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찰스 2세(1630-1685)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1649년 그의 아버지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그는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 찰스 2세로 선포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의 언약파를 탄압했던 인물인데, 그는 왕으로 취임하면서 천주교도 성공회도 반대하고 장로교 전통을 굳게 지키고 따르겠다는 서약, 곧 ‘엄숙동맹과 서약’에 서명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도 후에 처음 약속을 어기고 선왕처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인 언약파를 탄압했다.

당시 영국의 복잡한 정치 현실에서 조숙했고, 때로는 냉소적이며, 때로는 독선적이었고, 국가를 뒤로하고 쾌락을 추구하기도 했다하여 그는 ‘메리왕’(Mary Monarch)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소위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그가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1660년 5월 25일 도버(Dover)에 상륙하여 곧 런던으로 입성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그런데 왕으로 취임하던 그해에 그는 해외 식민지 위원회는 기독교적 가르침을 따라 영국 식민지의 원주민들과 하인들, 그리고 노예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노예들이나 하인들에게는 무식이 덕이었고, 그것이 신분체제를 굳혀가는데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즉위 원년에 이런 칙령을 발표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이런 칙령은 의외의 결단이었다.

그의 칙령은 즉각적인 반대에 직면했다. 영국의 노예 소유자들은 찰스의 칙령에 동의할 수 없었다. 노예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예들에게 성경만을 읽게 한다면 사회적 유대를 강화할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성경이 위에 있는 권위자에게 복종하라고만 가르치지 않고 권위자에게 공갈을 그치라고 했으니 노예들이 문자를 알게 되면 언젠가는 노예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자를 알게 되면 성경만 읽는 것이 아니라 노예폐지론자들의 글도 읽게 되고, 사회변혁에 대한 글도 접하게 되면 노예제도 존립 자체가 위협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노예소유자들은 노예들이 반항과 자유라는 개념을 깨우치게 되면 혁명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찰스의 칙령에 대한 반대는 미국에서 가장 강경했고, 그 중에서도 사우스 캐롤라이나주가 가장 격렬했다. 이곳에서는 이로부터 1세기 후에 모든 흑인들에게는 그가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글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법령이 선포되기까지 했다.

이런 현실에서 글 읽기를 배우려했던 흑인 노예들의 무용담은 앎을 향한 처절한 투쟁을 보여준다. 그들은 문자를 터득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철자를 익히려다 들키면 거반 죽기까지 채찍을 맞았고, 미국 남부에서는 단순히 글자를 배우거나 가르친다는 이유로 교수형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흑인 노예였던 데니엘 다우디는 이렇게 썼다. “글을 읽거나 쓰다가 들키면 처음에는 소가죽 채찍으로 맞지만 두 번째에는 끝에 매듭을 단 아홉 가닥의 줄의 채찍이 떨어졌고 세 번째는 손가락 마디를 잘랐다”고 회고했다. 어떤 이는 성경을 읽는 주인 몰래 훔친 성경으로 글자를 익히려다가 얼마나 맞았는지 지식을 향한 갈증을 완전히 상실했고 무지를 운명으로 여겼다고 했다.

노예 소유주가 크리스천이라면 다를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미국 남부에서의 노예제도의 성격을 이해한다면 노예가 글자를 익히는 것은 제일의 금기사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시대이든 압제자들은 휘하의 사람들이 무지하기를 원했다. 문(文)의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형국에서도 글자를 배웠다는 것은 앎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컸던 가를 보여준다. 처절할 정도의 수난의 위험을 이기고 문자를 터득하고 후일 작가가 되었고, 또 노예해방운동가가 된 사람 중이가 바로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 1817-1895)였다. 흑인 노예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출생한 그는 길거리에서 어린 아이들의 도움으로 문자를 익혔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머니와는 어릴 때 생이별했다. 8살 때부터 볼티모어의 휴올드 집안의 하인으로 일했다. 주인이 죽자 16살 때는 농장에서 일했다. 후에는 볼티모어애서 선원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1833년에는 다른 3명의 노예와 함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5년 뒤에 다시 탈출하였고, 이때 노예잡이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더글러스로 성을 바꿨다.

이런 여정 속에서 그는 작가가 되었고, 노예해방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노예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도록 허용한다면 노예제도 자체가 위협 받을 것이라는 우려는 사실이었다. 문자를 익혔던 더글러스가 바로 그런 혁명가의 길을 간 인물이었다. 그는 1841년 매사추세츠 주 낸터킷에서 열린 노예제 반대 집회에서 노예제도를 통렬하고 비판했다. 그는 이때부터 야유와 조롱, 모욕과 폭력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노예폐지운동에 헌신했다.

그의 언변은 탁월했다. 그처럼 말 잘하는 이가 노예였을 가능성이 없다고 의심하자 그는 자신의 삶의 이력을 쓰기로 작정했다. 자서전은 1845년 기록되었으나 1882년 <프레데릭 더글러스의 생애와 시대>(Life and times of Frederick Douglass)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이 자서전은 미국 문학의 고전이 되었고, 노예의 입장에서서 노예제의 실상을 고발하는 중요한 문서가 되었다.

1847~60년에는 뉴욕 로체스터에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North Star 라는 제호의 신문을 창간했다. 남북전쟁 기간(1861~65)에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자문위원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이전의 노예들을 북군으로 무장시켜 노예제에 반대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부의 주들이 미합중국으로 재통합되던 기간(1865~77)에는 해방 노예의 완전한 시민권 획득을 위해 투쟁했으며 여성의 권익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후일 그는 아이티 주재 미국 공사 겸 총영사(1889~91)로 임명되기도 했다.

더글러스와 비슷한 여정을 간 또 한사람의 노예가 영국 선교사가 된 토마스 존슨(Thomas Johnson)이었다. 이와 같은 노예출신의 인물이 배출된 것은 어쩌면 죽음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위험 속에서도 글자를 익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자와 글의 힘은 <가공할만한 독서의 위험성에 관하여>라는 볼테르의 풍자적 소책자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책은 무지와 조직화된 경찰국가의 감시와 호위마저도 사라지게 만든다.”라고 적고 있다. 책은 독재자에게는 맹독(猛毒)이다. 문맹과 무지는 가장 다스리기 쉬운 집단으로 남아 있게 만든다. 그래서 압제자들은 차선책으로 독서의 범위를 제한하거나 아예 책을 불태움으로서 책에의 접근을 제한했다. 그것이 금서(禁書) 조치 혹은 분서(焚書)였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