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성경공부모임의 기원과 의미 및 적용

 

▲ 황대우 교수 고신대학교
16세기 종교개혁이 기독교의 페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교육이다. 중세 시대의 교육은 수도원과 대성당, 그리고 대학이 맡고 있었다. 수도원의 수도사 학교와 대성당의 사제 교육 제도는 프랑스의 파리(Paris)와 런던의 옥스퍼드(Oxford)를 중심으로 교수 길드(guild)가 북유럽풍의 중세 대학으로 발전하는데 가교 역할을 감당했다. 물론 중세 대학이 설립된 이후 수도사 학교와 대성당 학교 형태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이 세 기관을 통한 중세의 신학교육은 성직자 양성과 재교육을 위한 것이지 그 혜택이 일반 교인들에게까지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중세 말기에 세워진 공동생활형제단은 평신도의 경건 훈련과 교육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중세 예배 형태와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개혁을 위해 소개한 새로운 형태의 획기적인 교육 효과는 바로 “자국어 성경”과 “자국어 설교”를 통해 나타났다. 유럽 각국의 자국어로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지만 자국어 성경 번역을 정당화하고 보편화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이다. 이것과 더불어 자국어로 설교하도록 한 것은 그야말로 교회개혁의 획기적인 사건이다. 중세시대의 설교는 반드시 라틴어로만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목회자가 자국어로 설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국어 설교를 하도록 권장하고 실행했다. 이와 같은 자국어 예배 및 설교는 라틴어 예배와 설교만 고집해 오던 로마가톨릭교회에서도 최근 제2차 바티칸공회(1962-1965)를 통해 시행될 만큼 교회의 보편적 현상이다.

 

1. 기원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는 종교개혁 초기부터 이미 자국어 예배 및 설교의 유익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라틴어 예배 및 설교를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예배형식과 순서의 개혁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자국어로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생각했지만 그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루터는 1526년까지도 라틴어 예배를 철폐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예배와 미사에 관해서는 세 가지로 나뉜다. 첫 째로는 라틴어 [예배]인데 이것에 대해 우리가 이미 출판했으며 미사 양식이라 부른다. 여기서 내가 원하는 것은 결단코 제거하거나 폐기해버리는 것이 아니다.”(1) 여기서 또한 루터는 라틴어 예배와 설교가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자국어 예배 및 설교란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필요한 일시적 방편 정도로 보았다.

루터와는 달리 취리히(Zürich)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Huldrych Zwingli)는 성경 본문의 연속 강독(lectio continua) 형식을 설교에만 적용하지 않고 목회자들의 성경공부모임에도 적용했는데 이 성경공부모임이 바로 ‘예언’을 의미하는 ‘프로프짜이(Prophezei)’였다. 이 용어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비롯된 것인데, ‘예언모임’ 또는 ‘예언연구회’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 예언연구회는 취리히 목회자들과 목회자 후보생들이 주된 구성원이었지만 일반 교인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취리히의 예언연구회는 다른 스위스 도시들과 지역 및 독일 남부의 도시들과 지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에도 도입되었다. 매주 금요일 오전에 모이는 제네바(Geneva) 성경공부모임인 ‘꽁그레가씨옹’(Congrégations)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성경공부모임은 유럽 대륙뿐만 아니라 도버(Dover) 해협을 건너 영국의 종교개혁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소위 청교도(Puritans)의 성경공부모임인 ‘프로프싸잉’(Prophesying)을 태동시켰는데, 이 용어는 독일어 prophezei의 영어 번역이라 할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에게 있어서 ‘예언’은 ‘말씀설교’ 혹은 ‘복음선포’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또한 그들에게 ‘연구’와 ‘공부’는 같은 뜻이며 ‘배움’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유는 이것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가 ‘열심’을 의미하는 ‘studium’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러한 세 가지 성경공부모임의 역사를 각각 간단히 살펴본 후에 16세기 교회의 성경공부모임의 의의를 분석한 다음, 결론적으로 그것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1. 취리히의 성경공부모임: 예언연구회(Prophezei)

츠빙글리 연구의 대가인 로허(Locher)에 의하면 츠빙글리의 취리히 종교개혁은 성경 본문의 ‘연속강해’(lectio continua) 외에는 달리 아무 것도 아니었다(Locher, 1981. 27). 츠빙글리는 1519년 1월 1일 35회 생일에 취리히 대성당 시민 사제직에 취임한 후, 마태복음 1장부터 강해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연속강해’로 불리는 것이다(Gäbler. 1983. 45. 박종숙 역, 56-57). 이와 같은 연속강해 방식은 17세기 정통주의 시대에 교의학적 방식으로 채택된 총론 형식의 로키(loci) 방법론과 대조적이다(Locher, 1979. 162).

이런 연속강해를 통해 취리히 개혁자는 신자 개인과 교회의 모든 것을 오직 성경의 권위에만 의존하게 되었고, 나아가 성경해석이 교황과 교회공의회의 권위에만 닫혀 있는 것으로 주장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견해와는 달리 그는 성경이 모든 신자에게 개방된 것임을 점차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속강해 방법을 취리히 종교개혁에 정착시키기 위해 다른 동료 목회자들과 함께 훈련할 필요가 있었다.

1520년 여름 이후 츠빙글리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공적인 연속 강해 설교 외에도 사적인 모임을 통해 연속강해 형식으로 성경공부를 진행시켜 오다가(Gäbler. 1983. 92. 박종숙 역, 113), 1525년 6월 19일 오전 8시에 신학 교리를 강해하는 모임를 공식적으로 개설하였는데, 이름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기원된 프로프짜이(Prophezei)이며 이 ‘예언연구회’는 주일과 금요일을 제외한 모든 평일에 대성당 성가대석에서 개최되었고 “모든 목사들과 설교자들과 참사회원들과 고학년 학생들”(alle Pfarrer, Predikanten, Chorherren und größeren Schüler)로 구성되었다(Locher, 1979. 161-162).

‘예언연구회’ 모임은 예배일인 주일과 장날인 금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평일 오전 7시(겨울에는 8시)에 시작되었는데, 모임 순서는 먼저 츠빙글리가 강단에 올라가 기도한 후, 학생 한 명이 라틴어 번역성경 불가타(Vulgata)를 낭독하면, 세 번째 사람이 동일한 본문의 히브리어 성경을 낭독하고, 네 번째 사람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인 셉투아긴타(Septuaginta)의 본문을 낭독한 후 본문의 의미를 요약하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다음, 다섯 번째 사람이 나와 낭독한 본문을 라틴어로 설명하면서 교육하고 나면, 여섯 번째 사람(대부분은 레오 유트(Leo Jud) 혹은 카스파르 메간더(Kaspar Megander)가 담당했지만, 때로는 츠빙글리 자신이 맡기도 했다)이 나와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일반 시민들을 위해 독일어로 설교하면서 구체적인 적용까지 제시했다(Locher, 1981. 28-29; Locher, 1979. 162. 참고. Gäbler. 1983. 92-93. 박종숙 역, 113-115).

예언연구회 모임에는 외국의 학자들도 참석하였고 질문과 의견 제시가 허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권장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예언연구회는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일종의 세미나(Seminar) 형식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긴 중보기도로 마무리 되었던 예언연구회는 츠빙글리 생전에 구약만 다루었는데, 츠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의 증언에 의하면 예언연구회가 구약 전체를 모두 다룬 것으로 보인다(Locher, 1979. 162).

개블러(Ulrich Gäbler)에 따르면, 성직자들의 참여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던 취리히 예언연구회는 라틴어 학교와 대학 사이에 위치시킬 수 있는 것이었지만, 취리히 시가 그것으로 대학의 신학과정을 대체할 의도도 없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대학을 설립할 계획도 없었다고 한다(Gäbler. 1983. 92-93. 박종숙 역, 114). 개블러의 주장을 감안하면 취리히 예언연구회는 일종의 오늘날 목사양성기관인 신학교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정말 일종의 신학교와 같은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판 데어 보르흐트(Van der Borght)는 루터의 비텐베르크 수도원 개혁과 츠빙글리의 예언연구회의 유사성을 다룬 브레흐트(Brecht)의 소논문을 근거로, 루터의 비텐베르크 성경연구모임이 회중에게 개방적이었던 반면에 츠빙글리의 취리히 성경연구모임은 교육받은 식자들만을 위한 제한적인 성격의 모임이었으며 신학 아카데미 설립의 기초 작업이었던 것으로 단정하지만 이렇게 단정할만한 분명한 자료를 제시하지는 않았다(Borght, 2007. 21. fn. 23).

비록 취리히의 예언연구회가 비록 성직자들에 의해 주도된 모임이었고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의 참여가 의무적이었으며 그들을 위한 성경해석과 신학교육이 주요 목적이었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성경해석과 신학에 관심이 있다면 학생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즉 도시의 시민들인 일반교인들도 참석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예언연구회는 확실히 당대의 ‘학교’와는 분명 다른 성격의 모임이었다. 물론 일반 교인들이 얼마나 참석했으며,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아직까지 발견되지는 않았다.

한편 오전의 예언연구회와는 별도로, 오후에는 신약성경에 대한 강해 모임이 츠빙글리의 동료이자 최초의 츠빙글리 전기 작가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의 주도로 성모마리아 성당의 성가대실에서 진행되었는데, 1526년 이후에는 츠빙글리도 이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여 최소한 한 주에 한 번 정도는 이 모임에서 신약성경을 강해한 것으로 밝혀졌다(Gäbler. 1983. 93. 박종숙 역, 114).

오후의 이 신약성경 강해 모임이 구약성경을 연속적으로 강해한 오전의 예언연구회와 어떤 관계였는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오후 모임에는 일반 교인을 위한 독일어 해설 없이 배운 사람들을 위해 라틴어로만 신약성경이 해설되었다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취리히 종교개혁 초기부터 이미 성경의 연속강해를 통해 주일 예배 시간에 자국어 설교, 즉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설교를 제공했으며 장날인 금요일 이외의 평일에도 그와 같은 형태의 독일어 성경 해설을 제공하기 위해 정기적이고 공식적인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예언연구회였다.

이 예언연구회가 당시 성경을 가르쳐야 할 성직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성경과 성경에 근거한 교리를 알고자 하는 일반 교인에게 말씀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는 점에서 그것이 16세기 취리히 교회를 위한 성경공부모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모임의 주된 목적이 성직자들과 라틴어 학교 고학년생들에게 신학적인 틀을 제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 교인들의 참여가 배제되거나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6세기 취리히 예언연구회는 오늘날 교역자 성경공부모임 정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취리히의 예언연구회는 독일 남부의 팔츠(Paltz) 지역과 동 프리슬랜드, 저지대 라인랜드, 네덜란드와 다른 개혁교회들에 세워진 유사한 수많은 기구들의 모델이 되었는데, 특히 존 아 라스코(John à Lasco)가 그것을 취리히에서 배워 런던(London)에 있는 피난민교회에 소개한 이후, 영국에서는 국교회(Englican Church)뿐만 아니라 비국교도 교회들(Nonconformist Churches)에 속한 모든 청교도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Locher, 1981. 29). 결과적으로 예언연구회는 성경해석을 위한 종교개혁의 모델이 되었다.

 

1-2. 제네바의 성경공부모임: 금요성경연구회(Congrégations)

칼빈의 제네바에서도 취리히의 예언연구회와 같은 모임이 있었는데, ‘꽁그레가씨옹’이 바로 그것이다. 이 불어 단어는 ‘모임’, ‘회집’, ‘회합’, ‘회집’, ‘회중’ 등을 의미한다. 제네바에서는 금요일마다 모인 성경공부모임을 ‘꽁그레가씨옹’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 용어를 ‘금요성경연구회’라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 모임은 매주 금요일마다 목회자들과 일반교인들이 제네바에서 가장 큰 베드로(=삐에르. St. Pierre) 예배당에 모여 중세 성무일과의 습관을 따라 간단한 예배를 드린 후 오전 9시에 시작되었다.

제네바에 이런 성경공부모임을 소개한 것은 파렐과 칼빈이고 그 시기는 “1536년 11월 21일 이전 어느 때”인 것으로 추정된다.(흐레이프, 2006. 178). 제네바의 금요성경연구회는 확실히 1525년에 취리히에서 설립된 예언연구회를 모체로 한 것이므로 그와 유사한 성격의 모임이었다. 금요성경공부모임에는 제네바의 모든 목회자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대중에게 개방되었던 제네바의 금요성경연구회에 일반 신자들이 빈번히 자발적으로 참여했는데(Boer, 2004. 652), 이것은 개방적이었으나 일반 교인의 참여가 소극적이고 미미했던 취리히 예언연구회와는 확실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1541년의 제네바 교회법(Ordonnances ecclésiastiques)은 금요성경연구회의 발족 필요성과 동기 및 목적, 그리고 참여 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지금은 우리가 교역자들을 선출하고자 할 때 반드시 그들을 검열해야 하는 것처럼, 또한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유지하도록 반드시 ‘선한 통치를 시행’(avoir bonne police) 해야 한다. 우선, 교역자들 모두가, ‘자신들 가운데 교리의 순수성과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pour conserver purete et concorde de doctrine), 매주 특정한 날에 함께 모여 ‘성경(토론)모임’(conference des escriptures)을 가지되, 합당한 구실 외에는 누구도 불참해서는 안 된다. 만일 게으른 자가 있다면 반드시 권고되어야 한다(CO 10a, 18. 거의 같은 내용의 1561년판 제네바 교회법은 같은 책 96쪽 참조.).

 

금요성경연구회가 일차적으로는 제네바 교역자들을 위한 모임이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교역자’란 ‘목회자’, 즉 ‘목사’(pasteur)와 같은 뜻이지만, 16세기 당시 이 단어는 ‘목사’보다 조금 더 포괄적으로 ‘사역자’ 내지는 ‘봉사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 금요성경연구회는 교역자들이 자신들의 의무에 충실하도록 하기 위한 “선한 통치” 수단의 당위성과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설립 목적 또한 제네바 교역자들 사이의 교리적인 혼합이나 불일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제네바 도시 내의 교회에서 사역하는 모든 교역자들은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고 제네바 주변의 변방 교회들에서 사역하는 교역자들은 가능한 자주 출석하도록 요구되는데, 병이나 합당한 이유 없이 한 달 동안 결석할 경우 그것을 태만으로 간주하여 ‘형제로서의 권면’(adminstrations fraternlles) 대상이 된다(CO 10a, 19).

여기서 우리가 감안해야 할 사실 하나는 제네바가 ‘무질서’와 ‘혼란’에 대해 너무나도 부정적이고 적대적이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질서가 잘 잡힌 교회를 원하고 그 [교회]를 그런 상태로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통치 형태에 견지해야 한다.”(CO 10a, 16-17). 그래서 무질서와 혼란을 야기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방지하고자 했는데, 금요성경연구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점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바울이 가르쳤던 말씀과도 일치한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2-33a).

제네바 교회법에 따르면 제네바 교역자들은 교리적 견해 차이가 발생할 경우 상호 토론을 통해 교정해야 하고, 필요할 경우 ‘장로들’(les anciens)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데, 우호적인 합의에 도달할 수 없을 경우에는 시의 최고 행정장관인 ‘시장’(magistrat)에게 호소해야 한다.(CO 10a, 18) 제네바 시의 시장은 1명이 아니라 4명이었고 시장의 임기는 1년이었으며, 네 명의 시장 가운데 한 명이 제네바 교회의 치리회(Consistoire = Consistorium), 즉 오늘날 당회의 의장직을 겸했다. 물론 제네바 교회의 당회는 범위에 있어서 오늘날 개교회의 당회와는 달리 제네바 시의 모든 교회의 행정뿐만 아니라, 제네바 변방의 교회들의 행정까지도 포괄하는 작은 노회 같은 당회였다.

제네바의 금요성경연구회가 비록 직접적으로는 제네바의 모든 교역자들, 즉 목회자들을 위한 모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일반인들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이 모임은 대중에게 개방되었는데, 제네바 교회의 일반 교인들은 이 모임에 자주 참석했다. 과연 어떤 일반인들이 이 모임에 참석했으며 무슨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더 부르(De Boer)의 소논문이 그와 관련한 분석을 상세하게 제시했다.

더 부르의 분석에 의하면 1540년대와 1550년대의 금요성경연구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는 목회자와 일반인을 합하여 모두 50~6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특히 제롬 볼섹(Jerome Bolsec)의 신학이 중요한 논점이 되었던 1551년의 한 금요성경연구회에는 31명의 일반인과 8명의 제네바 목회자와 10명의 제네바 변방의 목회자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금요성경연구회의 평균 참석자는 약 50명 정도였고, 그 가운데 약 40퍼센트는 목회자였으며 나머지 60퍼센트 혹은 그 이상은 목회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Boer, 2004, 653).

1555년 초에는 “성경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 하는” 일반교인 몇 사람이 목회자들에게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성경공부모임을 매주 갖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1557년에도 유사한 요청이 제기되었는데, 이때에는 이 모임을 주 단위가 아닌 월 단위로, 즉 매달 첫 번째 금요일마다 열기로 결정했으나 이것이 얼마동안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일반교인 가운데는 후에 목회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Boer, 2004, 658).

엘시 맥키(Elsie A. McKee)는 금요성경연구회 모임에서 목사들이 성경 말씀을 자기의 고유 언어로 해설하도록 연습하는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그것을 대중들에게 공개된 “일종의 설교실습” 모임으로, 그리고 “공부와 설교를 동시에 진행하는 수업”으로 간주했다(맥키, 2011. 50; 흐레이프, 2006. 178). 하지만 맥키 자신도 언급한 것처럼 칼빈의 불어 해설이 그 모임의 끝이 아니며 폐회 전에 참석한 일반인들도 발언하고 질문할 기회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금요성경연구회를 일종의 설교실습이나 신학수업으로 보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금요성경연구회에 목회자의 참여는 의무적이었던 반면에 일반교인의 참여는 전적으로 자발적이었다.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Registres de la compagnie des pasteurs de Genève)에 매우 간헐적으로 언급된 금요성경연구회의 기록과 칼빈의 설교 모음집을 발행한 인쇄업자 콘라트 바디우스(Conrad Badius)의 기록, 그리고 전직 이태리 추기경 피에르 파올로 베르게리오(Pier Paolo Vergerio)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금요성경연구회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권면하는 대로 무질서한 예언이 아니라 순서에 따른 질서 정연한 예언하기를 실천했다(Boer, 2004, 655).

베르게리오의 기록에 의하면, 매주 금요일 아침 삐에르 예배당에서 열리는 이 모임에는 목회자와 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하며, 그들 중 한 사람이 성경 구절을 읽고 간략하게 설명하고 나면 다른 사람이 문제가 될 만한 주제를 제시하고, 그 다음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그 다음 사람이 덧붙여 설명하는데,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들으러 온 청중들도 그와 같이 하며, 이런 방식은 고린도전서 14장 29-30절로부터 기원된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더 부르는 “일반교인들에게도 성경과 이와 관련된 교리를 해설하고 토의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정당하게 주장한다(Boer, 2004, 656).

1541년의 교회법 제정으로 제네바에서는 아마도 1541년부터 정기적인 목사들의 모임, 즉 제네바 목사회(Compagnie des pasteurs de Genève)가 구성되어 회집되었겠지만, 칼빈 생전의 목사회 회의록은 1546년부터 이후의 것만 남아 있다. 목사들만의 모임인 목사회는 오전 모임인 금요성경연구회가 끝난 이후 일반교인들은 떠나고 목사들만 남아서, 누가 어디서 설교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설교 배분 문제와 목사 후보생의 추천 및 조사, 학교의 감독, 목회자들 사이의 관계 문제, 다른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과 주고받은 공적인 서신에 관한 업무 등과 같은 주제들을 의논하고 결정했다(맥키, 2011. 50-51). 이런 ‘제한적인 목사회’와는 달리 목회자들의 참석이 의무적이었고 목회자들이 주도했던 오전의 금요성경연구회는 참여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개방적인 목사회’로 간주될 수도 있다.

금요성경연구회의 진행은 취리히의 예언연구회처럼 선택된 성경 본문의 연속강해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흐레이프, 2006. 179) 또한 아마도 칼빈의 생전에는 금요성경연구회에서 불어로 진행되는 모든 토론을 마무리 짓는 것뿐만 아니라, 모임 자체를 마무리하는 기도 역시 대부분 칼빈 자신이 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본문의 연속강해 방식이었지만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였다. 대표적인 예가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옹(Sebastian Castellion)과 제롬 볼섹(Jerome Bolsec)의 경우였다.(이 두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Boer, 2004, 660-669; 흐레이프, 2006. 179-182)

 

1-3. 청교도의 성경공부모임: 말씀연구회(Prophesying 혹은 Exercise)

제네바 금요성경연구회에 일반교인의 참여는 참여자의 60%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컸고 취리히의 학문적 예언연구회에서보다는 훨씬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었지만, 청교도의 ‘설교연구회’에서만큼 중심적이지는 않았다(Boer, 2004, 670). ‘프로프싸잉’이란 단어는 취리히의 ‘프로프짜이’라는 독어를 영어로 직역한 것이기 때문에 ‘예언연구회’라고 하는 것이 일관성 있는 번역이지만, 굳이 그것을 ‘설교연구회’라고 번역한 이유는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프로프싸잉’은 교회 강단의 설교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청교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는 “예언의 기술”(The Arte of Prophecying)이라는 자신의 글에서 ‘예언’을 “선지자의 공적인 말”(publike... speech of the Prophet), 즉 ‘설교’로 설명한다. “예언의 기술이나 능력은 예언을 바르게 적용하는 거룩한 교리이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예배와 이웃의 구원과 관련된 선지자의 공적이고 장엄한 말이다.”(Perkins, 1617. 646) 여기서 퍼킨스가 말하는 ‘프로프싸잉’은 설교, 즉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speaking forth the truth of God’s Word)을 의미한다(Beeke & Pederson, 2006. 476).

취리히 교회 구조는 1534년에 탄생한 영국국교회(Englican Church) 구조와 상당히 유사하지만 정작 영국에 ‘프로프싸잉’ 즉 ‘설교연구회’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은 영국국교회인 고교회(High Church)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비국교도(non-conformists)로 구성된 저교회들(Low Churches)이었다. 이 교회들에는 학식을 갖춘 설교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연습하는 기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설교자 수급의 절대적 부족 현상은 종교개혁을 장려했던 영국 왕 에드워드 6세(Edward VI)의 대권을 이어받은 메리 여왕이 영국교회를 다시 로마가톨릭교회로 만들기 위해 종교개혁에 가담했던 수많은 학자들을 처형하고 추방함으로써 발생했는데, 집권이 6년 천하로 끝난 메리를 이어 등극한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왕이 교회 정책에 관한 한 종교개혁 지지자들을 관용하는 ‘중도’(via media)적 입장을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자 부족 현상은 그녀의 집권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영국에서 가장 먼저 설교연구회와 같은 것을 세운 사람은 어린 왕 에드워드 6세 시절에 감독이었고 메리(Mary) 여왕의 집권 당시 순교한 존 후퍼(John Hooper. ?-1555)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후퍼가 조직한 것은 성직자들만의 제한적 설교훈련 모임이었다. 영국에 개방적인 설교연구회가 처음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엘리자베스 집권 초기인 1560년대로 볼 수 있다. 1560년 알반스(St. Albans)에 교육받지 못한 성직자를 위한 신학훈련 모임이 있었다(Jung, 2007. 44). 이런 설교연구회들은 1564년에 놀위치(Norwich)에서도 발견된다(Knappen, 1939. 253). 영국에서 이런 종류의 모임들은 아마도 에드워드 6세가 통치하던 시절, 런던에서 피난민 교회를 독립적 체제로 목회하던 대륙의 종교개혁자 존 아 라스코(John a Lasco)의 모범을 따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Spijker & Bisschop & Hof, 2001. 226).

1572년에는 그런 모임들이 공적인 것이 되었고 세 명의 발언자가 일반 청중 앞에서 성경을 해설하는 형식을 갖추었다(Jung, 2007. 44). 하지만 초기의 이런 설교연구회들은 단순히 성직자 훈련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동지애로 결속된 설교자들이 상호간에 설교의 은사를 조사하고 개발하는 모임, 즉 경건한 성직자들을 조직적인 성경 해설과 교리교육 및 설교훈련을 위한 일종의 직업훈련(job-training)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식한 성직자들에게 교리교육과 설교훈련을 제공하는 기관이기도 했다(Jung, 2007. 45).

청교도 설교연구회가 점차 발전해 가면서 일반교인들을 수용하여 경건한 삶에로 인도하는 수단이 되었다. 결국 설교자들이 자신들의 청중을 묘사하기 위해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상호 연대감을 증진시켰다. 성격상 학문적이고 지적이었으며 통상 라틴어로 진행되었던 청교도 설교연구회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매년 부활절부터 시작하여 미가엘 축일에 이르기까지 주 1회의 훈련모임으로 도시의 7-8마일 내에 거주하는 모든 교역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월요일 오전 9시경에 모였다. 신학적인 질문에 대답하도록 지정된 사람은 두 명이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차례나 순서에 이의를 제기한다.”(Jung, 2007. 47).

설교연구회는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먼저 아침기도로 시작한 다음, 성령께 호소하는 찬송을 불렀다. 가장 젊은 신자[divine. ?성직자]가 먼저 강단에 올라가 약 30분 동안, 자신에게 공식적으로 할당된 성경의 한 부분을 다룬 자신의 묵상을 발표한 후, 넷 혹은 다섯 명의 다른 신자들(divines)이 동일한 본문의 의미를 설명했으며, 마지막으로 좀 더 근엄하거나 경험 많은 신자(divine)가 이전의 의견들을 요약하고 자신의 설명을 덧붙였다. 취리히의 경우처럼 그 과정들은 일반 청중에게 설교하는 자국어 설교로 마무리 되었다. 그런 다음 영국의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즉 공동예배서가 제시하는 온 교회와 여왕과 영국을 위한 기도문으로 기도하고 시편 찬양을 함으로써 폐회되었다. 교역자들의 모임을 통해 다음 모임과 그 모임에서 다룰 성경 본문을 결정었으며, 설교연구회에서 논의된 교리와 발언자들의 삶과 도덕을 평가하고 감독하는 것뿐만 아니라, 교육 받지 못해 설교연구회에서 자유롭게 발표할 수 없었던 성직자들이 얼마나 공부에 진전이 있는지 살피는 것도 역시 교역자들의 몫이었다(Jung, 2007. 48).

방청이 허락된 신자는 앉아서 펼쳐진 제네바 성경으로 설교자들이 인용한 본문을 찾을 수 있었다. 성직자들이 설교연구회를 위해 모임을 가지는 동안 일반 교인들은 그들이 들었던 것을 가지고 서로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설교연구회 모임은 대학들과 무관한 것이었으나 1580년대 중반에 캠브리지(Cambridge)에서는 신학생들의 훈련과 연습을 위해 사용되는 순서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것 역시 고린도전서 14장 29절을 모델로 삼았던 것이다(Jung, 2007. 49). 이런 과정을 통해 설교연구회는 지역에 따라 신학교로 발전하기도 했다.

영국의 설교연구회 형태는 매우 다양했다. 어떤 곳에서는 설교연구회가 모이는 날이 월요일이었지만 그것이 토요일인 곳도 있었다. 어떤 곳은 규칙적인 형태를 사용했지만 새로운 것을 사용하는 곳도 있었다. 때로는 설교연구회가, 교리를 논의하기 위해 목사와 회중이 함께 매주 모이는 모임으로 간주되는가 하면, 때로는 학자들과 학생들이 라틴어로 진행하는 학문적인 주석 작업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설교연구회는 대학을 졸업한 성직자들을 동화되게 하고, 무식한 성직자들을 개선시키며, 청교도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일반 청중, 즉 일반 교인들이 참석하는 모임도 있었고 아무도 참석하지 않는 모임도 있었다. 설교연구회는 부주교(archdeacon)가 조직하기도 했고 청교도 설교자들이 조직하기도 했는데, 한 주에 한 번 모이거나 두 주에 한 번 모이거나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것 등 다양했다. 이런 설교연구회에 관심을 가지고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할 뿐만 아니라 선하고 경건한 제도가 되도록 권장하는 영국성공회 주교들도 있었지만 다른 주교들은 이해가 부족하여 그런 모임들을 허락하지 않았다(Jung, 2007. 50).

1570년대에는 영국에서 설교연구회가 모든 국민에게, 즉 영국의 국교도(conformists)뿐만 아니라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을 포함한 모든 비국교도(non-conformists)에게도 일반적이고 친숙한 관행이 되었으나, 당시 통치자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종교에 관하여는 중도적 입장이었지만 영국 교회의 통일된 모습을 원했고 국민에게 반항적인 지성보다는 무지한 순종을 원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의 신앙적 지성을 깨우는 교육의 통로가 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설교연구회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Knappen, 1939. 253).

 

2. 의미

 

16세기 성경공부모임은 종교개혁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무식한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열정을 가진 일반 성도들의 지성, 특히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지성을 깨웠다. 지역마다 세부적인 형태는 조금씩 달랐고 형태도 다양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알도록 사람들을 교육하는 유익한 개신교 제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16세기 성경공부모임 가운데 세 지역의 성경공부모임, 즉 유럽 대륙의 대표적인 두 개혁교회의 기원지인 취리히와 제네바에 세워진 것과 영국의 청교도적인 것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것들은 모두 예외 없이 모든 성경공부모임은 고린도전서 14장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었고, 당시 성직자로 분류되었던 교역자들의 설교 사역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후대의 신학 교육 기관인 신학교의 모체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성경공부모임이 단순히 신학교의 전신 정도로만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16세기의 모든 성경공부모임이 단지 성직자의 교육과 훈련만을 목표로 삼지 않았고, 성격상 신학교처럼 제한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방적인 강의 형식으로 진행된 것도,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만의 모임도, 설교를 담당한 교역자들만의 모임도 아니었다. 16세기 성경공부모임의 설립 배경과 목적은 기독교 교리의 통일성에 있었다. 교리의 통일성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핵심이었다. 이것을 위해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일반교인들에게도 성경을 가르쳤던 것이다.

16세기 성경공부모임은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 모든 교인들에게 개방된 모임이었다. 일반 교인들은 단순히 방청객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라, 질문과 토론을 통해 성경공부모임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영국의 성경공부모임 형태 가운데 일부는 일반 교인이 발제와 의견 제시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취리히와 제네바의 성경공부모임은 둘 다 교역자들인 목회자들이 주체적인 역할을 했던 모임이었다. 역시 둘 다 일반 교인들의 참여를 허용했지만 취리히보다는 제네바 일반 교인의 참여도가 훨씬 더 높았고 적극적이었다. 심지어 제네바에서는 일반 교인들만을 위한 성경공부모임도 시도되었다. 영국의 청교도 성경공부모임에는 크게 세 가지 형태, 즉 교역자들만의 제한적 모임과 교역자 주도형의 개방적 모임, 그리고 일반 교인들로만 구성된 모임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16세기 성경공부모임은 후대에 세 종류의 형태로, 즉 교역자를 양성하는 공적인 신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들의 재교육 및 평생교육, 그리고 일반 교인들의 신앙 교육을 위한 사적인 성경공부모임으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적용

 

지상의 교회는 어느 시대의 것이든 완전하지도 완전할 수도 없다. 항상 불완전하고 타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타락했다고 평가되는 중세 교회보다 결코 덜 타락했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세상의 악함을 한탄하고 지적해야할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를 하수와 같이 쏟기는커녕 세속화를 넘어 세상보다 더한 타락과 죄악으로 인해 오히려 세상의 지탄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교회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날로 높아져 가고 있다. 물론 교회 개혁을 부르짖고 개혁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안타깝게도 때론 ‘개혁’이라는 단어가 그것을 외치는 자의 타락을 숨기고 위장할 뿐만 아니라 변호하기까지 하는 수단으로 전락되기도 한다. 말씀을 통한 자기 개혁 없이는 진정한 개혁도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에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권위가 있는가? 16세기 교인들은 단지 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라, 강단의 설교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교역자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의 권위가 교역자의 성품과 자질로부터 기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기원된다고 믿었다. 물론 설교자 자신도 자신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고 여겼기 때문에 말씀 앞에 먼저 자신을 세우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설교 사역을 수행했다. 목사인 우리도 그러한가? 목사의 권위, 설교의 권위는 자신의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목사의 경건한 삶과 인격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16세기 개신교도들은 설교자든 청중이든 말씀을 최고최상의 권위로 간주했기 때문에 말씀에 죽고 말씀에 살 각오를 다짐하며 살았다. 당시의 성경공부모임이 그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는 확실한 증거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무엇을 삶의 최고 권위로 받아들이는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을 의미하는가? 과연 우리 삶의 최고 권위는 성경인가? 아니면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그 무엇인가?

종교개혁은 ‘새로운 개신교 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재발견이었다. 성경의 재발견이요, 교부들의 사상의 재발견이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은 모든 것을 부정하고 뒤집어엎는 혁명이 아니었다. 건축공학적으로 논하자면 종교개혁은 옛 건물들을 몽땅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재건축이 아니라, 헌 건물들을 수리하고 보수하는 개축이요 리모델링이다. 즉 종교개혁은 중세 기독교라는 집을 허물고 개신교라는 새로운 집을 세운 재건축 사건이 아니라, 중세 기독교의 사용 불가능한 낡은 부분을 과감하게 수리하고 보수한 리모델링 사건이라는 것이다.

리모델링, 즉 개혁의 핵심 부분은 바로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본래 말씀의 자리였던 지상 교회의 최고 위치에 다시 올려놓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16세기 종교개혁은 말씀의 회복사건이었다. 지상의 모든 것은 바로 그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는 성경의 원리를 종교개혁자들이 재천명했던 것이다. 그들은 말씀 위에 놓여 있던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위를 다시 말씀 아래에 위치시켰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바른 순서의 회복을 위한 운동, 즉 ‘질서회복운동’이었다.

여기서 종교개혁에 대한 후대 개신교도들의 심각한 오해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이 말씀의 권위만 인정했다는 오해다. 종교개혁자들은 말씀의 권위를 최고의 권좌에 회복시키면서 나머지 모든 인간적인 권위를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폐기처분해버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지상 교회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교회의 권위, 곧 직분의 권위를 인정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 역시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교회도 질서가 요구되는 집단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윤리적 타락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다. 하지만 교회문제의 핵심은 윤리와 도덕과 양심의 타락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가 실추됨으로써 빚어진 교회 질서의 붕괴이다. 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이미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도 일어났는데, 특히 고린도교회가 대표적이다. 극도로 타락한 고린도교회를 향해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질서의 하나님으로 강조하면서 말씀의 권위, 곧 설교의 권위와 질서의 회복을 가르쳤다. 바울 사도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내세운 것도 역시 말씀의 권위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

16세기 성경공부모임은 종교개혁의 정신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성경공부모임은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충고에 따라 교회에 말씀의 권위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 개신교도들은 권위와 질서 회복의 핵심을 교리의 통일성에서 찾았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 즉 바른 기독교 교리가 종교개혁의 핵심이었다. 바른 성경적 교리로부터 바른 순서, 즉 질서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에서 말씀의 권위와 질서가 바르게 회복될 때 비로소 교회의 잘못된 관습과 윤리적 타락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교회문제들의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그 말씀의 권위에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의 권위, 즉 설교의 권위와 교회의 질서가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말씀의 권위가 바르게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 질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고 혼돈과 혼란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온갖 종류의 인간적인 권위만 난무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세속화로 인한 타락상과 심각한 비윤리적 문제를 바로잡는 것 역시 권위와 질서의 회복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간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길이요, 교회의 길이 세상의 길과 다르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16세기 성경공부모임은 교회에서 말씀의 권위와 질서를 바르게 회복하기 위한 모범적인 사례다. 하지만 16세기의 그것을 오늘날 그대로 이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환경적인 토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오늘 우리 교회에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16세기 성경공부모임의 원리와 목적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마다 성경공부모임이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많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성경공부모임은 그 교회만의 유익을 위한 전도 및 양육 수단이거나 단순히 친분 있는 사람들의 친목도모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다 나쁘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성경공부들을 순수하게 교리의 일치를 도모하며 말씀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모임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 것들은 어쩌면 16세기 성경공부모임의 변질이 아닐까?

오늘날 교회들 간의 전도에 대한 열심을 ‘선한 경쟁’이란 말로 표현하는 것은 추악한 인간의 욕망을 위장하는 허울 좋은 포장지에 불과하다. 서로를 경쟁관계가 아니라 형제로 인식할 때 비로소 지역교회들은 연합할 수 있고 영적인 동반성장을 꿈꿀 수 있다. 지역 교회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관계는 더 나쁘다는 ‘거리와 관계의 반비례현상’은 오늘날 교회의 교회답지 못한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인간적인 필요와 욕구가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개교회주의를 극복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같은 지역 내에 있는 가까운 교회들의 교역자들이 ‘사심이나 경쟁의식 없이’ 동역자로서 함께 모여 성경을 공부하는 정기적인 모임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이상적일지 모른다. 물론 지금 우리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선한 뜻이 있는 곳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시찰회나 교역자회를 성경공부모임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이것 역시 실효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지역교회의 연합을 위해 그보다 더 건강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먼저 상호간의 경쟁의식부터 내려 놓아야할 것이다. 이웃 교회를 도와야할 형제교회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일까?

개체교회 내에서도 올바른 성경 해석 원리와 건전한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 교인들의 신학적 무지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루터가 말한 것처럼 신자는 신학자이기 때문에 신자인 우리는 모두 좋은 신학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전도비만증에 시달리고 있다. 교회의 본질적 사명 가운데 ‘전도’만 지나치게 강조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교육’은 무시된다. 어쩌면 오늘날 교회는 교인이 순종하는 바보가 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목사는 말씀을 잘 아는 똑똑한 교인을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말로 ‘교회’(敎會)라는 단어는 ‘가르칠 교’와 ‘모을(모일) 회’의 한자 합성어다. 이 단어가 가진 결점도 있지만 교회가 구원을 가르치고 배우는 영적 교육기관임을 가장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칼빈은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 자녀인 신자를 낳고 양육하는 일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가르치는 일, 구원의 샘이자 삶의 거울인 말씀을 공적으로 논의하는 성경공부모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좋은 소통의 수단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서 가장 거룩한 소통 수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교회문제 해결의 시작점이 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마지막 종착역이 되어야 한다.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단순히 16세기 종교개혁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참 교회이기를 원하는 모든 불완전한 지상교회가 끊임없이 자성적으로 외쳐야 할 공동의 구호다.

목사는 말씀의 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죽고 사는 사람이 바로 목사다. 그렇다면 그 말씀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건강한 목회를 위해서는 심방도 중요하고 행정도 중요하고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과 설교이다. 이 둘은 목사가 양떼를 바르게 인도하는 막대기다. 성경과 설교는 목사가 자신의 양떼인 성도와 더불어 가지는 거룩한 영적 교제의 수단이다. 이 수단을 통해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교회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복음선포요 말씀선포인 설교는 신자를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한다. 이러한 설교의 권위가 바르게 회복되는 곳에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도 회복될 것이다.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권위가 회복될 때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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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LW 3, 296: “Es ist aber dreyerley vnterscheyd Gottis diensts vnd der Misse. Erstlich eyne latinsche wilche wir zuuor haben lassen aufgehen vnd heist Formula Misse. Dise wil ich hie mit nicht auffgehaben oder verendert...”

*참고 도서 및 소논문 목록

 

1. 취리히 예언연구회

Ulrich Gäbler. 1983. Huldrych Zwingli. Eine Einführung in sein Leben und sein Werk. München: C.H. Beck. = <쯔빙글리: 그의 생애와 사역>. 박종숙 역. 서울: 아가페출판사, 1993.

Gottfried W. Locher. 1981. Zwingli’s Thought: New Perspectives. Leiden: E.J. Brill.

Gottfried W. Locher. 1979. Die Zwinglische Reformation im Rahmen der europäische Kirchengeschichte. Göttingen & Zürich: Vandenhoek & Ruppecht.

Martin Brecht. “Die Reform des Wittenberger Horengottesdienstes und die Entstehung der Züricher Prophezei,” in: Heiko A. Oberman ed., Reformiertes Erbe I.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92. 49-62.

Eduardus van der Borght, 2007. Theology of Ministery: A Reformed Cotnribution to an Ecumenical Dialogue. Trans. by H.J. Durell. Leiden: Koninkrijke Brill.

 

2. 제네바 금요성경연구회

Jean-François Bergier. ed. 1964. Registres de la compagnie des pasteurs de Genève au temps de Calvin. I. 1546-1553. Genève: Droz.

Erik A. de Boer. 2004. “The Presence and Participation of Laypeople in the Congrégations of the Company of Pastors in Geneva,” in Sixteenth Century Journal Vol. 35, No. 3 (Fall, 2004), 651-670.

Wulfert de Greef. 1989. Johannes Calvijn. Zijn werk en geschriften. Kampen: De Groot Goudriaan. = 1993. The Writings of John Calvin: An Introductory Guide trans. by Lyle D. Bierma. Grand Rapids: Baker Books. = 불페르트 더 흐레이프, 2006. <칼빈의 생애와 저서들>. 황대우 & 김미정 공역. 서울: SFC. 이 책의 수정증보판이 이미 출판되었으며 조만간 수정증보판의 한글번역도 출판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Philip Edgcumbe Hughes. ed. & trans. 1966. The Register of the Company of Pastors of Genevan in the Time of Calvin.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Robert-M. Kingdon. ed. 1962. Registres de la compagnie des pasteurs de Genève au temps de Calvin. II. 1553-1564. Genève: Droz.

엘시 맥키, 2011. <칼뱅의 목회신학>. 이정숙 역.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3. 영국의 설교연구회

Joel R. Beeke & Randall J. Pederson, 2006. Meet the Puritans: With a Guide to Modern Reprints.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Joanne Joe Jung, 2007. “Conference: Rediscovering a Communal Tradition of Puritan Piety”. A Dissertation Presented to the Faculty of Fuller Theological Semi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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