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여는 글

▲ 하재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예배는 하나님과 그 백성들 사이의 만남이다.”(1) 그것은 예배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초청에 의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인격적인 상호적 교통의 행위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2) 예배를 통한 그 인격적인 만남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가장 원하셨던 교제이다. 어떤 면에서 창조주의 인격과 그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인격이 서로 만나 교제하는 것,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적절한 언어와 형태로 제사와 예배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셨다. 기독교의 예배가 하나님 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교제를 이루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시고 예배를 창시하셨기” 때문이다.(3)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 예배자인 우리 인간들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한다. 또한 그렇게 압축되고 상징화된 인격적 행위에 참여함을 통하여 개인과 신앙공동체가 유익을 얻게 된다. 예배의 다양한 “예식은 [예배자들로 하여금 영적] 질서를 세우고, 의미를 재차 긍정하며,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상반된 가치를 다루어주고, [삶의] 신비성을 조우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4)

그렇다면 치유적 예배가 과연 가능한가? 일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는 예배에서 치유적 요소를 찾는 것을 근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예배는 근본적으로 그 목적과 성격에 있어서 목회 상담과 구별되며, 치유를 그 주된 목적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창조자이시고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님의 감동에 힘입어 예배할 때 과연 인간에게 치유와 회복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예배의 주된 임무 이외에 그 예배가 주는 인간 편에서의 변화와 회복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조건 인본주의적인 일일까?

치유라는 명분을 위해 예배의 하나님 중심성을 타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궁긍적으로 인간 치유를 목적으로 삼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일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바른 예배는 인간에게 치유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인간 창조의 원형인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고 발휘되는 시간이 바로 예배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예배는 치유적인 예배이다. 진정한 모든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다. 진정한 예배의 인도자들은 예배자들의 삶을 예배의 맥락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인도자인 목회자는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 예배자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그 연장선상에서 예배를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 중심성을 외면한 채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예배 프로그램들을 임의로 구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예배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돌보는 목회자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신령과 진리로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치유와 회복의 장에 초대받은 것이다.  

II. 펴는 글  

1. 예배의 분류와 하나님 중심성

기독교에 다양한 형태의 예배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자면 첫째, “제단 중심적 혹은 성례전적 (로마 카톨릭, 정교회, 영국국교회), [둘째,] 강단 중심적 혹은 선포적 (주요 복음주의 개신교), 그리고 [셋째,] 성령님을 기다림의 형태(오순절 교회 및 퀘이커 교회)”의 예배들로 나눌 수 있다.(5) 먼저 성례전적 전통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육신적 자기 계시”에 초점을 두고 성만찬을 통해 구원의 신비를 강조한다. 말씀 선포와 성경 읽기를 여전히 포함하고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가 그의 대속적 희생을 기념할 때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임재하신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형태의 예배에서는 “교회의 [성례전] 실행의 연속성과 성례전을 집행하도록 인증된 사람들의 연속성을 매우 강조한다.”(6)

둘째, 말씀의 선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예배의 전통에서는 설교가 예배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성격상 예배의 인도자는 ”설교자“ 혹은 ”목사“로 불리우며, 사제라고 불려지지 않는다.”(7) 이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을 성직자로서의 주된 권위로 삼고, 또한 성만찬을 집행한다. 만인 제사장이란 개념을 근거로 예배에 있어서 회중들의 찬송과 응답과 교제를 중요하게 여기며, 비록 설교자가 예배를 주관하지만 예전 중심적 예배에 비해 예전 자체보다는 말씀 선포의 기능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셋째, 오순절 교회 예배의 중심은 예측할 수 없는 성령의 은사와 방언의 표적이다. 특히 예배 인도자인 목사는 “예배 중에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기꺼이 따르겠다는 내적인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일정한 예배 순서가 있지만 “예배 순서는 목사가 관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영역이다. 목사는 단순히 그 진행에 협력할 뿐이다.”(8) 특별히 이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인종적, 사회적 차별을 초월하여 그들에게 주어지는 은사들을 평등하게 누렸다. 그 결과 사회의 하층민들과 다른 인종의 사람들도 이 예배 공동체에서 중요한 구성원들이 될 수 있었다.

만일 두 번째 예배 공동체의 형태에 가까운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들에 있어서 치유적인 예배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우선 예배의 형식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마치 목회 상담에서 하듯 인간의 마음과 감정을 중심으로 예배할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예배의 중심은 말씀이며,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예배의 참된 중심이 되신다. 예배는 예배이며,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을 가질 수 없다. 예배의 초대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 주도적인 초청에 응답하여 그 임재 앞에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  

“예배는 신인 사이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상호적인 행위이지만 그러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향적인 행위들에 있다. 그 놀랍고 은혜로운 행위들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다.(9)  

하지만 예배가 가져오는 삶의 변화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자가 그 자체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치유의 요소들을 경험함으로써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바른 예배를 드릴 때, 거기에 인간은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환대를 경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죄의 용서와 환대는 예배자들로 하여금 영생의 확신을 가지게 할 뿐만 아니라 예배자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전인적 회복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이처럼 신적 행위가 중심이 되는 예배에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 초월자(the Holy)를 경험한 것 자체가 더할 나위없는 축복인 것이다”(10)구원을 받은 예배자가 예배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가 기초하고 있는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원래 형상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예배자는 그 분의 임재 안에 온전히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이 지으신 새로운 피조물로서 풍성한 영적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예배의 본질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이에 대한 전심어린 인정과 응답”(11)이기 때문에 예배의 형태가 어느 것이든 관계없이 예배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주시는 회복과 치유에 참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에서 치유적 요소를 찾는 것에 대해 경악스러워하는 복음주의자들도 있다. “개혁주의 예배론”을 저술한 Michael Horton은 “시장에 의해 결정되고, 심리 치료적이며, 오락으로 형성된 우리의 예배관은 배교의 시기에 이웃 나라의 신들을 섬기자고 소리치던 이스라엘 자손의 아우성과 유사한 것”이라고 일갈한다. 그것은 곧 “성경을 더 이상 ‘사실’로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춰서 예배를 바꾸려는 시도”이며, “현세의 천박한 줄거리”에 불과하다.(12) 하나님 중심적이고 성경 중심적인 예배를 유지하려고 하는 그의 의도는 우리가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는 주제이다. 더 나아가 예배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흥미로운 볼거리와 드라마라는 그의 논지는 우리의 예배를 매우 역동적이게 할 수 있는 주장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예배에서 치유적인 요소를 찾고 거기에서 사람들이 위로를 경험한다고 해서 그것을 배교의 아우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격한 이분법이다. 그렇다면 특정인들에 의해 장악되고 구약의 전통을 이어오던 명실상부한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행위를 중지시키고, 그 집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외치시며 성전을 만민의 것으로 회복시키신 예수님의 행위는 과연 세상 사람들의 인기와 구미에 맞추려던 배교의 시도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여기서 본 연구자가 예수님의 비유를 든 것은 논리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말장난과 같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언어의 유희처럼 Horton의 비유 역시 그렇게 깊은 의미 없이 단순한, 그러면서도 예배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돕고자 하는 섬세한 신학이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과격하게 칼을 휘두르는 무모하고 맹목적인 서술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본주의와 비교하는 이들의 어투가 언제나 그래왔지만 예배는 분명 하나님과 인본주의를 이분법으로 나누고 구별하는 경험이 아니다. 외려 예배는 하나님의 초청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하고 교제하며,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고, 예배자인 인간은 거기에서 주어지는 은혜와 치유를 경험하는 특별한 경험이다. 예배에서의 치유적 경험을 이교도적인 것이라 단순화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표현이며, 예배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예배의 깊이와 풍성함을 경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사고의 게으름의 산물이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것이면서 동시에 예배는 인간의 필요를 결코 경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공적 예배는 우리의 인간됨(humanity)에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기억과 정체성, 찬송과 감사,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진실을 말함, 용서함과 용서받음, 먹여줌과 먹을 것을 공급받음, 치유됨,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 등.”(13)  

예배는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 삶의 생로병사나 예측할 수 없는 불행의 경험들을 겪어 가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것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구원받은 예배자는 반복적으로 예배에 나아감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말씀과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를 경험한다. 예배가 예배 되고, 예배자가 변함없이 예배자일 때, 하나님은 변함없이 하나님으로 계셔서 예배자들의 예배를 받으신다. 환난 중에 있는 예배자를 하나님께서 그 예식 가운데 받아 주실 때, 그 예배의 풍성함이 상한 심령의 치유와 회개하는 죄인들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예배자가 예배나 예전에 참석하는 것은 그 자체가 깊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치유를 위한 예배라는 별도의 예배나 치유를 위한 순서를 만들기 이전에 이미 예배 자체의 본질이 가지고 있는 치유의 환경이다. 인간이 그 초청의 자리에 응답하며 그 앞에 신령과 진리로 나아가는 순간 그는 창조주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위치를 다시 발견하고, 그릇된 삶을 회개하며, 다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준비를 갖춘다. 예배자가 하나님의 품에 새겨진 약속을 받고 그 분의 위로를 받을 열린 마음을 갖추는 것 자체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형상을 회복하는 치유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2. 상담적 예배 인도자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가 예배 밖의 일상에서 예배자들과 더욱 긴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면 할수록 예배의 영적 의미는 예배자들에게 깊은 영적 위로가 된다. 예배자들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들을 사랑하는 목회자, 한 영혼을 세워주는 상담자인 목회자가 또한 설교자나 예배 인도자가 된다면, 그것은 돌봄을 받는 영혼들에게 깊은 은혜와 위로를 준다. 왜냐하면 이천 년의 교회 역사의 맥락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담담하게 흘러내리는 교회 역사를 대변하는 목회자가 인격적 목회로 예배자들을 돌볼 때 거기에 더 큰 위로가 경험된다.  

이와 같이 천편일률적인 수직적 예배 권위에 비해 오늘날 목회 신학자들은 목회자의 역할을 벗 혹은 여행의 동반자, 즉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닌 곁에서 함께 걷는 사람, 진정한 상호적 관계를 위하여 인위적인 수직적 관계를 회피하는 사람으로 보기 원한다.(14) 

물론 예배 인도자의 영적인 권위를 무시하거나 교회에 대한 그들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배 인도자들의 권위는 “순전히 은혜에 기초하고 있으며, 말씀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15) 다만 예배 인도자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 백성의 형편을 가장 가까이에서 친히 경험하여 아는 목회자이어야 한다.

예배와 예배의 인도자를 따로 생각할 수 없듯이 예배 인도자와 예배자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목회적 돌봄의 현장과 괴리된 예배 역시 생각할 수 없다. 예배 인도자들은 때로 혼돈과 가치충돌이 일어나는 예배자들의 정돈되지 않은 현실적 삶에 대해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현실의 삶과 괴리된 예배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배가 비록 전적으로 하나님께 향한 것이지만, 예배는 정돈되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모여 드리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을 담지 않은 예배, 예배자들과 문화적으로 낯선 라틴어 미사가 예배자들에게 인격적 의미를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라틴어 예배를 자신의 나라 언어로 바꾸어 예배하였고 찬송가도 당시의 예배자들이 이해할 수 있고 쉽게 부를 수 있는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불렀다.  

[예배 인도자는] 그들 앞에 있는 특별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의 문제를 회피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이미 정해진 거룩한 형식을 가진 예배 의식으로 피해서 들어가면서 예배의식을 사용할 수 있다. 한 사람과 더불어 기도하면서도 [예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목회자는 [예배자]의 형편에 맞추어 그저 운이나 비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는 예배 의식을 사용하여 [예배자]의 필요를 물리쳐 버린다.(16) 

예배의 인도자는 예배자들과 영적인 여정의 동반자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예배자들의 문화적 양식과 언어로 번역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친밀하게 삶 속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예배의 언어는 예배자들의 언어와 동일해야 한다. 예배자들과 공통적이고 익숙한 언어의 매체를 가진 인도자인 목회자가 예배자들과 공통된 문화와 삶의 컨텍스트 속에서 예배를 이끌어 갈 때 하나님의 영적인 임재하심은 비로소 예배자들에게 있어서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예배가 목회적이고 치유적인 예배가 되기 위해서 목회자는 성도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들에 익숙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좋은 경청자가 좋은 인도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의 필요를 더 잘 알기 때문이다.”(17) 예배를 주재하는 목회자가 자신의 삶과 이야기를 이해하고 안다는 전제 하에서 예배의 참여자는 더욱 깊은 하나님과의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대화와 예식에서 [목회자는] 그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인간성을 통해, 또 [인간성]에로 하나님의 초대를 전달하고 구원의 상징들에로 [성도들을] 인도한다.”(18) 인도자의 인간됨과 인격성은 예배자들의 예배에 대한 기대나 경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를 형성한다.

따라서 인도자의 인격이나 예배 형식에 있어서의 경직성은 예배의 인격성을 해치는 가장 해로운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예배자들의 삶의 상황은 예배 인도자인 목회자의 지속적인 이해와 수용을 요청할 만큼 끊임없이 변화한다. 예배의 인도자는 예배 이전의 관계에서부터 예배자들의 삶의 변화에 따라 적절한 목회적인 반응을 보이는 인격적인 사역자이어야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예배 인도자는 예배의 진행과 형식에 있어서도 인격적인 융통성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배 인도자의 인격에 있어서나 그것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예배의 의식에 있어서의 “경직성은 질병의 상징이며, 예식의 목적을 곡해한 상징”(19)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가 중심도 없이 이리저리 표류하거나 상황에 따라 아무렇게나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예배는 언제나... 변화가 기꺼이 일어날 수 있는 신뢰할만한 상황에서의 안정성을 제공”(20)해야 한다. 변화는 주관적 인격성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인도자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온 예배자가 주관적 의지와 결단 가운데 예배하기 위해 서로 만나는 것이 예배의 장이다. 그 장은 예배자들로 하여금 일정한 규칙가운데 지속 혹은 반복되면서도 늘 새로운 영적, 인격적 조우를 경험하게 한다. 따라서 인도자들은 동일한 형식의 예배를 인도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상황에 반응하고 반영하는 인격적 유연성을 가지고 살아있는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반복적인 의식에 익숙하고 거기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런 편안함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일정한 패턴으로 의식화하는 경향이 있다. 일단 일정한 정도의 의식이 세워지면 스스로 그 의식에 소속되며, 그것을 자신의 일부분으로 삼고, 거기에서 위로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익숙한 오랜 예배의 관습을 단순히 경직된 보수성으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반복적인 전통적 예배의 형식을 무기력한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은 예배에 있어서 “질서와 연속성이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이라는 예배의 본질을 흔들어 놓는 것이다.(21)

하지만 과도한 의식화(ritualization)는 내면의 불안정을 반영한다. 마치 강박장애 (obsessive-compulsive disorder)를 가진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자주 손을 씻는 의식을 행함으로써 스스로를 불안의 예식 속에 가두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럴 경우 “그 경직성이 절대적이어서 활동에 있어서 모든 자유를 막아버린다.”(22) 마찬가지로 예배자들의 경험과 필요를 무시한 채 예배의식 자체를 움직일 수 없는 하나의 절대 계시로 상정하고, 거기에 예배 인도자나 예배자의 인격적인 이해와 협력이 아닌 일방적인 굴종만 강조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영적 예배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예배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상징으로 그들과 만나기를 원하신다. 낯설고 새로운 예식이 아닌 그들에게 익숙한 형태와 곡조들로 예배하기를 원하신다. 모든 예배가 철저히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하는 만큼, 모든 예배는 하나님께서 만나기를 원하시고 위로받기를 원하시는 예배자 중심적이어야 한다. 예배자들에 대한 배려와 예배자 중심성은 그들과 그 깊은 사랑과 은혜의 의도를 소통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  

3. 인간 주목의 위험성과 인간 이해의 중요성

하나님은 천사나 세상을 떠난 과거 성인들에게 예배의 인도를 부탁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이 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동시대에 동일한 문화를 누리며 살고 있는 안수받은 목회자들에게 예배의 인도를 위탁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배자들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인지 직접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예배에서 인도자가 예배자들 개개인의 정보와 이야기를 설교나 예식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 장례 예배와 같이 특별한 사람과 가족에게 집중된 예배들 외에는 그렇게 개인적으로 주목하게 하거나 그들을 중심으로 예식을 집행함으로써 자칫 예배의 본질을 그르칠 수있다. 예배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으로 산만해지거나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 있어서 어느 성도의 이야기나 고난의 개별성이 예배를 흔들어 놓을 만큼 크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이자 주체이신 하나님이 가장 크시고 전지전능하셔서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의 성취의 위대함이 예배에서 부각되어서는 안된다. 어떤 큰 고난도 하나님의 허락과 주권 아래 일어나지 않는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예배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주권이 예배에서 드러나야 한다. 그 주권 아래에서 인생의 모든 일들은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배는 지속적이어야 하고 어떤 개인이 그 예배에 참여하더라도 예배는 예배일 수밖에 없고 오직 하나님 외에는 주목받는 자가 없는 형식적 안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전의 규범적 목표는 인간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었으매“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신적 영광과 인간의 필요가 서로 연결되도록 선택하셨음을 의미한다.(23)  

하나님만 부각되는 참된 예배에서는 예배자인 인간의 상태나 필요가 결코 간과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 Notre Dam 대학교의 저명한 예배학자 James F. White는 “모든 예배의 제1구성요소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24) 로마 가톨릭 교회가 오랫동안 유지해 오던 예배의 획일성과 달리 개신교 예배는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예배 의식이 나타난다는 것을 인정해 왔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예배의 형태를 완수할 수밖에 없었다.

예배의 진행에 있어서도 인도자인 목회자는 인간 예배자들인 성도들의 다양한 고난과 환란과 혼돈, 삶의 절망과 트라우마를 예배 의식을 통해 끌어안아야 한다. 그들은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동시에 예배자들의 경험의 개별성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도자들이어야 한다. 그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거기서 위로와 힘을 얻어야 하는 예배자들의 일상적 실존과 필요에 익숙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와 예배자 사이의 관계는 예배자들의 삶의 변화에 의해 피하지 못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인의 장례 예배에서 예배의 집례자는 “기대치 못한, 비극적인, 혹은 폭력에 의한 사망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려 깊은 장례 예식을 통해 그렇게 비극적인 죽음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담아 내어야] 하기 때문이다.”(25)

하지만 예배를 통한 인간의 치료와 회복의 경험은 목회상담의 과정과는 다르다. 그것은 예배자가 자신의 내면적 이야기들을 모두 표현함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어려움을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을 예배의 형식에 적응시킴으로써 오는 치료이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예배의 형식을 치유적으로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당하는 예배자 자신이 남아있는 최선의 유연성을 발휘하여 주어진 예배의 형식 속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어 복종시킴으로써 오는 치유이다. 예배자가 예배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자신의 삶 속의 이해할 수 없는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과 권위 앞에 복종하며, 비록 자신의 고난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배를 통한 참된 치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쌓여진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지켜오던 똑같은 예배를 전혀 새로운 삶의 관점에서 새롭게 경험하게 됨으로써 오는 위로이다. 그것은 아직 정돈되지 않은 삶의 현장을 표현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런 삶의 현장에 변함없이 임재하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남으로써 오는 것이다. 그것은 상담자를 통하여 간접적이고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인격이 아니라, 동료 회중의 변함없는 찬송과 기도 속에서 공동체적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예배자는 예배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하나님을 만난다.

따라서 인도자가 예배를 인도함에 있어서 마치 상담자들이 상담실에서 하는 것처럼 예배자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추측 내지 공감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외려 예배의 본질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예배 인도자가 기도를 좀 더 개인적이고 적절하게 하려는 의도로 회중들이 어떤 감정 상태일 거라고 짐작”하는 것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왜냐하면 그들의 짐작이 틀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한 예배자들 가운데 그렇게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감정을 강요받음으로써 예배에서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추측하여 예배하는 것을 가리켜 ”예배학자들은 주관화의 실수“(the mistake of subjectivization)”라고 부른다. 이 학자들은 “신학적 이유 즉 기도의 합당한 목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것이다.”(25)

상담자는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듣고 서로 대화를 하면서 함께 합의된 결론을 향해 간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공감의 조정이 이루어지고, 내담자는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하도록 격려 받는다. 그 공감은 좀 더 개인적이고 정확하여 내담자가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예배 인도자의 가정과 짐작은 예배자들의 현실적인 마음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여러 예배자들은 상담을 받으러 온 내담자들과 같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다. 인도자가 그들의 마음을 정확히 모두 들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상담자는 오직 들은 후에야 공감과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의 인도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과도한 공감에 기초하여 예배를 이끌어 갈 필요가 없다. 덧붙여 “어린 아이들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의 통제에 취약하므로 아이들을 예배 상황에서 조종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26)

그러므로 예배를 인도함에 있어서 상담적 공감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배를 전후한 이 모든 과정에서 예배 인도자에게는 면밀한 목회적 인격성이 요구된다. 어떤 형태로든 인도자는 예배를 강요할 수 없다. 고난당하는 예배자들에게 위로나 치유를 명목으로 그들의 형편과 상관없이 무조건 예배에 참여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초청은 인격적이고 자원하도록 감동하시는 초청이지 결코 강요에 의한 초청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 인도자인 목회자들은 예배자 자신들이 깊은 고난 속에서도 스스로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도록 영적인 돌봄과 목회적 관심을 먼저 베풀어야 한다. 예배 이전에 이미 예배에 나오기도 힘들만큼 고통스러운 삶의 과정에 함께 있어주어야 한다. 예배에의 초청은 그런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비로소 참된 예배자를 찾아내게 되고, 이를 매개로 성령께서는 예비된 예배자로 감동하시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상담적 인격은 예배자를 예배에로 안내하는 핵심적인 길잡이와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결코 삶이나 목회 현장에서 괴리된 독립된 행사가 아니다. 성도들의 삶에 대한 목회자의 몰이해와 비인격성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이미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예배에의 참여는 철저하게 인간 목회자의 인격적인 중재의 사역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중재란 목회자가 은총의 중보자라는 뜻이 아니며, 외려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탁을 따라, 성도들의 영적이고 정서적인 상태를 가장 가까이에서 살펴서 이해하는 인도자가 그 개인들의 삶의 모습을 면밀히 알고서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통합적이고 인격적이며 치유적인 예배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4. 성육신적 예배가 주는 확신과 위로

모든 예배는 예배자들이 속한 문화적 요소들을 반영한다. 그 문화적 요소들이 예배의 핵심은 될 수 없을지라도 예배를 통해 전달하는 의미를 소통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모든 예배는 일종의 의미를 소통한다.”(27) 그리고 그 의미의 소통은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수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예배자들을 위한 초월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성육신적 배려 때문이다.

한편 예배 속에서는 초문화적 의미를 가진 상징들도 함께 사용된다. 공적인 예배의 요소들 가운데는 일대 일의 단순한 의미 이상을 내포하고 있으면서 “여러 겹의 중첩된 중요성을 가지고 광범위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진 상징들을 통해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28) 거기에 포함된 깊은 의미는 반복적으로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때로는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내용들도 포함된다. 예배에 있어서 상징들(symbols)이 중요한 이유는 예배자들에게 “생명과 죽음, 사랑과 악, 인류와 우주의 기원과 운명 등에 대한 거대한 질문들을 마주하고서, 논리적인 형식으로 하나의 대답을 제시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29) 이처럼 심층적인 의미를 가진 상징들조차도 고난의 심오한 의미들을 시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의 방편이다.

예배는 철저하게 예배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기획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다. 그것은 예배의 요소와 상징이 그들의 일상적인 삶을 반영한다는 것에서도 분명해진다. 예배로 나아감에 있어서 예배가 가진 일상성과 접근성은 한 문화에 속한 인간과 소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육신적 뜻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의 능력에 맞추어 조절하시고 선민들을 위해 그들로 하나님의 긍휼을 알도록 돕는 시각적 수단들을 마련하셨다.” 그것은 “영적인 일들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일들로 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30)

그러므로 모든 예배는 예배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환대하는 친밀감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을 예배에로 초청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까다롭거나 어려워서는 안된다. 그래서 예배에서 사용되는 여러 요소들과 상징들 가운데는 우리 삶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일상의 활동인 말하기, 듣기, 품기, 먹이기, 공급받기, 일하기, 쉬기 등의 행위는 하나님의 실재와 임재하심을 아는 의도적 행위 가운데 초점이 되었다. 일상적인 것들 즉 빵, 포도주, 물, 그리고 기름 등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시는 행위로서의 “은혜의 방편”이 되었다.(31)  

그러므로 말씀의 선포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라 하더라도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일상적이고 낮은 삶의 경험들까지 포괄하는 예배로 드리는 것이 성육신적이다. 물론 “예배의 회복을 위해 회중의 눈높이에 맞는 각종 문화적 도구들과 소통의 기법을 도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엽적인 방편일 뿐이다.”(32) 하지만 예를 들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을 표현하는” 입례 의식은 “그 의미를 살리는 큰 틀 속에서 회중에 맞게 변형을 모색”할 수도 있다.(33)

예배의 의식이 즉흥적이거나 임의적이지 않아야 하지만 “현대적 감각과 문화적 트렌드를 적절히 가미”하여 “음악이나 상징물, 상징적 행위 등을 통해 회중이 거룩하신 임재 앞으로 나아감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예배자의 이해와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성육신적 수단 될 수 있다. 기본적인 입례의 요소는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간다는 가시성을 위해 일종의 행진을 기획할 수도 있다. 이로써 “예배의 첫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입례의식을 통해 거룩하신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은혜와 복을 역동적으로 드러냄으로 예배 전체가 생동감있고 기쁨이 넘치는 예배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34)

예배자의 치유를 위한 예배의 성육신적 실현은 설교 말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다. 설교는 살아있는 인간의 입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말씀이 전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35) 신학자 칼빈의 언급과 같이 “설교자는 하나님의 입”(36)이며, 인간의 영광스러운 형상 가운데서도 “가장 놀라운 특권은 황송하게도 인생들의 입과 혀를 성별하셔서 그들 속에 자신의 음성이 울려 퍼지게 하신 것이다.”(37)

이에 성령께서는 인간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되게 설교자와 예배자들을 감동시키시는 하시는데, 이것만큼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은혜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말씀과 영의 일체성은 성경에서 잘 입증된다.”(38)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낮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은...예배를 포함하는 모든 노력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성을 강조”한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39) 

설교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격상 성례와 유사한 점이 있다. 하늘에 속한 영적인 실체가 땅에 속한 물질적인 방편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성례이다. 그러므로 땅의 언어를 통해 하늘에 속한 거룩한 뜻을 계시하는 설교는 성례전적인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선하신 뜻을 따라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기록된 계시가 선포된 계시로서 우리를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40) 

성례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지만 마음의 감동이나 고난의 묵상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해 주시는 의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상적인 빵과 포도주의 형태를 통해 영적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주심으로 그것을 받아 먹는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견고한 연합 속에 살게 하는 것이다”.(41)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에서와 같이 “상징이 아니고 표이다. 물을 뿌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구원의 상징을 받는 것이 아니고 표를 받는 것이다.”(42)

세례에 사용된 물이 표라면 중생은 실체이다. “그와 유사하게 성찬에도 떡과 포도주(표징)이 있고, 예수님과 예수님이 베푸시는 온갖 유익(표징이 가리키는 실체)이 있다. 이것을 ‘성례적 연합’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서는 표징과 그 표징이 가리키는 실체가 대단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43) 이런 예배의 의식들을 통해 성령께서는 실제로 우리의 구원을 확인하시고 인쳐주신다. 세례는 반복되지 않지만 성찬은 반복적으로 행하여진다. 예식을 반복하는 중요하는 이유는 이 예식이 세례를 받을 때와 “똑같은 복음을 전달하기 때문이다.”(44) 그 동일한 복음이 개인과 공동체에 유익을 준다.

이처럼 표와 상징을 통해 풍성함과 유익을 주는 우리의 예배는 또한 미래에 완성될 영원한 예배인 천국을 지향한다. 다만 하늘의 완성을 우리가 이 땅의 예배에서 완전하게 누리지는 못하고 “단지 그 맛만 볼 수 있을 뿐이다.”(45) 성찬을 통해 내세의 영원한 잔치를 맛보게 함으로써 예배는 이 땅에서 고난당하는 예배자들의 마음을 영원한 위로의 주님께로 인도한다. 예배의 인도자는 이 “특별한 방법으로 무거운 죄 의식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는 자들과, 진노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자, 그리고 은총 가운데서 그 전보다 더 큰 발전에 도달하기 위해 열망하는 자들을 주님의 성찬상으로 초대하고 격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약하고 지친 그들의 영혼을 새롭고 강하게 하신다는 확신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46)

특히 병든 이웃들이나 가족을 잃은 이들을 방문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 개혁교회 전통에서 지속적으로 해 오는 성경읽기나 기도를 드리는 사역은 병든 자들과 가족들을 위로하는 중요한 방편이다. “하나님은 병든 자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자이다.”(47) 비록 공식적인 공동체의 예배는 아니라 할지라도사역자들은 역시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영적 치유-곧 그 영혼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거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개인적으로 얻”도록 돕는다.(48) 하지만 영혼을 치유하는 목적은 같다고 하더라도 개혁주의 전통에서 야고보서 5:14-15에 나타나는 기름을 바르는 사역이나 죽어가는 자들에 대한 세례를 시행하지는 않는다.(49)

“성만찬을 받는 것은 영적 위로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일체성을 보여주는 표지이다.”(50) 이는 세례도 마찬가지이다. 세례는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가족적인 행사가 아니라 “세례의 광범위한 공동체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전체의 몸에 연합”이다.(51) 이 새로운 지체의 가입과 연합에 공동체 전체는 기쁨과 축하를 누린다. 세례의 집례자가 유아세례를 받는 한 아이에 대한 영적 양육의 책임이 그 아이가 세례를 받는 교회 공동체에 있다고 선언할 때 감동과 위로와 거룩한 의지가 일어나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성육신적 역사 가운데 어떻게 인간은 아무런 느낌이나 감동, 혹은 치유나 회복이 없이 나무나 식물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 있겠는가? “회중은 [예배에] 참여해서 응답”한다. 거기에 진정한 예배가 나타나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칼빈은 그의 성찬신학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식사에 초대하여 기운을 북돋아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52) 그것은 곧 성만찬의 초대가 예배자들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의 효과를 그가 인지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는 여러 표지들을 통해 “예배에서 구원과 치유와 위로의 능력”을 드러내신다.(53) 예배가 예배로 회복되고, 예배의 깊고 참된 의미들이 예배자들에게 바르게 심어질 때, 거기에 회복과 치유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영적 생산물이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인간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것이라면 예배와 목회적 돌봄의 관련성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54) 그러므로 예배의 인도자인 목회자는 예배의 각 순서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고, 예배를 인도할 뿐만 아니라, 예배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오래된 신자들에게까지도 예배 순서의 의미들을 필요에 따라 반복적으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 “생명력 있는 예배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배를 통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해야” 하며, “예배의 매 순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늘의 입맞춤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55) 그래서 예배가 습관적인 형식의 추종이 아니라, 각 순서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예배자들의 역동적인 응답이 나타나고, 거기에서 회복과 치료가 온전하게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III. 닫는 글

예배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인격적인 섬김과 교제의 장으로서 모든 믿는 자들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예배자인 인간의 경험과 필요가 다양하지만 예배의 우선순위는 언제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현실적 필요 때문에 예배의 신비롭고 상징적인 본질이 바뀔 수는 없다.

예배를 통해 예배자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경험을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이 만나고 (encounter) 거기에서 영적인 교제(fellowship)가 일어난다. “예배를 통해서 수직적으로는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지고, 동시에 수평적으로는 예배에 참여한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교제가 이루어지는”(56) 것이다. 예배는 수직적인 동시에 수평적인 교제와 나눔의 사건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속받은 사람들의 교제(a redeemed fellowship)” 이기 때문이다.(57)

하지만 각 시대와 문화마다 예배자 없는 예배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예배는 철저히 예배자의 언어와 가치와 삶을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 그 가운데서 예배자들로 하여금 온전히 하나님께 향하도록 인도하는 사람이 목회자이다. 그리스도 이외에 그 누구도 예배의 중보자가 아니지만 목회자는 말씀과 성찬으로 은총이 각각의 몸과 삶에 임하도록 예배를 인도한다. 백성들의 마음을 예배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향하게 요청하고,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가 그 각각의 삶에 내려지기를 기도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고난과 삶의 모순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목회자이어야 한다. 예배 인도자의 인격적인 경청과 성도 개개인에 대한 존중은 예배에서 내려지는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를 방해없이 전달하는 핵심 요소이다.

이와 더불어 예배의 각각의 순서가 가진 의미가 예배자들에게 인격적이고 반복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 소중한 은혜의 메시지가 면밀하게 전달되기 위해 예배 인도자는 예배자들의 개별적인 삶의 이야기에 익숙해야 한다. 그 뿐 아니라 에배자들의 삶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목회적 반응을 보이는 인격적인 사역자이어야 한다. 거기에서 인격적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소통을 경험할 수 있다. 성도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그들의 인격적인 신뢰를 받지 못하는 목회자가 인도하는 예배가 과연 얼마만큼의 하나님의 은혜를 소통할 수 있겠는가? 목회자의 인격은 유연성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예배 의식에서 경직성을 극복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연속성과 유연성은 동시에 존중되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집중은 상담과 달리 예배를 그르칠 수 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엎드림으로써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주권 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예배 속에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예배의 신비성은 인간의 경험의 다양성을 모두 품을 수 있다는 것에 있다. 거기에서 예배의 치유성이 나타난다. 그 치유는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다양한 예배와 예식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성도들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성례를 통해 자신이 성령 안에서 구원의 확실한 표를 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구원이 상징적이거나 모호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확실한 표를 받았음을 인식할 때 은혜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구원과 신령한 복과 같은 영적인 실체”를(58)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예배의 풍성함은 목회자 자신이 알고 누리는 만큼 성도들과 공유할 수 있고, 성도 자신이 이해하고 생각하는 만큼 누릴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예식을 만들거나, 치유를 주제로 새로운 형태의 예배 형식을 창조하기 보다는, 주어진 예전과 예배의 형식을 보다 풍성하게 하고, 그 속에 포함된 다양한 예배 순서들의 의미를 매 시간마다 나눔으로써, 그 예배가 자동화된 습관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깊이 체험되는 실존적 사건으로 경험되는 것이 예배를 치유되게 하는 것이다. 예배가 예배자들의 삶을 품고, 하나님의 은총이 성육신한 그리스도와 같이 그들의 삶에 소통될 때 그들의 삶은 치유적인 예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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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Robert E. Webber, Worship is a Verb (Dallas: Word Publishing, 1985), 129.

(2)James White, Introduction to Christian Worship, 정장복 역, [기독교 예배학 입문] 엠마오, 1992, 16.

(3)Franklin M. Segler, Understanding, Preparing for, and Preacticing Christian Worship, rev. by Randall Bradey (Nashville: Broadman and Holman Publishers, 1996), 48. 이현웅, 존 칼빈, 110에서 재인용.

(4)Elain 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22.

(5)Rodney Hunter, ed., Dictionary of Pastoral Care and Counseling (Nashville: Abingdon, 1990), 1340. 이하 DPCC.

(6)DPCC, 1340.

(7)DPCC, 1340.

(8)James F. White, Protestant Worship: Traditions in Transition, 김석한 역, 개신교 예배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341.

(9)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59차 정기논문발표회 (서울: 한국복음주의신학회, 2012), 29.

(10)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 29.

(11)DPCC, 1340

(12)Michael Horton, A Better Way 개혁주의 예배론, 윤석인 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2), 21.

(13)DPCC, 1340

(14)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17

(15)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20

(16)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55

(17)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18

(18)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21

(19)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25

(20)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24

(21)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25

(22)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24

(23)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22-23

(24)White, Protestant Worship:, 15.

(25)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33

(26)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27

(27)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 27. 한편 19세기, 회심이 강조되던 시기에는 감정적 요소가 설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그 결과 예배는 신앙의 개종자를 만드는 실용적 목적에 종속되게 되었다. 계몽주의와 함께 성만찬은 도덕화되며 거룩성이 제거되었다. 결국 이와같은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 보다 인간의 자기 성찰이나 그 외에 목적을 더 중요하게 하는 본질의 변화를 가져왔다. White, Protetestant Worship, 121-122를 보라.

(28)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 25.

(29)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 25.

(30)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 25.

(31)존 칼빈, 기독교강요 IV. 14. 3.

(32)DPCC, 1340.

(33)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29.

(34)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30.

(35)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30.

(36)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30.

(37)Homilies on 1 Samuel, xlii, 42.

(38)칼빈, 기독교강요, 4:1:5.

(39)Horton, 개혁주의 예배론, 102.

(40)White, Protestant Worship, 120.

(41)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 33

(42)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 33

(43)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 34

(44)Horton, 개혁주의 예배론, 185.

(45)Horton, 개혁주의 예배론, 189.

(46)Horton, 개혁주의 예배론, 222.

(47)Thomas Leishman, ed., The Westminster Directory, 정장복 역,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서울: 예배와 설교 아카데미, 2002), 62. 동시에 성만찬에서 목회자는 "무지하고 중상모략하며 불경한 사람들과, 양심과 지식에 반하여 범죄하며 죄악 가운데 사랑가는 사람들, 곧 감히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경고한다.

(48)The Minister Unit, Services for Occasions of Pasotral Care, 29.

(49)The Minister Unit, Services for Occasions of Pasotral Care, 36.

(50)신학자 칼빈은 특히 병든 사람이 아닌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도유식을 폐지하였다. White, Protestant Worship, 108.

(51)The Minister Unit on Theology and Worship for the Presbyterian Church (U.S.A.), Services for Occasions of Pastoral Care: The Worship of God,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0), 34.

(52)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 36.

(53)White, Protestant Worship, 109.

(54)Webber, 예배가 보인다, 169.

(55)DPCC, 1342.

(56)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 29.

(57)이현웅, 존 칼빈의 설교와 예배 (서울: 이레서원, 2009), 108.

(58)Segler, Understanding, 56.

(59)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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