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진환 목사 전고려신대원장 서문교회담임
예배는 인간이 고안한 것도 아니고 인간으로부터 기원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참된 목적과 방법을 계시해주셨고 예배하는 자리에 임재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배는 인간과 교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가슴에서 우러나온 언약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을 따라 믿음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하며 그분과 교통하는 은총을 누릴 수 있다.

구속사의 진전을 따라 하나님의 임재와 회중과의 교통도 더욱 심화되고 발전되었다. 제단은 선민 이스라엘이 최초로 하나님과 교통한 곳이다(창 12:6-8, 26:23-25, 28:10-12). 성막과 성전의 예배를 통해 그와 같은 교통은 더욱 정교하게 발전되었다. 땅 위에 교회가 세워진 후에는 하나님은 교회의 예배 중에 임재 하신다. 매주일 하늘의 예루살렘이 우리 가운데 내려오며 우리는 그 가운데 왕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히 12:22-23). 임재가 완성되는 천국에서는 영광과 기쁨으로 충만한 온전한 교통을 누리게 된다.

 

상호적 행위로서의 예배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만남이며 교통이다. 폴 훈(Paul Hoon)은 예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규정한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사역을 되풀이해서 나타내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견고케 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역사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린다.

이렇게 우리를 섬겨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행위(God's service to man and man's service to God)가 동시에 일어나는 복된 교통이 예배이다. 구체적인 예배 순서들을 하향적인 하나님의 행위와 상향적인 우리의 행위로 표시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입당송(↑), 예배부름(↑), 축복인사(), 기원기도(↑), 영광송(↑), 참회기도(↑), 사죄확신(), 조명기도(↑), 말씀봉독(), 응답찬송(↑), 말씀선포(), 제정말씀(), 감사기도(↑), 세례성찬(), 신앙고백(↑), 목회기도(↑), 연보봉헌(↑), 파송찬송(↑), 파송말씀(), 복의선언().

그러나 한국 교회의 예배는 이러한 양 방향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다분히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상향적 행위에 치중되어 있다. 최근 어느 예배 세미나에서 주승중 교수는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무한한 광휘에 완전히 잠기는 것”이라는 마르바 던의 말을 인용하면서 예배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응답의 행위”라고 규정했다. 예배를 인간 편의 응답과 반응 중심으로 이해하게 되면 인간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설교자가 설교를 잘하고 기도인도자가 은혜롭게 기도를 인도해야 하며 찬양대가 아름다운 찬양을 해야 은혜로운 예배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와 같이 인간 편의 기능을 강조하게 되면 결국 은혜로운 예배를 찾아 교회들을 기웃거리는 영적 걸인들을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가톨릭은 반대로 신적 임재가 중심이 되는 예배관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임재는 사제의 집례행위에 따라 기계적이고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임재이다(ex opere operato). 그것은 그들의 치우친 구원론과 교회론으로 인한 잘못된 교리의 산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은 그분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선물이며 우리는 오직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거룩하신 임재를 대면하는 것이다.

예배는 신인 사이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상호적인 행위이지만 그러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향적인 행위들에 있다. 그 놀랍고 은혜로운 행위들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는 것이다. 이처럼 신적 행위가 중심이 되는 예배에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 초월자(the Holy)를 경험한 것 자체가 더 할 나위 없는 축복인 것이다.

필자는 한국 교회 예배의 근본 문제는 인간 행위 중심의 치우친 예배 이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예배를 가르칠 때는 늘 예배자의 태도나 자세 같은 부차적인 문제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예배가 늘 교인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믿음과 헌신을 촉구하는 지적, 윤리적 예배로 전락하고 있다. 생명력 있는 예배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배를 통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예배의 매 순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늘의 입맞춤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예배 회복을 위해 회중의 눈높이에 맞는 각종 문화적 도구들과 소통의 기법을 도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엽적인 방편일 뿐이다. 우리의 문제는 근본적인 예배신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예배의 몇 가지 순서들을 하나님의 행위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입례의식: 임재 앞으로 나아감 

입례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공동체로 모여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입례의식은 입당송(Introit), 예배부름(Call to worship), 축복인사(Greeting), 기원(Invocation), 영광송(Doxology), 참회기도(Confession of sin) 및 사죄의 확신(Assurance of pardon) 등으로 구성된다.

입당송: 공예배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것이므로 모이는 행위 자체가 예배의 의미 있는 시작이 되어야한다. 모든 성도들이 행렬을 지어 입당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는 예배 인도자와 설교자, 찬양대만이라도 열을 지어 입당하는 것이 좋다. 입당 행위가 단순히 본당에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때 부르는 입당송은 경배드림의 기쁨과 소망을 담은 힘찬 찬송을 부르는 것이 좋다.

예배부름: 회중을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초청하는 순서이다. 예배부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거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즐거움, 예배드림의 기쁨과 소망 등을 담은 성경 구절을 낭독함으로 진행한다. 칼빈은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라는 말씀으로 예배부름을 했다(시 124:8). 성도들은 예배의 자리에 나아왔지만 여전히 세상 염려와 세속적 삶의 리듬을 벗어버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배가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순간인지를 깨우칠 필요가 있다. 예배의 영광과 축복을 선언하는 말씀의 낭독을 통해 비로소 성도들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거룩하신 임재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축복인사: 예배자로 모인 회중을 향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순서이다. 바울도 자신의 대부분의 서신을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예배의 처음과 마지막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장식되는 것은 예배 전체가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시간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예배부름이 회중이 하나님을 향해 고백하는 상향적 순서라면 축복인사는 하나님이 회중에게 복을 주시는 하향적 순서이다. 그와 같은 의미를 살리기 위해 예배부름은 목사가 강단 쪽을 향해 뒤돌아서서 진행하고 축복인사는 반대로 회중을 향한 채 진행하는 것이 좋다.

참회기도: 거룩하신 존전에 선 인생이 자신의 추하고 연약한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생 받은 성도는 죄를 토설하고 사함 받을 때 말할 수 없는 자유와 기쁨을 누린다. 그러므로 겸비한 마음으로 참회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회중은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은혜로 뜨거워진 마음으로 회중은 말씀(설교)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칼빈은 참회기도를 드릴 때 우리에게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는 문이 열린다.”고 했다. 참회기도에 이어 ‘사죄의 확신’을 선언함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를 선포한다.

이상과 같은 입례의식을 그림으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상과 같은 입례의식은 개개의 순서가 단편적인 별개의 순서들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가진 연결된 순서들이다. 즉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을 표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예배를 위해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배의 갱신을 모색한다면 입례의식은 그 의미를 살리는 큰 틀 속에서 회중에 맞게 변형을 모색해야 한다. 즉흥적이고 임의적으로 순서를 짜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또한 입례의식에는 현대적 감각과 문화적 트렌드를 적절히 가미하는 것이 좋다. 음악이나 상징물, 상징적 행위 등을 통해 회중이 거룩하신 임재 앞으로 나아감을 감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도 권장할 만하다. 입례의식은 전체적으로 변화와 속도감이 있게 진행하는 것이 좋다. 예배의 첫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입례의식을 통해 거룩하신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은혜와 복을 역동적으로 드러냄으로 예배 전체가 생동감 있고 기쁨이 넘치는 예배가 되게 해야 한다.

 

설교: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선 회중에게 주께서는 말씀으로 은혜와 복을 주신다.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인간 설교자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그 이면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설교자(The Preacher)는 하나님이시다.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신 후에는 인간 설교자들을 통해 ‘지금 여기’에 자리한 회중에게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종교개혁자들은 설교를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했다. 루터나, 불린거(Bullinger), 제2헬베틱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Praedicatio verbi Dei est verbum Dei)이라고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칼빈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입”이라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많은 탁월한 은사들을 주셔서 인간을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셨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특권은 황송하게도 인생들의 입과 혀를 성별하셔서 그들 속에 자신의 음성이 울려 퍼지게 하신 것이다.”

강단에서의 설교자의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는 것은 설교 중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 때문이다. 선지자와 사도들을 감동시켜 말씀을 선포케 하셨던 성령은 오늘날의 설교자들에게도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인 동시에 참 하나님’(vere homo et vere deus)이 되셨듯이 설교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참된 인간의 말이다. 설교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격상 성례와 유사한 점이 있다. 하늘에 속한 영적인 실체가 땅에 속한 물질적인 방편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성례이다. 그러므로 땅의 언어를 통해 하늘에 속한 거룩한 뜻을 계시하는 설교는 성례전적(sacramental)인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선하신 뜻을 따라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기록된 계시가 선포된 계시로서 우리를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잭 하일즈는 설교의 영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이 강단에 가까이 갈 때에는 천사들도 날지 못하게 하고, 천국의 호산나 소리도 잠잠케 하며, 어른들은 경청하고, 아이들은 귀를 기울이게 하고, 젊은이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서, 천국이 응답하고 지옥은 떨도록 전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거룩함으로 기다려야 한다. 그럴 때 영원한 모든 것은 떨며 사탄과 그의 사자들은 두려움으로 흠뻑 젖게 될 것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입으로 세움 받았다고 해서 강단에서 쏟아내는 모든 언사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으로 부름 받은 것이지 자신이 왕은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왕의 말씀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믿음이요 겸비함이다. 설교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씨름해야 한다. 그는 오직 받은 말씀을 전달하는 본문의 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항상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떠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전 2:3). 만약 자신의 직무로 인하여 목이 곧고 자만에 빠진다면 그는 설교의 본질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고 변질된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멸망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그 피 값을 자신에게서 찾을 것이라는 사실을 설교자는 깊이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마다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설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한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신학적 사고나 성경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는 장이 아니다. 설교자의 어떤 개인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은 더더욱 아니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 중에 “나는 . . . 이라고 생각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을 본다. 겸손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설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가 아닐까? 선지자와 사도들이 자신의 입을 열어 말하면서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라고 단언했듯이 설교자도 담대히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설교는 잘못되어 있을 때가 많다. 진리에 대한 이론과 설명은 많은데 막상 진리 자체를 확신 있게 제시하지는 못하는 설교가 많다. 복음 자체를 분명하게 증거 하지 못하고 복음의 중요성과 유익에 대해서만 잔뜩 늘어놓는 ‘about’의 설교가 횡행한다. 루얼 호위는 현대 설교는 분석은 많은데 해답은 적은 것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복음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는 18분을 소모하면서 막상 복음 자체를 제시하는 데는 2분밖에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성공회의 유명한 설교자 필립스 브룩스도 설교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 설교는 환자에게 의약품에 대해 강의하는 것과 같을 때가 많다. 그런 강의는 필요하고 중요하며 흥미롭기까지 하다. 환자가 그런 강의를 잘 소화한다면 그는 약을 좀 더 적절하게, 책임 있게 사용하는 보다 나은 환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강의가 곧 약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환자에게 약에 대한 강의가 아니라 약을 주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이다.”

한국 교회 강단의 회복은 설교자들이 설교사역의 고귀함과 영광에 대해 얼마나 눈을 뜨느냐에 달려있다. 과거 위대한 부흥의 시대보다 오늘날 설교의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된 것은 설교자들의 지적 능력이나 커뮤니케이션 기법이 뒤쳐져서가 아니라 설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확신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례: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다. 한국의 신자들은 눈물이 난다든지 가슴이 뭉클 한다든지 하는 주관적 감정을 은혜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은혜의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구원과 신령한 복과 같은 영적인 실체를 가리킨다. 성례를 통해 하나님은 그런 영적인 실체를 주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성례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성례는 은혜계약의 거룩한 표와 인침으로서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를 나타내며 그분 안에서 받는 우리의 유익을 견고케 한다.”

성례는 인침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세례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 사함과 거듭남에 대해 인 쳐주시는 것이다. 구원은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받지만 그러나 연약한 인생들은 무언가 좀 더 확실한 것을 원한다.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어떤 방편을 원한다. 하나님은 그 같은 인생을 불쌍히 여겨서 물 뿌림의 의식을 제정하신 것이다. 세례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죄 사함 받은 것과 영원한 천국 시민이 된 것을 확증하는 인을 쳐주시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는 세례를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의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학습자가 세례 준비과정을 이수하고 성경도 일독하고 정 교인으로서의 여러 의무를 준수할 것을 서약할 때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례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 외에는 어떤 자격 기준도 있을 수 없다. 세례는 근본적으로 구원을 인 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례를 베푸는 사람은 목사지만 그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요 그 배후에서 인침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찬은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하나님께서 인 쳐주시는 의식이다. 한국 교회에는 성찬 또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의식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성찬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데 도움을 주는 상징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은 우리의 mental activity를 돕기 위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해 주시는 의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주심으로 그것을 받아먹는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견고한 연합 속에 살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연합은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면 하면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좀 더 확실한 증표를 주기를 원하셔서 성찬의식을 제정하신 것이다. 떡과 포도주가 내 몸 속에 녹아들어 나와 일체를 이루듯이 그리스도와 나도 뗄 수 없는 하나가 되었음을 인 쳐주시는 것이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의하면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표이다. 표(signs)는 상징(symbol)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개념이다. 거리를 지나다 담벼락에 붙은 불조심 포스터를 보았다고 하자. 포스터는 빌딩에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는 화재의 순간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실감나는 그림이라할지라도 그것은 화재의 ‘상징’일 뿐이다. 그 포스터를 보고 119에 연락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면에 길을 가다 건물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는 것을 목격한다면 곧바로 119에 연락할 것이다. 그 시커먼 연기는 불이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이기 때문이다.

성례는 상징이 아니고 표이다. 물을 뿌려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구원의 상징을 받는 것이 아니고 표를 받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인 쳐주시는 일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실제로 일어난다. 성찬을 받을 때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상징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견고해지고 풍성해지는 일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다.

성찬을 단순한 상징으로 본 것은 쯔윙글리의 견해이다. 그는 성찬을 죄의 대속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상징으로 여기면 성찬을 자주 거행할 필요가 없다. 너무 자주 거행하면 면역력이 생겨서 상징의 약효가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은 성찬을 거행할 때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생각했다. 그 같은 관점에서는 성찬은 자주 거행할수록 좋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축복은 자주 받으면 받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요약컨대 성례는 구원의 표와 인침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성례를 인간이 주도적으로 행하는 의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례가 주는 풍성한 은혜를 상당 부분 놓치고 있다. 예를 들면 세례에 있어서 참된 교인으로 살겠다는 학습자의 결단과 서약을 강조하다보니 교인들이 세례 받기를 주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세례가 구원을 인 쳐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인 것을 안다면 세례 받기를 열망하게 될 뿐 아니라 세례의식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놀랍고 은혜로운 의식이 된다.

성찬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한 상징 정도로 생각하니까 교인들이 성찬의식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사실 떡과 잔은 고난을 상기시키는 데는 적절하고 효과적인 매개물이 아니다. 차라리 떡과 잔 대신에 대못이나 가시 한 토막을 나누어주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의미와 실제에 엇박자가 생기는 것은 애초에 성찬을 고난에만 연결시킨 치우친 해석 때문이다. 물질로서의 떡과 포도주가 내 속에 녹아들어 나와 일체가 되듯이 주님과 우리는 포도나무와 가지로 뗄 수 없는 생명적 연합을 이루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 사실을 인 쳐주시는 것이 성찬임을 믿고 성찬을 거행할 때 그것은 가장 은혜롭고 감격스러운 의식이 된다.

성례는 물질적 요소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것이므로 교인들이 분명히 느낄 수 있도록 물질을 풍성하게 사용하는 것이 좋다. 세례를 베풀 때 물을 충분히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따라 삼중적 뿌림을 해야 한다. 성찬을 베풀 때도 떡과 포도주를 충분하게 사용하는 것이 좋다.

또한 성찬 시에는 회중이 하나의 떡과 잔으로부터 받게 하는 것이 좋다(고전 10:17 참조). 우리가 다 한 분 그리스도에 연합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떡과 하나의 잔이어야 한다. 칼빈은 초대 교회의 관습을 따라 성도들이 강단 앞에 배설된 성찬 상에 앉아 떡과 잔을 나누도록 했다. 그러나 큰 규모의 회중이 그렇게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가능한 방식은 교인들을 열을 지어 나오게 해서 하나의 떡과 잔으로부터 받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지금과 같이 개별적인 떡과 잔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 됨의 공동체 의식을 공고히 할 수 있다.

 

축도: 복 주시는 하나님 

구약시대에 족장이나 제사장들은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를 향해 자주 축복했다. 그것은 그들 개인의 소원이나 기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에게 구원과 은총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족장이나 제사장을 통해 축복하는 것은 그 언약을 확실히 이루겠다는 약속이요 선언인 것이다.

교회는 그 같은 언약적 관습을 따라 예배의 마지막을 축도로 장식한다. 축도는 예배자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 편에서 올려드리는 기도나 기원이 아니라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작정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신적인 행위인 것이다. 축도 행위는 목사가 하지만 그는 하나의 도구일 뿐 그 배후에서 참으로 복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와 같은 축도의 본질적 성격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축도’라는 용어보다 차라리 ‘복의 선언’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축도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눈을 감을 필요가 없다. 눈을 떠서 축도자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감격스럽게 받아야한다. 축도는 신적 행위이기 때문에 끝말도 당연히 “있을지어다.”가 되어야한다. 축도에 온갖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축도는 삼위의 이름으로 간결하게 하는 것이 좋다. 수식의 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파송말씀’(Charge)에 포함시켜 해야 한다. 축도하는 목사나 축도를 받는 성도들이 그 순간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시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축도를 받으면 예배의 마지막이 더할 나위 없이 은혜롭고 복된 순간이 될 것이다.

 

맺는 말 

근래에 한국 교회의 예배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예배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예배로 전락되고 있으며 예배가 교회 성장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우려는 충분히 타당하며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할 것들임도 분명하다. 그러나 필자는 문제의 뿌리는 그런 것들이라기보다는 예배를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상향적인 행위로만 생각하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잘못된 예배 신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배를 인간이 주도하는 행위로 이해하게 되면 예배가 기능화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보다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예배를 찾아 사람들이 쏠리게 될 것이며, 교회 성장에 명운을 건 목회자들은 성장에 득이 되는 예배를 기안하고 싶은 유혹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회중 간에 상호 교통하는 행위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하향적인 행위들이라는 예배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해야한다. 그리고 그런 하향적인 행위들을 진정 하나님이 행하시는 신적 행위로서 제 자리로 돌려놓아야한다. 예배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지켜보고만 계신 분이 아니다. 예배의 매 순서 가운데 친히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는 분이시다. 회중이 그 같은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거룩하신 임재 앞에 서는 영광을 자각할 때 우리의 예배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예배의 회복은 구경하시는 하나님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으로의 전환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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