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훈련과 가정교회 운동의 연속성은 유의미하다

# 화란 개혁교회의 구역과 직분

화란에 공부하고 목회 하면서 살다보니 화란 개혁교회의 모습을 직간접으로 들여다 보는 기회가 있었다. 실제로 처음 화란에 왔을 때 아직 이명서를 가지고 오지 않아 성찬 주일이 다가오자 제가 속한 구역의 장로님이 심방을 오셨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온 목사인 저를 향해서 세례가 무엇이며, 성찬이 무엇이며, 언약이 무엇인지를 묻고 설명하는 장로님과 아주 흥미롭게 대화를 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것이 바로 화란의 개혁교회이구나, 장로의 역할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수시로 찾아와서 살펴주며 대화하는 장로님을 만났는가 하면 어떤 분은 전혀 찾아오지 않고 일년에 한번 의무적인 방문에 그치는 것도 보았다.

화란 개혁교회는 20가정이 되는 구역에 두 명의 장로를 배치한다. 그리고 한 명의 집사를 배치한다. 집사의 심방을 받은 적은 없는데, 이는 물질적인 어려움이 없는 어느 정도 평등하며 윤택한 사회를 이루었기에 집사의 고전적인 의미는 많이 퇴색한 현실이다. 그래서 집사의 심방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주변에서 어려운 가정들을 집사들이 심방하여 돕는다는 현실을 듣고 보고, 그리고 주로 교회 연합적인 구제 사업과 선교 사업에 관심하는 것을 볼수 있다.

장로들은 일년에 한번씩은 구역식구들을 심방하도록 시간표를 짜서 진행한다. 두 장로가 함께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때로는 혼자서 오기도 한다. 일년에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 20가정을 심방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개혁 교회에서 장로 지원자가 점점 줄어들어서(직장에서 바쁜 일정과 가정에 대한 소홀 때문에) 구하기 어려운 소리를 듣는다.

장로들과 집사들이 당회를 구성한다. 당회는 소당회와 대당회가 있다. 장로들과 목사만으로 구성되는 치리회는 소당회이고, 안수 집사들이 포함되는 회는 대당회라고 부른다. 거의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모이는 당회가 있는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했다. 밤8시에 시작하면 11시는 보통이고 자정을 넘겨 들어오는 때도 있다는 불평을 듣기도 했다. 실제 심방보다 회의를 하는 시간들이 더 많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물론 그 교회는 문제가 있어서 분열된 교회이긴 하다.

또 구역에는 우리 교회들에 있는 권찰 제도가 있는데, 자매 2명을 권찰(zuster contact)로 세워서 여러 가지 가정사의 일들을 돌보도록 했다. 이것은 실제로 굉장한 힘을 발휘한다. 공적 직분은 아니지만 장로와 집사를 돕는 보조의 임시적 역할이지만 실제로 구역의 어려운 짐을 모두 처리한다. 예를 들어 주부가 아파서 청소를 못하거나 장을 보지 못하면 권찰들이 대신 장을 봐주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주고, 설거지를 해준다. 그리고 또한 부부가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특별한 경우에 아이들을 돌봐주는 일들도 한다.

한 가지 더 개혁교회의 구역 체계가 가진 좋은 전통이 있다. 그것은 성찬식과 관련된 것이다. 성찬식을 하는 주일에는 그날 오후나 저녁에 구역 모임을 가진다. 구역이 많으면 두 파트로 나누어서 모이는 집을 공고한다. 보통 저녁 8시 이후에 모인다. 모여서 서로 성찬에 참여하면서 받은 은혜를 나누거나 아니면 최근에 지내는 교회 생활과 삶을 나눈다. 밤 깊도록 대화를 하는 것을 참여해 보았다. 성찬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주신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듯이 성도들과 서로 삶을 나누고 은사를 나누는 교제의 의미가 담겨있기에 이러한 교제의 장을 구역별로 혹은 구역 안에 그룹으로 진행을 한다.

구역은 개혁교회가 가진 최고의 아름다운 기초인 가정과 더불어서 중요한 구조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한국의 구역 모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매주 모이는 구역 예배라고 불리는 모임은 없다. 당회의 치리적 돌봄의 한 범주로서 구역을 장로와 집사들에게 맡겨서 돌보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화란 개혁교회의 구역 조직에 변화를 끼치고 있는 것이 소그룹 조직의 영향이다. 소위 미니 구역(miniwijk)이라고 구역의 분리 조직이다. 구역을 작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구역 안에 분리된 그룹을 두기도 한다. 목적은 좀 더 활성화된 교제권을 형성하고 돌보기 위한 것이다.

이런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개혁교회의 근본적인 틀이 변화되거나 흔들리지는 않는다. 가정교회에 대한 논의가 화란 교회 전체에서는 논의가 되고 있는 형편이고 정보들이 도입되고 있다. 개혁교회에도 이런 상황이 전달이 되는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한가지 알파코스 혹은 베타코스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이는 식사에 이웃을 초대해서 삶에 중요한 문제들을 질문하고 나누는 모임이다. 물론 코스라는 말에서 몇 주의 기간이 있다. 개혁교회들도 상당히 수용하고 있고 이를 통해서 전도를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것은 구역적인 활동은 아니고 교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전도 소그룹 정도된다.

# 한국교회의 구역 조직과 직분
한국 교회는 구역 모임이 상설화되어 있다. 잘 모이든 모이지 않든 모든 교회들이 모인다. 교파를 불문하고 모인다. 그런 가운데 식상된 모임이 되기도 하고 어떤 모임은 활발하기도 하다. 구역 모임에 생기를 불어 넣으려는 노력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가정교회 운동이 "자발적 선택과 위임"이라는 두 큰 명제를 가지고 소위 목장(구역)을 형성한다. 여기서 장로교회는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는 중이다. 실제로 장로교회적인 직분관과 교회관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입니다.

가정 교회 운동이 스스로 한 조직 자체를 교회라고 부른다면 기초부터 다른 길을 가는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한 모임을 전체 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수용해 낸다면 현재의 구역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현재의 가정 교회 운동이 기존의 교회 조직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이유는 실제로 섬김과 나눔을 통해서 전도와 양육과 봉사와 선교를 감당하는 좋은 제자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 수용 가능성을 위한 헌법 이해
이제 교회 안에 있는 가정교회 운동의 측면을 장로교회가 긍정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는 항존직에 관련된 임시 직분을 세울 수 있는 교회의 결정 가능성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목사는 동일하다는 장로교회의 기본 입장은 부목사 제도의 도입을 통해서 질서의 혼란이 있다. 그런데 실제 한국장로교회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 목사의 말 한마디에 그날로 보따리를 싸는 그런 교회들이 있는데도 여전히 장로교회의 목사직분의 동등성이 유지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한국교회에서 부목사 제도는 실제에 있어서는 담임 목사의 역할을 보조하는 임시직분에 해당한다. 동사 사역이란 표현은 말뿐임을 알 수 있다.

우리 교회는 준 직원이란 제도를 두어서 목회적 차원의 일들을 합법적으로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강도사, 전도사와 같은 제도이다. 목사에 대한 강도사와 전도사와 같은 준 직원의 개념에 대칭해서 항존직 안수 집사에 보조적인 서리 집사 제도를 헌법적으로 열어두었다. 장로 직분에 대해서는 권사라는 준직원의 개념을 두었다. 불신 가정이 많은 한국 교회 현실에서 심방을 위한 전도사와 권사 제도는 이에 좋은 제도적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치리회내 기관 설립에 대한 헌법조항 이해
우리 교회의 장로와 집사의 직분이 심방과 돌봄이라는 일에 더 노력해야 한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는 구역 조직이 이런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구역장과 권찰에 대한 이해를 해본다. 구역 조직이나 이에 책임을 맡은 구역장과 권찰은 장로교 헌법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가? 고신 헌법 교회 정치 제14장 교회 회의 및 소속기관에서 제109조에 보면 소속기관 조가 있다.

제109조 소속기관 *5
각급 치리회는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산하에 소속회 또는 기관을 설치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이 관할한다.
1. 소속회 및 기관을 조직하고자 하면 그 치리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2. 소속회 및 기관의 정관, 회칙, 임원선정, 사업계획 등은 그 치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3. 소속회 및 기관은 그 치리회의 감독 하에 교육, 선교, 구제 등 교회 발전을 위한 사업을 하여야 하며, 재정 검사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헌법적 규칙 5장 제4조에는 소속기관의 감독이 규정되었다.
치리회는 소속기관이 치리회의 감독을 받지 않거나 정당한 지도를 거부할 때는 그 대표에게 권고하되 권고도 듣지 않으면 그 기관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현재 장로교회의 구역 조직은 이런 소속기관이란 법 규정에 의해서 조직된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규정과 책임 직분자도 세울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한 치리회 내부의 조직을 결정하는 것은 치리회의 결정 사항에 근거한다. 따라서 한 교회가 구역을 소위 가정교회 운동의 조직으로 변화하는 것을 치리회인 당회의 결정에 의해서 실시할 수 있다는 헌법적 근거가 마련된다. 문제는 본질적 성격이다.

가정교회 운동은 장로와 집사의 직분의 충실함이란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따라서 이를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보조하는 조직과 임원의 선출을 해서 장로와 집사의 직분을 잘 도와 이를 통해서 교회를 온전히 세울 수 있는 길이 헌법적으로 열려있다.

가정교회 운동이 주목을 받는 것은 장로와 집사들이 본연의 역할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는 조직적인 운동이 된다는 사실이다. 가정 교회 운동이 침례교회에서 시작한 운동이란 사실을 말한다면 구역 조직은 감리교회에서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직분에 대한 혼돈이란 논리는 이미 직분 자체가 혼돈된 우리 현실을 직시하면서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적극적으로 우리 헌법이 치리회의 관할아래서 항존직의 직분을 도와 교회를 세우는 일에 필요한 조직과 임원을 둘 수 있다고 규정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 가정교회 운동의 역사적 문맥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이 가정 교회 운동도 아무런 문맥없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최영기 목사도 지적하듯이 한국 교회의 제자훈련 국면과 연결된 다음의 움직임이란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제자 훈련은 캠퍼스 사역에서 시작하였다. 실제로는 재생산하여 제자삼는 전도 운동으로 시작한 제자양육과 훈련이 교회 속에 수용되어 성도들에 대한 제자 양육으로 정착되었다. 원래 CCC나 네비게이토 운동이나 UBF운동 등이 추구했던 사영리나 재생산의 목표 등이 덜 충족되어 교회 속에 제자훈련이란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제자 됨이란 의미를 어떻게 설정하는가는 최근에 선교한국과 성서한국이란 두 중요한 운동의 지향을 통해서 다양할 수 있음을 본다. 이런 중에 실제로 한국 교회는 성장 정체와 수평이동에 의한 대교회 현상으로 위기의식까지 생기고 있다. 삶에서 전도하는 일에 대한 원래의 제자 훈련 목표가 교회 내에서 완전히 수용된 것은 아직 아니다.

가정교회 운동은 신약의 원형 교회를 추구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출발을 했지만 그 운동이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자신들이 설정한 그 목표나 신약교회가 가정교회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교회의 부족한 면에 대한 대안적 설득력이란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를 온전케 하시는 성령님의 은사로서 이 운동을 이해한다. 소외되는 개인주의적 사회 속에서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해결의 길을 확신있게 증거하고 나누는 것은 복음에 의한 대안적 공동사회의 한 면이 된다. 여기서 섬김과 전도와 교제와 양육과 선교에 대한 보이지 않는 훈련이 강하게 진행된다.

제자훈련은 캠퍼스 시절 기도하고 후배들을 돌보게 했고, 그 학원 속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소망하게 만들었고, 전도와 의에 대한 열심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졸업 후에 사회로 나가면서 기존의 교회에서 이들과 이들이 받은 훈련이 창조적으로 수용되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반쯤 형성된 제자훈련의 방식으로 정착된 교회들이 그나마 있는 현실일 뿐이다. 이제 적극적으로 전도와 섬김과 돌봄이란 목표로서 교회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정착해 보자는 노력이 바로 가정교회 운동의 위상으로 보인다.

가정교회 운동이 신약의 원형 교회를 추구하지만 가정교회 운동은 아직 제대로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중요한 한 교회의 그림이 있다. 순수한 말 그대로의 가정 자체가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종교 개혁 후 오백 년이 지났지만 유럽의 대부분의 교회와 달리 아직도 왕성하게 모이고 섬기고 선교하는 화란의 개혁교회들은 신앙생활의 중심으로서 가정이란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이를 신앙의 보금자리로 만들려고 노력해 왔다.

식탁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일, 잠자리에 드는 자녀들에게 말씀을 읽어 주는 일, 장로가 심방 시에 자녀들에게도 신앙에 대한 양육 상태를 질문하고 살피는 일, 자녀들의 양육을 위해서 기독교 학교를 만들어 교육시키는 일, 교리 교육을 위해서 매주 한번씩 주간 중 교회당에서 양육하고 성경공부나 자치활동을 위해서 격주의 모임을 주간 중에 가지는 일 등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이 가정 중심으로 온전한 입교인으로 자라가게 한다.

요지는 가정 교회 운동이 현실적 교회적 필요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즉 구체적 문맥 속에서 부족에 대한 보충일 뿐이다. 70년대 이후 한국 교회사적 문맥에서 캠퍼스 사역을 배제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기존 교회적 가치에서만 이런 가정교회 운동을 보지 말고 한국 교회사적 장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를 교회들이 잘 분별하고 수용할 수 있는 길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교회 헌법과 배치되지 않는 한 가능성을 제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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