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담임 코닷연구위원
한국교회는 신학교수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 교단이나 교회 내에서 신학교수의 발언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학교수의 발언권은 오직 신학교의 수업시간 이외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각종 신학회의 연례발표회장은 교회에서 아무런 발언권이 없는 신학교수들의 자기 위안의 장소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이다. 그만큼 교회는 철저하게 신학교수를 배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한국교회에서 발언권이 제일 클까? 한국에서는 교회를 성장시킨 목사의 발언권이 제일 클 것이다. 교회만 성장시키기만 하면 그 교회목사의 발언에 토를 다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교회를 성장시킨 교회의 목사는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심지어 신학적인 문제에서도 말이다. 아무리 크게 문제될 발언이라도 하더라도 성장한 교회의 목사이니 다들 쉬쉬 하는 분위기이다.

교회를 성장시킨 것이 그 교회 담임목사의 공으로 돌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정말 담임목사 한 사람의 카리스마로 인해 그 교회가 성장한 것일까?우리는 성장이라고 하는 큰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하겠다. 문제는 이 성장병이 대형교회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작은 규모의 교회라고 하더라도 대형교회보다 훨씬 더 심각한 대형병에 걸려 있으니 말이다. 성장병에 걸린 교회는 반드시 능력타령을 하게 되어 있다. 세상의 다른 어떤 단체 못지않게 교회가 능력타령을 하고 있다. 교회는 능력있는 목회자를 찾으려고 기를 쓴다. 그래야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테니 말이다. 목회자들은 자기 교회에 능력있는 장로, 집사가 없다는 것을 한탄한다. 교회의 문제를 직분의 문제로 보는 것이야말로 공교회적인 생각이지만 그 직분의 문제를 직분자의 능력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넘어 가장 분파적인 생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차제에 우리는 직분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해야 하겠다. 특히 위에서 문제제기한 신학교수의 문제에서부터 다루어 보자. 교회가 신학교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모든 교회 직분자에 대한 태도를 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1. 신학교수는 교회의 교사다.

개혁교회의 직분론에서 목사의 자리는 어떤 직분자의 자리보다 중요하다. 타 직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교회 직분론에서 가장 독특한 것이 ‘직분의 동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직분의 동권은 직분간의 문제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한 직분내의 문제에서 더욱 유효하다. 예를 들면 목사간에 위계질서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대형교회나 소형교회 목사간의 위계질서가 있을 수 없다. 교회 내에서 담임목사와 부목사라는 호칭을 쓸 수 있고 역할의 분담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목사라면 그냥 목사요, 동일한 목사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모든 직분이 다 말씀의 직분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특히 목사직은 ‘말씀의 사역자’라는 특별한 호칭으로 불릴 정도로 말씀을 순전하게 파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목사가 될 이를 훈련하는 곳이 필요하지 않는가? 우리는 내적이고 개인적인 소명과 더불어 외적인 소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신학생을 양성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목사후보생을 훈련하는 곳을 우리는 신학교라고 부른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이를 우리는 신학교수라고 부른다. 그런데 신학교수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학교수가 교회의 교사라고 본다.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직분의 개혁도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사제의 종이 된 집사직과 장로직을 회복하였고, 다양하게 위계질서화된 사제직을 단순화시켜 목사직의 중요성을 드러내었다. 칼빈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 나와 있는 직분에 근거하여 그의 직분론을 펼친다. 그는 앞의 세 직분(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은 교회가 창설될 때의 직분이고, 마지막 두 가지(목사와 교사)만이 교회에 항상 있는 일상적인 직분이라고 보았다.(Ⅳ.3.4) 그는 목사와 교사가 없으면 교회가 절대로 나아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칼빈이 믿기로는 목사와 교사의 차이가 있는데 ‘교사들은 권징이나 성례를 집행하거나 경고나 권면의 책임을 지지 않고 다만 성경 해석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며, 신자들 가운데 교리를 온전하고도 순결하게 지킬 책임을 지지만, 목사의 직분에는 이 모든 기능들이 다 포함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이 칼빈은 사도와 목사를 한 쌍으로 묶고, 선지자와 교사를 한 쌍으로 묶었다는 사실이다. 선지자직이 독특한 계시의 은사 때문에 두드러졌듯이 교사의 직분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은 교사를 목사, 장로, 집사에 이어 제4의 직분으로 인정한 것인가? 우리는 칼빈의 예에서 보듯이 신학교수를 교회의 교사로 보는 관점을 소중하게 받는 것이 좋겠다.

2. 신학교수는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해야 한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철저하게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하는데 개신교 신학자들은 신학을 위한 신학을 한다는 말이 들리곤 한다. 사실 그렇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철저하게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하기에 어용신학을 하기 쉽다. 하지만 신학을 위한 신학을 하는 개신교 신학자들은 어용신학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신학을 위한 신학을 하는 것이야말로 개인의 취향이나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는 신학을 하기 쉽다.

예전에 감리교 신학교에서 칼바람이 분 적이 있다. 신학교 교수 중에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이가 있었고, 교단에서 몇몇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 그 교수를 잘라낸 것이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신학교수들이 신학의 자유를 말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된다. 서구신학으로부터 자립하기는 커녕 교회정치로부터 자립하는 신학을 하기도 힘들다. 신학교수들은 태생적으로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개신교 신학교수들은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하지 않는 것일까? 같은 서방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로마 가톨릭이 철저하게 교회 중심적이라면, 개혁한 개신교는 철저하게 개인중심적인 신학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사적인 이야기지만 유럽에서 목회할 때에 신학공부하러 유럽에 온 이들을 지켜 본 적이 있다. 그들이 해마다 여름에 한 주간을 내어서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자리에 참여한 적이 있다. 논문발표는 자신들의 논문을 검증받아보려는 시간으로 할애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유학하면서 신학만이 아니라 유럽의 교회를 얼마나 진지하게 배우고 있는지,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신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고국과 떨어져 있기에 더더욱 고국의 교회를 위해 필요한 주제를 정해서 자신들이 쓰고 있는 논문과 관계없는 것이라도 하더라도 소논문을 발표하면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지 않을까? 이후에 그런 모임을 제언하여 몇 년간 시행해 본 적이 있다. 신학공부할 때부터 지적유희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는 일이 필요하겠다. 신학교수는 교회의 직분자이다. 목사가 아닌 사람이 신학교수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학교수는 목사요 교회의 직분자일 수밖에 없다.

신학교수는 목사후보생을 양성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지만 교회가 없이는 이 일을 결코 감당할 수 없다. 신학교수는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목사후보생을 양성하고 있으며, 목사후보생도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신학을 배우고 있다. 그렇다면 신학교는 교회의 기관이며 동시에 신학교수와 목사후보생은 교회의 직분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직분자로 훈련받고 있다. 신학교도 교과부에 등록되어 있기에 그 쪽에서 요구하는 논문을 쓰고, 행정적인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학교수는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교회를 위한 신학, 교회의 유익을 위한 신학보다는 자신의 관심사를 발전시키는 것을 더 큰 목적으로 삼을 때는 교회의 직분자로서의 위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3. 교회는 신학교수를 지원해야 한다.

신학교수가 교회를 위한 신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교회가 신학교수를 파송해 놓고도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고, 그들을 지원하기를 게을리 한다면 이것 또한 직무유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필요할 때 신학교수들에게 한번씩 설교 부탁하는 것으로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될 것이다. 교회는 신학교수를 위해서 훨씬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 신학교는 교회의 지원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신학교수는 교회가 알아주지 않고서는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우리 온생명교회는 개척할 때부터 목사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신학교를 지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말씀의 사역자들을 양성하는 신학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기도제목 중에 하나이다. 아직까지 신학생들을 위해 점심식사 한 끼를 제공하지도 못했다. 교회재정이 너무나 빠듯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신학생이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에 몰래 돕기도 했고, 교회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신학생들을 받아서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우리 온생명교회는 해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을 맞아 신앙강좌를 열고 있다. 교회가 꼭 필요한 주제를 미리 정하고 그 주제에 제일 적합하겠다고 생각되는 강사(신학교수)를 선정하여 최소한 6개월 전에 연구비를 지원해서 연구하게 한다. 강사가 이 곳 저 곳에서 단골메뉴처럼 재탕 삼탕으로 써 먹는 설교나 강의가 아니라 신앙강좌를 맞아 새롭게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논문(두편)과 설교(두편)를 준비하여 발표하게 한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산출되는 계기로 삼아 그 내용을 출간하여 한국교회와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아주 불순한(?) 의도도 있는데 그것은 신학교수로 하여금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해야 한다는 자극을 주고자 하는 목적이다.

교회는 신학교수를 적극적으로 자극해야 할 것이다. 교회를 위한 실질적인 신학을 해 달라고 자극해야 할 것이다. 일반 대학에서 ‘산학협동’이라는 말이 오래전부터 유행이지 않는가? 대학교와 산업체가 협동하여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좋은 산출을 내도록 하는 것 말이다. 그것처럼 신학교수는 교회현실과 담을 쌓고 자신의 가르침과 연구에만 전념할 것이 아니라 교회현실이 어떤지, 사회 속에서 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어떤 이단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등에 예민한 촉수를 들이대고 있으면서 ‘교학협력’을 생활화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교회가 신학교수들을 교회현실을 모르는 철부지들(?)이라고 치부하지 않고 신학교수들을 알아주고, 배우려고 할 것이다.

4. 교회가 신학의 장이 되도록 신학교수들이 도와야 한다.

신학교가 교회를 위한 신학을 산출하는 장이라면, 교회는 말 그대로 신학의 장이어야 할 것이다. 신학교가 신학의 장이 아니라 교회야말로 신학의 장이다. 교회야말로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는 신학의 장이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이 신학적이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무슨 주지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혁교회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교회가 신학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불문가지이다.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는 절박하다. 교인들, 심지어 직분자들마저도 아무런 통보없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반대로 새로운 교인 한 명 얻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쉽지 않다. 믿음 없는 목사라서 그렇겠지만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가 많이 있다. 상황이 이렇기에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가에 골몰하게 되고,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귀가 솔깃해 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럴수록 정도를 걸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인들을 잘 먹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다. 이때 신학교수들의 격려와 지원이 필수적이다.

교회가 먹이사슬의 장이 아니라 신학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신학교수들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핑게 같지만 일선 목회자는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신학교수들이 설교를 위한 도움을 줄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하겠다. 더 나아가 교학협동이란 표현까지 쓴 것처럼 신학교는 교회를 위해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해야 할 것이다. 일 년에 한번 논문집을 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신학교수들은 세계교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포함하여 교회를 위해 고민한 주제들을 엑기스처럼 전달하는 장을 수시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하계와 동계에 목회대학원 세미나를 열고, 신학교수들이 각 지역을 돌면서 신학세미나를 주최하는 노력을 높이 산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철저하게 ‘소비자(?) 위주’의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신학에 맞는 성경공부 교재를 개발하는 일도 적극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신학교수들은 교회가 자기들을 알아주지 않는데, 모처럼 어렵사니 한 발언에 대해서도 콧방귀를 뀌는데 어떻게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숫자적인, 그리고 물질적인 성장에 힘입어 선교지나 전 세계교회에 자랑을 늘어놓던 때가 지나가고 있다. 신학에 기초한 성숙한 신앙의 산물을 내놓지 않을 때 한국교회는 어떤 발언권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회의 쇠퇴에 대한 책임을 신학교수들도 같이 져야 한다. 그동안 신학자들의 발언이 씨도 먹히지 않았지만 너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제는 신학교수들의 발언을 주목하기 시작하고 있다. 신학자들끼리만 통용하는 언어로만 말하는 폐쇄성을 벗어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교회가 알아줄 것이다. 교회의 자립은 신학의 자립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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