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3년 가을 개혁신학회 학술대회(2013 10 5. 한울교회)에서 발표한 필자의 논문 가운데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1. 선제후령 팔츠와 팔츠의 수도 하이델베르크의 종교개혁 

▲ 황대우 목사 진주북부교회 기관목사 고신대학교

팔츠(Pfaltz)는 독일 남부의 선제후국이다. 16세기 초기부터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가 작성되기까지 이 지역을 다스린 선제후는 모두 넷이다. 1508-1544년에 재위한 선제후는 루트비히 5(Ludwig V)였는데, 그는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박해하지도 않았다. 1) 비록 그가 공식적으로는 로마가톨릭교도였지만 1520년 중반에 이미 성직자의 결혼과 성찬식의 이종배찬을 허용할 정도로 종교개혁을 추종하는 사람들에 대해 관대했다. 2) 이런 이유로 팔츠 지역에서 개신교 세력은 그의 통치 기간 말년에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뒤를 이어 동생 프리드리히 2(Friedrich II) 1544년 팔츠의 선제후 자리에 올랐는데, 1556년까지의 재위기간 동안 개신교를 위한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개신교 신앙을 공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종교개혁이 시작될 때부터 이 새로운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520년대 초에는 마르틴 부써(Martin Bucer)를 자신의 궁정 설교자로 초빙하기도 했고, 1541년에는 로마교 학자들과 종교개혁가들 사이의 교회연합모임인 레겐스부르크 회의의 의장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1546년에는 드디어 팔츠 지역의 귀족회의를 하이델베르크에서 개최하여 종교개혁적 성향의 교회법을 제정하고 한 해 뒤에 출판함으로써 팔츠 지역의 종교개혁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개신교 연합이 슈말칼덴 전쟁에서 패배하여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1548년 가신조협정(Interim)의 조항들을 적극적으로 이행하지 않았으며 1555년에 체결된 아욱스부르크 평화조약에 따라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기초한 루터파 교회를 공식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3)

프리드리히 2세의 팔츠 선제후 자리를 물려받은 통치자는 루터교도임을 자처한 오트하인리히(Ottheinrich)였는데, 그는 1556-1559년 사이의 짧은 통치기간 동안 팔츠가 루터파 지역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밝혔다. 프리드리히가 시작한 교회법 개정 작업을 1556년에 완수하여 법령으로 선포했다. 이렇게 개정된 교회법은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루터파 종교개혁자 요하네스 브렌츠(Johannes Brenz)작성한 뷔르템베르크 교회법을 따랐다. 뿐만 아니라 팔츠의 신앙교육서(Catechismus) 즉 교리문답도 역시 브렌츠가 작성한 뷔르템베르크 신앙교육서를 그대로 사용했다. 오트하인리히는 1556년에 교회시찰위원회를 조직하여 당시 스트라스부르 교회의 루터파 지도자 요하네스 마르바흐(Johannes Marbach)를 위원장으로 임명한 다음, 팔츠 지역 교회들의 실정을 파악하여 교회 개혁안을 작성하도록 함으로써 루터파 신앙을 결정적으로 확립했다. 또한 그는 1558년에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필립 멜랑흐톤(Philip Melanchthon)의 자문을 받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모든 교과 과정을 재정비하는 대대적인 개혁을 하고 신학부를 제외한 의학부와 법학부에 유능한 인재들을 초빙하는데 성공했다. 4)

팔츠 선제후령 후계는 오트하인리히를 마지막으로 팔츠의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팔츠-짐머른(Pfaltz-Simmern) 가문 출신의 경건자 프리드리히 3(Friedrich III)에게로 넘어갔다. 1559년에 팔츠의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3세는 당시 심각한 문제였던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의 성찬론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논쟁의 핵심 인물이었던 두 사람, 그네시오(Gnesio) 루터파의 수장 헤슈시우스(Heshusius)와 개혁파 성찬론을 옹호한 클레비츠(Klebitz)를 모두 해임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성찬 논쟁은 마무리 되지 않았고 1년 뒤 1560 6월에 공식적인 신학 토론으로 재개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이델베르크 성찬 논쟁이다. 루터파 대표 요하네스 슈퇴셀(Johannes Stoessel)과 개혁파 대표 피에르 보켕(Pierre Boquin) 사이의 논쟁이었는데, 보켕을 돕기 위해 츠빙글리파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가 나서는 바람에 개혁파의 성찬론이 설득력을 얻었고, 이로 인해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파 성찬론보다는 개혁파 성찬론을 좀 더 확고히 지지할 수 있게 되었다.5)

 

2.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작성 배경과 작성자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562년이 시작되자마자 뷔르템베르크의 신앙교육서를 대신할 새로운 신앙교육서를 작성하도록 명령함으로써 팔츠를 루터파에서 개혁파로 바꾸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6)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이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탄생 후 1563 1 19일 화요일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작성된 7)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초판의 짧은 서문이 밝히는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작성 배경은 “또한 우리 역시 결코 사소한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문제]는 어디에서든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우리 선제후국의 학교에서도 교회들에서도, 기독교 교리에 대해 너무 나태하게, 부분적으로는 전혀, 부분적으로는 [내용이] 다르게, 또한 어떤 항구적이고도 확실하며 통일된 신앙교육서 없이, 각자 선호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계획되고 교육된다는 것이다. 8)

그러므로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통치 지역 내의 모든 교회와 학교에서 청소년들이 어릴 때부터 “거룩한 복음의 순수하고 통일된 교리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가운데서 교육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설교자와 학교교사”(die Prediger und Schulmeister)가 청소년들을 가르칠 때 사용할 수 있는 “확실하고도 항구적인 형식과 수단”(ein gewisse vnd bestendige form vnd maß[=masz])인 신앙교육서가 작성되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9)

초판 서문에 의하면 프리드리히의 명령으로 새로운 신앙교육서를 작성하기 위해 목회자와 신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조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곳에 있는 우리의 신학부 전체와 모든 총감독들과 뛰어난 교회사역자들의 회의와 활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요약적 교육[] 혹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교육[], 독일어와 라틴어로 작성하여 출판하도록 한다. 10) 여기서 신앙교육서 작성을 위한 위원회의 구체적인 구성원은 신학부의 모든 교수들과 모든 총감독들과 유능한 교회사역자들로 된 세 그룹인데, 구체적인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는 한 사람이 아닌, 다수의 공동작품이었다고 조심스럽게 결론 내릴 수 있다. 11)

그렇다면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최종 본문의 편집자는 누구인가? 17세기 독일의 개혁교회 신학자 하인리히 알팅(Heinrich Alting)이 팔츠 신앙교육서를 작성하는 “그 수고는 1562년도에 두 신학자, 올레비아누스와 박사 우르시누스에게 주어졌는데, [둘은] 독일인일 뿐만 아니라 독일어로 저술하는데 숙달된 사람들이다. 12) 라고 언급한 이후 이 두 개혁자가 최종 편집자로 알려졌다. 19세기 초에 네덜란드 교회사가 아나에우스 에이페이(Annaeus[=Anne] Ypey)와 이삭 요하네스 데르마우트(Isaac Johannes Dermout)가 올레비아누스를 배제하고 우르시우스만을 최종 작성자로 주장하였으나, 13) 이후 19세기 중반에 독일 신학자 주트호프(Sudhoff) 19세기 후반에 네덜란드 신학자 호우즌(Gooszen)은 여전히 알팅의 견해를 지지했다. 14) 20세기에 발터 홀벡(Walter Hollweg)이 독일어 원문의 최종 편집자는 단 한 명이었겠지만, 그가 올레비아누스였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15) 홀벡 이후 현대 학자들 사이에는 우르시누스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작성에 가장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는 추정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견이 없으나, 그가 최종 편집자였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자료는 지금까지 제시되지 않았다. 16)

최종 편집자에 관하여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연구의 대가 비르마는 홀벡이 올레비아누스를 작성자 명단에서 완전히 제외시킨 것에 대해 반박하면서 여러 정황들을 고려할 때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를 작성한 위원회에서 올레비아누스의 역할이 사소한 것 이상이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17) 그리고 최종 편집자가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홀벡의 추정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주장하기를 올레비아누스가 비록 신앙교육서 작성을 위한 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할지라도 그가 최종 편집자였다는 증거가 거의 없는데 반해, 최종 편집자로서의 역할을 했을 법한 정황 증거가 우르시누스에게 우세하다는 것이다. 18)

비르마에 따르면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가 공동 작업의 결과로 탄생하긴 했지만 최종 편집자는 우르시누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특히 비르마는 우르시누스의 소신앙교육서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초고로 작성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19)  “정황 증거의 우세”가 우르시누스에게 있음을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를 비르마는 우르시누스가 작성한 두 개의 신앙교육서, 즉 먼저 작성된 소신앙교육서와 후에 작성된 대신앙교육서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두 신앙교육서는 모두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가 작성되기 전에 작성되었으며,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129가지 질의응답 가운데 약 90개 정도가 소신앙교육서의 내용에 기초하고 있고 대신앙교육서 역시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일부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20) 

우르시누스의 소신앙교육서가 1562년에 작성되었다는 것은 1612년에 우르시누스의 작품 전집을 편집 출판한 로이터(Reuter)에 의해 처음으로 주장되었다. “소신앙교육서. 기독교 신앙을 간단명료하게[=명료한 간결성으로] 포괄함. 1562년에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에 의해 작성됨. 저자의 서재로부터 자필 원본에 의해 드디어 처음으로 출판됨. 21) 비르마는 이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문제는 이 신앙교육서의 저자가 우르시누스라는 결정적 증거, 혹은 최소한 그가 홀로 작성한 것이라는 확실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비르마가 인용한 것처럼 노이저(Neuser)의 주장대로 이 소신앙교육서가 우르시누스 한 사람의 저작물이 아닌, “공동 작업의 결과”였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비르마는 알팅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로이터의 언급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 없이 수용한다. “그러므로 당대의 신학자들 가운데 결코 최하급이 아닌 우르시누스 박사는 최고 통치자의 명령으로 신앙교육을 책자로 만들었고 제공해야 했는데, 분명히 하나는 학구적인 성인들과 대학들을 위한 대[신앙교육서]이고 , 다른 하나는 백성의 이해력과 소년 연령대에 오히려 적용되는 소[신앙교육서]이다. 둘 다 승인되었는데, 그것은 천상적 진리의 요약 혹은 순전한 신학의 계획을 포괄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많은 것들이 프리드리히 3세에 의해 공적인 신앙교육[]로 옮겨졌는데, [이것은] 결국 1563 1월에 출판되었다. 22)  

로이터의 주장을 근거로 비르마는 대신앙교육서의 작성 연대를 우르시누스가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한 1561 9월에서 그의 소신앙교육서가 작성된 1562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23) 로이터의 말이 액면대로 사실이라면 “공적 신앙교육서”인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저자는 최종 혹은 대표 저자는 아마도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로이터는 소신앙교육서가 “백성의 이해력과 소년 연령대”에 적합한 것이라고 소개하는데, 그것은 독일어가 아닌 라틴어로 작성되었고, 독일어 소신앙교육서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16세기에는 일반적으로 “소”(minor)라는 글자가 신앙교육서와 결합되면 그것은 대체로 어린이 교육을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루터의 소신앙교육서가 독일어로, 제네바의 어린이 신앙교육서가 프랑스어로 작성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르시누스의 소신앙교육서는 오직 라틴어로만 작성되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과연 로이터의 주장을 그대로 신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또한 로이터는 자신이 3권으로 편집한, 하이델베르크와 노이쉬타트(Neustad) 시절의 우르시누스 “신학작품집”(opera theologica)에서 대신앙교육서 본문을 제외시키면서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점 역시 그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소이다. 

가령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최종 편집자가 우르시누스였다고 해도 우르시누스의 것으로 알려진 두 신앙교육서 작성 연대가 확정되지 않는 이상, 내용의 유사성만으로는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가 두 신앙교육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소신앙교육서가 1562년에 작성된 것이 확실하다 해도 그것이 우르시누스 개인의 것이 아니라면 그 자체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초안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만일 로이터가 제공하는 연대를 신뢰할 수 없다면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초안이 그 소신앙교육서 보다 먼저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존의 주장과 달리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가 두 신앙교육서 작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최종 편집본은 늦어도 1562년 말에는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초안자와 최종 편집자를 어느 한 사람으로 확정하기에는 아직 증거 자료가 불충분하다. 비록 우르시누스가 가장 적임자처럼 보이고, 몇몇 간접 증거들이 이를 강력하게 뒷밭침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3.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구조적 특징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는 1-2문답의 서론에서 “유일한 위로”(einiger trost)를 핵심으로 시작하여, 3-11문답의 1부에서는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비참”(Elend des Menschen), 12-85문답의 2부에서는 죄와 비참한 상태로부터의 “인간의 구원”(Erlösung des Menschen), 그리고 86-129문답의 3부에서는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Dankbarkeyt)를 다루는 삼중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유명한 삼중 구조가 어디서 연유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지금까지 몇몇 중요한 연구물들은 서로 상이한 견해를 내놓았다. 24)

이 삼중구조에 관심을 갖고 그 기원을 추적한 선두 주자는 19세기 네덜란드 신학자 호우즌(Gooszen)이다. 그는 멜랑흐톤이 로마서의 구조를 자신의 방식대로 활용하여 저술한 1521년의『신학총론』(Loci communes) 초판 구조에서 삼중 구조의 기원을 찾았다. 25) 하지만 이 주장은 14년 뒤에 독일 신학자 로이(Reu)에 의해 반박되었다. 로이는 주장하기를, 1554년에 레겐스부르크에서 출판된 니콜라우스 갈루스(Nicolaus Gallus = Nikolaus Han, Prediger zu Regenspurg. 레겐스부르크의 설교자 니콜라우스 한) “우리의 거룩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바르고 참된 교리의 간단하고 질서 정연한 총론”(Ein Kurtze Ordenliche summa der rechten Waren Lehre vnsers heyligen Christlichen glaubens) 1558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재판 되었는데,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삼중구조는 바로 이 논문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26) 

로이는 하이델베르크의 삼중 구조에 해당하는 단어, 즉 비참과 구원과 감사에 해당하는elend(비참), erlösete(구원하다), danckbarlich(감사함으로)과 같은 단어들이 갈루스의 글에 사용되었다는27) 사실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바로 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로 인해 후에 유명해진 특징, 조직적 순서, 신앙교육적 저술이 루터파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28) 하지만 단지 어원상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다는 것만을 근거로 ‘구조’의 유사성을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럽기보다 오히려 억지스러워 보인다. 갈루스의 레겐스부르크 판도 그리스도인 각자가 ‘알고 믿고 행해야 할’ 세 가지 교리를 구분하는 삼중 구조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비참-구원-감사’가 아닌 ‘율법-복음과 믿음-선행’이다. 29)

로이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독일 신학자 아우구스트 랑(August Lang)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와 다른 세 명의 네 가지 신앙교육서, 즉 취리히의 레오 유트(Leo Jud)와 네덜란드의 미크론(Micron), 그리고 우르시누스의 두 신앙교육서를 비교 연구한 책을 통해 로이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삼중구조의 뿌리를 루터가 1520년에 작성한 “십계명에 대한 간단한 형식, 믿음에 대한 간단한 형식, 주기도문에 대한 간단한 형식”(Eine kurze Form der zehn Gebote, eine kurze Form des Glaubens, eine kurzen Form des Vaterunsers)에서 30) 찾는다. 31) 랑과는 달리 발터 홀벡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구조적, 내용적 근원을 테오도르 베자(Theodor Beza = Théodore de Bèze) 1559년에 작성한 두 신앙고백서 “기독교 신앙고백”(Confessio fidei christianae)와“다른 간단한 신앙고백”(Altera brevis fidei confessio)에서 찾았다. 32) 마지막으로 비르마는 로마서 구조에 기인된 삼중구조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랑의 주장처럼, 루터의 저술에서이지만, 삼중구조의 좀 더 구체적인 적용은, 호우즌의 주장에 따라, 멜랑흐톤의 『신학총론』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이후 분명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다양한 경로를 거쳐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구조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33)

“비참-구원-감사”라는 삼중구조가 어디서 직접적으로 기원된 것인지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중세에서도 존재했던 신앙교육서의 세 가지 내용, 즉 율법과 신앙고백과 주기도문을 다루는 구조에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는 분명 루터를 비롯한 루터파 종교개혁가들의 노선을 따른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루터와 루터파는 ‘십계명-사도신경-주기도문’의 순서와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스트라스부르의 부써와 제네바의 칼빈이 작성한 신앙교육서는 모두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의 순서와 구조로 되어 있다.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의 해설 구조로 되어 있는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는 분명 루터파가 아닌 개혁파 라인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의 1521년 판 『신학총론』에서 멜랑흐톤 조차도 율법을 죄와 복음 사이에 위치시킴으로써 죄를 깨닫게 하여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서의 율법 개념이 강한 반면에,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순서 구조는 율법을 신앙고백 후에 다룸으로써 신자의 삶에서 요구되는 율법의 제3용법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개혁파적인 순서 구조와 일치한다.

1)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Sources, History, and Theology(Grand Rapids: Baker Publishing, 2005), 24. 한글 번역은 다음 참조. 라일 비어마 3 공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신지철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37-38.

2)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31.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54.

3) 프리드리히 2세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다음 참조.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25-31.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41-53.

4) 오트하인리히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다음 참조.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33-37.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59-67.

5) 하이델베르크에서 발생한 성찬 논쟁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다음 참조.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37-42.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67-79.

6) 참고.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49.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91.

7) J.N. Bakhuizen van den Brink, ed., De nederlandse belijdenisgeschriften in authentieke teksten met inleiding en tekstvergelijkingen(Amsterdam: Uitgeverij Ton Bolland, 1976), 151: Datum Heydelberg auff Dinstag den neuntzehenden Monatstag Januarij, Nach Christi vnsers lieben Herrn vnd Seligmachers geburt, im Jar, Tausendt, Fünffhundert, drey vnd sechtzig. = A. Lang, ed., Der Heidelberger Katechismus und vier verwandte Katechismen, 4.

8) J.N. Bakhuizen van den Brink, ed., De nederlandse belijdenisgeschriften in authentieke teksten met inleiding en tekstvergelijkingen, 150: Also wir auch in dem nit den geringsten mangel befunden, daß die blüenden jugend allenthalben, beides in Schulen vnd Kirchen Vnsers Churfürstenthumbs in Christlicher Lere sehr fahrlessig, vnd zum theil gar nicht, zum theil aber vngleich, vnd zu keinem bestendigen, gewissen vnd einhelligen Catechismo: sondern nach eines jeden fürnemen vnd gutdüncken angehalten vnd vnderwiesen worden. = A. Lang, ed., Der Heidelberger Katechismus und vier verwandte Katechismen(Leo Jud's und Micron's kleine Katechismen, sowie die zwei Vorarbeiten Ursins) mit einer historisch-theologischen Einleitung(Leipzig: A. Deichert'sche Verlagsbuchh. Nachf., 1907), 3.

9) J.N. Bakhuizen van den Brink, ed., De nederlandse belijdenisgeschriften in authentieke teksten met inleiding en tekstvergelijkingen, 151. = A. Lang, ed., Der Heidelberger Katechismus und vier verwandte Katechismen, 3.

10) J.N. Bakhuizen van den Brink, ed., De nederlandse belijdenisgeschriften in authentieke teksten met inleiding en tekstvergelijkingen, 150: Und demnach mit rhat vnd[=vnn] zuthun Vnserer gantzen Theologischen Facultet allhie, auch allen Superintendenten vnd fürnemsten Kirchendienern einen Summarischen vnderricht oder Catechismum vnserer Christlichen Religion auß[=ausz] dem Wort Gottes, beides in Deutscher vnd[=vnn] Lateinischer Sprach verfassen vnd stellen lassen.인용구에서 [] 안에 표기된 철자는 랑이 제시하는 본문으로, 16세기 남부 독일에서는 vnd vnn으로 표기되기도 했음을 있다. 참고. A. Lang, ed., Der Heidelberger Katechismus und vier verwandte Katechismen, 3.

11)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53-57.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100-109. 여기서 비르마는 그룹의 인문들을 제시하는데, 번째 그룹인 신학부 교수들에는 교의학 담당 교수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구약 담당 교수 임마누엘 트레멜리우스(Immanuel Tremmelius) 신약 담당 교수 페트루스 보퀴누스(Petrus Boquinus =Pierre Boquin. 삐에르 보껭) 있었고, 번째 그룹인 총감독들은 모두 9명이었는데 이들 중에서는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요아네스 벨바누스(Joannes Velvanus), 요하네스 빌링(Johannes Willing), 요하네스 실바누스(Johannes Sylvanus), 요하네스 아이젠멩거(Johannes Eisenmenger) 등이 있었고, 마지막 번째 그룹인 교회의 주요 사역자들에는 올레비아누스, 아담 노이저(Adam Neuser), 페트루스 마허로포에우스(Petrus Macheropoeus), 틸레만 무미우스(Tilemann Mumius), 요하네스 브루너(Johannes Brunner), 궁정 설교자 미카엘 딜러(Michael Diller), 지혜대학의 교수 콘라트 마리우스(Konrad Marius) 등과 교회[치리](Kirchenrat. 3명의 목사와 3명의 평신도 대표) 구성원 6 가운데 명의 평신도 역시 포함되었을 것인데, 이들은 회장이자 선제후의 정치고문 벤첼라우스 출레거(Wenzelaus Zuleger) 서기이자 선제후의 개인 비서 스테파누스 치를러(Stephanus Cirler) 의사 신학자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였다. 명단 외에도 비르마는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작성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추가로 제시하는데, 페트루스 다테누스(Petrus Dathenus) 크리스토프 에헴(Christoph Ehem)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그들이다. 특히 여러 증거 자료를 제시하면서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작성에 직접 참여한 것은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12) Heinrich Alting, Historia ecclesiae Palatinae in Monumenta pietatis et litteraria virorum in re publica et litteraria illustrium selecta(Frankfurt, 1701), 189: Id negotium datum duobus Teologis, Oleviano et dr. Ursino, 1562, tamquam Gernamis et Gernamice scribere doctis.이것은 M.A. Gooszen, De Heidelbergsche Catechismus. Textus receptus met toelichtende teksten(Leiden: E.J. Brill, 1890), 1. n.1.에서 재인용. 알팅은 자신의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해설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최초의 작성자들인 우르시누스 박사와 올레비아누스는 서로의 의견과 업무를 수렴하여 신앙교육서 [내용] 완수한 후에, 승인되어야 [=신앙교육 내용] 팔츠 교회의 감독들에게 제출했다.(Scriptores imprimis Dr. Ursinus et Olevianus, qui, cum collatis inter se consiliis et operis confecissent Catechesin, censendam eam dederunt Inspectoribus Ecclesiarum Palatinarum.)라고 주장한다. 라틴어 본문은 Karl Sudhoff, C. Olevianum und Z. Ursinus. Leben und ausgewählte Schriften, 108. n.*에서 재인용.

13) A. Ypeij & I.J. Dermout, Geschiedenis der Nederlandsche Hervormde Kerk I(Breda: W. van Bergen, 1819), 457.

14) Karl Sudhoff, C. Olevianum und Z. Ursinus, 88-124; M.A. Gooszen, De Heidelbergsche Catechismus. 1-132.

15) Walter Hollweg, Neue Untersuchungen zu Geschichte und Lehre des Heidelberger Katechismus(Neukirchen: Neukirchener Verlag, 1961), 124-152.

16)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71.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140-141.

17)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67.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131.

18)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74: Little evidence exists to suggest that this person was Olevianus, although his role on the committee was probably not as minimal as many today would have us believe. The preponderance of circumstantial evidence points toward on person in that role - Zacharias Ursinus.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147.

19)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61.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118-119.

20)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72.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142-143.

21) Quirinus Reuterus, ed., D. Zachariae Ursino theologi celeberrimi... Opera theologica I(Heidelberg: Johannis Lacellotus, 1612), 34-35: Catechesis minor perspicva brevitate christianam fidem complectens. Scripta Anno M D L X I I. A D. Zacharia Vrsino.

22) Quirinus Reuterus, ed., D. Zachariae Ursino theologi celeberrimi... Opera theologica I, 10-11: Itaque D. Ursinus, haud postremus inter ejus temporis theologos, Magistratus summi jussu, Catechesin, unam quidem majorem, pro studiosis adultioribus, & scholis majoribus: alteram minorem, captui populi & puerilis aetatis magis accommodatam, in chartam conjecit, & quibus oportuit exhibuit. Utraque probata, quod summam veritatis coelestis, sive sincerae Theologiae phrasi plana complecteretur. Ex hac etiam pleraque transcripta in publicam Catechesin, a Friderico III, Anno MDLXIII. Mense Ianuario, tandem in lucem editam,...

23)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137.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288. 에어트만 슈투름(Erdmann Sturm) 연구를 근거로 비르마는 대신앙교육서가 1562 후반기의 어떤 시점에 작성된 것으로 본다. 참고. Erdmann K. Sturm, Der junge Zacharias Ursin. Sein Weg vom Philippismus zum Calvinismus(1534-1562)(Neukirchen: Neukirchener Verlag, 1972), 238-245. 슈투름은 로이터가 올레비아누스를 하이델베르크 최종작성자로 언급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면서도 로이터가 우르시우스에 대해 제시하는 내용은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형평성이 부족해 보인다.

24)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의 삼중 구조에 대한 상세한 분석에 대해서는 다음 참고.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81-86.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164-175.

25) M.A. Gooszen, De Heidelbergsche Catechismus. 75: Ongetwijfel hebben wij hier een bewijs van den invloed, door Melanchton nog steeds in de Pfalz en vooral op Ursinus uitgeoefend. Want het schema wordt eenvoudig gevolgd, dat aan de Loci Theologici van Melanchton ten grondslag was gelegd, zooals het duidelijkst uitkomst in de eerst uitgave van 1521, en dat op zijne beurt door den Hervormer aan den brief aan de Romeinen was ontleend geworden.

26) Johann Michael Reu, ed., Quellen zur Geschichte des kirchlichen Unterrichts in der evangelischen Kirche Deutschland zwischen 1530 und 1600, 1. Quellen zur Geschichte des Katechismus-Unterrichts. I. Süddeutsche Katechismen(Gütersloh: Von C. Bertelsmann, 1904), 198-203, 특히 201-202.

27) ohann Michael Reu, ed., Quellen zur Geschichte des kirchlichen Unterrichts in der evangelischen Kirche Deutschland zwischen 1530 und 1600, 1. Quellen zur Geschichte des Katechismus-Unterrichts. I. Süddeutsche Katechismen, 720-734. 이것은 로이가 편집한 갈루스의 글인데, 명사 elend 동사 erlösete erlöset 724쪽에, 부사 danckbarlich 731쪽에 각각 나타난다. 여기에는 레겐스부르크에서 출판된 연도가 1554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로이의 책을 각주에 소개한 외에 다른 아무런 각주나 설명도 없이 비르마는 연도를 1547년으로 소개하고 있다. 참고.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82.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166.

28) Johann Michael Reu, ed., Quellen zur Geschichte des kirchlichen Unterrichts in der evangelischen Kirche Deutschland zwischen 1530 und 1600, 1. Quellen zur Geschichte des Katechismus-Unterrichts. I. Süddeutsche Katechismen, 202-203: So kommen wir zu dem Resultat, daß gerade einer von jenen dem Heidelberger Katechismus nachgerühmten Vorzügen, seine szstematische Anordung, einer katechetischen Schrift aus lutherischen Kreisen entstammt.

29) Johann Michael Reu, ed., Quellen zur Geschichte des kirchlichen Unterrichts in der evangelischen Kirche Deutschland zwischen 1530 und 1600, 1. Quellen zur Geschichte des Katechismus-Unterrichts. I. Süddeutsche Katechismen, 721-731: Volget in dreyen vnterschidlichen haubt leren, Was ein yeder mensch wissen, glauben vnd thun sol,... Die erste lere inst vom Gesatze,... Volget die ander lere: vom Euangelio vnd dem glauben.. ... Volget die dritte lere: von guten wercken.

30) Otto Clemen, ed., Luthers Werke in Auswahl II(Berlin: Walter de Gruyter, 1950), 38-59. = LW 7, 204-229.

31) A. Lang, ed., Der Heidelberger Katechismus und vier verwandte Katechismen, LXXIX-LXXXII. 여기서 랑은 우르시누스의 소신앙교육서와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루터의 1520 저술에서 삼중구조의 신학적 뿌리를 발견할 있다고 주장한다.

32) Walter Hollweg, Neue Untersuchungen zu Geschichte und Lehre des Heidelberger Katechismus, 86-110. 111-123에는 베자의 불어판 간단한 기독교 신앙고백 독일어로 번역되어 1562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출판된 번역문이 실려 있다. 이러한 홀벡의 주장에 대해 비르마는 상세하게 분석하고 비판한다. 다음 참조.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83-84.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168-171.

33) Lyle D. Bierma, ed., An Introduction to the Heidelberg Catechism, 85-86.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입문』, 17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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