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11주일(29,30문) 설교문

기획 의도

올해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탄생한지 4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그래서 한국 장로 교회도 관심을 가지고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 대한 논의를 합니다합신측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아니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도 표준 문서로 취급합니다작성자로 알려진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의 고향에 목회한 교회당에서는 전시회도 열리고 있고하이델베르그의 성령 교회당에서도 전시회가 진행됩니다여러 세미나들이 한국에서도 열렸습니다이런 관심에서 개혁파 신조 중에 하나인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어떤 성격의 글이며 어떤 구조로 되어 있고한국장로교회가 어떻게 수용할  있을 지를 논의하려고 합니다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글의 제목과 필진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구위원장 이세령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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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근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요리문답 교육

[이세령] 교회에서의 하이델 베르그 요리문답 이해

 

읽을 본문: 1:18-25; 2:1-11 

29: 왜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곧 구주라 부릅니까?

: 그가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고,또 그분 외에는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아서도 안 되며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30: 그렇다면 자신의 구원과 복을 소위 성인에게서, 혹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데서 찾는 사람들도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 아닙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말로는 자랑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합니다. 예수가 완전한 구주가 아니든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이 구주를 영접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서 찾든지, 둘 중의 하나만 사실입니다.

▲ 안재경 목사 온생명교회담임 코닷연구위원

1980년 예루살렘 남쪽지역인 탈피요트(Talpiot) 지역에서 한 동굴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동굴 안에는 10개의 관이 있었습니다. 그 중 6개의 관에 비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요셉, 요셉의 아들 예수, 2명의 마리아, 마태, 예수의 아들 유다의 이름이 그것들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들이 아닙니까? 그 이름들 때문에 그 동굴이 예수님의 가족무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겼습니다. 이 무덤이 만약 예수님의 가족 묘지였다고 가정한다면 마리아 중 한 명은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키며, 예수의 아들 유다는 예수님이 아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를 연상시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발견은 고고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뿌리로부터 뒤흔들어 놓을 세기의 발견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장에 대해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비문에 새겨진 이름들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장 흔하게 사용하던 이름들입니다. 예를 들면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여인들 중 25% 정도가 미리암이나 그와 비슷한 이름들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1세기의 한 편지에 보면 예수라는 어떤 사람이 다른 예수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 편지 안에 제 삼자인 또 다른 예수에 관해 증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금방 언급되었던 이름들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흔히 사용되던 이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너무나 흔한 이름이었지만 그 이름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둘째로, 예수는 교회를 인도하는 이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예수는 죄인과 교회와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이름입니다.

1. 예수, 죄인을 구원하는 이름

마태복음 118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우리는 행복에 부풀었을 한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무너진 다윗의 가문출신인 요셉이라는 유대의 한 청년이 마리아라는 처녀와 약혼했습니다.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약혼자 마리아의 배가 불러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내의 부정을 폭로하지 않고 가만히 덮어 버리기로 작정합니다. 이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말합니다. 약혼자 마리아 데려오기를 겁내지 말라고 합니다.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마리아가 임신했는데 성령께서 임신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씨가 마리아의 태에 착상했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천사가 하는 말이 아들을 낳게 되면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고 합니다. 천사가 작명까지 해 주었습니다. 이 이름은 헬라적인 이름인데 히브리어로는 우리가 잘 아는 여호수아가 바로 그 이름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1:21). 이렇게 해서 요셉이 약혼자 마리아를 데리고 왔습니다. 요셉은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상기시키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9문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곧 구주라 부릅니까?” 라고 묻고는 답하기를 그가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고, 또 그 분 외에는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아서도 안 되며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라고 부르는 것은 그 분이 유일하신 구주라는 의미입니다. 그 분 외에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 없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이미 예수가 있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예수는 우리가 잘 아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정복전쟁을 진두지휘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 정착을 베풀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이후의 역사를 보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누리기는커녕 궁지로 내몰립니다. 완전히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에 의해 구석으로 내몰립니다. 다윗 때에 가서야 이방민족들의 등쌀로부터 겨우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나마 안식을 누립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완전한 안식을 주었다면 또 다른 안식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다른 여호수아를 기대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의 여호수아로, 아니 마지막 여호수아로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줄 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귀신을 내어 좇아 주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마술사나 의원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그 죄로 인해 당하는 모든 불행으로부터 건져주시는 분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표적으로, 즉 사인으로 보지 못하는 이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주시는 분입니다. 한국교회만큼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교회도 드물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수많은 치유의 기적들을 지금도 일으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죄를 해결해 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받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위대한 마술사로 둔갑했고, 예수님은 훌륭한 도덕적인 선생으로 둔갑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사실 교회에서 죄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고 할 것입니다. 교회에 가면 지겹도록 고장난 축음기처럼 죄라는 소리, 죄인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말입니다.

교회는 이미지 쇄신을 위해 죄라는 용어를 마사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죄가 결핍, 소외 등의 용어로 바뀌고 있습니다. 용서가 치유, 회복 등의 말로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결핍된 자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용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회복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종교용어만 늘어놓는 교회는 이제 더 이상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신자가 교회에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자는 당신은 죄인이다, 당신은 예수님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복음을 듣기 위해 교회 갑니다. 이 말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힐링의 말로 넘쳐나지만 교회에서는 오직 예수님으로 인한 죄사함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죄인을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죄사함은 오직 예수라는 이름에 있습니다.

2. 예수, 교회를 인도하는 이름

요셉의 꿈속에 나타난 천사는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누구를 구원하느냐 할 때에 자기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백성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한 백성의 구원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시는 구속사역이 인류를 일일이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한 백성의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백성의 구원자입니다.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후에는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유대 민족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백성이라는 용어는 세상 모든 민족과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제사제도며 직분자를 주셔서 구원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 하나의 민족이요, 나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친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다시금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천사들을 붙들어 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건져내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2장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신 것은 자기 백성의 형제가 되기 위함입니다. 이제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불러모으십니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받을 때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입니다. 이제 유대인의 특권은 사라졌습니다. 유대인이라고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안다면 유대인들은 교회를 너무나 부러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자기 백성인 교회를 다스리는 왕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다스림은 개인주의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과 다스림은 집단적인 것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나타났던 대규모의 집단개종 같은 것은 결코 복음적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군종목사 생활을 했는데 군대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집단세례식도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만 5년동안 신병교육대만 돌아다니다 보니 거의 만 명 가까운 신병들에게 세례를 준 것 같습니다. 그들 중 몇 명이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세례받은 그들이 다 제가 섬기는 교회 교인들이 되었다면 저희 교회는 한국교회에서 제법 큰 교회 중에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시므로 우리에게 죄사함과 구원을 주십니다. 구원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 친척 중에 한 분은 제 어머니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면 누나가 천국 올라갈 때 제가 누나 발 붙잡고 갈 겁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조차도 개인주의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맺는 관계가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구원을 위해 교회가 걸림돌이 될 때는 교회를 쉽게 떠납니다. 교회는 오직 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때에만 필요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새로운 한 백성, 즉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인 교회에 속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개인을 구원하는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인 교회를 다스리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자동적으로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인도하고 다스립니다.

사도신경 해설 바로 직전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1문에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라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답의 마지막 문장이 다음과 같습니다. “곧 순전히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나에게도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다른 사람에게도 주신 죄사함을 나에게도 주심을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먼저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신 것을 나에게도 주신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나는 홀로가 아닙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서 가면서 나의 구원도 이루어집니다. 고립되어 있을 때 우리는 구원을 상실합니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목회자가 성도의 교제에서 소외되기 쉽습니다. 교회가 문제가 많아서 혼자 신앙생활해 보겠다고 교회를 떠날 때 구원을 상실합니다. 다른 성도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면서 나의 구원도 확인합니다. 나 자신을 아무리 골똘히 들여다 보아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다른 성도가 고난가운데서도 인내하며 주를 바라보는 것을 보면서 그 성도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구원이 나에게도 주어지겠구나 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속할 때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고 든든합니다. 고대 교부들이 말했듯이 교회를 떠나서 구원이 없다는 말을 우리는 신중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3. 예수, 하나님을 대표하는 이름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는 태어날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가문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지을 근거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이 이름을 지을 이유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1:23)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유다의 왕 아하스에게 주신 예언입니다. 북왕조 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하여 유다를 쳐 내려 왔는데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해도 이하스는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답답하셔서 징조를 구해 보라고 해도 아하스는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징조가 바로 이것입니다. 유다의 어떤 처자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으라고 합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군사력이 아니라 핏덩이 같은 한 아이의 출생을 통해 자기 백성의 구원을 보증하셨습니다.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는 바로 이 징조가 지금 마리아의 태에 잉태하여 태어날 아들에게 성취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야말로 임마누엘인 아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구히 함께 하기 위한 아기입니다. 이 아기는 하나님이신 아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라는 이름이 구원자의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임마누엘을 가리키는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인간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빌립보서 2장 말씀에 보면 서로 자기가 높다고 다투는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이 예수님에 관해 언급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지극히 낮추신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했는데 이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아지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무슨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히 예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이제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경배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이름이 전설적이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흥미있는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모든 무릎이 그 발 아래 꿇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 땅에 있는 자들,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우리는 이 표현이 십계명의 제2계명을 본뜬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2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들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게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형상도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기에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비춰주는 유일한 형상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어색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유일한 우상입니다.

우리 외에도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일신 종교들도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르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유대교인들이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을 불러도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모슬렘들이 아무리 알라를 불러도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표주자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부르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은 죄인을 구원하는 이름이요, 교회를 인도하는 이름이요, 하나님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입니까?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이라는 찬양의 가사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이름에, 이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습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30문답은 예수라는 이름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구원과 복을 소위 성인에게서, 혹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데서 찾는 사람들도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중세 로마 교회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완전한 구주로 믿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도 유효합니다. 개혁했다고 하는 우리 고신 교회와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답을 잘 들어 보십시오. “아닙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말로는 자랑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합니다. 예수가 완전한 구주가 아니든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이 구주를 영접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서 찾든지, 둘 중의 하나만 사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말로는 자랑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유일하고 완전한 구주라면 우리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신학교는 중세의 성인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는 탁월하고 능력 있는 목사를 배출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신자는 중세 교회가 빠졌던 공로사상처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경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내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중세교회의 면벌부처럼 헌금만 많이 하면 하나님의 마음도 얼마든지 돌려놓을 수 있다고 호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개혁은 단순합니다. 개혁은 다름아닌 예수라는 이름을 새롭게 붙잡는 것입니다. 개혁은 다른 이름을 구하고 않고 오직 예수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예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걸어두고 있습니다. 벽에 박힌 못이나 옷걸이에 너무 많은 것을 걸어두면 그 못이나 옷걸이가 상하여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 위에 걸어놓았던 모든 것이 다 바닥에 떨어집니다. 이것처럼 예수님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 사업을 할 때도 위험요소는 되도록이면 분산시켜 놓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데요. 기독교가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어두는 것이 안전할까요, 지혜로운 일일까요? 예수님이 무너지면 기독교는 그냥 무너져 내려 앉을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어두어도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는 구세주, 교회를 인도하는 왕, 하나님을 대표하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9문답의 증거 구절이기도 하고, 저희 교회 예배에서 사죄선언 구절로 사용하는 히브리서 724, 25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죄인입니다. 저희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은혜와 교회를 인도해 주실 모든 은사를 예수의 이름을 통해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직 말씀속에 오직 예수가 있는 것을 보게 하옵소서. ‘오직 은혜오직 예수로부터 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오직 믿음의 내용은 오직 예수임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오직 예수로부터 출발함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어리석은 저희들을 도우사 예수님 안에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길어내게 하시고, 저희들의 구원을 완성시켜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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