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문화연구소(Religion and Culture Study) 설립 모임 및 출판기념회

2013년 1월 12일 종교연구소는 논문집 <특집 - 이슬람화의 사례 연구(창간호)> 출판기념회와 연구소 설립 및 총회를 가졌다. 전호진 소장의 사회로 연구소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윤희구 목사(창원한빛교회)를 이사장으로 추대, 13명의 이사, 6명의 연구위원, 1명의 전임 연구원을 선임하였다. 종교문화연구소는 진정한 평화의 시대와 바른 인식을 가진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갈등을 야기하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의식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678501-01-292028 / 예금주: 정노화(종교문화연구소 출판사) 

* 논문집 <특집 - 이슬람화의 사례 연구(창간호)>는 2012년 10월, 6개국 최고 전문가를 초청하여 <이슬람화(Islamization)>를 주제로 개최했던 『한국 다문화 사회의 미래방향』강연을 번역, 출판한 것입니다. 논문집이 필요하신 분들은 종교문화연구소 공식 이메일(rncstudy@gmail.com)로 성함, 연락처, 주소, 필요 수량을 남겨 주십시오. 

2. 캄보디아 장로교 신학교 지방 목회자 대상 1차 훈련 시작

캄보디아 장로교 신학교는 교회 부흥을 위한 지방 목회자 대상 1차 훈련을 지난 1월14일과 15일 이틀간 캄보디아 깜뽕츠낭 지역에서 진행하였다. 수도 프놈펜에 집중된 대학위주의 신학 교육에서 벗어나 캄보디아 주요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여 기존 지방 목회자들에게 찾아가는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은 훈련들을 통해 전국에 흩어져 열악한 상황에서 목회를 해 왔던 캄보디아 목회자들이 교회 성장과 자립을 위해 하나가 될 뿐 아니라, 95% 이상 되는 미자립 교회들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3. 2012 전 세계 이슬람 테러 결산

1) 2012 이슬람 테러 결산

신년 미국의 이슬람 연구기관(The Peace of Religion)이 발표한 <2012년 이슬람 관련 테러 그룹>에 의한 총 테러건수는 총 2,800건에 사망자 17,725명, 부상자 15,708명(직접 집계한 것임)로 나타났다. 이 중,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일어난 테러건수는 155건이었고 이로 인한 사망자는 848명, 부상자는 1,638명이었다. 테러가 가장 많이 발생한 나라는 파키스탄으로(647)이었고 이라크(638)가 뒤를 이었다. 테러가 일어난 나라는 무려 40개 국가이며, 미국이나 구라파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 아프가니스탄(290), 나이지리아(279), 태국(175), 예멘(115), 말리(113), 소말리아(94), 시리아(90), 다게스탄(46), 인도(44), 케냐(40), 이집트(31), 이스라엘(24), 필리핀(23), 레바논(23), 이란(17), 알제리(16), 수단(16), 러시아(14), 리비아(9), 터키(3), 독일(4), 인도네시아(10), 튀니지(8), 팔레스타인(8), 카자흐스탄()1, 아제르바이잔(2), 체첸(1), 사우디아라비아(8), 요르단(6), 잉구셰티야(5), 타지키스탄(2), 불가리아(1), 코소보(1), 남아연방(1), 미얀마(4), 미국(1), 쿠웨이트(1), 벨기에(2), 몰디브(1) 

2) 2012 테러 분석

2001년 9.11테러 이후 일어난 이슬람 테러는 2만 건을 넘는다. 테러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슬람이 알라의 이름으로, 혹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테러는 이슬람 선교에 장애가 될 것이라 예상하였지만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현재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슬람은 도리어 부흥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기독교는 주목해야 한다. 

둘째, 9.11테러가 발생하자 한국 언론들이나 일부 학자들은 미국 주도의 패권주의와 반서구 감정이 폭발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반미감정을 부추기었다. 이 논리대로라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는 서구나 미국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테러는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라크의 경우는 시아파와 수니파 테러리스트들 간의 전쟁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미군 철수 이후의 이라크는 불안하게 본다) 

셋째, 테러 유형이 아주 다양해졌다.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는 무슬림 어머니가 코란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친딸을 죽이고 말았다) 

3) 2013년 테러 전망

미국 시사전문지인 타임(Time)의 논설가 파리드 자카리아는 2013년 이슬람 테러가 이집트, 튀니지아, 리비아 등 아랍혁명이 일어난 지역보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 인도네시아, 태국남부지역, 필리핀 및 동북아(중국신장)에서 많이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유는 아랍 혁명이 일어난 지역의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들이 알카에다를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알 카에다 외 좌익 그룹과 소수 인종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및 과격 이민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테러도 있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4. 세계 분쟁 지역 뉴스

1) 알제리 인질사태: 새로운 테러와의 전쟁으로 확대 우려

말리 반군은 지난주 프랑스가 반군의 주둔지인 말리 북부에 군사를 파견하자 보복 조치를 공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제리에서 이슬람 무장단체가 대규모 인질 사태를 일으켰다. 이들은 알제리가 프랑스에 영공을 열어줘 프랑스군이 말리 반군 지역을 폭격하도록 했다며 보복조치였다. 알제리에서 자국민이 희생된 데 분노한 서방이 말리 내전에 개입할 경우 테러 세력을 퇴치하기 위한 전쟁이 아프리카 땅에서 재현될 우려마저 있다. 이에 따라 말리 내전이 북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 서방과 이슬람 무장 세력간 새로운 '테러와의 전쟁'의 장으로 확대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일고 있다.

2) 아프리카에 확대되는 알카에다 조직

알카에다가 북아프리카와 아랍 국가에서 기반을 잃자 취약 지구인 북서부 아프리카의 말리 동북부, 알제리 일부, 마루타니아 등을 장악하여 이들 국가에 강력한 샤리아 국가 건설을 시도한다. 이것이 소위 이슬람화(Islamization)의 전략이다. 제2의 이라크 전선, 아프간 전선이 되지 않을까 국제사회는 우려하고 있다. 

3) 비대칭의 전쟁: 말리 전쟁에 개입한 프랑스군 vs 알카에다

21세기는 바야흐로 비대칭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이다. (일본의 젊은 이슬람 전문가 이케우치 사토시는 미국의 대 테러전쟁을 비대칭전쟁이라고 정의한다. 알 카에다는 전쟁을 오랫동안 지속시키려고 하는 반면 미국은 속한 종결을 원한다. 비대칭 전쟁은 우리는 피하기 위한 전쟁이지만 적이 적극적으로 시도하려는 전쟁을 일컫는다) 

(1) 프랑스 국기 vs 이슬람의 깃발: 프랑스 군대는 프랑스 국기를 들고 전쟁한다. 물론 말리 군대와 함께! 그러나 알카에다 전사들은 한 국가의 국기가 아닌 이슬람의 국기를 든다.

(2) 지상 국가 vs 알라 나라의 대결: 프랑스나 말리 군대는 자기 나라를 위하여 싸운다. 그러나 알카에다 전사들은 알라의 나라를 위하여 싸운다. 보이지 않는 영적 나라이다.

(3) 지역주의 vs 전 세계주의의 전쟁: 프랑스나 말리 군대는 말리 지역에 한정된다. 그러나 알카에다는 전 세계가 전쟁터이다.

(4) 일시적 전쟁 vs 영원한 전쟁: 프랑스 말리 군대는 일시적 전쟁을 원하나 알 카에다는 종말까지 싸운다. 

4) 인도: 힌두교 과격주의자들의 기독교 박해

신년,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 기독교 지도자들은 힌두교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유인즉 과격 힌두교도들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수돗물 공급을 중단하며, 신자들에게는 땔감나무도 팔지 않아 식생활을 아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배활동도 못하게 하였다. 이것을 주도한 힌두교 집단은 힌두교 민족주의정당인 힌두트와(Hindutva)라는 원리주의집단이다. 이번 북부인도 선거에서 힌두교 민족주의 정당인 BJP가 승리함으로 차기 수상은 이 정당의 지도자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기독교로서는 아주 어두운 소식이다. 박해는 이슬람 국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5) 내전이 계속되는 시리아,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의 미래는?

사진 속 마을은 시리아에서 유일하게 1,900년간 아람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마을이다. 다마스커스 근교 산에 위치한 이 마을은 시리아가 이슬람 국가가 된 후에도 존속되고 있다. 반군이 이 지역을 장악한다면 이 마을이 살아남을지 우려된다. 

서방세계와 아랍권의 맹비난에도 불구하고, 곧 무너질 것 같은 아사드 정권은 잘 버티고 있다. 친 아사드 국회의원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입장하는 아사드는 아주 여유만만 하다. 그러나 고향이나 집을 떠난 국내 난민이 200만 명과 국외로 탈출한 난만이 60만 명은 엄청난 수난을 당하고 있다. 비인권의 아사드 정권은 붕괴되어야 하지만, 남은 300만 기독교 신자들의 미래가 염려스럽다. 이미 반군들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다른 나라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5. 사우디 정부, 17세 스리랑카 소녀 사형집행

리자나 라피크라는 스리랑카 소녀는 사우디 가정부로 일하다가 돌보는 4개월 영아가 죽자 유아 살인 혐의로 사형을 구형, 스리랑카 정부와 국제 인권 단체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참수형에 처해졌다. 사우디 정부는 그녀가 23살의 성인임에도 소개업자의 주선으로 취업목적으로 나이를 속였다고 말했다. 

6. 인도의 여성 학대, 성폭력: 단지 문화가 원인?

지금 세계는 인도의 여성 폭력 문제를 연일 크게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15일 KBS는 이것을 문화 문제라고 짧게 논평하는 뉴스를 내보냈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문화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차별하는 힌두교의 영향 때문이다. 부모 사망 시 아들이 화장을 해야만 하는 종교적 교리도 성차별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인도의 유아 살해(임신 전 살해)는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인도에서는 연간 수 백 명의 소녀들이 1) 매춘, 2) 강제 결혼, 3) 성노예의 목적으로 행방불명되고 있다고 BBC는 밝혔다. 

7. 이코노미스트 특집 기사: 지옥 - 영원한 불구덩이 속으로

영국 경제 전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가 2012년 마지막호로 세계 주요 지도자들이 지옥에 떨어진 상상도를 표지에 실은 '지옥' 특집호를 발간해 화제가 되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전 세계에 번지고 있는 '21일 세계 종말론'과 관련 지옥 연구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표지에 지옥을 형상화한 풍자 만화를 함께 실었다. 한편 이코노미스트는 현대 성경 연구자들은 예수나 사도들이 신약에서 지옥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사 전문을 요약하여 첨부한다. 

이코노미스트 특집 기사: 지옥 - 영원한 불구덩이 속으로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류가 가장 무서워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지옥!

현대인들은 지옥을 단지 중세의 유물이라고 본다. ‘지옥’하면 마녀들이 인간을 물고문 의자에 앉히고 고통을 주는 장면을 떠올린다. 플라톤은 일리아드, 오디세이 등 신화로 유명한 호머의 이야기가 인간의 도덕성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호머이야기에 미래의 고통을 암시하는 내용들을 모두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어쩌면 지옥이란 개념은 플라톤 당시에 이미 없어졌어야 마땅할지 모른다. 

(중략) 

그러나 지옥이 개념상의 장소가 아니라 실제로 지도상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남부에는 “지옥은 -마치 이웃 마을처럼- 실제로 존재”한다고 광고하는 사람들도 많다. 지옥을 상상의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공포심과 희망이 종교를 낳았다. 공포가 없다면 악행을 처벌할 수 없고 성직자들의 권위도 사라진다. 구세군의 창시자 부스(Booth)는 “인류는 지옥의 불을 직면해야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자세히 설명할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불교도 모두 지옥이란 개념을 가지고 이를 철저히 믿고 있다. 기독교 원리주의자 역시 지옥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십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지옥체험”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중세 유럽인들이 생각했던 지옥의 악마분장을 한 사람들이 나와 청소년들을 놀래게 해주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배경그림 역시 싸움하는 사람들, 자살, 약물 복용자들을 묘사해서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온라인 “가톨릭 백과사전”은 지옥을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바티칸 교황청은 이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있지만, 그 저자들의 지옥에 대한 믿음은 아주 강하다. 오직 “무신론자들과 쾌락주의자들”만 지옥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가톨릭 백과사전의 지옥관은 많은 점에서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St. Ignatius Loyola)의 다섯 번째 성령체험에 나온 지옥의 설명과 비슷하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회에 처음 입문한 사람은 “고통 받을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지옥 불을 느끼고, 고통으로 슬퍼하는 소리를 듣고, 유황냄새를 맡고, 눈물을 맛보아야 한다. 19세기 말, 제임스 조이스는 10대에 더블린의 예수회학교 클롱고웨즈 우드 학교(Clongowes Wood College)에서 추위에 떨며 겪은 지옥체험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했다. 

언젠가는 영원히 타는 불 속에서 고통 받거나, 해충에 물어뜯기거나, 불에 지진 몽둥이로 고문을 당하며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생각해서 잘못을 뉘우치려 해도 쓰라린 고통 때문에 오히려 화가 날 뿐이다. ...(중략)... 그저 지옥에 떨어진 자들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악마들을 저주하거나 욕설을 퍼부을 뿐이다. 성령의 축복으로 구원을 받을 가능성은 절대 없을 것이다.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며 신에게 단 1분만, 아니면 1초만이라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울부짖을 따름이다. 그러나 아무리 애원한다고 해도 신은 절대로 그들에게 단 1초 동안의 구원이라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이기때문이다. ...(후략)...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지옥은 흔히 생각하는 저승이란 개념과는 다르다. 역사적으로 보건대, 세계 모든 문화는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저승세계 개념을 가지고 있다. 가령 고대 이집트의 경우 아멘티(Amenti), 유대교의 스올(Sheol), 연옥 개념이 그 예다. 거기서 죽은 자들의 영혼이 모여서 심판을 받고 또 다른 세상, 즉 천국에서의 삶을 위해서 순결하게 정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일반적으로 고대 이집트문화의 유산 ‘사자(死者)의 서(書)’(Book of the Dead)는 아마도 기원전 1500년경의 것이라 추측한다. 사자의 서에는 사람의 영혼이 죽은 후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 그 일생동안 한 행동들을 저울로 재서 그 영혼을 평가한다고 적혀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나 후일 기독교 역시 이개념을 빌렸다. 이렇게 죽은 후 심판을 받는 장소, 어둡고 미로와 같이 복잡한 심판의 장소에서 인간의 영혼은 혹시 오래 기다릴 수는 있지만 그 곳에서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심판을 받기 위한 기다림의 과정이므로 단축할 수도 있는데, 이는 아직도 살아있는 지상의 친구들이나

친척들의 기도로 가능하다고 한다. 그 심판의 장소에서 기다리는 과정은 매우 불안하고 빨리 끝났으면 좋은 과정이므로, 대체로 모든 영혼들에게 이는 결코 지상보다 더 좋은 장소가 될 수 없다. 

지옥은 단지 그런 저승과 같이 심판을 위해 잠깐 기다리는 곳이 아니다. 지옥은 심판에서 저주를 받은 자들이 영원히 고문을 받으며 도륙을 당하고 산채로 먹히고, 할복을 당하며, 창으로 찔리는 등 고통을 받는 장소이다. 그것도 영원히 그런 고통을 받으니 그 괴로움이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다가가 잠깐이나마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도 예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문화도 있다. 그들은 결코 그 영원한 지옥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이런 지옥에서도 부활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문화도 있다. 가령 힌두교에서는 야마 푸라(Yama Pura)라는 지옥을 믿고 있다. 이 지옥은 힌두교에서 믿고 있는 여러 지옥 중 가장 역사가 깊은 지옥인데, 성난 짐승들과 얼음처럼 차가운 창으로 인해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겪는 곳이다. 불교에도 지옥 개념이 있는데, 불교의 지옥에서는 지옥에 빠진 자들의 심장을 고통스럽게 깎아내고, 고슴도치들이 두개골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이런 정화과정을 거쳐 순결해진 영혼은 지상에 다시 태어나는데, 인간이 아니라 벌레나 도마뱀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영혼은 이러한 윤회과정을 거친다. 한편 이슬람교와 조로아스터교에서도 지옥에 빠진 영혼은 결국 지상으로 돌아온다고 믿는다. 특히 조로아스터교의 경우 영혼은 매년 마지막 5일 동안 지상에 머문다고 한다. 

(중략) 

기독교가 상상하는 지옥의 모습은 단테나 존 밀턴에 힘입은 바 크다. 기독교의 지옥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깔때기를 뒤집어 놓은 모습으로서, 밑으로 내려갈수록 그 공간이 더 커진다. 불교가 상상하는 지옥의 모습 또한 기독교의 지옥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런데 지옥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가령 힌두교에서는 지옥이 21개의 주(主)지옥과 수십만 개의 작은 지옥들이 있다고 한다. 이 지옥들은 대체로 종교적 탈선에 대한 처벌이라고 믿는다. 스리랑카 신할라(Sinhalese) 불교에서는 136개의 지옥, 미얀마 불교에서는 40,040개의 지옥이 있는데, 이들 지옥은 각각 특별한 위반에 대한 처벌이다. 가령 소음을 유발했거나, 닭을 팔거나, 쌀에 설탕을 섞는 행위에 대한 처벌로서, 각각의 위반에 대해서 그에 할당된 별개의 지옥이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각 종교 모두 저승에 들어서는 순간 일종의 심판이 있다고 믿는다. 그 심판에서 올바른 자와 저주받은 자를 분리한다. 이 심판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예수가 비유했듯이, 들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농부와 같은 장면이 벌어지고, 그 후에는 나락으로 떨어져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 받는 것이다. 

(중략) 

현대 성서학자들은 이 모순을 극복하고자 많이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는 물론 그토록 성마른 사도 바울조차 신약성서에서 “지옥”이나 “저주”를 언급한 적이 없다는 점을 발견했다. 굳이 그와 비슷한 용어를 신약성서에서 찾고자 한다면 희랍어로 적힌 “심판”과 “규탄(혹은 유죄판결-역주)”이란 표현이 이와 유사하다. 그리고 지옥에서 벌 받는 것도 반드시 영원한 처벌이 아니라 “오랫동안(희랍어 aionios, 시간을 의미하는 희랍어 aion과 형용사 접미사 -ios의 합성어, 그 진정한 의미에 대해선 아직 논란이 있다-역주)”이라고 한다. 농부처럼 과감히 불태워버릴 것이라고 비유한 예수 역시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7번이 아니라 70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은 만민에게 자비로운 분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 비판에 대해 영원한 지옥론자들은 예수가 영원한 지옥을 의미했다고 고집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피조물을 보살피는 방식은 인간의 방식과는 다르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정의 역시 무한하고 그의 사랑만큼이나 그의 정의 역시 무조건적이라고 한다. 

지옥은 이렇게 놀라운 복수의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뜨거워야 마땅하다. 신의 분노만큼이나 지옥의 불도 뜨거울 것이다. 대체로 세계 각국의 언어에서 지옥이란 말은 그 어원이 숨겨진 장소 또는 함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옥이 결국 불구덩이를 의미하게 되었다. 지옥을 의미하는 게헤나(Gehenna)라는 말은 원래 지명으로서 예루살렘 외곽의 쓰레기 소각장이다. 그리고 실제로 게헤나는 주로 범죄자들의 시체를 버리는 곳이었다. 예수 역시 게헤나를 언급한 바 있다. 반면 고대 이집트신화에서 지옥은 불구덩이로서 불의 신과 인간의 내장을 먹는 괴물이 거기에 들어간 사람들을 조그만 가루처럼 갈아버리는 곳이다. 또한 힌두교와 불교의 지옥에서는 악마들이 사람을 가마솥이나 쇠꼬챙이에 꽂아 뜨거움을 맛보게 한다. 

또 시간도 큰 문제다. 중세에는 지옥을 영원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또 영원하지 않은 지옥의 경우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불교 사제들은 그 제자들에게 이를 쉽게 설명하고자, 영원하지 않은 지옥을 참깨를 가득 실은 마차에서 100년 마다 참깨 한 알이 떨어지는 것처럼 예외적인 것으로 비유했다. 그러나 만약 영겁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그 마차에 든 참깨가 모두 다 사라진다고 해도 그 참깨들은 마차에서만 사라졌을 뿐이지 결국은 불교의 여러 지옥 중 최초의 지옥에 머무른다고 한다. 그 위에 수천 개의 다른 지옥들이 또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에이레의 현대 시인이자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젊은 시절 예수회학교에서 공부할 당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높이 백만 킬로미터, 넓이 백만 킬로 미터, 폭 킬로미터의 모래 산에서 조그만 새가 백만 년 마다 한 번씩 그 모래를 한 알씩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상상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모래알을 모두 다 옮기는데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 긴 시간도 영원이라는 무한의 시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17세기에 데카르트가 영혼은 물질이 아니므로 물질적인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설명하자 사람들의 시각이 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성직자들의 영향력도 약해지고 유럽대륙에 산업화의 물결이 넘치니 지옥의 뜨거운 불길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목소리는 비현실적인 것으로서 그 힘을 잃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리학의 힘을 빌려 지옥의 무서움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옥이 그토록 무서운 곳이라는 설명은 대체로 심리적 장치로서 사람들에게 외로움과 참회의 심정을 주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고대의 슬기로운 사람들은 이미 이 점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키케로도 말하길, “우리 인간이 가지는 공포의 감정은 사실상 우리 자신에게 속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 자신의 사악한 생각으로 인해 우리가 그토록 광분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자신의《신학 대전(神學大全, Summa Theologica)》(1265-1273)에서 말하길, 저주받은 자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옥이란 지리적 장소라기보다는 자신들에게 희망이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 역명제인 “희망이 없음은 곧 지옥” 역시 참이다. 

(중략) 

지옥에 대한 이러한 주장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무시무시한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며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주장은 너무도 가혹하기 때문에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이를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없어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지옥에 대한 일부 설명들은 합리적인 상식과 모순되기에 이미 오래전 그 설득력을 잃었다. 특히, 여러 신학자들 중에서 가령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가 죄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관대한 이론을 펼쳤다면 지옥론은 다시 설득력을 가지고 부활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천국의 축복을 강조하면서, “천국의 축복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알고자 한다면 저주받은 자들이 받는 고통과 비교해보라”고 했다. 성 베르나르디노(St Bernardino of Siena)는 한 술 더 떠서, “만약 하나님의 정의에 지옥에서의 끔찍한 처벌을 없애버린다면” 천국에서의 축복의 노래가 전혀 달콤할 리 없다고 했다. 어둠이 없다면 빛도 그 의미가 없고, 침묵이 없다면 소리도 무의미하듯이, 영원한 축복 역시 영원한 공포 및 영원한 처벌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지옥이 없다면 천국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The Economist, December 22nd 2012 - January 4th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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