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낙흥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1947년 가을 고신에 부임한 때로부터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이듬해 봄 당대 한국 최고의 보수 신학자 박형룡은 고신을 떠나 버렸다. 한 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해서 육 개월 만에 사임하는 사람도 처신이 신중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은 것은 고신측이었다. 일제 하에서 대부분 신사참배에 굴복했던 목사들로서 당시 출옥 성도들의 “움직임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던 한국 장로교회 주류들(1)은 박형룡 박사가 반 년만에 고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고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확증으로 단정하고 싶어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초부터 평양 신학교의 최초의 한국인 교수들 중 한 사람으로서 한국 교회에서 이미 공인된 경력을 가진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조차 수용하지 못하는 집단이라면 저들은 구제불능의 “독선적 소수”임에 틀림없다는 인상이 굳어지기 시작했다.(2) 심지어 고신이 “몇몇 개인의 야심에서 출발한 분파”가 아닌가 하는 의심조차도 야기되었다.(3)

박형룡의 고신 이탈은 고려신학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노회와 총회의 교권주의자들에게 고신을 매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제공했다. 박형룡이 고신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질 무렵인 1948년 4월 말에 개최된 장로회 총회는 공식적으로 고신을 부정했다.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 상관이 없는 학교이므로 고신에 추천서를 주지 말라”는 결의가 총회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총회가 고신을 부정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연쇄적으로 경남 노회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박형룡이 고신에 부임한 직후인 1947년 12월에 즉시 고신 인준을 결의했던 경남 노회는 이제 그가 고신을 떠나자마자 김길창 목사를 필두로 고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4) 김양선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박형룡의 고신 교장 부임 후 “일시 머리를 숙이고 있었던” 경남 노회의 “일부 교권주의자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고신 인가 취소를 위한 투쟁을 맹렬히 전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5) 그 뿐 아니라 그동안 고신에 우호적이었던 사람들도 고려파가 분리주의자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기 시작했다.(6)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보자면, 박형룡이 고신을 떠난 순간 고신은 대한 예장으로부터 사실상 축출당하는 길에 들어섰다고도 할 수 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로 하여금 고신을 짤라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7)

박형룡은 왜 고신을 떠났을까? 한 학자가 어느 학교에, 그것도 단순한 교수직도 아닌 교장직에 부임했으면 적어도 몇 년은 꾸준히 봉사해야 책임있는 처신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몇 달만에 떠날 학교에 부임하는 식으로 거취를 정하는 것을 보면 그도 그렇게 진중하거나 무게있게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박형룡이 개인적으로 그러한 평판의 손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사역지를 옮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박형룡이 고려신학교를 떠난 이유에 대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 시각이 있다. 첫째는, 박형룡과 한상동 사이에 “신앙 노선”의 차이가 있었다는 관점이요. 둘째는, 양자 사이에 단지 “신학교 운영 방법”에 관한 견해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며, 셋째는 첫째와 둘째의 중도적 시각으로 “신학교 운영 방법”에 대한 차이와 함께 약간의 “신앙 노선”의 차이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첫번째 설의 지지자는 김양선, 김요나, 정규오 등이요, 두 번째 관점의 옹호자는 허순길이며, 세 번째 시각의 대변자는 남영환이다.(8)

“신앙 노선” 이견설은, 한 마디로, 고신측이 중심이 된 새 교단을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한상동과 박형룡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는 견해이다. 즉, 고신측이 기존 장로교회 안에 남아 그들과 협력해야 한다는 박형룡의 견해와, 기존 장로교회를 부정하고 그 울타리 밖으로 나가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자는 한상동의 견해가 대립했다는 것이다. 신학교 운영에 관한 이견설은 신학교 운영의 구체적 방법에 관해 한상동과 박형룡의 견해가 달랐기 때문에 박형룡이 고신을 떠났다는 주장이다.(9) 이 주장을 지지하는 허순길은 박형룡이 출옥 성도들의 “총회 신설론”에 반대했기 때문에 고신을 떠났다는 김양선의 주장을 단지 “당시의 정황을 살핀 후 내린” 억측에 불과하다고 가볍게 일축해 버린다.(10)

주목할 사실은, 허순길과 남영환은 공히 박형룡이 고신을 떠난 사유를 하나 더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신학교 운영 방식에 대한 박형룡과 한상동의 견해 차이 이면에 신사참배 범과자들에 대한 권징 문제에 관한 이견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한상동은 일제 말 신사에 참배했던 목사들이 모두 해방 직후에 출옥 성도들이 제시한 교회 재건 기본 원칙의 “자숙안”(11)을 이행함으로써 권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렇게 되기 전에는 결코 “회개하지 않은” 총회와 신학교 운영을 위해 동역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박형룡은 설사 총회의 목사들이 “자숙안”을 만족스럽게 이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학교 운영을 위해 그들과 동역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형룡이 한상동에 비해 권징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이유를 두고서는 허순길과 남영환의 해석이 달라진다. 허순길은 권징에 대한 한상동과 박형룡의 접근이 달랐던 이유가 교회관의 차이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한상동은 교회의 “순수성”을 중시한 반면 박형룡은 교회의 순수성에 대한 집념이 약했다는 것이다. 즉 한상동은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교회론에 충실했기 때문에 신사참배자들에 대한 권징을 꼭 행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으나 박형룡은 교회관이 “약하고” “희미”했기 때문에 신사참배 범과에 대해 “자숙”하지 않은 총회 지도자들과도 신학교 운영을 위해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편, 남영환은, 허순길처럼 거창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하는 대신, 박형룡과 한상동 사이에 단지 권징의 가능성 여부에 대한 “현실 인식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고 본다. 즉 박형룡이 철저한 자숙을 행하지 않은 총회 지도자들과도 협력해서 신학교를 운영하자고 주장했던 것은 꼭 교회의 거룩성 혹은 권징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신사참배에 대한 권징의 시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되지도 않을” 권징은 일단 접어 놓고 우선 자유주의 조선신학교에 대항할 수 있는 정통 보수 신학교 설립을 위해 역량을 결집하는 것이 한국의 보수 장로교인들이 해야 할 첫번째 작업이라고 박형룡은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권징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인식 차이가 총회와의 동역에 대한 견해 차이를 낳았고 그 결과 양자가 결별하게 되었다는 것이 남영환의 해석이다. 과연 누구의 해석이 정확한 것인가?

박형룡의 고신 이탈의 진정한 이유에 대한 규명은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고신 설립자들이 애초에 지향하던 비전과 그것의 성격을 밝혀 주는 단초가 된다. 나아가 그것은 고신측과 기존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결별이라는 제1차 한국 장로교 분열의 이유를 발견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여러 사가들이 논의하고 있는 문제, 초기의 고신측 지도자들이 과연 분리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 직결된 문제이다. 만일 김양선의 진술이 정확한 것이라면 고신은 예장 총회에서 축출당하기 여러 해 전인 1940년대 중후반에 이미 기존 대한예수교장로회로부터의 분리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만일 허순길의 주장이 사실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라면 고신은 그 당시 적어도 의식적으로 분리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셈이 된다. 본고는 박형룡의 고신 부임과 이탈의 과정을 자세히 추적 분석하면서 과연 그가 고신을 떠난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를 발견하고 그것들에 내포된 의미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고신 부임 이전의 박형룡

박형룡은 1920년 숭실 대학, 1923년에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을 졸업한 후 도미,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3년간 공부하여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27년 9월부터 켄터키 루이빌의 남침례교 신학교의 박사 과정에서 9개월간 공부하다가 학위를 마치지 않은 채 1928년에 귀국, 산정현 교회에서 잠시 목회하다가 1930년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아마도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논문 작성을 계속, 1933년에 루이빌 신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38년까지 평양 신학교 교수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제가 신학교에 대해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해 오기 시작하자 평양 신학교 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은 1938년에 폐교 쪽을 선택했다. 사역지를 잃은 박형룡은 잠시 일본으로 갔다가 만주로 건너 갔다. 당시 만주에 흩어져 있던 한인 교회들은 별도의 노회를 구성하여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과는 별개로 봉천 신학교를 설립, 평양신학교의 계승을 표방하고 있었다. 신학교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박형룡, 박윤선 두 사람에 대해서만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하는 것을 묵인하도록 당국과 “묵계”가 있었다.(12)

 

박형룡의 귀국

박형룡은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계속해서 만주 봉천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으나 1947년 4월 고려신학교 측은 다시 한 번 박형룡 박사를 모셔 오기 위해 송상석 목사(13)를 특사로 봉천에 파송했다. 송상석 목사의 간청을 받고, 또 그의 편에 전달된 전 조선신학교의 “정통을 사랑하는 복음주의 신학생 51인”의 호소문을 읽고 마음이 움직인 박형룡은(14) 1947년 9월 23일 경 송상석 목사의 안내로 서울에 도착했다. 박형룡이 서울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 평양신학교 이사들을 비롯 보수 신학교의 재건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지도급 목사들은 앞 다투어 그를 찾아가 구 평양신학교의 복구를 이구동성으로 제안했다.(15) 박형룡의 “마음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16) 아마도 박형룡은 그냥 서울에 주저앉아 거기서 신학교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서울의 인사들이 그에게 들려 주었던 중요한 사실은 고려신학교가 장차 장로교회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 교회 내의 복수 신학교는 신학적 차이 혹은 출신 목사들 사이의 파벌 의식으로 인해 교단 분열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한국 교회의 전통적 인식의 반영이었을 수도 있고, 또는 신사참배에 대한 권징을 고집하는 고신측과 그것에 응하지 않는 기존 장로교 대다수 목사들의 대립이 결국은 교회 분열을 낳을 수 있다는 상식적 예상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한국 교회의 상태 및 고신과 관련하여 이런 저런 여러 말들을 들은 박형룡은 본래의 목적지인 부산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서 일주일을 지체했다. 초조해진 송상석은 부산으로 내려가 상황을 보고했고 그 보고를 들은 한상동이 9월 30일에 부랴부랴 상경하여 보니 “그 때까지도 박박사의 마음은 서울에 있었다.”(17) 한상동을 맞이한 박형룡은 고신에 내려가는 것과 관련하여 자기 마음에 가장 걸리는 점을 토로했다. 서울의 목사들 말을 들은 후 자기도 공감하게 된 우려, 즉 “고려신학교가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한 염려를 한상동에게 표현했다는 것이다.(18) 그것에 대해 한상동은 신학교 운영과 관련한 자신의 기본 입장을 일종의 최후 통첩으로 박형룡에게 전달했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한국 교회의 혁명”을 의미하니 그것을 감안하여 거취를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그 사실은 한부선 선교사가 그 해 10월 2일 미국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다. 그 편지 속에는 고려신학교 설립과 관련한 한상동의 의도가 얼마나 급진적이었는가가 잘 나타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박박사도 우리 신학교가 분열의 원인이 될까 두려워하고 있어요. 한목사는 우리[한부선과 한상동을 비롯한 고려신학측]가 한국 교회의 혁명을 위해 일어났으며 분열을 원치는 않으나 필요하다면 종국적으로 그것에 대해서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터놓고 그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Han told him outright that we stood for a revolution in the Korean church. We didn't want a split but were ready for even that eventually if necessary) 그래서 우리는 그런 전제 위에서 [박박사가 고신으로 ]오든지 말든지 스스로 결정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19)  

이 편지에 의하면, 이 당시 이미 한상동과 한부선 등 고신측 지도자들은 한국 장로교 분열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신측이 총회측과의 분열을 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종적으로 그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총회 내에 머무르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분열을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20) 지금 당장 능동적으로 분열을 시도하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분열만은 절대 피해야 한다는 입장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상동과 한부선 등 고신 지도자들 사이에 이미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우리”는 일단 유사시 교회 분열마저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이 꼭 고신측이 먼저 총회를 떠난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 장로교회 안에 남아 있는 것에 대단한 미련이 있다거나 그것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라는 어감이었던 것이다.(21)

한상동이 거론한 “혁명”의 내용은 물론 일차적으로 신사참배자들에 대한 권징, 그리고 다음으로는 자유주의 신학의 척결이었을 것이다. 이 회동이 이루어진 것이 1947년 10월 박형룡의 고신 부임을 전후한 무렵이었으니 그것은 고신측이 총회측과 나누어지기 무려 4년 전의 일이었다. 박형룡을 교수로 모시기 원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가 원한다고 해서 그들이 보장할 수 없는 일, 즉 여하한 경우에도 고신측이 총회에서 이탈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언질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한상동이 박형룡에게 마지막으로 전달했던 입장은 “우리는 만약의 경우 분열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러한 각오가 되어 있으면 우리에게 오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오지 말라”는 단호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참회와 자숙에 대한 고신측의 요구 때문에 총회가 고신측을 단절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주장을 포기하느니 짤리는 쪽을 택하겠다는 태도였던 것이다.  

한편 한상동으로 부터 고신측의 최종적 입장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박형룡으로서는 서울에 주저앉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목숨을 걸고 천신만고 끝에 만주까지 자기를 모시러 온 송상석 목사와 고려신학교 측의 성의를 무시하고 서울에 주저앉는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중대한 신의 위반이 될 것이었다. 정규오가 그것을 지적하고 있다. 박형룡이 고려신학교에 간 것은 단지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22) 그러나 박형룡이 고신으로 간 것은 단지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고려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서울 인사들의 보수 신학교에 대한 소망은 단지 소망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것을 향한 아무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처는 취해지지 않은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처럼 서울에서 언제 신학교가 시작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박형룡이 막연하게 서울에 머무를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박형룡은 “일단” 부산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23) 부산으로 내려가서 가르치고 있는 중에 서울 목사들이 신학교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면 그 때 가서 거취를 다시 결정할 수도 있다는 속셈이 있었을 수 있다.

또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서울의 보수주의 지도급 목사들이 중앙의 보수 신학교 설립에 관해 박형룡에게 제안한 아이디어들 속에는 박형룡이 일단 부산에 내려가 한상동 목사를 설득하여 아예 고려신학교를 서울로 이전시키도록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고신측이 그들과 함께 힘을 합쳐 조선신학교에 대항한 강력한 보수주의 신학교를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고신측이 그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박형룡과 함께 서울에 새로운 보수 신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까지 거론했을 수 있다. 부산에 내려간 박형룡이 고신 교장직을 수락하기 직전에 장차 고신을 전국 장로교회 배경의 총회 신학교가 되게 한다는 전제 조건을 한상동 목사에게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동의를 얻어 내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24) 그러므로 부산으로 내려가는 박형룡의 심중에는 이미 서울에서의 신학교 설립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김요나가 잘 지적한 것처럼, “큰 경륜과 포부”를 안은 그가 한반도 동남쪽의 좁은 항구 도시 부산에서 작은 지방 신학교를 섬기는 것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25) 부산의 신학교 운영은 그에게 단지 일시적일 뿐이라는 계산이 있었음에 분명하다. .

 

고려신학교 부임

박형룡은 10월 2일 가족과 함께 부산에 도착했다. 고신측은 그것을 박형룡이 한상동의 노선에 결국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한상동은 며칠 전에 분명히 그에게 자신의 가장 깊은 심중을 밝혔고 그러한 전제 위에서 고신 부임을 결정하라는 최후 통첩을 발하고 내려 왔었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박형룡이 고신으로 내려왔다는 것은 당연히 한상동의 노선에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고신측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고신 교장직을 최종적으로 수락하기 전에 다시 한번 자신의 복안을 관철하려 했다. 고려신학교를 장차 한국 장로교회 전체를 상대로 하는 총회 신학교가 되게 한다는 것에 대한 동의를 한상동 목사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박윤선의 후일담에 의하면, 박형룡은 노회와 총회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교회 재건을 부정했었으나 일단 고려신학교가 서울로 장소를 옮겨 총회 안으로 들어가게만 되면 교회의 분열이 방지될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었다.(26) 그 점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시 박형룡은 즉시 서울로 올라가 신학교를 따로 설립할 생각이었다.(27)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한상동은 박형룡이 제시한 그 조건에 합의를 해 주었다.(28)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왜 한상동 목사가 박형룡의 그러한 조건, 즉 전국 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총회의 인준을 받는 신학교라는 전제에 동의했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고 뒤에서도 다시 상술하겠지만, 총회 관할권 밖에 있는 독립적인 신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은 고신에 대한 한상동의 기본 구상들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한상동이 박형룡의 요구 조건을 처음부터 단호히 거부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김양선의 진술에 의하면 한상동은 이 때에 실제로 박형룡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신학교 운영에 대한 자신의 본래 복안 대신 박형룡의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상동은 그 후에도 몇 달간 그러한 입장을 유지했는데 결국, 뒤에 상술하게 되겠지만, 메첸파 선교사들의 입김 때문에 원래 복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한상동은 박형룡과 메첸파 선교사들 중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였을 때 결국 박형룡을 버리고 메첸파 선교사들을 택했으며 그 때문에 박형룡이 고신을 떠났다는 것이 김양선의 관점이다.

그러나 남영환과 허순길은 김양선과 다소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그들은 한상동도 “원칙적으로는” 신학교가 총회 지원을 얻는 전국적인 신학교가 되게 한다는 데 반대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신학교를 총회 신학교로 만든다는 데 대해 원론적으로는 이의가 없었기 때문에 한상동이 박형룡의 조건을 수락했다는 것이다. 단지 “적당한 시기”에 대한 인식 차이가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한상동이 보기에 “적당한 시기”란 물론, 한편으로는 신사참배했던 자들이 그 죄과를 참회하고 출옥 성도들이 제안한 대로의 자숙안을 이행함으로써 “권징”을 받아들이는 때요, 다른 한편으로는 총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척결되거나 최소한 그 주도권을 상실하는 때였다.(29) 그런데 박형룡은 “적당한 시기”가 이미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즉 신사참배했던 교회 지도자들이 철저한 자숙을 행하느냐와 상관없이 고신을 총회 인준 신학교로 만드는 일에 착수할 때가 임박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고신 부임 두 달 후에 있었던 경남노회에서 박형룡은 “적당한 시기”에 고신이 총회 인준을 받기 위한 수속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는데 그가 보기에 그 “적당한 시기”는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모두 “적당한 시기”에 고신의 총회 인준을 시도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그 “적당한 시기”가 어느 때인가에 관한 생각은 크게 달랐다는 것이다. 결국 전국 장로교 배경의 총회 신학교 운영이라는 기본 방침에 관해서는 견해가 일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시도할 “적당한 시기”에 대한 두 사람의 판단이 서로 너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박형룡은 고신을 떠났다는 것이 이 점에 관한 남영환과 허순길의 해석이다.

 

고신 위상의 재고

1947년 10월 14일 박형룡은 부산 중앙교회 (담임 노진현 목사)에서 고려신학교 교장 직에 취임했다.(30) 그 때 박윤선, 한부선도 그와 함께 교수로 취임했다.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의 자유주의적 가르침에 반발하여 학교를 떠났던 51명의 학생들 중 정규오, 차남진, 조동진, 박창환 등 34명이 박형룡을 따라 하부, 고려신학교에 합류함으로써 고신 학생 수는 120명으로 늘어났고 고신은 평양신학교 전통을 잇는 학교로 아연 활기를 띄게 되었다.(31) 출옥 성도들이 추구하던 “한국 교회 재건 운동”은 일정한 진전을 보았다. 박형룡의 고려신학교 합류는 고신의 대외적 입지 설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당대 최고의 신학자로 알려진 박박사가 고신 교장에 취임했다는 소식은 한국 교회 내에서 고신의 위상을 크게 고양시켰다. 뿐 아니라 그것은 고신 설립의 당위성에 대한 외부의 도전을 잠재우는 데 기여했다. 한상동 목사 자신은 그러한 변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지만 사실상 박형룡의 부임이 고신의 위신 함양과 입지 구축에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었는지는 당장 다음 번 경남노회에서 확인된다.

한편 고신의 위상이 올라가고 있는 것에 당황했기 때문인지 당시 김길창측은 다음 노회에서 고신측을 “권징”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노회가 열리기 전에 그 소문을 들은 한상동은 차라리 그들의 뜻대로 노회의 치리를 받고 짤려 나가 자신들만의 별도의 노회를 조직할 수 있었으면 하는 개인적 소망을 피력했다. 박형룡이 고신에 부임한 한 달 후, 그리고 경남노회가 열리기 한 달 전 쯤, 한부선이 아내에게 쓴 편지에 그러한 사실들이 나타나고 있다. 1947년 11월 17일 아침 한부선이 한상동과 박형룡을 만나러 갔을 때 두 사람은 마침 한 달 뒤에 있을 경남 정기 노회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길창 일파가 고려신학측 (Seminary faction)을 “권징”(discipline)할 궁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권징” (혹은 한국 교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대로 하면 “치리”)이라는 것은 물론 고신측의 목사들을 노회에서 제거하는 “제명” 조치나 최소한 신학교의 인준 취소를 의미했다. 그 소문을 거론하던 한상동은 이어서, 차라리 김길창파가 고신측을 “치리”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그렇게 되면 분리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별도의 노회를 조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경우 “보통 사람들”은 그 노회로 몰려올 것이라고 한상동은 전망했다. 한상동의 그러한 계산에 대해 한부선은 “글쎄, 그게 그렇게 뜻대로 잘 될지는 두고 보아야 알겠죠.”라고 대답했다.(32)

허순길은 박형룡이 고신에 재직하던 1947년 10월부터 1951년 5월 총회에서 고신이 추방될 때까지 만 3년 이상 동안 고려신학교측이나 경남 법통 노회측에서 교단 분리에 대한 논의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고신측은 총회를 이탈할 “계획”을 한 번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33) 고신측이 공식적이고 양성적으로 교단에서의 이탈을 논의한 적은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부선의 이 편지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장로교 일차 분열이 일어나기 이미 여러 해 전에 한상동은 기존 교회 밖으로 나가서 독자적 교단을 이룰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단지 일시적 충동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상존하는 소망이었는지는 현재로서 확인할 길이 없으나 한상동이 분리를 전혀 꿈꾼 적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이 편지가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다.  

박형룡이 고신 교장으로 부임한 약 두 달 후인 1947년 12월 9일 부산 광복교회에서 제49회 경남 정기노회가 개최되었다. 노회 전에 떠돌던 소문에 의해 고신측이 우려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노회는 출옥 성도들과 고신측에 우호적인 결정들을 무더기로 통과시켰다. 아마 그것은 연초에 있었던 경남노회 평신도들과 일선 교회들의 한상동에 대한 지지 성명과 박형룡의 고신 교장 부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노회는 제47회 노회가 통과시켰던 바, 신사참배자들의 자숙 결의안에 불복한 목사들로부터 “사과서”를 받기로 결의했다.(34) 또 고려신학교장 박형룡 명의로 제출된 고신에 대한 원조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노회는 고려신학교를 인정하기로 가결했다.(35) 1946년 12월 고신 인준을 취소했던 진주에서의 제48회 정기 노회 이후 정확히 일 년 만에 고려신학교에 관한 노회의 입장이 다시 정반대로 뒤집힌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려신학교와 노회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이 노회에서 신임 고신 교장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의 향후 총회와의 관계 설정에 관한 방침을 노회 앞에 제시했다는 것이다. “신학교는 이사회와 후원회를 조직하여 전국 교회의 원조를 받는 동시에 적당한 시기에 총회에 청원하여 총회 승인을 받고자 합니다.”(36)

김양선은, 박형룡이 경남노회에서 고신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밝힌 이후 한상동도 “고려신학교를 총회 신학교로 승격시키는 것을 최후 목표로 하는 박박사의 신학교 설립안”을 그대로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본의는 아니었지만” 박형룡의 의견을 따라 “지금까지 고집해 오던 교회 재건 방안을 완화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37) 김양선은, 또 박형룡이 메첸파의 신학 사상을 가장 건전한 것으로 인정했지만 고신에 부임할 때 “신학교 운영에 있어서는 4대 (미남북 장로교, 호주, 캐나다) 장로교 주한 선교부와의 협력”을 자신이 고신에서 봉사하기 위한 기본 조건으로 제시했었는데 출옥 성도들은 이 무렵 이 점에 관해서도 역시 “박박사의 의견을 추종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38) 이것이 사실이라면 박형룡의 고신 부임을 계기로 한상동 자신은 신학교 운영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박형룡의 그것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최소한 경남노회에 대한 한상동의 태도 변화는 구체적 행동으로 입증되었다. 박형룡의 권고에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그는 제49회 노회를 앞두고 제48회 정기 노회 때의 탈퇴 선언에 대한 취소서를 제출했다.(39)

 

메첸파 선교사들

1947년 12월 중순에 열린 제49회 경남노회가 폐회된 후 얼마 동안 박형룡과 한상동 사이에 별다른 의견 충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듬해 즉 1948년 봄이 다가오면서 두 사람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40) 김양선은 그 이유가 고려신학교측의 “돌변한” 태도 때문이었다고 쓰고 있다. 그 “태도의 돌변”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자명하다. 교장 취임 조건으로 박형룡에게 합의해 주었던 사항들에 대해 고신측이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김양선의 관측에 의하면, 한상동이 태도를 바꾸게 된 이면에는 한부선을 비롯한 메첸파 선교사들의 영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크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장 박형룡의 신학교 운영 방침을 추종하려 하던 한상동으로 하여금 본래의 노선으로 회귀하게 한 것이 타선교부들에 대해 “비협동적” 자세를 가졌던 메첸파 선교사들이었다는 것이다.(41) 만일 김양선의 관찰이 정확한 것이라면 결국 박형룡과 고신측이 헤어지게 된 결정적 요인은 직접적으로는 한부선을 비롯한 메첸파 선교사들의 영향이었다는 말이 된다. 한국 장로교 역사에 미친 미국 교회의 영향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가를 실감케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박형룡과 고신측의 결별 과정에 대한 김양선의 진술에 의하면,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나름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그것에 대한 한상동의 동의까지 확보한 박형룡은 그 후로 “對총회 관계와 메첸파 선교사와 네 선교부와의 관계를 조정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작업 과정에 “일대 난관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타 선교부들과의 협력을 거부하는 메첸파 선교사들의 배타적 태도였다.(42) 과연 한부선을 비롯한 소위 “메첸파” 선교사들은 박형룡이 제시한 노선에 역행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그렇게 함으로 한상동이 마음을 바꾸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소위 “메첸파” 선교사들 중 핵심인 한부선 선교사가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한부선 선교사와 메이첸(43)

1924년 봄, 대학을 졸업한 한부선은 그 해 가을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적으로 양분된 프린스턴의 교수들 사이에서 한부선은 메이첸 편에 서게 되었다. 그가 그러한 입장을 취한 데에는 구프린스턴의 신학 노선을 절대 지지하면서 프린스턴의 신학적 변화에 강력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던 부친 한위렴 선교사의 영향도 작용했다. 게다가 한부선과 메이첸은 프린스턴 신학교 기숙사의 같은 층에서 생활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던 메이첸은 기숙사 사감으로 봉사할 때 학생들과 사적 만남의 기회를 자주 만들었는데 그러한 교제를 통해 한부선은 메이첸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1928년 한부선은 프린스턴 신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하고 그 해 4월 그는 미 북장로교의 뉴 브룬즈윅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8년 9월 4일 미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는 그가 한국 선교사로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그를 청주로 파견했다. 1935년 한부선은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가서 신학을 연구하기로 했다. 당시 미 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규정에 의하면 선교사들의 첫 안식년은 신학 연구를 하며 보내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첫 안식년을 보낼 장소로 선택했던 곳은 모교인 프린스턴이 아니라 메이첸이 설립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였다. 다시 메이첸의 과목을 수강하게 된 한부선은 메이첸의 사상과 학문 방법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거기 있는 동안 한부선은 1934년 3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9월부터 웨스트민스터에 유학 와 있던 박윤선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한국 출신, 그것도 평양 근처의 서북 지방 출신이라는 배경 외에도 메이첸을 절대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메이첸파”(Machen men)였다. 그리고 이처럼 열렬한 메이첸 추종자들이 정확히 10년 후인 1946년에 고려신학교 최초의 교수들로 거의 동시에 부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부선과 박윤선이 웨스트민스터에서 공부하고 있던 1935년은 미 장로교 논쟁이 극에 달해 있던 때였다. 미 장로교 총회는 메이첸을 비롯한 독립 선교부 관계자들 모두에게 정직 처분을 내렸고 그것에 반발한 메이첸은 새로운 교단을 설립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부선은 미 북장로교에서 탈퇴하여 메이첸의 새로운 교단 아메리카 장로교회 (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44)에 합류함으로 새 교단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대신 본래 자신을 안수했던 미 북장로교의 뉴 브룬즈윅 노회로부터는 징계를 받는 희생을 감수했다. 그가 얼마나 철저한 메이첸의 추종자였는가 하는 사실은 그의 부친 한위렴 선교사와 장인 방위량 선교사, 마포삼열을 비롯한 한국의 고참 선교사들이 모두 그대로 북장로교 선교부에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이 선교사로서 적을 옮겼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한국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선배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보수적 신학 사상의 소유자였지만 북 장로교회를 떠나는 극단적 행동에는 합류하지 않고 기존 교회 안에 남아 거기서 진리를 위해 싸워 보수주의의 권토중래를 꾀하자고 그에게 권면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충고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메이첸의 새 교단에 합류하는 길을 선택했다.(45)

 

만주에서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

1936년 7월 한부선은 이제 미 북장로교 선교사가 아니라 메이첸이 만든 장로교 해외 독립 선교부에서 임명한 한국 선교사가 되어 만주 하얼빈으로 파송되었다. 193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7차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때 한부선은 회의장에서 강력한 반대를 표명하다가 일경에게 끌려 나갔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만주에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46) 그는 만주의 한인 교인들과 함께 <장로교인 언약 문서>를 작성하면서 기존 조선 장로교회를 타락하고 배교한 “거짓 교회”로 간주했었다. 1939년 1월 만주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장로교 언약 문서”를 작성하던 때의 상황을 한부선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스코틀란드 언약파들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신사참배와 우상 숭배를 인정하는 자들과 철저하게 단절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기초로 하여 장로교 언약 문서를 작성하였다.”(47)

한부선의 지도 하에 만들어진 장로교 언약 문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현재의 한국 교회의 형편을 볼 때 우리는 많은 배교와 권징에 있어서의 혼란을 발견한다. 우상숭배를 피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기존의 교단들 밖으로 나와서 함께 연합해야 한다는 확신 하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신앙을 개괄적으로 선포하고자 한다.”(48) 그리스도인, 죽은 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예배, 산당, 우상 숭배의 7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 언약 문서의 핵심은 신사참배가 명백한 우상숭배이므로 기독교인들은 절대 거기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언약 문서 작성자들은 우상 숭배를 행한 교회는 참된 교회이기를 포기한 교회이기에 거기서 “나와 분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신사참배하는 한국 교회는 장로교 신조와 헌법에서 떠났기 때문에 “그러한 치리회의 치리 아래 있을 수 없어 교회를 새롭게 결성”한다는 것이었다.(49) 한부선을 지도자로 하는 만주의 장로교인 언약 문서 작성자들의 그러한 시각은 한상동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상동도 신사 불참배자들로만 이루어진 새 노회 설립 운동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을 가졌던 두 사람이 해방 직후 고려신학교에서 만났을 때 의기투합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 일이다.

 

해방 후 고려신학교 교수 시절

1946년 9월 26일 한부선은 서울로 들어왔다. 그가 한국에 돌아오면서 가졌던 계획은 만주의 급진적 개혁주의자들 (come-outers)과 함께 일하는 것이었는데 만일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면 한국 안에서 “급진적 개혁” 운동을 시작하려 했다.(50) 한국에 도착한 날 한부선은 존 베촐드 (John Betzold)(51)의 소개로 한상동 목사를 만났다. 한부선과의 첫 만남에서 한상동은 그에게 고려신학교의 사역에 동참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한부선은 자신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더 적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그렇게 하는 데 동의하고 신학교에서 출애굽기, 교회사, 교회 행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52) 한부선으로 인해 고려파는 미정통장로교회와 국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한부선이 고신에 개입하는 “과정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은 그가 교회를 분리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공개적으로 표시”했다.(53) 고신과 관련하기 시작한 아주 초기부터 한부선은 고신측과 총회과 분열될 경우 거기에 가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국의 교회와 선교부는 이러한 운동[장로교 신조에 의한 교회 재건 운동]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내가 새로운 분파적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닌가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와 고려신학교는 우리가 처음부터 견지해 왔던 의도에 대해 분명했습니다. 고려파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개혁하고자 할 뿐이지만 만일 개혁 운동이 불가피하게 분열로 귀결된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합니다.(54) 

한부선은 1946년 12월 진주의 경남 정기노회에서 노회장이 된 김길창이 경남노회를 남부 대회에 연결시키려 한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 . . 내가 보기에 한국 교회에서 가장 악한 자들 중 하나 [김길창]가 노회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우리 그룹 [한상동, 박윤선, 한부선을 비롯한 고려신학교측]에 대한 거부 (slap)입니다. 그가 들어선 이후 이 노회를 남부 대회 (Southern General Assembly)에 연결시키자는 동의가 들어왔습니다. 몇 사람이 그것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한상동씨가 발언권을 요청했지만 노회장은 표결을 밀어 붙였습니다. 재고하자는 동의는 날아가 버렸습니다.(55) 

한부선은 경남노회가 남부 대회에 관련되는 것을 반대했다. 남부 대회가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정통성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56) 

1947년 4월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회 남부 대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3회 총회(장, 이자익, 부회장 함태영)로 개회할 것을 결정했다.(57) 전년도에 있었던 제1회 남부 대회도 제32회 총회로 소급 인정되었다. 여기서 소위 “한부선 선교사 호명 사건”이 발생했다. 회원 점명 시 총회 서기가 한부선 선교사를 호명하자 그는 “나는 이 총회 회원이 아닙니다”고 답변했다. 총회원들은 이 대답을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즉 “신사참배한 총회는 너무 더럽기 때문에 자신은 이러한 총회에 속하지 않는단 말인가?”하고 해석했던 것이다.(58) 그러나 김양선은 그 사건을 한부선이 단지 사실 자체를 지적했을 뿐인 것으로 본다. 해방 전인 1938년 조선예수교 장로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할 때 한부선은 그것에 반대했고 그 후에도 자신이 사역하던 만주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자 그가 소속해 있던 만주 봉천노회는 당시 만주국의 포교 허가제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한부선의 당회장권을 정지시키고 그를 제명해 버렸다.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목사 명단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해방 직후인 1947년 아직 회원권이 회복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는 총회 회원이 아니었다.(59) 간하배는 김양선의 해석이 한부선의 본의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부선은 1947년도의 남부 대회가 개회 시에는 “총회”라고 선언하지 않고 단지 “남부 총회”라고만 주장했다가 회의 도중에 전년도인 1946년도 “대회”를 제32회 총회라 소급 명명하고 스스로를 제33회 “총회”라고 자처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북한 교회가 불참한 가운데 남한 교회만으로 총회라고 자처하는 것이 “불법적”이라 여겨 자기는 그 총회의 회원이 아니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60)

그러면 진실은 무엇인가? 한부선은 위의 세 가지--즉 남부 총회의 이해, 간하배의 주장, 그리고 김양선의 해석--을 합친 이유들로 인해 자신이 남부 총회의 회원이 아니라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남부 총회가 짐작한 이유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한부선은 여러 이유로 해방 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라 자처하는 단체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일제 하에서 신사참배에 굴복했던 한국 장로교회가 한부선의 보기에 “거짓 교회”였다면 해방 후 특별한 변화가 없어 보이는 그 교회 역시 한부선으로서는 참 교회로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부선이 총회의 호명에 대해 “나는 이 총회의 회원이 아닙니다”고 답변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그 총회를 참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해석이 옳다는 사실은 1949년 주남선, 한상동 명의로 된 “대한예수교 장로회 성도들에게 알림”이라는 성명서에서도 증명된다. 거기서, 그들은 한부선이 그런 식으로 대답했던 이유가 “총회가 법통의 계승을 주장하고자 한다면 해방 전에 총회가 범하였던 과오를 시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한부선은 신사참배의 전과를 청산하지 않은 총회는 법통을 계승한 총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사건 이후 총회와 메첸파 선교사의 사이는 점점 벌어졌다.(61)  

한편 마두원은 원래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로서 해방 전 평양 숭실대에서 음악 교수로 봉사하던 유명한 피아니스트요 헌신적인 개인 전도자였다. 일제 말인 1940년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던 그는 페이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경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와서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1959년에는 매킨타이어의 ICCC 한국 지부장직을 비롯 ICCC 본부 부회장직을 맡았다.(62)

함일돈은 워필드 (B. B. Warfield)와 메이첸 (Gresham Machen)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으면서 프린스턴 신학교 (B. D., Th. M.)를 졸업하고 1920년에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1936년까지 평양신학교와 숭실전문학교에서 성경, 변증론, 칼빈주의를 가르쳐 한국 장로교회의 근본주의적 보수 신학 성향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1936년 북장로교를 떠나 정통장로교 선교부로 이적했다.(63) 동년 10월 그는 강계에서 성경학원을 세웠으나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고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신사 불참배자들을 지원하다가 1940년 체포되어 강제 출국당했다.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마두원, 최이손 등과 함께 부산에서 사역하던 중 곧 고려신학교 강사로 초빙되었고 얼마 후 교수로 임명되어 봉사했으나 한국 전쟁의 발발로 고신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종전 후 다시 내한했으나 마두원처럼 고신보다는 주로 ICCC와 관련하면서 그것의 한국 지부를 창립하고 그 기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64)

 

박형룡 vs 메첸파 선교사들

미국과 한국의 장로교 주류에 대해 그러한 태도를 가졌던 메첸파 선교사들이 한국의 신학교를 섬기고자 할 때 주한 4대 장로교 선교부와의 “합작”을 거부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신학교가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보수주의를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라면 말이다. 기존 한국 장로교회와의 관계에 대해 한부선 등 메첸파 선교사들이 한상동에게 어떤 조언을 했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 김양선이 주장하는 바, 메첸파 선교사들이 고신측으로 하여금 주한 4대 선교부 및 기존 한국 장로교 총회와의 관계를 멀리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진술은 충분한 개연성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메첸파 선교사들은 박형룡이 한상동에게 권고한 학교 운영 방안--총회와 제휴하는 신학교가 되고 4대 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는 일--에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상동이 박형룡의 복안을 받아들이는 날 한부선 등 메첸파 선교사들은 본국에서는 동거할 수 없다고 선언했던 자들과 피선교지에서 동거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한상동이 메첸파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날 박형룡이 고려신학교에 남아 있을 의욕을 상실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 때의 “전우”였던 메첸파 선교사들과 “혈맹”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한상동이 그들의 충고에 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한부선과 한상동 사이에는 유사성이 많았다. 우선 그들은 일제하에서 모두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옥고를 치른 세월이 있었다. 또 그들은 신학적으로 극히 보수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부선이 미주류 장로교의 “좌경화”에 반발했다면 한상동은 조선신학교의 김재준을 비롯한 총회 지도자들의 자유주의적 신학에 강하게 저항했다. 또 그들은 모두 다수파에 의해 따돌림 당하는 “소수파”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미정통 장로교회는 미 주류 장로교에 의해 거부당했고 출옥 성도들이 중심이 된 고신측은 한국 장로교 주류측에 의해 눈에 보이지 않게 경원시당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한상동은 박형룡보다는 한부선에 대해 훨씬 더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65) 간하배가 지적하듯, 만일 4대 선교부와 메첸파 선교부 사이에 택일해야 했다면 한상동은 후자를 선택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66) 실제 한상동은 그 무렵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교 운영에 대한 박형룡의 비전을 거부하고 한부선 등 메첸파 선교사들의 조언을 취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 결과는 본래의 자기 구상--총회와 무관한 독립 신학교를 부산에서 경남노회만을 상대로 운영한다는--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었다. 4대 선교부 전체의 협조를 얻어 전국적인 신학교를 운영하려는 계획을 좌절당한 박형룡은 물론 크게 실망하고 분개했다.(67) 아마 그것만으로도 그는 고신에 남고 싶은 마음을 거의 완전히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신앙 노선 전향 권고설

아마도 이 때 박형룡과 한상동은 서로의 견해를 상대방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신학교의 운영 방식에 대한 논란은 총회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와 직결된 것이었고 그것은 결국 고신측의 미래 존재 방식에 대한 토론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김양선의 표현에 의하면, 한상동과 박형룡 양자 사이에 “신앙 노선”의 차이가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68) “신앙 노선”이란, 김양선의 주장에 의하면, 두 가지 문제에 관한 입장이었다. 하나는 기존 대한 예장 총회를 인정하고 그 안에 남느냐 아니면 그것을 떠나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느냐(총회 신설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한국 교회 형편으로서는 전자와 직결된 것으로, 주한 4대 장로교 선교부들 모두와 관계를 가지느냐 아니면 소위 “메첸파” 선교부와만 관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69) 그리하여 김양선은, 박형룡이 고신을 떠난 이유는 단지 신학교와 총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정도의 문제에 대한 이견 때문이 아니라, 기존 대한 예장을 인정하고 그 안에 머무느냐 아니면 그것을 떠나 새로운 교단을 만드느냐 하는 것에 대해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것과 불가분의 관련을 가졌던 문제는 어느 외국 선교부와 관계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었다.

김양선은 신학교 운영 방식을 둘러싼 박형룡과 출옥 성도들 사이의 의견 대립이 날로 증폭되어 가다가 급기야는 출옥성도들이 박형룡에게 “신앙 노선 전향”을 권고했다고 주장한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당시 고신측의 신앙 노선이란, 김양선에 의하면, “현 총회를 떠나 성자들만의 新총회를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당시 조선신학교를 자퇴하여 50명의 학생을 이끌고 고려신학교로 와서 공부하고 있던 정규오도 같은 진술을 하고 있다. 박형룡을 평생의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삼고 그를 절대적으로 추종했던 정규오는 당시 박박사와 한목사 사이에 “한국 교회의 장래 설계”에 대해 견해 차이가 있었는데 박형룡은 “심지어 신사참배를 한 기성 교회와는 결별을 권고받기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71) 김요나도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그는 당시 박형룡이, 총회로부터의 분리를 택하려 하던 고신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제지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고 주장한다. 박형룡은 고신 재직 당시 “제자들인 박윤선, 송상석, 한상동 등 쟁쟁한 고려파 핵심 요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분립을 반대하였고 총회에 그냥 남아 있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식은 완전히 굳어져 있어 요지부동이었다. 여기에 박형룡은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이다.(72) 만일 이 여러 사람들의 진술이 전혀 근거없는 말이 아니라면 고신은 총회에 의해 축출된 1951 년보다 훨씬 전인 1940년대 후반에 이미 기존 한국 장로교회를 떠나 새 교단을 만들려는 마음을 꽤 강하게 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초두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것처럼, 고신측 사가인 허순길은 당시 한상동이 박형룡에게 교단 신설을 제안했다는 김양선의 주장에 반대한다. 단 허순길도 한 가지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의 상황이 어떤 면에서” 고신측으로 하여금 새 교단 형성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강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73) 허순길의 이러한 진술은 실상 한부선의 편지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선교 본부에 쓴 편지에서 한부선은, 고려신학교에 대한 박형룡의 주된 불평들 중 하나는 고신이 “교회 밖에서 투쟁하면서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고신측으로서는 자기들이 “[대한 예수교 장로]교회 밖에 있지도 않으며, 새 교단을 형성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는 것을 거듭 확신시켜 주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석연챦고 의미가 모호한 언급을 덧붙인다. “우리의 현 노선이 그것 [교회 분열]으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though our present course may lead to that).(74)

다소 자가당착적으로 보이는 한부선의 보고서 속에 나오는 위의 언급들은 세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적어도 박형룡은 고신측이 총회와 무관한 신학교 운영을 통해 새로운 교단을 만들려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 당시 고신이 총회로부터의 이탈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시도하지는 않고 있었다. 세째, 그러나 고신측은 당시 자신들의 노선을 고수하면 총회와 분리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신이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단절당하기 3년 전인 1948년의 일이었다. 간하배가 당시의 상황을 잘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결국 [고신측이] 분리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을 수 있다. 한상동은 이미 1940년대 초에 그러한 필요성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교가 독립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당초의 의도가 분리나 분열은 아니었다.”(75) 한부선이나 간하배가 의미하는 바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인 듯하다. 1) 한상동의 고신측은 단지 신학교를 총회 밖에서 독립적으로 하고 싶어 했을 뿐이다. 2) 그들은 의식적으로 독립적인 교단을 만들고 싶어 한 적이 없다. 3) 그러나 총회와 무관한 독립적인 신학교라는 것 자체가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교단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4) 그들은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막연히나마 인식하고 있었다. 5)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독립적 신학교에 대한 염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한편 이 무렵 서울에서는 장로회 신학교의 재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인식 등의 월남한 원로 목사들이 고신측의 태도 변화에 관한 소식을 듣고 “분개”하고 있었다고 한다.(76) 이들은 부산의 박형룡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조만간 고신이 총회 배경의 전국적 신학교로 변신을 시도할 때 자신들과 협력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가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실망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울에 새로운 보수 신학교를 설립하자는 제안과 함께 박형룡의 상경을 촉구했다.(76)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고신에 대해 더 이상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없으니 미련없이 그곳을 떠나 서울에서 조선신학교에 대항할 보수적이고 전국적인 신학교를 설립하자고 설득했던 것이다.

결국, 김양선의 진술을 따른다면, 신앙 노선 전향 권고를 받은 박형룡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고신측 권고를 따라 신사참배에 가담했던 총회의 모든 목사들과 결별하고 오직 고신측과만 관계하면서 고려신학교에 헌신하든가 아니면 고신을 떠나 서울에서 새로운 전국적 보수 신학교 운동을 시작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는 것이다. 만일 전자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물론 자신도 고신측 인물이 되어 총회와의 갈등과 대결 구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선택은 별 고심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격리된 지방의 작은 집단의 지도자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떠날 결심을 굳히고 학교에 사의를 표했던 것이다. 김양선의 진술에 따르면, “최후에 신앙 노선 전향 (총회 신설론)의 권고를 당한 박박사는 그 이상 의견 대립을 계속하는 것이 徒勞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1948년 4월 고신을 사임하고 5월에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취임한지 불과 반 년만의 일이었다.(77)

부산에서 그러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서울의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은 부산의 박형룡과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장로회 신학교의 개교를 위해 시동을 걸고 1948년 3월 15일 신학교 문제를 위한 전국 회의를 대전 제일교회에 소집했다. 그러한 움직임이 박형룡의 향후 거취와 의사에 대한 타진 없이 이루어졌을 리가 없고 회의의 소집 통보는 최소한 소집일로부터 몇 주 전쯤에 이루어졌다고 볼 때 고신을 떠나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겠다는 박형룡의 결단은 늦어도 2월 중에 일어났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예정대로 3월 15일, 전국에서 다수의 유력한 교역자들과 선교사 몇 사람이 개인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한 결과 신학 문제 대책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장로회 신학교 즉각 개교안은 일단 보류하고 대신 조선신학교 개혁안을 작성했다. 그것을 그 다음 달에 있을 총회에 제출하기로 하되 만일 총회에서 그 안이 부결되면 장로회 신학교 설립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1948년 4월 20일 제34회 총회 (장, 이자익)가 서울 새문안 교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총회측 이사들이 제시한 조선신학교 개혁안의 내용은 1) 김재준 교수의 진술서에 대한 비판, 2) 조선신학교 이사의 재선정, 3) 현 조선신학교 교수진의 총 퇴진이었다. 그러나 재래의 이사 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투표 결과 그 개혁안은 부결되었다. 그러자 총회측 이사들은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1) 김재준 교수를 일시 인퇴시켜 일 년간 미주에 유학케 하고, 2) 박형룡, 명신홍, 김진홍, 심문태, 서고도, 노라복, 위인사 등을 보강한 새로운 교수진을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총회는 그 안을 통과시켰으나 조선신학교가 그것을 거부해 버려 조선신학교 개혁은 무위로 돌아갔다. 김재준 교수는 <조선신학보>에 “편지에 대신하여”라는 제하의 장문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한편 고려신학교와 관련하여 총회는 동 학교는 총회와 전혀 무관한 기관이므로 그 학교에 신학생을 추천하면 안 된다고 결정했다. 고려신학교가 총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부정당한 순간이었다. 총회가 고신을 부정하는 것을 목격한 박형룡은 즉시 부산에 내려와 자신의 사임 의사가 확고부동한 것임을 재차 확인해 주었다.  

박형룡의 고신 이탈 이유에 대해, “신앙 노선” 차이라는 김양선의 설명 외에 또 하나의 설명이 있다. 그것은 단지 신학교 운영 방법에 대한 이견설이다. 남영환과 허순길이 그 견해의 대변인인데(78) 여기서 그 실체를 자세히 살펴보자.

 

신학교 운영에 대한 박형룡과 한상동의 견해 차이

고신에서 집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박형룡과 한상동 사이에는 몇 가지 의견 차이로 인한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 신학교와 총회의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

첫째는 고려신학교를 총회 산하에 둘 것인가 아니면 독립적인 신학교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박형룡 박사는 고려신학교를 가능한 한 빨리 총회 인준 신학교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전국 장로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신학교를 운영함으로써 한국 장로교회를 자신의 보수 신학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비전을 가졌다. 당대 최고의 신학자로서 그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총회의 보수주의 세력의 협조 하에 자유주의 조선 신학과 싸워 한국 신학계의 대세를 장악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고신이 총회 신학교가 되면 교권의 간섭 하에 들어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총회에 들어가면 신학교가 교권주의자들의 손에 녹아 버린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79) 그리고 당시 총회의 교권은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이나 일제 때 신사참배한 목사들 손에 있었다. 한상동의 판단에 의하면, 그러한 자유주의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은 보수 신학과 순교 정신을 건학 이념으로 하는 고려신학교와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총회와 무관하게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비록 전국적인 후원과 인정 대신 단지 경남노회의 후원만을 받을 수 있을 뿐이라 하더라도 그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80)

이 점에서 당시 고신의 교수로 있던 한부선과 박윤선이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선례를 소개함으로 한상동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920년대 미장로교를 휩쓸었던 현대주의대 근본주의의 논쟁 와중에서 프린스턴 신학교가 진보주의자들의 손에 장악되기 시작하자 그 학교의 교수 그래샴 메이쳔은 프린스턴 신학교를 이탈, 1929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다. 그것은 미장로교 직영 신학교가 아니라 독립적인 사설 신학교였다. 당시 교단 총회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득세하자 신학교까지 자유주의에 물든다고 여겼던 메이첸은 신학교가 교단의 관할 하에 있는 상태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새로운 신학교는 교단 치리권 밖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교단 총회가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될 때 총회 직영 신학교도 신학 노선을 수정하도록 강요받을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메이첸으로 하여금 교단의 영향력 밖에 있는 독립 신학교를 추구하도록 자극했다는 것이다.(81) 메이첸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심지어 자신이 주도해 만든 정통장로교단의 관할 하에 있는 신학교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한상동 목사가 고려신학교를 세울 때 한부선 선교사나 박윤선 교수를 통해 그러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전례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신학교의 초대 교수요 교장이었던 박윤선 목사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메이첸 밑에서 공부했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메이첸이 미 장로교 주류에서 떨어져 나와 새 교단을 설립했던 바로 1934-36 년이었다. 자유주의대 보수주의의 갈등의 절정기에 박윤선이 그 갈등의 중심 인물 밑에서 제자로 성장했다는 것이었다. 박윤선에 대한 웨스트민스터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진정한 기독교를 발견했다.”고 고백한다.(82) 그는 거기서 또 “칼빈주의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칼빈주의는 “곧 예수를 믿는 것을 뜻”했다.(83) 메이첸과 그 추종자들이 자유주의에 대항한 전투적 정신으로 충만해서 교단 분열에 이를 정도로 극도의 예민함 속에 처해 있던 바로 그 시기에 박윤선은 바로 그 투쟁의 선봉장인 메이첸의 제자로 있으면서 그의 학문과 노선에 전적으로 매료되었다. 신학 사상은 물론이요 메이첸의 교회론에도 거의 무비판적인 지지와 동의를 보냈음은 물론이다. 후에 고려신학교 교수로 일하게 된 박윤선이 웨스트민스터에서 배웠던 메이첸의 신학과 교회론, 나아가 신학교 설립 방식을 이런 저런 기회에 한상동에게 전달했을 가능성도 많다. 그는 고려신학교 초창기의 사실상 유일한 전임 교수였던 것이다.(84) 박윤선과 함께 고신 설립 초기부터 교수로 봉사했던 한부선도 박윤선 못지 않게 철저한 메이첸의 지지자였다. 신학교와 총회의 관계 설정에 관한 한 한부선도 박윤선과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방식을 모델로 하자고 한상동에게 충고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85)

만일 총회와 신학교의 관계 설정에 관해서 한상동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전례에 영향을 받았다면 한상동이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전국 교회 배경의 총회 직영 신학교를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원했으며 단지 “적당한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해서만 박형룡과 의견을 달리했다는 허순길의 주장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사실은 원칙적으로든 이론적으로든 한상동이 고신에 관해 전국적 신학교 내지 총회 직영 신학교로의 발전을 언급한 경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는 처음부터 경남노회의 신학교가 되는 것 이상의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애초에 신사참배에 굴복한 한국 장로교 총회와 자유주의 조선신학교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던 한상동은 보수 신학과 순교 정신을 가르치는 작은 지방 신학교를 구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많이 배출한 자기 고향 경남(86)의 노회 협조만으로 가능하며 또 경남노회의 신학교가 되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상동과 함께 고신을 설립했던 주남선 목사도 애당초 신학 교육과 관련해 아주 소박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후일 주남선은 고려신학교가 자신의 옥중 기도--“거창에 성경 학원 하나 설립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의 응답이라고 감사했다.(87) 고신에 대한 설립자들의 비전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인 것이다.

허순길은 박형룡이 고신을 총회 직영으로 승격시키는 시기에 대해 “조급”하게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즉시” 총회에 청원하여 총회 신학교가 되고자 했다는 것이다.(88) 즉 신사참배자들이 공적 자백을 하고 자숙하든 않든,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총회 안에서 상당한 세를 이루고 있건 말건 그것과 상관없이 신학교를 서울의 총회 직영으로 만드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인할 길이 없는 주장이다. 박형룡이 교장 취임 강연 “사도적 신학 소론”에서 고려신학교는 단지 더 큰 계획을 위한 “기초 공사”에 불과하며 앞으로 전국적 규모의 신학교가 세워져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은 사실이다.(89) 그러나 박형룡이 고신을 총회 신학교로 만드는 것을 어느 정도로 서둘렀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은 한상동이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에나 고신을 총회 직영 신학교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하려고 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2. 신학교의 위치에 관한 견해 차이

고려신학교가 총회 인준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는 쟁점은 신학교의 소재에 관한 것이었다. 박형룡은 신학교를 수도 서울로 옮기자고 주장했으나 한상동은 그대로 부산에 두자고 했다.(90) 중앙으로 진출해야 전국을 망라하는 학교가 될 수 있다는 박형룡의 주장에 대해 한상동은 일제 시대 평양신학교도 서울에 있지 않았으나 전국 장로교회에 영향을 미친 신학교가 될 수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그 제안을 거부했다.(91) 그는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하는 것이 친일 교권주의자들의 손아귀에 학교를 넘겨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신학교의 서울 이전을 애초의 신학교 “설립 목적 포기”와 동일시할 정도였다는 것이다.(92) 박형룡은 당시 김재준 등 자유주의자들이 버티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를 호랑이에 비유하면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된다고 주장했으나 한상동은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가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게 될 것 아닌가고 염려했다.(93) 여기서 한상동과 박형룡 사이의 자신감의 차이가 느껴진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리고 어느 영역에서나 한 나라의 수도는 항상 가장 진보적인 인물들이 활동하는 곳이다. 신학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허순길이 지적하듯, 서울은 오래 전부터 미국과 일본의 자유주의적 신학교들에서 유학한 경력을 가진 한국 교계 지도자들 여러 명이 포진해 있던 곳이었다.(94) 인간적으로 볼 때, 특별한 교육적 배경이 없는 한상동으로서는 “외국 물을 먹은” 자유주의자들이 득실대는 서울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박형룡으로 말하자면 한국 최초의 신학 박사들 중 한 사람이요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들 중 하나라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서 서울의 자유주의자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없는 자격과 실력을 갖추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터였다. 게다가 조선신학교에서 자퇴해 나온 복음주의 학생 51인들을 비롯하여 서울에서 만난 수많은 목사들은 일단 박형룡이 보수 신학교를 설립하기만 하면 그를 지원할 용의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김재준과 조선신학교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세력을 상대로 일전을 벌여 얼마든지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박형룡의 판단이었다. 이미 20년 전인 약관 30대의 나이에 평양 신학교 교수로서 전국 장로교회들을 위한 목회자들을 양성하고 있었던 박형룡은 이제 50대가 된 중견 교수로서 기껏해야 일개 지방 노회의 지원만을 받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후일 고신을 떠난 것은 개인적 야심 때문이었다는 고신측의 비난이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닐 수 있다.(95) 많은 경우 야심과 “비전”의 경계는 아주 애매하다. 그는 한번도 웨스트민스터 같은 독립 신학교에서 교육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다. 교단과 무관한 독립 신학교라는 것은 한부선이나 박윤선 같은 메이첸의 추종자들, 그리고 그들 자문의 영향권 속에 있을 한상동에게나 익숙한 개념이었다.(96) 박형룡은 항상 프린스턴 신학교나 남침례교 신학교 같은 대표적 교단 신학교에서 공부했었고 평양 신학교 같이 전국을 포괄하는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상동은 달랐다. 신학적 전투를 통해 한국 교회를 장악할만한 학문적 배경이 없었던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신학 교육보다는 목숨 걸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자신의 경력을 배경으로 한국 교회를 향해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한편 자기처럼 순교 정신을 가진 신학생들을 양육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박형룡의 제안대로 신학교를 서울로 옮기고 그것을 총회 직영으로 만든다는 것은 일단 총회 내의 신사참배 경력을 가진 인사들과 공존 협력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설사 박형룡의 복안처럼 그것이 보수 신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한상동은 단지 보수적인 신학을 교육하는 신학교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런 학교에서라면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한상동은 신사참배의 죄에 대해 “자숙”하지 않은 목사들과 공조하여 “진리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수 있는 목회자를 양성한다는 것이 심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한상동은 처음부터 경남노회에 의한 경남노회의 신학교가 되는 것 이상의 비전을 품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그는 경남노회의 인정과 지원만 추구했다. 짧은 시일 내에 총회를 석권하고 전국 교회를 장악하는 신학교 건설이라는 것은 애초에 그의 구상에 없던 계획이었다. 그는 그저 교회의 정통 신학과 순교 신앙으로 무장한 교역자를 작은 일각에라도 공급할 수 있다면 자신의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한상동의 이러한 자세는 신학교의 미래에 대해 박형룡의 구상에 공감했던 정규오 같은 사람들에게 “비전이 좁고 소극적”인 것으로 비쳐졌다.(97)  

3. 외국 선교부와의 협력에 대한 견해 차이

박형룡과 한상동의 의견이 충돌한 세번째 사안은 국제 친선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즉 고신은 한국에 있는 어느 선교부와 관계를 맺고 지원을 받을 것인가? 한상동은 정통 장로회 선교부와 독립 선교부와만 관계를 가지고 싶어 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앞에서 상술한 바 있다. 고신이 일단 한부선 등 미정통 장로교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시작한 이상 미국 남북 장로교나 호주 및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와 친선 관계를 맺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미정통장로교는 미국 주류 장로교를 참 교회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이 새로이 조직한 교회였고 한부선 등 메첸파 선교사들은 바로 그러한 교단에서 파송되어 고신과 협력하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형룡은 보다 포괄적이었다. 그는 그럴만한 과거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는 교육 과정에서 “에큐메니칼”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공부한 평양 숭실 전문이나 중국의 남경 대학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들이 연합하여 설립한 학교였다. 그는 또 선교사들의 도움에 의해 중국과 미국 유학을 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평양 신학교 교수 시절인 1930년 대부터 이미 미국 남북장로교를 비롯한 4대 선교부 출신 선교사들과 동역한 경험이 있었기에(98) 그 교단들에 대해 친근감과 개인적 관계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학적으로는 미국 정통장로교회와 가장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으로는 정통장로교뿐 아니라 미국 남북 장로교 및 호주 장로교회와도 관계를 가지고 싶어 했다.(99) 그가 미 장로교 주류와 관계를 계속 가지고 싶어 했던 이유들 중 주된 것은 아마도 재정적 고려였을 것이다. 신생 교단인 미국 정통 장로교회는 너무나 작고 미약하여 한국 교회를 도울 재정적 능력이 없었던 반면 미 북장로교나 남장로교는 거대한 교단으로서 얼마든지 그럴 경제력을 가진 교회들이었다.

박형룡의 고신 이탈 배경에는 한상동과 박형룡 사이에 신학교 운영에 대한 이상과 같은 세 가지 견해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순길과 남영환의 지적에 의하면, 그것들은,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보다 깊은 요인, 즉 양자 사이의 “현실 인식의 차이”의 외적 표출에 불과했다. “현실 인식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신사참배 죄과에 대한 권징을 둘러싼 것이었다. 권징을 둘러싼 이견에 대해 허순길은 그것이 “교회관”과 관련된 것이라 주장한다. 반면 남영환은 그것을 단지 권징의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판단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이 점을 좀더 심층적으로 살펴 보자.  

4. 권징에 관한 견해 차이

한상동은 신사참배한 교회 지도자들이 “자숙안”의 이행에 의해 권징을 받아야만 교회의 재건에 동참할 자격을 회복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 장로교 지도자들이 철저한 회개를 할 때까지 회개를 외치겠다는 확고한 결심 하에서 해방된 지 4년이 지난 1949년 봄에도 아직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참회를 외치고 있었다.  

이러므로 오늘날 대한 교회에 있어서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은 가장 지당한 일이며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며 그저 우물쭈물 덮어서 무사주의로 나가려 함은 결단코 불가한 줄로 알아 주장하여 마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시급히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회개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진노가 무서운 까닭이다.(100)  

그는 자신을 옛날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회개를 부르짖던 선지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교회가 바로 서고 교인이 살아나며 민족이 재흥하고 강토가 미려하기까지는 넘어지는 한이 있을지라도 외치고 또 외칠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다.”(101)

그러나 박형룡은 한국 장로 교회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신사참배에 대한 권징 문제에 발목이 잡혀 보수 신학 교육과 복음 전도 같은 시급한 사업에 결집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그가 고려신학교를 떠날 때의 고별 설교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시행도 안 되는) 권징보다는 복음 전파자 양성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현실 인식이었다는 것이다.(102)

일찌기 한상동은 신사참배는 십계명의 제1, 2계명을 범하는 우상 숭배의 죄이므로 목숨을 걸고 저항해야 하는 일이라 믿었고 실제로 그 자신은 그렇게 했었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그리스도인이, 그것도 목사가 신사참배에 굴복했다는 것은 용서받기 어려운 죄였을 것이다. 신사참배한 목사들에 대한 한상동의 묘사는 거의 최악의 단어들을 동원한 부정이었다. 1953년에 쓴 글에서 그는 신사참배한 목사들을 “일제 하에 양심이 마비되어 타락한 목사들”이라고 표현했다.(103) 양심이 “화인맞은” 자들이라는 것과 거의 비슷한 표현인 것이다. 물론 초대 교회의 노바티안처럼 그들에게는 갱생의 길이 없다는 식으로 사죄와 재신임의 기회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세컨드 찬스”는 있었다. 1949년에 그가 쓴 글에 그것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過日의 모든 죄를 솔직히 자복하고 눈물을 흘려 통회하면 긍휼이 풍성하신 여호와께서 인자하게 용서를 하시련만은. . . .”(104) “여호와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진노의 신만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며 자복하면 또한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인자하신 신이시다.”(105)

그리하여 그가 일제 말 옥중에서 구상했던 것들 가운데 하나는 해방이 되면 신사참배한 목사들이 “수양”하여 조선 교회 앞날을 위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수양원”을 짓겠다는 것이었다.(106) 그러므로 한상동은 일제 하 타협했던 목사들의 재생의 길은 해방 직후에 자신을 포함한 출옥 성도들이 제안했던 교회 재건 기본 원칙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일단 교회를 사임하고 두세 달간 과거의 죄를 씻어 내는 자숙의 기간을 거친 후 교회의 신임 투표를 받아야만 목회할 자격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107) 역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자숙과 정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자들은 사역자로서의 자격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런지 모르나 그것은 그의 관점 속에서 피할 수 없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최소한 그의 무의식 속에 그러한 생각이 강하게 잠재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해방 후 바로 그 목사들 대부분, 특히 총회 지도급 인사들이 그러한 자숙과 정화의 과정을 거치기를 거부했다. 다시 말해 한국 장로교 대다수 목회자들과 총회는 그가 보기에 충분한 통회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이 어떻게 다시 교회의 지도자들로 행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그러한 자들과 함께 신학교 운영이라는 멍에를 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총회와 상관없이 고려신학교를 운영하고자 했던 배후에는 그러한 판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상동과 박형룡의 “현실 인식”의 차이의 핵심은 결국 신사에 참배하고서 제대로 참회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자들을 기독교 사역에서의 동역자로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상동은 충분한 권징 없는 용납과 교회 재건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박형룡은, 권징을 행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그것은 일단 접어 두고 보수 신학 사상을 가진 교회 지도자들만이라도 동역자로 받아들여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투쟁을 위해 보수주의자들의 역량을 모으자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고신측이 계속 권징의 관철을 부르짖는다면 그 권징의 대상이 되는 총회 지도자들은 물론이요 대다수 목회자들과 결코 화합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박형룡의 관측이었다. 다시 말해, 만일 한상동이 권징 포기 불가라는 강경 입장을 고수하면서 신학교 운영에 있어 총회와의 협조를 끝내 거부한다면 양자간에 갈등과 반목의 관계 및 대결 구도가 형성되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교회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 박형룡의 전망이었다. 고신의 청빙으로 귀국한 박형룡이 서울에 며칠 머물고 있을 때 서울의 많은 목사들이 그에게 고려신학교가 “교단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던 것이나, 한부선이 고신측에는 분리의 의도가 없지만 당시의 노선을 고수하면 교회 분리로 귀결될 수도 있다고 예측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였다. 당시 한상동이 고집하던 노선은 그 본의와 상관없이 교회 분열로 귀착될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었다.

한상동과 박형룡 사이의 견해 차이는 당시의 신학교 재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다. 그 대립은 기존 고신 학생들과 박형룡을 따라 서울 조선신학교에서 내려온 학생들 사이의 것이었다. 김요나에 의하면, 이 때 이미 학생들도 고려파가 총회 안에 남아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총회를 떠나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의견이 양분되어 있었다고 한다. 기존 교회를 떠나 새 교단을 창설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이미 공공연한 논란거리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기존 고신 학생들은 총회 이탈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들은 총회 잔류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1947년 고신 학우회장 선거에 출마한 두 사람, 즉 기존 고신 학생들의 대표자 윤봉기와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들의 대표 김삼대가 각각 그러한 두 입장 중 한 쪽씩을 대변하고 있었다. 김삼대는 일제 때 요시찰 인물로 찍혀 감시망을 피해 경북 청도 운문산 등지에서 4년간 기도 생활을 하면서 초량 교회와 경남 일대의 많은 성도들을 상대로 산중에서 집회를 하는 등 해방될 때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고려신학교에 입학하여 보수 노선을 충실히 따랐던 사람이었다.(108) 김요나의 진술에 따르면, 김삼대는 한상동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점차 분리주의로 기울어지고 교단과는 고립되는 방향으로 나가자 크게 우려하여 反고려파 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김삼대의 지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형무소엘 갔든 산중으로 피난갔든. . .일제 때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했다고 해서 그것을 사유로 죄인시하는 것은 진정한 성도들이 취할 행동이 못 된다. 서로 용서하고 해방된 조국에 민족 복음 사업에 열중하는 것이 우선이지 분리주의는 비신앙적이요 비성경적이다.”(109)  

신사참배한 자들을 정죄하여 그들로부터의 분리를 시도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않은 태도라는 말이었다. 학우회장 선거에서 패한 김삼대 측은 그 후에도 고신의 나아갈 길과 관련하여 “한상동의 흑백 논리”를 반대하고 총회 안에 남아 있어야 할 것을 역설했다. 그 결과 점차 그들은 박형룡과 가까워졌고(110) 그 결과 박형룡이 고신을 떠날 때 약 50명의 학생들이 그를 따라갔다.(111) 박형룡에게서 배우기 위해 고신에 내려왔던 학생들보다 더 많은 수가 떠났다는 것은 본래 고신 학생들 중에도 박형룡을 따라 상경한 이들이 15명 정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어쨌든 50 명이라는 수는 당시 고려신학교 재학생 수의 과반수에 달하는 수였다.(112) 학교 운영에 엄청난 타격이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박윤선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상경 직전 박형룡은 박윤선 교수를 만나 동행을 권유했다. 박윤선이 거절하자 박형룡은 “다른 집을 세우려는가요?”하고 불만을 표시했다.(113) 고신에 남는 것이 분리주의에 가담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의미의 말이었다. 이 때 이미 박형룡은 고신측이 새 교단을 세우려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5월 27일 박형룡이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간 후 박윤선이 고려신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독립 선교부 선교사 최의손 (William H. Chisholm), 마두원 (Dwight R. Malbury)이 교수진에 합류했다.(114)

박형룡의 이탈 직후 한부선 선교사가 정통 장로교 해외 선교위원회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박형룡이 자신이 고신을 떠나는 이유로 제시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고려파가 교회 밖에서 싸워서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려 한다. 둘째, 고려파는 신사참배 문제를 과도하게 강조함으로 다른 선의의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115) 셋째, 신학교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고 있다.(116) 세 가지 이유는 모두 한상동 목사의 행태에 관련된 것이었다. 즉 한상동의 교회론이 분리주의적이라는 것, 신사참배 죄에 대한 권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교만하고 독선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태도로 보인다는 것, 신학교의 운영이 비민주적이고 독재적이라는 것이 박형룡이 고신을 떠난 공식적인 이유였다. 허순길은 “박형룡의 글 어디에도 고려신학측이 총회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고 밝히는 내용이 없다”고 주장한다.(117) 그러나 한부선의 이 공식 보고서에 의하면 박형룡은 분명히 고신이 새 교단을 형성하려 한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박형룡의 고신 이탈의 파장

한상동을 비롯한 고신측은 박형룡 박사의 고신 이탈이 그들의 행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 파장을 충분히 예기치 못했던 것 같다. 한 마디로 한상동은 박형룡이 한국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과소평가하고 출옥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에 대한 세간의 존경을 다소 과대평가했던 것 같다. 공인된 권위를 가진 학자가 교장으로 취임한지 몇 달도 못 되어 그 학교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 집단에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박형룡의 이탈로 교계에 그러한 파문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한상동은 충격으로 일주일간 입원하기까지 했다.(118) 결과를 볼 때, 차라리 고신은 애당초 박형룡을 교장으로 초청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박형룡의 고신 이탈로 고신은 인물 귀한 줄 모르는 집단이라든지, 학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교단이라는 부정적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인상은 10여 년 뒤 고신 신학의 정초를 놓고 그 대변인이자 수호자로 있었던 박윤선마저 축출함으로써 한국 교회 내에서 완전히 굳어졌다. 한국 교회가 나은 제1, 제2의 보수 신학자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 양자를 모두 놓쳐 버렸기 때문이었다.

박형룡의 고신 이탈은 결국 바로 그 무렵인 4월에 서울에서 열리고 있던 총회에 의한 고려신학교의 거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음에 분명하다. 총회의 그러한 태도는 연쇄적으로 경남노회에도 파급되어 노회 내의 反고신 세력 발호에 절호의 찬스를 주었다. 그리하여 동연 9월에 열린 경남 임시 노회는 다시 고신 인준을 취소했고 12월의 경남 제50회 정기 노회도 고신 인준 취소를 재확인했다. 김양선에 의하면, 출옥 성도들에게 가장 동정적이었던 자들조차 “신앙 노선” 문제에 관해서는 그들의 노선에 동조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이 볼 때 박형룡에 대한 출옥 성도들의 “신앙 노선 전향” 요구는 “곧 경남노회와의 분열, 나아가서는 총회와의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일제 하 출옥 성도들의 고난과 옥중 투쟁을 높이 평가하는 자들조차도 그러한 행위를 “독선” 혹은 “ 영적 교만”으로 보고 거부감을 느꼈다고 한다.(119) 한상동은 이에 대한 반발로 바로 그 제50회 경남노회에서 그러한 움직임을 주도하는 인물인 김길창의 제명을 동의했다. 제명 가능성을 두려워했던 김길창은 1949년 3월의 제51회 노회 때 제멋대로 또 하나의 노회를 자기 교회에서 소집하여 두 개의 “경남노회”를 만들어 버렸다. 이 경남노회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 총회가 개입하게 되고 그 와중에 한국 장로교 제일차 분열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편, 자신들의 조선신학교 개혁안이 무위로 끝나는 것을 목도한 신학 문제 대책 위원회는 동년 5월 20일 서울 창동교회에 모여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다음 카드인 장로회 신학교의 개교를 결정하고 이사회를 조직했다.(120) 이사회는 1948년 6월, 박형룡 박사를 임시 교장으로 세워 서울 남산에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했다. 그들은 그것에 前 평양 신학교의 계승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121) 이듬해인 1949년 4월 총회는 장로회 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승인함으로 한국 장로교 총회의 직영 신학교가 둘이 되었다. 그러나 1951년 5월 총회는 장로회 신학교와 조선신학교 두 학교의 총회 직영 결정을 모두 취소하고 몇 달 후인 동년 9월 박형룡 등의 보수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총회 신학교를 대구에 신설한다.(122)  

 

정리, 평가, 결론

박형룡의 고신 이탈 과정을 정리 요약해 보자. 고신 특사 송상석을 통한 고신측의 요청으로 박형룡은 귀국했다. 부산에 내려가기 전 서울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박형룡은 여러 보수적 목사들로부터 중앙에 소재한 보수적 신학교의 필요성에 대한 요청과 함께 총회 관할권 밖의 고려신학교가 교회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박형룡은 하부를 주저하고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박형룡을 만나러 서울에 올라온 한상동에게 박형룡은 자신이 하부를 망설이는 이유를 털어 놓았다. 내용은 참회와 자숙이 없는 무리라는 이유로 총회와의 협조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운영할 때 결국 그들과 감정적으로 대립하여 신학교 운영도 어려울 뿐 아니라 대립이 지속되면 교회가 분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우려 표명에 대해 한상동은 고신이 한국 교회의 “혁명”을 위해 생긴 학교이므로 그 점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 선이라 선언하면서 그러한 절대적 명제를 염두에 두고 고신 부임을 결정하라고 일갈하고 하부해 버린다. 기왕에 고신의 요청으로 귀국했고 또 당장 서울에서 일할 신학교도 없는 상태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던 박형룡은 다소 내키지 않는 상태에서 일단 하부한다. 한상동은 박형룡의 하부를 자신의 지론에 대한 수용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 즉 권징 양보 불가 노선, 그리고 그로 인해 교회 분열이 생기더라도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신념에 동의하게 된 것으로 이해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부한 박형룡은 교장직을 수락하기 전에 다시 한상동에게 조건을 제시한다. 그것은 조만간 고신을 총회 인준 신학교로 승격시킨다는 것 (그리고 주한 4대 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만주에서 부산까지 내려온 과거의 스승의 요청을 정면으로 거부하기 곤란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박형룡이 총회 신학교로의 승격을 시도할 시점을 정확히 밝히지 않은 이상 그것은 언제 있게 될지 모르는 막연한 미래의 일이므로 당장 예민하게 반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는지 한상동은 그 조건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었다고 생각한 박형룡은 고신 교장으로 취임한다. 고신에서의 봉사 초기부터 박형룡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고신의 총회 직영 신학교 승격이라는 구상을 진척시키기 위한 의욕적인 행보에 착수한다. 우선 경남노회에서 그 구상을 밝히고 노회의 협조를 확보한다. 한상동도 그러한 박교장의 열성에 제동을 걸지 않고 동의하는 외양을 보인다. 그러한 평화는 교장 취임 일인 1947년 10월 중순에서 아마도 그해 연말 내지 이듬해 초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이듬해 초가 되면서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한상동은 박형룡의 교장 수락 조건과 관련한 자신의 합의를 번복하기 시작한다. 결국 갈등은 원점으로 돌아가 서로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기 위한 설득을 시도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허순길의 주장에 의하면 여기서 박형룡이 고신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김양선은 여기서 한 가지 언급이 더 있었다고 주장한다. 논란 끝에 한상동은 박형룡에게 자숙하지 않는 총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총회를 만들자는 결정적인 복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과연 이 때 한상동이 실제로 “총회 신설론”까지 거론했는지 직접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박형룡으로서는 한상동이 자신에게 “구총회에 집착말고 신총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학기가 시작되어 한참 진행 중이었을 4월 초 박형룡은 이사회에 고신 교장직 사임 의사를 전달하고 무려 삼 주간 학교를 비우고 서울에 올라가 서울의 보수파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중앙에 보수 신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을 추진한다. 4월 말 서울에서 열린 제34차 총회에 참석한 박형룡은 총회가 고신에 대한 부정을 결의하는 것을 지켜 보고 즉시 하부하여 다시 한번 자신의 사임 의사를 최종적으로 밝힌다. 그러면 과연 고신측은 박형룡에게 기존 총회 이탈과 새 총회 설립을 권유했을까? 즉 박형룡이 고신을 떠난 것은 과연 한상동이 그에게 교단 신설을 제의했기 때문이었는가? 설령 그러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극히 은밀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직접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우리는 간접적 증거를 가지고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앞의 진술들을 토대로 다시 한번 가부 간의 가능성을 종합해 보자. 먼저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들을 정리해 보면,

(1) 1947년 당시 한상동이 새 교단 창설을 꿈꾸기에는 지지 세력이 너무 약했다는 것이다. 신학교를 설립한지 불과 1년 남짓 지난 시점에 경남노회 안에서조차 고신에 대한 인가와 취소가 서너번씩이나 반전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직 학교가 안정 궤도에 올랐던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교단 창설을 꿈꾸는 무모한 일을 했을 가능성은 적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2) 당시 뿐 아니라 그 전후로 한상동과 한부선은, “필요하다면,” “최종적으로” 분열할 수도 있다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분열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여러번 공언했다.

(3) 1946년 말 진주에서 열렸던 제48회 경남노회의 결정에 대한 반발로 1947년 초 경남 전역에서 평신도들과 일선 교회들이 한상동을 비롯한 출옥 성도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을 때 후에 재건파를 이루게 될 최덕지 같은 과격한 인물들이 한상동에게 기존 경남노회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했으나 한상동은 그것에 불응했다.  

한편 한상동이 박형룡에게 교회 이탈과 새 교회 창설을 제안했을 가능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무엇보다도 박형룡 자신이 고신측의 분리 움직임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그가 고신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공언한 첫번째 사실은, 고신이 총회에서 분리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 박윤선을 만나 고신에 남는 것은 교회 분리에 동참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형룡 정도의 인물이 그러한 말을 근거없이 함부로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가 고신을 떠난 2년 반 후인 1950년 8월 한국 전쟁 중 한상동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초량교회에서 열린 피난민 교역자 수련회에서도 그는 같은 관점을 스스럼 없이 표현하고 있다. 부산에 피난와 있던 수 백명의 목사들과 피난민들 앞에서 행한 “은사의 마음과 선지자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그의 설교 내용 중에는 고신측이 총회 울타리를 뛰쳐 나가려는 태도를 가진 집단이라는 것을 기정 사실로 여기는 부분들이 발견된다. 이 설교를 통해 그는 현실 교회에 대한 실망에서 기성 교회를 이미 떠나 자기들끼리 교회를 구성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진 재건파나 복구파 뿐 아니라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출옥 성도들의 분리주의적 멘탈리티를 경계하고 있다. 그 속에는 박형룡이 본 고려파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자주 나오는데 그것은 “교회 안의 교회”를 구성하고자 하는 집단 아니면 분리주의자들이다.  

수난 성도들 중에 어떤 이들은 교회 안에 남아 [있지만] 교회 안에 부패한 일이 많고 자기들이 부르짖는 회개와 신앙 정화에 반항으로 나오는 자 많음을 분개하여 뜻맞는 사람끼리 모이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입산 수도하여 생활하려고는 아니하나 현실 교회를 버리고 뜻맞는 성도끼리 모여서 순수하게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123)  

박형룡은 분리주의자들에 의한 기성 교회 개혁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교회사가 보여 준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교회 역사에 나타난 사건들을 살펴 보면 울 밖에 나가 울 안에 있는 양떼들을 끌어 내는 일은 그렇게 만족할만한 결과를 못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의 모임도 시간이 흐르게 되면 역시 기성 교회와 마찬가지로 부패하게 되어 그들 사이에 또 다른 분리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현실 교회 밖으로 나가면 결국 소수의 신앙의 동지들끼리 모여 신앙 생활하게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그 그룹 자체 내에서 부패하고 변질되어 다시 분리되고 맙니다.”(124)

흔히들 분리주의자들이 기성 교회를 떠날 때는 교회 개혁을 명분으로 제시하는 것을 염두에 둔 박형룡은 만일 그들이 진정 교회를 사랑한다면 남아서 그것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진정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를 슬퍼한다면 교회 안에 남아 있어” 그것을 막는 데 충성을 다하며 교회로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며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교회를 이탈해 버리면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을 지키려는 세력은 더 약해져서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는 더 심해질 것이니 그들은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125) 분리를 시도하는 신자들의 또 한 가지 불평은 현실 교회가 그들을 부당하게 대한다는 것이라 지적하면서 박형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을 참으면서 외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이므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계한다.(126) 이것은 당사자인 한상동 목사의 교회에서 한상동 목사를 포함한 수 백명의 목사들 앞에서 행한 설교의 일부이다. 책임있는 위치의 사람이 확실한 근거없이 말하기는 어려운 내용들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설교에서 박형룡은 고려파에 대한 총회측의 잘못도 지적했다. “현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에 열렬한 수난 성도들”에게 “친절과 동정을 나타내 주지 못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127) 그는 현실 교회가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깨끗이 살기를 애쓰는” 고려파를 “잘 포용하여 함께 노력하여야” 한국 장로교회의 “부패와 속화를 막고 부흥”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128) 고려파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는 기성 교회 지도자들을 달래는 박형룡의 중재적 발언 속에서 우리는 당시 한국 장로교의 주류가 고려파 지도자들에 대해 어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고려파가 너무 “뾰죽하고 고집스러우며 과격하여 손을 잡기 어려우며 겸손치 아니하여 같이 일하기가 어렵다”고 불평했다. 박형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려파를 이해하고 거부하지 말 것을 간절히 권고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우던 성도들이니만큼 그들에겐 그게 자연스러운 특성인 것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장로교 주류의 지도자들은 고려파를 “포용하여 결코 버리지” 말아야 하며 그들을 “섭섭하게 하여 떠나보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29) 결론적으로 박형룡은 고려파는 현실 교회를 떠나려 하지 말고 현실 교회는 고려파를 떠나보내지 말라고 권고했다.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민족 간의 전쟁이 일어나 교회의 존폐가 걸려 있는 마당에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져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130) 이 설교에서 기정사실로 공공연히 전제되고 있는 것들 중 하나는 고려파가 분리주의적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듬해 총회에 의해 경남노회 대표권을 박탈당한 고신측이 독자적 교단 창설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판단한 박형룡은 1951년 12월 25일 고신측 지도자들을 향해 “출옥한 지도자들이여, 우리 교회 전체의 회개의 지연함에 불만하여 당파를 이루어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것이 바른 일이겠습니까?”고 하여 고신의 이탈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131)

이런 관점을 가진 박형룡은 후일 고려파의 분열에 대해 최소한 양비론적 태도를 취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총회측은 고려파를 거부했고 고려파는 총회를 뛰쳐나가려 했기 때문에 두 조건이 맞아 떨어져 결국 장로교 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박형룡에게서 발견되는 이런 양비론적 시각은 김양선에게서도 나타난다. “출옥 성도들의 현실 교회에 대한 염원은 참된 통회이고 현실 교회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주님의 마음과 같은 넓은 아량과 관용이다.”(132)

(2) 김양선은 분명 한상동이 박형룡에게 총회 신설론을 제시했다고 강조한다. 김양선의 저서 《한국 기독교 해방 십년사》를 주의깊게 읽은 독자들은 그가 신사참배한 지도자들과 신학적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총회의 교권주의자들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진 반면 출옥 성도들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133) 한 마디로 그는 자유주의 신학과 신사참배자들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보수 성향의, 그리고 상당히 공정한 시각을 가진 사가라는 것이다. 실제 그는 《한국 기독교 해방 십년사》에서 총회의 고신 축출을 한국 장로교 70년 역사상 가장 심한 교권의 횡포라고 기술한 바람에 후일 총회의 징계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저서가 총회의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신사참배 반대자들과 보수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인 사가가 보수적 출옥 성도의 대표인 고신측을 근거없이 음해하는 글을 썼을 가능성은 아주 적어 보인다.

(3) 한상동이 박형룡에게 총회 신설론을 제시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947년 11월 한부선이 아내에게 쓴 편지이다. 당시 한상동은 박형룡과 한부선이 임석한 자리에서, 김길창 측이 고신측을 잘라내 주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신측이 새 노회를 조직할 수 있고 그 경우 사람들은 새 노회로 몰려들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4) 또 한 가지는 박형룡의 고신 재직 당시 고신 학생들 사이에 이미 교단 이탈이냐 잔류냐의 논쟁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삼대 같은 당시의 대표격 학생은 한상동이 신사참배 경력자들을 죄인시하여 그들과 격리하고자 하는 분리주의적 태도를 가진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고신 지도자들 사이에 그러한 논의가 없었다면 학생들이 그러한 문제를 논쟁의 소재로 삼았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할 것이다.

(5) 박형룡이 고신으로 부임하자 전 조선신학교 학생 30여명을 인솔하여 고신으로 전학하여 고신에서 공부하던 정규오도 “신앙 노선 전향” 운운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당시 박박사와 한목사 사이에는 “한국 교회의 장래 설계”에 대해 견해 차이가 있었고 박형룡은 “심지어 신사참배를 한 기성 교회와는 결별을 권고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134)

(6) 김요나도 동일한 진술을 한다. 당시 박형룡은 “제자들인 박윤선, 송상석, 한상동 등 쟁쟁한 고려파 핵심 요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분립을 반대하였고 총회에 그냥 남아 있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식은 완전히 굳어져 있어 요지부동이었다.”(135)

(7) 또 하나 중요한 증거가 있다. 남영환은 자신의 책에서 박형룡의 고신 이탈에 관한 대목에 이르러 어떤 이유 때문인지 독자적인 서술을 하지 않고 김양선의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의 내용들을 무려 4페이지 (150-53 전문)에 걸쳐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것을 전재함으로써 그 사건에 대한 진술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최소한 그가 그 문제에 대한 김양선의 서술을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한상동이 최종적으로 박형룡에게 신앙 노선 전향을 요구했다는 부분은 옮겨 적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려신학교 개교 후에도 한상동측이 “박형룡 박사에게 제안하였던 ‘구총회를 유지할 생각 말고 신기치를 들자’던 의견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는 김양선의 진술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136) “총회 신설론”에 대한 김양선의 진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8) 당시 뿐 아니라 그 전후로 한상동과 한부선은, 자신들이 분열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 공언했지만 그 때마다 “필요하다면,” “최종적으로” 분열할 수도 있다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분열에 대한 생각이 항상 마음 속에 잠재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9) 자기보다 더 약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던 최덕지 등의 재건파가 독자적 교단을 만들어 나갔던 것을 보면서 한상동은 자신이 독자적 교단을 만드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1947년 초 경남 67개 일선 교회들과 평신도들의 자신에 대한 지지 선언을 목격한 한상동으로서는 경남에서 자신을 따르는 세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형룡이 고신에 영입됨으로써 1947년 12월의 경남노회가 고신에 대한 승인을 회복해 주었고 결과적으로 고신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그런 상황에 고무되어 그는 독자적 교단 형성의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137)

(10) 해방 전 경남 지역에서 한상동이 신사참배 반대 운동과 신사 불참배자들로 이루어진 노회 조직 운동을 시작한 사실,(138) 그 직후 주기철 목사를 만나 새 교회를 만들자고 제안한 성향을 볼 때, 그리고 신사참배한 교회가 여전히 참회와 자숙을 거부함으로 일제 말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고 보였을 때 그가 새 총회 창설을 꿈꾸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설사 한상동이 박형룡에게 노골적인 총회 신설론을 발설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박형룡은 고신의 노선이 필연적으로 교회 분열로 이어질 것으로 파악했던 것 같다. 한상동이 철저한 자숙을 이행하지 않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계속적으로 참회를 외치면서 출옥성도들이 제안한 방식대로의 “자숙”을 요구하는 한편 신학교 운영에 있어 그들과의 동역을 계속 거부할 경우 장로교회 지도자들이 반발하리라는 사실을 박형룡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139) 실제로 해방 직후 박형룡은 그러한 반발을 손수 체험한 적이 있었다. 평북 선천에서 교회재건 기본원칙을 발표했을 때 홍택기 목사 같은 이들은 그를 “도피자”라고 역공했다. 목회자들을 위한 전주 집회에서 그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촉구했을 때 많은 목사들은 그가 그것을 너무 강조하면 사람들이 그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 경고하기도 했었다.(140) 이러한 경험을 가진 박형룡은 이미 원숙한 연륜의 학자로서 고신측이 계속 신사참배 범과에 대한 권징 주장을 계속하고 장로교회 지도자들이 그것을 계속 거부할 경우 고신측과 총회가 대결 구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될 것임을 내다볼 수 있었다. 고신측이 총회 울타리 밖의 신학교를 고집할 때 총회도 고려신학교를 부정하게 될 것이고 그 경우 결과는 그에게 자명해 보였을 것이다. 고신의 勢가 아주 약할 경우라면 총회에 의한 고신의 枯死가 될 것이요, 고신 지지세가 상당한 경우라면 총회가 신학교와 그 지지 집단을 축출하든지 아니면 그 학교와 그 지지 집단이 스스로 총회 밖으로 뛰쳐나가게 되든지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어느 경우든 박형룡은, 총회를 불신하고 그 지도자들의 자숙을 관철하려는 출옥성도들에 의한 독립 신학교 운영은 결국 교단 분열로 귀결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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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박윤선, “고신 초창기와 나,” <월간 고신> 1986 9, 17.

(2)남영환, 한국 교회와 교단, 1988, 소망사, 322.

(3)남영환, 322; 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1996, 69.

(4)남영환, 322.

(5)김양선, 한국 기독교 해방 1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56, 155.

(6)서영일, 박윤선의 개혁 신학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230.

(7)남영환, 322.

(8)김양선,《한국 기독교 해방 1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56. 149-165; 김요나, 《총신 90년사: 1901-1991, 도서출판 양문,1991, 313-23 ; 정규오,《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 장로교회사》, 한국복음문서협회, 1983; 남영환,《한국교회와 교단: 고신 교단사를 중심으로》, 소망사, 1988, 300-350; 허순길,《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1946-96,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1996. 34-84를 보라.

(9)주로 세 가지가 지적된다. 첫째는 신학교와 총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박형룡은 총회 관할 하에서 전국 장로 교회를 발판으로 하여 신학교를 운영하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한상동은 총회와 상관없이 오직 경남노회를 상대로 독립적인 신학교를 운영하자는 입장이었다. 둘째는 첫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요소로서 신학교의 소재에 대한 것이었다. 박형룡은 전국 장로교회를 포괄하는 신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학교 위치를 중앙인 수도 서울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상동은 신학교가 부산에 소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셋째는 주한 외국 선교부와의 협력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박형룡은 전통적으로 한국 장로교회와 교류해 오던 주한 4대 장로교 선교부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의 지원 하에 신학교를 운영하자는 입장이었고 한상동은 단지 미국 정통 장로교 선교부 내지 독립 선교부와만 협력하면서 신학교를 운영하자는 입장이었다..김양선,《한국 기독교 해방 1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교교육부, 1956. 149-165; 김요나, 《총신 90년사: 1901-1991, 도서출판 양문,1991, 313-23 ; 정규오,《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 장로교회사》, 한국복음문서협회, 1983; 남영환,《한국교회와 교단: 고신교단사를 중심으로》, 소망사, 1988, 300-350; 허순길,《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1946-96, 고려신학대학원 출판부, 1996. 34-84를 보라.

(10)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1946-96, 62.

(11)해방 후 평양 감옥에서 출옥했던 성도 20여명은 한국 교회 재건에 관한 제반 문제를 논의한 후. 한국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아래와 같이 발표한 바 있었다. 1. 교회 지도자 (목사 및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2. 권징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케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12)남영환, 305. 당시 교장은 정상인 목사, 총무는 계일승 목사, 교감은 안광국 목사였다.

(13)1947 10 2. 한부선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허순길은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48, 각주 58에서, 한상동의 과격한 표현을 완화하기 위해서인지, 한부선의 이 편지 속에 있는 "revolution"이라는 단어를 “대개혁”이라고 번역했다. 한편 송상석이 목사가 되기 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설들이 있다. 혹은 일제 하에서 순사 생활을 한 자로서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룬 바가 없으나 해방 후 고려측에 적극 가담했다 하고 (정규오, 104), 혹은 193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29)하고 이북에서 목회를 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목회를 중지하고 과수원을 경영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김요나, 《총신 90년사》, 316.  

(15)1947 10 31, 한부선이 미정통장로교회 해외 선교위원회로 보낸 편지, Harvie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Korean Presbyterian Church,"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967), 146.

(16)김요나, 《총신 90년사》, 316.

(17)김요나, 《총신 90년사》, 316-17

(18)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1946-9648. 

(19) 1947 10 2. 한부선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허순길은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48, 각주 58에서, 한상동의 과격한 표현을 완화하기 위해서인지, 한부선의 이 편지 속에 있는 "revolution"이라는 단어를 “대개혁”이라고 번역했다. 한편 한상동과 자신을 지칭하여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고 있는 이 편지는 한부선 선교사 측과 한상동 목사측의 유대가 얼마나 강했으며 그들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비교할 때 박형룡 박사의 존재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20)Ibid.

(21)그러한 태도는 삼사 년 후 기존 대한 예장에서 축출되어 별도의 교단을 형성하게 될 때 발회식 취지문에서 밝힌 바, 기존 예장에 대한 고신측의 그 간의 태도가 그것을 “장중 보옥”처럼 여겼다는 말과는 별로 조화되지 않는다

(22정규오, 《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장로교회사》 (I), 73. 

(23)김양선, 227. 김요나, 90년사, 317.  

(24)남영환, 313. 

(25)김요나, 90년사,316.  

(26)박윤선, “고신 초창기와 나, <월간고신> 1986 9: 19.  

(27)남영환, 313. 

(28)김양선, 153. 남영환, 313. 장동민은 박형룡이 고신측으로부터 이러한 동의를 얻어 낸 것은 부산에 내려가기 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346). 그러나 아마도 부산에 도착한 직후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김양선의 진술이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29)남영환, 309-310, 314; 허순길, 50년사, 52-55.  

(30)만일 이 때 그러한 조건들에 한상동 목사가 합의한 것이 사실이라면 얼마 후 한상동 목사가 그러한 조건들의 이행을 거부한 것은 약속 위반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31)Hunt's Letter to Marsden, Oct. 31, 1947. 이들 51인의 조선신학교 학생들은 송상석 목사 편에 박형룡 박사의 귀국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32)1947 11 17, 한부선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This morning I went to see Han and Dr. Park. Presbytery is to meet next month. 김길창 and his crowd are talking of disciplining the Seminary faction, . . .He says for himself, he thinks that if the other side would discipline the Seminary group it would be a good thing, for then we'd form a new Presbytery and he thinks the common people would flock to the banner. I'm not sure it's that easy. . . .  

(33)허순길, 50년사, 62. 

(34)이 사실을 보면 경남노회 안에 신사참배가 큰 죄였다는 인식을 가진 지도자들이 상당수, 때로는 다수파로 존재했으며 따라서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한 김길창 등의 입지가 그리 넓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에 굴복은 했었으나 그것을 회개하고 자숙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온건파들이 경남노회의 다수를 이루었던 것 같다 

(35)경남 제49회 정기노회록. 남영환, 323. 

(36)김양선, 154. 

(37)Ibid., 153-54. 여기서 교회 재건 방안이란 물론, 출옥 성도들이 만든 교회 재건 기본 원칙들 속에 명시된 바, 신사참배한 목사들이 자숙안을 철저히 준행한다는 조건 하에 목사직에 복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8)Ibid., 153.  

(39)Ibid, 한상동 목사가 노회 탈퇴를 취소하자 최덕지를 중심한 과격파들은 그를 타협주의자로 몰아세우면서 “재건파”라는 분리주의 교회의 설립을 완성했다. 재건파는 당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하나님께 범죄한 구예배당에는 하나님이 떠나시고 안 계시니 예배당을 불태워 없애야 한다 (그들은 실제로 몇몇 교회 예배당을 불태웠다). 2. 현실 교인들은 동참죄를 범하고 있으니 인사를 하지 말라. 부부 간은 갈라서야 한다. 부모 형제라도 절연하라. 3.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만일 인사를 했거나 말을 했으면 입을 씻어 내어야 하고 상당 기간 자숙해야 한다. 남영환, 308-9.  

(40)박윤선, “고신 초창기와 나, <월간 고신> 1986 9, 19. 

(41)김양선, 154. 김양선은 이 부분에 대한 진술에서 메첸파 선교사들에 대해 “독선적”이라거나 “비협동적”이라는 묘사를 사용하면서 그들에 대해 강한 부정적 인식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42)Ibid., 그러나 간하배는 한부선이 미 주류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협조적이었다는 증거들을 제시한다 

(43)이 부분은 박응규, 『한부선 평전』에 많이 의존한다. 

(44)이것은 얼마 후 정통장로교회 (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명칭을 바꾸었다 

(45)새 교단에 대한 그의 그러한 충성이 인정을 받은 결과 후일 그가 1957년에 다시 미국으로 가서 안식년을 보낼 때 그는 미 정통장로교회의 총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46)주남선, 한상동, “대한예수교 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 <고신교회 역사 자료집> vol. 6. 고려신학대학원 도서관 편, 3-4. 한부선은 만주에서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던 한인 70여명과 함께 투옥되었고 그 중 네 명은 결국 순교했다. 

(47)Bruce Hunt, "Korean Martyrs: Part II," Reformed Bulletin of Missions (Dec. 1968): 11. 박응규, 한부선 평전, 286에서 재인용 

(48)A Presbyterian Covenant," Translated by Bruce Hunt. Presbyterian Guardian (Jan. 1943) 19-25; (Feb. 1943), 37-40. 최덕성, 《장로교인 언약과 바르멘 선언》 (본문과 현장 사이, 2000), 81. 

(49)“장로교인 언약,” 최덕성, 《장로교인 언약과 바르멘 선언》 (본문과 현장 사이, 2000), 77-78. 

(50)Letter to Marsden, Oct. 5, 1945. 

(51)Letter to Hunt, Sep. 20, 1946.  

(52)Letter to Marsden, Nov. 7, 1946.  

(53)서영일, 박윤선의 개혁 신학 연구, 219.  

(54)1946 11 18, 한부선이 말스덴에게 보낸 편지. 한부선이 그 해 11 7일에 말스덴에게 보낸 편지도 참조하라 

(55)Bruce F. Hunt, "Report from Korea," The Messenger (미정통장로교회의 선교사 정기간행물), 1947 2, p. 2-3. Conn, "Studie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43에서 재인용. 

(56)특기할 사실은, 당시 미국에 있는 정통 장로교회도 기존 한국 장로교회에 대해 한부선과 동일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미정통장로교 선교 본부는 한부선 등 자기들의 재한 선교사들에게 기존 한국 장로교회로부터 분리하라고 지시했다.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한 미정통장로교 해외 선교부는 “소속 선교사들이 한국 장로교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그들이 예전에 활동했던 선교지의 조직이나 단체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도록 권고했다. Hunt's personal annual report on Aug. 1939, 2.  

(57)1942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해체되었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1회를 계승한 것이었다. 남북 통일의 희망은 점점 묘연해지고 북한의 교역자와 신자들이 다수 월남했기 때문에 남한에서만이라도 총회를 재건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의 결과였다 

(58)주남선, 한상동, “대한예수교 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 <고신교회 역사 자료집> vol. 6. 고려신학대학원 도서관 편, 4.  

(59)여기에 대해 자신이 스스로 노회에 제명을 요청했기 때문에 노회가 그것을 받아들여 그를 제명해 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한부선은 신사참배에 굴복한 노회에 소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 있다. 

(60)Conn, "Studie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53-54. 각주 49.  

(61)김양선, 163.  

(62)The Christian Beacon, 1959. 4. 16. 장동민, 384에서 재인용 

(63)정통장로교가 수립된 미장로교 분열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술하고 있다. 

(64)이상규, “함일돈의 생애와 선교 사역,” 고신대학교 부설 기독교 사상 연구소, 기독교 사상 연구, 도서출판 영문, 1996, 105-113.  

(65)간하배의 표현에 의하면, 한상동과 한부선 사이에는 “기질적”으로 그리고 “신학적 확신”에 있어 큰 유사성이 있었다. Conn, "Studies," 154. 

(66)Conn, 154.  

(67)출옥 성도들이 “신학 교육”에 대해 메첸파 선교사들의 “보수적 견해”를 박형룡의 “개방적” 견해보다 선호했다는 김양선의 표현은 다소 애매하지만 “개방적”이라거나 “보수적”이라는 표현이 신학 사상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외국 선교부와의 협력에 관한 것이라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바로 앞, 즉 해방 후 십년사 153쪽에서 김양선은 박형룡이 “메첸파의 신학 사상을 가장 건전한 것으로 인정”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형룡도 메첸파 못지 않게 신학 사상 면에서는 보수적이었다는 말이다 

(68)김양선, 154.  

(69)김양선, 154-55. 김양선은 박형룡의 “신앙 노선”을 “현 총회 및 4선교회지지론”이라 요약하고 고신파의 신앙 노선은 “현총회를 떠나 성자들만의 신총회를 설립하자는 것”으로 그것은 “메첸파 선교사들의 독선적 신앙 태도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고 정의한다. 만일 김양선의 진단이 정확한 것이라면 한국 장로교에 미친 미국 교회의 존재의 영향이 그처럼 지대했다는 말이 된다

(70)정규오, 106.  

(71)김요나, 총신 90년사, 322. 

(72)허순길, 신대원 50년사, 62-63. 그렇다면 과연 고신에 그러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진술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질문은 제기될 수 있다. 공식적 토론을 통한 결정 과정은 없었지만 고신 구성원들이 모두 묵시적 동의 하에 교단 신설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73)한부선이 1948 6 6일 정통장로교 선교위원회에 보낸 편지, Harvie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Korean Presbyterian Church,"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967), 152,  

(74)Conn, 149.  

(75)김양선, 228. 김요나는 서울의 보수파 목사들이 “고려파 운동 소식을 듣고 크게 우려”하여 박형룡에게 “하루라도 속히 상경해서 서울에 신학교를 세워야 함을 간청했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고려파가 총회로부터 이탈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려한 것 같다. 322.  

(76)남영환, 310.  

(77)김양선, 154. 박형룡이 정확히 언제 고신을 사임했는가 하는 시기 문제가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의 사임이 고신에 대한 제34회 장로교 총회의 거부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의 사임이 총회 전에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총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많고 그 후에 있었다면 적어도 총회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점에 관한 사가들의 진술이 엇갈린다. 김양선은 1948년 총회 무렵에는 “박형룡이 이미 고려신학교를 떠난 때”였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총회 역시 고려신학교의 “독선적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양선, 156). 한부선 선교사는 자기 아내에게 보낸 4 25일자 편지에서 박박사의 사면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 말은 그 전에 이미 박형룡이 고신에 사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5 25일자로 선교 본부에 보낸 편지에서는 “박박사가 결국 지난 주에 사표를 제출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임을 두 번했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공식적 사표 수락이 총회 후에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가 학교에 실질적으로 사표를 제출한 것은 아마 늦어도 4월 초순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표를 제출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책임있는 교장이 4월 한 달 내내 거의 학교에서 근무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4월 한 달간 고신 이사회는 박형룡의 사표를 즉시 수락하지 않고 그에게 재고를 요청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볼 때 4월 이전에 이미 박형룡이 고신을 떠날 결심을 굳혔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는 4월 초부터 서울에 올라가 서울의 보수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새로운 보수 신학교 설립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던 것 같다. 그는 4 20일부터 열린 제34차 총회에 참석하여 총회가 고신을 부정하는 것을 목격한 후 부산으로 내려가 자신의 사임을 재확인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고신 사임 소식은 이미 4월 초부터 서울 교계에 알려졌을 것이고 그러한 소식이 총회의 고신 거부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78)이것은 허순길 50년사, 50-64, 남영환, 309-317에 나타나 있다 

(79)심군식, 《세상 끝 날까지》, 소망사, 1977, 303-305 

(80)김영재, 한국교회사,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2, 251.  

(81)그 때에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생들이 과연 미장로교에서 안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으나 메이첸은 그 길을 고수했다. 결국 개교 6 년 후인 1935년 메이쳔이 정통장로교회라는 독립된 교단을 창설함으로써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생들이 미장로교에서 안수받을 필요 자체가 없어졌다 

(82)박윤선이 메이첸에게 보낸 편지, 1936. 7. 14. 미국 유학의 첫 경험은 학생들에게 대개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그 학교가 유명한 학교이고 가르치는 교수들이 대가로 알려진 사람들이면 더욱 그러하다. 박윤선도 순진한 학생으로서 선생들을 무조건 존경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그는 메이첸을 절대적으로 존경했고 거의 맹목적으로 숭배했다. 어느 다과회 석상에서 한 노교수는 “박윤선씨는 예수님과 또 메이첸을 믿는 듯합니다.”고 말했는데 박윤선은 그 교수가 자기 심정을 “잘 이해했다”고 말했다. 1936 9 3일 메이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메이첸의 가르침을 정확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고린도후서 주석을 쓰면서 메이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나는 해석 방법에서 유일한 참된 방법이라 믿는 바 당신이 가르쳐 주신 방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의 성경 해석 강의 시간에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이 내 영혼 속에 살아 있습니다”고 말했다. 

(83)박윤선, “신학 연구에 바친 생애, 39.  

(84)그러나 특기할만한 사실은, 다른 많은 한국 장로교회들과 미국 선교사들의 관계와는 달리, 고려파의 경우 OPC로부터 받은 원조는 무시할만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Bong Rin Ro "Division and Reunion in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1959-68," Concordia Theological Seminary, 미출판 Ph.D. 논문, p. 167. 사실 지극히 작은 교단인 미국 OPC는 줄래야 줄 돈이 없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말해서 지갑에 돈이 없습니다. Letter to Marsden, Nov. 18, 1946. 게다가 한부선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재정으로 돕는 것을 반대했다. “신학교가 [외국] 보조금에 맛을 들인다면. . .지도자들은 자연히 기대는 습관이 생길 것입니다. Letter to Marsden, Jun. 28, 1947.  

(85)그러나 정통 장로교회와 한부선이 고려신학교 설립이나 운영 자체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혹자는 정통 장로교 선교사들 “몇 사람이 한국 교회와 그 지도자들과 함세하여 [고려] 성경 학원과 [고려] 신학교를 설립했다.”고 쓰고 있다. 민경배도 《한국기독교회사》 1982, p. 456에서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고려신학교가 개교한 것은 1946 9월이었고 한부선이 한국에 도착한 것은 10월 말이었다. 

(86)공교롭게도 남한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지도자들이 대부분 경남 출신이었다. 주남선은 거창, 주기철은 웅천, 한상동은 부산, 이인재는 밀양, 조수옥은 하동, 최덕지는 통영이 고향이었다 

(87)박윤선, “고 주남선 목사 옥고기, <파숫군> 15, 22-23. 

(88)허순길, 50년사, 52.  

(89)박형룡, “사도적 신학 소론” 박형룡 전집13: 216-231.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8. 

(90)사실 한상동은 박형룡이 고신에 와서 그러한 제안을 하기 전부터 신학교가 부산에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한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1947 8 12, 보수 신학교가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서울의 지도급 보수주의 목사들의 견해를 대변하여 김치선 박사가 부산에 내려왔다. 그는 박윤선과 함께 한상동을 찾아가 밤 1시까지 고려신학교를 서울로 옮기자고 설득했으나 한상동은 끝내 그 제안을 거부했다. 이것은 신학교의 부산 소재에 대한 한상동의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보여 준다. 한부선이 1947 8 13일에 부인에게 쓴 편지, 허순길 50년사, 47쪽 각주 57에서 재인용 

(91)남영환, <한국 교회와 교단>, 310. 허순길, 50년사, 55.  

(92)허순길, 50년사, 56.  

(93)남영환, 322.  

(94)허순길, 50년사, 56.  

(95)고신 사가들은 박형룡의 고신 이탈을 심하게 비판한다. “한국 교회의 개혁과 재건을 위해 싸우는 진리 운동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것이다. 혹은 그가 권력욕이나 개인적 야심 때문에 고신을 떠났다고 폄하한다. 허순길, 신대원 50년사, 62. 

(96)한부선에 의하면,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박형룡이 한상동과 한부선보다 더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한부선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47 9 30일과 1948 5 1일자.

(97)정규오, 74.  

(98)허순길, 50년사, 56-57.  

(99)당시 주한 미남북 장로교 선교사들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에 대해서는 허순길과 장동민의 견해가 완전 상충된다. 허순길은 박형룡 박사가 그 때 해방 후 한국에 처음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전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도 일제에 의해 추방된 후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 에큐메니칼 정신에 젖어 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50년사, 59). 그러나 그렇게 단정하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장동민이 지적하듯, “내한한 젊은 선교사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해방 직후 박형룡이 서울에 올라갈 당시 선교사들이 자유주의자들이었다고 생각할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장동민은 박형룡의 포괄주의에 이해할만한 요소들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 본국의 북장로교 선교부와 상관 없이 해방 후 다시 내한한 주한 남북 장로교 선교사들은 해방 전부터 한국에서 사역하던 자들로 보수적인 신학 사상의 소유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자신들이 일하던 학교들의 폐쇄와 한국으로부터의 강제 추방까지 감수했던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1년 총회 신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교수로 부임한 선교사들을 보면, 교장 감부열 (Archibald Campbell, 1890-1977)은 북장로교 선교사로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출국당했다가 1947년에 내한했는데 박형룡과 절친한 관계였고, 인돈 (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은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그가 교장으로 있던 전주 신흥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조하파 (Joseph Hopper, 1892-1971)은 보수적 남장로교 선교사로 평양신학교 교수였으며, 권세열 (Francis Kinsler, 1904-?)도 해방 전부터 평양에서 일하던 선교사로 해방 후 내한했다. 장동민은 박형룡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에큐메니칼 논쟁 때부터였다고 한다. 352-54.  

(100)한상동, “현하 대한 교회에, <파수군> 2, 1949. 4, 20 

(101)한상동, “현하 대한 교회에, <파수군> 2, 1949. 4 18 

(102)남영환, 310. 

(103)“한상동 목사 옥중기, <파숫군> 29 (1953 6), 22.  

(104)한상동, “현하 대한 교회에, <파수군> 2, 1949. 4 18 

(105)Ibid., 17. 

(106)“한상동 목사 옥중기, <파숫군> 29 (1953 6), 22.  

(107)한상동, “소위 고려파가 생기기까지, <고신학보> 창간호 1972 3, 37. 

(108)김요나, 총신 90년사, 319.  

(109)김요나, 총신 90년사, 319-20  

(110)당시 고신의 진로에 대한 학생들 사이의 의견 대립이 심각했다는 것은 선교사들의 보고서에도 나타난다. 한부선은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들”은 “교회 안의 문제에 대해 입장이 그리 선명치 못한 것 같습니다”고 쓰고 있다. “그들은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대하지만 일제 하에서 교회를 인도하여 신사참배를 하게 했으며 지금도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자들의 교권주의ecclesiasticism에 대해서는 그처럼 강하게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자들의 죄를 인정하고 있지만, 거의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교회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커다란 바램이 여기 기존 학생들의 태도와는 다소 다릅니다.1947 10 31일 한부선이 정통장로교 선교위원회에 보낸 편지 

(111)서영일, 229.  

(112)남영환, 316.  

(113)박윤선, “고신 초창기와 나, <월간 고신> 1986 9월호. 20.  

(114)서영일, 232. 김양선의 주장에 의하면, 출옥성도들은 메첸파 선교사들과 박박사 양편을 다 붙들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결국 선교사들 쪽을 선택했다. 결국 고신측은 박형룡과 메첸파 선교사들 사이의 양자택일을 해야 할 상황에서 박형룡을 버리는 대신 메첸파 선교사들을 택했다는 말이다 

(115)간하배도 “신사참배 죄 회개에 대한 고신의 강조가 너무 지나치다고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것 같았다”고 지적한다. “회개에 대한 그들의 바램이, 비록 건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온건함을 요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권징보다는 가르침과 인내가 더 요청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Conn, WTJ., vol. 30, 155.  

(116)한부선이 미정통장로교 선교부 총무 말스덴에게 보낸 편지, 1948. 5. 25.  

(117)허순길, 신대원50년사, 62쪽 각주 82.  

(118)남영환, 316.  

(119)김양선, 154-55.  

(120)박형룡의 신학교 설립을 지원한 목사들은 이정로, 권연호, 이인식, 김선주, 김광수, 계일승, 이운형, 이재형, 전인선, 김현정 등이었는데 이 중에는 일제 때 총회장을 지낸 사람이 세 명 포함되어 있다. 허순길, 65.  

(121)그러나 김요나는 박형룡을 도와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는 데 앞장선 많은 보수주의 목사들은 친일 전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주기철 목사가 옥고를 겪고 있을 때 주목사를 산정현 교회에서 파면한 노회가 임시 당회장으로 세워 주목사의 가족들을 사택에서 내어 쫒는 일을 하게 했던 이인식 목사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김요나, 《일사각오》, 서울: 한국교회 뿌리 찾기 선교회, 1992, 473. 이 때문에 장동민은 장로회 신학교 설립이 신사참배 전력을 가진 교권주의 목사들이 자신들의 과거 행적에 면죄부를 얻기 위해 채용한 수단이며 박형룡은 그들의 그러한 시도에 이용된 것이라 냉소하기도 한다. 351. 

(122)그것은 아직 합동과 통합이 나누어지기 전이었으므로 고신측을 제외한 한국 장로교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망라한 신학교였다. 현재의 총회 신학교와 장로회 신학교는 1959년 합동과 통합이 교단 분열을 일으킨 후 각각 세운 학교이므로 1951년 당시의 장로회 신학교나 총회 신학교와는 직접적인 계승 관계가 있는 기관들은 아니다 

(123)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18:199,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124)Ibid. 

(

125)Ibid. 

(126)Ibid. 199-200 

(127)Ibid. “떠날 생각”을 했다는 표현에서도 여전히 박형룡은 고려파가 능동적으로 총회를 이탈하려 했다는 투로 말하고 있다 

(128)Ibid., 200 

(129)Ibid.,  

(130)Ibid.,  

(131)김양선, 159. 

(132)김양선, 164-65. 

(133)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김양선 자신이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일제에 의해 박해받은 경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1938년의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을 때 평양 신학교 학생 장홍련이 격분하여 평양 신학교 교정에 있던 평북 노회장 김일선의 기념 식수를 도끼로 찍어 버렸다. 이 때 일경은 장홍련 뿐 아니라 박형룡 교수, 그리고 김양선, 안광국 등 다수의 학생들을 불구속 입건했었다. 김양선,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한국 기독교사 연구, 서울: 기독교문사, 1971, 33.  

(134)정규오, 106.  

(135)김요나, 321-22. 

(136)남영환, 312. 

(137)1977 9 13일 대구 서문로 교회당에서 열린 고신측 제27차 총회는 이 때를 고신 교단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고 결의했다. “진주 노회장 최연석 목사가 문의한 교단 창립 30주년 기산은 한상동 목사가 경남노회를 탈퇴 선언하고 67개 교회가 호응한 때가 창립 정신의 기준이 되므로 1946 12 3일을 교단 창립 기산일로 하도록 가결한다.” 제27(고신) 총회록, 26. 이에 앞서 1977 3 4일 “수난 성도 기념 사업회”는 제 1차 사업 계획으로 “대성회”를 개최하기로 했으며, 그 해 7 5일 총회 교육부는 “대성회”의 명칭을 한상동 목사 탈퇴 선언을 기점으로 하여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로 정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육부, 교단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 순교정신 계승하자(1977), 92. 

(138)<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 평양지방 법원, 1945. 5. 18). “제10피고 서원상동 (한상동),” “제16피고 국본주원 (이인재),”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270-72에서 재인용

(

139)김양선, 312.  

(140)남영환, 305. 한편 박형룡의 경력 자체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자신있게 강조하기에는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그는 1938년 평양 신학교의 폐교 후 1940년대 초부터 1947년 고려신학교에 부임하기까지 봉천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런데 그 학교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있었다. 물론 학교측의 배려로 박윤선과 그 자신은 거기서 열외가 될 수 있었지만 다른 모든 교수들과 신학생들은 모두 그것에 참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박형룡이 몸담고 있던 학교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공공연히 신사참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만일 그가 정말 철저히 신사참배를 죄로 여겼다면 학교를 향해서 우상숭배의 죄를 중지하라고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는 그처럼 범죄하는 학교에 남아 계속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 학교를 떠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쪽도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현실의 부패와 타협했다 할 수 있다. 그러한 경력의 소유자로서는 해방 후 신사참배자들에 대해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거나 권징을 주장하기 곤란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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