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자세의 탐구

발단 전쟁중 자신의 자세에 대한 반성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연 무엇이 오늘의 테마에 나의 전 생애를 바쳐 천착하게 만들었는지 설명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장로교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우리집은 동네의 유일한 기독교 가정이었다. 아버지는 평신도였지만 마을에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집이 집회소로 사용되었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스스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했고, 주위에 쉽게 휩쓸리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보다 지적으로 탁월해야 한다고 자연히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신앙이 아주 명확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인임을 확실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수치라 여겼을 따름이다.

 

스무살이 되었을 때가 1943년이었는데, 이미 전쟁은 확대되어 일본군의 전선은 전면적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그전에는 고등교육을 수학중인 학생들은 졸업때까지 병역의 의무가 유예되었으나, 그 조치는 취소되고, 학업중인 학생들도 군대에 투입되어 전선으로 보내졌다. 당연히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조치에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반대운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나 역시 전쟁에 투입되기 싫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은 병역유예의 특권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성경이‘살인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독교에서 병역거부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죽이는 국면에는 서지 않기로 각오했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은 본의가 아니지만, 그것을 피하고 싶은 사람 을 대신하여 죽기로 각오했다. 따라서 위험한 지역으로 배치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육군에 비해 훨씬 근무조건이 가혹하며 사망률도 높은 해군을 택했고, 그것도 육상근무가 아닌 함선(艦船)근무를 자원하여, 당시 차례로 침몰을 거듭하고 있는 해군방위함(海防艦)의 사관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선에 가보니 얼마나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를 설득해왔지만, 전사에 의의(意義) 부여란 국가권력이 지어낸 작문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무의미한 개죽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 절약상 이 부분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그 시점에서 생각은 반전되었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전시상황에서 도중에 직무를 방기(放棄)한다면 다른 사람의 위험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므로 전쟁종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삶의 방식을 바꾸어, 자신이 어떤 사고방식에서 오류를 범했는지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의 자기검토에 대한 면밀(綿密)한 설명은 시간관계상 생략하겠다.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하더라도 대충 설명하자면 나의 사고가 조략(粗略)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엄밀(厳密)한 사고의 수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철학공부를 시작했다. 철학과에 입학하여 실제로 연구 정진한 내용은 신학이었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엉터리 선택을 하지 않도록 제대로 된 사고와 더 넓은 시야로 사고하도록 노력했다.

 

전후(戦後) 목회자가 매우 귀한 실정이라, 섬기던 교회에서 설교자로 서달라는 요망이 있었고, 나 자신도 주님의 부르심을 확인하였던 터라 설교자의 자격을 얻어 목사가 되었다. 내가 설교자가 된 배경을 세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으나, 소명을 받고 ‘설교’를 나의 평생의 직무로 삼았지만, 전쟁에 대한 반성을 계기로 이미 학문정진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목사가 된 후에도 학문연구를 지속하며 전쟁반대운동 또한 쉬지 않았다.

 

국가 권력을 상대화(対化) 하는 원리의 부재

전쟁중, 내가 왜 무의미한 전사(戰死)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오류를 범했을까? 반성해보니 기본적인 결함이 쉽게 깨달아졌다. 1) 신앙 자체의 빈약(貧弱). 그 이유는 교회가 마땅히 가르쳐야 할 바를 가르치지 않은데서 기인한다. 2) 가르쳐 알게 할 것 중에서도 특히 일본교회는 교회와 국가의 바른 관계 정립에 실패했다.

 

‘믿음’이란,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로서 확실하고 견고해야 마땅한 게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얼핏 그럴듯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확신이 확신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믿음의 대상으로 받은 말씀에는 믿도록 만드는 권위가 동반된다. 배움을 통해서나 아니면 믿으라는 명령을 받지 않는 한 신앙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믿음’에는 항상 가르칠 책무(ministerium)가 동반되는 것이다.

 

일본교회가 특히 전시중(戦時中)에 쉽게 타협하게 된 이유는 가르칠 책무의 약체화로 인한 것으로, 동시대의 다른 나라의 교회와 일본교회를 비교하는 작업이 그에 대한 반성의 동기가 되었다. 비교 대상이 된 나라는 1)유럽의 개혁주의교회 특히 독일, 네들란드, 프랑스의 개혁주의 교회가 지녔던 저항의 자세이다. 루터파와 비교해 볼 때 명확해진다. 2) 한국의 신사참배강요에 대한 교회의 저항을 공부하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지만, 그것을 배운 후로는 한국교회는 가졌으나 일본교회에는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가장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국가권력의 위대함과 사상의 연원(淵源)

같은 개신교이면서도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루터파와 개혁파는 초기부터 차이가 컸다. 루터파 교회의 대부분은 왕국의 령방(領邦)교회로서 성립하였고, 개혁파의 대부분은 공화제를 택한 도시국가의 교회로서 성립되었다.

 

또한 양파의 신학적 차이가 ‘국가관’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양파(兩派)의 상이(相違)가 결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시대의 진전과 더불어 여러가지 이유로 양파의 대비(對比)의 구조는 변화되고 있다.

 

양쪽 다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론이 성립되었고 그와 연관되어 국가론이 구상되었다는 유사점이 있다.

 

마키아벨리즘의 대두와 대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4세기 콘스탄틴대제 이래지만, 교회는 중세 중기 로마 교황권으로부터 시작하여 반동종교개혁(트리엔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여 교회의 권능이 국가의 권능을 뛰어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와 반대로 16세기 이후에는 국가의 구조와 기능이 현저하게 변하여 국가 권력의 비대화를 막을 길이 없어졌다.

 

.고대교회의 교회론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적 전통

칼빈의 교회론을 연구하다 한가지 깨달은 점은, 그의 교회론이 단순히 로마 가톨릭의 교회론을 반론하는데 그치지 않고, 사도적 교회와 본디적 의미의 공동성(公同性)으로의 복귀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 교회에서 명확한 교회론이 성립된 시기를 확정하기란 용이하지 않을 뿐더러 그 시기를 엄밀히 확정해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교회론을 하나의 신학적 이론체계로 파악할 수 있는 요점의 확보가 가능해진 시기를 추증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요점으로

 

다음의 세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라는 말씀의 결정적 위치 파악

)‘나는 교회를 믿는다 ’라는 성구(聖句)의 확립

)‘공동성(公同性)’개념의 성립

다음으로 무엇에 의해 교회가 세워진 것인가 하는 문제는,‘말씀’혹은‘전승’혹은‘전승된 말씀’(이 단어들은 명확한 구별 없이 사용되기도 하므로 그 내용 역시 명확히 구별된다고는 볼 수 없다)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와, ‘성례전:sacrament’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가 양립된다.

 

나아가서 무엇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는가는‘은사를 통하여’라는 견해와,‘교회적 직무를 통하여’라는 견해가 혼재하지만 도나투스파 논쟁을 거쳐 가톨릭파와 도나투스파로 분열된 이후 교회법의 근원으로서 직무(ministerium)의 객관성 사상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교회의 영적권위의 구현으로는 사도로부터 임명되는 감독(사교: )이 출발점인데, 감독의 영역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지도력을 지니는 감독회의와 감독의 상위감독인 대사교(大司), 그 위에 총대사교(総大司教)를 세우고, 결국 교황을 정점에 세우는 계층구조(hierarchia)의 방향과, 교회회의(즉 감독회의) 사상이 양립하게 되었다. 종교개혁 교회의 대부분은 교회회의(감독회의)의 방향을 취하고 반종교개혁은 교황권의 절대화의 방향을 취한다.

 

.종교개혁의 교회관

종교개혁이 교회론을 약화시켰다는 가톨릭측의 해석

종교개혁이 로마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무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교회를 부정(否定)했다는 견해는 오해다. 다만 개신교 쪽에서 실제로 교회를 무시 혹은 경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며, 그 오류를 철저히 논박(論駁)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이‘교회를 믿는다’는 조항을 보지(保持)하며 충실한 교회론의 전개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종교개혁자 중에서도 칼빈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교회론의 충실이 칼빈 특유의 것인지 아니면 종교개혁 일반에 공통되는 것을 칼빈파가 당시에 처했던 상황 탓에 비교적 잘 발휘한 것이었느냐는 이 자리에서 논급하지 않겠다.

 

하나님 말씀에 의한 개혁

종교개혁이 단순한‘교회 개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 말씀에 따라 교회를 개혁한다’는 기본원리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확인해 두고 싶다. 단순한 교회개혁은 항시(常時)있어왔고 앞으로도 여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교회개혁과 16세기의 종교개혁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하나님의 말씀에 따라’라고 할 때의‘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교개혁 중에 이를 ‘정의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를 명확하게 문장화한 것으로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을 들 수 있다. 교회법의 수순을 거쳐 이 신앙고백을 확정한 교회가 많지는 않으나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인정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성경론(聖書論)의 이름으로 많이 논하고 있어서 장로교 신학생들은 잘 알고 있으리라 간주하고 생략하겠다. 다만 칼빈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실하게 수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직된 성경론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점은 성서해석의 실천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에는 성경주석과 설교가 있다.

 

섬기는 백성

칼빈은 말씀에 대한 복종으로 먼저 말씀의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설교’를 듣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나,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의 복종의 행위로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봉사를 중시하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칼빈은 고대교회로의 복귀를 지향하며 고대교회의 직무의 재건에 힘썼다. 그것에는 가르치는 직무(목사,교사), 다스리는 직무(장로) 봉사의 직무(집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 고대교회는 이러한 직무를 획일적인 상하관계로 여기지 않았지만, 로마가톨릭 교회는 이 직무를 일직선(설교와 세크라멘트)의 계층제(職階制)로 변조했다. 디아코노스(집사들이 교회내외의 봉사의 직무를 행함(디아코니아)은 사라졌다.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의 직무는 교회의 직무에서 벗어나 수도사나 수녀들이 하는 작업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런 디아코니아가 종교개혁에 의해 부활되었는데 제네바가 가장 진보적이었다. 제네바는 시참사회의 발의로 종교개혁이 시작된 도시이기 때문에 시의 시정(市政)과 교회활동의 분리가 곤란한 난점이 있었다. 칼빈은 정치와 종교,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그의 이념으로 하였다. 칼빈의 머리속에는 가난한 자를 섬기는 복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좀 더 광범위한 봉사활동의 영역이 들어 있었다. 실행된 영역으로는 학교교육과 식산사업(殖産事業) 등이 있다. 그와 관련하여 국가의 사회복지 업무의 원조(援助)도 생각할 수 있다.

 

.국가론과 신학과의 대화

하나님의 지배 아래서 교회와 국가 영역의 차이

재래의 중세 스타일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로는, 교회 선행적 통일형과 국가 선행적 통일형의 차이점은 있지만, 로마교회와 로마제국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였다. 종교개혁시대에는 국가를 속된 것으로 간주하고 교회의 세속 자산을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국가의 권력 행사자는 원칙적으로 교회의 권위를 행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고에 더욱 철저를 기한 것이 동시대의 급진적 개혁주의다. 오늘날에는 급진적 사고를 수용하여 개혁적 사고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도 루터와 비교할 때 칼빈은 훨씬 진보적이었다.

 

당시와 비교할 때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종교성을 극력 최소화하는 실정에서, 국가의 존립을 철저히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칼빈의 견해는 시대적 적합성을 잃어버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국가가 다윗왕조를 제외하고는 신성국가(神聖國家)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의 참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리스도라는 원리가 통하지 않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교회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

국가주권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국가가 알던 모르던 상관없다. 다만 국가의 통치하에 있는 신앙인은 국가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신앙을 지닌 채 국가권력에 복종한다. 좋은 실례가 두개의 다른 왕조를 섬겼던 다니엘이다. 칼빈은 이것을 옛날이야기라 여기지 않았다.

 

신앙인은 피지배자라할지라도 하나님의 통치에 속한자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치나 법률에 관심을 가질 것을 강권할만한 이유를 찾기는 어려우나 칼빈주의 교회에서는 교인이 정치나 법률에 관여한 예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을 혼돈했던 바는 아니었다.

 

시민의 복종의 이중성과 복종의 한계

시민의 복종의 자세는 중세보다 상황이 상당히 복잡하다. 단순히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조로 양분화하여 정리하기가 곤란한데다, 피지배층도 다시 여러 계층으로 나뉘게 된다. 군주제는 공화제로 이행되어간다. 한편 지배층은 예로부터 왕과 부왕에 의한 통치의 시정이 이루어졌으나, 이와 더불어 관료기구가 다각적인 통치를 수행하게 된다. 또한 마키아벨리가 생각하는 왕권의 증대가 진화되는 측면도 있어 국가의 구조는 더 복잡해지고 지배기능은 강화되어 지배기구에 저항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시민 중에서 힘을 지닌 자들은 위정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그것이 공화제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유럽의 정치지도가 크게 변했다. 칼빈은 시종 권력의 증대를 경계하며, 통치기구의 다양화에 따른 통치기능의 강대화를 반대했다.

 

저항권

저항권 사상의 연원(淵源)은 오래지만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시인하는 이유가 많았다.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주권의 원리에 반하는 통치에 저항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긍정했다. 이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저항의 기초가 된다는 사상을 경시하는 것은 기본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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