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환희교회 최홍종 장로의 작품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최홍종 장로 환희교회 

센텀시티 누리마루 공원 입구 왼쪽 편에 나무의 모습이 참 멋진 두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듣기로는 어느 마을입구에 당산(堂山) 나무로 모시던 나무였지만, 개발 붐에 밀려 동네 앞으로 큰 길이 나면서 이 나무를 옮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답니다. 동네 분들과 심사숙고한 결과 큰 비용을 들여서 이곳으로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이 나무를 처음 발견하고 저 나무가 잘 살아줄까 하고 내심 걱정을 했지요. 나무를 옮겨 심고 전문가들이 나무의 둥치에 따뜻한 옷을 입히고 둥치 중간 중간에 좋은 양분의 수액을 공급하고 혹시나 나무가 비바람에 쓰러질까 걱정하여 엄청난 쇠사슬로 옭아매었지요.

그런데 오늘 와서 보니 많은 아픔과 고난과 수난을 딛고 잘 살고 잘 자라서 나무가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서 있네요. 이 모습을 보고 참 다행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멋진 나무를 사진에 담아 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사진을 찍기 위해 나무 주위를 빙빙 돌다가 마음속으로 아이구야, 이 쇠줄 때문에 사진을 망쳐 놓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무를 쇠줄로 칭칭 감아놓았으니 멋있고 품위 있는 우람한 나무가 영 볼썽사납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 쇠줄이 참으로 눈에 그슬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사진은 환희교회 최홍종 장로의 작품이다.
그런데 문득 이 말씀이 생각나며 , 그렇구나! 정말 구속은 이 쇠줄이 아니고 나의 마음이구나, 즉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나의 뇌리(腦裏)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얼른 보고 자칫 잘못 생각하면 무엇 때문에 저 나무를 힘들게 쇠사슬로 칭칭 감아 더욱더 꼼짝도 운신(運身)도 못하게 자유를 구속하는가 하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인간은 곧잘 자기 자유를 구속한다고 자기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두라고 소리소리 지르기도하지만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유를 옭아 맨 것이 아니고 질서 속에 참다운 의미 있는 자유를 부여하려는 것이지요.

만약 동네사람들이 그냥 조상 때부터 모셔온 나무니까, 그리고 자기 동네의 당산 나무로 신(神)과 같은 나무이니까, 이 나무를 맹목적으로 아낀다는 생각으로, 별다른 전문적인 기술이나 준비된 비용도 없이 동네의 적당한 곳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면 , 아마도 죽고 말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이 현명한 판단을 해서 이렇게 잘 옮겨서 잘 살리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구경나온 공원 산책객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고 즐거움을 주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인 것입니다.

요즘 도시에 사는 자녀들이 부모님 문제로 머리가 아픈 경우가 종종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옛날 이면 다 돌아가셔야 할 연세이지만, 나이 많으신 노부모님이 고향집에 불편하게 고생하면서 사시는 것이 안타까워 자녀들이 부모님을 도시로 모셔 오려고 합니다. 자녀들이 효자효녀여서 보다는 노인들을 시골에 방치하는 것이 남들이 욕이나 할까 두렵고, 혹시나 갑자기 불상사를 당하지나 않나 하고 걱정하여, 또 내심으로는 보모님 모신다는 핑계로 시골집과 농토를 정리하여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보려는 욕심이 숨어 있는 것 이지요.

그런데 노부모님은 한사코 도시에 나가 편히 살고 싶지 않다고 극구 반대를 하여 결국은 모셔 오지 못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노인들이 대도시 고층 아파트에 사시면서 좋은 식사나 대접하고 좋은 옷(불편한)이나 입혀드리고 편하게 놀면서 잘 잡수시기만 하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 노인들은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자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자녀들이 노부모님의 자유를 구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아파트 밖을 한 발지국도 못나가고,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니 마치 감옥살이를 시키고 있는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 모르면 결국은 자기의 자유를 스스로 구속하고 사는 것이지요.

나는 종종 외국에 사진 촬영차 해외에 나갑니다. 외국에 나가서 종종 느끼는 점이 우리를 인솔하여 가이드해주는 그분이 없으면 꼼짝없이 호텔에 갇혀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중국이나 동남아 지역은 그래도 나가서 한 바퀴 휘 돌아 보기도하지만, 유럽이나 미주의 큰 도시 에서는, 어느 누구가 아무도 나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았지만, 속절없이 나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긴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사진은 환희교회 최홍종 장로의 작품이다.
나무의 자유를 빼앗아 구속하기 위해서 나무를 칭칭 쇠사슬로 묶어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더 확실한 보장된 자유를 주기위해서, 다시 말하면 새로운 삶을, 새로운 생명을 주기위해서, 우선 구속해 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깨달아야합니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잘 받아들여,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되는 것은, 사실은 소경이 축복을 받아 눈을 뜨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가장 좋은 소식, 가장 기쁜 소식, 복음(good news)은 무엇일까요?

입학시험이나 입사시험을 친 사람은 합격했다는 통보일 것이고, 암(癌)병이 걸려 죽게 되었는데 이제 살아날 수 있는 새로운 치료법이나, 약이 개발 되었다는 소식일 것이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제 눈을 뜨게 되어 볼 수 있다고 하면 그 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니 지금 꼭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 새로운 삶을 주겠다고 하는 데 이 보다 더 귀한 자유가 , 더 좋은 소식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위에 서두에 적어둔 이 성경 말씀을, 나의 명함의 맨 위에 적어두었지요. 진리로 말미암은 자유를 말하고 싶은 나의 간절한 작은 소망입니다. 사실은 다분히 의도적인 나의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할까요.

“ 아! 성경말씀이군요, 그런데 무슨 의미이죠? ” 하고 가볍게 관심을 보여주기만 하면, 나는 슬슬 나의 의도대로 예수님을 증거 해 볼, 그리고 복음을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전할 기회를 포착해 볼 심산인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아주 나쁜 의도로 계획되어 있는 , 결코 나쁜 짓은 아니니, 무슨 죄스러운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은 아니지요.

요한복음 17:17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셨고 요한복음 14: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심을 보아 진리는 곧 예수님 자신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보면, 31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절,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절,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 당시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자기들은 다른 민족과 다른 선민사상(選民思想)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기들은 모두 율법을 잘 지키는 율법준수(律法準守)자이니 자기들은 자유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참 자유가 무엇인지를 설파(說破)하신 말씀으로 유대인들의 참 자유에 대한 그릇됨을 일깨워 주시려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구속(拘束)의 반대는 자유(自由)이고, 억압(抑壓)이나 압제(壓制)의 반대는 해방(解放)입니다

특별히 작금의 시대는 모두가 다 자유인임을 자처하고 모두다 민주사회에서 누릴 자유를 마음대로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나의 자유를 위해서는 남은 추호(秋毫)도 고려(考慮)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까지도 말씀을, 그리고 엄격히 지켜야할 교리(敎理)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모두 자기에게 유리하게 자유스럽게 살고 있지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진정 자유의 삶을, 해방된 삶을 누리고 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자유의 삶인지 방종의 삶인지, 진정 진리를 알아야 하는 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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