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 박용규 교수 총신대 신대원 역사신학 교수
올 해는 고려파가 1960년 예장승동측과 합동 후 1963년 다시 환원한지 정확히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변천을 했고, 양 교단은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수많은 교단으로 사분오열되어 같은 신학 노선을 걷고 있는 교단들 사이에도 왕래조차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환원 후 고려파와 합동은 과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과거사를 다루는데 있어서 뚜렷한 시각차를 노정해왔다. 특히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 과정을 서술하는 면에서 보여준 뚜렷한 시각차는 그 한 예이다. 같은 신학 노선을 걷고 있는 고신과 합동이 환원 50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 그 사건을 돌아보고 반성의 기회로 삼는 것은 시대적 사명이 아닐 수 없다.(1)

1959년 WCC 에큐메니칼 문제로 연동측과 승동측으로 분립된 후 승동측 안에서는 고려파와의 합동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신학적인 동질감이 두 교단을 묶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박형룡은 이 일에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1946년 고려신학교 설립 후 분리주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신학적 순수성을 지켜가려는 고려파와 반 W.C.C. 에큐메니컬 입장을 분명히 천명한 예장 합동의 연합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동안 W.C.C.등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어 온 장애물이 제거됨에 따라 신학적으로 입장을 같이하는 교단끼리 연합을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더구나 당시 양 교단의 시대적 상황도 합동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합동측은 통합측이 분립되어 나간 후 한동안 심리적으로 허전함과 허탈감에 젖어 있었다. 보수 세력의 강화를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재집결이 절실했다. 1959년 고려신학교에서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박윤선 목사가 떠나자 고려신학교도 난감한 상태였다. 박윤선 목사가 없는 고려신학교는 그 존재 의의를 상실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와 같은 정황 속에서 합동측 지도자들 중에서 몇몇이 사석에서 고려파와 합동하는 것이 어떠냐는 말을 한 것이 고신측 지도자에게 전달되어 그것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었다. 고신측은 1960년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부산 남교회당에서 회집된 제10회 총회에서 승동(합동)측과 합동을 추진하기로 정식 결정하고 황철도 목사 등 9명을 추진위원으로 선임했다. 1960년 제 45회 총회에서 승동측도 “신앙노선이 동일한 고려파 교회와 합동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 고신측과의 합동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노진현 정일영 양성봉 배태준 심천 양화석 이환수 김윤찬 고성모 정규오 등 합동추진위원 10명을 선정했다.(2)

I. 예장승동(예장합동)측과 고려파(고신)의 합동

고신측 위원장은 황철도 목사였고 승동측 위원장에서는 양화석 목사가 맡았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60년 10월 25일 오후 2시 합동측과 고신측의 합동 추진위원회가 충남 대전 중앙교회에서 위원 19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합동측 “합동추진위원회”의 위원장에는 양화석, 서기에 정규오, 위원으로는 고성모, 노진현, 김윤찬, 이환수, 심천, 정일영, 배태준, 양성태, 박찬목 등이었고, 고신측 “합동추진위원회” 위원장에는 황철도, 서기에 윤봉기 그리고 위원에는 한상동, 박손엽, 송상석, 추국원, 남영환, 조수환이었다.(3) 이날 양측 합동위원회의 모임은 참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1960년 11월 파수군에 실린 이날 합동위원회 회록 한 부분은 당시 분위기를 그대로 대변해준다. 

“韓尙東 盧震絃 高性模 牧師와 梁聖奉 長老로부터 過去는 一掃하고 白紙로 還元하여 合同을 하도록 하자는 感激한 人事의 말씀이 각각 有하다”(4) 

서로 낯선 사람들끼리의 연합이 아니라 이미 고락을 같이한 한 형제의 연합처럼 예장합동과 고려파 대표자들은 합동을 위해 뜻을 같이했다. 그 날 합동측 인사는 물론 고려파의 한상동, 송상석 목사를 비롯 합동위원회는 합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5)

여기서 내린 합동 결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에 명시한 12신조와 ... 칼빈주의 개혁신학에 의하여 합동할 것을 원칙으로 한다.”(6) 양측 5인씩 헌법수정위원회를 선임하여 합동을 위해 헌법을 수정하기로 결의하였다. 헌법 수정위원으로 합동측에서는 김윤찬, 고성모, 정일영, 정규오, 심용이고, 고신측에서는 황철도, 한상동, 송상석, 박손엽, 전성도가 선임되었다. 이들은 “합동에 필요한 최소한 헌법시정과 규칙을 작성하여 총회에 제안”하는 임무를 맡았다. 신학교는 총회 직영의 단일 신학교로 하고 이사는 동수로 선출하여 경영케 한다는 것이다.

이날 모임에서 양측 위원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합동을 위해 의견을 교환하고 힘을 모았는가는 회의록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1960년 10월 25일 하오 2시 대전 중앙교회당에서 예장(승동)측과 고신측 합동위원회가 개회 예배를 드렸다. 고신측 합동위원장 황철도 목사 사회하에 묵상기도, 시편1편을 낭독, 기원하고, 찬송가 18장(32장)을 합창하고, 고성모 목사가 기도하고, 성경 엡4:1-6까지를 양화석 목사로 봉독하고, 성령으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것을 권면하고 기도한 후, 찬송가 456장을 합창하고, 송상석 목사가 기도한 후 예배회를 필했다.(7)

이어 사무 처리에 들어가기 전 양측 위원들이 인사를 교환했다. 양측 인사위원은 예장(승동)측 합동위원장 양화석, 서기 정규오, 위원 고성모, 노진현, 김윤찬, 이환수, 심천, 정일영, 배태준, 양성봉이었고, 고신측 합동위원장 황철도, 서기 윤봉기, 위원 한상동, 박손역, 송상석, 김성도, 추국원, 남영환, 조수완이었다. 회의가 진행되어 오후 5시까지 그리고 오후 7시-9시까지 회의를 진행, 고신측 합동위원장 황철도 목사가 합동위원회가 모이기까지의 경위를 간단히 설명하고, 한상동, 노진현, 고성모 목사와 양성봉 장로가 이제 “과거는 일소하고 백지로 환원하여 합동을 하도록 하자”는 감격스런 인사말을 했다.

이어 양측에서 합동에 필요한 합동원칙, 합동정신과 태도, 합동방안을 논의하고 이를 위해 합동순서를 하향으로 할 것인지 상향으로 할 것인지, 또 헌법 수정절차와 신학교, 합동에 필요한 규칙과 노회 합동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또 여기서는 고신측에서 제기한 헌법수정, 교리, 정치 생활면, 신학교 일원화, 사업(선교, 병원, 학교, 기타), 외국 선교사에 관한 건을 논의했다. 잠시 휴식을 가진 뒤 오후 7시에 다시 모여 아래와 같은 합동원칙을 결정했다: 

1. 합동원칙

1) 신조: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에 명시한 12신조.

2) 신학: 우리는 칼빈주의 신학에 의하여 합동을 원칙으로 한다.

2. 합동방안

3. 헌법수정: 헌법수정위원을 양측 각각 5인씩을 선출하여 헌법 수정위원회를 구성하고 합동에 필요한 헌법수정과 규칙을 작성하여 총회에 제안토록 한다.

4. 교리, 정치, 생활면은 헌법과 예배모범, 권징조례를 엄수한다.

5. 신학교 일원화, 신학교는 교회직영의 단일신학교로 하고 양측 동수의 이사를 선출하여 이사회를 구성하여 경영케 한다.

6. 사업은 양측 현상대로 수락한다.

7. 외국 선교사의 건은 양측 현상대로 수락한다.

8. 합동방식

금년 내로 합동총회로 모이고 동 총회에 헌법수정위원이 제안한 헌법수정안을 통과시켜서 각 노회에 중의하여 총회 서기에게 보고함으로 효력을 발생토록 가결한 후 각 노회를 합동하도록 한다.

이튿날 회의는 계속되었다. 황철도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는 합동일을 12월 13일(화)로 하기로 결정하고 헌법위원을 선임하였다. 헌법위원으로는 예장(승동)측 김윤찬, 고성모, 정규오, 정일영, 심천 그리고 고신측 황철도, 한상동, 송상석, 박손혁, 전성도를 선정하였고, 합동총회 절차위원으로 양측 총회장과 서기 송상석, 전성도, 고성모, 박찬목, 양측합동위원장과 서기 양화석, 정규오, 황철도, 윤봉기 8명으로 선임 가결하다. 이렇게 해서 1960년 10월 26일 역사적인 합동을 위한 법적인 토대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합동의 기본 원칙을 정한 양측은 “금년 내로 합동총회로 모이고 전 총회에 헌법수정 위원회가 제안한 헌법 수정안을 통과시켜 공포하므로 그 효력을 발생하도록 한다”(8)고 결의하였다. 고신측에서는 소속 목회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1960년 12월 13일 서울 흥천교회에서 목사 64명, 장로 55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신측 제10차 총회 속회를 열어 각 노회에 수의한 결과 6개 노회 총투표수 188표 중 가표 178표, 부표 8표, 기권 2표로 승동측과의 합동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통과되었다.

이에 1960년 12월 13일 오후 5시 30분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고신측 총대 131명, 승동측 총대 233명, 총 364명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합동총회가 개최되었다. 합동이라는 교단이 이렇게 해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고신측은 1960년 9월 현재 교회 590개, 목사 126명, 장로 213명, 전체교인 66,784명이었다.(9) 고신측 총회장 송상석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개회예배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 찬송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황철도 목사의 성경봉독, 승동교회 찬양대의 찬양, 박형룡 박사의 에베소서 4:1-15절에 근거한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제목의 설교가 있었다. 송상석 목사의 사회로 1부 예배가 끝난 후 승동측 총회장 고성모 총회장 사회로 회무가 진행되었다. 합동위원회에 의해 합의된 합동원칙이 합동위원회 서기 정규오 목사의 보고 후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이어 고신측 전성도 목사가 “취지 및 선언문”을 낭독하여 일부 수정 후 채택하였다:

진리는 영원히 살아 있어 필요가 있을 때마다 생명의 새 역사(歷史)를 창조하신다. 이와 같은 창조의 역사는 근원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예정의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한토막의 변혁(變革)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점쳐 놓은 사실(事實)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창세사(創世史)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復活史)를 비롯한 성령의 역사(役事)는 역대의 기독교회사가 이를 밝히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금일 두 총회 합동도 이 역사(歷史)의 한토막인 것만은 사실이다. 백년이 채 못되는 한국 기독교 특히 장로교회 역사 페이지는 기독교 본연적인 순색(純色)으로 수록된 면이 없는바 아니다. 그러나 혹은 검게 혹은 붉게 물들인 비장(秘藏)된 사실(史實)도 적지 않다. 더러 펴 놓은 교회사 페이지를 그 누구의 힘으로나 현대과학적 기술로는 시채낼 자 없고 다만 기도의 제단(祭壇)밑에 성스럽게 엎디어 느껴우는 성도들 심령골수(心靈骨髓)에서 녹아내리는 통회의 눈물만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울어 보았는가? “에스라”는 수염을 뜯어가며 울었고 “예레미야”는 눈물로 밥을 삼았건만 우리는 마음을 찢고 통회해야 할 것이다. 진리가 모독을 당할 때, 불신앙의 무리가 교회를 퇴속화(退俗化) 시킬 때, 불법의 무리에게 교회 질서가 교란(攪亂)을 당할 때 교권주의자(敎權主義者)들에게 순진한 양떼들의 당한 유린은 너무도 참혹하였다. 사이비(似而非)한 진리의 간판을 내걸고 회색적(灰色的)인 복음주의자 혹은 자칭 보수(保守)라는 미명(美名)하에 위선자가 횡행하고 있는 난세(亂世)에 처한 성도들의 심령은 여지없이 더렵혀졌고 어두워져서 심령의 마비상태(痲痺狀態)는 아무리 매를 맞아도 아픈 줄도 모를 만큼 되었다. 한국 기독교계에 저질러 놓은 책임소재(責任所在)를 찾아 보자. 한국교회는 알아야겠다. 너나할 것 없이 책임을 남에게 전가(轉嫁)하지 말자. 이 심정을 여실히 나타낸 것이 오늘 우리의 교회 합동이다.

그러나 웃음으로 합했다가 울음으로 헤어지는 것보다 감격의 눈물로 합하여 웃음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한다. 배고파 창자를 움켜쥐고도 물질에 유혹을 받지 아니하였고, 헐벗고 떨면서도 고맙게 주는 미국 형제의 입성을 탐내지 아니한 것이 우리들의 심정이었다.

때가 되매 친구는 찾아오다. 신앙의 동지 보수사상(保守思想)의 뜻 깊은 일꾼들, 우리는 힘을 얻었고 큰 기쁨과 큰 위로의 선물을 듬뿍 받게 되었다. 질(質)이 같으면 서로 합하고 성(性)이 같으면 서로 응하는 것이 물리학의 원리라면 신앙의 신학체계(神學體系)가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똑같은 두 총회가 함께 뭉치지 못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보수주의 수호자(保守主義 守護者)가 진리 투쟁에 불타는 동지들의 규합(糾合)으로 보수 보루(保守堡壘)와 진리 전선(眞理戰線)의 진지가 강화된 것이다. 자유주의(自由主義)대 보수주의 대결이다. 이제는 전진이 있을 뿐이고 후퇴는 없을 것이다. 이 싸움을 위한 희생(犧牲)의 대가를 더 많이 지불해야 할 것을 우리는 각오한 바 있어 제삼자(第三者)의 구구한 억제 비난도 공격도 다 불문에 부치고 우리는 비장한 결심(決心)을 하였다. “여룹바알”이라는 “기드온”의 병거와 전법(戰法)을 생각하였다. 항아리는 깨어 졌다 할지라도 승리의 횃불은 높이 들어 올렸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는 최후 승리라는 깃발을 높이 달고 그 아래로 모였다.

이 일은 하나님의 최종적(最終的)인 우주 통일 원칙(宇宙統一原則)하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단체 생활의 참답고 향기로운 전형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겨레 앞에서도 솔선수범코자 주 안에서 진리로 하나되는 두 총회 합동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세간여론(世間與論)에 구애(拘礙)를 받지 않고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통일 총회의 막을 올리고 거보(巨步)를 내어 디디며 앞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다음 조항의 선서(宣誓)를 중외(中外)에 선포한다.(10)

고려파 교단과의 합동은 전통계승, 합동원칙, 지도원리, 생활원리를 구체적으로 명시, 합동의 목적과 의의가 퇴색되지 않도록 배려했다.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합동총회는 그 전통과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1.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5회 총회는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제1회 총회로 창립한 총회로부터 일본 교단과 신사참배를 제외한 동일성(同一性)을 유지하고 전통을 계승한 유일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법통총회임을 선언한다. 2. 고신측 총회의 10회 총회 기간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이원적(二元的)인 사실(事實)로 수록한다. 3. 고신측 총회는 1949년 이래 경건생활에 치중하여 정통신학교육에 힘쓴 것과 예장측 총회가 세속주의를 배격하기 위하여 W.C.C.를 탈퇴하고 W.C.C. 노선의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한 결의를 인정한다. 4. 1951년 5월 25일 제36회 총회에서 경남 법통노회 제 51회 노회에 대한 결의와 총회장의 포고문(布告文)은 이를 취소한다. 5. 단일 총회의 헌법은 1934년 개정판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총회 합동에 구애되는 점만을 수정하여 잠정적으로 사용한다.”

합동원칙(合同原則)으로 신조에 있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에 의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 명시한 12신조”를,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 신학”에 의하여 합동하는 것을 그리고 신학교는 “총회 직영을 일원화하여 양보다 질에 중점을 두며 이사회가 이사선임 재청제를 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교리는 “칼빈 선생이 가르친 장로회의 교리를 그대로 고수”하고, “신조 정치 권징조례 예배 모범과 규칙에 의하여 교회를 치리”하며, “개별적으로는 순복음주의 교회와 기독자의 생활행동원리에 위반되는 행위와 사상은 엄중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청교도 칼빈주의 전통을 따라 신앙의 순수성과 삶의 순수성이 괴리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것은 생활원리로 명문화시킨 세 가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정경과 신도게요서에 준하여” 첫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 둘째, “교회를 봉사하는 생활,” 셋째, “사회생활에 모본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인된 본분을 다하도록 한다.”

이들은 “자유주의적이며 비성경적인 W.C.C.노선의 에큐메니컬 운동을 반대하며 그러한 사상적인 단체와의 제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 “교회 경제적 자립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십일조를 권장”하고, “개인전도와 국내전도에 힘쓰며 외국선교 사업을 계속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바른 신앙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복음전파와 대 사회적 책임과 교회의 자립을 도모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이들은 보수적인 입장을 피력하면서도 폐쇄주의로 흐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진보적인 교단들과의 교류는 금하면서도 “신앙사상이 같은 보수주의의 국내 교단과의 친선을 도모하며 성도의 교제와 협조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했다. 선교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전세계 교회가 W.C.C.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교류보다는 신앙이 같은 선교회와의 교류를 명문화시킨 것이다. “과거 복음을 전해준 초대선교사들의 수고와 노력을 높이 칭송하고 감사하며 지금도 우리와 신앙노선이 같은 선교회들이나 선교사들이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에 사랑과 봉사의 협조를 제시공여할 때에 우리의 주권과 신앙의 침해가 없는 한 이를 가납한다.” 선언문에는 위에서 언급한 칼빈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이고, 선교적인 노선을 확정한 뒤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교단의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신학 노선을 아래와 같이 천명했다:

1. 우리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45회 총회에서 선포하는 선서문에 의하여 교회의 화평과 발전을 도모하며 70여년의 보수신앙순교정신으로 고수할 것을 굳게 결의한다.

2.우리는 복음전리에 배치되며 70여 년의 전통적 질서를 문란케 하면서 본 총회에서 이탈 혹은 중립상태에 있는 교회 및 노회에 대하여 조속히 본 총회에 귀의할 것을 권고한다.

3. 우리 총회관하에서 봉직하는 교직자들은 혼미 중에 있는 교회와 교우들을 사랑과 성실로 권면하며 지교회와 노회 총회의 단결을 공고히 함에 힘써 기도하며 우리 초대교회와 같이 성경공부와 복음전파에 전력을 기울이며 경건생활에 힘씀으로써 민족과 세계교회에 영원한 구원에 기여함이 있기를 바란다.

12월 14일 오전 9시 속개된 합동총회에서 임원 선출을 하여 고신측 한상동 목사가 총회장에, 부회장에 김윤찬 목사가 당선되었다. 이어 증경 총회장 이대영, 이인식, 한상동 목사의 기도가 있은 후 14일 오후 2시에 환영회가 열렸고, 14일 오후 3시에는 정통장로교 선교부 한부선 선교사, 세계 장로교 선교부 현요한(John Hunt) 선교사 그리고 미국 독립선교부 마두원(Malsbary) 선교사의 축사가 있었다. 고신측과 합동측의 합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표준교리를 준수하는 개혁주의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W.C.C. 에큐메니컬 운동에 반대적인 입장을 가진 양 교단이 연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합동은 하나님의 뜻”(11)이라는 확신 속에서 “옥중성도”로 시작한 고려파 교단과 승동측이 연합하여 한국장로교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합동교단으로 새롭게 거듭난 것이다. 양측 교회의 전임 총회장들이 단상에서 서로를 껴안을 때 온 총회장은 감동이 넘쳐흘렀다. “이리하여 신앙 때문에 나뉘어졌던 양 총회가 신앙을 위하여 합해진 감격적인 장면이 이루어졌다.”(12) 승동측과 고려파의 합동 후 「새찬송가」를 출간하였다. 목사 101명, 장로 92명, 선교사 2명 합 195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제 46회 총회가 1961년 9월 21일 부산남교회에서 개최되어 한상동 목사가 총회장에 재선되었다. 총회는 파숫군 잡지를 신학교 기관지로 채택 널리 보급하기 시작했다.(13)

II. 고려파의 환원

예장합동은 고려파와의 연합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느 한쪽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시의 적절한 조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때문에 이와 같은 두 교단의 연합은 한국교회사에서 참으로 빛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교단끼리 신앙의 동질을 확인하면서 하나로 합류한다는 것은 그만큼 의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 교단이 연합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외형적으로 하나로 연합하기는 했지만 그 후 약정(約定)을 실현해 나가는 입장에서 서로 간에 의견이 상충되었던 부분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신학교 문제였다. 양측이 합동을 추진하면서 “신학교는 총회 직영으로 일원화하며”라고 정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양쪽이 서로 달랐다. 일원화라는 말을 고신측에서는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 양자의 행정적인 연계성을 가진 일원화로 이해했으나 승동측에서는 통합의 의미로서의 일원화로 이해하여 고려신학교의 폐쇄를 전제로 한 일원화로 이해했던 것이다.

서로 간의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신학교 문제는 예정대로 추진되었다. 1961년 9월 21일 부산 남교회당에서 모인 제46회 합동총회에서 당시 이사회가 고려신학교의 점차적인 폐쇄를 가결하였고, 3개월 후에 모인 1961년 12월 28일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 연합교수회에서는 교장제를 교수회장 윤번제로 하기로 하고, 서울의 총회 신학교를 본교로, 부산의 고려 신학교를 분교로 하고 졸업반은 서울에서 수업케 하고 분교는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도록 결의하였던 것이다. 신학교 이사회는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교가 더 이상 신입생을 받지 않도록 결정하고, 그곳에 재학하는 3학년은 마지막 학기를 서울 총회신학교에 편입해서 마치도록 결정했다.(14) 이렇게 해서 70명의 학생과 3명의 전임교수를 둔 부산의 고려신학교와 서울에 있는 장로회총회신학교(15)가 결합함으로써 명실공히 그 신학교는 학생 350명을 지닌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신학교로 부상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신학교 가운데서 최고의 교수진을 갖추게 되었다. 결국 신학교는 미국에서 철학박사(Ph.D.) 학위와 신학박사(Th.D.) 학위를 취득한 최소한 여섯 명의 한국인 교수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16)

고려파에서 볼 때 이것은 일원화를 양 신학교의 통합의 의미로 받아들인 합동측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고려파에서는 신학교가 합동측의 의도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에 반대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1961년 11월 경남(법통)노회는 “합동 총회에 대한 호소 ... 경남(법통) 노회 결의와 해명을 공개함”이라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17)

여기서는 “(1) 憲法과 憲法的 規定을 떠난 多數暴政 (2) 總會 合同原則과 宣言文 破棄된 狀態 (3) 信仰敬虔과 神學保守와 基督者의 行動原理立에 대한 非違點 論證”(18)이 지적되었다. 이들이 불만을 가진 것은 합동 후에 나타난 합동 약속의 이행과정에서 생긴 문제들 때문이었다. 이들이 고신과의 합동시 “신학교를 총회 직영의 일원적인 신학교로 하고 이사는 양측 동수로 할 것을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신학교를 불법적으로 단일화 결의를 하고 고신을 폐합하고 고신측 이사 수는 3분의 1이 되었는가?”(19)라고 반문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이들이 제기한 다른 한 이유는 고신측 노회와 합동측 노회가 합동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다. 즉 “구역 및 명칭에 있어서 경상남도는 고신측 노회 구역과 명칭에 의하여 합동하고 그 외는 예장측 노회 구역과 명칭에 의하여 합동하기로 결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신측 부산노회와 예장측 경남노회가 합동함에 있어서 왜 고신측 부산노회 명칭과 지역대로 합하지 않고 예장측 경남노회 명칭과 그 지역대로 하였는가?”(20)하는 것이다.

홍반식 박사, 오병세 박사가 1961년에 귀국하여 서울의 총회신학교와 부산분교에 각각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1962년 화란 자유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이근삼 박사는 총회신학교에 조직신학 교수가 많다는 이유로 임용이 거부되었다. 고려신학교가 폐쇄 위기에 처한 것이 고신측 환원의 일차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신학교 교수와 이사회에 구성에서 고신측 출신자들이 소외당하자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1962년 10월 17일 한상동 목사는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즉 고려신학교) 경건회를 마친 직후 “고려신학교 복교 선언”을 하였다. 고려신학교의 복교는 단순히 고려신학교만이 복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것은 고려신학교의 복교인 동시에 승동측으로부터의 고신측의 환원을 의미하는 첫 신호였다.”(21)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막으려는 노력이 한편에서는 진행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한상동 목사의 고려신학교 복교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고려신학교 학우회는 10월 31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상동 목사의 복교 선언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아래와 같이 발표했다.  

한상동 목사님께서 전 고신 이사님들의 합의하에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선언하셨기 때문에 학우회는 다시 모여 의논한 다음, 다음의 5개 조항을 정한 것입니다.

1. 본 장로교의 합동을 재확인하고 이를 고수한다.

2. 합동원칙을 준수하며 신학교의 일원화를 재확인한다.(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는 다같이 인정하는 내용)

3. 한상동 목사님의 사과말씀을 환영하고 그의 복교 선언을 지지한다….(22)

성명서에는 이례적으로 현 재학생들 가운데 찬성하는 학생과 반대하는 학생들을 구분하여 명기하였다. 찬성 서명 날인한 학생은 최만술 외 52명이었고, 중간적인 태도를 가진 학생은 오상진, 윤형묵, 하설자, 함숙진, 홍영희, 진부생 그리고 반대하는 학생은 최기채(광주신학출신), 변순제(광주신학출신), 지염근(광주신학출신), 박효배, 채은수 등이었다.

한상동 목사의 영향력, 환원이 고려파에 불이익으로 작용했다는 환원에 대한 비평의 목소리가 뭉쳐져 고려신학교 재학생들 상당수가 환원 쪽으로 기울었다. 고려신학교 재학생 65명 가운데 53명이 복교를 지지하고 6명이 반대했고, 6명이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중립적 입장을 취했던 6명 가운데 4명이 후에 복교를 지지했다. 고려신학교의 복교는 급속하게 가속화되었다.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착착 진행되었다. 1962년 12월 17일에는 박손혁, 오병세, 이근삼 등 세 교수가 고려신학교 정교수에 취임했고, 다음날인 18일에는 서울 총회신학교에서 수업 받던 고려신학교 출신 10명의 학생이 부산에서 내려와 수업을 받았다. 이중 5명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고려신학교의 복교는 신속하게 추진되었다.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세 사람이 고려신학교를 위해 같이 힘을 모으기로 하고 1963년 2월 25일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아래 성명서에서 명분 없는 환원이라는 비판의 여론을 환원 쪽으로 유도하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성명서

1. 우리 세 사람은 일찍이 고려신학교에서 양성을 받은 동지로 뜻한 바 있어서 신학을 좀더 연수하여 한국교계에 미력으로나마 이바지하자는 약속을 하여 왔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권고로 유학을 마치고 미숙한 자들로 자인(自認)하면서도 귀국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계 정세를 보니 저들의 생각과는 달리 정착할 수 없었고 환경의 강력한 지배가 우리들의 입장을 좌우하게 되며 우리들도 모른 사이에 서로 떠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교계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감을 주는 형편이었으므로 적지 않은 괴로움을 가져왔습니다. “하나가 둘이 서 있는 자리로 가느냐? 둘이 하나가 서 있는 자로 가느냐?”가 우리의 당면한 문제였지만 동지 규합은 소지관철의 비결이므로 결국 3인이 약속하여 행동하기로 하였습니다.

2. 우리는 고려신학교 복구의 방법은 가하지 않았다고 하겠으나 그 동기는 순수하고 그 정신이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3. 우리는 신학교를 운영하는 이사회와 학교의 교육과 행정을 담당하는 교수회의 책임한계를 엄격히 할 것을 확보하고 재단을 구성하여 구태를 벗어난 새로운 운영방침수립을 확인하고 고려 신학교에서 세 사람이 동역하기로 하였습니다. 민간 교회에 불안을 끼친 우리들의 부족한 점을 관용해주시고 앞날의 지도와 편달을 바라오며 이로써 우리의 소신을 외람되게 교계에 성명하는 바입니다. 1963년 2월 25일(23) 

이들은 한상동 목사의 고려신학교 “복구방법은 가하지 않았다”면서도 “그 동기는 순수하고 그 정신이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을 인정”한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절차상, 행정상의 문제의 소지는 있지만 그 동기를 높이 사야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고신 1951년 졸업생으로 고신 출신 교수들이었던 이들의 성명서는 자신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고신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선언과도 같았다. 고신의 복교는 합동측에서 볼 때 합동의 원칙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합동을 찬성하고 이를 염원해온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특히 합동 총회 총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사람이 그토록 무책임하게 고신의 복교를 선언해 일치를 가를 수 없는 일이었다. 1963년 6월 합동총회 고시부에서 고려신학교 제 17회 졸업생 남영희, 이지영, 진학일, 최만술, 최진교 등 5명에게 전도사 고시 자격을 허락지 않자 고신측에서는 더욱 합동측의 처사에 불만을 갔게 되었다. 고신측에서 볼 때 “이점이 고신측 환원 운동에 결정적인 동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고신의 복교를 선언한 것은 고신측의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합동측이 왜 이들에게 전도사 고시 자격을 허락지 않았느냐고 문제시 할 수 없다.

이제 환원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1963년 7월 29일 부산노회 고신측 출신 교역자들이 환원 발기회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노회 환원 취지문”을 발표하고 고신측의 환원을 선언하였다:

“우리 大韓 예수敎 長老會 高神側 敎會는 解放後 韓國敎會의 信仰復興과 淨化運動에 힘써 오던 中 1951年 9月에 第 1回 總會를 組織하고 하나님의 恩寵과 祝福으로 正統神學敎育과 敬虔生活과 福音傳道에 힘써 오다가 大韓예수敎長老會 勝同側 敎會가 이를 公認하고 過去에 高神側에 對한 자신들의 잘못된 決議를 取消함으로써 兩 敎派는 正統保守와 敎會淨化의 崇高한 理念아래 1960年 12月 13日에 合同하게 되었든 것입니다. 그러나 合同후 總會는 여지없이 合同誓約을 違反하여 合同精神과 理念을 無慘하게 짓밟고 있으며 萬一 이대로 持續한다면 우리의 將來는 甚히 暗澹하고 悲慘할 것은 明若觀火의 事實입니다. 이제 와서는 우리의 合同理念 達成은 絶望的이요 解放後 우리들이 가져오든 信仰路線은 餘地없이 유린 當하고 있으니 우리 敎會를 이 暗黑으로부터 救出해내고 韓國敎會의 正統神學 敎育과 敬虔生活의 再建設을 위하여 合同前으로 돌아가서 陳容을 再整備하고 眞正한 칼빈主義 敎會 建設을 爲하여 邁進코자 하는 바입니다. 이에 共鳴하는 信仰同志들의 全國的인 봉기에 呼應하여 우리의 進路를 韓國敎會에 널리 宣言하는 바입니다.(24)

III. 환원에 대한 찬 반 움직임

그러나 고려파의 갑작스런 환원이 분명한 명분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와 같은 환원 움직임에 반대하는 고신측 목회자들이 많았다. 1963년 8월 8일(목) 오후2시 고신측 목회자들이 부산남교회당에서 부산노회 환원노회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고 부산노회 내 구 고신측 교역자들 김장원, 이상근, 박유생, 황보연준 목사 등 29명은 1963년 8월 5일 부산노회 환원을 반대하는 아래와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환원부산노회발기회장 박상순 명의로 부산노회 소집통지서를 발송하고 동시에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측) 부산노회 환원발기회란 이름 아래 전국의 구 고신측 교회에 노회환원 취지문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드디어 교회 분열이란 비극의 막을 열었다. 이 비극을 막기 위하여 우리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왔으나, 분열주의자들은 기어코 취지를 관철하여 드디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실로 통탄을 금할 수 없다. 회고하여 보건대 고신측 장로교회가 승동측 장로교회와 1960년 12월 13일에 역사적인 합동총회를 성취할 때 우리들은 고신측 지도자인 한상동 목사 및 기타 목사들의 “합동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지도를 받아 감격과 감사를 가지고 순종하였던 것이다. 그후 한상동 목사는 2년이나 총회장을 위임하면서 합동총회를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며 총회와 신학교가 잘되어 간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작년 9월 총회에서 한상동 목사는 총회장에 3선이 되지 못하고 10월에 청천벽력과 같이 총회가 부패되었고, 신학교도 부패되었다 하면서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고려신학교 복교에 대하여 우리들은 그것이 정당한 이유 없는 것임을 지적하고 또한 그 결과는 비극적인 교회 분열이 될 것이라고 극구 만류하여 왔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 및 기타 목사들은 여출일구로 노회석상에서나 또 교인들에게나 교회 분열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총회 산하 2천교회라는 무대를 두고 왜 나갈 것인가?“ 등등의 말을 몇 십번 몇 백번 하였던가? 목사의 생명은 양심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이렇게까지 비양심적인 거짓말을 거침없이 하여야 하는가?

한국교회의 정통신학교육과 경건생활의 재건설을 위하여서는 거짓말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가? 이제까지는 “고려신학교 인준해 주변 분열되지 않는다”하여 왔는데 노회환원취지문에는 합동총회는 여지 없이 합동서약을 위반하고 합동정신과 이념을 무참하게 짓밟아서 노회를 환원한다 하였다. 그러면 고려신학교를 인준해 주면 합동서약을 위반한 것이 안되고 합동정신과 이념을 무참하게 짓밟은 것이 안되는가?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는 법이다. 소위 노회환원취지문이란 것이 이렇게 전부 거짓이요, 순진한 교인들을 기만하기 위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것이로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전국교회성도들을 위하여 저들이 열거한 조항에 따라 간단한 해명을 부치는 바이다.  

“합동선서와 위반”이란 조항의 해명

1. 신학교 문제

(1) “일원화를 1년이 못 가서 단일화 시켰음.”

이 일은 한상동 목사 총회장 때에 한상동 목사 주동으로 단행하여 그 당시 한상동 목사에게 대하여 불평이 적지 않게 있었음.

(2) “이사회구성에 있어서 양방 동수제를 폐지함”

총회에서는 이사 동수제를 폐지 결정한 일이 없고, 다만 이사전형위원 한상동 목사, 황철도 목사, 노진현 목사, 박형룡목사 4인이 원만한 합의 아래 이사를 전형한 것을 이사회를 경유하여 인준한 것뿐인데, 만일 교려측 이사가 동수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하면 그 책임은 전형위원인 한상동 목사, 황철도 목사에게 있음.

(3) “신학교육에 있어 질적 교육 보다 양적 교육에 기울어졌음”

이 조항은 고려신학교 선전 목적을 위한 것인 모양인데 신학교육의 愚劣은 장차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

2. 政治問題

(1) 다수에 의하여 불법을 감행하고 있음.

1) 부산노회는 합동원칙을 어기고 노회 명칭과 회수를 수로써 결정함

부산노회는 노회유익을 위하여 다수의 의견을 따라 합동원칙을 몇 노회 연기하여 시행하였다. 교리문제 아닌 것은 방법적으로 그 단체의 유익이 되도록 행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닌가?

2) “고려신학교를 불법 정죄하고”

고려신학교는 한상동 목사 자신이 혁명이라고 증언하였고, 고려신학교의 이근삼, 오병세, 홍반식 3 교수가 그 방법이 불가하다고 천하에 성명한 일이니, 부산노회가 불법이라고 결의한 일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지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2) “고신을 협조하는 교회와 교역자를 강압함”

1) 東一敎會 교역자 청빙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음.

동일교회는 교역자가 사면하자 교역자가 공석임을 기화로 고려복교운동자인 朴某長老가 교회 분열운동과 고려지지 운동으로 교인들을 선동 교란하여 교회의 분규를 일으켜 놓았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뜻대로 되지 아니하는 일에 대하여 억지 비난이다.

2) “제2영도교회에 전권위원을 보내여 고신지지하는 교역자와 교인을 강압하였음”

고신 지지하는 목사가 고신복교를 반대하는 장로들을 불법으로 해임시킬 공작을 노회가 법대로 저지한 것이며 목사가 당파를 조직하여 교회 분열을 제 1착으로 실천하고 있는 곳이 제 2영도교회이다.

3) “고신 교수들을 넣었다 하여 학생신앙운동 전국대회를 하지 못하는 결과에 이르게 하였음”

학생신앙운동의 간부 중 대다수가 고신지지의 학생임을 기화로 하여 명예대회장 및 중요시간의 대부분이 고신 교수로 되어 있으며 총회신학교교수는 1명도 없기 때문에 (全弘全박사는 총회신학교 교수가 아님) 명예대회장을 총회장으로 할 것과 총회신학교 교수도 1명 강사로 넣을 것을 요구하였던 바 집회를 무기한 연기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고려신학교 선전과 고신복교운동을 암묵적으로 의도한 것이 그대로 되지 못하게 되니 집회를 중단하고 만 것이다.

3. 信仰路線 問題

(1) 경건하고 순수한 “칼빈주의 신앙노선을 버리고 세속주의, 타협주의, 편리주의로 나가며 불순한 신앙운동과 단체에 가담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음”

극히 추상적인 문구의 나열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혹 한상동 목사의 주창으로 통합측 예장교회와 합동하고자 한 일을 지적하는 것인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거니와 이 말의 뜻은 너희들은 다 잘못 믿고 우리만 잘 믿고 경건하다 하는 뜻인 것 같다.

(2) “합동부산노회와 총회의 현재의 동향이란 제항의 해명”

1) “고신측 지도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완전히 교권을 장악하려 함”

총회와 노회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회원의 자유스러운 의사 아래서 투표로서 임원이나 총대가 선정되었는데 거기에서 뽑히지 못한 불만으로서 이러한 말을 한다면 이것은 그들 자신이 교권주의자가 아닐까?

2) “분열을 전제로 하고 고신측 교인을 선동하고 교회와 교회당 쟁탈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음”

분열은 누구가 하고 선동은 누구가 하고 있는가? 현재에도 노회 총회 분열을 위하여 몇몇 목사들이 짝을 지어 각 지방을 유세, 권유공작을 하고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3) “고신측의 그림자까지라도 한국교회에서 지워버리려고 함”

문학적인 표현이 되어서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 전 고신측에 속해 있는 교역자와 교인들에게 대한 감정적인 호소인 모양인데, 전 고신측에 속했던 교역자와 교인에 대하여 적개심을 일으키게 하여 합동을 破壞하고자 하는 비열한 근거 없는 言說이다.

4. 結 論

(1) 구 고신측 부산노회의 환원이 아니라 분열이다. 구 고신측 부산노회에 속했던 목사와 총대장로의 다수가 부산노회의 환원을 원하지 않으며 고신복교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일부 소수의 목사, 장로가 분열노회를 조직하면서 부산노회의 환원이라고 할 수 있는가?

(2) 이 분열운동은 교권운동이다.

몇몇 목사의 교권확립을 위해서 순진한 어린 양떼들을 기만하여 비극적인 교회 분규를 불사하며 식언과 거짓말을 떡 먹듯이 하면서 一路 韓高波 수립에 邁進하는 교권운동인 것이다.

(3) 우리의 대책

우리는 긴급히 임시노회 소집을 청원하여 노회적으로 대책을 세우는 동시에 전국 성도 앞에 이 사실을 알게 한다.

주후 1963년 8월 5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부산노회

구 교신측 교역자

목사-김장원, 이장수, 황보연준, 이재만, 최대연, 김강원, 차문제, 최천구, 한대식, 김덕곤,

최진도, 이상근, 김원주, 초종린, 김을길, 김성환, 황종은, 방유생, 정해동, 이갑득, 김상도,

우하섭, 김갑석

강도사-이근신 김의장, 박윤식

전도사-저영수, 강학건, 송요섭(25)

환원을 반대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들이 볼 때 고려파의 환원은 명분이 없었다. 상당히 많은 고려파 출신들이 부산노회 환원을 반대한 이유도 거기 있었다. 이와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3년 8월 8일(목) 하오 2시 부산 남교회에서 부산노회 내 구 고신파 목사 23명과 장로 44명이 모여 부산노회 환원노회를 결의하고 김영진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였다. 반대하는 목회자가 29명, 찬성하는 목회자가 23명이었다면 전체적인 대세가 어떤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고신측의 환원은 고신측의 목회자들이 볼 때도 합당하지 않은 처사였음을 말해준다. 고신측 환원에 반대하는 고신측 목회자들은 일부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진행되는 고신측 환원을 반대했다. 8월 29일에는 강유중, 안용준, 이인재, 박유생, 황보연준 목사 등 합동측 내 구 고신파 목사 49명(경북지구 18명, 경기지구 5명, 전라지구 4명, 부산지구 22명 등)은 고신측과의 환원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60년 12월 13일 고신측 장로회와 승동측 장로교회가 합동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감격에 넘쳐 합동한 이후 2년이 되지 못하여 지난 12월에 한상동 목사가 혁명으로 고려신학교를 복교하고 금년 8월 8일에는 “우리는 절대로 교회를 분열하지 않는다”고 공석 사석에서 수십 수백 번 언명한 모든 발언을 전격적으로 번복하여 소위 환원부산노회란 이름으로 분열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를 계기하여 전국적인 교회 분열 계획은 착착 실천에 옮겨져, 전라분열노회가 이미 조직되었으며, 말구에 경기분열노회, 경북분열노회도 조직될 것이라 한다.

저들은 소위 환원노회란 이름 아래 전 고려측 교역자와 교회가 전부 합동이전으로 환원하는 것 같이 위장 선전하여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교회와 교인들을 현혹하기 때문에 이에 우리들은 우리의 소신과 견해를 다시 한번 천명하여, 전국 교우들의 태도결정에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1. 환원노회란 이름을 붙일 수 없으며 분열노회라 함이 妥當하다. ...

2. 우리는 교회 분열을 반대한다.

(1) 고려신학교는 합동원칙, 즉 신학교 일원화원칙에 의하여 수습되기를 바라며 합동원칙 이전상태의 환원은 합동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2) 교회 분열은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 ...

“이제 고려파가 전부 환원한다”등은 대표적인 허위선전이며 반대하는 사람들의 개인 인격을 중상하는 모략적 수단은 저들의 요긴한 방법이 되어 있다.  

3. 결론

(1) 우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총회의 합동을 더욱 더 공고히 하며 우리 총회 산하 모든 교회가 말씀에만 순종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진리의 교회가 되기를 힘쓰며 기원한다.

(2) 우리는 총회신학교(서울본교와 부산분교)가 충성된 진리의 종들을 양성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건하고 칼빈주의에 충실한 하나님의 선지학교 되기를 기원하며 총력으로 후원한다.

주후 1963년 8월 29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구고려파측 목사 일동 (무순)

1. 경북지구 대표

목사...이인제, 추국원, 정운필, 배수윤, 최현선, 최덕일, 조성권, 최준섭, 우명군, 추교경,

       김영환, 최창갑, 장기목, 김용호, 조신재, 박약실, 구연대

2. 경기지국 대표

목사...정봉조, 김승곤, 장석인, 안용준, 장경재

3. 전라지역 대표

목사...전관목, 김영업, 방인옹, 김원남

4. 부산지구 대표

목사...이재만, 김갑석, 김경원, 이장수, 황보연준, 찬문재, 최대영, 한대식, 최진도, 김덕곤, 이상근

       최천구, 최종린, 김을길, 김성환, 황종은, 김원주, 정해동, 이갑덕, 김상도, 우하섭, 박유생

5. 마산지구 ...

6. 진주지구, 진주노회는 노회적으로 우리 總會 率下에 확고히 서 있음(26)

기독교가 보여주듯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가 한 개인의 명예와 욕심에 의해 움직여 갈 때 교회의 일치는 심각한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교권주의가 여기에 가미될 때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는 법이다. 당시 환원에 반대하는 이들이 볼 때 고려파의 환원은 신학적인 이유가 아닌 한상동 목사 개인의 뜻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여기에 합류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신측 노회 환원은 계속되었다. 부산노회의 환원에 이어 8월 12일에 전라노회가 환원했고, 9월 3일에 경북노회, 9월 4일에 경기노회와 경동노회, 9월 5일에 진주노회 그리고 9월 10일에 경남노회가 환원했다. 1963년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부산남교회당에서 7개 노회 445개 교회(목사 116)의 총대 목사 36명, 장로 36명 합계 72명이 참석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제13회 환원총회를 조직하였다. 이 때 7개항의 성명을 발표했다.(27)

(1) 우리는 합동전 총회로 돌아간다.

(2) 우리는 칼빈주의 신학을 고수한다.

(3)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계승한다.

(4) 우리는 합동전 고신측 헌법과 규칙을 채용한다.

(5) 우리는 칼빈주의 생활 원리에 입각한 경건생활에 힘쓴다.

(6) 우리는 복음전도 사업에 힘쓴다.

(7) 전국적인 신앙동지를 규합하여 총회를 구성하고 합동전 총회를 계승한다.

이것으로 고려파는 합동측과 합동한 후 34개월 만에 다시 환원한 것이다. 고려파 교회 중 445개 교회가 환원했다.(28) 한상동, 송상석 목사의 영향력이 강한 경남노회는 175개 교회 중 163개교회가 환원하였으나 부산노회의 경우 131개 교회 중 69개만 환원했고, 경북 경동노회는 183개중 70교회만 환원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합동측과 합동 총회를 개최할 때 고신측 총대가 131명이었던 것에 비해 거의 3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환원 총회였음에도 총대가 72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과반수가 환원을 반대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합동측은 고신측 총회보다 이틀 늦은 1963년 9월 19일에 목사 97명, 장로 95명, 선교사 3명 합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 48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맺는 말

정확히 50주년을 맞는 오늘 고려파의 환원은 한국교회에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는 법이지만 만일 예장합동과 고려파의 합동이 순조로웠다면 예장합동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을 것이다. 양보와 대화와 관용으로 서로의 부족을 주안에서 이해하고 주님이 명하신 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다면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돌이켜 볼 때 해방 이후 15년 가까이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해 왔던 고려측 형제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정서상 맞지 않은 부분이 많은 데다 합동 후 신학교 운영문제로 부산과 서울의 견해와 의견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합동 후 총회장을 두 번이나 연임한 한상동 목사의 주도로 고려파는 결국 1962년 10월 17일 일방적으로 환원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명분은 미약하여 약 150교회가 환원에 가담하지 않고 합동측에 남았다. 환원한 고신측은 교인들의 마음을 다잡고 뒤숭숭한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합동측은 큰 동요 없이 종전과 같이 변함없는 전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고려파가 환원하던 해 대구의 박병훈 목사가 주도하는 호헌파(헌법을 수호한다는 것)가 1962년 11월 12일 이탈해 나갔고 같은 해 김치선 목사는 미국 매킨타이어 목사와 손을 잡고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창설했다. 이 교단을 가리켜 대신(大神)측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보수교단들의 이탈과 출범이 합동측 총회의 진로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지는 못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볼 때 승동측과 고려파의 합동과 환원은 몇 가지 중요한 교훈과 과제를 한국교회에 남겨주었다.

첫째, 돌이켜 볼 때 예장 승동측과 고려파의 합동은 너무도 시의적절하고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 결정이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신학노선을 가진 교단들과의 일치와 연합은 한국교회에 합동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63년 한상동 목사가 환원을 선언했을 때 훌륭한 젊은 지도자들이 고려파로 환원하지 않고 합동교단에 남아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단순히 합동교단만 아니라 전체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지도력을 발휘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김창인, 최훈, 이상근, 정봉조, 최기채, 채은수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의 리더십과 헌신이 없었다면 1970년대와 1980년대 합동교단의 놀라운 성장과 발전은 현실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 한국장로교회는 합동의 실패를 통해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진단하고 앞으로 한국교회의 합동 추진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최근 합신측과 대신측 고신측이 합동의 움직임이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또 다시 옛날과 같은 상처와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거시적인 안목의 합동 원칙을 세우고 시행에 옮길 수 있는 세칙도 마련해 무리 없이 합동 후 하나될 수 있도록 이 사건을 통해 깊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합동 과정에서 합동의 원칙을 세우는 일은 물론 세부적인 시행규칙을 세워 합동의 실천과 이후 진행이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주도하지 않고 양측의 합의와 동의 속에 합리적으로 진행되도록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역사를 통한 양측의 자기반성이다. 고려신학교 복교가 “혁명”이고 세 명의 교수가 절차상 방법이 문제가 있었다고 자인한 이상 환원의 문제를 무조건 정당화시키거나 미화시키거나 합리화시킬 필요는 없다. 더구나 한상동 목사는 2회 연속 총회장으로서 합동의 원칙을 합리적으로 진행하고 추진할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합동교단이 고려파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합동을 이끌어갔다고 책임을 합동측에만 전가하기 힘들다. 예장 합동도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당시 외국에서 공부한 젊고 유능한 교수인 이근삼 교수를 조직 신학 교수가 많다는 이유로 임용을 거부한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보수주의가 인재를 키우는데도 약하고 활용하는데도 약하다는 평가를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약자의 소외가 느껴지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을 포용할 수 있는 장자의 관용이 합동과정에서 절대필요하다. 교회의 합동이 사적 감정이 개입되거나 지분 다툼으로 이어질 때 언제나 다시 분열의 위기를 만났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치가 인간적 개입에 의해 방해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신학적 원칙이 준수된다면 지역과 인맥과 계보를 초월하여 일치를 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존 칼빈의 정신이다.

넷째, 한 인물을 평가할 때 통합적으로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한상동 목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를 매도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의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더구나 환원의 경우 그것을 정당화시키기에는 명분이 약하다. 필자를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흑백논리에 익숙해 개인적인 섭섭함과 공적으로 전체 교단과 한국교회의 유익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약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역사 앞에 서는 것이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WCC를 지지하는 진보주의자들은 고려파가 다시 환원한 후 마치 기회를 노렸듯이 보수주의는 분열주의자들이라고 비판의 화살을 계속해서 날렸다.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의 책임이 보수주의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지금까지 메이첸파 보수주의자들은 모두 분열주의자들이라는 비판이 혹독하게 일었다. 불행하게도 예장합동은 그 후 분열의 분열을 거듭했고, 고려파 역시 한 두 차례 뼈아픈 분열을 경험했다. 우리는 환원 50년을 맞는 지금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이 시대적 요구임을 깊이 인식하고 한국교회와 역사 앞에 ‘과연 합동의 길이 요원한 일인가?’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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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본고는 필자가 집필 책임으로 참여한 <大韓예수교長老會 總會 百年史> 2(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06), 157-180에 필자가 기고한 원고를 보완한 것임을 밝힌다.

(2) 45회 총회록, 1960, 10.

(3)장희근, 韓國長老敎會史 (부산: 아성출판사, 1970), 416-7.

(4)“합동총회 12 13일로,파수군 104(1960 11), 79.

(5)宋相錫, “교회 합동은 될 것인가(1),파수군 100(1960 1), 62-66.

(6)장희근, 韓國長老敎會史, 417.

(7)정규오, 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장로교 교회사, (서울: 한국복음문서협회, 1983), 320-322.

(8)大韓예수敎長老會 總會 歷史編纂委員會, 韓國長老敎史(고신)-1988-(부산: 고신출판사, 1988), 277.

(9)Ibid., 285-286.

(10)Ibid., 278-284.

(11)Minutes of Korea Mission(1964), 528.

(12)예장 고신측, 합동총회, 파수꾼 CVI(1961 1), 40.

(13) 47회 총회록, 1962, 35.

(14)오병세, “우리 교단의 역사”, 1966 10 4; 크리스챤신문, 1961 12 5, 1.

(15)기독공보, 1961 9 26 1 1960 11 11, 1.

(16)크리스챤신문, 1963 1 21, 4.

(17)장희근, 韓國長老敎會史, 428-433.

(18)Ibid., 428.

(19)大韓예수敎長老會 總會 歷史編纂委員會, 韓國長老敎史(고신), 287.

(20)Ibid., 287-288.

(21)Ibid., 289.

(22)고려신학교 학우회, “성명서”, 1962 10 31.總神大學校百年史에서 재인용, p.624.

(23)大韓예수敎長老會 總會 歷史編纂委員會, 韓國長老敎史(고신), 290.

(24)장희근, 韓國長老敎會史, 425-426. 이 때 이들이 밝힌 合同宣言違反은 신학교 문제, 정치문제, 신앙노선문제였다. (1) 신학교문제: 1) 일원화를 1년이 못가서 단일화 시켰음 2) 이사회 구성에 있어서 양방 동일수제를 폐지함 3) 신학교육에 있어 질적 교육보다 양적 교육에 기울어졌음. (2) 정치문제: 1) 다수에 의하여 불법을 감행하고 있음 -부산노회는 합동원칙을 어기고 노회명칭과 회수를 수로서 결정함 -고려신학교 복교를 불법 정죄하고 2) 고신을 협조하는 교회와 교역자를 강압함 -동일교회 교역자 청빙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음 -2영도교회에 전권위원을 보내어 고신을 지지하는 교역자와 교인을 강압하였음 -고신 교수들을 강사로 넣었다 하여 학생신앙운동전국대회를 하지 못하는 결과에 이르게 하였음. (3) 신앙노선 문제: 경건하고 순수한 칼빈주의 신앙노선을 버리고 세속주의, 타협주의, 편리주의로 나가며 불순한 신앙운동과 단체에 가담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음. 고신측은 또한 “合同釜山老會總會現在動向”을 다음 세 가지로 집약하고 있다. (1) 고신측 지도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완전히 교권을 장악하려 함 (2) 분열을 전제로 하고 고신측 교인을 선동하고 교회와 교회당 수탈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음 (3) 고신측의 그림자까지라도 한국교회에서 지워버리려고 함. 그리고 나서 성명서에는 “우리의 진로”를 7가지로 밝혔다. (1) 우리는 합동전 노회와 총회로 돌아간다. (2) 우리는 칼빈주의 신학을 고수한다. (3)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준수한다. (4) 우리는 합동전 고신측 헌법과 규칙을 채용한다. (5) 우리는 칼빈주의 생활원리에 입각한 경건생활에 힘쓴다. (6) 우리는 복음전도사업에 힘쓴다. (7) 전국적인 신앙동지를 규합하여 총회를 구성하고 합동전 총회를 계승한다.

(25)장희근, 韓國長老敎會史, 433-436.

(26)Ibid., 437-440.

(27)정규오, 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장로교 교회사, 341.

(28)大韓예수敎長老會 總會 歷史編纂委員會, 韓國長老敎史(고신),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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