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유광 박사 /고려신학대학원장 지난 5월31일 12시에 고려신학대학원(현유광 원장) 강당에서 설교실습실 개관기념행사가 있었다. 1부에서는 현유광 원장의 인도로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윤희구(창원한빛교회) 동창회장이 기도하고 김상수 목사(안양일심교회)가 ‘설교자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 설교하는 김상수 목사 /안양일심교회
김 목사는 “먼저 설교실습실을 갖게 되어 자부심을 가지며 훌륭한 설교자들이 배출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설교는 죽은 자를 살리고, 영의 사람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7가지 자세로는 영의사람, 헌신하는 자세, 열정, 영적능력, 삶과 설교의 일치, 현장에 맞는 메시지, 설교기량 등이 필요하다. 이에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전하여질 때 생명의 씨앗이 자라게 된다” 고 말씀을 전하였다.

  

▲ 설교실습실 개관예배를 드리고 있다. 2부에서는 김순성 교수(교무처장)의 사회로 개관식 및 개관 커팅식을 가졌다. 김순성 교수는 경과보고에서 “고려신학대학원에서는 21세기 급변하는 목회 현장 속에서 설교능력을 배양하고 설교실습을 통한 탁월성을 확보하며, 현장 목회자들의 설교클리닉운영을 목적으로 설교 실습실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 일을 위해 지난해 12월에 설교실습실 설치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2007년 3월에 칸막이 공사가 마무리 되고, 5월20일에 시스템 설치 및 인테리어 공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 일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하고 설교실습실 설치를 위해 창원한빛교회, 성안교회, 안양일심교회, 송도제일교회, 안양신일교회, 하나교회, 장형배목사, 울산교회, 온천교회가 참여하였다. 설교실습실은 1억2천만을 들여 도서관 4층에 80평 규모로 개인 실습실 3개소와 20-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 4개를 갖추고 있다. 설교실습실은 한국에서 2번째이지만 시설에서는 단연 앞선 첨단의 설비가 갖추어져있다. 설교실습실을 로고스 설교훈련원으로 명칭하고 신학생들의 설교실습과목을 비롯한 설교클리릭 센터 운영을 통한 목회자 고급과정 및 목회자 연장교육에 활용함은 물론 강의를 녹화하여 학교홈페이지에 제공할 계획을 밝히며 많은 기대가 된다” 고 말했다. 이어 후원교회에 감사의 선물증정과 김국호 이사장의 축사가 있었다. ▲ 개관 테이프를 끊는 관계자들
축사에서 김 이사장은 “설교실습실, 기도실 등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발전하는 신대원을 보게 된다. 설교실습실을 위해 물질로 후원해주신 교회와 목사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설교실습실을 통해 설교임상실험이 이루어져 훌륭한 설교전문가들이 배출되고 신대원이 보수신학의 중심이 되고 개혁주의의 산실이 되며 정통성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교단신학의 근간을,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고 축하했다. 이어 후원교회 목사, 신학위원회 임원, 신대원장 및 보직교수, 원우회장 등이 모여 커팅식을 가졌다.

  

점심식사 후 3부에서는 ‘한국교회 설교의 현실과 대안’이라는 주제로 개관기념세미나를 가졌다. 두 명의 발제자와 3명의 패널과 청중이 참여하는 세미나였는데, 상당한 관심과 열기가 있었다. 먼저 발제하고 그 내용을 패널들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 세미나 강사로 나온 정용섭원장과 류응렬교수
첫 번째 발제자: 정용섭 원장

                서울신대원 졸

                독일 뮌스터대학교

                계명대학교(Ph. D)

                대구성서 아카데미 원장

        저 서:속빈설교와 꽉 찬 설교, 설교와 선동사이에서 등

제목: 한국교회의 설교의 현실과 대안

발제내용 요약(발제한 내용은 실제 발제한 내용과 소책자에서 기자가 읽고 보완하여 요약함)


-청중인가 성서텍스트인가?

현대 설교학의 주요 관심은 청중을 어떻게 설교 행위 안으로 끌어들이는가에 놓여있다. 전통적 설교는 청중들의 실제적인 삶과 영적인 상황을 간과한 채 기독교교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전통적 설교가 청중과의 소통에 장애를 일으키는 이유는 청중의 눈높이를 무시한다는 사실보다는 훨씬 근원적인 사태에 놓여 있다. 그것은 설교자가 계시사건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태다. 설교자가 성서와 하나님의 통치와 그 구원현실에 눈을 떴다면 그는 자기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그의 경험과 인식이 영적인 지평에 속한 것이기만 하다면 청중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청중들의 영혼과 대화가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허공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대상을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선포된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설교행위에서 청중중심이 아니라 계시사건, 언어사건, 구원사건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오늘의 설교학이 제시하는 청중중심주의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복음은 상품이 되고 말았다. 설교는 그 상품을 포장하는 기술로 전락했다. 청중은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삶에만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설교자는 민중들의 이런 속성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전통적 설교의 대안으로 등장한 현대적 감각의 위로설교는 세속적인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필요한 것을 공급하겠다는 일종의 상품논리이자 대중추수주의와 다르지 않다. 대중들의 욕구에만 눈높이를 맞춤으로써 결국 복음의 역동성과 날카로움을 순치시키고 만다는 위험성이 숨어 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설교만이 가장 거룩한 행위라 할 수 있는 예배자체가 볼거리를 제공하는 쇼가 되고 말았다. 열린예배는 극도로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에만 영적안테나를 맞추고 있다. 이것은 개인 주관적 은혜만능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


-종교적 여흥

오늘의 한국교회는 종교적 오락을 제공하기에 바쁘다. 온갖 종류의 이벤트와 프로그램이 신앙과 선교라는 명분으로 교회 안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소비자가 왕이다는 경제구호가 설교현장에서도 진리로 통하는 실정이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할 때 청중들을 한번은 웃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설교의 여흥적인 요소를 극대화한 설교자는 대전중문교회 장경동목사이다. 나는 그것을 설교자의 자학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개그맨들이 자신을 학대하고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주는 것과 같다. 오직 청중들의 호응만을 설교평가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온 한국강단에서 장목사의 출현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허무주의 영성이다.


흡사 피에로처럼 연기하고 있는 그는 우리 모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속도와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런 대중주의를 추종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성서텍스트가 담고 있는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생명의 신비에 들어갈 생각은 없이 청중들의 정서와 심리를 읽는 인간론에 매달린다는 것은 결국 설교자의 영적인 촉수가 오로지 청중들에게만 쏠려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말씀이 제공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만이 설교자의 영성이 살아날 수 있는 토대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씀의 세계는 날이 갈수록 축소되고 청중들의 종교적, 또는 통속적인욕구에만 기울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설교자들의 영성은 확보될 수 없다.


-통속과 자기연민

구약의 예언자들이 활동 할 때에도 사이비 예언자들의 선포는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반면에 엘리야와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의 선포는 대중들에게 외면 당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내가 만일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입니다”(갈1:10)

  

이제 설교자들은 청중들에게 그만 아부하고 그들을 그만 닦달하자. 청중을 풀어주자는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성서 텍스트와 영적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설교자는 옆으로 비켜서자. 혹시 우리는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를 볼 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좋든 나쁜 뜻이든 청중들에게만 매달려 있는 것 아닌지. 이건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텍스트로 돌아가자.


-성서 도구주의

대부분의 명망가 설교자들은 성서 텍스트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성서를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경우에도 시늉만 낼 뿐이다. 성서의 가르침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전하는 데만 치우쳐 있다. 그들은 신자들을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성서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성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성서가 일종의 소품처럼 되어버렸다. 한국교회에서 세련된 설교자들도 기본적으로 성서 도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성적이고 세련된 포즈에 그 실상이 가려진 탓으로 다른 이들의 설교보다 더 위험하다.


-성서 텍스트의 침묵

설교가 뭣 대수냐 청중들이 재미있게 듣고 은혜 받으면 좋은 설교가 아닌가하고 생각하는 설교자와 평신도지도자들이 꽤 있다. 성서가 설교행위에서 도구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에 나타나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성서 텍스트의 침묵이다. 성서 텍스트에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통치가 언어 존재론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설교자는 구원의 실체를 모른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이 구원을 이루는 게 아니라 성서가 그 길을 갈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일뿐이다. 성서텍스트는 일종의 기보다. 설교자는 그 안에 은폐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도록 길을 내는 사람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그 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관심도 없고, 다만 청중들을 종교적으로 위로하거나 재미를 주는 것에 만족한다.

-교회력으로 돌아가자

개 교회주의와 교회 성장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현재의 목회구조가 설교자들로 하여금 설교의 신학적 영성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만들며, 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설교자들이 이런 신학적영성의 경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푸는 길을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하겠지만 쉽게 생각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미 교회의 전통이 그 길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 전통은 교회력과 예전이다. 특히 설교에 관해서는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와 설교전문을 일정한 수준에 올라선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작성하고 그것을 개별 설교자들이 섬기는 교회의 형편에 맞도록 활용하는 방식이 최선이다.


두 번째 발제자: 류응렬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신대학원

               Gordon-Conwell 신학대학원(구약성경신학 Th. M)

               Southern Baptist 신학대학원(설교학, Ph. D)

               총신대 교수

제목: 한국교회의 말씀회복을 위한 개혁주의 강해설교의 나아가야할 방향


A. 들어가는 말

1. 한국교회의 위기를 바라보며

세계 10대 대형교회 가운데 절반이 한국에 있고 선교사파송 2위국이 바로 한국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화려한 현상을 잠시 덮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실체를 만난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의 선호도는 4위다. 1위 불교, 2위 카톨릭, 3위 무교, 그리고 마지막이 기독교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복음에 합당한 삶의 부재, 구령사역의 쇠퇴, 교회안의 양극화 현상, 담임목사직의 세습문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신학 등, 여러 면에서 원인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위기의 주요원인은 강단의 위기, 즉 설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교회의 생명은 설교와 직결되고 교회의 부흥은 말씀의 회복과 직결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될 때 건강한 교회와 기독교는 탄생된다.


2. 한국교회의 설교의 세 가지 위험성

1)한국교회의 강당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의 자리에 점점 사람의 경험 또는 이야기가 차지한다. 본문을 설명하는 대신에 감동적인 이야기로 강단을 장식하고 있다. 예화가 설교의 중요한 수단으로 등장하고 감동적인 예화가 있으면 본문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도 교인의 가슴에 메시지를 남긴다는 것이다.


2)한국교회의 강단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설교대신에 점점 고양된 삶의 윤리와 철학이 자리한다. 기독교의 설교의 핵심은 구원과 성화를 가능하게 하시는 예수님이 자리해야한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기독교 설교의 선택이 아니라 기독교 설교를 결정짓는 핵심이다. 오늘날 한국강단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의 자리에 고양된 삶의 윤리가 자리하고, 행복한 삶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차지한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을 누리는 하나의 방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을 향한 값싼 은혜가 예수님이 쏟으신 피의 은혜를 가리고 있다. 기독교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되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인본주의적인 설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3)한국교회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자의 의도를 좇아 전하지 않고 설교자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하고 전하는 것으로 얼룩져 간다.

  

성경적인 설교란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에게 말씀하시는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여 오늘날 청중에게 전하는 것이다. 설교란 오늘날 예수님께서 몸소 이 땅에 계신다면 주어진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그 말씀을 대신 전하는 일이다. 본문에서 시작한 설교는 본문을 설명하고, 본문을 적용하고 ,본문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려야 한다. 설교자는 본문의 통제를 받아야 할 대상이지 본문을 통제할 자격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은 제목설교라는 이름 앞에 본문이 훼손되어 간다. 제목설교란 본문에서 하나의 제목을 끌어낸 후 그 제목에 근거하여 설교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설교를 진행한다. 주어진 주제와 관련된 성경적인 예를 아무리 인용한다 할지라도 본문이 말씀하지 않는 것은 이미 성경적인 설교의 근거를 상실한다.


3. 개혁주의 성경관과 개혁주의 강해설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관점은 모든 신학과 설교의 기본을 이룬다. 성경에 대한 관점이 어떤 설교를 하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개혁주의 신학은 다른 말로 하면 성경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 된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구원의 길과 신앙인의 삶에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리킨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설교자가 처음 가져야 할 자세는 성경에 대한 절대적 권위와 경외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며 변화된 사람을 온전하게 만드는 진리임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개혁주의 설교자를 만드는 첫 요구이다. 개혁주의 강해설교는 성경이 영감 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설교자가 추구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설교라고 생각한다.

4. 강해설교의 신학적 기초

강해설교를 말할 때 먼저 잘못 인식되는 점을 세 가지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강해설교는 한 책을 순서대로 하는 연속설교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둘째, 강해설교는 한 구절씩 주해하는 본문주해 설교와 다르다. 셋째, 강해설교는 여러 가지 설교 형식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어떤 형식을 지닐지라도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파악하여 청중의 변화를 위해 설교하는 것이 강해설교이다. 강해설교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을 가리킨다. 강해설교는 하나님께서 성경저자에게 의도한 본문의 의미를 묵상과 주해를 통하여 바르게 파악하여 성령님이 먼저 설교자 자신에게 적용하게 하시고 청중의 변화를 위하여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설교하는 것이다. 강해설교란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바르게 찾아내어 전하는 설교이다.


B. 개혁주의 강해설교가 나아가야 할 다섯 가지 방향

1.개혁주의 강해설교자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의 기초위에 서야한다.

1) 개혁주의 성경관이 개혁주의 설교를 만든다.

-성경에 관한 잘못된 견해들

  첫째,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하나의 문학적 테스트가 아니다. 둘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담고 있는 거룩한 책이 아니다. 셋째, 성경은 설교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 설교자가 지녀야 할 성경관이 있다.

  첫째, 성경은 영감 된 하나님의 계시다. 둘째,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 셋째,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신다. 


2) 최근 설교학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성경관의 문제다.

  유진 로우리는 “설교자가 더 이상 성경의 진리성이나 권위에 집착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프래드 크래독은 저자의 의도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고 해석학적 중심을 청중에게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결론을 맺게 하는 귀납법적 설교를 주창했다. 또한 데이빗 버트릭도 1세기의 배경 속에 기록된 것이기에 당시의 세계관을 지우는 작업인 탈신화화를 시도할 것을 강조했다. 이상의 세 사람들은 설교가 청중의 가슴에 들려져야 하며 청중의 가슴에 하나의 주관적인 사건의 영역으로 치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설교가 하나님의 주어진 말씀의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하나의 사건으로 해석된다. 인간체험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신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3)성경은 구원과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4)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이것을 인정하는 설교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개혁주의 설교자는 본문의 의미를 자신의 눈으로 지배하지 않는다. 둘째, 개혁주의 설교자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만을 파악하려 하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들려주시고자 하는 목소리를 듣고자한다. 셋째, 하나님이 지금도 본문을 통해 말씀하는 것을 믿는 개혁주의 설교자는 그 말씀을 듣기 위해 기도하게 된다.


2.개혁주의 설교자는 저자의 기록의도에 해석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

1)저자의 의도가 진정한 의미이다

  성경저자의 의도에 해석의 우선적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성경해석의 기준점은 결국 독자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완전히 밝히지는 않을지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알 수 있도록 계시했으며 하나님은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에게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린다.


2)본문만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다.


3)의미란 독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3. 개혁주의 강해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주해와 설교를 진행해야한다.

1) 개혁주의 강해설교는 성경신학에 근거한다.

  그래엄 골즈워디는 “성경신학이란 성경이 전체로서 말하게 하는 것, 즉 구원의 유일한 길에 대해 한 분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것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고 지적했다.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다루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계시의 유기성이다. 둘째, 점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셋째, 예수그리스도의 구속과 연결되어 간다


2) 왜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전해야 하는가?

  첫째, 성경기록의 목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예수그리스도 자신이 구약의 모든 말씀이 바로 자신을 가리킨다고 말씀하신다.


4. 개혁주의 강해설교는 적용을 통해 삶의 변화를 촉구해야한다.

1) 적용이 시작될 때 비로소 설교는 시작된다.  

2) 본문의 말씀과 삶에 적실하게 적용하라

  철저히 본문에 근거하여 설교의 대상인 청중의 삶에 뿌리를 내려야한다.


5. 개혁주의 강해설교는 성령의 역사를 신뢰해야한다.

1) 말씀의 진정한 해석자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이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2)성령이 움직여야 설교가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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