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허순길 목사 전고려신학대학원장
‘고신 초기와 박윤선’이란 제목을 받고 고신 2세대에 속한 사람으로 박윤선의 신학과 신앙과 생활이 초기 고신교회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기억하고 아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유익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고려신학교가 설립 개교한 것은 1946년 9월 20이었고, 고신교회가 총 노회로 출발한 것이 1952년 9월 16일이었다. 필자가 고려신학교 예과에 입학한 것은 1954년 9월이었다. 그러니 이때 고려신학교는 개교한 지 8년, 고신교회가 형성된 지는 2년이 된 때였다. 수년 전부터 전국 SFC 수양회나, 지도자 수련회 등에 참석하여 박윤선 교수의 강의나 설교를 가끔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를 가까이하고 자주 듣게 된 것은 신학교에 입학한 1954년부터였다. 예과 재학 중에 예과 2년제가 4년제로 바뀌어 4년제 대학 과정(칼빈학원)이 되었다. 1957년 9월 칼빈학원 4학년 2학기 때 필자는 박윤선 교장 집의 가정교사로 부름을 받게 되어 이제 그와 개인적인 밀접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다음해 3월에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자 박윤선 교장은 자기의 비서(조교)로 도와 달라는 요청을 하셨다. 이후 필자는 신학교 재학 3년 동안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를 전적으로 돕게 되었다. 주로 그의 주석원고를 정리하여 출판하는 일과 외국에 보내는 편지를 타자하며 돕는 일이었다. 1960년 10월 신학교 졸업반 마지막 학기를 맞았을 때 박윤선 교장은 주일 성수 문제로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고신 초기 약 4년 동안 박윤선과 가까이 지내게 되므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많은 유익을 얻게 되었다. 이제 필자가 그를 가까이 모시고 지나오며 보고 아는 대로의 고신 초기와 박윤선에 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고신의 터를 놓은 신학자 박윤선 

고신교회는 고려신학교를 떠나 생각할 수 없고 고려신학교는 박윤선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 박윤선은 고려신학교 설립에 동참하였고, 고신교회 출발 초기 고신의 신학과 신앙의 방향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한상동, 주남선 두 목사는 일제 시 신사참배 항거로 평양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해방되어 출옥하게 될 때 해야 할 일을 구상했고, 해방되어 출옥하자 신학교를 세워 순교적 신앙을 가진 충성스러운 교역자를 양성할 뜻에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주남선 목사는 곧 남하했으나 한상동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봉사하게 되어 서로 멀리 나뉘어 있어 그들이 공유했던 뜻을 바로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약 반년 후인 1946년 4월에 한상동 목사가 남하함으로 두 분은 신학교를 세울 뜻을 이룰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신학교 설립은 뜻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먼저 가르칠 신학자가 있어야만 했다.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 두 분 다 순교적 신앙을 가진 신실한 분들이었지만 평범한 목회자이지 신학자는 아니었다. 신학교 설립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들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신실한 정통신학의 지식을 갖춘 신학자를 찾아야만 했다. 더욱 순교적 신앙을 가진 충성스러운 교역자 양성을 위해서는 이것이 필수적이었다. 해방 당시는 오늘날과 달리 한국 교계에 손가락으로 헬 수 있는 수명의 신학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 중에도 정통신학을 갖춘 신학자는 극소수였다.  

한상동 목사는 38선을 넘어 남하하자마자 마침 지난날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친 경험이 있고, 만주 봉천 동북신학교에서 교수한 적이 있는 박윤선이 이미 남하하여 서울 이태원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박윤선은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이미 강사로 봉사하면서 총회의 표준주석 편집부에서 일했고, 고린도후서 주석을 낸 잘 알려진 젊은 주경신학자였다. 특별히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장로교 정통신학의 보루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두 번 유학한 분이라 의심할 수 없는 장로교 정통신학자요, 자기들의 신학교 설립 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분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그를 하나님이 그의 신학교 설립을 위해 보내주신 학자로 믿고 바로 그를 찾아가 신학교 설립에 동참하고 교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박윤선은 해방이 되자 만주에서 귀국하여 잠시 고향을 들른 뒤 남하하여 신학교육의 기회를 찾고 있던 터라 출옥한 충복들이 원하는 신학교 설립에 기쁘게 동참하기를 원하고 쾌히 동의하게 되었다. 그는 평생 성경연구와 가르치는 일을 소명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46년 5월 박윤선은 부산을 거쳐 진해로 내려와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등 여러분과 함께 모여 신학교 설립을 논의하였다. 당시 여러분이 모여 신학교 설립을 위해 함께 논의했지만 설립자는 주남선, 한상동으로 정했다. 이것은 그 모임에서 박윤선이 제의함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설립위원들은 신학교 설립 전지작업으로 그해 6월 23일부터 8월 10일까지 약 두 달 동안 진해에서 박윤선을 강사로 신학강좌를 갖기로 합의하고, 고려신학교 설립취지도 발표하기로 했다. 이 설립취지문은 박윤선의 작품이었다. 이 취지문에는 해방 후 한국 교회에 평양신학교의 복구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남한에 자유주의 신학교인 ‘조선신학교’만 있는 환경 속에서 “正統信仰運動 곧 明白한 正統體系에 있는 眞理運動을 急要”함을 말함으로 설립 이유를 들었으며, “正否와 是非를 斷하는 칼빈주의의 神學을 樹立하고자 한다.”라고 함으로 그 설립목적을 밝혔다.(1) 두 달 동안의 진해 강좌에서 박윤선은 혼자 성경신학, 조직신학, 창세기, 시편, 로마서, 히브리서, 계시록 등 여러 과목을 강의함으로 짧은 기간 동안 신학공부 대한 관심을 높였다.(수료증 참조) 이 신학강좌에는 63명이 참석했고 그 가운데는 이인재, 손명복, 황철도, 홍반식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고려신학교가 개학하자 입학하게 되었다.  

1946년 7월 9일에 진해읍 교회에서 경남노회 제47회 임시노회가 열렸다. 이때 신학교 설립 기성회는 신학교 설립의 인허와 협력을 요청했다. 노회는 이 청원을 받아드렸다. 그해 9월 20일 고려신학교가 부산진에 있는 금성중학교 한 교실에서 박윤선을 교장서리로 세우고 개교를 했다. 그를 처음 교장서리로 한 것은 정통신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초빙하려는 데 있었다. 설립자들은 고려신학교를 평양장로회 신학교의 전통을 이어가는 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지난날 그 학교의 교수였던 정통신학의 거장 박형룡을 교장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로써 이제 한 달 전에 마친 진해 신학강좌는 고려신학교 개교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때 참석한 분들의 상당수가 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려신학교를 개교했을 때 전임교수로 봉사한 신학자는 박윤선뿐이었다. 목회자들인 한상동, 한명동, 이상근, 박손혁 목사가 시간 강사로 도왔다. 이때 박윤선 교수는 주경신학, 조직신학, 성경신학, 심지어 성경원어 과목까지 가르쳤다. 대부분의 중요한 과목을 혼자 가르쳤다. 그러니 고려신학교 초기에 그는 온 종일 강의를 했던 것이다. 그 후 10월 초에 미 정통장로교회 선교사 한부선(“B.F.Hunt)이 내한하여 돕기를 시작했고, 이어 미 성경장로교회 선교사 마두원, 최의손, 함일돈이 내한하여 도움을 주었다.  

이로 보건대 고려신학교는 박윤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실제 고려신학교의 설립자 중 한 분이었으며, 고려신학교의 신학의 터를 놓았을 뿐 아니라, 고신신학을 주조한 분이었다.

2. 고신 초기 칼빈주의를 주도한 박윤선 

박윤선은 그 시대의 한국의 신학자들 중에 두드러진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특별히 칼빈주의와 칼빈주의 신학을 강조한 데 있다. 그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두 번 유학하여(1934-36, 1938-39) 메췐 박사(G. Machen)와 밴틸 박사(C. Van Til)의 지도 아래서 신약과 변증학을 전공하면서 비로소 칼빈주의가 무엇인 것을 깨달았고 거기 매료되었던 것이다. 

박윤선은 ‘성경과 나의 생애’라는 자서전에서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그를 가르쳤던 외국인 교수 일곱 분(마포삼열, 라부열, 이율서, 어도만, 업아력, 곽안련, 왕길지)과 본국인 교수 세분(남궁혁, 이성휘, 박형룡)에 관하여 한 사람씩 다 소개하고 난 다음 그들의 일반적인 신학적 입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상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적 보수의 입장을 간단히 기술한 것 같다. 그런데 이 신학교가 개혁주의(Reformed) 신학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명확하지 못하였다. 나는 신학교 재학 중에 ‘칼빈주의’(Calvinism)라는 말을 별로 들어본 적이 없으며, 교수들로부터 ‘성경신학’이란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성경신학이 없었던 그 시대에 교리들을 성경적으로 단 맛있게 가르쳤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 그때의 신학생들이 교수들로부터 근본주의를 받으면서 그들이 칼빈주의 차원에서 신학을 해득하지는 못하였다.”(2)  

펑양신학교 졸업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와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평양신학교 시절에는 보수주의이면서 주관적 체험을 탐구하는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평양신학을 마친 후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연구한 후부터는 칼빈주의(혹은 개혁주의) 신학을 재정비하게 되었다.”라고 했다.(3)  

이후 박윤선의 신학은 그의 교수였고 동역자였던 박형룡의 신학과는 개혁주의 신학을 강조함에 있어서 약간 다름이 나타났음을 보게 된다. 물론 교의학자인 박형룡과 주경학자인 박윤선이 신학적 강조점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두 분에게서 강조가 달리 나타난 사실을 쉽게 느끼게 된다. 

박형룡은 그가 1970년에 발표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전통’에서 “장로교회의 신학이란 유럽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라고 하고, 이어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란 이 웨스트민스터표준에 구현된 영미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한 과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교의신학’ 머리말에서 “팔십년 전 이 땅에 서양 선교사들이 와서 전해여 준 그대로의 바른 신학을 새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필자의 염원”이라고 밝혔다. 곧 박형룡은 한국 초대 선교사들이 전해 준 신학을 영미장로교회의 청도교 사상이 가미된 개혁주의 신학이라 보고 이를 새 세대에게 전달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박윤선은 초대 선교사들의 신학에서 칼빈의 개혁주의 신학보다 근본주의 신학이 짙게 나타난 것을 보았고, 그는 이보다 네덜란드를 중심한 구라파 대륙의 칼빈주의 신학에 매혹되고 이를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메췌과 밴틸 아래서 칼빈주의 신학을 재정비하고, 곧 네덜란드어를 익혀 카이퍼, 바빙크, 스킬더의 교의학 책들과 흐로솨이데, 흐레이다너스 등의 주경을 접한 결과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박윤선은 어떤 수식어가 붙은 개혁주의를 말한 일이 전혀 없고 언제나 칼빈주의(개혁주의)라는 말만을 사용했다. 

박윤선은 이제 칼빈주의에 매혹이 되고 칼빈주의에 집착하는 신학자가 되었다. 그는 이제 한국에서 칼빈주의를 강조하고 전하는 전도사가 된 셈이다. 고려신학교의 개교를 말하면서 “이 학교의 신학노선은 칼빈주의이다.”라고 하였고,(4) 지난날의 그의 교수 생활을 돌아보면서 “나의 교수생활에 있어서 언제나 불타는 가슴으로 학생에게 주고자 한 것은 칼빈주의 신학이다. 그 이유는 칼빈주의 신학이야 말로 성경을 그대로 믿는 말씀의 신학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5) 

결과 고려신학교에서는 처음부터 칼빈주의가 자연스럽게 강조되었고, 고신교회에서도 일반신자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라는 신학적 어휘가 유행이 되고 자리를 잡았다. 칼빈주의와 개혁주의는 고려신학교와 고려파교회 안에서 동의어로 쓰였다. 이때 고신신학은 칼빈주의였다. 고신의 칼빈주의 신학은 박윤선이 주조한 것이었다. 고신 초기에 칼빈주의라는 말은 한국교계에서 고신의 독점용어처럼 여겨지고 사용되었다. 박윤선은 고신초기 고신을 칼빈주의 교회로 만들기 위해 온 정렬을 기울였다.

3. 순수한 개혁교회를 지향한 박윤선 

고신 초기 박윤선은 순수한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위해 봉사를 했다. 이는 특별히 1947년 10월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던 박형룡 박사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듬해 5월에 지난날 함께 했던 네 외국 선교부(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캐나다연합교회)와 협력하고 장로교회 총회를 배경하여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떠나게 되었을 때 그를 따르지 않고 고려신학교에 그대로 머문 데에서 나타났다.  

박형룡은 고신을 떠나기 전 그를 불러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박윤선이 이 청을 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평양신학교 3년간 그의 교수였고, 그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가도록 추천해 준분이었으며, 일제 시 만주 봉천에 있는 신학교에서 동역자로 봉사한 적이 있었던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있었을 때 총회 표준성경 주석 편집부장이었던 박형룡 아래서 편집부의 일을 맡아 일한 적도 있었다. 그는 박형룡의 많은 사랑을 받아온 제자의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윤선은 그의 권유와 요청을 거절하고 고려신학교에 머물렀다. 

물론 박윤선은 박형룡과 달리 고려신학교의 설립 초부터 관련한 처지에 있음으로 고려신학교에 대한 애착이 그와는 전혀 다를 수 있었다. 그는 실상 주남선, 한상동과 함께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총회를 배경하고 신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박형룡과는 달리 그의 스승인 메췐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처럼 당시 한국교회의 정치적 정항을 고려했을 때 얼마 동안 총회의 조직과 교권을 벗어난 신학교의 독립적 운영을 원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당시 박형룡을 따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이보다 다른 데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이에 대해 분명하게 밝힌 일은 없다. 하지만 그가 평생 순수한 교회 건설을 바라고 노력해 온 것을 생각할 때 이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한국에서 대세를 이루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선교사들은 미북장로교회(당시 연합장로교회)에 속한 분들이었다. 그들을 파송한 북장로교회는 이미 자유주의를 수용하였고 그 교회 신학교육의 중심인 프린스톤 신학교가 1929년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재편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메췐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신학 교수들이 장로교신학의 보수적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프린스톤 신학교를 나와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박윤선은 바로 그 신학교에 유학을 했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지원하는 교회들이 1936년에는 북장로교회(연합장로교회)를 떠나 미정통장로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박윤선은 누구보다 이 역사와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박형룡이 프린스톤 신학교에 유학하여 메췐에게서 배우고 그의 정통성을 잘 알고 있었음으로 박윤선을 뭬첸의 웨스트민스터에 추천했지만, 그는 뭬첸이 1929년 프린스톤신학교에서 나오기 전 프린스톤에서 공부했으므로(1933-6) 역사적 현실을 보는 시각이 박윤선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었다. 

나아가 1946년 10월 초 한국에 와서 고려신학교에서 그와 동역하는 한부선 선교사는 그의 유학 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동급생 친구였다. 한부선의 정통신학과 정통교회에 대한 애착은 남달랐다. 그는 북장로교가 자유주의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그의 부모와 장부모가 속한 북장로교회를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했고, 이 신학교를 지원하는 교회들로 조직된 미 정통장로교회에 가담하여 이 교회의 선교사로 한국에 나와 고려신학교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한부선은 박윤선의 귀한 친구였고 이제 고려신학교에서 그의 동역자였다. 그러니 박윤선은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과 협력하는 것은 한국의 정통적 장로교회 건설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어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가 박형룡을 따라가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여기기 있었다고 보게 된다.  

수년 후 박형룡은 외국인 선교사 단체들(미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캐나다 연합교회)과의 협력 추구가 잘못되었음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 때를 맞게 되었다. 박형룡은 서울에 가서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고 신학적으로 포괄주의적인 네 외국인 선교단체와 협력하며 도움을 받고 지났으나 그들과의 동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침내 교회 내부에서 WCC에 대한 견해 차이로 수년간 싸우다 1959년 총회가 WCC 찬동 측인 연동, 반대 측인 승동 측으로 분열되었을 때 그가 협력을 받아 온 선교사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물러서게 되었던 것이다. 

박윤선은 신학적으로 포괄주의적 입장에 선 외국 선교단체들과 협력을 하고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교회에 자유주의 세력을 수용하는 길이 되고, 순수한 개혁주의 교회를 건설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것이다. 그는 고려신학교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같은 정통신학교가 되기를 원하고, 순수한 개혁주의 신앙에 자리 잡은 순수한 이 나라 장로 교회 건설을 위해 봉사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박윤선은 교회관에 있어서 그의 입장이 분명했다. 그는 교회의 WCC적 혼합주의, 포괄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50년에 그가 써 낸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어디로 가나?’하는 펨프렛에서 세계교회협의회에 관하여 이렇게 썼다. “우리 장로회는 세계기독교연합회(WCC=세계교회협의회-필자 주)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장로교 교리에 위반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위의 세계기독교연합회의 움직임이 전통적인 정통주의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통주의가 아닌 사실은 누구나 다 인정합니다. 우리 장로교회더러 그 옳지 않은 회(세계기독교연합회)와 보조를 같이 하며 합류하라고 가르치는 분들도 그것을 자증하고 있습니다.”(6) 이 글을 낸 때는 고신이 총회로부터 축출을 당하기 바로 전이었고, 당시 장로교회 총회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WCC 창립대회에 김관석 목사를 대표로 파송하여 참가함으로 회원교회가 되어 있었다. 

박윤선이 고신 교회생활에 중심이 되어 온 때, 고신 교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고 정통의 순수성을 지켰었다. 고신은 1948년에 창립된 WCC에 반대하여 같은 해에 창립된 보수적 국제기구인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 협의회의 회장인 맥인타이어(C. McIntire)가 고신을 여러분 방문하고 회원 가입해 주기를 바랐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국제기구가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이외에 침례교를 위시한 여러 종류의 교파 교회들을 포함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가 동서 냉전 시대였다 해도 지나치게 정치적인 기구로 나타나 수수한 교회적 국제기구로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초기 고신은 박윤선의 신앙적 지도 아래 신학적인 포괄주의를 멀리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교회적인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4. ‘오직 성경’의 원리에 선 박윤선  

박윤선은 “오직 성경만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줄 확신하고, 성경을 바로 알고, 그대로 전하는 것이 사도적 전도라고 믿으며 살았다.”라고 했다.(7) 그는 모든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 어떤 신학자들이 어떤 성경의 부분을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여(예 창19:30-38) 그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성경 저자의 진실성을 거기서 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고 한다.(8) 그는 성경의 무오를 믿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절대 진리로 받아들인 것이다. 결과 그는 자율주의를 반대하고 타율주의를 제창하며, 계시의존사색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학자들은 성경의 교훈대로 순타율주의(純他律主義)에서 말해야 된다. 신학자에게도 ‘내가 말 한다’는 위치가 전혀 부여되어 있지 않다. 그는 다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 들어야할 위치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만이 그의 지켜나갈 궤도이다.”라고 했다.(9)  

그는 이렇게 개혁주의 핵심 모토의 하나인 ‘오직 성경’의 진리를 강의실에서 경건회에서 계속 강력하게 전했다. 그래서 초기 고신교회는 객관적인 성경말씀의 진리를 떠난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주장을 따르지 않았다. 이것이 고신 초기 교회 생활의 순수성을 보존하게 했다. 

해방 후 한국에는 각종 신비주의적 종교혼합주의적 이단 운동이 나타나 교계에 혼란을 가져왔다. 박태선 이단은 주관주의적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었으며, 나운몽 문선명 이단은 종교혼합주의적 색채가 분명했다. 박태선은 김치선 박사가 시무하던 서울 남산장로교회 출신이었음으로 그로 말미암아 장로교회가 입은 피해는 더욱 컸다. 1955년 박태선이 혜성처럼 나타나 서울 남산 옥외집회를 시작으로 전국을 다니며 옥외집회를 인도했다. 그가 처음 등장했을 때 장로교회 상당수 지도자들이 그를 도왔고, 소위 장로교회 총회장을 지난 권연호 목사를 위시한 1백여 명의 목사들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안찰기도까지 받았다. 이로 인해 교회지도자들이 이 이단 운동의 출발을 돕게 되었다. 1957년 6월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수가 10만이 된다고 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을 ‘동방의 의인’ ‘감람나무’라 일컬으며 이단의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경기도 소사를 시작으로 여러 곳에 신앙촌을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의 재산을 착복했다. 그의 등장으로 많은 신자들이 그를 따르고 많은 교회들이 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 때 고신교회와 성도들은 전혀 그의 형향을 받지 않았고 동요 되지 않았다. 이는 고려신학교를 중심하여 모든 고신 교회 안에는 ‘오직 말씀’의 생활이 강조되고 정착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윤선은 ‘오직 성경’의 원리가 교회의 모든 생활에 정착되기를 원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자신의 어떤 위치나 정치적인 고려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부터 예배당 확보를 위한 소송을 반대한데도 ‘오직 성경’의 생활의 원리를 따른 때문이었다. 소송을 하는 분들은 여러 가지 법적 합리적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박윤선은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원했다. 그는 1957년 3월 파수군지에 ‘우리의 갈 길’이라는 글과 ‘나의 갈 길’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첫 번째 글에서 진리를 위해 선한 싸움을 싸워오는 우리가 예배당을 안내어 주겠다고 소송까지 하는 것은 ‘신덕’을 잃게 되고 성경 고전6:1-7을 어긴 것이라 했다.(10) 그는 성경 고전 6:7의 말씀대로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났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총회나 이사회가 이 소송문제데 대한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자 1957년 초에 교장직을 사임하고 학교를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사회가 그의 뜻을 수용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8개월 후 복귀하게 되었다.(11) 그에게 는 ‘오직 성경’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가장 중한 것이었다. 고신교회 초기는 그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순종의 생활이 어느 교회보다 강조되었다.

5. 고신의 부흥을 이끈 박윤선 

박윤선은 신학과 영력을 겸비한 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신학자이면서 고신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가 교실에서 행하는 강의는 언제나 열강이었고, 그의 설교도 언제나 열정에 차 있었다. 그의 영력은 그의 기도생활에서 왔다고 본다. 그의 친구였던 방지일 목사는 숭전 시절부터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죄를 숨겨두지 않고 회개하게 된다. 회개하게 될 때 성령의 충만을 받고 영력을 갖춘 사람이 된다. 이 사실을 박윤선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일제 시 한번 범한 신사참배의 죄를 회중 앞에서 회개했다. 물론 그는 개인적으로 그 죄를 오래전 이미 회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신앙양심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집회 중에 공적으로 회개했다.  

6.25 전쟁 중 부산 초량교회에서 교역자들을 대상한 부흥회가 있었을 때 설교자로 봉사한 그는 신사참배를 한 죄에 대해 공중 앞에서 회개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도 단 한번 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그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때에 그 죄를 회중 앞에 고백하였던 것이다.”(12) 그는 다른 곳에 이렇게도 쓰고 있다. “나는 기도하면서 계속 울어본 적이 있다. 우는 가운데 나의 마음에 평강이 임했다. 그것이야 말로 단 맛 있는 슬픔(sweet sadness)이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 7:10)이었다.”(13) 

필자도 그의 조교로 일하면서 그가 깊이 기도하는 분인 것을 알았다. 신학교 재학 3년 동안 그의 일을 도우면서 밤이면 교장실에 있는 그가 종종 누어 쉬는 침대에서 잤다. 새벽이 되면 나는 교장실 옆에 있는 도서실로 자리를 옮겨가 기도하고, 그는 교장실에 와서 기도했다. 하루 새벽은 크게 슬픈 소리로 “나는 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는 말만 약 한 시간 동안 반복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하며 회개하며 울었는지 모른다. 어떻든 그는 깊이 회개하고 기도하는 진실한 신학자였다. 그러기에 그는 영력이 있었다. 경건회 시간 그의 설교는 언제나 큰 감화를 주었다. 은혜를 받은 대부분 학생들은 다음 주일 그들이 봉사하는 교회에 가서 박 교장의 설교를 그대로 전했다.  

그가 고신 초기에 교수와 교장으로 봉사하는 동안 그가 말씀을 전했을 때 두 번 부흥이 일어났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50년 4월 어느 날 고려신학교 경건회 시 그는 요21:15-17을 본문으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를 근거로 설교했다. 이 설교 후 그는 누구든지 한사람 일어나 기도하라고 했다. 이 때 한 학생이 일어나 기도했다. 그 기도는 눈물겹고 진실한 기도였다. 그를 이어 다른 학생이 일어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그 뒤를 이어 연달아 학생들이 기도함으로 장내 전체가 기도의 분위기로 채워졌다. 이 때 학교 측은 강의를 전폐하고 학생들의 기도가 중단되지 않게 했다. 모든 학생들이 상상도 못할 죄까지 자백하며 기도했다. 이 자복 회개의 기도는 온 종일 이어졌고 그 기도회는 한주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기도운동은 부민동에 있는 고려고등 성경학교로 확산되고, 고신 교회 전체에로 확산되었다. 박윤선은 이 회개운동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한국 땅에 환난이 이르기 전에 이처럼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환난을 대비하도록 하신 귀한 섭리였음을 후일 알게 되었다.”(14) 이 기도로 말미암은 회개운동이 있고 두 달 지난 후 6.25 전쟁이 일어났다. 

두 번째 부흥은 같은 해 일어난 6.25 전쟁 중이었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서울을 위시하여 전국에서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 왔다. 피난 온 교역자들도 그 수가 많았다. 9.28 수복이 있기 얼마 전이었다.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는 초량교회에서 피난민 교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부흥집회를 갖게 되었다. 강사로는 박형룡, 김치선, 박윤선이 함께 봉사하게 되었다. 사흘째 되던 날 박윤선 목사가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다. 이때 참석한 교역자들이 통회 자복함으로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울산, 온산에서도 집회를 가져 거기에서도 큰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다. 박윤선은 이 회개사건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은, 이처럼 교역자들의 통회 자복의 회개가 있은 후에 유엔(UN)군이 승리하고 공산군이 삼팔선 이북으로 물러가게 된 사실이다. 회개의 사건에 뒤이어서 승전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신 것이다.”(15) 

박윤선은 기도의 능력과 응답을 믿고 기도 생활에 충실한 분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강의는 열강이었고 그의 열정적 설교에는 큰 감화와 부흥이 뒤따랐다. 그는 고신 초기에 신학교와 고신 교회에 열정적 말씀봉사로 영적활력을 불러온 분이었다. 

맺는 말 

박윤선은 1946년 9월부터 1960년 9월 고신을 영구히 떠나기 까지 만 14년을 고려신학교의 교수와 교장으로 봉사했다. 41세에서 55세에 이르는 그의 생의 황금기를 고려신학교와 고신 교회 건설을 위해 봉사한 것이다. 고려신학교 15회 졸업생들이 그에게서 배운 그의 마지막 제자들이었다. 10여 년 전에 이미 그의 마지막 제자들 이 모두 은퇴하여 목회현장에서 떠나 있다. 필자도 그 중 한사람이다. 그래서 고신교회에는 박윤선의 그림자가 지워진지 오래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봉사한(1980,11-1988,6) 합신 측 교회에는 그로부터 배운 50대, 60대의 목사들이 현재의 목회현장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니 합신 측에서는 아직 박윤선의 신학과 신앙의 영향이 크게 나타나고 있다. 

고신은 1960년 박윤선을 떠나보냄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그 해 9월 총회가 장신 승동측과의 합동을 위해 “합동추진 위위”을 선정한 후 바로 고려신학교 이사회에 의한 박윤선의 해임이 뒤 따랐다. 이후 합동의 과정이 과속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고신은 보수진영의 통합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고신측 지도자들에게는 당시 주일성수에 관한 의견차이로 예리하게 맛서 온 고려신학교의 박윤선 시대의 막을 내리고 승동측과의 합동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주도하려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것이 큰 오산이었음이 1년이 못가 들어나고 말았다. 승동측과의 합동이 고신 안에 박윤선이 떠나고 남긴 공간을 메워줄 수 없었고, 고신지도자들은 곧 승동측이 주도하게 된 총회 교권의 언저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합동으로 고신은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것을 잃었다. 고신 신학을 개척한 신학자를 잃었고 3년 동안의 역사의 단절을 겪었으며, 고신정신의 퇴색을 초래했던 것이다. 합동에 대한 깊은 사려와 선명한 이유가 결하고 현실적은 문제 타결을 위해 추진한 졸속한 합동이 고신 교회에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초래하고 말았다. 합동과 박윤선의 퇴출의 역사는 고신에 많은 교훈을 주었다.  

현재 고신인들 가운데 고신초기를 알기 원하고 고신의 신앙적 유산을 찾고 보존하기를 원하는 분들이 있음은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물론 고신 교회의 선진들인 한상동, 주남선 등이 남긴 귀한 순교적 신앙, 교회의 정화, 회개, 참된 교회의 재건 등의 귀한 신앙적 유산이 있다. 그런데 고신 초기에 고신 교회를 참된 개혁주의 교회로 가꾸고 내외에 개혁주의 신학, 신앙의 정체를 드러내게 한 분은 박윤선이었다. 

신학적 교리적 포괄주의와 WCC적 일치운동이 주변을 강타하고 있는 오늘, 고신교회 공동체 안에 박윤선처럼 칼빈주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참된 개혁주의 교회를 건설하기 원하는 진실한 봉사자들이 나와 개혁주의 고신교회의 정체성을 찾고 쇄신하는데 크게 봉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말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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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상규, 최수경 편집, 한상동 목사; 그의 생애와 신앙, 부산:글마당, 2000, 311-313

(2)박윤선, 셩경과 나의 생애, 영음사, 1992, 55,56

(3)박윤선, 같은 책 69

(4)박윤선, 같은 책 97

(5)박윤선, 같은 책 147

(6)박윤선,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어디로 가나? 1950, 18

(7)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89

(8)박윤선, 위의 책 85

(9)박윤선, 위의 책 96

(10)피수군.[51.1957, 3, 8-18

(11)허순길, 한국장로교회사(고신교회중심),2008, 도서출판 영문, 456-58

(12)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106

(13)박윤선, 위와 같은 책, 60

(14)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100,101

(15)박윤선, 같은 책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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