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준관 명예총장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I. 서론적 논거

저는 오늘 하나의 ‘고전’(classic)에서 주제의 실마리를 찾고자 합니다. 1955년 출판된 작은 책 하나가 당시 미국 종교계를 크게 뒤흔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책명은 “Protestant, Catholic, Jew”, 저자는 Will Herberg, 그는 유대인이면서 Drew 대학교 교수였습니다. “Turn to religion”Î, ‘Î종교로 회귀하는 시대’라는 서두에서 Herberg은 놀라운 통계 하나를 소개합니다. 

“1950년 당시 미국인의 95%가 종교인이었다. 그중에 개신교인이 68%, 가톨릭인이 23%, 유대인이 4%였다.”(p.46) 

전 인구의 95%가 종교인이라는 충격적인 통계는 미국 종교의 영원성을 말하는 듯하였습니다. 특히 전인구 대비 68%를 차지한 미국 개신교회는 이 지상에 거대한 왕국을 건설하고 전 세계를 기독교화 하는 주역이 되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2012년(바로 지난해) 미국 종교사회학계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리포트를 내놓았습니다. 2043년을 기점으로 미국 개신교회는 18%로 추락할 것이라는 예고였습니다. 30년 뒤 미국 개신교회는 전인구 대비 50%의 신자를 잃게 된다는 뜻입니다. 미국 개신교는 더 이상 majority가 아닌, marginality 즉,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 종교사회학계는 미국을 파고드는 ‘세속주의’(secularism), 이슬람과 토착종파의 성장, 그리고 젊은이와 지식인들 속에 퍼져 가는 ‘spiritual but not religious’(종교는 거부하고 스스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로 표현되는 지표들을 쇠퇴의 주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틈새에 제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든 영감 하나가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classic속에 숨어있던 낯설은 idiom이었습니다. 그 고전은 Dutch신학자, Hendrik Kraemer가 쓴 “A Theology of the Laity”(l958년)(평신도신학)였습니다. Kraemer는 자신의 책에서 Will Herberg의 책, p.2를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지금 미국은 전례 없는 교회 부흥 시대에 돌입하였다... 나는 Will Herberg의 “Protestant, Catholic, Jew”를 인용한다... 1949년에서 1953년 사이 미국의 성경 보급률은 140% 증가하였다... 연평균 1,000만 권의 성경이 팔렸다. 그리고 미국 성인 4/5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믿었다. (문학작품이 아니라)... 그러나 기독교인의 53%가 신약성경 처음 4복음서의 이름 하나도 답하지 못하였다.”(p.103)  

바로 이 대목을 들어 Kraemer는 미국 기독교는 지금 깊은 ‘영적 문맹’(spiritual illiteracy)이라는 수렁에 빠져 있다(p.103)고 꼬집었습니다.

“영적 문맹!”극히 평범한 네 글자, 그러나 이 언어가 담고 있는 음률은 극에 달한 종교적 황금기 속에 이미 밑으로 스며든 소멸의 바이러스를 알리는 경고음 같은 것이었습니다.

“Î영적 문맹”Î이라는 짧은 언어! 그것은 ‘세속주의적 종교성-religiousness in a secularist framework’(p.103)의 이름으로 신자들을 오랜 세월 ‘무지’속에 묶어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거기에는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목회는 실패했다는 의미입니다. 미국교회는 이 소리에 귀를 귀울여야 했습니다.

‘영적 문맹!’혹시 이 네 글자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묻고 또 미래를 풀어가는 ‘idiom’은 아닌가? 여기서부터 조심스런 여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Ⅱ. 오늘의 한국기독교

한목협이 내놓은 야심작, “한국기독교 분석리포트”- ‘2013년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보고서’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역사적 자료이고 또 공헌입니다. 이 리포트는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들을 그 속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방대한 자료를 survey한 제 소박한 결론은 ‘역설적’입니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비관적이라는 여러 통계와 지표 앞에서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목회자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 ‘교인들의 배타성’, ‘헌금 강요’, ‘교회확장주의’로 요약되는 부정적 이미지로부터 저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 목회자 모두가 져야 할 일차적 책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 이면에는 아직 70%가 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고 있든지, 노력하고 있다’는 진솔한 신앙고백 앞에서 저는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그것은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남겨두신 ‘남은 자’, 마지막 영적 에너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그루터기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여기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부정’(교회의 위기)과 ‘긍정’(그리스도인들의 헌신)사이, ‘갈림길’ 혹은 ‘juxtaposition’으로 표현되는 이 둘 사이에는 ‘영적 에너지’와 ‘영적 문맹’이 교묘하게 얽히면서 ‘혼재’하고 있는 하나의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수면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영적 문맹’은 수시로 영적 에너지를 타고 ‘거룩’으로 둔갑하곤 합니다.

한국교회 저변에 지금도 강력히 흐르는 기복신앙이 그것이고, 축복과 번영신학이 그것이며, 교회 정치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없는 평신도 운동이 그것입니다. 환언하면, 우리는 거룩의 이름으로 마지막 남은 영적 에너지마저 계속 신자들을 ‘영적 문맹’으로 매몰해가는 ‘거룩한 범죄’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어떤 외적 이유와 원인보다도 이 ‘영적 문맹’이 한국교회를 위협하는 가장 두려운 내면의 위기인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보다 심각한 문제 하나가 더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영적 에너지’와 ‘영적 문맹’사이의 역설적 상황을 풀어나갈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더욱이 이 둘 사이를 이어줄 그 어떤 목회 신학적 패러다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program들은 우리 주변에 즐비하지만, 그것들이 ‘영적 문맹’과 ‘영적 에너지’사이를 매개하는 패러다임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고 각종 대형 집회들이 이 두 사이를 이어 주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번 연구에서도 한국교회 미래를 마치 ‘사회봉사’(diakonia - 고아원, 양로원, 장애인, 지역아동센터, 노숙자care, 환경운동, 탁아소등)에 내맡기는 듯한 통계자료는 솔직히 저를 많이 괴롭혔습니다.

사회봉사(diakonia)는 교회의 소중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영적 문맹’의 해결 없는 diakonia가 답은 아닌 듯합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diakonia는 살아있는 교회 공동체의 존재 양식이며 사역일 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새로 피선된 로마교황 Francis는 그의 즉위 첫 강론 (homily)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선단체나 NGO는 될 수 있어도 우리는 교회가 아니다.” 

이 짧은 한 마디가 지구촌 3억의 가톨릭교회 교인과 전 세계를 조용히 뒤흔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 한목협 연구에서 표출된 또 하나의 제언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영적 에너지’와 ‘영적 문맹’사이를 이어가는 길은 목회자의 ‘영성 회복’, ‘도덕성 회복’, ‘성스러움의 회복’에 있다는 제언이었습니다.

이 제언은 소중하고 절실한 접근이기는 하나 제게는 그리 설득력 있는 것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영적 에너지’와 ‘영적 문맹’사이는 목회자의 도덕성, 윤리성, 거룩성으로 매개할 수 있는 ‘개인적 차원’(personal)(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의 것이 아니라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자칫 지난날 범해온 ‘성직 범례(clerical paradigm)의 반복 내지는 도덕주의적 범례(moralistic paradigm)에 빠질 위험성을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III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국교회 이야기’를 집약해 보겠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아직 소멸되지 아니한 한국교회 신자들이 품고 있는 순수하고 거룩한 ‘영적 에너지’와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영적 문맹’사이를 어떻게 매개하여 ‘영적 파워’로, 공동체적 파워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의 출현을 절실하게 기다리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III. 그렇다면 ‘누가’ 그리고 ‘무엇’이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를 ‘영적문맹’으로 만들었는가?

A. 그 일차적 책임은 놀랍게도 신학 교육에 있었습니다.

문제 접근을 위해 저는 잠시 Joseph Hugh와 John Cobb이 “Christian Identity and Theological Education”(기독교적 정체성과 신학교육)에서 제기한 문제를 논거의 근거로 삼고저 합니다.

신학 교육은 17세기 초, ‘스승’(the master)으로서의 목사 양성에 목적을 두고 커리큘럼을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목회학’이라는 ‘네개의 틀’(fourfold pattern)을 설정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학교육의 처음 pattern이었습니다.

그러나 1740년을 기점으로 폭발한 미국의 ‘대각성 운동’(the Great Awakening)과 함께 급격히 부상한 ‘설교자’(pulpiteer) 혹은 ‘부흥사’(revivalist)로서의 목사상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스승으로서의 목사상을 목적으로 해온 신학 교육은 이 변화에도 fourfold pattern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신학 교육과 목사상 사이의 공백과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초 새로운 목사상은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을 하는 builder, 세우는 자로 변형되었습니다. 그러나 신학 교육은 이때에도 fourfold pattern의 교육 과정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신학 교육과 목회자상 사이는 점점 더 벌어졌습니다.

300여 년 간 신학 교육은 급격히 변화되는 목회 환경과 목사상을 향해 어떤 의미의 신학적 기초도, 방향도 제시 못하는 ‘게토’(ghetto) 집단으로 고립되어 왔습니다.

바로 이때 그러나 최초로 날카로운 비판과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Yale대학의 H. Richard Niebuhr 교수였습니다. 그의 유명한 책, “ÎThe Purpose of the Church and Its Ministry”Î에서 Niebuhr는 최초로 잘못 가고 있는 신학 교육을 향해 날카로운 메스를 가했습니다. 

“신학교 커리큘럼은... 수많은 과목들을 계속 첨가(addition)해 갔으나... 거기에는 ‘통일성’(unity - p.99)도 ‘방향성’Î(sense of direction - p.99)도 없었으며, 오히려 갈등만 초래하였다.(p.99) 그 결과 신학교육과 교회 그리고 목회 사이에는 갈등 그리고 경쟁관계만이 남게 되었다.(p.101)” 

이어 Niebuhr는 미래 목회자상을 “the pastoral director”(목회적 지휘자, p.79)로 정의하면서, 신학 교육의 동시적 변화를 강력히 촉구하였습니다. Pastoral director로서의 목사는 목회를 통하여 교회와 신자를 ‘하나님의 백성’(a people of God)으로 세우는 자이며, 동시에 그들로 지역 공동체(local community)와 세계를 섬기도록 ‘세우는 자’(edification)라고 했습니다.(p.82)

이 짧은 글은 대단히 중요한 key words를 담고 있습니다.

1. 목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는 부르심의 자리,

2. 신자는 ‘영적 문맹’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Laos Tou Theou),

3. 하나님의 백성은 ‘지역 사회’와 ‘세계’를 섬기는 자들,

4. 목회자는 신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고, 그들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목회신학자가 아닌 윤리학자가 이미 위기의 징조를 몸에 지닌 미국교회, 목회 그리고 신학 교육을 ‘하나님의 백성’사상 안에 집약하고, 그것을 미국교회의 미래로 제시한 신학적 통찰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Niebuhr의 제언은 하나의 논쟁거리로 외면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미국 신학교와 미국교회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이 틈새에 목회자상은 급격히 ‘치유자’(Therapist) 또는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Henri Nouwen)로 선회하였습니다. 각광 속에 등장한 ‘목회상담학’은 fourfold pattern의 또 하나의 ‘첨가물’(addition)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미국 신학 교육은 ‘기능주의’(functionalism)에 빠졌으며(Donald Messer), ‘교회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로(영적 문맹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음.), 그리고 신학교는 ‘반교회주의’(antiecclesiaticism)로 전락하였습니다.(Niebuhr, p.107) 10년 안에 미국 주류 신학대학원의 30%가 폐교될 것이라는 예고는 우리를 큰 비애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지금도 미국 신학 교육의 영향 속에 있는 한국 신학 교육이 미국의 실패의 흐름까지도 그대로 되풀이 하고 있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내재합니다. 특별히 교회를 반지성주의로 몰고 온 신학 교육은 한국교회를 위기로 몰아넣은 ‘영적 문맹’의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신학 교육에 몸담아온 저 자신을 향해 던지는 자기비판입니다.

B. 그러나 미국교회와 한국교회를 ‘영적 문맹’으로 만들어 온 또 다른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여 오늘의 한국교회 문제는 목회자 ‘수’의 결핍도, ‘학위’의 부족에도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회자’도, ‘학위’도 넘쳐 나는데 있습니다. (1년에 배출되는 신학교 졸업생은 6,00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작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회’는 ‘목회자’가 하는 ‘전문직’(professional)이라는 일명 ‘성직 범례’(clerical paradigm)에 있습니다. 이 논제는 이미 고인이 된 James Hopewell이 남긴 유고, ‘A Congregational Paradigm for Theological Education’에서 제기된 첨예한 신학적 issue였습니다.(p.1)

‘목회’는 목회자가 하는 것이라는 clerical paradigm의 특성은 신자를 목회의 ‘대상’(objects)으로 전락시키는 치명적 오류를 동반합니다(Kraemer, p.19). 목회의 대상인 신자 또는 평신도는 연쇄적으로 ‘비인격화’되고 또 ‘객체화’되어 항상 no body로 전락해 왔습니다.

여기서 평신도는, 신자는 ‘주체’(subjects)됨이 거부되면서, ‘영적 문맹’으로 추락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Kraemer, p.19)

이번 조사에서 부각된 한국교회의 위기가 목회자의 부정적 image에 기인하고 있다는 보고는 자못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 원인을 목회자의 도덕성 내지는 윤리성에서 찾는 접근은 극히 피상적인 듯 합니다.

오히려 한국교회의 위기는 오랜 세월 ‘목회’라는 이름으로 신자들을 목회의 대상으로 객체화해온, 그래서 평신도를 ‘병신도’로, ‘영적 문맹’으로 무력화해온 ‘우민목회’, 성직 패러다임에 있다고 해석해 봅니다. 이것이 clerical paradigm이 범하기 쉬운 ‘Î목회의 함정’Î입니다.

Ⅳ. 한국교회 미래

한국교회의 미래는 존재하는가?

이 거대한 물음 앞에 감히 정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 자신이 이 물음 앞에 해답자는 아닙니다. 다만 오늘의 신학 교육과 교회 그리고 목회의 실패를 통회하는 짧은 글 하나가 해결의 미래를 열어 갈수 있는 실타래처럼 제게는 영감으로 다가왔습니다. 

“1809년 William Rainy Harper가 던진 충고 한마디, ‘신학교는 교회론에서 출발해라’라고 한 말을 신학 교육이 성실히 따랐더라면, 오늘의 미국교회는 이토록 비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Joseph Hugh, John Cobb, p.17, 의역) 

이것은 Joseph Hugh와 John Cobb이 쏟아낸 작은 절규지만, 그 절규는 무서운 암시 하나를 담고 있었습니다. ‘교회론에서 출발하였다면’이라는 암시였습니다.

교회론에서 출발하는 신학 교육 그리고 목회!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하나님 백성 공동체에서 출발하고,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목적으로 하는 신학 교육, 목회라는 뜻이었습니다.1) 여기서 신학 교육은 하나님 백성인 ‘Î교회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 백성인 교회를 위한’신학 교육일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1) 구약은 출애굽사건 에서 출현한 이스라엘공동체(하나님백성)의 이야기라면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신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고,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공동체 (하나님백성)이야기라는 점에서 공동체 주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지금도 전세계 신학교가 한 결 같이 고집하는 fourfold pattern curriculum도 하나님 백성 공동체인 교회론적 차원에서 재구성되었다면 그 내용도, 결과도 달리 했을 것입니다.

학자형 목사, the master도 소중하지만 교회론에서 출발하는 목회자는 ‘Î하나님의 백성’Î을 세우는 목회, 그리고 그들로 지역 공동체와 세계를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는 pastoral director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오늘 여기에 Niebuhr의 충고가 절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상에서 논의한 모든 논거들을 묶어 감히 한국교회 미래를, 목회자와 목회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자 합니다.

1. 첫째로 한국교회의 미래는 교회론에 근거한 신학 교육의 재편이라는 project를 한국교회의 긴급한 과제로 제언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project는 단순한 커리큘럼의 재편이나 과목의 Î나열’또는 ‘첨가’(addition)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신학교육의 철학과 목적 진술’, ‘교육 시스템의 분석과 재설정’, ‘커리큘럼의 재구조화’, ‘교수 방법’, ‘신학생의 수급’그리고 ‘미래 교회 사역’, 특히 ‘team ministry’까지를 포괄하는 system approach이어야 할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하나님 백성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에서 다시 출발하는 6만여 한국교회의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교회론의 신학과 존재 이유 그리고 존재 양식에서 한 교회 한 교회가 위임된 존재이유와 존재 양식을 찾아나가는 치열한 신학적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정체성과 역할마저 ‘Î역기능’속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과도하리만큼 기능주의와 성공신화에 매달려 있습니다. 유명하다는 program에 끌려다니는 노예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program은 하나님 백성 공동체와 신앙 그리고 선교의 표현 양식이어야 합니다. 신자들을 ‘영적 문맹’으로 묶어 놓고 이런저런 program으로 문맹들을 이리저리 끌고 가는 오류를 이제는 중단해야 합니다.

한목협 같은 순수하고도 미래 지향적인 기관이 신학대학교들과의 협력을 통해 단기적으로 또는 장기적으로 ‘교회의 신학적 근거’, ‘교회의 존재론Î, ‘교회의 구조’, ‘교회의 사역’을 심도 있게 추구하는 신학 Forum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담임목회자들의 교회론 이해는 대단히 시급한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3. 세 번째는 하나님 백성 공동체인 교회론에서 ‘목회’, 특별히 ‘목회자’의 정체성을 다시 설정하는 ministerial paradigm의 전환입니다.

교회론에서 다시 출발하는 목회(ministry)와 목사론(minister)은 목회는 목사가 하는 것이라는 소위 ‘성직 범례’(clerical paradigm)을 과감히 넘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회는 목사이기 전에 교회의 ‘종말론적’, ‘역사적’, ‘선교적’소명에서 오는 하나님의 위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론에서 시작하는 목회는 ‘교회 공동체’에 위임된 ‘직’(office)을 의미하며, 목사는 ‘안수’를 통하여 그 직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은 목회자입니다. 그러기에 목회가 목회자이고, 목회자가 목회라는도식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사는 목회라는 거룩한 ‘직’에 부름 받은 ‘의로워진 죄인’(justified sinner)입니다. 이것은 Martin Luther의 천재적인 신학적 발상이고 또 해석이었습니다.

그럼으로 목회는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에 위임된 직을 수행하고 또 만인제사장인 성도들을 세워 그들로 그들의 사역(일반사역 - general ministry)를 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오늘 목회자의 ‘탈진’, ‘좌절’그리고 ‘이탈’의 악순환은 목회는 목사가 한다는 clerical paradigm에 기인합니다. 생존의 문제, 경제 문제, 교단 정치 문제, 개척교회의 한계 등이 젊은 목회자들을 정신적 공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 이때, 그럴수록 목회의 방향을 교회론에서, 특별히 공동체 사역론에서 다시 찾는 전환이 절실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신학적으로 다시 세우는(생활비 보조 못지않은) Platform이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판단됩니다.

제 짧은 경험에 비추어 오늘 우리의 자랑스런 목회자들이 program에 기웃거리지 않고 과감히 교회론적-목회신학적 패러다임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 그리고 공동체 사역으로 향할 수만 있다면, 이 작은 전환은 ‘영적 문맹’을 Niebuhr가 그토록 절규했던 ‘하나님의 백성’(People of God)으로 변화시키는 종말론적 통로(eschatological channel)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목회자, 그 미래는 여기서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4. 끝으로 하나님백성공동체인 교회론에서 다시 시작하는 한국교회는 교회론에서 평신도의 신학적 위치와 평신도 사역을 다시 찾는 일에 모험을 걸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마지막 보루는 아직 소멸되지 않은 1,000만을 헤아리는 평신도의 영적 잠재력입니다. 목회가 더 이상 평신도를 ‘영적 문맹’으로 묶어두는 ‘우민목회’를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성서는 처음부터 평신도를 ‘하나님의 백성’(Laos Tou Theou)로 호칭합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의 관계로 초대된 ‘거룩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세상의 아픔을 대변하는 ‘제사장 나라’, 세계 속에서의 사역을 위임받은 사역자들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servant leader들이었습니다.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는 마지막 선택은 영적 문맹으로 전락한 우리의 신자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되돌려 놓아야 하는 종말론적 결단에 있다고 믿습니다.

모름지기 한국교회의 마지막 선한 싸움은 평신도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고, 그들로 세계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는 사역자가 되게 하는데 있는 듯합니다. 다만 평신도신학이 전제되는 평신도 사역이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어떤 방법과 형식으로든지 평신도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평신도 사역자로 다시 세우는 교회 연합적인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것이 소망이기도 합니다. 

V. 결론에 부치는 몇 말씀

“초대교회는 산상수훈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부활하심을 선포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Bernhard W. Anderson이 그의 작은 책, The Unfolding Drama of the Bible(p.85)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그 본질에 있어서 도덕, 윤리적 종교가 아니다 라는 선언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함정에서 벗어나야합니다. 한국교회는 신앙을 도덕으로 둔갑하여 그것을 마치 신앙인 것처럼 위장해온 근본적인 오류를 넘어서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비밀을 기억하고, 죽음을 삼키고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사신 하나님의 생명을 호흡하는 생명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러한 부활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에서 아직 살아있는 신학 교육이, 제3교회로서의 6만여 한국교회의 구조가, 헌신된 7만여 목사와 목회의 자리 그리고 1,000만을 헤아리는 평신도의 자리와 사역을 되살려내는 하나님의 때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한목협이 이 거룩한 소명에 부름 받은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하심과 인도하심이 한목협의 선교적 소명을 품어주시기 기도합니다. 그리고 미래를 고민하시는 목사님들은 이 땅에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창조적 소수’입니다. 목사님들로 인하여 내일을 기다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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