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성령

▲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한국교회에 강해설교의 붐이 일어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이런 운동은 설교가 우선적으로 성경본문의 충실한 해석에 근거해야한다는 중대한 사실에 주목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충실한 강해설교에 대한 관심만큼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에 대한 관심은 아직까지 미흡하다. 설교에 있어 말씀과 성령은 서로 뗄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칼빈은 말씀과 성령은 항상 같이 가야하며 성령이 없이는 말씀도 아무 효력이 없다고 하였다.

성경본문을 잘 해석했다고 해서 그 설교에 자동적으로 성령이 함께 한다는 보장은 없다. 성경에 충실한 설교가 항상 성령의 역사하심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탁월한 강해설교에 성령의 역사가 부재할 수도 있고, 성경해석이 좀 미흡한 설교를 통해서 오히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할 수 있다. 주 기철 목사를 비롯해서 과거 한국교회에서 활동했던 기라성 같은 목사들의 설교를 지금의 강해설교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모두 낙제감일 것이다. 그들의 설교는 거의 예외 없이 성경해석도 부실하고 내용도 빈약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설교를 통해 성령이 강하게 역사했던 역사적인 증언들이 남아있다. 지금도 어떤 목사의 설교는 성경해석도 시원찮고 기발한 아이디어나 지혜의 번득임도 없고 논리도 엉성함에도 신비하게 청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적인 감화력이 있다.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선동하지도 않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반면에 성경강해가 탁월하며, 세련되고 정제된 언어와 빈틈없는 논리로 구성된 설교가 별 감화력을 미치지 못하고 열매가 없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설교에 있어 성령의 역사하심을 추동하는 것은 설교의 문자적 내용만이 아니라 그 외에 다른 요소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과거 신학적인 혜택을 요즘같이 누리지 못하던 시절에 사역했던 목사들은 신학적으로 충실한 내용의 설교를 작성할 만한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영성과 기도의 사람들이었기에 불완전하게나마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에 반해 지금은 설교자들이 많은 학식을 가지고 뛰어난 강해설교를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었음에도 그들의 설교를 통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심대한 제약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설교자 자신이 성령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거룩한 도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을 잘 해석할 능력이 부재한 것이나 영성이 결핍된 것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을 제한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성경에 충실한 강해설교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설교는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며 결코 양자택일해야할 문제가 아니다. 설교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 즉 말씀과 성령이 결합되어야 엄청난 영적인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지금까지는 성경본문에 충실한 강해설교에 관심을 집중했다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설교사역을 위해 성령을 도구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이 성령께 온전히 사로잡힌 도구가 되는 것이다. 설교사역에서 설교자가 성령을 도구화하느냐 아니면 성령의 도구가 되느냐의 양극 사이에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이 존재한다. 설교의 은사가 탁월할수록 성령을 도구화하려는 위험은 더 커질 수 있다. 설교자로서 성공하려는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을 간절히 구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설교자가 성령 충만을 간절히 구할수록 성령으로 충만하기가 어려워진다. 그것은 성령 충만을 자신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삼으려는 강한 욕망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갈증이 성령의 생수 자체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라 설교자로서의 성공에 대한 목마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교자의 깊은 마음의 동기가 주를 위해 일한다는 거룩한 대의로 교묘히 은폐되기에 그 욕망의 정체를 판독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설교자가 성령의 충만함이 가장 필요한 사람인 동시에 성령으로 충만하기가 가장 힘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성령을 자기 목적을 위해 도구화하려는 설교자의 은밀한 종교적 야욕이 십자가에서 처리될 때까지는 성령으로 충만하기 힘들다.

 

성령의 조명과 신학

복음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에 대한 증거이며, 성령은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빛을 우리 마음에 조명하여 그 영광을 보게 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사도는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했다(고후4:6). 성경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되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속사의 맥락을 따라 점진적으로 계시되었고 구원역사의 정점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러 가장 찬란하게 빛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서 구약에 산재해있던 모든 약속과 소망이 마치 흩어진 퍼즐을 맞추듯 서로 절묘하게 조합되고 연결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시의 결정체를 이루었다. 이 영광을 계시하는 복음의 진리는 혼란스러운 신비적인 개념으로 모호하게 표현된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납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체계로 전달되었다.

여기에서 복음에서 계시된 영적인 현실을 통찰하는 인식론적인 방편으로서 성경에 충실한 신학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체험했다고 하자. 만약 그가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영적인 현실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신학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는 온갖 신비주의적이고 체험주의적인 혼돈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성령운동에서 만연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령의 임재를 깊이 체험한 사역자가 자신이 성령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실체를 성경적인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잘 해명할 수 있는 신학적인 소양까지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설교자의 자격을 구비한 셈이다. 신학적인 도구를 통해 그의 설교는 성령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좌우에 날 선 검으로 예리하게 갈고 닦이게 된다. 성령의 불과 신학이 융합하여 만들어진 불붙는 신학, 로이드 존스의 말로, 불붙은 논리(logic on fire)로 승화될 것이다. 과거 한국교회에서 사역했던 설교자들은 오늘날과 같이 신학적인 혜택을 누리지 못해 이런 자질이 부족했음에도 깊은 영성과 경건의 소유자들이었기에 그나마 성령께 쓰임 받을 수 있었다고 본다. 요즘 설교자들은 신앙의 선진들이 가졌던 깊은 영성도 없고, 엄청난 신학적인 혜택을 누리면서도 공부하기를 게을리 함으로 최소한의 신학적인 자질마저 갖추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참된 영성뿐 아니라 신학까지 실종된 것이 우리 강단의 문제이다.

왜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복음이 전파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설교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설교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영적으로 보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마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에 펼쳐지는 삼위하나님의 구원행위와 그 존재의 신비에 대한 점진적인 계시를 체계적이면서도 총괄적으로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설교의 기본기가 훈련되어있지 않다. 신구약성경의 중심주제인 새 언약의 “약속과 성취(Promise and Fulfillment)"를 구속사의 맥락을 따라 잘 간파하여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어떻게 성취되고 성령 안에서 우리 가운데 현실화되었는가를 제대로 설파하지 못한다. 그래서 새 언약의 영이신 성령이 부여하는 은혜의 풍성함과 영광, 성령 안에서 삼위하나님의 임재와 주권적인 통치가 펼쳐지는 복된 영적인 현실을 밝히고 사람들을 그 복음에서 열리는 하나님 나라로 초청하지 못한다.

오늘날 강단에서 전파되는 메시지에 복음의 골자는 빠지고 온통 신자의 헌신과 열심을 고취시키는 윤리적인 지침과 권면으로 가득하다. 많은 교인들이 도덕적으로 각색되어 복음의 핵심이 흐려진 율법적인 메시지에 짓눌려 그리스도 안의 자유와 생명력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설교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의 생명력을 시들게 하는데 지대하게 공헌한 두 극단, 즉 무율법주의와 율법주의의 폐단을 낳았다. 삶과 유리된 믿음에 안주하게 하는 값싼 은혜의 복음이 도덕적인 해이와 방종을 조장했다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윤리를 강조하는 설교는 사람들을 새로운 율법주의의 올무에 빠지게 하는 오류를 범했다. 개혁교회임을 표방하면서도 종교개혁의 구원관과 거리가 먼 전혀 개혁되지 않은 구원론을 전하는 교회가 부지기수이다. 그것은 설교자들이 기본적인 구원의 진리마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한국교회에 성령의 조명과 복음에 대한 합리적이고 신학적인 이해는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신학교에서부터 신학생들 사이에 영파와 학문파, 기도파와 공부파의 양극단으로 나뉘는 경향이 나타난다. 목사들 중에도 신학무용론에 빠진 신령주의자들은 신학적인 바탕 없이 영적인 깨우침과 체험에 의존하여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함으로 많은 혼란을 야기한다. 그런가하면 주관적인 감정이나 경험의 피상성을 경멸하는 주지주의자들은 신학의 상아탑 안에서 지성의 빛과 합리적인 판단의 명료함에 도취되어 성령의 빛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다. ‘신학의 실종’과 ‘영성의 빈곤’, 이 두 가지가 모두 한국교회 강단이 안고 있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 마음에 비추는 성령의 조명과, 그 빛 가운데서 성경 속에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현실을 총괄적으로 파악하는 신학적인 통찰이 하나로 아우러질 때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현대 신학교육의 문제는 성령 충만과 신학공부가 거의 연결될 수 없을 정도로 이원화된 것이다. 신학교가 머리에 지식은 좀 채워졌으나 성령으로는 충만하지 못한 복음전파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설교자로서의 훈련에 있어 성령 충만과 신학공부가 결합될 때 성령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예리한 말씀과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힌 복음전파자들이 등장할 것이며, 이런 설교자들의 출현만이 한국교회에 한 가닥 남은 희망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설교자

성령 충만이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속에 사는 것을 뜻하며, 설교자가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삶의 모든 정황에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 산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체질화되어야 한다. 많은 설교자가 안고 있는 빈곤한 영성의 문제는 설교할 때만 성령 충만을 구하며 강단위에서만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고 체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진정한 영성은 강단 위가 아니라 그 아래서 밝히 드러난다. 평상시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다가 설교단에 오르기 전에 기도하여 성령의 사람으로 돌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설교를 위해 성령을 도구화하려고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에 의해 주관되고 사로잡힌바 된 사람인지는 설교단 아래서 확연히 드러난다.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특별한 사역을 할 때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평범한 영역까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이다. 설교자의 참된 영성은 강단 아래서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입증된다. 그러한 모습을 통해 그가 얼마나 순수하게 하나님 자신과 그 임재를 갈망하며 매순간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사모하는지가 밝히 드러난다. 이런 이에게 풍성한 말씀과 영감의 세계가 쉽게 열린다. 보통 때 성령의 임재 속에 살지 않는 이들에게 성경은 봉한 책같이 말씀 속에서 하늘의 영역이 열리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과 긴밀하게 교통하며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는 이의 설교를 통해서도 간혹 성령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다. 이는 설교자가 부적합한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청중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며 설교자와 상관없이 역사하는 말씀자체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수록 설교자의 영성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평상시 성령을 거스르며 제멋대로 살아도 강단 위에서 설교할 때는 성령의 은혜가 임하니 그런 모순된 설교행위가 상습적이 되고 고질화되어 나중에는 그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어떤 목사가 거짓되게 사는데도 설교할 때는 항상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한다면 그는 버림받을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일 것이다. 과거 미국에 지미 스와게티라는 유명한 TV 전도자는 그의 설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는데 그렇게 설교하고는 곧장 창녀에게 달려가곤 했다. 매번 그런 짓을 되풀이 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설교를 계속했다. 나중에 이런 사실이 들통이 나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어떤 이는 그의 설교를 통해 사람들이 받았다는 감동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령은 간혹 휘어진 막대기도 사용하여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신다. 문제는 그런 사람은 남에게 전파한 후에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강단 아래서 성령을 따라 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설교 시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긍휼인 동시에 설교자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설교에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그만큼 하나님께서 능력 있게 사용하는 종이라고 교인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으며 자신마저 그런 사람으로 착각하기 쉽다. 뛰어난 설교의 은사와 설교 시에 임하는 성령의 은혜가 오히려 진정한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설교는 잘하지만 인격에 문제가 있고, 강단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 자아의 얼굴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다. 그는 점차 강단위에서 가면 쓴 자신과 참된 자신을 혼동하게 된다. 자기기만에서 자기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거짓선지자들이 그토록 자신 있게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한 것도 철저한 자기기만이 빚어낸 당당한 자기 확신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지적과 책망이 심히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 자신들이 행한 사역과 거기에 수반된 권능으로 자신을 평가해주지 않느냐는 불만 섟인 항의가 그들의 말에 깃들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보는 관점은 아주 달랐다. 주님은 그들이 무슨 사역을 했으며, 어떤 권능을 행했는가보다 어떤 삶의 열매를 맺었느냐를 더 우선적으로 고려하셨다. 사역자의 진정성은 열매로 판단된다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강단위에서 감동적으로 설교하는 모습보다 강단아래에서 형편없이 사는 모습을 보고 설교자를 판단하실 것이다.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는 설교단 위에서 뿐 아니라 그 아래서도 지속적으로 성령과 동행하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산물이다. 이 열매가 없는 설교자들은 평소에는 성령을 거스르고 살다가 설교할 때만 성령을 도구로 이용하려는 심각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평상시 그들을 주관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육신의 소욕이며 설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세속적인 욕망의 성취이며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성령의 능력을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이런 설교자들은 설교사역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던 교회성장을 이루어도 만족을 잠깐이고 가시지 않는 내적 공허함에 쫓기며 더 많은 성취를 위해 허덕인다. 육신의 야망은 끝이 없고 만족할 줄 모르며, 이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을 쉼이 없게 하며 지치고 탈진하게 만든다. 이들의 심령은 성령과 날카로운 대립관계에 있기에 성령만이 줄 수 있는 영적인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영적인 공허함에 시달린다. 설교를 은혜롭게 하고도 허탈감을 느끼며 그것을 채울 수 있는 영적인 대용물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는 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며 특별히 음란의 죄같이 짜릿하고 자극적인 죄의 노예가 되기 쉽다. 이것이 세계적인 설교자라는 명성을 얻고도 몰락한 지미 스와게티나, 수많은 청년들이 열광하는 대형교회를 이뤄놓고도 파멸의 늪에 빠진 전 병욱목사가 생생한 견본으로 보여준 부패한 설교자의 비참한 말로이다. 그들의 설교사역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다면, 그들의 실족함으로 인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빠지고 주님의 교회와 복음에 더 큰 거침돌이 되었다. 이것이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목사들이 안고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다.

설교단아래서 성령과 지속적으로 교통하는 참된 영성의 부재가 많은 설교자들을 파멸의 벼랑 끝으로 내몰며 강단의 권위를 땅에 실추시킨다. 이런 영성이 빈곤한 데서 오는 문제, 즉 강단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설교자의 모습이 현저히 다르고, 설교와 인격에 심각한 괴리가 있는 것이 한국교회 강단을 쇠퇴하게 한 중대한 요인이다. 어떤 이가 한국교회의 설교의 실태를 진단하면서 한국기독교가 “신뢰 잃은 말의 종교”로 전락했다고 지적하였다. 요즘 설교가 교인들에게 잘 먹히지 않는 것은 설교 내용이 별로 들을 것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목사의 말이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인격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설교에 교인들이 귀를 기울일지 모르나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다.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살아내지 못하는 설교자의 말을 교인들이 듣고 따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목사의 감동적인 설교보다 그 설교와는 딴 판인 목사의 인격과 삶이 교인들에게 더 크게 말하는 법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도덕적인 연설을 할 때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청중이 알고 있는 그의 삶과 인격이 더 큰 소리를 내며 듣는 이들의 귀에 윙윙거리기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교인들은 설교자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샘에서 생수를 마시며 진정한 영적인 만족을 누리고 있는지를 보기 원하다. 복음이 설교자의 심령과 인격과 삶에 구체적으로 체화되어 전인격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를 듣기 원한다.

 

성령과 설교준비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는 설교자의 전인격과 삶이 성령께 온전히 사로잡혀 주관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 설교는 성령으로 충만한 설교자의 전인격을 통해 흘러나오고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일에 강단위에서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는 설교를 하려면 주중에 강단 밑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일 설교는 밖으로 드러나는 빙상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 표면 아래는 한 주간 성령과 동행한 삶이 깔려있고 더 깊은 저변에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온 오랜 연단의 과정이 잠재해있다. 한 저명한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하는데 얼마나 걸렸냐고 묻는 사람에게 40년 걸렸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설교는 성령이 설교자를 인도하고 훈련하는 오랜 과정을 통해 배양된 인격과 영성, 은사와 지혜를 비롯한 모든 자질의 총화가 발휘되는 종합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설교의 요령과 테크닉을 배우려하지 말고 매일 성령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성령이 사용하시기에 적합한 영적인 자질과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 자신을 준비해 가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주일설교 준비는 설교를 작성하기 위한 노력만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 성령을 온전히 따르는 삶으로 해야 한다. 잭 헤이우드라는 목사는 “탁월한 설교는 못해도 한 주간 성령과 동행하는 이의 설교를 교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을 통해 말씀하신다. 진실하지 못한 삶, 깨끗하지 못한 심령, 더러워진 양심으로 성령을 자주 거스르고 근심시키는 설교자는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며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설교자의 바르지 못한 삶이 주일 강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성령은 죄에 대해 매우 민감하신 분이다. 성령을 거스르는 설교자의 죄가 강단까지 따라 올라가 말씀의 빛과 권세를 앗아가며 성령의 다이내믹한 역사를 방해한다. 강단 위에서 설교자의 영성이 여지없이 들통 난다. 마치 범죄한 삼손이 힘이 빠지고 사슬에 매인 것처럼 성령의 능력이 떠나고 무력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 설교를 준비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우선되는 일이 자신 안에 하나님과의 교통을 단절시키며 성령의 조명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는지를 성찰하는 기도와 회개이다. 불신과 죄악으로 우리 마음이 어두워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영적인 깜깜함과 막막함을 경험하게 된다. 깊은 회개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볼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을 회복하며, 성령의 조명과 영감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준비하는 노력 없이 성급하게 설교 작성으로 뛰어들면 시간만 낭비하고 헛수고만 하게 될 것이다. 설교를 준비할 때 뿐 아니라 항상 성령의 감화를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상시에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사는 이는 쉽게 성령의 감화를 받는다.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는 물론이고 인문학 서적이나 딱딱한 신학 책을 읽을 때도 영감의 순간이 자주 임하며, 일상의 단조롭고 자질구레한 일과 속에서도 영적인 깨우침을 받는 기회가 그치지 않는다. 이런 영감과 계시의 순간들을 잘 포착해서 활용하기 위해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메모해놓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필요하다.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극단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인간적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노력을 성령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하는 육적인 열심으로 배격한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말하게 하심만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강단에 올라가면 성령이 전할 말씀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마10:19-20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러나 이 주님의 말씀은 설교단이 아니라 법정에서 복음을 변호하는 특별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가 복음을 변증할 때 이 말씀대로 성령이 그에게 할 말을 주셨다. 성령께서 그를 충만케 하셔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이다(행4:8-11).

설교자가 성령을 의존하다보면 자신의 역할에 소홀할 수 있다. 성령의 은혜를 의지한다는 태도가 자칫 잘못하면 설교자의 열심과 노력을 약화시키고 그의 게으름을 조장할 수 있다. 설교자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설교사역이 전보다 훨씬 수월해지는 대신에 설교의 효력과 열매는 더 풍성하게 나타나기에, 성령의 은혜만을 믿고 더 태만해지기 쉽다. 육신의 힘을 빼는 것까지는 좋은데 꼭 해야 할 일까지 손놓아버리는 것이 탈이다. 육적인 설교자의 문제가 과도한 욕망과 열정이라면 성령에 이끌리는 설교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바로 게으름이다. 성령의 은혜만을 믿고 설교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영적인 것에 몰두한 나머지 학적인 것을 경시한다. 신학을 많이 공부한 이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안 하는 것이 큰 흠이다. 이런 이들은 “영감(inspiration)은 공부와 상관없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공부 때문에 온다.”는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가 말을 가슴에 새겨야 하리라.(1)

(1) Oswald Chambers, The Complete Works of Oswald Chambers, "Disciples Indeed"(Grand Rapids: Discovery House, 2000), 404.

지금 우리는 2천년 교회역사에서 무르익은 신학의 풍요로운 열매와 혜택을 만끽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설교자들이 손쉽게 참고할 수 있는 성경해석과 설교를 위한 좋은 주석들과 신학적 자료들이 무궁무진하다. 조금만 열심히 준비하면 좋은 설교를 만들 수 있는데도 너무 게을러서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기 힘들 정도로 내용이 허접한 설교로 교인들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는 이들이 적잖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설교했던 스펄젼도 “공부에 더 이상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거두지 못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자신의 설교사역을 회고하면서 만일 자신의 사역을 다시 한다면 그는 두 가지를 바꾸겠다고 했다. 첫째는 자신이 했던 것보다 세배는 더 공부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너무 많이 설교하고 너무 적게 공부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더 기도하겠노라고 했다. 그의 뼈아픈 자성에서 나온 고백을 설교자는 잊지 말아야 하리라.

설교는 창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전달하는 것이기에 설교자는 우선적으로 성경본문연구에 충실해야 한다. 본문연구에 소홀할 때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이 본문에서 의도하신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고, 본문의 뜻에 멀어질수록 설교에 함께 하는 성령의 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설교자가 사람들의 욕구와 기호에 맞추어 말씀을 조작할 때, 청중의 마음을 끌기 위해 쓸데없는 것을 말씀에 더 하거나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꼭 해야 할 말을 뺄 때 성령은 근심하신다. 기발한 예화나 유머를 가미하여 설교의 효과를 돋우려는 시도는 오히려 성령의 감동을 삭감시키고 대체할 수 있다.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강하게 발동하여 성령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힘들게 할 수 있다. 성경강해가 탁월하고 신학적인 치밀함과 영적인 깊이가 있는데다 대중적인 적용성까지 두루 갖춘 불후의 명 설교를 창작하고픈 유혹이 열심 있는 설교자들을 늘 따라 다닌다. 설교준비를 게을리 하는 것 뿐 아니라 열심히 하는 데에도 성령을 거스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설교행위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그 자체를 거의 우상화하므로 성령께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탁월함이 치명적인 약점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게으름과 과잉열심이라는 양쪽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그 사이를 조심스럽게 줄타기하는 중용의 묘미를 터득해가야 한다. 설교자가 매번 창조적이고 신선한 내용으로 꽉 차고 빼어난 문장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고품격 설교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설교자마다 설교의 은사와 학적인 소양과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수준 높은 설교 원고를 기대할 수 없다. 정 용섭 목사는 철학과 인문학의 도구들을 활용해 성경을 창의적으로 이해하고 풀어가는 설교를 주문하는데, 그것은 그의 이상일 뿐 설교가 꼭 그래야 한다는 법도 없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도 매우 희박한 일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지식의 겉멋부리는 설교를 만들어 낼만한 학식도 없고 그럴만한 여유도 없다. 정신없이 쫓기는 각박한 목회현실 속에서 성경본문이라도 제대로 해석해서 설교한다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형편이다. 비록 탁월한 내용의 설교 원고를 작성하지 못할지라도 성령과 매일 동행하며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영감 받은 말씀을 수수하게 전하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설교는 인간의 탁월함을 드러내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들린 오병이어와 같이 그 자체는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설교의 능력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라는 비천한 방편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만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 미련함과 비천함이란 설교의 본질적인 특성을 설교를 지혜롭고 아름답게 꾸미는 노력으로 상쇄해버리려고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은 떠나갈 수 있다. 뛰어난 재담과 유머 감각으로 사람들을 끄는 것만큼 화려한 언어구사력이나 화술, 또는 지적인 탁월함으로 설교를 치장하여 사람들을 매료시키려는 것도 성령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다. 성령은 설교의 능력이 말의 유창함이나 언어의 존재론적인 능력이나 지식의 힘에 있지 않고 오직 성령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에 충분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방편을 즐겨 사용하신다.

설교자의 약점보다 탁월함이 설교사역에 더 거침돌이 될 수도 있다. 설교의 은사와 언변이 뛰어나고 지적으로 출중한 실력을 갖출수록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처절한 무력함을 망각하기가 쉽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절대 의존감은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반면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의존하려는 뿌리 깊은 자만심은 더 팽배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설교자의 탁월함이 성령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사역에 방해거리가 된다.

설교자는 자신의 죄악 뿐 아니라 탁월함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하나님께만 영광이 온전히 돌아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자신의 뛰어난 지식과 재능을 주님 앞에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nothing)로 만들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무에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사용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무로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고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탁월함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다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죽이라고 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도구로 다시 부활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은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는 설교자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여, 그를 통해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게 하신다. 윌리암 스틸(William Still)이 말했듯이, 오직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구주를 전할 수 있다. 십자가의 죽음을 거친 후에 설교자의 탁월함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은밀히 가로채는 마귀적인 교활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기 적합한 그리스도적인 ‘수줍음’을 띠게 된다.

설교의 위기는 복음 전파자들이 설교를 잘 해서 사람들의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는 강한 인정욕구에 이끌리거나, 설교의 큰 성과를 거두려는 성취지향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는데서 부터 기인된다. 이런 욕망에 눈이 멀어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청중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설교하면서도 설교를 잘해서 좋은 반응과 성과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욕망에 강하게 사로잡혀 예수님을 잊어버린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탐하는 욕심이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고 청중만 의식하며 그들의 관심과 반응을 끄는데 만 민감하게 한다. 여기서부터 설교가 하나님보다 청중에게 집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행위로 변질되고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정과 영광을 얻고 그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이끌어내려는 욕망의 뒷면은 두려움이다. 설교를 못해서 청중의 사랑과 인정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며 그들의 인정 위에 조심스럽게 쌓아올린 자신의 명성이 금갈까봐 노심초사한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명성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에 거기에 목을 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주던 것들을 잃을 때 자신의 존재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고 붕괴되는 것 같은 위기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는 고사하고 조롱감이 될 정도로 자신이 사람들 앞에 망가지는 것을 죽기보다 더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대가로 받게 되는 형벌인 셈이다. 사람들의 인정과 영광을 더 사랑함에서부터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강렬한 패션을 가진 성령께 사로잡히면 그의 인정욕구가 지향하는 바가 획기적으로 전환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만을 간절히 추구하게 된다. 그의 두려움은 새로운 두려움으로 대체된다. 전에는 청중의 호응과 인정을 얻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온전히 전파하지 못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게 된다. 사람들의 인기와 호응을 잃을까봐, 그들의 비위를 상하고 거스르게 할까 두려워하던 데서 자유하여 하나님의 뜻이면 교인들이 싫어하고 부담스러워 해도 가감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담대함을 갖게 한다. 성령은 하나님 앞에서는 한없이 두렵고 떨림을,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의 낯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갖게 하신다. 이 담대함이 설교자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덕목이다. 비겁한 자는 사람들의 아첨꾼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단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가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의 비위나 맞추기에 급급한 겁약하고 소심한 설교자들이 있는 반면에, 사람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소신껏 할 말 다하는 용감하고 대범한 설교자가 있다. 그러나 이런 용기가 성령에서 나온 담대함이 아니라 육신의 혈기에서 나온 무례함인 경우가 있다. 비겁함과 무례함은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을 잃어버린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두 얼굴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엄성과 예의조차 없을 정도로 고압적이고 공격적이다. 이런 무례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데서 비롯된 인간멸시이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담대함에는 온유함과 겸손,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깊이 배어있다.

설교자는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 가운데서만 설교를 잘 할 수 있다. 자유의 복음을 전하면서 죄의 결박에 매여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다. 성령은 설교자를 옥죄고 짓누르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그를 해방하신다. 두려움과 긴장, 불안과 염려에서 자유하여 평안한 마음으로 설교하게 하신다. 설교자의 마음이 균형 잡히고 평안할 때 설레거나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고 온유하게 설교하게 된다. 자유의 복음을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모습으로 전해야 한다. 전하는 메시지만큼 전하는 자의 자세와 모습, 인상과 음성이 중요하다. 청중들에게 전달되는 실제 효력에 있어서 비언어적인 몸짓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경직되고 불안한 모습, 흥분하고 혈기 찬 음성은 자유의 복음과 상충되며 메시지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너무 말을 빨리 하거나 지나치게 큰 소리를 지르며 설교하는 것도 삼가는 것이 좋다. 온유하고 차분하게 전하는 것이 부드러운 복음의 성격과 부합하며 온유한 성령의 특성과도 조화가 된다. 부드러운 음성에 성령의 은혜와 힘이 실릴 때 듣는 이들을 감화하며 그들의 강퍅함을 꺾는 역사가 일어난다. 성령은 설교의 내용뿐 아니라 설교자의 음성과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전인적으로 흘러나오는 스피릿을 통해 주님의 아름다운 얼굴이 듣는 이들의 마음 판에 그려지게 하신다.

성령은 설교자의 기억력을 새롭게 하며 생각을 윤활하게 해주고 혀를 풀어주어 말의 자유함을 누리게 하신다. 설교를 준비할 때 잘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 놀랍게 풀리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르게 하신다. 어떤 경우에는 준비된 원고의 내용을 떠나서 자유롭게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자유가 주어질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유하니 말의 실수를 범하기 쉽다. 성령은 설교자의 몸에 새 힘, 부활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피곤한 중에도 설교하고 난 후에는 몸이 더 가벼워지고 편해지는 은혜, 즉 성령 안의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

 

설교 원고를 불태워버리라

스펄전 목사는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해서 작성한 원고를 설교단에 오르기 전에 불태워버리라고 했다. 설교자가 설교원고를 마음에 흡족할 만큼 완벽하게 작성하고 나면 무의식적으로 원고에 의존하게 되고, 그것이 종종 내용이 충실하고 잘 구성된 설교에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설교원고에 자신이 없을 때 더욱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의지하므로 뜻밖의 결과를 체험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준비했어도 강단 위에서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설교는 영혼들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데는 별 효력이 없다는 뼈저린 깨달음이 없는 한 설교자는 계속 낭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설교를 통해 성령의 은혜가 온 회중에 이슬비처럼 때로는 소낙비처럼 내리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 영적으로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억압된 자가 자유케 되며 죽은 자가 살아나고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는 암울한 현실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성령은 말씀하시는 인격일 뿐 아니라 행동하시는 인격, 즉 그 말씀하시는 바를 반드시 실행하시는 전능하신 인격으로 역사하신다. 성령은 복음의 핵심내용인 새 언약의 은혜를 교회 안에 전달하여 실현시킨다. 새 언약을 성취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편의상 7중 사역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조명하심(illuminate), 자유케 하심(liberate), 치유하심(heal), 안식하게 하심(rest), 풍성하게 하심(flourish), 아름답게 하심(beautify), 능력 있게 하심.

설교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의 권능을 입어야만 죄와 사망의 권세에 매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 새 생명을 얻게 할 수 있다.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한 후에야 복음전파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복음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다. 설교자가 성령의 충만한 임재와 역사하심 가운데 복음을 전할 때 죄로 망가진 인생들을 새롭게 하는 새 언약의 은혜와 새 창조의 능력이 함께 한다. 흑암의 권세아래 있는 자들에게 복음의 광채가 비치고 마음의 눈이 열리게 하시며 죄의 속박에서 자유하게 하시고 심령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만약 설교자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이런 능력이 역사하지 않아 교회가 영적으로 피폐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성령으로 충만하는 것은 교회의 사활이 달린 문제이다.

한국교회가 강단의 권위를 회복하려면 설교에서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새롭게 눈떠야 한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오직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만 의존했다는(고전2:4) 점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로이드 존스가 2차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으나, 설교자들이 꼭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사실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회역사 속에 능력 있는 복음사역을 감당했던 이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후의 그들의 설교사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똑같은 설교를 했음에도 그 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능력과 변화가 나타났다는 증언도 귀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이런 체험을 했던 알 에이 토레이(R. A. Torray)목사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차라리 설교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까지 말했다. 그런 조언을 꼭 따를 수는 없을지라도 그 말이 강조하는 바는 놓치지 말아야 하리라.

 

말씀과 기도

누가 성령으로 충만한 설교자가 될 수 있는가. 그는 먼저 이 설교의 막중한 사명 앞에 절망한 사람이다.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고 자신에 대해 처절히 절망한 사람만이 성령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절망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절망은 성령에 대한 전적의존으로 이어지는 참된 희망의 서곡이다. 설교자를 무릎 꿇게 하여 하늘의 능력을 간절히 구하게 하는 열렬한 기도의 견인차이다. 설교자가 참으로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기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경륜과 은사와 지식으로 인해 은근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결코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자의 절망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기도의 자리로 내려가 그의 무능이 성령의 능력을 초청하며 그의 텅 빈(empty) 영혼이 성령의 충만함(fullness)을 불러들인다.

설교사역에서 기도와 성령 충만은 한 짝을 이룬다. 기도가 성령으로 충만하는 방편인 동시에 성령 충만의 증거이기도 하다. 성령으로 충만한 설교자는 기도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초대교회에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할 긴급하고 분주한 상황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도들이 최우선 순위를 둔 것이 바로 기도였다. 말씀 사역마저 기도 없이는 효력이 없음을 그들은 절감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했던 것이다(행 6:4). 변화산 밑에서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기도가 귀신의 세력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체득하게 되었다. 실패한 그들을 향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막 9:29)에서 오직 기도로만 귀신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기도가 이 땅의 고통스럽고 암울한 현실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이 땅위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며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원하신다.

기도와 말씀이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복음사역의 두 축이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미미해 보이는 말과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 당신의 뜻과 통치를 이 땅위에 펼쳐나가심으로 모든 능력과 영광이 하나님께만 돌아가게 하신다. 그러기에 복음사역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업적을 쌓아 자기를 과시하려는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에게는 무척 힘들고 고역스러운 일이다. 인간적인 지혜와 잔꾀를 다 비워 세상 사람들에게는 약간 바보스럽게 보이는 이들, 육신의 혈기와 힘을 다 뺀 약골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기도를 하기에는 아직 육신이 너무 지혜롭고 강한 이들이 많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용하시는 설교자를 기도 외에는 소망이 없는 상황 속에 갇혀 있게 하신다. 그러나 설교의 능력은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능력 있는 말씀의 선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설교자 자신뿐 아니라 모든 교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설교는 결코 목사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가 동참해야 할 사역이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기 위해 교회에 기도의 향이 가득해야 한다. 새로운 성전으로서의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며 기도의 향이 끊임없이 올라갈 때 하나님의 말씀과 그 영광이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기도의 향이 올라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오지 않고 은혜가 임하지 않는다.

기도가 없으면 말씀이 효력이 없고 열매도 나타나지 않는다. 목사의 은사와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교인들의 기도의 지원 없이 그의 설교에 성령의 큰 권능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스펄전은 자신의 교회에 방문해서 탁월한 설교의 비밀을 알기 원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설교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을 보여주며 자기 설교의 능력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고 했다. 하나님이 교인들의 기도를 통해 목사의 설교를 축복하시는 것은 목사를 겸손히 교인들의 기도를 의존하게 하며 교인들도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복음사역에 동참하게 하심이다. 목사의 설교사역에 기도로 참여하는 교우들은 대개 설교에 더 큰 유익과 은혜를 누리게 된다.

한국교회 강단에 능력 있는 말씀이 회복되려면 겸손히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해야 한다. 바울 사도 같은 이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복음사역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교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하지 않는 설교자는 얼마든지 자신의 실력으로 설교사역을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 교만한 사람이다. 아니면 교인들이 기도하면 설교를 더 잘 해야 한다는 부담만 커진다고 생각하거나, 교인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자신은 설교를 적당히 때우는 식으로 하거나 못하기로 작정했기에 기도를 부탁하지 않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설교사역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이다. 오랫동안 말씀을 열심히 전해도 그 열매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을 때 설교자는 지치며 에너지와 시간을 무한히 소모하는 것이 아니가하는 회의마저 들게 된다. 목사들 중에는 설교의 열매가 속히 나타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해하는 영적인 조급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복음의 정로를 벗어난 은사운동이나 성령운동의 편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끌고 제압하려는 유혹에 굴복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복음사역자들은 비록 복음의 열매가 빨리 나타나지 않고 교인들의 변화와 교회성장이 지체될지라도, 말씀과 성령의 원칙을 따라 주의 일을 해야 한다. 성령을 따라 설교사역을 하는 것은 바울처럼 모든 겸손과 눈물과 오래 참음으로 일하는 것이다(행 20:19,31). 어떻게 보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소모품 같은 존재이다. 설교사역이 온통 자신을 낭비하는 일처럼 보일 수 있다. 이렇게 무의미하고 소모하는 것 같은 설교사역이 당신의 은혜를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무한히 낭비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오래 인내하고 기다리는 설교사역을 통해 목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체화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그 은혜를 한없이 탕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국 탕자들을 설복하듯이, 자신의 청춘을 낭비하는 것 같은 설교자의 사역이 마침내 죄인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이키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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