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교회사
일반적으로 한국 개신교회는 성찬에 대하여 제대로 된 충분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의 교회론, 종교개혁사의 성찬 논쟁, 예배학의 성찬의 실제를 통해 가르쳐지는 성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교리들이 목회 현장에 거의 반영이 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기보다는 기존의 관습대로 성찬식을 집례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성찬이 일반적으로 일 년에 겨우 한 두 차례 시행되다 보니 성찬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변으로 밀려나 있고 하나의 특별한 연례행사로 인식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성찬에 대한 한국교회의 가장 잘못된 이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성찬의 의미가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성찬식이 먹고 마시면서 즐기는 영적인 잔치가 아니라 죽은 이를 추모하는 엄숙하고 슬픈 장례식이나 추도식이 되어가고 있다. 예배 시간에 성찬식이 거행될 때 잔치집이 되어야 할 교회가 초상집으로 변한다. 성찬식에서 사용되는 찬송은 하나 같이 무겁고 어두운 곡조로 이루어져있다. 이런 성찬의 모습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나치게 죽음만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미 이런 점에 대해서 소책자를 저술하여 목회자들에게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1) 적어도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은 성찬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며, 성찬에 대한 기존의 이해가 너무 잘못되어 있으며, 적어도 지금보다는 성찬이 자주 시행하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하였을 것이다. 이 책이 출판된 이후로 여러 목회자들이 이 주제에 대해서 강의나 설교를 부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찬의 실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하였다. 이 질문들을 요약하면 “어떻게 하면 성찬을 보다 은혜롭게 시행할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런 질문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답으로서 나오게 되었다. 이 글이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대답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길잡이는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예비적 고찰 

본 글은 성찬의 이론이 아니라 성찬의 실제를 다루고 있으며, 적어도 개혁파 전통이 말하고 있는 성찬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독자들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영적 임재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의미하고 있지 않은지를 대충 이해하는 독자라면 먼저 성찬에 대한 기본적인 교리에 대해서 선행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성찬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성찬의 시행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자 없이 후자가 제대로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표적인 예로 성찬의 본질을 제사(드리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식사(받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에 따라 성찬에 임하는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성찬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죽음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승천인지에 따라 성찬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성찬이다. 따라서 성찬을 집중해서 논의할 수밖에 없는데, 독자들이 잘못 이해하면 성찬이 최고라는 오해를 가지기 쉬울 것이다. 이 글은 성찬이 예배에 있어서 최고라기보다는 그동안 소외되었던 성찬이 예배에서 올바른 자리매김을 하도록 촉구하는 글이다. 앞으로 보다 자세하게 언급되겠지만 개혁주의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누가 무엇이라 해도 설교이다. 따라서 이 명제가 이미 본 논문에 전제되어 있다는 점을 독자들이 사전에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이 성찬이 예배 갱신의 전부라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성찬은 은혜의 수단이지 예배의 갱신이나 부흥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성찬을 은혜롭게 시행하려는 동기가 무엇인가? 예배시간에 무엇인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여 성도들에게 참신함을 주려고 한다면 그것은 출발점부터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논의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성찬예식의 유형들을 살펴보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새롭고 참신한 예식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진부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 예식 자체를 하나의 목회적 수단으로 보아서 뭔가 새로움 자체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성찬 자체가 은혜의 수단이 되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예배: 하나님의 일 

이 글이 예배의 관점에서 성찬을 보기 때문에 예배에 대한 선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성찬과 관련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명제는 예배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Opus Dei)”라는 사실이다.(2) 이것은 예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사실 오늘날 예배에 대한 많은 오해는 예배를 본질적으로 인간의 행위로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좋은 예배는 뭔가 좋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배에 대한 판단 기준이 주관적 체험이 되어버리고 만다. 예배의 기준이 인간의 주관적 체험이 되면 예배 의식은 인간 중심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예배에 있어서 이런 변화는 새로 짓는 예배당 구조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전과 달리 오늘날 예배당 구조는 거의 극장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물론 예배 시간에 성도들이 기도하고 찬양하는 일을 하지만 이것이 예배의 중심 요소는 아니다. 이 점에서 오늘날 음악이 예배에서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찬양대가 점차적으로 전문화 되고(반주자와 솔리스트에게 수고비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화 되고 있음), 찬양팀과 그에 부수적인 음향 및 영상시설이 예배에 있어서 점차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악기부나 오케스트라도 점차 대형화되고 있다. 그 결과 예배는 점차적으로 인간의 행위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예배를 인간의 행위로 이해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예배와 관련된 관용적 표현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국어에서는 보통 “예배를 드린다” 혹은 “예배를 본다”(3)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러다 보니 예배가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 전혀 실감이 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독일에서 예배는 “Gottesdienst”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봉사로 이해된다. 물론 이것을 목적격으로 해석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섬김”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소유주격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섬김” 즉 하나님께서 섬기는 것으로 이해된다.(4)

예배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 확립이 되면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꾸어 다음과 표현될 수 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뭔가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뭔가를 주시는 행위이다. 이 점이 예배에 있어서 이방인들의 거짓 예배와 성도들의 참 예배가 구분된다.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들의 예배는 본질적으로 기복적이다. 이방인들은 기본적으로 예배를 통해서 신에게 뭔가 드려서 복을 받으려고 한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의 참 하나님은 예배 속에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비와 은혜와 복을 베푸신다. 참 예배에서 기도와 찬양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베푸심에 대한 감사와 그분의 약속에 근거한 간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심지어 헌금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돌려 드리는 행위일 뿐이다.(5) 앞에 진술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예배는 과거에 이루어진 일, 즉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여, 삼위 하나님께서 진노와 저주 아래에 있었던 자기 백성들에게 한없는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고 그들로부터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는 행위이다.  

삼위일체: 예배의 주체 

예배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면 예배의 주체자는 당연히 하나님이 되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이 질문에 대한 적지 않은 이들이 막연하게 “하나님”이라고 쉽게 답을 할 것이다. 이 답은 틀린 답은 아니지만 충분한 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단들이나 거짓교회들도 이 질문에 참된 신자와 동일하게 답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의 주체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라는 점이 먼저 확고하게 성도들 가운데서 인식될 필요가 있다.

예배 시간에 삼위 하나님이 강조되지 않은 가장 큰 결과 한국 교회 성도들이 쉽게 이단에 빠지게 되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한국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대부분의 이단들(신천지나 신사도 운동)은 아리우스나 아폴리나리우스와 같은 이단들과는 달리 영지주의나 몬타누스주의와 같은 저급 이단들이다.(6) 한국 교회가 이렇게 초보적인 이단들에게도 흔들리는 이유는 삼위일체 교리가 제대로 예배 속에서 실천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배가 명시적으로 삼위일체적인 예배만 되더라도 한국에서 판을 치고 있는 상당수의 저급 이단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이야 말로 참 예배와 거짓 예배를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 개신교의 예배는 이 점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를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이유에서 예배의 대상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7) 무엇보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이 예배 가운데 언급이 되지 않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거의 따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과 “주여”라는 호칭은 자주 사용되지만, “성부, 성자, 성령”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부르는 공교회 예배 전통에서 많이 멀어졌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예배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불명확하니 삼위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찬송인 송영도 예배 시간에 사라졌고, 이 송영은 다른 간단한 노래로 대치되거나 성가대만의 예배 시작송 정도로 불리고 있다. 사도신경도 삼위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신앙암송 시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설교도 자기 백성들을 향한 삼위 하나님의 메시지 선포가 아니라 설교자 개인의 사적인 종교적 교훈으로 바뀌고 있다. 삼위 하나님이 그나마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축도에서도 역시 여러 미사여구가 첨부되어 늘어나면서 복을 주시는 삼위 하나님 보다는 “--하기를 결심하는” 성도들이나 그들이 받게 될 복의 내용이 중심이 되어 가고 있다. 이 반면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세례식은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유아세례 식도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자주 시행하기 보다는 한꺼번에 몰아서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

성찬이야말로 예배의 주체자가 누구신지를 가장 명시적으로 보여 주는 예배 의식이다. 왜냐하면 성찬 속에서 성도들은 삼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은혜를 가장 분명하게 체험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성찬도 하나의 식사라고 한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식사를 베푸시는가?”이다. 식사의 중요성은 식사의 내용이 아니라 식사를 초대한 주인에게 달려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베풀어 두었다고 하더라도 그 식사가 만약 조폭 두목이 준비한 것이라면 그 식사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범하는 것이다. 성찬이 우리에게 고귀한 이유는 그것을 베푸신 분이 삼위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식사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살과 보혈이기 때문이다.

성찬을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성찬 그 자체에 매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성찬은 수단일 뿐이다. 성찬이 중요한 이유는 이 성찬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제는 식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시간되면 같이 한 번 밥 먹자”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한 상에 앉아서 배고픔을 해결하자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밥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식사를 통하여 식사의 당사자와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앞으로 계속 언급하겠지만, 성찬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 전체가 삼위일체적으로 진행되어야 성찬의 진정한 의미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찬송이나 설교가 삼위일체적이 아니라면 성찬도 삼위일체적이 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의 성찬이 너무 기독론적으로만 이해되고 실천되는 것은 극복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성찬에서 너무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강조되고 있고, 특별히 떡과 포도주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 성찬에서 성령님의 사역이 주변부로 물러나게 되고 교회론적이고 종말론적 이해가 매우 약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찬을 인도하는 집례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삼위 하나님의 종으로서 성찬식을 집례해야 한다는 의식을 분명히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적인 예배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기는데, 가장 쉬운 방법 중에 하나는 예배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또한 성찬식에서 사용되는 공적인 기도가 삼위일체적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성찬에서 사용되는 찬송 역시 삼위일체에 대한 감사의 찬송이 되면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이 성찬을 베푸시는 주체가 누구신가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언급없이, 삼위 하나님께 기도함 없이 그리고 그분에 대한 찬송없이 의미있는 성찬식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반대로 예배의 다른 요소들이 삼위일체적이 될 때, 성찬식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도들의 교제를 보다 튼튼하게 강화시킬 것이다.  

은혜의 수단: 성찬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 

예배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행위라면 우리는 그 은혜의 수단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일반적으로 외적인 수단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통하려고 하는 모든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참된 교회에서 설 자리는 없다. 오늘날 직통계시를 추구하는 모든 잘못된 신앙의 행태들은 예배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외적인 수단은 말씀과 성례이다.(8) 일반적으로 말씀이라고 하면 성경이라고 인식되고 있지만 말씀과 성경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물론 성경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이단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말씀은 성경이라기보다 선포된 말씀, 즉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개인주의가 강화되는 상황 속에서 설교의 우선성은 최대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성도들은 예배 속에서 회중들에게 선포되는 설교보다는 QT로 대표되는 개인적 묵상을 통해 깨달은 말씀을 더 신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성도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목사의 설교가 평신도의 깨달음보다 수준이 더 낮은 것에도 이유가 있기 때문에 설교에 대한 무관심이 전적으로 평신도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목회자들은 충분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설교 역시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은 그 자체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설교는 무오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에만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도덕적/종교적 훈화일 뿐이다. 심지어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할 때에 그 설교는 이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가들은 참된 교회의 표지를 설명함에 있어서 말씀 앞에 수식하는 형용사를 붙여서 “순수한” 말씀이라는 용어를 정착시켰다. 참된 교회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곳이며 참된 예배는 그곳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결정한다.

은혜의 두 번째 수단인 성례 역시 잘못 사용되면,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보다는 미신이 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가르친 화체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거짓된 교리는 은혜의 수단인 성찬을 우상숭배로 바꾸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가들은 성례 앞에 수식구를 더하여 “(순수한)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시행되는 성례라는 문구를 확립하였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말씀과 성례의 관계, 즉 성례가 말씀에 종속되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예배에 있어서 이전과 달리 설교의 우선성이 확보되었고 설교가 중심이 되는 예배로 바뀌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성례전 중심적인 “보는 예배”에서 설교 중심의 “듣는 예배”로 바뀐 것이 종교개혁 시대에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예배가 설교 중심으로 바뀐 것은 바른 개혁이었으나 오늘날 설교가 성찬을 압도해 버린 것에 대해서는 심각한 반성이 필요하다. 종교개혁가들이 원한 것은 성찬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이었지, 성찬을 주변부로 밀어내려고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칼빈은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적어도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성찬식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9) 보통 칼빈은 매주 성찬이 시행되기를 원하였다고 관습적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사실은 칼빈은 그 보다 더 자주 성찬이 교회 안에서 실시되기를 원하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칼빈의 의견은 제네바 시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 왜냐하면 아직 로마교회의 거짓 예배(미사)로부터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찬식을 자주 시행하다 보면 평신도들이 로마교회로 다시 회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개혁교회 안에서 성찬의 횟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교회마다 다르겠지만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겨우 일 년에 서너 차례 성찬을 시행할 뿐이다. 칼빈을 따른다고 하는 장로교회는 적어도 성찬에 있어서 칼빈의 가르침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성찬이 예배에 필수적인 요소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찬을 예배에 필수 요소로 보지 않는 이유는 설교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교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이상 성찬은 예배에 있어서 주변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예배가 성찬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설교와 성찬의 관계가 분명해져야 한다. 개혁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중요한 이유는 설교가 성도들에게 믿음을 일으켜서 은혜를 받도록 하기 때문이다. 믿음을 일으키는 역할에 있어서 설교는 독보적이다. 다른 어떤 예배의 요소도 이 일을 할 수 없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하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이다(로마서 10: 16).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설교가 예배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말씀을 통하여 생긴 믿음은 연약하기 때문에 여러 환경에 의해서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약한 믿음은 더욱 튼튼하게 강화 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간단히 요약하면 설교는 믿음을 일으키고, 성찬은 일으켜진 믿음을 강화시킨다.

성찬과 설교의 관계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사건보다 더 잘 보여 주는 예는 없을 것이다(누가복음 24장).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약) 성경을 풀어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 본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였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날 말씀의 사역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그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성경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 주는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고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통해서 생긴 믿음을 성찬을 통해 더욱 확고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을 일으키는 것도 일으켜진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도 모두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그 믿음을 지키고 강화시키는 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은 개혁교회 안에서 용납될 수 없다.

설교와 성찬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면 목사들이 성찬을 통해 예배를 어떻게 회복시켜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설교가 믿음을 일으키고 성찬이 일으켜진 믿음을 강화시키는 일을 한다면, 설교는 무엇보다 성도들의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만약 설교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 결과 신자들에게 믿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성찬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찬은 이미 말씀을 통해 일으켜진 믿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는 성찬은 그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와 믿음과의 관계를 좀 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목사가 성탄절에 “왕이신 예수님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삽시다.”라고 설교했다고 하자. 안타깝게도 이것은 설교가 아니라 종교적 훈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설교는 복음을 설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어떤 믿음도 일으킬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생명이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은 죽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라고 어떤 목사가 설교했다고 하자. 이 설교는 복음의 핵심을 전하는 설교이기 때문에 선택된 백성들에게 믿음을 일으킬 것이다. 이 설교 뒤에 성찬이 따라오게 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강화될 것이다. 설교와 성찬은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예수를 믿으면 복 받습니다. 모든 사업이 잘 되고, 자녀들이 평생 건강하게 살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복음 설교처럼 보이지만 복음 설교가 아니다. 이 설교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사실상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믿음이 아니라 희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념이나 긍정적 사고를 믿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의 내용, 즉 복음이 성찬의 내용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설교와 성찬은 본질은 같고 형식만 다르기 때문에 성찬이 설교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설교의 내용과 성찬의 내용이 다르다면 어떻게 성찬이 설교를 강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성찬의 본질을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제사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의와 영생을 주신다는 것이다. 성찬의 이 본질은 설교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 형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니, 성찬은 보이는 떡과 포도주의 형태로, 설교는 들리는 말씀으로 성도들에게 전달될 뿐이다. 보이는 말씀으로서의 성찬은 보이지 않는 설교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찬으로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 설교가 먼저 복음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아무리 로마 카톨릭이나 성공회처럼 성찬 예식을 화려하게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설교가 복음적이지 않으면 그 성찬은 하나의 형식적 의식이 될 수밖에 없다.  

세례와 성찬 

앞에서 우리는 설교와 성찬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성찬과 더불어 또 하나의 성례인 세례와 성찬이 예배 속에서 어떤 관계를 갖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성찬만 제대로 시행된다고 해서 예배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예배의 전 요소가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지나 친 설교 중심적 예배는 성찬뿐만 아니라 세례도 약화시켰다. 마태복음 28장에 따르면 세례는 제자를 삼기 위한 중요한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제자 훈련에서 세례는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세례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가르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교리문답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에서 세례에 대한 무관심은 교리문답 교육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다.(11)

세례에 대한 무관심은 성찬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성도들은 세례와 성찬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있어서 한국 교회는 초대교회의 순전한 모습에서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이 3000명이었다. 그렇게 세례를 받은 자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 사도행전 2장 42절은 여기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한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것을 원문에 좀 더 가깝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저희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 즉 떡을 떼며 기도하는 일에 전혀 힘쓰니라.” 여기서 우리는 은혜의 외적 수단, 즉 말씀과 세례와 성찬이 초대교회에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게 된다.

초대교회부터 세례 교육은 기본적으로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쉽게 비유를 들자면, 손을 깨끗이 씻고 밥을 먹는 것과 같다. 따라서 세례를 교육할 때 성찬에 대한 교육이 부실해 지면 성찬도 따라서 부실 해 질 수밖에 없다. 그 반대로 성찬이 부실해지면 세례도 그 의미를 쉽게 상실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세례식와 성찬을 동시에 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이유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 세례를 받더라도 예배에서 이전과 아무런 실질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세례를 받음으로 수세자는 그 교회의 정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없다. “이제 내가 이 교회의 회원이 되었구나!”라는 주관적 느낌만 존재할 뿐이다.

성찬으로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세례와 성찬은 함께 가야 한다. 세례와 성찬 둘 다 동일한 형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 본질은 설교와 동일하다.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다른 측면에서 보여줄 뿐이다. 세례는 수세자에게 십자가를 통한 죄씻음을 확신하게 하며, 성찬은 수찬자에게 십자가를 통한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을 확신하게 한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정말로 세례를 통하여 받은 회원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 성찬이다. 따라서 세례식 이후에 성찬식이 이어져야 세례의 진정한 의미가 수세자에게 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을 실제적으로 적용시키면, 세례와 성찬의 관계를 보다 더 의미있게 하기 위해 수세자를 가장 앞자리에 앉게 하고 세례 직후 성찬식에서 가장 먼저 떡과 잔을 받기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정리하면 세례는 교회의 회원권의 시작을 알리고 성찬은 그 회원권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회원권과 관련하여 성찬이 보다 더 의미 있게 집례되기 위해서 필자는 “울타리 성찬(fenced communion)”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울타리 성찬은 그 교회의 정회원에게만 분배되는 반면, 열린 성찬(open communion)은 회원권과 관계없이 세례받은 모든 자들에게 (어떤 경우에는 세례를 받지 않더라도 예수를 구주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분배된다. 성찬을 누구에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두 가지 견해가 나뉘며 각 견해마다 장단점이 존재한다. 한국 개신교회는 일반적으로 열린 성찬을 채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열린 성찬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특별히 교회가 클수록 열린 성찬(open communion)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한두 가지 심각한 약점을 가지고 있다. 열린 성찬을 채택하면 성찬은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가 된다. 성찬에 분배된 떡을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본인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성찬의 소중함이 그만큼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울타리 성찬은 성찬에 참여할 자를 교회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당회가 정하게 된다. 성찬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허락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물론 이 제도를 시행하게 되면 다른 교회에서 온 사람들이나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찬의 제한은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설교가 된다.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과 확연하게 구분되기 때문에 성찬의 소중함을 보다 확실하게 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필자는 적어도 작은 교회에서 울타리 성찬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은 교회일수록 교인들의 소속감과 교제를 강화하여야 하는데 성찬이야 말로 성도의 교제 그 자체이며, 모든 교제의 근원이다. 울타리 성찬을 실시하면 당연히 매주일 성찬을 실시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매주일 성찬을 실시함으로 회원들은 소속감을 보다 분명하게 가지게 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빨리 회원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울타리/열린 성찬은 성찬의 빈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울타리 성찬을 실시하면서 성찬의 빈도가 적다면, 열린 성찬에 비교하여 볼 때 그 성찬이 성도들에게 실제적으로 주는 차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된다.

회원권과 성찬이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회원가입을 현재 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이전과 달리 성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옮기는 일이 빈번해졌다. 요즘에는 등록카드를 제출하면 등록교인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작은 교회일수록 교회 문턱을 너무 쉽게 낮추는 경향이 있다. 한 명이라도 더 늘이고 싶은 목사들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여기에는 숨은 함정이 있다. 교회 문턱을 낮추면 그만큼 교회를 떠나기도 쉽다는 점이다. 쉽게 들어 온 교인은 쉽게 떠난다. 따라서 작은 교회가 장기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회 문턱을 조금 높이는 것이 궁극적으로 유익이다. 새가족반을 운영하여 그 과정을 마친 사람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보통 예배시간이나 예배 후에 가입 환영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교인들을 받아들이게 되면 일반 동호회가 회원을 받아들이는 것과 본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따라서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예배 시간에 성찬 직전에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원 가입 서약식을 엄숙하게 하는 것이다.(12) 새 회원이 된 사람은 성도들의 환영의 박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시는 떡과 잔을 받음으로써 주님으로부터 환영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그 교회의 회원이 된 사람이 그 교회를 쉽게 떠날 수 있겠는가? 이런 서약식을 거행할 때마다 기존 교인들도 자신들의 옛 서약식을 생각하면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즉 성찬은 자신이 새로 가지게 된 교회의 회원권을 실제로 누리고 즐기는 시간이다.  

직분과 성찬  

예배의 주체와 은혜의 수단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그것을 실제로 수행하는 직분자를 다루어 보도록 하자. 직분은 라틴어 “munus”에서 왔고 그 의미는 일 혹은 섬김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직분자는 섬기는 자이다. 이것을 모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섬김의 내용이 무엇인가? 성도들이 “직분자는 섬기는 사람입니다”라는 설교를 들었을 때 구체적으로 머리에 어떤 섬김이 떠오를까? 아마도 주일날 교회 와서 아이들 가르치고, 청소하고, 성가대나 찬양대로 봉사하고, 차량 운행에 협조하는 것 등을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직분자는 누구를 섬기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분자는 교인들을 섬기는 자들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보다 직분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직분자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종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다. 교인들을 섬기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다. 직분자들이 교인들을 섬기는 것은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맡기셨기 때문이지 직분 그 자체가 교인들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은 아니다. 문제는 직분자들이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봉사하는가이다. 그리고 그렇게 봉사하는 구체적인 현장은 어디인가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직분자들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현장은 예배이며 직분자들은 이 예배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수단들, 즉 말씀과 성례를 집행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섬긴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와 직분은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예배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면 직분에 대한 이해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배와 직분이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를 성찬과 관련해서 살펴보자. 종교개혁을 통해 예배가 바뀌게 되자 그 결과 직분에 대한 이해도 현저하게 바뀌게 되었다.(13) 종교개혁 이전 시대에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찬을 미사, 즉 제사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직분은 사제, 즉 제사장이었다. 실제로 로마교회에서는 오직 한 직분 사제만이 존재한다. 단지 계급이 다를 뿐이다. 심지어 집사(deacon)도 부제로 이해된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성찬을 식사로 이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필요한 직분은 사제가 아니라 말씀과 성례를 집례하는 목사, 그것을 보호하는 장로, 그리고 그것을 섬기는 집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예배와 직분이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성찬이 약화되면 직분의 왜곡도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오늘날 장로교회에서 당회 안에서의 갈등은 만성적인 문제가 되었다. 당회 안에서 갈등이 없는 교회는 목사가 독재를 하든지, 아니면 장로들이 전권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 교회는 참 편안합니다”라는 목사의 말은 “장로님들이 다 내 말을 잘 이해하고 따릅니다”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이다. 정말로 목사와 장로가 아름답게 서로 섬기며 당회를 이끌어 가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서로 견제하면서 긴장관계 및 적대관계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문제가 어디에서 왔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성찬의 약화, 그리고 이로 인하 예배의 왜곡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목사와 장로는 서로 협력 관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은 목회 현장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실천은 무엇보다 예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나 친 설교 중심적 예배로 인하여 목사의 위치가 예배 속에서 지나치게 격상되었다. 솔직히 장로들이 예배 시간에 할 일이 없어졌다. 집사(안수집사)는 거의 할 일이 없다. 대부분의 장로들이나 집사들은 자신들이 예배시간에서 무엇을 섬겨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아마도 목사들은 그들이 새 신자를 좀 챙기고 자신들 구역원들을 점검하기를 원하겠지만 이런 이들은 부교역자들에게 넘어간 지가 오래이다. 장로나 집사들이 주로 하는 일은 기도 인도를 하는 것이다. 장로는 주로 주일 오전 예배에, 집사는 오후예배나 수요일에 기도를 인도한다. 그러다 보니 순서를 맡지 않은 주일에 직분자들은 예배 속에서 할 일은 별로 없다. 도대체 왜 직분자들이 존재해야 하는지 교인들은 전혀 인식을 못하게 된다.

직분자는 예배 시간에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인데 예배 시간에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은 직분의 심각한 왜곡을 초래하고 있다. 장로들이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보니, 그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당회에서 나타낸다. 장로들 중에 당회에서 목사가 하는 일을 견제하는 것이 주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목사들은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장로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생각은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다.

목사와 장로의 올바른 관계가 실현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평소 예배 속에서 그런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훈련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수단이 성찬인데 그 빈도가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성찬이야 말로 목사와 장로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성도들에게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목사는 성찬 식사에서 성도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장로들은 목사가 준비한 음식을 먹어야 할 대상들에게 배분한다. 집사들은 예배 전에 성찬 집례를 준비하며, 예배 시간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헌금을 거두고, 예배 직후에는 성도들이 먹을 애찬을 준비한다. 이렇게 목사, 장로, 집사는 각자의 직임에 충실하면서 한 분 주님을 섬긴다. 성찬 속에서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져야 당회에서도 동일한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

장로들이 떡과 잔을 나누어주는 것은 장로들이 단지 음식만 나르는 식당 웨이터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교회가 매 주일마다 울타리 성찬을 실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장로들은 적어도 교회의 정회원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14) 성도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장로들은 성찬식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성찬식에서 분배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성도들에게 무시를 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로들은 평소에 부지런히 성도들의 형편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그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적합한지를 살펴야 한다. 즉, 장로들도 목사와 마찬가지로 평소에 늘 목양을 할 수밖에 없다. 요약하면, 성찬이 회복될 때 직분이 회복이 될 수 있고, 직분이 회복이 될 때 예배도 회복이 될 수 있다.  

주변적인 요소들  

앞에서 성찬을 통해서 어떻게 예배가 회복될 수 있는지 본질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이런 본질적인 요소가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아무리 성찬식을 성대하게 거행한다고 해서 예배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본질적인 요소들이 충분히 제대로 자리 잡았을 때 성찬의 주변적인 요소들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아무리 주변적인 요소라 할지라도 잘못되었을 경우 처음에는 괜찮지만 결국에는 교회에 큰 해가 될 수 있다.  

1. 성찬의 분위기 

한국교회에서 성찬이 바뀌어야 할 가장 큰 요소는 성찬의 분위기이다. 성찬식은 기본적으로 천국잔치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성찬식 분위기는 거의 초상집과 같다. 따라서 집례자들은 성찬이 즐거운 혼인 잔치가 되도록 여러 모로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물론 수십 년간 내려온 한국교회의 전통을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목사 스스로 성찬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야 한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떤 시도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성찬이 천국 잔치라는 사실, 성찬이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 영적 임재설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존전으로 이끌려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뿐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개혁신학에 대한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찬 예식에 어떤 변화를 주기 전에 성도들에게 이런 사실을 설교, 강의, 성경공부를 통해서 충분히 인식을 시켜야 한다. 성도들의 인식에 변화를 주는 것에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가장 실천하기 쉬운 것은 성찬 직전에 간단한 멘트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 이제 주님께서 베푸신 식사를 기쁨으로 다같이 나누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성도들은 자신들이 식사에 참여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성찬식을 거행하겠습니다”라는 표현보다 성찬식의 분위기를 훨씬 더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

일단 흰 장갑이나 흰 보자기는 없애는 것이 분위기를 밝게 한다. 사실 그런 것들은 교회 안에 없는 전통이나 관습들이었다. 성찬식에만 특별한 가운, 그것도 검은 색 가운을 입는 것도 삼가는 것이 좋다. 그런 것들이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찬식을 자주하게 되면 가운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집례자가 너무 근엄한 표정을 짓기보다도 약간의 미소를 지으면서 성찬을 인도하는 것도 성찬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도 식사와 관련된 용어를 사용하고 기도도 기쁨과 감사가 중심내용이 되도록 바꾸면 좋다. 비록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 된다는 측면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성찬에서 사용되는 찬송을 무겁고 슬픈 곡 보다는 기쁘고 즐거운 찬송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면, “즐겁게 안식할 날”과 같은 찬송곡이다. 분병과 분잔을 할 때 성가대가 사용하는 곡도 잔치와 관련된 곡을 사용하면 성찬식의 분위기가 많이 바뀔 수 있다고 본다.  

2. 성찬의 시간 

성찬식에 걸리는 시간이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정해진 성경적 규범이 없다. 그러나 매주 혹은 자주 성찬을 시행할 경우 성찬식은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시행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성찬식이 성도들에게 매우 지루하게 느껴 질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성찬식에서 목사가 일일이 떡을 떼어서 성도들에게 주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르게 된다. 따라서 본질에 큰 손상이 없는 한 성찬식은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현재 일반적으로 시행되는 성찬 예식에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부분은 분잔이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빵과는 달리 잔은 쏟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조심스럽게 다루기도 하고, 각자가 마시고 잔을 다시 원 위치시키기 때문에 분병 보다 서너 배의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좋은 방법은 개인별로 마시기보다는 받은 잔을 가지고 있다가 끝나면 다같이 마시는 것이 좋다. 성찬이 공동체적 식사라는 점에서도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이다.

다같이 떡을 나눌 때, 다음과 같은 간단한 멘트를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떡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신 생명의 양식입니다. 다같이 받아 먹어서 영생의 은혜를 함께 누리겠습니다.” 잔을 나눌 때에는 다음과 같은 멘트를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함께 나눈 이 잔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신 생명의 음료입니다. 다같이 받아 마셔서 기쁨의 은혜를 함께 누리겠습니다.” 성찬에 사용되는 떡과 잔은 ‘생명’과 ‘기쁨’을 각각 상징한다. 따라서 집례자가 떡과 잔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간단하게 언급함으로 성도들은 자신들이 성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3. 다양화에 대한 문제 

매주 성찬식을 거행하면 너무 형식화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많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설교와 성찬을 분리시켜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개신교 예배에 있어서 성찬은 설교에 의해서 결정된다. 성찬은 스스로 설수 없기 때문에, 설교가 복음적이고 은혜로워야 성찬도 은혜로운 것이지, 설교가 은혜롭지 못한데 성찬이 은혜로울 수는 없다. 따라서 성찬 예식 자체에 너무 의미를 두고 바꾸려고 하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 아니다.

성찬은 본질적으로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찬의 다양성은 성찬에서 사용되는 말씀, 기도, 찬양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보통 제정 말씀을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구절을 사용하는데 성찬을 자주 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 본문이 가장 좋지만(성찬의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에, 자주 행하는 경우에는 얼마든지 다양한 본문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시편 23편은 성찬식에서 사용될 수 있는 아름다운 본문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

기도문도 예식문에 실린 것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여러 개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4개 정도를 준비하면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사용할 수 있다. 기도문 중에서 주기도문을 사용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주기도문 중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같은 구절들은 성찬과 너무나 조화를 이루는 기도문이다. 일반적으로 주기도문을 예배나 집회 시간 가장 마지막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찬식전 기도로 사용하면 성도들은 주기도문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4. 그 외의 요소들 

성찬에서 사용되는 요소를 엄밀하게 말하면 “떼어진 떡” 그리고 “부어진 잔”이며, 이것은 각각 그리스도의 “찢겨진 살” 그리고 “흘려진 피”를 의미한다. 찢김과 흘림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신 사역이 제사임을 증거한다.(15) 따라서 성찬식에서 이런 요소들이 반영되는 것이 성찬의 의미를 더 살릴 수 있다. 집례자는 미리 준비된 큰 떡을 떼면서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자신의 살을 찢어 주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포도주를 부으면서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자신의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면, 성도들은 자신이 받는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찢긴 몸과 흘린 피라는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성찬상에는 포도주 잔과 주전자를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없는 것보다 성찬의 의미를 보다 있는 것이 성찬의 의미를 가시적으로 선명하게 전달한다. 이 점에서 칼로 예쁘게 잘린 빵 조각을 사용하기 보다는 떼어진 빵 조각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성찬의 의미를 살릴 수 있다.

전통적으로 성찬 예식에서 “마음을 들어 올립시다(sursum corda)”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수찬자들로 하여금 떡과 잔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좋은 전통이며 오늘날 성찬예식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떡을 떼기 전에 집례자는 “우리의 마음을 들어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라고 말하면서 떡을 들어 올리고 그 상태에서 떡을 뗀다. 성도들은 자신의 시선을 좀 더 높이 두게 되고, 자신들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을 보다 실감있게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전과 달리 예배에서 생동감이 많이 떨어진다고 사람들이 느끼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세속화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전과 달리 초월적 세계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물질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것보다 순간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보다는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런 세속주의는 교회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암세포처럼 소리없이 교회 전체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가장 쉬운 방법은 세속화에 영합하는 것이다. 오늘날 열린 예배, 구도자 예배로 대변되는 탈 형식적 예배는 교회 문턱을 많이 낮추었다. 교회는 세상과 다름을 추구하기 보다는 세상과 같음을 추구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음악에 있어서 CCM은 일반 가요와 아무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과연 이런 식의 예배가 교회를 튼튼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 즉 거룩함이 없다면 사람들이 교회에 올 이유가 무엇인가? 세속화의 거대한 흐름을 교회가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면, 교회는 자신의 표지인 설교와 성례를 통하여 자기 거룩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교회에서 설교는 들리는 거룩성이라고 한다면, 성례는 보이는 거룩성이다. 거룩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냄에 있어서 성찬은 설교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성찬은 교회의 거룩성을 확보하게 함으로 예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이 논문은 성찬식을 보다 잘 할 수 있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다소 실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면 그러한 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16) 사실, 성찬을 뭔가 특별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잘못된 생각이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볼 때 교회는 항상 보편성(catholicity)을 추구하였고 이 보편성을 통해서 하나된 교회를 가시적으로 드러내었다. 성찬은 교회의 하나됨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회의 분열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교회마다 부르는 찬송이 다르고, 교회마다 선포되는 설교가 다르다. 이렇게 다른 교회들이 어떻게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부지런히 성찬을 시행함으로 교회가 보편성과 하나됨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야 할 것이다. 예배 때마다 성찬이 실시될 때 비록 교회가 법적으로 분열되어 있다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은 특히 작은 교회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된다. 왜냐하면 비록 자신들이 작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거대한 보편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성찬을 통해서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 성찬의 문제점은 형식에 있지 않고 내용에 있다. 예배는 아는 만큼 누릴 수 있다. 아무리 형식이 좋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성찬은 소꿉장난처럼 보일 뿐이다. 따라서 평소에 성도들에게 성찬이 무엇인지를 성경공부를 통해서 자세히 가르쳐져야 하고, 설교를 통해서 분명히 선포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성찬은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집행될 때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강단에서 복음이 설교되고 성찬이 신실하게 집행될 때, 예배의 주체이신 주님은 그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셔서 자신들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은 감사와 찬송으로 화답할 것이다. 이 잔치를 베푼 주인과 이 잔치에 참여한 손님들이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예배이다. 이 기쁨의 온전한 회복은 성찬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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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성호, 성찬: 천국잔치 맛보기” (여수: 그라티아, 2012).

(2)“한국교회와 예배”라는 주제를 다룬 제59차 복음주의 신학회(2012)에서, 총신대학원에서 예배학을 가르치는 정일웅 교수는 “한국교회의 예배변화와 예전의 문제성”이라는 논문에서,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예배학을 가르쳤던 한진환 목사(서울서문교회 담임)는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라는 논문에서 이 점을 강조하였다.

(3)어떤 사람들은 “예배를 본다”라는 표현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본다”라는 말이 한국어에서 반드시 시각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맛을 본다”라는 표현이다. 여기에서 “본다”라는 뜻은 “체험한다”는 뜻이 강하다. 그 점에서 “예배를 본다”라는 뜻은 하나님과 교제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4)정일울, “기독교 예배학 개론” (서울: 범지출판사, 2005), 17.

(5)역대상 19: 14: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6)여기에 대한 논의는 다음 자료를 참고하라: 이성호, “이단의 출현과 교회의 응전” 개혁신학과 교회 26 (2012):165-186.

(7)이 부분과 관련해서 본인이 쓴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예배: 십계명이 첫 돌판의 관점에서,” 제26 (2012): 192-196.

(8)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은 기도도 역시 은혜의 일상적 수단으로 다루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유해무, “기도: 은혜의 방편?개혁신학과 교회 vol 9 (1999): 202-225. 본 논문에서는 편의상 기도에 관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9)John Calvin,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8), 4.17.43.

(10)칼빈은 권징 문제로 시의회와 의견 마찰이 있었을 때 기꺼이 제네바를 떠났다. 하지만 성찬의 빈도에 있어서 의견의 차이가 있었던 이유로 제네바를 떠나지 않았다. 칼빈은 권징을 누가 행사할 것인가(교회 치리자인가 아니면 공직자들인가?)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지만 성찬의 빈도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11)최근에 교리문답 교육에 대한 관심이 되 살아나고 있는 일은 고무적이다. 교리문답 교육은 딱딱하고 재미없다라는 인상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다음 책은 그런 풍문이 별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황희상, “특강 소요리문답” (서울: 흑곰북스, 2012).

(12)회원 가입식은 아주 간단하게 할 수 있다. 한 예를 들면, o o o 씨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본인의 신조로 받아들이고, 본 교회의 당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릴 때 복종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십니까?”라고 묻고 “예”로 답하게 한다.

(13)여기에 대해서는 본인이 쓴 논문, “바른 교회, 바르게 세우기: 직분에 대한 칼빈의 이해,신학정론27권 제1 (2009): 51-78을 참조하라.

(14)만약 열린 성찬을 하면 장로들은 그야말로 식당 웨이터에 불과하다. 직분의 관점에서 울타리 성찬이 열린 성찬 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15)여기에 대해서는 고재수, “세례와 성찬” (서울: 성약출판사, 2005), 3장 “주님의 만찬의 의미”를 참고하라.

(16)이 주제에 대해서는 본인이 쓴 다음 책을 참조하라. 󰡔비법은 없다󰡕 (수원: 그 책의 사람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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