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어제 입수된 이코노미스트지는 장장 15페이지의 한국 특집을 보도하였다. 한국의 긍정과 부정이 잘 설명되고 있다. 특히 14 "한국의 교육"이라는 부분에서 한국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가장 무서운 독재국가에서 시끄러운 민주주의(dowry democracy)로 발전한 국가임에도 이런 가운데 '가장 감동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한국인들'이라는 재미있는 평가를 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연이어 나오는 15페이지에서는 현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적시하였다고 본다.

내전과 쿠데타로 신음하고 있는 이집트와 시리아 뿐 아니라 기존의 비교적 온건한 동남아 이슬람 국가들이 과격 이슬람 국가로 변화하고 있다. "인도양의 보석"으로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몰디브와 브루나이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Sharia)법을 국가 전반에 적용하며 국민(특히, 여성)들을 처벌하여 그 공포감이 증대되고 있다. 이 부분은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특집 뉴스와 더불어 다음 번 뉴스레터에서 다시 다루고자 한다.

이런 가운데 반가운 소식은 캄보디아 장로교신학교가 2014년부터 정식으로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이 되었다는 사실을 얼마 전 종교성으로부터 통보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동시에, 학교를 위해 기도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많은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금번 62회 뉴스레터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현재 부산에서 진행 중인 세계교회연합(약칭 W.C.C.)의 신학적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 WCC 제10차 총회주제와 개막식

WCC 10차 총회주제와 개막식

W.C.C.의 신학적 평가

부산에서 제10 W.C.C.총회가 열리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축하할 일이다. WCC는 로마 가톨릭 다음으로 가장 큰 세계적인 기독교 연합운동으로 약250개 회원교단과 5억 명이 넘는 신자를 가지고 있다. 전 세계의 대()교단이 대체로 회원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 보수교회 목회자들이 한국에서 개최를 극력 반대하였지만 "버스는 이미 달리고 있다". 

그나마 신사적 반대가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떨어뜨리지 않게 할 것이다. 반대한다고 총회가 다른 데로 옮겨질 만큼 WCC는 허약한 기구가 아니다.

 

▲ 교계 연합단체 및 시민단체 WCC부산총회 개최 철회 촉구 - 조선일보(2013.03.20.)

W.C.C.는 제2 UN총회로도 불린다. 1968년 제 4 차 웁살라 총회를 방문했던 우탄트 유엔 사무총장은 W.C.C. 대회의 토의 내용이 유엔과 너무 유사하여 서로 협력하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그는 미얀마 사람에, 철저한 불교도로서, 불교만이 세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 1960년대 초기 불교의 세계적 연합기구를 만드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1. 교회 연합은 성경적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17:21).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기도에서 거룩, 진리 그리고 하나님을 증명하는 수단으로서의 연합을 강조하였다. 연합을 통한 전도와 선교는 매우 중요하다. 칼빈은 독일의 종교 개혁자들이 교제와 연합이 없는데 안타까움을 느끼고 불링거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이 시대에 우리가 모든 가능한 수단을 다하여 우리 사이에 형제적 우애를 유지하고 보증

하는 것 이상 더 관심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교회가 참 화합으로 서로 뜻을 같이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전체의 문제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는 신앙으로 뜻을 같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참 목사들과의 연합과 우정을 유지해야 한다. … 나로서는 이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독일의 한 신학자는 이러한 칼빈을 위대한 애큐메니스트(연합운동가)라고 말하였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4 '교회론'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당시 성전의 극심한 부패를 정죄하였다. 그리고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하면서 "잘못된 분열"을 경고하였다.

한국 보수 장로교회는 이점을 들어 W.C.C.를 신학으로 비판하는데, 반면 분열의 죄도 회개해야 한다. "보수는 분열"이라는 등식 자체가 비성졍적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연합은 1)하나님 안에서의 연합, 2)성령 안에서 연합, 3) 진리 안에서의 연합이어야 한다.

또한 연합운동은 W.C.C.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에큐메니컬 운동”하면 일반적으로 WCC 에큐메니컬 운동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복음주의 에큐메니컬 운동도 있다. 예를 들면, 화란과 미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이 주도한 개혁파 에큐메니컬 대회(Reformed Ecumenical Conference: REC), 미국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그리고 고신교단이 가입한 국제개혁파교회대회 등이다. 복음주의 에큐메니컬 운동과 WCC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말하는 한국의 보수 장로교회는 REC 회원교단 중 WCC 회원교단이 있고 신학 또한 좌경화되었다는 이유로 가입하지 않았다.

2. 빗나간 연합운동: W.C.C.

W.C.C.의 시작과 동기는 순수하였다.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가 WCC의 효시이다. 이 대회는 원래 윌리엄 캐리가 1792년 인도 선교사로 가면서 1810년 희망봉에서 세계적 선교대회 개최, 선교정보와 전략을 공유하자는 취지로 제안하였다. 구두수선공 치고는 엄청난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 그의 비전은 100년 후에야 실현되었다. 그러나 원래 목적과는 많이 빗나가고 말았다.“이교도의 세계에 복음을 어떻게 전하느냐”를 다루기 위하여 모인 1910년의 대회(국제선교대회, IMC)는 불행히도 1948 WCC로 발전한다. 대회는 비기독교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전략으로 비기독교 종교를 진지하게 다루었다. 이 운동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선교가 '정치 선교'로 발전하여 해외 선교를 사라지게 만들고 말았다. 김활란 박사는 58 IMC WCC와 합하면 선교는 사라지고 만다며 눈물로 호소한 바 있다. 불행히도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한 서구 신학자는 에큐메니컬의 선교를 “에큐메니컬 정치 선교(Ecumenical Political Mission)”로 정의하였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WCC는 지금도 복음주의 교회와 선교운동에 중요한 경종을 울린다. 첫째 선교를 위한 연합 운동으로 시작된 에딘버러 선교대회는 풀러 신학교 선교학 교수 아서 글라서가 지적한 것처럼 처음부터 불안한 정통에서 시작되었다. 주도자들은 주로 초교파 선교회, 평신도, 진보적 학생선교운동단체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통교리에 큰 관심이 없었다. 현재 복음주의 선교 운동에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지나치게 폭이 넓은 신학, 초교파 선교운동, 평신도 주도의 탈()성경적, ()교회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내부자 운동(Insiders Movement)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1) 자유주의가 주도하는 W.C.C.

WCC는 첫 총회부터 진보적 신학자들이나 진보주의자들이 주도하였다. WCC 첫 총회인 암스테르담 대회는 기독교적 노동운동가이자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를 강사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화란 정부는 처음에 그에게 비자발급을 거부하였다. 화란정부가 상황을 정확하게 본 셈이다.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노동운동가인 동시에 신학자였다. 노동 운동의 본산지이자 자동차의 메카 도시였던 디트로이트는 세계적으로 첫 파산도시가 되고 말았다.

2) W.C.C.의 주관심은?  

복음주의 선교대회의 주관심은 선교와 세계복음화이다. W.C.C.도 이 주제를 다룬다. 여기에는 존 스타트의 영향이 컸다. 그는 로잔대회 이후 복음주의운동과 W.C.C.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WCC는 “처음부터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며, 지상의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가 되게 하느냐” 하는 영적인 문제보다도 사회정치경제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기독교와 서양의 합리주의를 혼합한 신학으로 정의한다. 합리주의와 결합한 첫 신학이 성경비평주의이다. 정통적 성경관을 거부하면서 예수님을 혁명가, 해방운동가로 재해석한다. 합리주의로 재해석된 하나님 나라 사상으로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지배한다. 그래서 개인의 죄보다는 사회 구조악을 더 강조한다. 암스테르담 대회는 공산주의의 모순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동시에 지적한다. 한국교회의 친 WCC주의자들은 최근 성명서나 회의에서 WCC는 결코 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 포용주의 신학, 세속주의 신학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WCC는 그동안 발표된 WCC 성명서나 신학선언문을 정직하게 소개하기 바란다. 물론 WCC에서 발표된 신학선언서나 내용을 회원교회나 신자들이 반드시 따를 의무는 없다. 즉 신학적 구속력은 없다. 또한 회원교회 목사들을 모두 신()신학이나 자유주의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사실 회원 교단에는 복음주의 신자나 복음주의 목회자가 더 많다고 본다. 그 안에서도 신학적 논쟁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의 성명이나 신학 선언문들이 전 세계 교회와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주요 회원 교단 신학교는 대체로 WCC신학을 추종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3) 인권과 정의 비판의 잘못된 적용: “문화적 자율주의”

이번 총회 시작 때, 이집트 콥틱교회 지도자가 최근 이슬람으로부터 이집트 기독교회들이 수난 당하는 것과 중동 크리스천들의 고난을 진지하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과연 이번 총회가 이러한 문제를, 특히 이슬람 국가에서의 기독교회 박해를 신랄하게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그간 WCC가 자유주의 국가에서의 인권탄압, 독재, 부정부패, 사회정의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성명은 발표해 왔지만 이슬람 국가와 공산국가에서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실제 침묵하거나 매우 함축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해 왔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한국, 대만, 브라질이 이러한 사안의 최대 피해국이다. 당시 이들 세 나라는 WCC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한국은 경고장까지 받았다. 물론 김일성에게는 경고장을 발송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이유는 1961년 뉴델리 대회 때 러시아 정교회가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는데 이후 WCC 내에서 공산권의 인권과 종교탄압을 다루자 이에 대해 정교회가 강력하게 항의를 한 것이다. 타종교 세계에서 일어나는 박해도 마찬가지로 종교대화의 신학은 다른 종교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는데 한계가 보여왔다. 뉴델리 대회 이후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에 종교대화 연구소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들 연구소의 세미나에서는 타종교가 기독교를 공격하는 반면 기독교는 타종교를 비판하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되었다.

한국의 좌파들이 우리사회의 독재, 사회정의, 억압은 예리하게 비판하면서도 북한의 독재, 인권탄압에 침묵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것을 윤리적용의 이중 잣대라고 말한다.  

인권, 정의도 문화에 따라 달리 적용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영어로는 이것을 cultural determinism이라고 부른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이러한 식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이것은 북한 주민의 인권은 중요하지 않고 한국의 인권은 중요하다는 차별주의이다. 인권은 보편적 가치관이다. 

WCC 80년대 등장하기 시작한 평화의 신학으로 남북화해를 주선하는데 주력, 먼저 북한을 방문하고 다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남북화해와 통일을 촉구하였다. 이것 역시 남북한 모두에게 분열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분열의 이념적, 신학적, 윤리적 문제를 전혀 도외시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WCC의 탈이념주의, 탈종교주의를 나타내는 것이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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