 더 쉽게 개종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 즉 천주교회가 하나님의 명칭에서부터 교직자와 성례의 명칭에 이르기까지 개신교와는 다른 점이 너무 많다. 서양에서는 적어도 그러한 명칭에는 차이가 없으나 한국에서 그렇게 달라진 것은 양 교회가 한국의 역사 안에서 각기 시대를 달리하여 선교되고, 제각기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식(歷史意識)을 가지고 교회의 전통을 존중할 때, 양 교회는 하나인 교회에서 분립하게 된 것과 양 교회의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게 된다. 그래서 개신교 교회는 자체의 중세 교회화 현상을, 즉 목사를 제사장으로 이해함으로써 사제주의화하고, 교회의 직분을 세분하며 목사와 부목사 간에 현격한 격차를 둠으로써 교계주의화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반성할 수 있다.

11. 교회 질서의 회복

한국 교회는 대중을 영입하는 일에 급급한 나머지 중세적인 교회로 퇴보하지 않아야 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 스스로 개혁하며, 말씀의 권위를 높이는 교회로 발전해야 한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성찬을 받도록 하는 무질서를 범해서는 안 된다. 세례는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여 교회의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단계에서 단 한 번 받는 성례인 반면에, 성찬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이 성화의 삶을 사는 동안에 세례를 받음으로 성삼위 하나님께 접붙임을 받게 된 은혜를 상기하며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수시로 받는 성례이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성찬을 받을 수 없다.

교회가 이제는 성숙한 신앙을 가진 교회로 발돋움할 시기다. 대중도 미개한 종교적 신앙을 찾는 단계에 그대로 머물지는 않는다. 교회는 국내외 선교를 위하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더 넓은 안목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학원 선교 단체들을 ‘파라 처치’(para-church)라고 백안시할 것이 아니라 포용해야 한다. 선교 단체들이 한국 교회의 성장에 직접, 간접으로 기여한 사실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학원은 민족 복음화를 위한 온상이다. 교회는 학원 복음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복음화 운동이 활성화하도록 교회와 연계된 학생 운동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선교 단체들도 직접 혹은 간접으로 지원해야 한다. 교회가 학원의 복음화를 소홀히 하면 이단들이 와서 씨를 뿌린다. 그리고 해외 선교에 힘을 쏟는 것에 못지않게 국내의 군(軍) 선교와 학원 선교에 관심과 열심을 기울여야 하며, 병원 선교의 필요성과 효율성에도 눈을 떠야 한다.

사회에 기여하는, 아니, 이웃을 사랑하는 구제와 봉사 사업을 소홀히 하고 선교만을 교회의 과업으로 생각하는 교회는 결국 자신의 비대만을 추구하는 교회가 되고 만다. 해외 선교는 성장한 한국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위대한 과업이다. 그러나 일차적인 선교의 대상은 선교의 주체인 교회의 구성원이며,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이다. 교회는 가까이 있는 이들에 대한 전도와 교육에, 즉 교회 교육과 주일학교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 성장을 위하여서는 개개의 교회가 전도에 힘써야 하므로 교인의 수평적인 이동을 합법화하는 등의 무원칙한 것들은 배격하더라도 교회 성장학에서 말하는 많은 이론과 실제를 수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12. 교회 연합의 과제

교회 역사에서 교회의 분열을 초래한 요인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견해 차이, 언어와 문화를 달리하는 인종 혹은 민족의 차이, 그 밖에 자기를 중심하며 파벌을 형성하는 인간 본래의 속성 등이다. 그러나 ‘하나 되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면서 서로 사랑하는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며, 교회는 사랑의 하나님을 전파하고 사랑을 구현하는 공동체이므로, 교회는 하나이어야 하고,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이요, 명령이며 간곡한 부탁이다(요 17:21~24).

사도들은 그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으며, 그 뜻을 교회에 전하였다. 특히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고전 15:45, 갈 3:28, 엡 4:13), 성전 또는 집(고전 1:10~17, 엡 2:19~21; 고전 3:11), 그리고 몸(고전 12, 롬 12:5)으로 비유하며 교회의 하나 됨을 강조하였다.8) 교회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지상 명령으로 여긴다면, “하나 되기를 힘쓰라.”는 말씀 역시 지상 명령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역사에서 “복음을 전하라.”는 선교 명령은 순순히 지켜 왔으나 “하나 되기를 힘쓰라.”는 교회 연합의 명령은 잘 지키지 못해 왔다. 그것은 아마도 선교는 종교적인 과제인 데 반하여, 교회 연합은 윤리적인 과제인 데서 온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 교회가 수행해야 하는 윤리적인 과제라면, 주님의 바라심과 명령은 당위임에도 불구하고, 그 계명에 충분히 순종하지 못하거나 도리어 역행하는 교회의 성향이나 교회가 빚어 온 분열의 상황은 역사적 현실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는 말씀이 있으며, 교회의 일부 지체를 제거해서라도 교회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 미혹하는 무리나 거짓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를 경계하라는 말씀이 있다(마 24:23~27; 행 20:29~32; 갈 1:6~9. 벧후 2:9~22; 요1 2:18, 19; 계 2:6, 2:14~16, 2:20~22).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따르려는 교회는 교리를 불문하고 교회의 연합을 주창하며, 교회의 정체성도 저버리는 종교다원주의를 포용하는 WCC의 연합 노선을 마다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교회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가 되라.”는 명령을 거스를 수밖에 없게 된 현실에서도 교회의 하나 됨을 모색하고 추구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긴장이나 반성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교회는 독선적이고, 폐쇄적이며, 불건전한 교권주의 교회이거나 분리주의 교회이다.

8)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517~1948, ed. by Ruth Rouse and Stephen Charles Neill, 19451, 19863, 4.

13. 한국 교회의 위상과 한국 사회를 향한 과제

신자 수 수백만에다 160여 개 나라에 2만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9) 이제 자체의 존립에 집착해야 하는 소수인의 종교 집단이 아니고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초기의 한국 교회가 교인의 수가 인구에 비례하여 극히 작았을 때도 한국 사회와 문화에 크게 기여하는 역할을 다하였음을 기억한다. 한국 교회가 이제는 초보적인 선교적 차원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수용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하기보다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및 사회를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를 물어야 하며, 박해 하에서 신앙을 유지하며 살아남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취했던 소극적인 대응의 자세와 세계관을 탈피해야 한다.

민족의 복음화와 더불어 교회가 필연적으로 생각하고 대비해야 하는 문제는 사람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일뿐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살게 하는 일이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일은 통계에 나타난 기독교인이 모두 의식화되고 성숙한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바람직하게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에 걸친 꾸준한 배움과 수련을 통하여 가능하다. 교회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찬다는 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달성될 수 없는 이상이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다고 하여 기독교적 이상 사회가 건설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현실에는 부조리한 점이 많다. 미국의 많은 교파들의 선교를 통하여 교파와 교단을 달리하면서 서게 된 교회들, 교회 안에 팽배한 물량주의와 상업주의, 개신교적 전통과는 역행하는 교권주의 등 한국 교회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교회의 자체 개혁을 위한 부단한 노력은 사회 개혁의 전제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 개혁으로 확산될 수 있다.

산업화된 오늘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 특별히 의식하는 문제들을 전통적인 교회가 간과하고 있다고 하여 교회의 역사와 신앙고백을 모두 부정하거나 가치를 전도하여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과거의 교회가 말하지 않은 문제에 대한 신앙고백은 보완하면 되는 것이고, 또한 보완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나온 개신교의 신앙고백서가 선한 행위에 대하여 막연히 말할 뿐, 사회 정의나 사회 참여라는 구체적인 개념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종교개혁 당시는 군주정치 체제하에 있었으므로 국민의 정치 참여란 개념이 아직 배태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개인의 칭의와 구원만을 말하거나 개인적인 성화만을 말하는 것이 반드시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오늘의 정치 제도와 사회가 당시의 것과 같지 않으며, 오늘의 생활양식과 정치사상 및 사회사상이 당시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교회는 오늘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증언해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사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길을 가르쳐야 한다. 이를테면 환경오염은 20세기 후반에 와서 당면하게 된 문제이다. 자연을 훼손하고 모든 생명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환경오염의 주범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지구인이라면 모두 다 함께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말하자면 환경오염에 대처하는 일은 기독교 윤리의 새로운 과제이다. 그것은 종래의 사회 윤리의 주제보다 더 광범한 문제이면서, 동시에 개인 각자의 윤리적인 양식(良識)과 결단에 호소해야 하는 문제이다.

한국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다종교(多宗敎) 사회에 전파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는 다종교 사회 속에서 자라 왔다.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간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일반은총 속에 산다. 기독교인들도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 함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유산을 공유하는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 한데 어울려 산다. 문화생활에 관한 한 그것은 일반은총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도 한국 문화를 향유하고 형성하며 전수하는 일에 다 함께 참여한다.

다른 종교에서도 진선미를 추구하는 노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은 타종교의 현실을 인정하며 관용해야 한다. 이것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식의 견해를 가지고 관용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만민에게 미치기를 기원하는 가운데서 관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문화 속에 그냥 맹목적으로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대한 의식과 분별력을 가지고 산다. 문화에는 종교가 용해되어 있고, 종교는 문화를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문화는 우리 삶의 수단이고 양식이며 표현이므로, 종교적인 신앙은 우리의 삶에 표출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우주를 다스리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로 인식하므로, 기독교인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돌리는 삶을 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다원종교 사회에서 문화에 대하여 종교의 혼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독교적인 문화를 창조함으로써 기여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며,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일에 힘쓰는 한, 우리는 문화의 기독교적인 변혁에도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과 삶이 이원적일 수는 없다. 기독교에서 종교와 윤리는 불가분의 것이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상의 문화 건설이나 이상사회 건설이 아니라,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며 사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모름지기 한국 민족을 위하여 선교사들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셔서 성장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돌리며, 교회가 안고 있는 취약점과 부족함을 부단히 개혁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빌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한다.

9) KWMA가 제공한 2008년의 통계(2009년 8월 11일 제공)에 따르면, 남자 선교사 9,551명, 여자 선교사10,952명으로 도합 20,503명이다. 그 가운데 부부 선교사는 17,258명이고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자녀가 12,674명이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