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대학 인가(認可) 기초이념과 현실의 평가

▲ 김철봉 목사 부총회장 사직동교회

고신대학의 인가 기초이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고신대학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고려신학교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고려신학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들의 순수한 믿음 가운데 탄생하였다. 학교라는 기관은 일반적으로 치밀한 계획이 앞서고, 인력과 재정이 확보됨으로 설립된다. 그러나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그와는 달랐다. 주의 말씀을 죽도록 순종하며 살던 주의 제자들이 감옥에서 품었던 거룩한 이상을 감옥 밖에 나와 실현하게 된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19407월 투옥되어 5년 동안 옥고를 치르던 주남선, 한상동 두 목사가 옥중에서 일본의 패망과 출옥의 날을 바라보고 한국 교회 재건을 위해 신학 교육기관의 설립을 기원했다. 이 들은 당시 감옥에 있으면서 한국교회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19389월에 보인 제27회 총회에서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일본 신으로 심기는 신도(神道)를 수용하여 신사참배가 애국적 의식임을 자각하고 또 신사참배를 솔선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한국 장로교회는 공적으로 절을 하게 되고, 이후 교회 지도자들의 90퍼센트 이상이 신사참배를 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참 목자를 잃은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런 변절한 교회 안에서는 성경을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이 기회를 포착하고 교권을 잡았다. 성경의 절대무오를 주장하고 가르쳐 온 평양의 장로회신학교가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문을 닫게 되자, 자유주의자들은 정치력을 앞세워 기민하게 일제와 타협하고 양보하면서 평양에 평양 장로회 신학교’, 서울에 조선신학원을 세웠다. 변절한 한국교회는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로운 무대로 변하고 말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일제가 무너지는 날, 한국교회는 신앙과 신학, 교회의 총체적 재건이 반드시 필요했다.

1945815일 대망하던 해방의 날이 왔다. 일제가 연합군 앞에 백기를 들고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옥에 갇혔던 종들도 817일 풀려났다. 성도들은 옥에서 풀려났으나 한국 교회의 현실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감옥에서 풀려 나온 종들은 주의 교회를 위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변절한 죄에 대한 공적인 회개를 외치고, 교회의 정화를 통한 교회 재건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변절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부르짖음에 더욱 큰 증오감을 품고 응할 뿐이었다. 이들은 오히려 기존 교권을 수단으로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는 주의 제자들에게 박해를 가하여 왔다. 이런 환경 속에서 주남선, 한상동 두 목사는 옥에서 품은 뜻대로 참된 말씀의 사역자 양성을 통한 한국장로교회의 재건을 목적으로 부패한 교권이 지배하는 교회의 제도권 밖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신학교의 설립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순종하고, 주의 교회를 재건하고 진심으로 봉사하기 원하는 종들이었으나 신학자는 아니었다. 신학교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신학자가 필요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선한 소원을 미리 아시고 박윤선 박사를 보내주셨다. 박윤선 박사는 일찍이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 두 번이나 유학하여 당시 세계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메이첸(Gresham Machen)과 반틸(Cornelius van til)에게서 연구하고 돌아와 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쳤고 만주 봉천 신학교에서 봉사한 적이 있었다. 설립자들은 학교를 시작하기 전 박 목사를 강사로 진해에서 6주간(1946. 6. 23~8.10) 신학강좌를 열었다. 이 신학강좌를 마친지 40일 만에 부산에 있는 구 일신여학교(현 금성중학교)의 한 교실을 빌려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다. 학교란 어떤 이념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필요한 재정적 배경, 가르칠 수 있는 인물, 건물이 필요하다. 그러나 설립자 한상동 목사는 10년 후에 밝힌 대로 돈 없이, 집 없이, 인물 없이하나님께서 주실 줄 아는 믿음으로 문을 열었다. 건물을 준비하지 못한 이 학교는 문을 연 후 반 년 동안 장소를 세 번이나 옮겨 다니게 되어 보따리 신학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듬 해(1947) 415일에야 광복동 17번지 적산 건물을 빌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교수 학생 모두가 주님의 교회재건이라는 선한 목적을 위해 뜨거운 사랑과 정열을 가지고 모였기 때문에 그 동안 당한 모든 불편함과 어려움을 주를 위해 겪는 특권으로 여기고 오히려 기쁨으로 감내할 수 있었다.

학교설립자들은 고려신학교를 통해 지난날의 장로회신학교의 장로교 정통신학을 계승하고, 더 나아가 바른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교회 재건에 봉사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 19471014일 당시 한국 장로교회가 정통신학자로 인정하는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모셔왔다. 그러나 설립자들과 방법론적인 차이가 생겨 결국 1948527일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박윤선 목사가 2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박윤선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밝힌 것과 같이 단순한 보수 신학자가 아니라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였다. 그를 통해 고려신학교에 개혁주의 전통이 확고해졌다. 물론, 고려신학교의 신학적 정립이 그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참된 신앙과 생활로 그의 신학을 뒷받침해주는 설립자 한상동 목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학교에 그와 같은 학식을 가지고 협력할 많은 사람을 동역자로 보내주셨다. 개교한 지 두 달 만에 가르치기 시작한 한부선 선교사를 위시해서 이상근 목사, 김진홍 목사, 김철현 선생, 안용준 목사 모두가 다 웨스터민스터 신학교 출신이었다. 그래서 고려신학교는 당시 한국의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라 불리기까지 했다. 이는 고려신학교의 신학이 철저한 개혁주의 정통신학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오직 성경이라는 개혁주의 신학의 기치 아래, 객관적으로 주어진 기록된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전대 표준으로 삼아 가르치고 생활한 고려신학교의 영향은 당시 교회 생활에서 뚜렷하게 나타났었다. 해방 후 특별히 6.25사변 후에 나타나게 된 박태선을 위시한 각종 주관적, 체험적 신비주의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 많은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동요되었으나 고려신학교와 관계를 맺은 지도자들과 교회들은 조금도 동요를 받지 않았다. 고려신학교와 이 학교를 지원하는 교회들은 말씀을 통한 주님의 통치에 만족하고 살았던 것이다.

19601213일 승동측과 우리 교단이 합동하면서 고려신학교에도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19619월 합동총회는 합동총회의 상호약정을 위반하고 고려신학교의 폐합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19621017일 고려신학교의 설립자요 이사장이었으며 당시 합동총회 이사회 부이사장인 한상동 목사가 고려신학교의 복교를 선언 함으로 우여곡절 끝에 고려신학교는 복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590 교회 중에서 150 교회를 승동측에 잃었고, 15년 이상 고려신학교를 위해 봉사한 이상근, 김진홍, 안용준 교수를 잃게 되었다. 신중성이 결여된 합동, 학교의 폐합, 복교의 역사의 저변에는 지난날 그리스도의 통치와 인도만을 바라보고 살아오던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생활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겼고 이들의 신앙과 생활에도 인간적인 요인이 상당히 작용했다는 사실을 보게 한다.

19649월 총회에서 고려신학교가 총회직영 신학교가 되었고, 총회적으로 구성된 새 이사회는 19659월 총회에서 총회 유지재단을 구성했다. 이 이사회는 신학교에 부속되어 있는 대학부를 정식 대학으로 승인 받는 일을 추진하고자 했다. 원래 대학부는 고려신학교 초창기에 2년제 예과였던 것을 기독교 대학 추진을 목표하고 1955년에 4년제 칼빈학원으로 개편하여 독립적으로 운영되어 온 기관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편이 허락되지 않아 1964년에 다시 고려신학교 대학부로 흡수된 것이었다. 대학 인가 없는 기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병무 소집 연기를 받지 못하는 등 불이익이 많았기 때문에 대학 인가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675학교법인 고려학원인가를 받게 되었고 학교 법인 고려학원의 인가가 난 후 19701222일에 고려신학대학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다. 1955년 정규대학 설립을 목적하고 예과 2년제를 4년제로 개편하여 칼빈학원을 세운 지 15년 만에 그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고려신학교 부속 대학부가 대학인가를 받게 되므로 기존 고려신학교는 법적으로 폐교 되고 부속기관이었던 대학부가 법적으로 학교의 주체가 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써 교회가 신학교를 설립, 유지 감독하는 개혁주의 원리 생활에 굴절이 생기게 되었다. 대학과정의 교육은 목사후보생 교육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고려신학교 과정에서는 목사 후보생이 교육기관에 속하고 교회가 세운 총회의 학교법인 이사회는 마땅히 목사후보생을 교육하는 신학 본과를 운영하고 감독해야 하지만, 이사회가 법적으로 대학을 운영하고 감독하는 기관이 되었다. 대학인가로 말미암아 개혁주의 교회생활에 이변이 생긴 것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1955년 칼빈학원을 독립시켜 대학 설립을 기도했을 때 이미 일반 기독교대학을 설립하는 것을 목적했었다. 그렇다면 이사회가 대학인가를 원할 때 이를 고려해서 교회와 신학교, 교회와 대학의 관계를 개혁주의 원리를 따라 연구하고 상호관계를 분명히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준비 없이 대학인가만을 받았으니, 교회는 체제 변화에 따라 당황하게 되고 또 교회와 대학과의 관계를 대학이 이미 설립된 마당에 다시 연구하고 재정립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가지게 되었다.

197012월 신학대학 인가를 받을 때 고려신학대학은 신학과만이 있는 명실공히 신학대학이었다. 기존 신학과 외에 기독교 교육학과와 종교음악과가 1977, 1978년에 증과 되었다. 이 학과들은 교회봉사라는 차원에서 신학에 인접한 학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신학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부담 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 중에는 신학대학을 발판 삼아 기독교 일반대학으로 변신과 확장을 바라는 분들이 있었다. 지난날 칼빈학원을 세울 때에 이루지 못한 이상을 이루어 보려는 것이었다. 학교당국의 건의로 이사회가 대학 명을 고신대학으로 고치고, 정관을 변경하여 기독교 일반대학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하고 1978년 총회에 건의하였다. 그러나 총회가 이 건의를 표결에 부친 결과 절대다수의 반대(재적 111명 중, 36, 74)로 부결이 되고 말았다. 이는 교회가 기독교 일반대학을 직영하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2년 후 1980년 총회 시에 이변이 일어났다. 학교 당국이 학교 교명과 법인 고려학원 정관 변경을 교육부에 신청하여 이것이 수락된 사실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19799월 의과대학 설치를 위해서 연구, 추진하기로 하고 이사회 15명과 10개 노회 대표 1인씩 총 25인 합동위원회가 구성되어 연구 추진하던 중 의과대학의 별도 설립은 어려움으로 고려신학대학에 의예과를 증과하는 방향으로 결의해서 문교부에 신청서를 보내었다. 정부 당국의 여건조사 결과 가능성이 인정되어 허락의사를 가졌으나 신학대학으로서는 어려우니 교명을 고신대학으로 바꾸고 그 결의사항이 담긴 이사회 회의록을 요청했다. 그런데 당시 이사장이 국외여행 중이었고 심사시한이 촉박하여 문교부에서는 학장의견서라도 된다 하여 학장은 신청한 학과들이 증과 인가되는 경우에는 교명이 고신대학으로 바꾸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는 의견서를 문교당국에 제출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80년 고려신학대학은 의예과 증설과 함께 고신대학이 되었다.

30회 총회록은 자세한 설명 없이 이렇게 기록한다, “교명 변경에 대한 것은 책임자가 사과하고 목회신학대학원 인가를 추진키로 하고 위원선정은 이사회에 맡기고 학장이 즉석 해서 사과하니 박수로 받다.” 교회직영 신학대학이 교회의 동의 없이 몇몇 특정인의 뜻으로 기독교 일반대학으로 전환된 것이다. 총회 총대들은 교회의 일반적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를 수용하고 관람객처럼 박수만을 보냈다. 고신 교회는 이와 유사한 역사를 몇 번이나 반복해 왔다. 몇몇 특정인, 몇몇 지도자들이 교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회를 이끌었고 이로 말미암아 교회와 기관은 말할 수 없는 손실을 보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난날의 합동이 그러했고, 신학교 폐합이 그러했다. ‘사조이사단사건이 몇몇 특정인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고. ‘법적 이사장확보를 위해 저지른 공문서위조사건등이 다 본질적으로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 고신교회는 처음부터 교회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신뢰했다. 이 결과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도자들로 지나친 교권을 행사하게 한 것이다. 교권은 사람을 자만하게 만든다. 교권을 쥔 사람은 다수 의견을 외면하고 자기 뜻을 최선으로 알아 이를 관철해 나간다. 여기에 편법이 동원되고 불법도 사용되는 것이다. 목적이 선하면 이를 이루려는 위한 방법도 선해야 한다. 그릇된 방법의 선택은 말할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고신 역사의 과거가 이를 잘 보여주었다. 총회의 사전 동의 없이 몇몇 특정인에 의해 본질적인 변신을 가져온 고신대학도 난국을 맞게 되었다. ‘신학대학에서 기독교 일반대학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의 문화적 사명의 완수라는 차원을 넘어 교회와 일반 기독교대학의 관계에 대한 원리적 이론의 뒷받침과 제도상의 재정비가 있어야 했다. 하나님의 영역주권을 믿는 개혁주의 세계에서 교회가 문화권에 속한 기독교 일반대학을 직영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물음에 깊은 연구와 토론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가 고신대학으로 변하고, 고신대학과 고려신학대학원으로 이원화되기까지 이 모든 과정에서 교회와 기독교 대학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제대로 논의하지 못하고 오늘까지 온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독개혁교회(CRC)에서 경영하는 칼빈대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기독개혁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칼빈대학은 고신대학교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학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교회는 19세기 화란에서 미국에 이민 온 개혁파 교인들이 세운 교회이다. 이들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교육은 질적으로 수준이 높아야 함을 인식하고 1876년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886년에는 신학교에 문과를 신설하고, 1890년에 들어서면서 목사 후보생이 아니지만, 교사가 되기 원하는 사람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기로 했다. 1910년에는 2년제가 3년제로 발전했고, 1920년 가을에는 완전히 인가를 받은 4년제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처럼 교회가 신학교를 운영하는 가운데 예과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하여 4년제 대학이 된 칼빈대학은 자연스레 교회의 학교로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칼빈대학을 소유하고 운영한다는 계획은 1986년부터 1926년까지 매 총회 시마다 열여섯 번의 논의가 이어졌다. 1896년과 1898년 총회는 독립적인 대학의 설립과 협회의 구성이 바람직하다고 결의하였고, 1900년 총회는 예과를 4년제로 발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분리의 찬반을 떠나서 개혁파 신조 위에 기초한 학문 연구와 교육 기관인 대학의 설립 자체에 대해서는 전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기독개혁교회 안에는 신학교와 대학의 분리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다. 1923년 총회는 예과를 형성하는 문과 교육은 원리상 협회가 운영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대학의 개혁파적 성격, 학문적 탁월성과 재정적 안정을 보장하는 협회가 구성되면 교회가 대학을 넘겨주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음 총회는 시기상조라는 결정을 내렸고, 개혁주의 신학교와 기독교 대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원리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을 다 아우르는 토론을 30년동안진행하여 결론을도출하였다. 이들의 결론은 학교는 고등교육까지 포함하여 교회가 아니라 부모들이구성한 협회가 주도해야 한다는 원리를 확인했다. 이것은 자녀들에대한 교육적 책임은 국가나 교회가 아니라 부모가 주체가 된다는 개혁주의 교육관에 기초한 것이었다. 국가나 교회는 부모의 책임수행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기독교 학교는 교회의 소유가 아니라 교회와 유관할 뿐이며 결코 교회학교나 교구학교가 아니다. 물론 교회의 재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교육의 주체는 부모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부모들이 큰몫을 담당하도록 했다. 비록 현실적인 이유에서 기독개혁교회가 칼빈대학을 직영하지만, 이 원리는 지금도 건재하다. 현재 기독개혁교회는 두 이사회를 임명하여각각 대학교와 신학교를 감독하고 있다. 이런 역사과정을 통하여 칼빈대학은 기독교 대학이 미션스쿨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채플과 기도회가 있다고 해서 기독교대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칼빈대학에도 채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도목적이 아니라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위한 말씀묵상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기독교 대학은 예수그리스도가 학문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면서 총체적 학문활동과 그 성격을 성경적 원리와 기독교 세계관을 근거로 제시해야 한다.

지난 역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신대학은 범교회적인 토론과 여론 수렴을 통해 고려신학교에서 고신대학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특정 인물들과 행정적 결정을 통해 신학교가 기독교 대학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 대학 자체에 대한 충분한 공감과 고민 없이 기독교 대학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불구하고 교단과 교수진의 꾸준한 정체성 부여를 통해 고신대학은 기독교 대학으로 상당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1993고신대학고신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입학자격을 기독교 신자인자에서 학습교인 이상인 자로 규정했다. 당시는 신학부, 자연과학부 의학부의 3개 학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신학부는 1991년부터 지원자격을 학습 이상인 자로 규정하여 왔으나, 1993학년부터는 자연과학부의 전 학과도 입학자격을 학습 이상인 자로 규정하여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그 결과 1993학년도 신입생의 73%가 세례 신자였다. 문제는 의예과였다. 상당한 반발이 있었으나 19939월 당시 이근삼 총장은 교육이념 구현을 위해서는 지원자격 규정이 불가피하다고 보아 의예과도 입학 자격을 학습이상인자로 확정하였다. 지원자격을 학습이상인자로 규정한 것에 반대하여 의학부 학생들의 소요가 있었고, 의과대학생 권동일 외 4명은 1994118, 고신대학교의 조치는 헌법이 보장한 교육의 평등권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헌법재판소에 소원을 제기하였다. 1997421일 헌법재판소는 “1995학년도 고신대학교 신입생지원자격제한 조치에 대한 부작위 위헌확인심판청구건을 기각하여 신급제한의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학과 신설 등 교육부로부터 불이익을 감내해야 했다.

고신대학은 신앙적 기준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맞서 왔으나 기독교 대학으로 신앙의 정체성을 채 꽃 피우기도 전에 지금은 또 갑작스러운 대학환경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출산율 감소와 함께 고교졸업생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고신대학교가 원하는 학습인이상의 고교 졸업생을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고신대학 뿐만 아니라 전체 대학들의 지원율이 현저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의학부의 불만은 그만두고라도 자연과학부의 불만도 예견된 것이었다. 지원율의 감소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지켜 온 그 불가피한 제한을 허물게 된 것이다. 자가당착적이지만 현실의 힘은 이념보다 강했다. 신급제한은 힘을 잃기 시작하여 점차 완화되고 탄력적 적용이라는 이름으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고신대학이 세상과 싸워 이뤄낸 지원 자격을 대학 스스로 허물 수밖에 없었다. 입학정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2005년 당시 총장이 되고자 했던 모든 이들도 한결같이 신급의 탄력적 적용을 거론하여 사실상 학습 이상인 자를 허물기 시작했다. 2004학년도부터는 학습교인 또는 6개월 이상 교회 출석자, 2006년부터는 기독교인 또는 본교 신앙교육에 동의하는 자로 대치되었다. 현재 고신대학교는 20개 학()960명의 입학정원을 두고 있는데, 지난 몇 년간 거의 유사하게도 <30% 정도의 비신자들>이 입학하고 있다. 지금 고신대학은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고교졸업생 수가 격감함으로 정원확보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방대학은 정원확보에 목을 매고 있으나 정원의 절반도 못 채운 학교도 생겨나게 되었다. 급기야 지난 해 9월 교육과학기술부는 사실상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현재 전문대를 포함한 대학정원은 58만 명인데, 2017년에는 고교졸업생 수가 597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 진학율도 떨어지고 있어 2017년부터는 심각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2020년의 경우 고교졸업생 수는 46만 명으로, 대학정원에 12만 명이 미달한다. 이 통계로 본다면 1천명 규모의 120개 대학이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다. 이런 대학 현실에서 고신대학교가 정원을 확보할 수 있을까? 지금 고신대학교는 생존을 걱정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다. 지금 고신대는 생존을 걱정해야 할 형편이지만, 고려신학교 때부터 내려온 신앙의 정통을 다시 생각한다면 이 어려움은 어려움으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고려신학교부터 면면히 내려온 신앙의 정통성과 학문적 탁월성을 바탕으로 고신대학교를 진단해보면 작지만 강한 대학의 비전을 볼 수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이 있다.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일을 벌여 놓고 추인 받으면서 사후에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몇 번의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더 이상 그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선배들이 고려신학교를 처음 세웠을 때 한국 교회를 향한 마음, 고신대학으로 바뀌면서 기독 지성으로 세상 모든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선포하려 했던 그 마음을 기억하고 차분히 의논하고 선택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등교육기관의 은혜가 우리의 대를 넘어 우리의 후대까지 이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고려신학대학원 출판, 1996) 175~181

양낙흥, 고신초기와 박형룡, (2013.11.12)

대담: 이근삼 박사에게서 듣는다: 이근삼총장과 기독교대학설립.” 월간고신 19943월호: 이근삼전집 7291

대담: 이근삼 박사에게서 듣는다: 고신의 미래상을 알아본다.” 고신회보 19802; 이근삼전집 7: 개혁주의 신앙과 문화 284-288

개혁주의 기독교학, 고신대학보 지령 100호 기념논문, 19857: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이근삼 박사 사역 50주년 기념논집 (총회출판국, 2002), 73

기독교 고등 교육, 교회의 사명인가?: 고신대학교와 고신대학원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위하여, 유해무 207-208/ [연속간행물] 개혁 신학과 교회: 교수 논문집 2003. volume 14

이상규, 고신대학교, 어찌할꼬?, , (201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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