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운동은 시대적 부족의 충족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필자는 수년 전에 벨기에의 브루셀 한인교회에서 몇 번의 설교를 하면서 가정교회 현장을 간접적으로 경험하였다. 당시 J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면서 가정교회 사역을 도입했다. 그래서 가정교회의 목자와 목녀 그리고 장로님과 식사를 하면서 자세하게 상황을 듣고, 또한 가정교회라는 책을 읽어 보았다.

그때 필자는 근본적인 질문보다는 실제적 질문들을 했고 들었다. 기존의 구역보다 더 역동적이고 나눔과 섬김과 복음 증거에 좋은 운동이란 인상을 받았다. 매주일 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모임이 섬김과 사랑의 현장이 되어 참여한 이들에게 손쉽게 복음 증거의 현장으로 자리매김을 하겠구나 하는 인상을 가졌다.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필자는 화란 개혁교회의 장로들의 역할과 섬김을 중심으로 상응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원리적인 개혁교회의 장로와 집사의 상이 가정교회에서 실제적으로 실천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후에 목회를 시작하면서 J 목사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고 나누었는데 한국으로 사역지를 옮기셨다.

그리고 지금 이성구 교수의 글로부터 시작된 논의를 보면서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필자는 코닷에 오른 글들을 살펴보았고(부산노회 보고서를 포함) 가정 교회 사역원의 홈을 들러 그들의 기본적 개념들이 무엇인지 한번 확인해 보았다.

한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시대가 가진 한계를 넘어서는 실천적 필요를 반영한다. 특히나 열매가 있는 운동일 때 더욱 그러하다. 교회내의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해하고 오늘의 우리의 교회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고 채우고 싶은 마음에서 이 논의에 참여한다.

어차피 새로운 운동은 기존의 저항과 비판에 쉽게 노출된다. 따라서 몇가지 의심스런 눈을 피할 수 없다. 그 운동의 장점과 더불어 현재의 궁극적 대안으로 존재할 수 있느냐는 비평적 평가를 나누어 본다.

전체적 이해를 위해 몇 가지 정리를 나름대로 해본다.

첫째 가정교회 운동은 평신도와 목사의 구별을 명시화한다.
이런 구별을 하는 실질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기본 발상이 구교적(로마 카톨릭) 교회이해이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가 운동 전체의 조직과 운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신약적 교회의 회복이라는 기본 개념과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까? 전체 교회상의 왜곡을 불러오지 않을까?

종교 개혁을 통해서 성취한 것은 평신도와 사제간의 구별을 폐지한 것이다. 단지 은사에 따른 교회적 부름의 결과 직분이 존재하게 되었다. 모두 한 지체로서 역할을 공적으로 감당하는 것이 직분이다. 그래서 직분자와 성도들간에는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정교회는 목사 중심리더십에 집중된다. 회중교회적인 성격을 바탕에 깔면서도 감독교회의 실제를 구현한다.

여기서 장로교의 주된 특징인 치리회에 의한 섬김과 다스림이 상실되지 않을까?(최근 부산노회 보고서가 지적한 내용 중 장교교회의 특징을 개인이 아니라 회에 의한 다스림이라고 지적한 것은 아주 적절한 지적이다)

둘째 교회 안의 교회로서 가정교회
가정교회라는 한 교회가 구체적인 지역교회 안에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의 교회이다. 이것은 가정교회가 신약 성경적 교회상을 회복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교회에 대한 고백적 이해와는 거리가 있다. 말씀과 성례와 직분에 의해 정의되는 장로교적 개념의 교회는 아니다.

 '가정교회'는 교회라는 표현을 장로교적 기준은 물론 성경적 기준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소위 가정교회의 실제가 교회적 의미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은 다른 의미이다. 아주 막연한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교회 정의를 사용한다.

이것은 과거 학생 선교단체들이 캠퍼스에서 운동하면서 교회를 정의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그 운동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보고 있다. 네비게이토 운동이 교회를 위한 운동으로 궤도 수정이며, UBF의 거듭되는 분열과 비리 노출과 본 운동 자체의 교단화이다. 기존의 교회가 가지지 못한 어떤 특성을 채워주는 운동이 교회 자체로 등장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있어왔다. 가정교회 운동도 그런 류가 아닐까?

실제로 과거 캠퍼스의 선교 단체 운동이 기존교회의 청년부나 교회 조직이나 내용에서 수용되는 요즈음에 선교단체의 캠퍼스 사역은 절대적으로 위축되고 있는 현실을 목격한다. 선교 단체는 교회의 정의를 너무 쉽게 정의하고 운동함으로 스스로의 무덤을 만들었다.

오늘날 캠퍼스의 선교단체들이 살아가야 할 길은 캠퍼스 속의 그리스도인들이 캠퍼스의 복음화를 위해서 다른 교회의 성도들과 연합하고 협력하는 방식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개념의 변화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형교회 청년부가 캠퍼스 모임을 가지는 것이 한 선교단체의 모임보다 클 수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그리스도인들로 서는 교회적 연합의 의미를 빨리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가정 교회 운동이 기존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현실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가정'교회'라는 명칭으로 교회라고 칭하는 태도의 부적절함을 지적해 본다. 특히나 독립적 교회를 지향하는 가치관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이것이 결국 이 운동의 한계나 무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셋째 가정교회 사역이 그 정의나 실제에서 침례교나 회중교회적이라고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사역원의 사역 강령 제 7조에서 각 교단의 신학적 전통을 존중히 여김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나 미국의 한인교회들에서 가정교회 사역에 큰 혼돈이나 어려움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실제로 한국교회는 형식상 대체적으로 장로교회적이다. 장로는 심지어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고백에 충실한 장로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도를 심방으로 돌보고 섬김으로 나오는 권위에서 치리하는 장로상의 상실과 그런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가 치리회적 성격을 상실하고 운영위원회의 성격으로 변질됨으로 생긴 난맥상이 한국 장로교회의 현실이다.

여기에 가정교회 운동은 바른 장로와 집사상의 재발견을 촉구한다. 타락한 교회를 위한 바른 교회상의 한 중요한 부분을 일깨우는 운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가정 교회 운동이 새로운 운동이 아님을 보여준다. 단지 현재에 잃어버린 교회의 중요한 모습을 회복하자는 운동이다.

앞서 밝힌대로 캠퍼스의 선교단체 운동이 기존 교회에 양육과 제자훈련이라는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기존 교회의 주일 예배 중심 회집에 큰 변화를 가지고 왔던 것과 같이 가정교회 운동은 성도의 교제과 전도와 섬김에 대한 큰 변화를 요청한다. 교리 공부로 만족치 못한 교회에 제자훈련의 성경공부가 필요했듯이 형식화된 구역 모임은 역동적인 교제와 재생산과 섬김의 장으로 변화되어 수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면 가정교회 운동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한 것이다. 스스로 운동은 사라지기를 바라야 한다. 영속하기를 원할 때 스스로의 함정에 빠진다. 소그룹 운동의 역사는 교회 역사를 두고 계속되어 왔다. 교회는 시대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시대의 필요에 반응하는 빠른 운동에 깊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가정교회는 교회가 아닌 한 운동이다.
필자는 앞서 밝힌 세가지 논점을 가지고 가정교회 운동의 한계를 이해하였다. 가정 교회 운동이 좋은 목표와 실천 강령 그리고 이에 따른 좋은 실천적 구조와 방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정교회 운동은 교회가 아닌 운동이다. 실제로 감리교회가 구역 조직 즉 속제도를 도입하였을 때 어떤 마음으로 도입했을까?

그리고 이런 구역 조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그룹 운동이 교회 안에 일어나게 되었을 때 어떤 중심이 있었을까? 좀 더 명시적으로 셀교회 운동이나 가정 교회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중심은 복음적 열정을 교회가 회복하는 것이다.

가정 교회 운동이 구체적인 지역 교회적 기능을 하기 위한 예배, 교제와 치유, 교육과 훈련, 섬김과 사역, 전도와 선교를 직접 하도록 한다. 그런데 모든 교회의 조직은 실질적으로 이런 필요를 가져야만 한다. 말씀의 전파와 돌봄과 다스림, 섬김과 나눔이 있어야 한다. 장로교적인 표현에 의하면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있어야 한다.

이런 직분을 언급함은 모든 교회와 교회적 조직에 필요한 것이 이런 직분에 맞는 역할을 요청한다. 이것은 교회나 교회 안의 모임들이나 혹은 성도들의 가정에서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들이다. 교회적 성격이 이런 요소들을 필요로 한다.

글을 마치면서
가정 교회 운동이 좋은 실천적 목표와 실제를 가지고 있지만 기본 개념과 실제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 운동의 발생은 그 시대의 보편 교회가 가진 잃어버리거나 상실된 교회적 모습에 대한 비평적 통찰에서 나온다. 따라서 이 운동과 그 열매에 대해서 교회적 관점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제도적 교회가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 깊이 상고해야 한다. 치리회가 이런 자기 반성적 태도를 더 많이 가지면서 운동을 평가하기를 바란다.

감리교회가 영국 성공회의 실천없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속제도를 도입하여 정착시켰고 이것이 전체 교회에 유익하다는 평가를 받아서 장로교회 속에서 구역 제도로 정착된 것을 기억해보자. 그리고 캠퍼스 선교단체들의 제자훈련이 오늘날 교회 성경공부 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자. 가정교회 운동은 이제 구역이 더욱 교제와 나눔과 섬김 그리고 전도와 양육의 장이 되어야 함을 요청하는 시대적 표징이다. 상호 겸손하게 문제들을 접근해보자.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