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신대원를 영도캠퍼스로 이전하자는 것은 역사를 역주행하자는 주장이다

고려신학대학원 수도권 이전운동 역사

허순길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장로교회사》에서 “고려신학대학원의 수도권 이전 운동의 역사는 고려신학교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다”고 하였다. 한상동 목사가 평양에서 출옥한 후 서울에 왔을 때 보수적인 입장에 섰던 목사들이 서울에다 정통·개혁주의신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일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고려신학교 제1대 교장으로 취임했던 박형롱 박사가 취임한 지 겨우 6개월 만에 이탈하여 서울로 간 이유 중 하나가 고신의 서울 이전 문제였다. 그 후에도 이 문제는 이곳저곳에서 계속 제기되었고, 총회에 정식 안건으로도 수차례 제출되었다. 그러다가 근 40년 이 지나 1986년 제36회 총회는 드디어 “신학대학원”을 수도권으로 이전하기로 합의하였고, 그 이듬해 열린 제37회 총회는 이 일을 적극 추진하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이런 거듭된 결의 후에도 신대원 이전은 쉽지 않았다. 제일 큰 난관은 대학과의 관계문제였다. 본래는 대학이 신대원의 예과로 시작되었으나 문교부의 인가를 받게 되면서부터 법적으로는 신대원이 대학에 종속기관이 된 것이다. 주객의 완전한 전도(顚到)였다. 그래서 교육부에 신대원만 따로 떼어 이전하는 인가를 받는 일이 아주 난감하였다.

신대원 단설대학원 설립시도 실패

그런데 김영삼 장로가 대통령이 되면서 기독교계의 끈질긴 청원에 의해 대학원대학교 설립에 대한 입법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이를 기회로 삼아 학교법인 이사회는 천안에다 3만2천여평의 대지를 마련하고, 차후 대학원대학교로 설립한다는 것을 목표로 교육부에 신대원 위치변경계획 승인을 요청하였다.

교육부는 1994년에 이를 승인하였는데 1996년부터 캠퍼스 조성공사를 시작하여 1998년 8월에 준공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달 9월8일에 신대원은 천안 캠퍼스에서 드디어 감격적인 개강예배를 드림으로 천안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후 총회가 신대원을 대학원대학교로 설립하자는 결의를 하고 이를 추진해왔으나 고려신학대학원이 신설되는 학교가 아니라 이미 고신대학교에 소속된 기존 대학원이라는 것 때문에 이를 분리하여 독립된 학교로 설립인가를 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시는 임시처방으로 비록 신대원이 법적으로는 대학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인사, 행정, 재정, 커리쿨럼 등 모든 것을 독립적으로 운영한다는 결정을 하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렇게 지나오다보니 이런 일을 추진하고 결정했던 사람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학교 당국자들도 세대교체가 되면서 신대원의 정체성과 위상에 대한 인식이 약해지고, 심지어는 우선순위마저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대학이 주체가 되고 신대원은 그 종속체가 되는 모순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서 이미 지난 사설에서 거듭 언급한 대로 신대원을 대학에 완전히 종속시키려는 아주 엉뚱한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교회의 사명도, 고신의 역사도 신학도 모르고 그저 현실의 다급성만 생각하면서 도로를 역주행하려는 너무나 위험한 생각들이다.

고신대의 설립과정과 그 정체성 논란

고려신학교는 처음부터 사실상 총회 직영신학교로 운영돼오다가 1964년도에는 정식으로 총회직영 신학교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감천 화력발전소 뒤에 한 때 미군부대가 주둔했던 자리에 한명동 목사 등이 운영하던 칼빈학원(일명 칼빈대학)이 있었는데, 그해에 이 학원도 고려신학교 예과과정으로 편입시켰다. 그 명칭은 고려신학교 대학부였다.

그런데 칼빈학원을 운영하며 대학설립의 꿈을 가졌던 몇몇 지도급 인사들이 신학교의 예과로 있는 대학부를 정식대학으로 인가를 받으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총회유지재단을 교육재단으로 변경해달라는 청원을 총회에 제출하고 공적인 절차를 밟아 대학인가를 받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여러 가지 교단 내 정치적인 갈등과 생각들이 달라서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유지재단이사회와는 별도로 대학인가를 위한 가(假)이사회(일명 私造이사회)를 만들어 학교재단설립인가를 받고 이어 고신대학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총회와 고려신학교에 관련된 지도급 인사들의 엄청난 갈등과 내홍의 원인이 되었다. 여기다가 대학부 교수들의 소위 ‘음주사건’까지 겹쳐서 학교전체가 큰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조이사회 관련자들을 징계하려는 과정에서 대학부 교수들이 총사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하는 등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거기다 신학적으로도 개혁주의 영역주권사상에 의해 일반대학을 교회가 직영할 수 없다는 논란이 일어나 사태는 파국 직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결국 신학적인 논란은 뒷전으로 돌리고 아무런 체제정리를 하지 않은 채 현실을 인정하고 수습하는 방향으로 엉거주춤 매듭이 되었다. 고신역사에 남은 큰 그림자였다. 그리하여 신학교에 속했던 예과가 대학이 됨으로써  교단의 심장부였던 신학교가 법적으로는 대학 안에 있는 하나의 대학원으로 강등되는 이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고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이후 대학이 신학교육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일반 학과들을 계속 증설하게 되면서 초기의 설립이념이나 정체성은 점점 더 희미해지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신교단이 대학을 갖고 있고, 종합병원까지 갖고 있다는 것이 자랑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자랑이 고신을 세속화의 길로 견인하고 있다. 곧 구미의 유수한 신학교들이 일반대학으로 발전하면서 신학교육이 완전 뒷전이 되거나 폐지되고만 것처럼 고신이 지금 그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고신대가 처음에는 “고신대학”으로 신학교의 예과 성격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반학과들을 증설하면서 일반대학으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고신대가 처음에는 신급 제한을 두어 크리스천 학생들을 받으려고 노력했으나 학생모집 등에 어려움이 생기면서 결국 현실타협이 이루어져 신급을 폐지하게 되었다. 완전히 일반대학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신급을 폐지하고서도 상당수 학과들은 여전히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감소로 여전히 학생 모집이 힘들어져서 다른 지방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존립위기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천안의 학교부지(신대원)를 팔아서 영도 캠퍼스와 합하고, 그 매각대금을 대학을 살리는데 사용하자는 희한한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만 보면 이런 생각이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신대원 부지를 팔아서라도 학교를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현실적인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신앙원리를 따르는 일을 포기하고 경제논리에 끌려가는 우상숭배적인 행태와 같다고 아니할 수 없다. 왜 잘못된 것을 근본적으로 고쳐 새로운 출발을 하려하지 않고 계속 세속주의와 타협하며 현실만 무마하려하는지 모르겠다.

고신이 깨어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지금 영적으로 정말 심각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일어나 역사의 오류를 바로 잡고, 우리의 이념 -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다시 찾고 구해야 할 때이다. 계속 현실타협을 하면서 이대로 나가면 캄캄함이 곧 고신을 덮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복음병원으로 인해 바벨론 유수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런 경고의 역사를 경험하고서도 아무런 감각이 없단 말인가? 북쪽 이스라엘이 이방나라 앗수르에 정복되었을 때 남쪽 유다는 어찌했나? 돌이키지 않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지 않았던가. 일본 신사에 무릎을 꿇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켰던 고신이 이제는 위장한 세속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인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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