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 최윤배 교수 장신대 조직신학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가 1517년 10월 31일에 발표한 「95개조」가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중요한 첫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는 개신교의 시발점을 루터의 제자인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2.16-1560.4.19)이(2) 작성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1530)을 기점으로 잡는다.(3) 왜냐하면 아마도 이 신앙고백 속에 개신교 최초로 교회의 두 가지 표지(ecclesiae notae; marks)가 고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순수한 종교적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루터교회-독일인 루터(1483-1546)는 천주교회의 신부였다. 교회에 대한 개혁주의자로서 정통교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주장했다. 1517년에 교황권을 거부하고, 교회에서 파문된 후 미사, 성체, 성직자와 수도사의 독신생활을 반대했다. 드디어 1530년 독립된 교파를 이루었다. 루터는 대사(大赦)논쟁을 계기로 하여 당시에 교회적 경제적 사회적 질서에 대한 불만을 모두 표현하며 종교개혁을 이끌어 갔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순순한 종교적 사건이 아니다.”(4) 

종교개혁을 시도한 종교개혁자들은 부패한 중세 로마가톨릭교회 안에서 로마가톨릭교회를 개혁할 의도였지,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와 결별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립하여 개신교(프로테스탄트교회)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후 교회사속에서 오늘날까지 개신교 내에서 다양한 교파들이 생겨났고, 특히 한국장로교회 내에서 세계교회사 속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교회분열을 통해 수많은 교단들이 생겨났다.

이 같은 현상을 근거로 상당한 신․구교 신학자들은 물론 로마가톨릭교회 교인들은 “개신교의 중요한 특징은 교회분열”임을 기정사실화한다. 그리고 교회분열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이 세계 개신교 내에서 개혁교회(장로교회)로 향하고 있으며, 특별히 한국장로교회로 향하고 있다. 최근 영국 캠브리지대학교에서 펴낸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7.10-1564.5.27)에 대한(5) 안내서에 실린 한 논문은 교회 “분열은 한국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현저한 특징”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6)

그러나 미국의 칼빈연구가 요한 맥닐(John T. McNeill)은『프로테스탄티즘의 일치사상』이라는 책에서 칼빈을 비롯하여 여러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에 대한 이상(理想)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주장한다.(7)

요한 맥닐의 위의 주장이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창시자로 간주될 수 있는 부처(Martin Bucer = Butzer, 1491.11.11-1551.2.28)와 칼빈에게는 틀림없이 해당된다는 사실이 본고를 통해서 밝혀지기를 필자는 기대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두 개혁파 종교개혁자들(the reformed reformers)인 부처와 칼빈의 생애를 먼저 간략하게 기술하고, 두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의 교회 “연합운동”에(9) 대한 사상과 실천을 논의하고, 마지막으로 결론에 이르고자 한다. 

Ⅱ. 부처와 칼빈의 생애 개요

1. 부처의 생애(10)

오는 2017년에는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서구의 교회와 신학은 이미 여러 가지 행사들과 학술대회들을 기획하며,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한국기독교학술원 주최로 “종교개혁 500주년기념사업회”가 2011년 8월 27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발대식을 갖은 바 있다.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똑같이 중요하지만, 특히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Straßburg)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는,(11) 그가 교회와 신학에 공헌한 것에 비하면,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잊혀진 종교개혁자”임에 틀림없다.(12) 왜냐하면 루터는 독일에서, 칼빈은 제네바에서는 물론 그의 전통을 잇고 있는 다양한 국가나 여러 도시에서, 츠빙글리와 불링거는 스위스에서,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영웅처럼 존경을 받았지만, 부처는 그의 사후(死後) 어느 나라나 어느 도시에서도 집중적으로 기념되거나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연구에서도 부처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사실상 그가 개혁교회의 원조(元朝)로서 칼빈에게 끼친 영향은 절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한국개신교회에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장로교회가 2009년 칼빈탄생 500주년을 맞이하여 칼빈에 대한 연구는 상당한 르네상스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지만, “칼빈의 영적인 아버지”로 알려진 부처에 대한 연구는 국내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현재 국내에서 마르틴 부처 연구가로는 필자와 황대우 교수가 있을 정도이고,(14) 부처와 관련하여 번역 출판된 책은 지금까지 단 두 권이 있을 뿐이다.(15)

우리는 본고에서 조직신학적 내용보다는 주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마르틴 부처가 종교개혁운동과 관련하여(16) 그의 전(全) 생애를 간략하게 스케치하고자 한다.(17) 토마스 아퀴나스,(18) 에라스무스,(19) 루터,(20) 츠빙글리,(21) 재세례파와 열광주의 운동,(22) 쾌락․자유주의파,(23) 기타 당대의 다른 사상과 종교 등은(24) 부처에게 부정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는 “말씀의 신학자, 성령의 신학자, 교회의 신학자”로서 자신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을 항상 견지했다.(25)

부처는 1491년 11월 11일에 그 당시 남부 독일이었던 엘자스(Elsaß) 지방의 쉴레트쉬타트(Schlettstadt; Sélestat)에서 태어났다. 부처는 이곳에 있는 유명한 고전 라틴어 학교를 다니면서, ‘현대경건 운동’(devotio moderna)과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5세 때 쉴레트쉬타트에 있는 도미니칸 수도원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철저히 연구했다. 그는 곧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의 저서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부처가 접한 에라스무스의 작품들 중에 하나가 『비평신약성서』(Novum Instrumentum)인데, 이것은 공식적인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Vulgata)로부터 벗어난 이탈(離脫)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헬라어 텍스트와 함께 실린 에라스무스의 새로운 라틴어 번역본이다. 1515년 말경에 그는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갔다. 여기서 그는 그가 이미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갖고 배웠던 인문주의에 다시 관심을 기울였다. 이곳에서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도미니칸 수도원으로 옮긴 후에 부처는 루터가 1518년 4월 이 도시의 동료 어거스틴파들과 논쟁할 때 여기에 참석하고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지지자였던 부처는 이때부터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에 특별히 심취하면서 루터의 제자, 소위 ‘마르티안’(Martian)이 되었다.(26)

부처가 1523년 5월 중순 스트라스부르에 왔을 때, 이 도시에서는 이미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3주 만에 그는 시의회로부터 라틴어로만 요한복음서를 강해할 수 있도록 보장받았다. 8월 중순경에 그는 스트라스부르 교회당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 해에 그는 그의 최초 작품인『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Das ym selbs, 1523)를 출판했다.(27) 부처는 유명한 대부분의 국제 종교 간의 대화 모임(가령, Regensburg, 1541)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울름(Ulm), 쾰른(Köln), 특히 헤센(Hessen) 지방 등에 초청되어 종교개혁의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고, 조언했지만, 그는 특별히 교회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영국에 망명한 해인 1549년까지 내내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역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사반세기가 지나서 부처는 1549년 4월에 스트라스부르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쉬말칼텐 전쟁에서 개신교(종교개혁 진영)를 패배시킨 황제 칼5세에 의해서 제안된 󰡔아우구스부르크 임시안󰡕(Augsburger Interim, 1549)에 대해 부처가 결사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임시안의 문서는 사제에게 결혼을 허용하고, 평신도에게 떡과 잔을 나누어주는 이중 배찬을 허용한다는 점에서만 종교개혁 진영 입장과 일치하고, 이외의 모든 예배의식과 교리에서는 로마가톨릭교회 입장을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처에 의하면, 이 임시안의 해결방법은 개신교 종교개혁 진영에 대한 지엽적인 허용에 불과했다. 여러 곳에서 온 초청장들 중에서 부처는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와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주교의 초청장을 선택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2년간을 캠브리지 삼위일체 왕립대학교의 명예교수(Regius Professor)로 지냈다. 여기서 부처는 『공동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 1552)의 개정에 공헌하였고,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위한 탁월하고도 포괄적인 청사진으로서 『그리스도의 왕국론』(De regno Christi, 1551/1557)을 써서 어린 왕 에드워드 6세에게 새해 선물로 헌정했다.(28) 이 책은 영국교회의 그 당시와 그 이후의 지도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 예를 들면, 존 브래드포드(John Bradford), 메튜 파커(Matthew Parker), 에드문드 그린달(Edmund Grindal)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임종을 얼마 앞둔 상태에서 진행된 그의 에베소서에 대한 강의는 영국의 성경주석의 발전과 부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남부 독일 스트라스부르의 출신인 부처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1551년 2월 28일 타국인 영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프랑스인 칼빈이 타국 스위스 제네바에서 묻혔듯이, 부처도 타국 영국에서 묻혔다. 그의 시체는 무덤 속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수난을 당했다. 나중에 로마가톨릭 교도로서 악명 높았던 ‘피 묻은 메리 여왕’은 많은 종교개혁운동 옹호자들을 처형할 때, 부처가 종교개혁자였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무덤을 파헤쳐 다른 곳에 이장시킴으로써 부처는 무덤 속에서도 모욕을 당했다. 그 후 영국에서 종교개혁신앙이 꽃이 피었을 때, 엘리사베드 여왕이 부처의 무덤을 원 위치에 복원시킬 뿐만 아니라,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비문도 세웠다.(29) 

2. 칼빈의 생애(30) 

삼위일체론 또는 기독론 이단자(異端者)로서 화형당한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 문제를 중심으로 칼빈 자신은 물론 개혁․장로교회 전통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제기되곤 한다. 여기서 칼빈은 눈물 한 방울도 없는 냉혹하고 잔인하고 엄격한 사람으로 비쳐지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 당시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하다. 우리는 칼빈을 일방적으로 영웅으로 만들려는 위험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하지만, 그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려는 위험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도 칼빈은 공정하게 평가되어야할 필요성이 있다. 세르베투스 처형문제를 중심으로 칼빈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를 보다 더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들을 기억해야할 것이다.(31)

1) 16 세기 당시 유럽에는 자신과 종교적 신념이 다른 자들, 특히 기독교 이단자들을 처형하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관행이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21 세기에 교통법규를 위반한 운전자에게 벌칙을 부과하는 것과 같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매우 정상적인 관행이었다.

2) 각 기독교파들(로마가톨릭교회, 루터파, 재세례파, 개혁파 등)은 다른 교파들 내지 기독교 이단자들을 처형했는데, 로마 가톨릭에 의해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고, 상대적으로 개혁파(칼빈)에 의해서 가장 적게 처형당했다.

3) 세르베투스 처형시 사법권(사형집행권)은 제네바 시당국에 있었지, 칼빈 자신에게는 없었다.

4) 제네바시는 세르베투스를 사형집행하기 전에 많은 도시들과 교회들에게 세르베투스 형집행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설문에 응한 모든 도시들과 교회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사형에 처할 것에 동의하면서 회신했다.

5)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찾아가서 잘못된 교리를 취소하고, 올바른 교리를 받아들이라고 목회상담적 차원에서 여러 번 권고했다.

6) 제네바 시당국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기로 결정하자, 칼빈은 제네바 시당국에게 매우 가혹한 화형 대신에 보다 온건한 참수형을 택하도록 권고했다.

7) 다른 기독교종파들을 이단자로 처형한 어떤 기독교 종파들(로마 가톨릭, 루터파, 재세례파)의 후손들은 과거 자신들의 역사적인 과오에 대해 역사적으로 사과하지 않았지만, 칼빈주의자들은 20 세기 초 제네바에서 세르베투스 처형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회개의 비석을 세웠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제네바시나 칼빈은 종교의 자유가 전적으로 보장되는 오늘날의 관점과 기준에서 볼 때는 완전히 무죄한 것으로 간주될 수는 없을지라도, 16 세기 유럽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세르베투스 문제를 중심으로 제네바시나 칼빈은 당대의 어느 도시보다도 어느 누구보다도 어느 기독교교파보다도 더 합리적인 절차를 밟았고, 더 책임적으로 행동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칼빈주의자들은 그 같은 선배들의 오점조차도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하면서 회개의 비석을 역사적으로 세웠다. 

1) 노아용(Noyon) 시절(32)

요한 칼빈(Jean Calvin)(33) 또는 꼬뱅(Cauvin)은 1509년 7월 10일 오늘날의 벨기에와 프랑스 파리 사이에 있는 노아용(Noyon)에서 아버지 제라르(Gérard Cauvin)와 어머니 르프랑(Jeanne Le Franc)의 다섯 형제들 중 넷 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481년 시의 등기 직원이 되었고, 후에 노용 주교청의 비서, 노용 참사회의 대리인이 되었다. 노용시를 통치한 주교는 샤를 드 앙제(Charles de Hangest)였는데, 칼빈은 어려서부터 이 주교 집안의 자녀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후에 파리로 유학 갈 때 앙제 집안의 세 자녀와 함께 갔다. 칼빈은 1521년 12세 때부터 노용 대성당에 있는 라 제시느(La Gésine) 제단으로부터 나오는 수입의 일부를 받았다. 

2) 파리와 오를레앙 시절

칼빈이 고향을 떠나 언제 파리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1523년 경으로 추측된다. 그는 1527년 쌩 마르땡 드 마르테빌르(Saint-Martin-de-Martheville) 교구의 사제보의 성직록(사례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끝가지 로마 교회의 신부로 서품을 받지 않았다. 칼빈은 마르쉬 대학에서(Collège de la Marche) 꼬르디에(Mathurin Cordier)에게로부터 라틴어를 배웠다. 그리고 그는 몽때귀 대학(Collège de Montaigu)으로 전학하였다. 이 대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정통주의 요새로서 혹독한 신앙훈련을 시키는 곳으로 유명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는 이 대학의 똥뻬뜨(Pierre Tempête) 학장을 ‘전율하는 폭풍’(horrida tempestas)이라고 풍자하였고, 식사로 주어지는 ‘썩은 달걀’은 견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칼빈은 여기서 특히 유명론(唯名論) 철학을 접했고(Duns Scotus, William Ockham, Gabriel Biel 등), 1527년경에 이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성직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1528년부터 오를레앙(Orléans)에서 법학을 시작했다. 그는 명성이 높던 법률학자 삐에르 드 레뚜왈르(Pierre de l’Etoile)로부터 법학을 배웠다. 칼빈은 루터의 영향을 받은 볼마르(Melchior Wolmar)를 이 대학에서 만나 그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다. 칼빈은 1529년 가을에 부르쥬 대학(Collège de Bourges)에서 잠시 동안 이탈리아의 유명한 법학자 알치아티(Andreas Alciati)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오를레앙에서 3년의 수학 후 법학 학사를 받았다. 1531년 5월 26일에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그의 고향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1532년 1월에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칼빈은 인문주의 입장에서 1532년 4월 4일에 그의 처녀작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을 출판했다.

1530년대 초기의 칼빈의 행적은 지금까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특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것은 “언제 어떤 형태로 칼빈이 회심했느냐?”이다. 어떤 칼빈 연구가는 그의 처녀작 『세네카의 관용론』(1532) 속에 이미 그의 종교 개혁 사상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온전한 종교개혁자로서 칼빈이 아니라, 기독교 인문주의자로서 칼빈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칼빈의 회심의 방법을 둘러싸고 ‘갑작스런 회심’ 또는 ‘점진적 회심’으로 의견이 나누어진다. 칼빈의 점진적 회심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로마 가톨릭 진영의 칼빈연구가들인데, 그들은 칼빈이 ‘니고데모파들’의 신앙 형태를 취했다고 보거나 칼빈을 중세의 전통과의 연속성 속에서 보려고 한다.(33) 그러나 칼빈은 자신이 ‘갑작스런 회심’(subita conversione; a sudden conversion)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편 주석』(1557) 서문에서 이 사실을 신앙고백 형식으로 고백하면서도 정확한 날짜를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런데, 처음에 내가 교황(로마 가톨릭교)의 미신에 그토록 완고하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회심으로 그 같이 깊은 미궁에서 헤어날 수가 있었다.”(34)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파리 대학 총장 꼽(Nicolas Cop)의 종교 개혁 사상이 담긴 『연설문』(Concio academica, 1533)이 칼빈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또는 칼빈 자신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것이다.(36) 칼빈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최종결별 행동으로서 1534년 5월 4일에 그의 고향 노용에서 성직록을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환함으로써, 로마 가톨릭교회와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기독교 인문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칼빈의 처녀작 『세네카의 관용론』(1532년 4월 4일)이후 그의 노용 성직록을 반환한 1534년 5월 4일 이전에 칼빈은 ‘갑작스런 회심’을 체험했을 것이다. 여기에 반대해서, 칼빈의 초기 회심설과 점진적인 회심설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

칼빈은 꼽 총장의 『연설문』(1533)과 1534년 10월 17일 마르꾸르(Antoine Marcourt)의 미사반대 벽보 사건에 연계되어 종교개혁 사상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프랑스에 은거했다. 그는 파리 등으로 전전하다가 샤를 데스쁘빌르(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으로 1534년 4월까지 그의 친구 앙굴레므(Angoulême) 성당의 주임 신부 뒤 띨레(Louis du Tillet)의 집에 피신하여, 초판 『기독교 강요』(1536)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칼빈은 1542년에 개정된 『영혼의 잠』 (De Psychopannychia)을 1534년에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은 죽은 즉시 영혼이 수면 상태로 들어간다고 주장한 재세례파들의 중간상태에 대한 비성경적 주장을 반박했다.(37) 칼빈은 메츠(Metz)를 지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마르틴 부처를 방문하고, 1535년에 에라스무스가 머물고 있던 바젤로 가서 머물렀다. 이 때 칼빈은 조국 프랑스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핍박받고 있는 종교개혁 운동 지지자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1535년 8월에 초판 『기독교 강요』(1536)를 탈고하고, 이 책을 헌정받을 프랑스 왕 프란시스 I세에게 보내는 서문을 8월 23일에 쓰고, 1536년 3월에 바젤에서 출판했다.(38) 

3) 제1차 제네바(Genève) 시절(1536-1538)

칼빈은 당시 남부 독일 알자스(Alsace) 로렌 지방의 도시 스트라스부르에 살기 위해 프랑스로 가서 가사 일을 정리하고, 그의 동생과 함께 돌아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왕 프란시스 I 세와 황제 찰스 5세(Karl V)의 전쟁으로 파리로부터 스트라스부르에 이르는 도로가 차단되어, 그는 남쪽 우회 도로 상에 있는 제네바를 경유하여 스트라스부르에 가려고 했다. 제네바에서 이미 종교개혁 운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출신 종교개혁자 파렐(Guillaume Farel = William Farel, 1489-1565)이 칼빈의 친구 뒤 띨레로부터 칼빈이 제네바에 머문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렐은 제네바의 한 숙소에 머물고 있는 칼빈을 밤중에 찾아가 제네바의 종교 개혁 운동을 도와 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칼빈은 파렐의 요청을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갔던 요나의 예를 통한 협박조의 설득으로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칼빈은 이 사건을 그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내가 이제 은거하려고 했던 스트라스부르에 가는 최단 지름길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폐쇄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제네바에서 하루 이상을 머물지 않고, 빨리 그곳을 지나가려고 했다. … 내가 몇 가지 개인적 연구를 위해서 자유를 얻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듣고 난 뒤에, 그의 간청으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는 이렇게 큰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에 내가 돕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휴가와 평안을 저주할 것이라는 저주의 말까지 했다. 이 말에 너무나도 놀라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나는 계속하던 여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여기서 나의 수줍음과 소심함을 느꼈지만, 어떤 특정한 직분을 그런 식으로 소홀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39)

칼빈이 제네바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 또는 교사(doctor)로 1536년 9월 5일에 파렐에 의해서 제네바 시의 소위원회에 단지 ‘저 프랑스 사람’(Ille Gallus)정도로만 소개되었다. 1537년에 불어판 『제네바 요리 문답』(Catechismus Genevenis Prior, 라틴어판은 1538)과 『제네바 신앙 고백』(Confession de la foi de Genève)이 확정되었다. 칼빈은 그의 동역자들인 파렐과 비레(Pierre Viret, 1511-1571)와 함께 성찬 의식 문제로 제네바 시의회와 갈등 끝에, 시의회에 의해서 1538년 4월 23일에 추방명령을 받았다. 평소에 폭음, 폭식, 방종, 심지어 음행까지 하다가 주일에 집례되는 성찬식에 참여하고자하는 사람들을 칼빈과 파렐은 수찬을 정지해 줄 것을 원했다. 그러나 이것이 시정이 되지 않자 칼빈과 파렐은 성찬집례를 거부했다. 제네바는 그들을 향해서 “배신자들을 로느(Rhône) 강에 던져라”고 소리쳤다. 칼빈은 제네바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자 “만약 자신이 사람을 섬기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가 한 수고에 대해서 충분한 보수를 받지 못했을 것이나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종에게 충분치 못하게 보답하시는 일이 없으시며, 그들이 받아야 할 분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다스리다가 핍박받아 좇겨나는 가운데서도 칼빈과 파렐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르몽(Leman) 호수를 바라보면서 제네바를 떠나야만 했다. 칼빈은 바젤로, 파렐은 뉘샤뗄(Neuchâtel)로 향했다. 

4) 스트라스부르 시절(1538-1541)

칼빈은 1538년 9월 5일에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하여 만 3년 머문 후 1541년 9월 4일에 그 곳을 떠나서 9월 13일에 결국 다시 제네바에 돌아갔다. 성찬의식 문제로 제네바 시의회와 갈등 끝에 추방당한 칼빈이 바젤에 머물고 있을 때,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는 칼빈을 스트라스부르로 초청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부처는 파렐이 칼빈을 제네바에 초청할 때 사용했던 협박조의 동일한 설득방법을 사용하여 칼빈을 스트라스부르로 초청하는데 성공했다. 칼빈은 이 사실을 그의 『시편 주석』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파렐이 나에게 행했던 그와 같은 방법으로 마르틴 부처는 나를 다시 새로운 임지로 초청했다. 그가 나에게 보여 주었던 요나의 예는 나를 완전히 굴복시켰고, 나는 다시 가르치는 직분을 수락했다”.(40)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프랑스 이민 교회의 목사로 취임하여 목회하면서 1538년 11월에 성찬식을 집례했다. 1539년 2월 1일부터 스트라스부르 대학(소위 김나지움, Gymnasium)의 신학 교수로 공식적으로 임명되었다.(41)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특별히 『기독교강요』 재판(1539)과 『로마서 주석』(1540)을 출판하고, 라틴어 재판 『기독교 강요』 (1539)를 1541년에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했다. 이 작품들은 루터는 물론 특별히 부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1540년에는 재세례파 교인이었던 스또르되르(Jean Stordeur)의 미망인 네덜란드(현재는 벨기에에 속함)의 롸이끄(Luik) 출생인 이델레뜨 뷔런(Idelette de Buren)과 결혼했다. 이 기간 동안에 주로 독일에서 열렸던 종교간의 대화 모임들(1540, Hagenau; 1540-1541, Worms; 1541, Regensburg)에 부처의 권유로 참가하여 국제적인 견문을 넓히고,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물론이고, 다른 종교 개혁자들, 특히 루터파 종교개혁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동안에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 사돌레토(Jacopo Sadoleto, 1477-1547)가 제네바 시민들을 로마 가톨릭교회로 회유하기 위하여 글을 썼는데, 여기에 대해 반박할 수 있는 적당한 사람이 그 곳에는 없어서 제네바시가 칼빈에게 사돌레토에 대한 반박문을 부탁했다. 칼빈은 이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칼빈이 추기경 사돌레토를 너무나도 잘 반박했다는 소문이 제네바 시민들에게 퍼졌고, 3년 전과는 달리 지금은 칼빈을 지지하는 지도자들이 많아졌다. 이전에는 항상 베른, 바젤 그리고 취리히 등의 도시들이 제네바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적으로 행사했으나, 지금은 제네바가 상당히 독자적인 노선을 택할 수 있게 되었다. 제네바는 칼빈을 그곳에 오도록 여러 번 요청했으나, 칼빈은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부처 등의 권유로 일정 기간만 그곳에 머물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제네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5) 제2차 제네바 시절(1541-1564)

1541년 다시 제네바에 도착한 칼빈은 수없이 많은 믿음의 선한 싸움 끝에 1554년 선거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네바를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그의 개혁 운동의 방해자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지만, 여기서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론을 중심으로 반(反)삼위일체론자들인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 Servet), 까롤리, 겐틸리(V. Gentili)와의 논쟁, 예정․섭리론을 중심으로 볼섹(Jerome Bolsec), 카스텔리오(S. Castellio)와의 논쟁, 자유의지와 노예 의지를 중심으로 피기우스(A. Pighius, 1490-1542; 네덜란드 Kampen 출신)와의 논쟁, 성찬론을 중심으로 루터파 신학자들, 특히 베스트팔(Westphal)과의 논쟁, 계(언)약과 유아 세례를 중심으로 재세례파와의 논쟁, 교회 치리와 윤리를 중심으로 소위 자유주의자들(Les Libertines: Ami Perrin, Philibert Betheliers, Pierre Vandel)과의 대결 등이다.

칼빈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1541년에 『제네바 교회법』(Les Ordonnances Ecclésiastiques de l’Eglise de Genève)을 통과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소위 ‘당회’(Consistorium = Consistoire)의 구성과 기능을 중심으로 의견이 분부하여, 개혁․장로 교회는 국가교회의 형태와 자유교회의 형태로 갈라져 있다.

종교 개혁 제 1세대(루터, 파렐, 부처, 쯔빙글리 등)의 영향, 특히 부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종교 개혁 제 2세대로서 칼빈은 종교 개혁 제3세대로서 그의 위대한 두 제자인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와 존 녹스(John Knox, 1505/1515-1572)를 남기고, 임종시에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시39:9)라는 시편 말씀을 묵상하면서 1564년 5월 27일에 임종하였다. 평토장을 해달라는 칼빈의 유언에 따라 5월 28일에 제네바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현재까지 그의 무덤의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1556년 제네바를 방문했던 녹스는 “여기에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가 있다. 나는 여기보다 도덕과 신앙이 향상된 곳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41)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는 칼빈의 임종 전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전혀 신음도 하지 않고 심지어 몸을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떠났다. 그는 마치 잠든 것 같았다. 해가 지는 그 날, 지상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하던 가장 큰 별이 하늘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이 한 사람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훌륭하게 살고 죽는 법을 시범을 통해서 가르쳐주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우리는 말 할 수 있다. 그 날 밤과 그 다음 날 시 전체는 슬픈 분위기에 휩싸였다. 백성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애도했고, 불쌍한 양떼들은 그의 신실한 목자의 떠남을 슬퍼했다. 학교는 그의 참된 교사와 스승의 여읨을 애도했다. 모든 사람들은 참된 아버지이며 하나님의 위로자를 애도했다.”(42) 그의 일생 동안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했던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1559)를 “하나님을 찬양하라!”(laus Deo)로 마쳤다.(43) 

Ⅲ. 부처와 칼빈의 교회 연합운동 

1. 부처의 교회 연합운동(44)

I) 서론

우리는 본고에서 개혁파 종교개혁자 부처의 교회연합 운동 또는 에큐메니칼적(교회일치적) 사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개혁신학 전통에서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초와 방향에 대한 고전적 기초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부처의 연대기에 따라 서신서 등 역사적, 신학적 자료들을 참고하여 분석할 것이다. 부처는 당대의 많은 사상에 영향도 주고, 받았지만, 그는 항상 “말씀의 신학자, 성령의 신학자, 교회의 신학자”로서 자신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다.(45)

16세기 당시 부처의 명성은 목회자와 주석가로서 뿐만 아니라, 1529년에 개최된 최초의 개신교 연합운동인 마르부르크(Marburg) 종교대화와 1539년부터 1541년 사이에 열린 최초의 신․구교 연합운동인 프랑크푸르트,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 대회를 주도한 교회연합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이 연합운동이 큰 결실을 거두지 못했기에 그는 로마가톨릭교회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진영으로부터도 배척되었다. 그 후 오랫동안 그의 이름은 잊혀졌고, 그의 작품은 역사 속에서 파묻혀버렸다. 20세기에 칼빈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부처가 칼빈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종교개혁자로 알려지면서 그의 이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고, 최근 세계교회 연합운동과 함께 부처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46)

우리가 본고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자 하는 문제는 부처가 그의 에큐메니칼적 열망 속에서 어떻게 그의 에큐메니칼적 교회론을 형성했는가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부처가 강력하게 구사했던 세 가지 차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일 먼저 우리는 교회자체의 하나됨 또는 통일성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으로 개신교의 연합에 대해서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이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의 엽합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교회의 일치

부처는 교회의 일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특별히 그의 작품 『올바른 목회론』(Von der wahren Seelsorge, 1538)에서 부처는 교회의 이상형(理想形)을 그렸다. 여기서 그는 기독론으로부터 규정되는 두 가지 요소, 즉 교회의 통일성과 교회의 거룩성 사이의 관계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부처가 그가 사역하던 스트라스부르가 처했던 상황 속에서 이 작품을 기획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부처는 이 작품 속에서 “이 불행하고도 치명적으로 해로움을 주는 종교의 균열과 분열로부터 교회의 참된 통일성과 교회의 올바른 질서를 다시 이룩할 수 있는 정당한 수단들”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47) 부처는 이 책의 서두에서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고유한 영역 및 한계들과 교회의 질서(정치)에 대한 지식이 한탄할만할 정도로 태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다.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영적으로 아무 것도 받지 않아도, 그들이 교회의 회원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과 한 영혼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몸의 지체들이 되어야 하고, 동시에 상호간의 지체들이 되어야함을 누가 알고 있는가? 항간에 교회의 본질에 대한 분부한 의견들은 바로 교회의 본질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부처는 지적한다. 복음의 빛이 새롭게 다시 동터 오는 것처럼 보인 이래로, “많은 이단종파들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와의 연합(교제)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다.”(48) 부처는 교회의 일치성을 “의식(儀式)이나 외형적 방법들 속에서가 아니라, 순전한 복음에 대한 순종과 주님께서 규정하신 대로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 속에서” 파악한다.(49) 바로 여기에 교회의 일치성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교회의 지체들에게 최선의 상태가 되도록 구축되어져야 한다.”(50)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교제) 속에 있다. 부처는 이 같은 기독론적 모티브를 교회의 일치성을 위한 그의 관점에 대한 출발점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부처는 스트라스부르의 이단종파(특히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교회에서 자행한 잘못들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열매가 없고 능력이 없는 설교를 선포했고,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교제)과 그리스도의 몸의 구별을 촉구하지 않았다. 초기 단계에서는 신앙의 열매들이 이단종파들의 무리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사람들은 이단종파의 지도자들의 교리와 신실성과 열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운동은 항상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그리스도를 참으로 의지하고, 복음에 순종하는 자들도 있었다. 소위 “열광주의자들의 스승”(rottenmeister)은 사람들을 기존 교회로부터 떠나가도록 충동질했지만, 그들은 그들을 따르는 작은 무리들 속에서 엉겅퀴들과 가시들만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51)

이 작품 속에서 부처는 성서와 초대교회의 실천과 일치하는 교회구조(직제와 정치)를 제시한다. 부처에게는 오직 한 가지 수단만이 있는데, 이 수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치성이 이룩되어야한다. 여기서 한 가지 수단이라는 것은 목회의 방법으로서 교회 공동체 전체와 교회의 각각의 지체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치리’라는 개념이 사용되었다. 모든 그리스도인 각자는 자신의 임무를 가져야 한다. 교회 속에서 교역자들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사역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교회의 모든 각각의 지체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지체이며, 성령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각자는 교회의 구축을 위한 구원 사역에 대한 특별한 임무를 가지게 된다.(52)

부처의 교회의 구축에 대한 사상은 성서로부터,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와 성령의 지배권으로부터 나온 사상이다. 교회의 일치성은 바로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오직 이것을 통해서만 교회는 아주 본질적인 일치를 형성하고, 특별히 생동적이고도 사랑이 넘치는 연합(교제)을 형성하게 되고,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서로 서로에게 영적인 도움과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부처의 작품은 오랫동안 개혁교회전통 속에서 보전되어 왔고, 오늘날에도 역시 실제적으로 유익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 속에서 왕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통치권을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을 통해서’ 행사하신다.(53) 이 같은 활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외적인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어 진다. 외적인 문제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항상 추구되어야만 하는 교회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외적인 문제들은 지역교회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다. 남부독일(특히 스트라스부르)과 스위스에서 이 같은 일이 있었던 것처럼, 부처는 외적인 문제들을 그가 처했던 상황과 연관시켰다. 이 교회들 사이에 총회적 유대(관계)는 생기지 않았다. 교회의 일치성은 지역교회들의 일치가 우선적이었다. 물론 총회는 도시에 있는 교회들과 국가 속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지배권을 가졌다.(54) 이 같은 직접적인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역시 의식(儀式)과 교회질서(교회정치)의 일치도 모색했다.

부처는 재세례파들과의 대화 모임들 속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교회일치사상으로부터 출발했다. 부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경건한 사람들 중에 일부가 재세례파들로 개종하여 교회일치를 깨뜨리는 것을 보고 매우 슬퍼했다. 결국은 타락과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는 분열과 분리 속으로 자신들의 금욕주의적 경건을 강요하는 재세례파들을 볼 때, 부처는 그들에게 매우 비판적이게 되었다. 부처는 재세례파들에게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종교개혁적 관점에서 재세례파들이 갖고 있는 거룩성의 개념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더욱 그것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교회의 일치성과 교회의 거룩성을 함께 결합시켰다. 

3) 개신교의 연합운동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처는 독일 개신교의 일치를 위한 노력에 더욱 매진했다. 부처의 이 같은 많은 노력들 중에 하나는 이미 잘 아려진 바와 같이 1529년에 개최된 마르부르크의 종교 간의 대화(Das Marburger Religionsgespräch, 1529)이다.(55) 여기서 루터와의 만남은 모든 면에서 부처를 완전히 실망시켰다. 루터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설교에 대한 대화를 거부하면서, “당신은 우리와 다른 영을 가졌다.”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는 루터와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부처는 그의 『복음서주석』(1530)을 마르부르크 아카데미에 헌정했고, 마르부르크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그곳에서 기독교 일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상호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56) 부처는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은 오래 전에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파괴했던 자인 사탄의 분노에 기인한다고 말했다.(57) 그리스도인들의 연합(교제)에 반대하는 적대자는 인간들의 사상에 너무나도 완고하게 집착하여, 사람들이 한 번 받아들인 교리의 내용을 통해서 사람들을 매료시킴으로써, 사람들은 신적 계시를 통해서 그 교리를 받아들였는지 또는 그들이 성서의 무오의 전승에 의해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곧 바로 선언한다. 이 경우, 비록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있고, 거룩한 삶에 대한 올바른 열심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은 차이점의 원인이 무엇이며, 무지의 영향이 무엇인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게 된다. 만약 하나님께서 방해를 하시지 않고,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교회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결점이 없이는 이 땅에 살수 없기 때문이다.”(58)

여기에 마르부르크에서 루터의 행동에 대한 부처의 기억이 나타난다. 부처는 루터와 함께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했다. 폭넓은 설명 속에서, 비록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셨을지라도, 그는 육체와 정신의 강력한 활동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선포했다. 육체에 대한 생각들이 성령의 계시로 보여지는 경우가 너무도 가끔 발생했다.(59) 인간적 약함은 가장 거룩한 사람들 중에서 여전히 특별히 강하게 나타난다. 인간적 약함이 하나님의 진리가 부인되는 원인일 수 있지만, 또한 인간적 약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가 되는 원인일 수도 있다.

부처는 우리가 행동하는 매우 단순한 특징을 말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그러나,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는 올바르게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 거룩성에다가 자기 자신을 맡기는 자들(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해당되는 것), 바로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하시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소유이다.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사람들을 형제와 자매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그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다.”(60)

부처는 이단(異端, haereticus)과 실수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에 대해서 아주 폭넓게 기술했다. 이단은 잘못된 의견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종파를 교회 안에다 세운다. 이단은 자신을 형제와 자매로부터 격리(분리)시키고, 형제와 자매에게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부인한다. 그러나 단지 실수하는 사람들은 형제와 자매와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정당성을 깨뜨리지 않고 그대로 간직한다. 비록 동일한 실수에 관한 것일지라도, 이단은 아주 과격하고 폭력적이게 되는 반면, 실수하는 자들은 사랑의 정도에 따라 더욱더 인간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비록 일시적으로는 가능하지만, 결국 우리는 이단과는 절교를 해야 되지만, 실수를 범하는 자들과는 결코 절교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맡길 것인가 또는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올곧게 생활할 것인가이다. 이 같은 일들이 있는 경우에 우리는 결코 형제의 손길을 뿌리쳐서는 안 된다.(61) 바로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적 평화의 끈(유대)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교리들 사이를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지게 되고, 다른 경우에는 기독교적 평화의 유대에 해당되지 않는다. 올곧은 양심과 참된 기독교적 사랑이 여기서 하나의 기준이 된다. 이 같은 특징들을 보여주는 자가 비록 여전히 어떤 결점들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간주되어야 한다.(62) 신앙과 사랑은 참 그리스도인의 특징들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하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어떤 사람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63)

이 같이 매우 단순한 기준을 가지고 부처는 성찬의 문제에 접근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날에 재림하실 때, 전(全) 세계가 그의 앞에서 드러날 것처럼 부처는 심판하는 것을 그의 후손들에게 맡기기를 원했다. 부처는 이 모든 확신을 공평무사하게 실현시켰다. 부처는 츠빙글리와 루터 사이에 있었던 갈등은 상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처에 의하면, 그들 사이의 싸움은 단지 말싸움에 불과하며, 전혀 불필요한 싸움이었다고 생각했다. 1534년에 부처는 두 진영들 중에 어는 한 쪽도 참으로 상대편에 반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다만 두 진영들은 다른 편이 처한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공식화했다.(64) “그러므로, 내용과 본질 자체에 관한 한 눈곱만큼의 논쟁도 없었고, 단지 언어의 사용에 관한 한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전적으로 확신하는 바이다.”(65) 부처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말했다시피, 그가 그의 생애 마지막에 영국에서 강의 중에 그의 학생들에게 선언했다시피, 또한 그의 학생들이 적은 강의노트로부터 볼 때, ‘로고마키아’(logomachia)는 방크(Joh. Bancks)에 의해서 차용되었다. 성찬과 관계하여 참된 차이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주의자들과 재세례파들과 관계되는 문제였다. 이들과의 관계에서는 내용과 본질에서 상호간의 차이가 존재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는 말싸움에 불과한 싸움이 발생하게 되었다. 비텐베르크 교회와 취리히 교회 사이에는 상호 일치되었다.(66) 이 강의 자료로부터 볼 때, 부처는 루터와 츠빙글리의 상호 불일치의 원인을 독일에서 종교의 쇠퇴로 보았다. “나는 처음부터 모든 어려움에 직면했다. 전체 내용과 갈등에 대해서 양 진영의 유명한 지도자들은 물론 논쟁에 관련된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기 위해서 전 독일을 일주했다. 나는 루터와 멜란히톤을 방문했다. 나는 츠빙글리와 불링거를 방문했다. 내가 항상 꿈꾸던 공적 일치를 보존하는데 대한 안목을 가지고 그들을 방문했다. 그러나 내가 두 진영으로부터 그들이 성찬에 대해서 느꼈던 내용들을 듣고, 그것을 성찰해 본 뒤에, 나는 그것이 단지 언어적 관점에서 오는 견해의 차이임을 알게 되었다.”(67)

부처는 이 문제를 공평무사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우리는 부처가 너무나도 순진한 신학자가 아니었나 하고 질문할 수 있다. 절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부처는 그의 당대에 가장 탁월한 신학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는 분명히 성찬에 대한 각자의 고유한 차이점을 알았다. 그러나 부처는 그와 같은 식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신학의 성격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부처의 신학은 상호 대화적인 신학(communicatieve theologie)이었기 때문이다. 부처의 신학은 믿음의 형제와 자매와의 대화 속에서 입증되어진다. 이로 인해서 바로 윤리적 실천이 신학을 확증해야만 했다.

부처의 사상에 의하면, 성찬은 그것에 대해서 논쟁해야 할 성격이 아니라, 성찬을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자는 누구든지 성찬에 참여할 수가 있다. 그의 신학적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부처는 그의 자신의 경건 체험의 중심으로부터 다양한 형식들을 통합시킬 수 있었다. 바로 이점에서 그는 그의 형제와 자매를 얻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조금 양보하여 다양한 형식들을 상호 통합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통해서 그 자신은 조금도 손상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부처의 견해에 의하면, 바로 이점에서 종교개혁 속에서의 양 진영은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부처 자신의 친구들조차도 부처가 선택한 길을 항상 따를 수도 없었거나 따르기를 원치 않았다. 마침내 콘스탄쯔(Konstanz)의 두 블라우러(A. Blaurer, T. Blaurer)와의 냉전의 시대가 왔고, 불링거와의 관계도 결코 좋은 상태에 이르지 못했다. 칼빈은 여기서 부처의 유산을 물러 받았다. 부처는 마침내 『비텐베르크 일치신조』(1536)에서 루터와의 합의에 도달했고, 칼빈도 몇 가지 관점들에 대한 양보의 미덕을 통해서 『취리히 합의문』(consensus Tigurinus)(1549)에서 불링거와 합의에 도달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마도 칼빈이 그의 형식에서 보다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36년 부처가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와 성찬에 대한 문제에서 상호 합의에 도달했을 때, 마침내 싸움에 종지부가 찍혔다. 안리흐(G. Anrich)가 말했다시피, 바로 이 순간에 부처의 신학은 ‘개신교의 상호 연합’ 속에서 완성되었다. 부처 자신의 성찬 개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갖는 연합(die Gemeinschaft) 자체인데, 부처의 이 개념은 동일한 신앙으로 살고, 동일한 그리스도로부터 살기를 원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일치의 길을 그가 걸어가도록 박차를 가했다. 

4) 기독교(그리스도인들)의 연합운동

부처가 독일제국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와 관계하여 많은 활동들을 펼쳤던 보다 폭넓은 장이 있다. 이 같은 협상을 위한 폭넓은 기초는 수 없이 많은 종교개혁교회적인 로마 가톨릭교도들 속에서 발견되는 의지 속에서 뿐만 아니라, 상호 연합적인 인문주의적 배경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의지 속에서도 존재한다. 후자의 경우는 아주 분명히 인식될 수 있다. 1525년에 노예의지 문제로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운동 사이에 상호 분리가 일어났다. 많은 인문주의자들은 루터의 인도 하에 있는 종교개혁운동과 결별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적인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의해서 스며들어간 큰 그룹의 신학자들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스트라스부르의 신학자들은 인문주의자들의 그룹들과 아주 규칙적인 만남을 가졌다. 이것은 아마도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참된 개혁이 시작되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소망했던 부처의 낙관주의의 한 형태일 것이다. 파렐과 함께 같은 수신자로 된 칼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부처는 교회의 개혁에 대한 그의 노력들에 대해서 회고의 글을 썼다. 부처는 파렐에게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이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과의 일치 속에서 너무나도 순전하고 완전해 질 수 있어야만 하며, 그래서 모든 미신(迷信)들에 대한 기억은 물론 모든 미신들에 대한 이름들조차도 사라져야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너무나도 많이 이 방향에서 충고를 했다. 이 같은 필수조건이 만족될 수 없는 곳에서 내가 원했고 다른 곳에서 가진 것을 얻을 수 없는 곳에서도 항상 포기하지 않고 더욱 노력했다. 나는 순수한 교리(말씀)가 선포되어지며, 성례전의 순전한 집행이 이루어지기를 촉구한다. 아직도 적그리스도의 잔당들이 어디선가 남아 있다. 따라서 그들은 나로 하여금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성례전의 집행을 중지하도록 방해할 것이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의 잔당들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68)

부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문을 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는 그 말씀을 의지하였고, 그 말씀 자체가 순전하고도 완전한 종교개혁을 돌보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같은 부처의 통찰력은 교회의 화해와 회복을 이룩하기 위한 부처의 그칠 줄 모르는 노력의 배경을 형성한다. 당연히 독일 제국 속에서 정치적 상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독일에서 교회회의가 개최되고, 경건한 사람들과 능력 있는 신학자들과 정치적 수완이 있는 정치지도자들이 서로 서로 협조한다면, 종교개혁의 미래는 밝아 올 것이라고 사람들은 고대했다. 어떤 면에서 의심이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부처는 그의 강력한 활동으로 좋은 길목에 섰다.(69)

문제는 과연 사람들이 다른 편의 토론모임(colloqium)을 신뢰할 수 있는가 또는 부처가 교회의 일치와 평화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진행하는 활동들이 그란벨르(Granvelle)와 그의 지도하에 황제가 파송한 신학자들에 의해서 그들 자신의 목적에 의해서 이용당하지 않고 성공을 거둘 수 있는가 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가지 더 고려할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기서는 궁극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가능성들에 대해서 종교개혁 진영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전례를 통해서 상상해 볼 수 있다.

프랑스에 종교개혁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부처는 대표자로서 1534년에 멜란히톤을 파리에 초대하였고, 두 블라우러의 편지 속에서 잘 나타나듯이, 멜란히톤 자신도 기꺼이 부처의 초청에 응했다. 헤디오(Hedio)가 자리에 앉았을 때, 부처는 가능성들에 대한 그의 관점의 핵심을 주지시켰다. 자료로부터 볼 때, 여기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내용은 역시 교회의 일치에 대한 부처의 사상이었음이 드러난다. “교회의 참된 일치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간절히 갈구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외에 어떤 다른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에는 어떤 연합(교제)도 없기 때문이다. 자연인(自然人)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은 하나님을 미워한다.”(70) 그러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증언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조직되어야 한다. 이 모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올바르게 하나님을 찾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하는 그룹들과 신학자들의 그룹들과 동일한 증언을 유도하는 사람들이 첨가되어야 한다. 지체 없이 교회의 평화가 마련되어야 한다.(71) 정부의 권위는 분명히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부처는 종교개혁적 정신을 받아들인 교리들과 의식(儀式)의 수정들이 도중에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부처는 조목조목 그의 개요(nota) 속에서 유효한 신앙조항들을 하나하나 펼쳐 나간다. 여기서 제일 처음의 조항은 칭의(稱義)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그는 칭의를 성서와의 일치 속에서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는 의식(儀式)들과 고해(고백)에 대해서는 아주 짧게 언급한다. 그는 그의 자신의 방법으로 설명했던 ‘참된 현존성’(praesentia vera)이라는 신학적 개념의 도움으로 미사 문제에 접근한다. 그는 종교개혁의 진영 속에서도 성찬의 개념을 중심으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사실을 첨가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로 하여금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서 선행된 총회의 유익과 구성에 대한 그의 관점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여기서 성서와 경건과 모순되는 어떤 교리도 거부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될 것이다. 부처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 진영으로부터 어떤 것도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방해되는 요소란 전혀 없다. 만약 교황과 다른 주교들조차도 오직 교회의 구축을 위해서 사용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조차도 그들의 권위를 가질 수가 있다.(72)

초기 프로그램에 해당되는 프랑스의 1534년에 진행되었던 프로그램은 부처가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식화하였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오직 칭의의 순수한 복음을 위한 공간만 주어진다면, 이것 자체가 계속 진행될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부처는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지만, 일리가 있는 그의 친구들의 비판을 받아들였다. 프랑스에서 일의 경과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설명하면서 그 일을 계속 추진시켰다. 다시 부처는 참으로 교회(ecclesia)로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73)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일치의 노력을 통해서 형제와 자매 가운데서 새로운 불일치가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의 친구들의 반대에 역시 대답했다. 부처는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토마스 블라우러(Thomas Blaurer)에게 편지했다. “평안한 마음을 가지시오, 나의 사랑하는 형제여, 참으로 우리는 지금도 가식으로 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첨부하고자 하는 것을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판단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들도 아무 것도 첨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그들의 입장을 찬성할 이유가 없을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입장을 비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이 문제를 위해서 그들에 대한 우리의 우정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역시 우리 자신의 판단 속에서 견고해질 것입니다.”(74)

부처는 지속적으로 편지를 교환하던 마가레타 블라우러(Margaretha Blaurer)에게 그 날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배후에 머물러 있던 교회들(로마가톨릭교회, 필자주) 속에서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들을 우리는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가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려야 합니다. ‘나는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뜻이 무엇인가를 형제와 자매는 곰곰이 생각하기를 나는 참으로 바라는 바입니다.”(75) 그러나 그 사이에 부처는 그들이 없이는 살수 없는 그 형제와 자매지만, 그들의 비판은 부처를 힘들게 했다. “나는 이 일 전체에 나의 사력(死力)을 다했습니다. 나는 프랑스의 순교자들과 함께 차라리 그리스도에게 가기를 원합니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탁월한 사람들이 나와는 전적으로 다르게 판단하는 것을 내가 보았을 때, 그것은 나를 소스라치게 했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 나는 국민의 의견을 물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죽음을 의미했습니다.”(76)

부처는 프랑스의 기독교의 연합에 실패했을지라도, 그는 독일 기독교의 재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독일의 교회회의가 하나의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책의 제목이 보여주다시피,(77) 부처는『회의를 향한 준비』(Furbereytung zum Concilio)에서(78)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옹호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에 띄는 대목은 부처가 모든 참된 경건한 사람들 속에 루터교도들 뿐만 아니라, 로마가톨릭교도들도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부처도 자유로운 독일의 교회회의가 개최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여기서 교황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교황은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부처의 교회 개념은 지금도 특별히 말씀을 선포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목자적 기능을 수행하는 교회 직분과 함께 참된 신자들의 모임이다.(79) 교황과 로마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이 종교개혁을 위해서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할 대상자들이다. 그들은 교회회의의 지도자들이 될 수가 없다. 교회회의에서 지켜져야 할 사항은 성서가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부처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권위는 거룩한 교부들에 의해서 순수한 복음이 확정되었던 고대교회의 권위이다. 부처는 자신이 있었던 교회의 일치를 모든 시대에 똑같이 적용되었던 가장 깊은 경건(pietas) 속에서 발견한다. 경건과 불경건(impietas)은 모든 시대를 관통하면서 그 자체로서 동일한 자신의 불변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올곧고 참된 믿음 속에 있는 진지성과 열심이 고대교부들에게도 있었다.”(80)

여기서 부처는 점점 더 교회일치를 위한 그의 노력의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는 부처가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1541)와 그 이후 종교 간의 대화 모임 속에서 만들었던 자료들만이라도 한 번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부처가 의도하고 있던 모든 관점들을 둘러쌓고 있는 문제는 단 한 가지인데, 그것은 교회의 일치문제였다. 참된 교회일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로부터 발생하는 칭의(稱義)의 진리와 동시에 새로운 삶이 순종과 사랑 속에서 효과적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칭의의 진리의 일치 속에 있다. 1541년 레겐스부르크 종교 간의 대화 모임 속에서 ‘믿음을 통한 칭의’와 관련해서 채결된 타협안을 부처는 위와 같은 의미에서 이해했다. 부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은혜의 전가적(轉嫁的) 성격이 충분히 보존되었으며, 동시에 은혜의 효과적(效果的) 성격도 잘 유지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변인들의 그들의 지지자들에 반대해서 이 타협안을 설명하고 변호했는지가 로마 가톨릭교회 대변인들에의 측으로부터 분명해졌다는 사실을 부처는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피기우스(Pighius), 에크(Eck), 라트무스(Latmus), 그로퍼(Gropper)는 부처가 그의『회의록』(Acta Colloquii)으로 출판했던 자료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부처는 종교개혁의 전체 역사(歷史)를 큰 화폭 속에서 그려보려는 적지 않는 수고를 했다. 부처는 이 같은 이야기들이 교리와 의식(儀式)과 치리 속에서 교회의 참된 화해와 회복의 문제에 한 줄기의 빛을 비춰줄 것을 소망했다.(81)

그러나 현실적으로 부처의 이상(理想)은 너무나도 높은 것처럼 보였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은혜의 교리 속에 있는 학문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부터 흘러나오는 참 경건에 대한 개념의 문제였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다. 가장 깊은 배후에 놓여 있는 문제는 교회론 속에서 그리고 성례전과 의식(儀式)의 개념 속에서 찾아져야 했다.(82) 교회론과 관련된 통찰들은 너무나도 다양하여 갈래 갈래로 갈라졌다. 모든 논쟁들에 대한 문헌들은 대부분 교회론에 대한 문제들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부처는 ‘필수적인 신앙조항들’(necessaria)과 ‘지엽적인 신앙조항들’(non-necessaria)이라는 개념들을 통해서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방법으로 작업을 진행시킬 수가 있었다. 부처는 이 방법을 처음부터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특별히 종교 간의 대화 모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83) 여기서 부처에게 중요한 것은 교리의 환원이 아니라, ‘한 가지만이 필요한 것’에 대한 집중(촛점)이 중요했다. 부처에게 구원은 ‘기독교의 본질’(substantia christianismi)에 속했다.(84) ‘필수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이라는 부처의 개념은 직접적으로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라는 신앙 고백으로 엄격하게 귀결되었다.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라는 교리가 구원이 우리의 몫(것)으로 분배되는 유일한 길이라면, 이 신앙교리를 필수적인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이것을 변호해야할 필요성을 갖게 된다. 이 같은 맥락에서 말씀의 순전한 선포는 포기할 수 없는 좋은 일에 속한다. 바로 이 중심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고 함께 연합하는 것이 가능해져야만 한다. 말씀은 항상 성령을 통한 은혜의 강력한 능력에 대한 약속을 그 말씀 자체 속에서 가지고 있다. 다양성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속에서 존재한다.

블라우러(Ambrosius Blaurer)는 1543년 12월 12일에 불링거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악한 말로 그리고 좋은 말로 퍼진 루머와 비난과 적개심과 견딜 수 없는 조롱과 억울한 누명을 통한 정죄에 의해서 방해받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가능한 한 폭넓게 확장되도록 하기 위해서 부처는 누구에게나 모든 것이 되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모든 일들로 인해서 침체하여 사기를 잃게 될 때마다 그는 새 힘을 얻어서 다시 일어서기도 했다. 왜냐하면, 부처의 대적자들은 그의 속에 있는 신적 능력을 완전히 고갈시키고자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85)

마침내 황제의 독재의 결과로서 교회의 일치가 이해되어, 황제의 교회에 대한 독재가 도래되어, 실재적인 대화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부처는 한계에 도달했다. 1542년에 부처가 멜란히톤과 함께 쾰른(Köln)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돕고 있을 때, 로마가톨릭교회 진영에서 이미 비판의 소리가 들렸다. 쾰른의 헤르만 폰 비트(Herman von Wied) 주교 관구를 위한 교회법은 순전히 종교개혁적 관점으로부터 왔다. 다시 말하면, 교리와 설교와 성서가 가장 우선순위를 차지했다. 여기서도 역시 칭의와 회개 및 회심의 삶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교회와 교회의 일치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 교회법 속에서 멜란히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그러나 부처는 그의 변호 속에서 이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현 세상에서 보이는 교회와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해서 우리에게 위탁되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믿고,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자들의 모임으로 구성된다.”(86) 이 교회의 표징(ecclesiae notae)은 기독교 치리와 순종과 함께 순수한 교리와 성례전과 신앙고백의 합법적인 집행이다. 이 교회의 일치는 성례전의 합법적인 사용을 가져오는 교리에서의 일치이다. 일치의 세 번째로 중요한 구성 요건은 직제와 목회자에 대한 청빙이다. 이 같은 부처의 아이디어가 성공한 종교개혁 운동에서 기능하였듯이, 말씀의 우위성과 화해의 대한 봉사의 강조와 지역에 위치한 실재적인 교회-존재는 종교개혁을 위해서 찬란한 약속들이 놓여 있는 곳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으로서 독일 전역은 물론 유럽 전체를 위해서 참으로 중요하다. 바로 여기서부터 부처가 이전에는 형제적인 대화 속에서 함께 하던 모든 자들에 대한 강력한 반대가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이 같은 협상에 대해서 반대하는 팜플렛과 문헌의 홍수를 이루었다.(87)

황제 칼 5세(Karl V)가 전장(戰場)에서 율리흐(Jülich)와 클레이프(Kleef)를 빠르게 정복하고, 네덜란드의 헬더르란트(Gelderland)는 프랑스 부르곤디를 위해서, 쾰른은 교황을 위해서 보호되었을 때, 에큐메니칼적 노력은(Reformatio Coloniensis) 이미 쉽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벤로(Venlo)의 평화(1543)에서 쾔른의 몫이 확정되었고, 이와 함께 사실상 쉬마르칼텐 전쟁을 위한 길이 열리게 되었다. 황제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고, 교회의 개혁에 대한 그의 관점을 『아우구스부르크 임시안』(Interim, 1549) 속에 실행시키고자 압력을 가할 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 아직도 부처는 화해를 위한 그의 노력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공간의 창조로 보는 것 같았다. 마침내 종교개혁이 실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는 것처럼 보였을 때, 부처는 그가 계속 추진하던 에큐메니칼적 협력 사업을 거부했다. 부처는 교회에 대한 그의 이상(理想)을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 부처에게 그토록 협조적이던 스트라스부르의 정부의 행정 관료들은 부처가 계속적으로『아우구스부르크 임시안』을 거부하는 것을 정치적인 상황에서 허락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부처는 『아우구스부르크 임시안』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스트라스부르를 떠나 어디론가 망명을 해야만 했다. 부처는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부처는 1549년 4월 6일에 스트라스부르를 출발하여 4월 25일에 영국 런던에 도착하여 어린 왕 에드워드 6세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왕립대학교 명예 교수로서 캠브리지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영국의 종교개혁을 도왔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침내 영국에서 1551년 2월 28일에 임종했다. 그는 교회에 대한 그의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영국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강력하게 이 사역을 계속하였다. 이 세상 속에서조차도 그리스도의 통치를 실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왕국의 비전을 가지고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론』(De Regno Christi, 1550)이라는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칼빈은 부처로부터 많은 사상을 물려받았다. 칼빈의 에큐메니칼적 활동과 부처의 에큐메니칼적 활동을 상호 비교해보면 너무나도 많은 점에서 서로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는 부처가 칼빈에게 기친 영향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네이언하이스(W. Nijenhuis)의 책의 제목처럼[『교회일치운동가인 칼빈』(Calvinus oecumenicus)], 우리는 칼빈도 ‘교회일치운동가’(oecumenicus) 라고 부를 수 있다.(88) 부처는 기독론적 성령론으로 인해서 역시 교회의 신학자요, 그러므로, 대부분의 말씀의 포괄적인 의미에서 성령의 신학학자였다. 부처의 이상(理想)은 때로는 망각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전(全) 세계로 확장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나라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참 경건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는 모든 자들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실현되지만, 동시에 보이는 가운데서 성도의 교통으로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기독교회 속에서 교회론적 형태를 얻을 것이다.(89) 

5) 소결론

우리는 본고를 부처가 에큐메니칼적 열망 속에서 어떻게 그의 에큐메니칼적 교회론을 형성했는지를 세 가지 차원, 즉 교회의 일치, 개신교회의 일치, 그리스도인들(기독교)의 일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교회의 일치성, 교회의 통일성과 관련해서 부처는 성서와 초대교회의 교부의 사상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와 성령의 교통을 통하여, 교역자와 성도들로 구성된 말씀의 순수한 선포와 성례전의 합법적인 집행과 치리를 통한 교회의 일치성과 거룩성을 주장했다. 지체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상호간에 영적인 도움과 물질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개신교의 일치와 관련해서, 부처는 특별히 성찬 문제로 갈라진 개신교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종교개혁자들의 상호간의 갈등은 사상의 내용적,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오해의 차이로 규정했다.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의 일치와 관련해서, 부처는 ‘필수적인 것’(necessaris)과 ‘지엽적인 것’(non-necessaris)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오직 믿음을 통한 칭의’라는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독일제국내에서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에큐메니칼 활동은 물론, 재세례파와의 대화, 영국에서 성공회에 대한 종교개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상과 같은 기초 위에서 부처는 교회연합을 진작시키기를 원했다.

① 부처의 에큐메니칼적 노력은 그의 교회 개념 속에서 강력한 추진력을 발견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이 일치는 일차적으로는 불가시적이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존재한다.

②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일치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부처의 교회 개념은 사랑과 일치가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성도의 교제 속에서 보이는 일치를 요구한다.

③ 폭넓은 의미에서 부처의 교회적 일치의 이상(理想)을 그는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상황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만약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이 시행될 수만 있다면, 부처는 이 전체의 틀 속에서 모든 것을 용납하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④ 교회일치를 위한 기본적인 기초는 일차적으로 성서지만, 교부들이 전해준 순전한 신학이 있는 고대교회의 역사(歷史) 속에서 뿌리를 두고 있는 이상(理想)도 해당된다.

⑤ 부처의 에큐메니칼적 노력의 한계는 위의 이상적인 네 가지 요소들에게 완전히 도달하기에는 여러 가지 장해요인들로 인해서 역부족이었다. 

2. 칼빈의 교회 연합운동(90) 

1) 칼빈의 교회연합의 원리

박경수는 칼빈의 교회연합의 원리로서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91) 첫째, 칼빈은 교회의 두 가지 표지가 있는 곳에 참된 교회가 있다고 주장하여, 교회의 두 가지 표지가 있는 교회와 연합하고, 이런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정죄하였다. 둘째, 칼빈은 󰡐본질적인󰡑교리와󰡐비본질적인󰡑(adiaphora) 교리를 구별하여, 본질적인 교리를 가진 교회와의 연합을 주장하였다. 칼빈의 경우, 본질적인 교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92) 셋째, 칼빈은 교회연합의 조건은 항상 그리스도와 말씀진리에 근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언제나 말과 행동으로 내가 일치를 얼마나 열망하는지를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일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 만일 내가 자신들이 교회의 머리들이고 신앙의 기둥들이라고 떠벌이는 사람들과의 평화를 원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부임함으로써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저주스러운 화해에 굴복하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습니다.”(93) 넷째, 칼빈은 부처처럼 중도의 길(via media)을 통해 교회연합운동을 하였다. 칼빈은 개신교 종교개혁운동 안에서는 루터와 츠빙글리 중간에 그리고 멜란히톤과 불링거 중간에 섰고, 개신교 종교개혁운동 밖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과격파 종교개혁운동 사이에 섰다.  

2) 칼빈의 교회연합의 실천 

박경수는 칼빈의 교회연합의 실천을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94)  

(1) 종교개혁운동의 필연성을 역설한 칼빈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처음부터 로마가톨릭교회와의 분리를 의도하지 않았다. 더구나 제1세대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통합이라는 소망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제2세대 종교개혁자 칼빈은 로마가톨릭교회와의 분리는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보였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인 사돌레토에게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훨신 더 강력한 필연성이 결국 우리가 나서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필연성이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꺼졌고, 하나님의 말씀이 파묻혔으며, 그리스도의 덕이 깊은 망각의 늪에 빠졌습니다.”(95) 칼빈에 따르면, 종교개혁운동은 순전히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그리스도의 깃발󰡑아래로 모으려는 운동이었다. “교회를 유기한다는 비판에 관해서는, 그들이 곧잘 내게 이런 비난을 했는데, 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 이렇게 흩어진 사람들을 함께 모으기 위해서, 나는 낯선 깃발을 세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좇아야하는 주님의 거룩한 깃발을 세웠습니다. … 이에 대해 통탄할 소동이 일어 논쟁이 불붙었으며, 분열이 초래되었습니다.”(96) 

(2) 부처처럼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를 중재한 칼빈

1529년 마르부르크 종교대담에 참가하여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를 헌신적으로 중재하던 것을 경험한 칼빈도 부처의 교회연합운동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칼빈은『성만찬에 관한 소논문』에서 루터 진영과 츠빙글리 진영을 화해시키고자 하였다.(97)  

(3) 불링거와 연합한 칼빈

츠빙글리의 제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루터의 책을 󰡒악의, 비기독교적 표현, 중상모략하는 말들, 다투려는 마음, 불순한 언사, 분노, 속임수, 격정과 격노로 가득찬󰡓것이라고 말하고, 불링거가 부처를 비판할 때에 칼빈은 루터와 부처는 위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라고 말하고, 직접 취리히에 찾아가서 『취리히 일치신조』(Consensus Tigrinus, 1549)를 도출하여 취리히 진영과 하나가 되어 스위스 개혁교회의 연합을 이룩하였다. 

(3) 영국교회와 연합운동한 칼빈

칼빈은 영국의 종교개혁자 그랜머(Thomas Cranmer)에게 편지를 보내어 교회연합운동을 제안한 바, 교회연합을 위해󰡐열 개의 바다라고해도 기꺼이 건널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분리되어져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필요하다면 나는 열 개의 바다라고 해도 기꺼이 건널 것입니다.”(98) 

(4) 유럽의 다른 여러 개혁교회들과 연합한 칼빈

주로 제네바에 머물었던 칼빈이지만, 그는 저술활동과 편지들을 통하여 유럽 전역에 형성된 신생 개혁교회들, 가령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체코, 폴란드 등에 흩어진 개혁교회들에게 목회적, 선교적 활동을 통해 교회연합 운동을 위해 전심전력을 하였다. 

Ⅳ. 결론

우리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 개혁파 종교개혁자 부처와 칼빈은 양쪽 상대편으로부터 오해까지 받으면서도 그리스도의 교회연합 또는 교회일치를 위해 어느 시대의 사람과 어느 시대의 교회보다도 성경적 원칙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일했다. 교회분열이 특히 세계개혁교회와 한국장로교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개혁파 종교개혁자인 부처와 칼빈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세계개혁교회와 한국장로교회에 속한 우리로서는 믿음의 선배들인 두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에게 송구함을 가짐은 물론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 통회 자복하고, 두 개혁파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연합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이라도 실천해야할 것이다.

칼빈은 특별히 스트라스부르 체류기간(1538-1541)에 여러 측면에서, 특히 교회일치운동 정신에서 부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오늘날 종교개혁전문연구가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교회연합운동측면에서 부처와 칼빈의 교회연합 사상은 상당히 유사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첫째, 부처는 참된 교회의 표지를 세 가지, 즉 올바른 말씀선포, 합당한 성례전 집례와 치리의 시행이고, 칼빈의 경우 치리시행이 교회의 표지에 포함되지 않는다.

둘째, 부처는 제1세대 종교개혁자로서 루터, 츠빙글리를 비롯하여 개신교 종교개혁 연합을 추진할 뿐만 아니라, 재세례파 운동은 물론 로마가톨릭교회 진영과의 교회연합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제2세대로서 칼빈은 자신의 교회연합 운동을 개신교 종교개혁 안에서의 연합운동으로 제한시켰다. 왜냐하면 칼빈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통합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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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항공대학교 항공전자공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전자공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대학원 졸업, ‘네덜란드 개혁신학대학교’(Kampen) 졸업(Drs.), ‘네덜란드 기독교개혁신학대학교’(Apeldoorn) 졸업(Dr. theol.),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새문안교회 강신명석좌교수, 명성교회 협동목사, 한국칼빈학회 명예회장, 한국개혁신학회 부회장, 전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 회장, 장로회신학대학교 ‘최우수 업적평가 우대교수’ 3(2005, 2008, 2009), 한국기독교학회 “제6회소망학술상” 수상(『잊혀진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 대한기독교서회, 2012), 문서선교협력위원회 “2012년 올해의 저자상” 수상,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2012년 신학 국내부문 최우수상 수상”(『깔뱅신학 입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2).

(2)이은선최윤배 공역,『기독교고전총서 17: 멜란히톤과 부처』(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3)최윤배 공저,『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112-124.

(4)천주교가두선교단 편,『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서울: 천주교 서울대교구 역삼동성당, 1999), 53.

(5)우리나라 기독교 초기 문헌에는 ‘갈빈(葛貧)’으로 표기했고, 한국교회사에서는 대체로 ‘칼빈’으로 표기되었으며, 그러나 프랑스어에 충실하려면 ‘깔뱅’이고, 국어표준어로는 ‘칼뱅’이다. 필자는 본고에서 칼빈, 깔뱅, 칼뱅을 혼용하여 사용할 것이다.

(6)박경수,『교회의 신학자 칼뱅』(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05, 재인용: R. Ward Holder, Calvins Heritage, 254.

(7)박경수,『교회의 신학자 칼뱅』, 86, 재인용: John T. McNeill, Unitive Protestantism: The Ecumenical Spirit and Its Persistent Expression (Richmond: John Knox Press, 1964), 15.

(8)한국교회와 신학에서 교회 “연합운동”에 대한 용어는 학자나 교단에 따라 용어사용이나 용어이해에서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가령 어떤 신학자나 교단은 교회 ‘연합운동’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어떤 신학자나 교단은 교회 ‘일치운동’ 또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있다. 영어로 표현한다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지금도 인정하고 있는「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18) 등은 ‘에큐메니칼’(ecumenical) 신조이고, ‘에큐메니즘’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성경의 ‘온 세상’(오이큐메네; οίκουμένη; 24:14)에서도 나타난다. 필자는 본고에서 ‘교회연합운동’이나 ‘교회일치운동’의 용어를 병행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9)최윤배,『잊혀진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44-50. 이 책은 한국기독교학회 ‘제6회 소망학술상 수상’ 저서임(2011.10.21).

(10)불어로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독어로는 스트라스부르크(Straßburg)로 부를 수 있는 이 도시는 현재는 프랑스에 속한 지역이지만, 부처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남부독일에 속했다. 우리는 본고에서 이 도시를 불어 발음을 따라서 ‘스트라스부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의 워래 이름인 ‘Butzer’가 라틴어로 ‘Martinus Bucerus’이고, 현재 는 ‘Martin Bucer’로 표기되기 때문에, 비록 불교의 창시자 부처(Buddha)와 동일하게 발음될지라도, 우리는 한글로 ‘부처’로 번역하기로 한다.

(11)M. van Kampen, Martin Bucer: een vergeten reformator (s-Gravenhage: Boekencentrum, 1991), 이 책 제목은『마르틴 부처: 잊혀진 종교개혁자』이다.

(12)Yoon-Bae Choi, De verhouding tussen Pneumatologie en Christologie bij Martin Bucer en Johannes Calvijn(Leiden: J. J. Groen en Zoon, 1966, Proefschrift van de Theologische Universiteit van de 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Apeldoorn, 1996), 13-20.

(13)황대우,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칼빈연구』제3(2005), pp. 147-205; Dae-Woo Hwang, Het Mystieke lichaam van Christus: De ecclesiologie van Martin bucer en Johannes Calvijn,(Proefschrift van de Theologische Universiteit van de 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Apeldoorn, 2002).

(14)최윤배 공역,『기독교고전총서17: 멜란히톤과 부처』(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pp. 219-504; 황대우 편저, 『삶, 나아닌 남을 위하여: 마르틴 부처의 기독교윤리』(서울: SFC, 2007).

(15)G. Anrich, Martin Bucer, Straßburg 1914; J. W. Baum, Capito und Butzer, Nieuwkoop/B. de Graaf 1860; H. Bornkamm, Martin Bucer: Der dritte deutsche Reformator, in: idem, Das Jahrhundert der Reformation: Gestalten und Kräfte, Göttingen 1961, S. 88-112; H. Eells, Martin Bucer, New Haven 1931; K. Exalto, Een pastorale gemeente, Apeldoorn 1986; M. van Campen, Martin Bucer: een vergeten reformator 1491-1551, s-Gravenhage 1991; M. Greschat, Martin Bucer: Ein Reformator und seine Zeit 1491-1551, München 1990; H. Joisten, Der Grenzgänger: Martin Bucer: Ein europäischer Reformator, Stuttgart 1991; W. Köhler, Dogmengeschichte II, Zürich 1951; M. de Kroon e.a., Bucer und seine Zeit, Wiesbaden 1976; A. Lang, Der Evangelienkommentar Martin Butzers und die Grundzüge seiner Theologie, Leipzig 1900(Aalen 1972); A. Lienhard, Martin Butzer, Straßburg 1914; H. J. Selderhuis, Huwelijk en echtscheiding bij Martin Bucer, Leiden 1994; W. P. Stephens, The Holy Spirit in the Theology of Martin Bucer, Cambridge 1970; W. van t Spijker, De ambten bij Martin Bucer, Amsterdam 1970(= J. Vriend e.a. trans., The Ecclesiastical Offices in the Thought of Martin Bucer, Leiden/New York/Köln 1996); H. Strohl e.a., Martin Bucer 1491-1551, Lichtweg 1951; F. Wendel, Martin Bucer: Esquisse de sa vie et de sa pensée publiée à loccasion du 4e février 1551, Strasbourg 1932; G. H. Williams, The Radical Reformation, Philadelphia 1952.

(16)참고, 최윤배 공저, 16세기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유산』(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pp. 305-315.

(17)L. Leijssen, Martin Bucer en Thomas van Aquino: De invloed van Thomas op het denkpatroon van Bucer in de commentaar op de Romeinenbrief(1536), Leuven 1978; idem, Martin Bucer und Thomas von Aquin, in: Ephemerides Theologicae Lovanienses 55, Leuven 1979, S. 266-296.

(18) F. Früger, Bucer und Erasmus: Eine Untersuchung zum Einfluss des Erasmus auf die Theologie Martin Bucers, Wiesbaden 1970; N. Peremans, Érasme et Bucer daprès leur correspondance, Paris 1970.

(19)A. Wiedeburg, Calvins Verhalten zu Luther, Melanchthon und dem Luthertum(Diss.), Tübingen 1961.

(20)H. J. Selderhuis, Bucer en Zwingli, in: F. van der Pol(red.), Bucer en de kerk, Kampen 1991, pp. 55-56.

(21)Cf. W. Balke, Calvijn en de doperse radikalen, Amsterdam 1970, pp. 1-5; J.N. Bakhuizen van den Brink e.a., Handboek der kerkgeschiedenis 3: Reformatie en contra-reformatie, Leeuwarden 1980, pp. 97-108; M. Greschat(Hrg.), Die Refortmationszeit I, Stuttgart 1981; R.M. Jones, Spiritual Reformers in the 16th & 17th Centuries, London 1914; C. van der Valk, Bucer en de dopersen tot het jaar 1532(D.S.), Gouda 1976; G. H. Williams(red.), Spiritual and Anabaptist Writers(= LCC XXV), London 1957; idem, The Radical Reformation, Philadelphia 1952.

(22)M. Lienhard, Croyants et sceptiques au XVIe siècle: Le dossier des Epicuriens, Strasbourg 1978; G. Livet e.a. (red.), Strasbourg au coeur religieux du XVe siècle, Strasbourg 1977.

(23)A. Hyma, The Christian Renaissance: A History of the Devotio Moderna, Grand Rapids 1924, pp. 40, 340, 349.

(24)W. van t Spijker, De kerk bij Bucer: het rijk van Christus, in: idem(red.), De kerk: wezen, weg en werk van de kerk naar reformatorische opvatting, Kampen 1990, pp. 127ff.

(25)D. F. Wright, Bucer, Martin(1491-1551), in: Donald K. McKim (ed.), Historical Handbook of Major Biblical Interpreters(Downers Grove: IVP, 1998), pp. 157-164.

(26)Das ym selbs(1523), in: R. Stupperich(Hrg.), Martin Bucers Deutsche Schriften, I, Gütersloh 1966ff(= MBDS), 44-67; 황대우 편저, 『삶, 나아닌 남을 위하여: 마르틴 부써의 기독교윤리』(서울: SFC, 2007).

(27)최윤배 공역,『멜란히톤과 부처』(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1), pp. 219-496; F. J. Taylor (ed.),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Ichthus Edition XIX: Melanchthon and Bucer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9); Tomus Anglicanus, pp. 1-170; Martin Buceri Opera Latina, Vol. XV. De Regno Christi Libri Duo 1550. ed. F. Wendel, Paris/Gütersloh 1955, Vol. XV bis Du royaume de Jésus-Christ, édition critique de la traduction française de 1558, texte étabili par F. Wendel, Paris/Gütersloh 1954.

(28)최윤배 공저,16세기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유산』(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p. 307.

(29)참고, 최윤배,『깔뱅신학 입문』(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12), 84-93. 이 책은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으로서 “2012년 신학 국내부문 최우수상 수상‘ 저서임.

(30)최윤배,『깔뱅신학 입문』, 94-95.

(31)François Wendel, Calvin: sources et évolution de sa pensée religieuse, Paris 1950 (= tr. by P. Mairet, Calvin: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New York 1963 = 김재성 역, 『칼빈 : 그의 신학사상의 근원과 발전』(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Wilhelm Niesel, Die Theologie Calvins, München 19572 (1938) (= The Theology of Calvin, Grand Rapids 1980 = 이종성 역, 『칼빈의 신학』(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3); H. T. Keer (이종성 역), 『기독교 강요선』(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60); J. Calvin (이종성 외 3인 공역: 영역 편집- J.T. McNeill), 『기독교강요』 상 (1559)(서울 : 생명의 말씀사, 1988) (= OS = Johannis Calvini Opera Selecta III-V, cf.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 = CO; Corpus Reformatorum = CR); J. Calvin (양낙홍 역: 영역- F.L. Battles), 『기독교강요』 (1536) (서울 :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996) (= OS I, 11-280); S. Y. Lee, La notion dexperience chez Calvin daprès so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estienne (= Calvin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경험개념) (Thèse), Strasbourg 1984; Yoon-Bae Choi, De verhouding tussen pneumatologie en christologie bij Martin Bucer en Johannes Calvijn (= 마르틴 부처와 깔뱅의 성령론과 기독론의 관계) (Proefschrift), Leiden 1996; 이종성, 『칼빈』(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8).

(32)John Calvin(존 캘빈, 영어), Jean Calvin(쟝 깔뱅 또는 칼뱅, 프랑스어), I(J)ohannes Calvinus(요하네스 칼비누스, 라틴어), Johannes Calvin(요하네스 칼빈, 독일어), Johannes Calvijn(요하네스 깔베인, 네덜란드어) .

(33)‘니고데모파’란 칼빈 당시에 주로 프랑스에서 마음속으로는 종교개혁 사상을 동조하거나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로마 가톨릭 사회로부터 오는 불이익 때문에 자신의 종교개혁적 신앙을 외적으로 그리고 공적으로 표시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34)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CO) 31, 22.

(35)Jean Rott, Documents strasbourgeois concernant Calvin: I. Un manuscrit autographe: la harangue de recteur Nicolas Cop, in: RHPhR 44(1964), pp. 290-311 (= in: Regards contemporains sur Jean Calvin, Paris 1965, pp. 28-49); F. Wendel, Calvin: sources et évolution de sa pensée religieuse, Paris 1950, pp. 22ff; W. van t Spijker, Luther en Calvijn, p. 65, cf. R. Stauffer, Was weiß ich über die Reformation?, Zürich 1971, S. 93.

(36)W. Zimmerli (Hrs.), Psychopannychia, Leipzig 1932.

(37)J. Calvin (양낙홍 역), 『기독교강요』 (1536) (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38)CO 31, 26.

(39)CO 31, 28.

(40)그 당시의 김나지움은 오늘날의 개신교 유럽대학의 전신이었다. 오늘날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인문계중고등학교를 김나지움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나 최고 상아탑의 상징이다.

(41)John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p. 178: the most perfect school of Christ that ever was in the earth since the days of the apostles.

(42)Théodore de Bèze, La vie de Jean Calvin (Chalon-sur-Saône cédex : Europresse, 1993), p. 131, 참고, 데오도르 베자, 『존 칼빈의 생애와 신앙』, 김동현 역 (서울 : 목회자료사, 1999), p. 182.

(43)『기독교 강요』(1559)를 인용할 때, 예를 들면, 1 , 1, 1절을 간단하게 I i 1로 표시하기로 한다, IV xx 32.

(44)참고, 최윤배,『잊혀진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 373-394.

(45)W. van t Spijker, De kerk bij Bucer: het rijk van Christus, in: idem(red.), De kerk: wezen, weg en werk van de kerk naar reformatorische opvatting, Kampen 1990, pp. 127ff.

(46)부처의 교회 연합운동에 대한 탁월한 연구로서 다음을 참고하시오. 황대우 편저, 『삶, 나아닌 남을 위하여: 마르틴 부써의 기독교윤리』(서울: SFC, 2007), 74-75; 74-83.

(47)MBDS VII, 90.

(48)MBDS VII, 93.

(49)MBDS VII, 95.

(50)MBDS VII, 95.

(51)MBDS VII, 97.

(52)MBDS VII, 101.

(53)MBDS VII, 103, durch sich selb und seinen Geist.

(54)F. Wendel, LÉglise de Starsbourg, sa constitution et son organisation 1532-1535, Paris 1942, 228-235.

(55)W. Köhler, Das Marburger Religionsgespräch 1529: Versuch einer Rekonstruktion, Leipzig 1929, 38.

(56)A, Lang, Der Evangelienkommentar Martin Butzers und die Grundzüge seiner Theologie, Leipzig 1909, 386-410.

(57)Ibid., 387.

(58)Ibid., 387.

(59)Ibid., 388.

(60)Ibid., 390.

(61)Ibid., 392.

(62)Ibid., 394.

(63)Ibid., 396.

(64)M. Goldast, Politica Imperialia, sive discursus Politici, Acta publica et Tractatus generales, Frankfurt 1614, 1282.

(65)Ibid., 1282: Nobis igitur persuassimum est, in re ipsa nullam esse controversiam: de verbis est.

(66)Gonville and Caiuscollege, Cambridge, manuscr. No. 423: dissensio non illa quidem de re ipsa, sed de verbis, ut dictum est.

(67)Bancks collegeverslag, 42.

(68)Calvini Opera XIII, col. 356.

(69)M. Lenz, Briefwechsel Landgraf Philipps des Grossmüthigen von Hessen mit Bucer I, Osnabrück 1965, 278. C. Augustijn, Godsdienstgesprekken tussen rooms-katholieken en protestanten van 1538 tot 1541, Haarlem 1967, 60.

(70)M. Goldast, op. cit., 1280.

(71)bid., 1281.

(72)bid., 1283.

(73)T. Schieß, Briefwechsel der Brüder Ambrosius Blaurer und Thomas Blaurer I, Freiburg 1908, 643.

(74)Ibid., 647.

(75)T. Schieß, op. cit., II, 814.

(76)Ibid., 815.

(77)Wie alle recht Gotßfortigen von beden, yetz fünemmen theylen so man alt - und new gleubige, Bapsttische und Lutherische nennt, zu Einigkeit Christlicher kirchen kommen und sich darin unbewegt halten mögen(1533).

(78)Stupperich, Bibl., No. 41.

(79)MBDS V, 266.

(80)Ibid., 268.

(81)Stupperich, Bibl., No. 73: De vera Ecclesiarum in doctrina, ceremonii et disciplina reconcilliatione et compositione. Hic cognosces veros ortus et progres dissidiorum in religione, verasque vias illa tollendi, et Christianam consensionem restituendi[Strasbourg 1542], p. 2 recto-21 verso.

(82)C. Augustijn, op. cit., 3.

(83)F. W. Kantzenbach, Das Ringen um die Einheit der Kirche in Jahrhundert der Reformation, Stuttgart 1957, 131ff.

(84)H. Wagenhammer, Das Wesen des Christentums. Eine Begriffsgeschichtliche Untersuchung, Mainz 1973, 50-54.

(85)G. Anrich, Martin Bucer, Straßburg 1914, 77.

(86)Stupperich, Bibl., No. 86, Bestandige Verantwortung, LIII verso.

(87)M. Köhn, Martin Bucers Entwurf eienr Reformation des Erzstiftes Köln, Witten 1966; J.V. Pollet, Études sur les relations de Bucer avec les Pay-Bas, lAllemagne du Nord, Tome I, Leiden 1985.

(88)W. Nijenhuis, Calvinus oecumenicus. Calvijn en de eenheid der kerk in het licht van zijn briefwisseling, s-Gravenhage 1959, 참고 박경수,『교회의 신학자 칼뱅』(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89)MBDS II, 147.

(90)칼빈의 교회연합운동에 대한 탁월한 연구로서 다음을 참고하시오. 박경수,『교회의 신학자 칼뱅』(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85-106, 147-165.

(91)박경수,『교회의 신학자 칼뱅』, 98-104.

(92)John Calvin,『기독교 강요』(1559), IV i 2.

(93)John Calvin, 󰡒Reply to Sadolet,󰡓 240.

(94)박경수,『교회의 신학자 칼뱅』, 88-97.

(95)John Calvin, 󰡒Reply to Sadolet,󰡓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ed. J. K. S. Reid (London: SCM Press, 1954), 241.

(96)John Calvin, 󰡒Reply to Sadolet,󰡓 248-249.

(97)John Calvin, 󰡒Short Trestise on the Lords Supper,󰡓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ed. J. K. S. Reid (London: SCM Press, 1954), 142-166.

(98)John Calvin, Letters of John Calvin, Vol. 2, ed. Jules Bonnet (New York: Burt Franklin, 1972), 347-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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