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진 목사 /부평시민교회

 

신학이란 학문의 한 분야이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서 신지식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성경을 통하여서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를 체계화한 것입니다. 신학은 성경 해석의 문제입니다. 성경의 바른 해석과 바른 체계화가 바른 신학을 결정합니다.

신학은 교회됨의 이론적인 바탕이며 토대입니다. 신학과 무관한 교회됨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교회됨은 이론적인 영역만 아니라 실천적인 영역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데, 실천적인 영역은 이론적인 영역을 바탕으로 결정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신학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신학의 자리가 없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론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 지성주의입니다. 지성을 너무 앞세우면서 감정과 의지를 약화시켰던 지난 교회 역사에 대한 반발입니다. 하나님을 앎이란 전인격적인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고 지성주의를 추구했던 교회 역사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의지가 뒤따르지 않았고 체험은 약화되었던 시대입니다. 그에 대한 바른 개혁은 각 영역을 함께 강화시키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은 형편입니다. 체험을 강조하고 의지를 강조하면서 반 지성주의로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체험이나 의지의 강조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반 지성주의와 함께 흘러가는 것은 잘못된 현상입니다. 신학 사랑이란 지성과 체험 그리고 의지를 함께 강조하며 제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론적인 영역에 바탕을 두지 않는 실천적인 영역이 난무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됨의 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 제대로 된 이론적인 바탕이 매우 취약합니다. 많은 경우에 수적인 성장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면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과연 성경적인가?”라는 깊은 고민과 치열한 검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적이지 않은 것은 언제나 하나의 운동과 같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여러 가지 문제를 남기고 사라져갈 뿐입니다. 외형적인 성장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고 보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많은 교회가 총동원전도주일을 실시합니다. 한 날을 정하고 성도들이 주위의 불신자들을 예배당으로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초청을 받아 오는 불신자들에게 주는 선물이 함께 합니다. 그리고 식사를 아주 멋들어지게 준비하여 대접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경품까지 내걸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경로당의 어르신들이 단골 고객(?)이신데, 어느 교회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는 나름대로 순위까지 매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 주에는 이 교회, 다음 주에는 저 교회를 찾아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돌아오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날에 다른 시간대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총동원전도주일의 실시에 있어서 성경적인 근거로는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총동원전도주일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실천인가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한 이들이 사도들입니다. 실천에 있어서 구체적인 모습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총동원전도주일과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불신자들을 찾아가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나타내기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복음 전파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교회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발에 티끌을 털어버리고 옮겨갔습니다. 믿을 것을 애걸하지 않고 당당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날 교회의 총동원전도주일의 이론적 근거로 제시될 만한 요소는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먼저 복음을 바르게 누리고 보여주면서 전하여야 합니다. 사도들의 이적 행함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복음에 합당한 모습을 통하여 복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연결되어집니다. 총동원전도주일은 복음을 보여주기보다는 훼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너무도 값비싸서 우리 편에서 대가를 지불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총동원전도주일의 행태는 복음을 천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복음과 그 값어치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는 물질을 선물로 끼워 넣고서는 불신자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선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번 들어주자는 마음으로 예배당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의 발걸음에 감사하며 감격하고 무엇인가를 해낸 것 같이 여깁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때, 많을 때는 가슴 뿌듯하게 여깁니다만 성경의 원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모습입니다.

총동원전도주일 시행의 중심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복음을 전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함이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그렇지만 중심이 바르다고 방법이 다 용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든지 만들지 말라는 2계명은 우상숭배에 대한 금지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당대의 다른 민족들이 신을 섬기는 방법과의 차별화입니다. 아무리 중심이 바르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현대 교회에게 신학의 자리가 없다는 것은 아주 큰 문제입니다. 한 신실한 집사님께 “제가 학교 다닐 때에는 성경을 깊이 아는 일에 아주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과목은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그 외의 과목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대뜸 “목사님은 목회에 관심이 없으셨네요”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목회를 바르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바르고 깊이 아는 일에 열심을 내었는데, 그것이 목회에 무관심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기에는 목사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주의와 수고가 없이 양적 성장만 앞세우는 행태가 낳은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말씀 사역자로서 바르게 깊이 있게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기보다는 경영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 경영을 위한 리더십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의 바르고 깊은 이해를 위한 연구는 약화되고 경영에 관한 수고는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목회가 사람을 세워가는 일이기에 상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목사가 공부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것이 성경 연구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성경 연구는 설교를 위한 방편으로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럴 때에도 아주 피상적인 경우가 많으며 아예 주석을 참고하는 등의 연구가 없이 설교를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목회의 가장 핵심이 말씀 연구에 기초한 말씀 봉사인데 현대에는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말씀 연구를 통한 바르고 깊이 있는 말씀 봉사가 목회의 핵심으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 외의 부분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세워 사역을 하도록 하면 됩니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분야를 목사가 감당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사역의 질이 떨어질 여지가 많습니다. 사역 분담을 통하여 각각의 사역에 있어서 질적인 향상을 꾀하여야 합니다. 목사는 바른 신학의 토대를 굳건히 하고 그 위에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온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바르게 세워가기 위하여 신학을 사랑하 여야 합니다.

목회방의 신학 배너의 황창기 목사님의 글에 대한 조회가 적은 것도 동일한 맥락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어서 그렇다면 제가 전적으로 잘못 생각한 것일 뿐이기에 미리 사과를 드립니다. 신학 부재가 아니라 신학 사랑의 터 위에 굳건하게 세워지는 교회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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