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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신학자 버미글리와 푸티우스의 개혁신앙제5회 개혁신앙 세미나 열어

6월 17일(월),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세움교회(예장 합신, 담임 정요석 목사)에서 16세기 종교개혁 신학자인 피터 마터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 1499-1562)와 17세기 개혁교회 신학자인 기스베르투스 푸티우스(Gisbertus Voetius, 1589-1676)를 다루는 세미나가 열렸다. 종교개혁과 이후 개혁파 신앙에 열정을 가진 목회자 및 신학자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개혁신앙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고 있는 이 세미나는 16-17세기 개혁 신앙에 영향을 준 주요 인물과 신학을 다룸으로써 오늘날 교회의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황대우 교수(고신대학교 교양학부, 개혁주의학술원 책임학술위원)가 “기스베르투스 푸티우스의 생애와 신학”, 김진흥 교수(고신대학교 교양학부, 온생명교회 협동목사)가 “피터 마터 버미글리의 개혁파 성찬론 옹호”라는 제하의 발표를 하였다. 

   
▲ 예배를 인도하는 권형록 목사
발표에 앞서 진행된 예배에서 권형록 목사(푸른교회, 예장 합신)는 에스겔 11:14-21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권 목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지키고자 하는 뜻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언약을 행하시고 정해진 백성들을 이끌어가신다. 비록 연약하고 때로 비천해 보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고 하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교회”라고 덧붙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종교개혁의 유산을 오늘날 성도들이 잘 계승할 필요가 있음을 권면하였다. 

이후 이남규 교수(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의 사회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황대우 교수와 김진흥 교수의 발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기스베르투스 푸티우스의 생애와 신학 / 황대우 교수 

   
▲ 기스베르투스 푸티우스의 생애와 신학에 대해 발표하는 황대우 교수
17세기 개혁교회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신학자 푸티우스는 이름이 생소할 정도로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다. 1589년 3월 3일에 훼스든(Heusden)에서 태어난 푸티우스는 매우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푸티우스는 선천적으로 똑똑했으며 부모님과 스승, 목회자의 영향을 받아 경건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했다. 1604년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레이던(Leiden)에 간 푸티우스는 1607년까지 신학 예비 과목들을 공부하였다. 이 때 국립학교 학감이자 정통주의자였던 요아네스 쿠클리누스(Joannes Kuchlinus)의 열심을 배우게 된다. 1607년 5월 8일에 신학 본과 수업을 시작한 푸티우스는 변증학에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여 여러 철학 교수들이 철학으로 학위논문을 작성하기를 권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푸티우스는 이를 거절하였다. 푸티우스는 실천적인 수업과 순교 역사, 그리고 금욕적인 도서들을 좋아했으며 기타, 플롯, 오르간 등 악기를 즐겼다. 

푸티우스에게 평생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호마루스(Gomarus)였다. 교리에 대한 입장에서 푸티우스는 호마루스의 입장을 지지했다. 또한 히브리서를 가르치는 호마루스 덕분에 푸티우스는 동양 언어, 즉 중동 언어에 천착하는 등 오랜 기간 언어 연구에 매진하였다. 호마루스 덕분에 푸티우스는 칼빈주의적 교리를 정통적인 것으로 수용하였다. 당시 아르미니우스주의자였던 학감 베르티우스와 심한 갈등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신학 공부를 마치고 1611년에 졸업하였다. 

당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푸티우스는 여러 교회에서 힘겹게 사역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푸티우스의 학구열은 식지 않아 여름과 겨울에는 4시에 기상하여 하루의 시간을 연구와 사역으로 구분하여 사용했다. 푸티우스는 1618-1619년 지역노회의 대표로 도르트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후 푸티우스는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확립하고 고수하는 일에 큰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 평가된다. 

1634년 6월 푸티우스는 위트레흐트(Utrecht)에 세워진 광명학교에서 히브리어와 동양 언어를 가르치는 신학교수로 청빙받았다. 푸티우스가 교수 취임식 때 한 연설문 제목은 “학문과 연결되어야만 하는 경건에 관한 연설”이다. 푸티우스는 신학교수 뿐만 아니라 목사로서의 사역도 겸하였다. 교수 시절에 푸티우스가 남긴 대표적인 저술은 <신학 백과사전>, <신학논쟁선집>, <경건훈련>, <교회법> 등이다. 1673년 11월 23일, 설교 도중 쓰러진 푸티우스는 이후 설교사역을 중단하고 회복한 이후 학장직만 수행하였다. 이후 1676년 10월 7일, 한 논쟁서 작성을 위해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다가 다시 쓰러진 푸티우스는 회복하지 못하고 1676년 11월 1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푸티우스는 대표적인 17세기 스콜라주의 개혁파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 푸티우스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학문과 경건의 통합'이다. 이것은 신학을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한 교리’로 정리한 아메시우스(Amesius)에게서도 발견된다. 다만 아메시우스가 신학의 무게 중심을 개인의 영적 삶에 두는 반면, 지식과 학문을 강조하는 푸티우스에게 신학의 무게 중심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계시에 놓여 있다. 푸티우스는 신학을 ‘신지식’으로 정의했다. 신지식은 첫째,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 연합으로, 둘째, 보는 것, 즉 환상의 은혜(gratia visionis)로, 셋째, 자연 신학과 초자연 신학으로서의 계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푸티우스는 철학을 하나님의 창조산물의 사역으로 여겼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존중했으며, 신학자에게 형이상학과 논리학은 목수의 연장이나 군인의 무기 같은 도구로 간주된다고 보았다. 

푸티우스의 생애에 항변파와의 논쟁, 얀세니우스와의 논쟁 등 주요 논쟁이 있다. 논쟁 중에서 특별히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René Descartes)와의 논쟁이 유명하다. 푸티우스에게는 데카르트의 ‘의심을 통한 진리 증명 방식’이 객관적 진리의 근거인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한다고 보고 이를 거부하였다. 또한 개혁파 언약신학자인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ius)와의 대립도 유명하다. 신약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이전의 모든 것은 그림자로서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본 코케이우스와는 달리, 푸티우스는 구약을 지나간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신약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가치와 효력을 지닌 하나님 말씀으로 주장하였다. 

푸티우스에게 있어 경건의 열매와 교회치리, 윤리, 금욕과 같은 주제들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신학적 주제였다. 또한 십계명을 신자의 삶과 교회 현장에 적용하는 문제는 푸티우스의 최고 관심사였다. <금욕, 혹은 경건의 훈련>은 푸티우스의 실천신학적 특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푸티우스는 ‘금욕’을 “신학적 교리, 혹은 경건 실천의 방법과 서술을 내포하고 있는 신학의 한 분과”로 정의한다. 금욕은 단순히 신자의 개인의 경건훈련이라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적 경건훈련을 의미한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아는 객관적 지식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주관주의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의 한 몸인 전체 교회를 중시한다. 그러면서도 푸티우스는 경건의 개인적 측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정리하면, 17세기 네덜란드 개혁 신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푸티우스는 신학을 단순히 학교의 전유물로서의 학문으로 간주하지 않고 반드시 경건, 즉 신앙적인 삶과 결합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칼빈과 청교도의 실천신학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개혁파 스콜라주의로 대변되는 푸티우스의 신학방법론은 신학 자체에 영향을 미쳐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의 신학을 계승하는 측면과 동시에 다른 모습도 나타났다. 

피터 마터 버미글리와 개혁주의 성찬론 옹호 / 김진흥 교수 

   
▲ 피터 마터 버미글리와 개혁주의 성찬론 옹호에 대해 발표하는 김진흥 교수
버미글리는 1499년 9월 8일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본적인 라틴어 교육을 받고 1514년 피에솔레에 있는 산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에 입문하였다.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회에 가입하고 4년 후에 정식으로 수도사 서원을 하고 ‘피터 마터’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후 8년 동안 그는 같은 종단 소속의 산 지오반니 데 베르다라 수도원에서 지내며 인근의 파두아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 시기는 버미글리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 형성기로 평가된다. 토마스주의적 스콜라주의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신학적 토론에 아주 뛰어난 능력을 나타내었다. 또한 소속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저녁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의 저서를 읽고 깊이 연구하였다. 그리스어를 독학으로 배우기도 했다. 교부적 지식, 토마스주의적 스콜라주의, 인문주의 사상이 버미글리의 사상적 배경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525년 파두아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서품된 이후 1531-1533년간 볼로냐의 수도원장 대리(vicar)를 역임하면서 구약 성경에 대한 깊은 관심에 의해 히브리어를 연구하였다. 

1537년 4월에 나폴리의 산 피에트로아드 아람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된 이후, 버미글리는 한 인문주의자 서클에서 알프스 이북의 개신교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접하고 이신칭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 카톨릭 내에서 도덕적 개혁과 교리적 개혁운동을 주도하던 와중 여러 계기로 인해 진로에 대한 결정적인 시기를 맞게 되고 1542년에 개혁파 개신교 교회로 망명하였다. 버미글리는 취리히와 바젤을 거쳐 스트라스부르크에 도착하였고 부서(Martin Bucer)의 지지에 의해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가 되었다. 1547년 11월에 크랜머(Thomas Cranmer)의 초청을 받아 영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3월 옥스퍼드의 레기우스 신학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영국 종교개혁 진행에 공헌하였다. 1553년 10월에 다시 스트라스부르크로 돌아와 신학교수직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성만찬 논쟁으로 인해 곤경을 겪다가 1556년 취리히로 가게 된다. 취리히 시기(1556-1562)는 버미글리의 인생에 가장 평안한 시기였으며, 버미글리는 강의와 집필에 몰두할 수 있었다. 1562년 11월 12일에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갔다. 

버미글리와 관련한 성만찬 논의는 천주교 논박 및 루터와 츠빙글리에 대한 평가, 루터파 신학자인 브렌츠(Johannes Brenz) 논박 등 주로 개혁파 성만찬론에 대한 논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중에 브렌츠와의 논의가 중요하다. 브렌츠는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설을 주장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키릴루스(Cyrillus),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논의를 빌려 자신을 변호한다. 이에 대해 버미글리는 브렌츠의 교부 인용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브렌츠는 교부들을 자의적이고 편파적으로 인용하여 결과적으로 교부의 의도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교부 문헌의 전문가인 버미글리는 브렌츠가 언급하는 내용의 원 저작을 정확히 인용하고 해석하여 브렌츠의 교부 인용이 실제로는 자신의 논지와는 반대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스칼리거(Scaliger)의 평가에 의하면, “피터 마터는 궤변론자들과 논쟁하면서 궤변론자 자신이 사용하는 그 궤변을 이용하여 궤변론자들을 물리쳤다.” 칼빈은 버미글리의 성만찬 견해에 대해 “완벽한 견해”라고 평가하였으며 교부에 있어서 버미글리의 권위를 깊이 인정하였다. 

종교개혁은 교부의 신학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회복할 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버미글리의 개혁주의 성만찬 옹호에서 나타난 중요한 원리는 오직 성경의 원리다. 버미글리에게 있어 모든 절대적인 기준들에 상수로 존재하는 유일한 요소는 성경이다. ‘오직’(sola)이라는 말은 궁극적인 권위로서의 성경 및 성경의 권위에 근거한 여타 권위들을 말한다. 버미글리의 성만찬 옹호는 오늘날 교회에 성경적 은혜의 방도인 성례의 의의를 회복할 필요성,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의 통전성에 대한 이해 제고, 성경의 교훈에 따라 교회의 유산을 오늘날의 형편에 맞게 적용하는 것의 필요성 등의 함의를 제공한다. 

개혁신학의 끝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다.
발표가 끝나고 이어진 토론시간에는 16세기와 17세기의 차이, 개혁주의 신학의 끝 등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발표 때 다룬 인물들에 대한 보론의 요청이 있었다. 황대우 교수는 “당장 명확하게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비유를 들자면 같은 쌀을 어떻게 정제하느냐의 차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17세기의 계속해서 세분화하는 방식이 설명을 한다는 면에서는 용이하지만 세분화된 내용을 다 모아 놓고 보았을 때 이것이 개혁신학을 잘 설명하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 때가 있다”고 답변하였다. 아울러 “16세기와 17세기 신학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가운데 연속성이 훨씬 강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연속되는 큰 흐름 속에서 각 지류들의 흐름은 다르다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진흥 교수는 “종교개혁자들은 개혁주의 신학의 끝이 어디인지를 잘 알았다. 오직 은혜나 오직 성경은 일종의 수단이다. 그 끝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다. 사톨레토가 제네바로 보낸 편지에 대한 칼빈의 반박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는 대답을 통해 개혁신학의 최종 목표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왜 버미글리는 칼빈만큼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김진흥 교수는 “사실 20세기 들어 바르트(Karl Barth)가 칼빈을 언급하기 전까지 칼빈도 거의 잊혀진 인물이었다. 칼빈이 버미글리에 비해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칼빈은 한 지역의 리더였고 버미글리는 한 지역의 리더인 불링거를 도운 조력자였기 때문에 돋보이는 정도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사회를 맡은 이남규 교수는 “당시의 개혁자 사이에서는 버미글리의 영향력이 지대했고 많은 개혁자들의 사상의 전환에 영향을 미쳤다”고, 황대우 교수는 “사실 역사적으로 칼빈의 활용도는 17세기 이후로 줄어든다. 칼빈의 이름이 드러난 것은 17-19세기에 존재했던 ‘칼빈주의’라는 이름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온라인에서 활성화된 자발적 개혁신앙 모임 

   
▲ 단체사진
이 개혁신앙 세미나는 학술원 등의 기관에서 주최하는 것이 아닌, 개혁신앙에 열정이 있는 목회자, 신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모임이고 온라인 활동(주로 페이스북)을 통하여 홍보가 되어 목회자, 비목회자를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졌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함께 시편찬송을 부르는 시간도 가졌다. 서로 사는 지역이나 소속 교회는 다르지만 신앙을 나누며 상호 간 교제가 발생하는 모습을 통해, 같은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이 성도의 동질감과 친밀감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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