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인식사유와 더불어

서론 

▲ 박건택 교수 총신대 신학대학원
최근 칼뱅 서간집 1권(1530-1538) 번역을 마치면서 필자는 다시 한 번 칼뱅의 이미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미지를 추적하는 일은 역사를 움직인 인물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게 할 뿐 아니라 주변 인물 및 사건과의 관계를 통해 그의 인물됨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서간문을 통한 이미지 추적은 한 인물의 사생활을 엿보는 일이기도 하기에 개인적인 흥미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위대한 종교개혁자라는 공적 인물인 칼뱅의 내면성과 사생활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그를 지나치게 높이 떠받힌다거나 또는 억지로 폄하시키는 부적절함을 교정하여 있는 그대로의 그 자신을 그려내는 데 도움을 주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 서간문에 나타난 칼뱅의 이미지는 단순히 내면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칼뱅은 편지들을 통해 자신의 삶의 외연을 표출한다. 험하고 시큼한 세상을 향해 나서면서 자신의 존재를 형성해야하는 필연적 외연 말이다. 본래 고급 지식인은,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모종의 정치-사회적 책임으로 초대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책임 수행은 필경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칼뱅도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역사의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칼뱅을 중심으로 이뤄진 필자의 학문적 방향은 이 서양 종교개혁자의 이미지를 추적하는 일과 깊게 관여되어 있었다. 필자는 오래 전 베자의 서간문에 따라 칼뱅의 이미지를 묘사한바 있다.(1) 칼뱅의 추종자에게 그의 스승은 선지자였다. 필자는 또한 오랜 시간 <칼뱅의 자유사상>을 추적하면서 서양 사회에 각인된 칼뱅의 삼중 이미지를 들춰냈다.(2) 칼뱅은 개신교 신학의 교의학자요, 근대문명의 "창설자"며, 자신을 성찰할 줄 아는 경건의 인물이었다. 사실 칼뱅의 이미지는 보는 시각에 따라 극명하게 대립되어왔다. 그는 한편으로는 심하게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칼뱅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는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3) 그렇다면 동양적 시각에서 칼뱅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어떠할까?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융합으로 이뤄진 서양문명에 속한 칼뱅을 동양(동아시아)적 인식사유 속에서 읽어내겠다는 생각은 일견 잘못된 선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여겨질지 모르나, 사실 동서의 인물 비교는 이미 진행되어왔고(4) 앞으로는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게다가 서양의 두 전통 외에도 동양사상을 가미해야 하므로 훨씬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칼뱅은 신앙의 인물이자 동시에 정치적 인물이었다. 그는 신학자이자 또한 법률가였다. 그는 설교자이자 또한 정책입안자였다. 즉 종교적, 정치적, 법률적 고문이었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책사였다. 물론 서양에는 동양의 책사 같은 존재가 없다. 이것은 서양이 민주제와 공화제를 비교적 빨리 확립시킨데 비해, 동양은 강력한 통치자 밑에 문무를 겸비한 지식인 내지는 사상가가 활동하는 형태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백가의 유명한 인물들이 통치자로 하여금 보다 나은 정치를 펼치도록 협력한다는 점에서 동서양의 지식인들은 같은 길을 간다. 역으로 정치권력에 협력하지 않고 비판 내지는 은둔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양의 책사는 치국 이전에 수신을 요구받는다. 수신이 안 된 책사는 욕심으로 인해 국정을 잘못 이끈다. 칼뱅은 자신의 수신과정을 명백히 알려주지 않는다. 종교개혁 2세대에 속한 칼뱅은 앞선 선배들에 비해 수사나 사제 훈련을 많이 받지 못했고 오히려 인문주의 훈련을 더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칼뱅이 몽테귀 콜레주에서 스콜라적인 사상 훈련을 받았다면, 그가 인문주의 훈련을 받은 곳은 오를레앙/부르주 법대와 콜레주 루아얄에서다. 그가 치국책의 일환으로 펴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 <세네카 관용론 주석>과 <기독교강요>는 이 훈련의 결과다. 그는 이 훈련 과정에서 깊은 회심을 경험했다. 그렇다고 이 회심이 공자의 30년에 걸친 "독립"과 "불혹"과 "지천명"을 한꺼번에 가져다 준 것은 아니다. 칼뱅은 훗날 개혁자로서의 소명을 이때의 회심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아무튼 남아 있는 칼뱅의 최초의 편지들은 인문주의 훈련의 어느 시점이었고 그 방점은 그의 처녀 작품의 출판이었다. 필자는 먼저 칼뱅이 정치철학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을 살피고 이어서 그의 통치 이념의 내용을 목회와 성경해석의 관점에서 분석한 뒤 마지막으로 자신의 소명을 가능케 한 그의 내면성을 들여다 볼 것이다. 

1. 정치철학자의 길 

삶의 승부사

칼뱅은 <세네카 관용론 주석>을 자비로 출판하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카이사르의 말을 인용했다.(5) 편지의 문맥은 경제적인 파산을 염려하는 어조로 보이지만, 이것은 단순한 장난기어린 수사학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운명적 승부사의 고사와 얽혀있다. 물론 이 시기에 칼뱅에게 있어서 루비콘 강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 경제적인 문제일 수 있다. 칼뱅은 자신이 경제적 어려움을 잘 견뎌내는 습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늘 상 돈을 꾸었던 프랑수아 다니엘에게 상환 능력이 없음을 뻔뻔히 농으로 말할 수 있었다.(6) 어쩌면 경제적 “신용도”를 잃을 뻔했던 니콜라 뒤슈맹에게는 “하루 한 시간도 견딜 수 없는 궁핍”을 막아달라고 요청했으며 장 코프도 채권자 명부에 있을 듯하다.(7) 가족인 형 샤를르가 오히려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기에 칼뱅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첫 작품이 얼마간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는 강의 교재로 써달라는 식으로 친구들의 도움을 청했다.(8) 사방팔방에서 들어오기를 바랐던 금전 회수가 얼마나 이뤄졌는지 알 수 없으나 크게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출판 된 지 두 달 후에도 칼뱅은 일정한 주거지 없이 지냈다.(9) 그는 변호사 업무로 생계를 유지한 듯하다.(10)

지식인 칼뱅을 이렇게 경제적인 면과만 연결시키는 것은 그의 작품 내용이 허락하지 않는다. 칼뱅의 내면에는 철학과 법학과 문학을 연마한 지식인으로서 지식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릴뿐만 아니라 나아가, 성급하긴 하지만, 정치사상가의 청사진과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칼뱅은 몽모르 가문의 동문인 클로드 드 앙제스트에게 쓴 헌정 서문에서 은근히 유명해지고 싶은 충동을 드러낸다. “사실, 바로 내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 의식이 지금껏 나로 하여금 드러내는 것을 삼가게 했던 것입니다.”(11) 또한 칼뱅은 세네카가 네로에게 충고하는 글을 주석하면서 은근히 당시의 군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섞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기독교도들을 박해했던 네로는 중세 말 바른 경건에 따라 살려는 복음주의자들을 핍박했던 군주들(일례로 프랑수아 1세)과 중첩된다. 칼뱅은 이런 군주들에게 “충고하기란 어렵다”는 플루타르코스의 말로 주석을 시작한다.(12)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한 말은 칼뱅에게는 정치철학자의 길로 들어서는 운명적인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학자들은 이 책을 한 법학자가 쓴 치국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13)

칼뱅은 첫 출사표의 상대적 실패 이후 법률관계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런 그를 보면서 프랑수아 다니엘은 칼뱅에게 [파리] 주교 밑에서 할 일거리를 찾아주고자 했다.(14) 하지만 칼뱅은 자신의 부친이 했던 것과 유사한[그보다 약간 나은 정도의] 직업에 마음을 두지 않은 듯하다. 그는 철저히 기독교 인문주의자의 길을 갔다. 고전 작가 중에서 세네카를 주석한 그는 이번엔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하나인 사후 영혼의 문제를 다뤘다. 이 주제는 아마도 어린 시절에 경험한 모친의 죽음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나, 서문에 따르면 사후 영혼이 잠자거나 죽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미혹된 많은 이들의 요청에 부응한 것이다.(15) 영혼 불멸 사상은 고대 이교 사상이기도 하지만 칼뱅은 다만 성경과 교부들의 글로 이 사상을 옹호한다.(16) 사실 이 주제는 로마가톨릭과 벌리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종교개혁이 강하게 주장하는 “신앙의 본질”과도 다소 거리가 있다. 카피토는 이것이 썩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님을 지적하고 다툼을 야기하느니 차라리 모든 논쟁에서 물러나도록 권면했다.(17) 하지만 칼뱅은 자신의 첫 번째 신학 저술을 서둘러 출판하고 싶었다. 그는 별거 아닌 것으로 소란을 일으킨다고 말하는 자들(이중엔 카피토가 있다)에게 “하나님의 진리가…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8) 사실 칼뱅에게 재세례파는 가볍게 볼 대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로마가톨릭과 대등한 위치에 있는 또 다른 대적이었다. 칼뱅은 프랑스 왕에게 종교개혁의 신앙을 변호하는 글에서 마귀의 두 가지 방책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인간들의 폭력과 힘으로는 참된 씨를 뿌리 뽑고자 애쓰며, 또한 가라지로는, 할 수 있는 한, 참된 씨를 밀어내어 그것이 성장하고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고자 합니다.”(19) 즉 로마가톨릭은 폭군이요 재세례파는 가라지다.

<영혼 수면론 논박> 초판 탈고와 더불어 어느 시점에 칼뱅은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했다. 이 회심의 내용이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칼뱅으로 하여금 정치철학자의 길을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칼뱅의 <기독교강요>도 어떤 면에서 치국책의 일환이다. 이것은 <기독교강요>의 마지막 부분인 “국가론”이 첫 판부터 마지막 판까지 크게 변화 없이 삽입되어 있다는 데서 입증된다. 또한 헌정 서한을 프랑수아 I세에게 바친 것도 근거가 된다. 당시 지식인들이 왕에게 자신의 책을 헌정하는 것은 흔한 일로서(20) 이것은 일종의 유세에 해당된다. 물론 칼뱅이 프랑스 왕에게 쓰임을 받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칼뱅 가문은 부친이 누아용 성당의 참사회 직원이 될 때까지 우아즈Oise 강변에서 대대로 뱃사공 노릇을 했다. “민중의 대열에서 출생한 보통 사람”(21)인 칼뱅이 신학 예비 공부와 법학을 마쳤다고 해서 왕에게 등용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에게는 정치적, 경제적 배경도 없었다. 그가 비빌 수 있었던 언덕은 교회 직원에 불과했던 아버지가 전부였다. 그래도 제라르 코뱅은 자신의 둘째 아들을 위해 성직록을 따낼 수 있었고, 이 아들이 파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몽모르 가문과 엮을 수 있었다.(22) 칼뱅 자신이 영향력 있는 몇몇 가문들(대표적으로 코프Cop 가문)과 그리고 오를레앙의 몇몇 친구들(대표적으로 프랑수아 다니엘)과의 교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신분의 운명을 바꾸어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태생적 한계를 가졌던 후원자인 아버지를 잃은(1531) 후 칼뱅은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야 했고 그 ‘출사표’가 <세네카 관용론 주석>이었으며, 이것을 자신의 초기 학문 형성에 생활과 환경적으로 결정적인 도움을 준 몽모르 가문에게 바쳤다. “이것은 나의 나 된 모든 것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당신에게 빚진 것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내가 소년으로 당신의 집에서 교육받고 당신과 함께 같은 공부를 시작했을 때, 내 삶의 첫 교육과 문학에 있어서 매우 고귀한 당신 가정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23)

칼뱅이 왜 세네카를 선택했으며 그것도 하필이면 <관용론>을 주석했는가?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에라스무스가 이 고전을 두 번씩이나 다시 편찬해내면서 다음에는 누군가가 이것을 주석하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칼뱅은 기독교 사회에서 참된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박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마치 이교 사회에서 기독교도가 박해당하는 모습을 연상했을 것이고, 그것은 통치자 네로에게 세네카가 충언한 것처럼 당시의 통치자에게 충언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엄밀하게 보면 칼뱅은 이 주석을 프랑스 왕에게 헌정했어야 옳다. 하지만 이것은 고전에 대한 주석일 뿐 자신의 사상이 담겨 있는 저서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의 명성이 그럴 위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석 안에는 미래의 개혁자가 갈 정치철학과 윤리의 일면이 들어있다. 필자는 이것을 자유, 정의, 사랑의 관점에서 풀어본 바 있다.(24) 정작 칼뱅이 세네카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훗날 기독교 통치 이념서의 역할을 하게 될 <기독교강요>를 쓰기 시작하면서였던 것이다. 

제네바 책사 칼뱅

칼뱅이 정치 영역에서 책사로 받아들여진 것은 막 종교개혁 진영으로 넘어온(1536. 5. 21) 제네바에서다. 이 개혁을 이끌어 낸 파렐은 <기독교강요>의 저자를 제네바 시에 천거했고(25) 시의회는 그를 “저 프랑스인”으로 기록했으며(1536. 9. 5) 그에게 “성경 교사”의 직분을 주었다. 이듬해 칼뱅은 자신을 “제네바 교회 신학 교수”라고 소개했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던 16세기 제네바에서 초반 칼뱅은 파렐을 보좌하는 보조 책사였다. 그는 아직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맡지 않았다. 제네바는 아직 뚜렷한 종교 이념과 정책을 갖추지 못한 채 베른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칼뱅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 시기를 회상하면서 “소란스러웠다”en tumulte고 말한다. 파렐과 칼뱅이 첫 번째 제네바 사역을 실패한 이유는, 베른과의 신학적/언어적 갈등 가운데서, 이 불어권 자유 도시에 확실한 종교/정치적 이념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초기 신학/의식 논쟁들은 곧 통치 이념과 관련되기도 했다. 카롤리는 초기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베른 시의회는 기존의 비레를 보조로 밀어내고 카롤리를 책사로 책봉하여(카롤리는 집 외에도 비레의 세 배 연봉을 받았다) 로잔으로 보냈으며, 로잔의 목회자회는 그를 받아들였다. 카롤리가 교황의 태도로 로잔대회를 소집하자, 제네바에서 목회자회를 구성한 파렐과 칼뱅은 분노하여 이런 베른과 로잔의 행위에 부당함을 지적했다.(26) 이에 카롤리는 비레와 파렐과 칼뱅을 아리우스주의자로 단죄했고 제네바 목회자들은 로잔의 ‘교황’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지지한다고 반박했다. 그리하여 진정한 아타나시우스를 가리는(27) 장기간의 소송으로 들어갔고 결국 제네바 목회자들이 승소했다. 베른 치리회(콘지스토리움)는(28) 카롤리의 기소가 부당함을 선포했고 이 사람은 최종 소환에 불응하고 도피했다.(29)

헤브라이즘에 대한 칼뱅의 해설은 프로테스탄트 사회에서 점점 인정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강요>는 1년도 안 돼 출판업자에게 재판 내지는 수정판의 욕심을 갖게 했으며(30), 고국 프랑스에는 많은 칼뱅 모방자들Calvini imitatores을 만들어냈는바, 푸아티에의 한 교수는 프랑스에서 <기독교강요>를 구할 수 없는 것을 한탄했다.(31) 하지만 한편으로 프랑스 안에는 개혁신앙은 인정하면서도 스스로를 위장하고 미사에 참석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훗날 니고데모파로 불리는 이 사람들을 향해 칼뱅은 두 편의 공개서한을 쓰면서 자신을 예언자로 제시했다. 종교적으로 부패한 유대 사회와 전면 개혁이 필요한 고국의 형편을 대비시키면서 이 프랑스 개혁자는 에스겔의 심정을 갖고 말했던 것이다.(32) 칼뱅은 특별히 프랑스 사람들을 위해 불어로 된 요약 기독교강요를 작성했고 거기에 <제네바 신앙교육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와 같이 라틴어로 된 <기독교강요>(1536)와 불어로 요약된 <신앙교육서>(1537)는 불어권 개혁신학의 토대가 되었고 그 저자를 책사로 삼는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어권 개혁신학과 연대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아직 사상이 무르익지 않은 칼뱅이 제네바의 책사로 인정받기에 미흡했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통치 이념을 이 레만 호의 도시가 받아들이기에는 시기상조였다.

비록 카롤리의 문제는 일단락되었으나, 삼위일체의 관례와 화법을 놓고 베른과의 갈등은 1537년 내내 여전히 있었다. 사실 파렐과 칼뱅은 성경에 없는 이 용어들의 사용에 대해 다소 유보적이었고 이에 대해 베른 시의회는 다소 위협적인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네바 개혁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신앙고백서에 용어들을 수용했음을 말하고 하지만 이런 문제로 다른 사역자의 사임 여부를 결정하지 않겠다고 답했다.(33) 칼뱅은 바젤과 스트라스부르, 그리고 취리히의 종교지도자들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교환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명백하게 해나갔고 급기야 불어판 <신앙교육서>를 라틴어로 옮긴 제네바 카테키스무스를 펴냈다. 그리고 헌정 서한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신앙이 명백히 고백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와 협력하여 이 신앙고백서를 유대 백성이 행했던 것처럼(대하 15:14) 언약의 법으로 삼았다. 이점에서 제네바 개혁자들은 자신들을 언약의 중재자internuntius foederis라고 부를 수 있었다.(34) 칼뱅은 목사pastor와 설교자concionator를 구분하면서, 목사의 역할을 설교를 포함한 제반 행정으로 확대한다. 이 행정에는 교회의 자유에 해당되는 수찬정지(출교)권과 교구 분할권이 포함된다. 목사는 이 일을 위해 목회자 모임과, 국가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함께하는 공동 치리회를 만들어 사회 전체를 개혁하는 일에 관여하는 존재였다.(35) 마르틴 부써가 칼뱅을 스트라스부르로 초대하면서 “작은 목회사역”이라 말할 때(36) 그것은 단지 200명도 안 되는 교구민의 숫자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도시 및 제국 전체와 관련하여 할 일이 작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것이 우리가 목사를 책사로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책사를 포기하고 추방된 이유는 시의회가 자신의 개혁 프로그램을 따르지 않고 베른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상황은 베른/제네바 집권자들 대 칼뱅/파렐의 대결이었다. 제네바 시의회가 베른의 예배의식을 채택하고(3.11) 개혁자들을 불어권 스위스 교회들의 대회인 로잔대회(3.31-4.4)에 보내기로 결정했는데(3.26) 이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베른은 이들에게 로잔대회의 결정사항 따르도록 요구했는바, 그 내용은 세례수반에서 세례의식 거행, 성찬 시 무교병사용, 4축일 준수였다.(37) 게다가 시의회의 결정을 어기고 부활주일(4.21)에 성찬식을 거행하지 않았다. 칼뱅은 교회의 자유에 속한 전자의 아디아포라의 문제와 수찬정지라는 교회 고유의 치리권에 속한 후자의 문제를 구별하여 설명한다.(38)

칼뱅은 3년간의 스트라스부르의 사역을 거쳐 더욱 탄탄한 이론을 다지고 제네바로 되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의 정치철학의 기반은 이미 세워져 있었고 그것 위에 그는 치국평천하의 외연을 확대한다. 

2. 칼뱅의 정치철학 

칼뱅의 정치철학이 무엇인지 말하기에 앞서 제네바 종교개혁자 이전의 경우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칼뱅이전의 정치철학

칼뱅의 통치 이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양 문명을 공시적으로 읽어보자. 서양의 뿌리인 그리스-로마 문명의 절정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를 침공하던 BC 326년과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되던 BC 27년이었다. 비록 그리스와 로마가 민주제와 공화정을 만들어냈지만 그 종국은 전제국가였다. 이에 비해 황허문명은 중원 전체를 통일시킨 진시황제와 유방으로 대변되는 진한 시기(BC 221-AD 220)에 제도를 확립시킨다. 이 시기까지 양 문명은 인류의 가장 탁월한 현자들을 배출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 노자, 장자, 공자, 맹자, 순자, 한비자, 등등. 흔히 말하듯이,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의 차이 가운데 하나는 전자의 중심이 이동한 데 비해 후자의 중심은 중원에 멈춰있다는 데 있다. 혹 어떤 이들은 이 차이를 서양문명의 우월적 특성으로 설명하지만,(39) 이 입장이 최종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현대 중국의 G2 부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보다 진정 서양문명을 논함에 있어 유대-기독교의 정치적 이념화를 빼놓을 수 없다. 고대의 콘스탄티누스(313)와 중세의 샤를마뉴(800)로 이어지는 서양의 황제들은 기독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일개 국가 이상으로 커져버린 성직자 중심의 종교지도세력(교황청)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와 왕들이 가졌던 기독교 통치이념이란 무엇인가? 이들에게 기독교 지도세력은 어떤 통치이념을 제공했던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일치된 교리였다. 교리의 단일화는 정치가에게나 성직자에게 공히 중대한 요소였다. 따라서 기독교의 창설자의 삶의 모방은 일부 수사들과 이단들의 몫이었다.

서양문명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중세의 닫힌 기독교세계에서 벗어나면서다. 소위 르네상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근대는 고대 사회의 부활이었고 칼뱅은 이 문명의 초기에 활동했다. 16세기 초반은 동아시아에서 명나라의 10대(1505-1521), 11대(1521-1567) 황제, 조선의 중종(1506-1545), 명종(1545-1552), 선조(1552-1608) 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서양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통합시킬 줄 아는 자였다. 난세 중의 난세인(40)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기독교적인 이상에 따른 정치의 불가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기독교 인문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기독교적이고 스토아주의적인 군주의 의무를 비판했다. 그가 키케로의 <의무론>을 반박한 것과 칼뱅이 세네카의 <관용론>을 지지한 것은 대비된다. <군주론>은 그가 로마의 역사를 통해 통치의 지혜를 얻고, 메디치 가문에게 책사로 발탁되기를 바라면서 쓴 책이다. 마키아벨리는 헌정사에서 대놓고 자기를 발탁해달라고 애원한다.(41) 난세를 풀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고대 로마의 정치가와 철학자들에 의해 펼쳐진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42)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처음부터 헤브라이즘의 고전 연구는 없었다. 따라서 종합도 없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의 "광기"를 목도했다. 그에 따르면 이 피렌체의 예언자는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을 뿐이다. 흔히 마키아벨리를 동아시아의 한비자와 비교하는 것은 피렌체의 공화정을 꿈꾼 인문주의자에게서 법가의 세치와 술치를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통치이념의 중요한 요소인 종교적 측면이 없다.

이에 비해 에라스무스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절충에 성공했다. 다만 수사 출신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답게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으로 결론을 맺었다. 그의 영성은 그 이전의 데보티오 모데르나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사유재산 폐기를 주장한 토마스 모어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 성현들은 네 것 내 것이 없는 공동체 사회를 제안했다. 플라톤이 그랬고 공자가 그랬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유토피아는 애초부터 치국 이념에 적합하지 않다. 예수는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지만 결국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 산상설교의 정치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건 세상의 적응불능자로 여겨진다. 훗날 재세례파가 이 극단을 지향한다. 성현들의 정치이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황금시대에나 어울린다. 일례로 고대 중국의 요순시대 말이다. 공자는 그런 시대로의 회귀를 갈망했고 맹자는 그런 공자의 사상을 더욱 강화했으나 그들을 발탁하는 군주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사유 재산을 인정하고 세속 귀족을 영적 존재로 여겨 그들에게 통치권을 부여한 루터가 치국을 위한 책사에 적합했다.

그렇다면 칼뱅의 입장은 어떤 것일까? 칼뱅은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와 기독교 인문주의의 이상주의 중간을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적인 인식 사유로 말할 때 칼뱅은 순자와 한비자를 겸한 법가사상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법과 사상과 융합된 기독교(43)

동아시아에서 치국은 수신제가를 마친 지식인으로서 꿈꾸는 다음 단계다. 지식인은 통치자나 군주에게 통치의 정책과 방향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이념을 실현한다. 치세에는 공맹의 유가 사상이 채택될 수 있으나 난세에는 법가 내지는 병가 사상이 유용하다. 인의仁義 정치보다 높은 이상인 도의 정치를 주장하는 도가 사상가는 차라리 종교인에 해당된다. 물론 유가 사상에 종교적 측면이 없지 않지만 도교에서만 못하다. 이는 노자보다도 장자에게서 더욱 분명해진다. 고대 중국에서 불교는 외래 종교이지만 불가 사상이 오랜 동안 정치 철학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의 서유럽은 난세였다. 앞에서 보았듯이 데보티오 모데르나와 에라스무스의 “그리스도의 모방”이라는 이상은 난세의 현실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다. 중세의 수도회 전통에 서 있는 이 입장은 불교의 한 부류와 견줄 수도 있을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도 마찬가지다.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공자의 대동 사회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공산 사회다. 이런 사회는 심지어 교회에서도 불가능하다. 재산공유를 교회의 표지 가운데 하나로 삼은 것은 재세례파다.

동양적 시각으로 칼뱅은 제자백가 가운데 아마도 법가에 가까울 것이다. 법가는 불교, 유교, 도교에 비해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입장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치국책과 관련해서 칼뱅은 순자나 한비자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칼뱅이 에라스무스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말하지 않고 부패한 인간 본성에서 출발하여 제도를 논하는 것은 순자가 공맹 사상(유토피아적임)과는 달리 성악설을 주장하면서 치국을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칼뱅이 새 제도를 수립할 때 그리스의 공화정과 로마의 법을 도입하는 것은 한비자가 한나라 왕에게 법치(세, 술, 법)를 권하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한편 법의 정신이자 이념인 종교적 측면을 간과한 마키아벨리에 대한 언급이 칼뱅에게서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은 제네바 개혁자의 출발이 피렌체의 인문주의자와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칼뱅에게 있어서 종교적 측면이 하나님에게서 출발한다면, 제도적 측면은 인간에게서 출발한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에 대한 성찰은 수신뿐만 아니라 치국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어찌 보면 칼뱅에게는 노자, 순자, 한비자로 이어지는 연결선이 있다. 법가 사상에는 종교적 측면인 노자의 도치와 순자의 예치가 배제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묵, 노장이 모두 백성 중심의 정치사상을 갖는 반면, 법가는 군주 입장의 정치사상을 표방한다. 칼뱅에게는 통치자 중심의 정치이념을 기본으로 하면서 백성 중심의 저항사상이 있다.

<기독교강요>(1536)는 처음부터 이 성찰을 담고 있다. 신지식과 인간 지식이라는 이중 구조의 구성을 알리는 첫 서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 변증법으로 전개될 것을 예고한다. 이 책에서 도와 예와 법이 찾아질 수 있어 보인다. 구체적으로 도식화 시키자면, 도와 신론, 예와 인간론, 법과 제도론을 비교해볼 수 있다. 일례로, 하나님은 그 근원이 끝이 없는, 그래서 그분 자신의 계시로서만 파악할 수 있는 존재로서 그 이름조차(“스스로 있는 자”)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런 종교성이 도덕경의 첫마디(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에서 발견된다.

아무튼 <기독교강요>는 칼뱅을 책사로 삼을 도시/국가의 종교이념이자 통치이념이 될 텍스트다. 제네바는 칼뱅을 끌어들이는 순간 루터와는 다른 통치 이념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무르익지 않은 치국책은 실제적 적용에 어려움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기본 원리는 갖추었으나 유형 교회 이론이 결여되었고 따라서 영권과 세속권 사이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초판에서 칼뱅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기존 사회의 종교/통치 이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스위스 개혁교회에 루터적인 입장을 받아들이자는 소위 비텐베르크 일치(1536. 5. 21)의 도입 시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마르부르크 회담(1529) 이후 잠잠했던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의 일종의 연합운동이다. 여전히 마르틴 부처를 비롯한 스트라스부르 신학자들은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일부 베른 목회자들이 이에 동조했다. 쿤츠가 동조자라면 메간더는 반대자였다. 이 시도는 메간더를 추방함으로써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취리히 대회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중재 역할을 한 부써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44) 

개혁교회의 목회현장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1538.4.23) 칼뱅은 잠시 책사 일을 멈추고 바젤에 머물면서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목회 현장은 가톨릭 통일천하의 붕괴 이후 일종의 백가쟁명처럼 많은 책사들이 군주와 시당국의 눈에 들어 벼슬을 얻고자 유세 내지는 책략을 썼으나 비교적 일찍 지역마다 각기 탁월한 책사들을 배출했다. 독일 프로테스탄트 사회에서는 루터를 책사로 삼은 군주가 주도권을 잡고 주로 자신의 영토를 이끌었다면,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도시들과 스트라스부르는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개혁자들로 넘쳤다.

불어권 스위스를 지배하고 있던 베른에서는 한동안 쿤츠의 지휘 하에 목회자들이 도시를 섬겼다. 칼뱅은 두 가지 이유로 이 인물을 부적합하게 평가했다. 쿤츠는 개혁신학을 바르게 적용할 수 없는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일처리를 합리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미친 짐승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인물 평가는 상대적이다. 쿤츠가 불어권 지역에서는 마땅치 않은 인물이었지만 독일어권 스위스 입장에서는 활용도가 있었다. 바젤의 그리나이우스는 쿤츠를 호의적으로 보았다. 비록 쿤츠가 품행에 있어서 상당한 문제를 앉고 있지만 그것이 그를 내쳐야할 이유는 못되었다. 그는 “그쪽의 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비난받는다는 이유로,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현명한 형제를 경멸해야한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했다.(45) 이런 상황은 카롤리의 경우의 재현과도 같은 것으로 그리나이우스는 카롤리를 칼뱅과 동일한 자신의 친구로 여겼다.(46) 한편 칼뱅은 카롤리를 “버릇없게 사나운”, “말썽장이”요 “작은 짐승”이라고 불렀다.(47)

취리히가 베른에서 면직된 목회자 메간더를 받아들인바 있기에(1538.2.2), 칼뱅은 불링거와의 연대를 꾀해야 했다. 그와 파렐은 취리히 목회자들에게 비밀스러운 장문의 편지를 써서 자신들의 면직되는 과정과 그들의 후임들의 인물됨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 사람들 역시 카롤리나 쿤츠와 다를 바 없었다. 4명의 후임자들 가운데 세 사람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모두 목자의 탈을 쓴 간교하고 방탕하며 거만한 자들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48) 장 모랑의 제네바 입성은 가관이었다. 그는 많은 기병의 호위 하에서 부인과 시녀를 데리고 왔다.(49) 모랑의 추잡한 행위는 계속 이어져서 우리의 서간집을 메운다.(50) 심지어 이들 사이에서 지배권을 놓고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목사 부인들의 경쟁도 곁들여졌다.(51) 목사들 사이의 비방은 싱거울 정도였으며, 파렐은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내놓지 않고 오히려 검을 지니고 다닌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포르나투스 목사 부부가 시각장애인 목사 엘리 코로에게 행한 것보다 더 악한 것은 없다. 모종의 보복 조치로 코로는 독살 당했다. 보복적 차원에서 목사가 목사를 독살한 사건이 종종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52) 흉악하고 부당한 자들이 목회사역에 천거되는 것을 보면서 탄식한 파렐의 말은 당시 개혁교회의 목사 세계의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오, 야망이여, 너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괴물을 만들어낼 것인가!” 최고의 덕목을 보여야할 개혁교회는 아직 개혁되지 않았다. 이런 난세에 칼뱅은 법가사상가로 옷을 입고 그에 맞는 목회와 성경해석을 시도해야 했다. 

3. 목회와 성경해석의 관계 

칼뱅의 목회는 위에서 말했듯이 단순한 설교 사역만이 아니다. 그의 목회는 교회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또한 치국을 위한 것이다. 교회와 국가, 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종교는 정치이념의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 목회란 국가를 위한 것이며 성경의 목회적 해석이란 결국 국가의 통치이념을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다. 칼뱅이 수행한 목회는 우선적으로 제네바 개혁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으며, 다음으로 정치와 경제적인 면에서 제네바 공화정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목회사역이 칼뱅의 성경해석의 일부를 낳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칼뱅이 목회사역으로 부름받기 이전에 성경을 통해 얻은 깊은 통찰은 그를 회심으로 이끌었고 이 과정이 칼뱅의 수신修身 기간을 이룬다. 물론 칼뱅의 수신은 성경연구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로마 고전도 분명 한몫했음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결정적으로 뒤바꿔 놓은 것은 성경의 구원 계시에 대한 순종적 이해다. 그러므로 칼뱅의 치국을 위한 성경해석에 앞서 자신의 수신을 위한 성경해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먼저 보자. 

수신과 성경 묵상

현존하는 칼뱅의 최초의 편지들은 1530년대 초, 오를레앙과 부르주에서 함께 법학을 공부하던 친구들 간에 주고받은 것들이다. 친구들은 주로 경제적으로 신세를 진 프랑수아 다니엘과 니콜라 뒤슈맹이다. 20대 초반의 이 프랑스 인문주의자는 그 또래 청년들이 가질 수 있는 자유분방한 면이 없지 않다. 엄격한 부친의 임종 앞에서 친구에게 보내는 진한 우정 표현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초기 서간문에 나타나는 칼뱅의 첫 번째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철학과 법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독학으로 신학을 연구한 청년 인문주의자가 자신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는 출사표를 던지는 모습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칼뱅이 자신의 덕성 수련을 위해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이용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와 같이 칼뱅의 수신은 당연히 서양 인문학적인 주제들인 자유, 정의, 사랑에 대한 성찰과 관계한다. 이 성찰은 그의 처녀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칼뱅은 그의 고전 성찰에서 심오한 종교 체험을 얻지 못했다. 칼뱅의 경건은 성경 연구를 통해서 왔다. 이 경건은 구원의 힘이 외부에서 온다는 관점에서 동아시아 종교의 수신 개념과 구분된다. 물론 불교(정토종)에도 타력신앙이 있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으나 그것은 아마도 경교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수 있다. 분명 기독교의 특징은 은총의 종교라는 데 있고 이것을 가장 급진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칼뱅의 경건은 루터와 함께 이 영역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룬다.(53) 로마가톨릭의 경건이 인간 중심의 공전이라면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은 하나님 중심의 공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경건이란 말의 특수성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성화를 생각할 때 자신의 구원 서정 전체가 수신이라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개인구원은 사회구원(치국평천하)으로 나아가기 전에 제가齊家(“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를 거치는 것이다.

칼뱅의 수신은 끊임없이 자신의 결정적인 회심 체험에 대한 묵상으로 이뤄지며 그것은 강해설교를 동반하는 지속적인 성경연구의 결과이다. 칼뱅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두려움을 벗고 그를 바르게 경외함으로써 참된 경건에 이른다. 물론 1538년까지 칼뱅은 성경주석을 쓰지 않았고 이따금 행했을 설교는 남아있지 않다.(54) 초기 그의 성경 묵상/강해의(55) 결과는 <기독교강요>, <신앙고백서>, <두 서신>에 들어있다. 우리가 칼뱅의 초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길은 그의 후기 저서들을 통해서다. 별로 1인칭 화법을 사용하지 않는 그에게서 그 자신의 내면을 읽어낼 수 있는 길은 3인칭 화법 속으로 들어가 심리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56) 따라서 당연히 추측적인 글로 표현된다.

칼뱅의 수신은 “내가 어떻게 하면 참된 경건에 이를 수 있을까?”에 대한 몸부림일 수 있다. 그는 루터와 같은 갈등을 거친(콜레주 몽테귀) 후, 어느 시점(1534년 겨울)에 이 경건에 이르렀다. 칼뱅이 성경에서 체험한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미리 정하시며 불변하시는 분으로서 인간은 그의 지성과 의지로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도 그의 뜻을 바꿀 수도 없다. 이런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로 결심하던 순간은 갑자기 찾아왔지만 그 과정은 점진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인종忍從적인 것이었다. 칼뱅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에 부딪혀서 오랜 수용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의 중심 주제가운데 하나였다. 자유와 비-자유 사이에서 칼뱅의 모습이 그려진다.(57) 칼뱅은 어쩌면 자신의 수신 기간이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가 자꾸 은둔을 생각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실 회심 이전 친구들과의 서신 교환에 나타난 그는 가족관계를 제외하면 밝고 적극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그를 “마지못해 된 개혁자”Réformateur malgré lui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가 수신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의 못된 성질이 다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된 경건”의 정립이 흔들리지 않았고 또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묵상이 이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칼뱅의 목회적 소명은 일종의 치국평천하의 길로의 부름 받음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소명은 수신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며, 소명이후 수신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있다. 적어도 수신 때 갖추었던 확고한 신앙/마음이 흔들려선 안 된다. 그리고 여기에 자신의 성경해석법을 갖춰야 한다.

칼뱅은 회심이후에는 마키아벨리나 에라스무스의 방향이 아닌 루터나 츠빙글리의 방향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그가 종교개혁자로서 부름을 받았다고 해서 정치철학자의 길이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난세에 그의 활용도가 더욱 요구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수신(회심에 대한 묵상)이 그의 목회적 소명의 길의 발목을 붙들곤 했지만, 궁극적으로 개혁자로서의 소명이 한 지식인의 사회참여 의지와 완전히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에 신학적 소양이 없이는 사회참여의 수준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법학의 소양이 없이 신학만으로는 제한적 참여에 머문다는 말이다. 어쩌면 전자의 경우가 마키아벨리라면, 후자의 경우는 에라스무스이리라. 더욱이 개혁신앙에 기초한 새 질서를 수립해야하는 경우, 단순한 신학 소양 정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통치 이념을 제공할 수 있는 성경해석학의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칼뱅의 목회적 해석

칼뱅이 치국을 위해 끌어온 해석학적 개념은 구약의 언약신학이다. 제네바 카테키스무스 헌정서한에서 그는 목회자의 직무가 “잘 손질한 설교로 하루 일과를 마치는 정도”가 아니라 성례의 올바른 시행에도 있음을 지적하고 이 성례라는 말을 구약 백성의 할례 언약circicumcisionis foedus과 연결시켜 설명한다.(58) 칼뱅은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과 관련된 이 언약이 모세, 요시야와 아사, 에스라와 느헤미야로 이어지면서 갱신 지속되었음과, 이런 종교적 언약이 이방 세계에서도 국가 수립 시에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임을 상기시킨다.(59) 이런 이유에서 그는 제네바 시의회의 협력을 얻어냈고 전 시민들로 하여금 이 신앙고백서에 서약하게 했다. 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칼뱅은 언약의 맹세sacramentum가 실행된 여러 구약성경 본문을 인용한다.(60) 칼뱅은 제네바가 선택한 신앙고백이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특히 취리히)의 신앙고백과는 일치하나 루터파가 선택한 신앙고백과는 다른 통치 이념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비텐베르크 일치의 수용을 주도한 베른이나 그것의 중재 역할을 했던 마르틴 부써를 거부했던 것이다. 또한 칼뱅은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재세례파 신앙을 가진 목사들이 시의회와 협력하는 것도 인정할 수 없었다.(61) 따라서 칼뱅의 성공은 시의회가 그의 정치철학과 더불어 그를 책사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했다. 제네바는 그를 받아들이기까지 3년을 흘러 보내야 했다.

한편 제네바는 몇 가지 일치하지 않는 전례들은 아디아포라의 문제로서 각 교회의 재량에 맡겼다.(62) 일례로 베른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례식의 장소, 성찬의 빵, 축일 선정 방식을 고수했고, 취리히는 성찬 시행방식(앉은 상태)과 성모 마리아 경배에서 차이를 보였다.(63) 이 모든 것은 각 도시 개혁자들의 목회적 해석에 기인한다.(64)

전례 문제가 개혁파 교회 내에서의 목회적 해석의 문제라면, 마법사, 일부다처, 영혼수면 등의 주제는 개혁파가 인정할 수 없는 “이단적인” 문제이다. 칼뱅은 앙투안 뒤 피네에게 쓴 목회서신에서 이런 주제들에 대한 성경 해석을 제공한다.(65) 그렇다면 누가 이단인가? 이런 질문은 결국 가라지에 대한 해석으로 귀결한다. 파렐은 칼뱅에게 불어권 개혁교회 형편을 알리면서 많은 가라지를 언급하고 이것들이 뽑혀야 될 것으로 여겼다.(66) 개혁교회 목사라는 자들 가운데 자신의 야망 때문에 다른 목사를 독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는바, 위에 언급한 엘리 코로 외에 장 르기가 독살되었으며 크리스토프도 두 번 죽을 뻔 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칼뱅과 파렐은 이런 사회학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과 이단 사상을 심는 자들 가운데서 후자를 가라지로 여기는데 비해 일부 어떤 이들은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파렐은 쿤츠의 중재로 목사가 된 파리아투스를 한 사례로 든다. 이것은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보존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성경해석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이 논쟁은 훗날 칼뱅과 카스텔리오 논쟁에서 극에 달한다. 칼뱅은 세르베투스와 같은 이단 사상을 심는 자들을 가라지로 여기고 위정자의 처벌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복음서의 말씀을 위반하는 것인가? 칼뱅의 성경해석은 다른 상황에서 온다. 먼저 모든 정치체제는 종교적 기초를 갖고 있다는 것, 다음으로 구약에 따르면 바른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서 위정자가 무장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신약에서도 바울이 경건과 예절에 따른 삶을 위해 위정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했다는 것이다.(67) 칼뱅은 이 논리가 기독교 국가가 아닌 시대와 장소에서 다 적용되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런 칼뱅의 목회적 해석이 오늘날 종교다원사회에 속한 한국 사회에 적용이 가능할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개혁신학을 민족적 언약으로 삼고 북아메리카, 남아공, 호주 등으로 민족 이동한 백인 사회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종교적 통치이념을 가진 한 국가가 종교적 견해가 다르다고 박해와 처벌을 정당화한 결과는 종교 전쟁이거나 민족 말살일 뿐이었다.(68) 동아시아의 다른 종교와 국가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파악될 수 있다. 

교회의 역할

이제 마지막으로 동양 문명과 달리 서양 문명에서 특별하게 평가될 수 있는 교회의 문제가 남아있다. 본래 예수의 가르침은 세상 나라와는 다른 통치방식이었다. 제자들을 통해 새 나라(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면 베드로 위에 세워지는 교회는 이런 나라의 유형화된 존재로 제시되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세상 나라와 맞먹는 하나의 나라요 제국이었다. 중세 교황청의 역할을 오늘날 유엔의 역할과 대비시킬 경우(69) 그리스-로마시대에서나 동아시아에서 그에 대비되는 역할을 한 종교기관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정치철학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리스에서의 소피스트나 동아시아에서의 제자백가와 같이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교회는 동일한 정치철학을 공유한 집단이 되겠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에라스무스에게 교회란 권력화 된 종교집단에 불과했으며 중요한 것은 예수에게서 발견되는 기독교철학이었다. 루터는 자신의 두 왕국 이론에도 불구하고 국가 교회의 탄생을 인정해야했으며 따라서 그에게는 무형교회 개념이 소중하다. 이때 교회는 국가의 보호 하에서 도리어 교회의 자유를 상실할 수 있다. 한편 급진파들은, 폭력적이건 비폭력적이건, 교회와 국가를 대립적으로 보고 신앙공동체의 순수성, 독립성, 우월성을 강조했다. 칼뱅에게 있어서 교회는 영적 통치를, 국가는 육적 통치를 담당한다. 국가가 교회의 보존을 위해 존재한다면 교회는 국가가 바른 통치를 할 수 있도록 그 영혼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제도 형식으로 존재해야할까?

칼뱅은 제네바의 도시 종교urbis religio가 복음의 순수함을 회복하긴 했지만 교회의 외양ecclesiae facies을 갖추진 못했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교회 제도를 수립하고자 했다.(70) 물론 개혁교회의 원형은 그가 스트라스부르 체류기간을 거쳐 다시 제네바로 오게 되는 때 형성되지만,(71) 교회의 개혁방향은 이미 칼뱅의 머리에 있었다. 그것은 성찬의 바른 시행과 신앙교육Catechismus 시행(72)을 통해 백성 전체의 영적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교회를 세우기 위해 시의회의 권세를 활용하여 제네바 시민들로 하여금 신앙고백서에 서명하게 함으로써 출교(수찬정지)를 실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통치에 있어서 잘못된 교리나 견해가 육적 통치의 사회적 범죄보다 더 심각할 수 있었다. 

결론 

칼뱅의 초기 서간문들을 읽으면서 우연히 동아시아의 인식 사유에서 분석해보려던 필자의 시도는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 것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와지고 기독교인으로 우리는 서양문명에 탐닉되어 있을 수 있다. 칼뱅의 목회와 성경해석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고 또 우리 신학의 정체성과 관련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모조리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이미 “역사적 칼뱅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도 시도되고 있거니와, 향후 50년 동아시아의 개혁신학의 미래를 생각할 때 개혁신학의 기원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한국의 많은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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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mage de Calvin daprès la correspondance de Th. de Bèze, Dissertation de DEA(1984)..

(2) “칼뱅의 삼중 이미지”, 칼뱅탄생500주년기념발표(2009).

(3) 물론 “역사적 칼뱅 연구”라는 이름으로 시도된 일련의 저술들에도 여전히 저자의 주관성이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4) 일례로, 김흡영, “존 칼빈과 이퇴계의 인간론에 관한 비교연구”, in <도의 신학>, 다산글방, 2000, 231-291.

(5)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8(COR, VI/I, 66)..

(6)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1(COR, VI/I, 41).

(7)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5(COR, VI/I, 53)..

(8)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9(COR, VI/I, 58).

(9)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11(COR, VI/I, 73)..

(10)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12(COR, VI/I, 83).

(11)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7(COR, VI/I, 61), <칼뱅작품선집> I, 2..

(12) <칼뱅작품선집> I, 16.

(13) Heiko A. Oberman, Initia Calvini: The Matrix of Calvins Reformation, Amsterdam, 1991.

(14)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15(COR, VI/I, 89)..

(15)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17(COR, VI/I, 97)..

(16) 딱 두 군데에서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이교 작가의 사례를 든다. <칼뱅작품선집> II, 102, 140.

(17)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18(COR, VI/I, 102-103)..

(18)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21(COR, VI/I, 123), <칼뱅작품선집> II, 43.

(19) <칼뱅 서간집> I권 부록 1(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estienne/1541, 2008).

(20) 일례로 츠빙글리

(21)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7(COR, VI/I, 60), <칼뱅작품선집> I, 8.

(22) 테오도르 드 베즈는 이렇게 말한다. (칼뱅의) 부친은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는 인물이어서, 주변 영주들의 가문에서 필요로 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아들은, 어쨌든 부친의 희생의 대가로, 보다 낫고 자유스럽게 몽모르 가문의 자녀들과 어울려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공부하기위해 그들과 동행했다”(<칼뱅의 여호수아서 주석> “서문”, 제네바, 1565).

(23)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7(COR, VI/I, 61), <칼뱅작품선집> I, 7..

(24) <칼뱅작품선집> I, 서론 참고..

(25) 칼뱅은 프랑수아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개혁 진영의 목회자이 대열에 합류하기를 은근히 권했다(<칼뱅 서간집> I권 서신 24; COR, VI/I, 135).

(26)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26(COR, VI/I, 147). Colloquia ereximus per Christum.

(27)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37(COR, VI/I, 212).

(28) Consistorium. 독일어로는 Chorgericht 또는 Ehegericht라고 불리는 감독치리회는 베른에서 1528 5월에 설립되었다. 위원은 시의회에서 2, 시민 가운데서 2, 그리고 목사 2명 등 총 6명으로 구성되었고, 주로 월, , 금요일 오전 설교 직후 모였다(COR).

(29)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36(COR, VI/I, 205).             

(30)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32(COR, VI/I, 188).

(31)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33(COR, VI/I, 192).

 

(32)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28(COR, VI/I, 151); <칼뱅작품선집> II, 200.

(33)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42, 43(COR, VI/I, 244, 247).

(34)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50(COR, VI/I, 287)..

(35)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56(COR, VI/I, 330).

(36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74(COR, VI/I, 421). parvo ministeriolo.

(37) 4축일은 성탄절, 그리스도 할례제(1.1), 성 수태고지제(3.25), 그리스도 승천제(부활절후 40일째 되는 목요일)이다<칼뱅 서간집> I권 서신 63(COR, VI/I, 373)..

(38)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64(COR, VI/I, 463)..

(39) 남경태, <역사>, 2011..

(40)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한 대격변을 밤낮으로 보고 있다"(<군주론>, 25)

(41)로널드 김상근, <마키아벨리>, 21세기북스, 2013, 231 재인용.

(42) 김상근, <마키아벨리>, 24..

(43) 참고문헌: 풍우란, <중국철학사>, /, 까치, 1999; 이중톈, <백가쟁명>, 에버리치홀딩스, 2010; 신동준, <한비자>, 인간사랑, 2012.

(44)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51(COR, VI/I, 294-295). 부처와 카피토가 비텐베르크 일치를 종용하기 위해 참석한 1537년 가을 대회synod에서, 부처는 메간더의 성찬 이론에 대해 공격했다. 토론 중 메간더는 자신의 Catechismus에서 밝힌 입장을 비텐베르크 일치에 맞게 고칠 의향을 보였고 대회가 끝난 뒤 부처는 그 작업을 도왔다. 메간더는 현저히 바뀐 자신의 입장에 불만을 품고 시의회에 호소했으나 오히려 12 24일 공직을 박탈당하고 베른에서 추방당해 취리히로 갔다(1538 2월 초)(COR).

(45)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58(COR, VI/I, 336-337).

(46)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38(COR, VI/I, 216)..

(47)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30, 31(COR, VI/I, 174, 181)..

(48)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68(COR, VI/I, 390-391). 세 사람의 이름은 Jacques Bernard, Henri de la Mare, Jean Morand이며, 나머지 한사람인 Antoine Marcourt는 비교적 우호적으로 평가된다(서신 87).

(49)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78(COR, VI/I, 437).

(50)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83(CO, Xb, 249; Herminjard, V, 115)..

(51)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76(COR, VI/I, 429)..

(52)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87(CO, Xb, 262; Herminjard, V, 149)..

(53) Jean Cadier, Calvin: lhomme que Dieu a dompté, Paris, 1958.

(54) 칼뱅의 첫 주석은 <로마서 주석>(1540)이고 남아있는 첫 설교는 <예레미야 설교>(1549)이다.

(55) 칼뱅은 묵상méditer을 말하기parler와 동일하게 여긴다(시편 119 4번째 설교[CO, XXXII, 517]참고).

(56) Cf. Wiliam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th Century Portrait, Oxford, 1988; Denis Crouzet, Jean Calvin: Vies parallèles, Paris, Fayard, 2000.

(57) Bouwsma Two Calvin 이론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58)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50(COR, VI/I, 285).

(59) 훗날 테오도르 드 베즈(베자) <위정자의 권한>이란 글에서 상당량의 이런 사례들을 모아 국가의 종교적 이념의 정당성을 입증한다(박건택, <종교개혁사상선집>, 솔로몬, 2009 참고).

(60) 일례로, “아사 시대에 언약은 동일한 법에 의해 인준되고, 환호성과 함께, 큰 목소리로 그리고 피리와 나팔소리로, 온 힘을 다 해 맹세되었습니다[대하 15:14](COR, VI/I, 287).

(61)칼뱅과 파렐은 재세례파 전염병이 개혁파 도시에 퍼지는 것을 염려했다(<칼뱅 서간집> I권 서신 82, 83[Herminjard, V, 109, 115]).

(62) “교회의 자유에 속한 아무래도 좋은 문제”(<칼뱅 서간집> I권 서신 64[COR, VI/I, 463]).

(63)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61, 63(COR, VI/I, 364, 373).

(64) 일례로 오늘날 “여성 목사 안수”의 문제도 각 교단의 목회적 해석으로 결정된다.

(65)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85(Herminjard, V, 126).

(66)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87(Herminjard, V, 149).

(67) 박건택, <칼뱅의 자유사상>, 솔로몬, 2013, 228-248 참고.

(68) 박건택, “자성적 칼뱅주의”, 신학지남, 2012/, 참고.

(69) 남경태, 위의 책.

(70) <칼뱅 서간집> I권 서신 50(COR, VI/I, 284-285).

(71) <1541 교회법규>(<칼뱅작품선집> III권 참고). 이렇게 아직은 형태가 없는 교회에서 확실한 개혁교회의 형태로 만들어질 때까지(기독교강요의 초판에서 최종판까지) 칼뱅이 생각한 교회의 역할에는 변함이 없다.

(72) 교회설립시안은 이것 외에도 찬송과 혼례 문제를 다룬다(<칼뱅 서간집> I권 서신 29[COR, VI/I,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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