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와 시련은 갱신의 기회이다

교회와 신학교는 하나다

교회와 교회의 목회자를 기르는 신학교는 하나다. 학교는 그것이 기독교학교라도 교회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교는 교회의 한 파트로서의 자격을 인정한다. 거기서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을 하지는 않지만 성찬을 통한 성도의 교제와 가르침을 통한 제자 삼는 일을 수행한다.

그리스도께서는 12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훈련하셔서, 땅 끝까지 이르러 그의 증인이 되라며 파송하셨다. 사도들은 성령을 받고 큰 확신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여 각 곳에 교회를 세웠다. 교회에는 성령의 은사를 따라 지도자들이 세워졌는데 그들은 교회를 목양하는 장로들이었다.

이후 사도의 사명을 계승한 교회는 인재를 개발하고 훈련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고 복음사역자들로 세웠다. 아직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던 초대교회는 회중 가운데서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은사를 확인하고 그들을 따로 세워 파송하였던 것이다.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각 지역에 조직교회가 세워지면서 교회는 인재의 개발과 지도자 양성을 위해 교회 안에 신학교를 세웠다. 따라서 신학교 곧 교회지도자양성소는 본래부터 교회에 속했고 교회가 직영하였다.

시대가 흐르면서 교회가 부흥하고 교회가 사회의 매조리티를 이루게 되면서 각 종 학교들을 세웠고 인문교육을 통해 전도를 하고 또 사회 여러 분야에서 봉사할 인재들을 양육하였다. 소위 미션 학교들의 설립이었다. 이런 학교들은 교회가 설립하고 운영하지만 교회의 한 부분은 아니었다. 개혁파 교회들에서는 교회가 세운 일반(미션) 학교를 영역주권의 원리를 따라 교회와 구별하였다. 그리고 직영이 아닌 간접적인 운영방식을 취하고 있다.

대학과 병원의 직영문제는 먼저 신학적으로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따라서 고신대학교와 부속 복음병원을 교회가 직영하는 것이 합당하냐 하는 문제는 먼저 신학적으로 확실히 검토해서 입장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고려신학교의 대학부를 고신대학으로 인가를 받으려고 할 때 거론되었던 문제이다. 그런데 당시는 “사조이사회”의 문제로 총회가 너무나 시끄러웠기 때문에 더 본질적이었던 이 문제는 오히려 뒤로 밀려버렸다. 그러다가 결국은 갈등을 정치적인 타협으로 적당히 풀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후 고신의 역사 속에서 이로 인해 교회가 받은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복음병원은 고신교회 지도자들의 이권개입의 마당이 되었다. 학교법인 이사가 되려고 치열한 선거운동이 벌어졌고, 이사회도 계파로 갈라져서 끊임없는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면서 학교나 병원의 설립이념의 실현이나 봉사정신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렸고, 경영상의 어려움도 가중되었다.

교회가 노동조합과 바로 부딪쳐야 했고, 성총회의 자리에 노조의 데모와 회장석에는 쇠사슬로 몸을 묶은 사람이 등장하고, 회의장 밖에는 분뇨가 뿌려지는 일까지 일어났다. 특히 김해복음병원은 “강도의 소굴”처럼 되었고(부외부채가 100억원이 넘었다), 여파로 복음병원이 부도가 나서 관선이사가 파견되어 “바벨론 유수” 시대를 맞는 비참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200억원이나 되는 교회의 헌금이 부도를 메꾸는 일에 사용되었다.

또 앞으로도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제는 고신대학교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신대학교나 직영하고 있는 총회가 잘못해서 생긴 위기가 아니라(잘못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시대적인 변화에서 오는 위기이다. 그러기에 돌파하기가 훨씬 더 힘든 위기이다. 더욱이 교회직영이라는 스스로 매인 한계 때문에 용신할 수 있는 여지도 매우 좁다.

정도를 찾아 걸어야 한다

무슨 일이든 정도를 걷지 않으면 결국에는 엄청난 시련과 위기를 당하게 된다. 그리고 시련을 당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은 패망에 이르게 된다. 지금은 고신이 시련 중에 있다. 시련은 개혁을 위한 기회이며 우리를 향해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모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시작하는(reform) 마음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학교나 병원이 조상들의 유업이니 무조건 이를 붙들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일 수 있다. 교회의 유업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땅이나 건물이나 재산이 유업이 아니다. 유업은 그들이 남긴 믿음과 정신과 삶이다. 이것이 없으면 보이는 것은 우상이 돼버린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대인들의 우상이었다.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 조상의 유업인 땅도 성전도 이방인들에 의해 정복되고 훼파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에게 준 기업이 이방인들에게 유린당할 때도 지켜주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불러들여서 징계하셨다. 우리는 성경이 이런 역사를 통하여 계시하고 있는 교훈에 주목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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