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5일-27일 문경에서 열린 미래교회포럼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코닷-

 

서론 

▲ 홍성철 목사 대전 주는교회

20131030CNN 뉴스에 따르면, 지구의 기후 변화로 대부분 나라들이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거의 세계경제 3/112년 내에 기후 변화의 충격에서 오는 극단적 리스크에 직면할 나라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보도한다. 영국에 있는 리스크 분석 회사 마에플크로프트(Maplecroft)의 연간 리포트는 세계 대도시에서 경제성장 유지는 기후 변화가 심각한 방해물가 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오늘날 홍수로 사람들은 죽는가? 왜 지진과 태풍이 있는가? 왜 기근으로 사람들은 굶어 죽어 가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암으로 고생하고 죽는가? 왜 사람들은 아프고 죽는가? 왜 폭탄이 폭발되어 사람들은 죽는가? 왜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 나쁜 일을 행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성경적 관점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이해하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현재 고난을 소망으로 인내하기 위해 신자의 눈은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 영광에 고정해야 한다고 격려한다. 

8:17-30절의 문맥

8:17절에서 언급한 고난의 주제로서 고난의 중요성을 8:18-25절에서 상세히 언급하게 만든다. 신자는 고난이 존재하는 옛 시대 속에서 계속 생활한다. 고난의 반대는 하나님이 계시한 영광이다. 그 영광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는 교제이다(5:2). 그러나 그 영광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을 창조물의 고통이라는 상황과 더불어 설명하고자 한다(8:19-25). 현재 창조물도 신자도 고통을 당하지만, 구속의 희망은 확실하다. 그러나 신자는 영적으로 약해지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신자의 고난은 극복될 수 있다(8:28-30). 그리고 확실히 신자의 고난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있다(8:28-30).

그리스도의 구속을 기초로 성령의 첫 열매(8:23)를 갖고 있는 신자는 더 큰 비젼이 있다. 그것이 확실히 온 창조물이 구속에 참여할 것이라는 것이다. 창조물도 현재는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물을 버리지 않았다. 창조물은 구속을 기다린다. 그 구속은 하나님의 자녀의 계시로 발생할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구속받은 존재들임을 생각할 때, 창조물의 회복 또한 발생할 것이다.

8:14-15절에서 주요 중의 하나인 ‘양자됨’의 주제는 8:19절과 23절에서 다시 등장한다. 영광의 주제는 8:18, 21, 그리고 30절에 등장한다. 그런데 성령의 주제는 8장 전반에 걸쳐서 등장한다. 이 구절에서 신자는 종말론적 상속을 강하게 기다리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됨으로서 종말론적 상속을 설명한다. 그리고 8:29절에서 미리 신자를 예정하신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을 언급한다. 그러나 미래의 영광은 현재 시대에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당하는 조건이 있다. 신자의 미래의 소망은 현재 고난당하고 창조물과 탄식하는 상황 중에서 성령의 역할을 설명한다(8:26-27). 하나님이 현재 당하는 고난 중에서 성령으로 신자를 강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어려운 고난의 상황 중에서 인내하며 영광을 성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은 미래 영광을 바라보게 한다. 바울은 신자의 현재 고난의 상황이 미래를 어떻게 소망하게 하는지, 8장 나머지에서 길게 설명한다. 이 구절에서 신자 속에 내주하는 성령이 현재의 고난을 이해하게 만들고 고난을 극복하게 한다. 

1. 미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현재의 고난(8:18)

1) 선언: 현재의 고난은 미래의 영광과 동등하게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8:18a).

8:18절에서 ‘왜냐하면’으로 먼저 설명한다.(1)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미래 영광과 새 창조(65:17; 66:22)는 그리스도 교회에게 약속되었다. 그러나 이 소망이 확인되고 약속되는 수단은 고난이다. 현재 신자가 당하는 고난을 견뎌야할 이유는 현재 고난은 미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8:18). 어구 '왜냐하면 나는 생각하다'(로기조마이 갈, Λογζομαι γρ)는 엄격한 원칙에 따라 사고의 행동의 결과를 암시한다.(2) 바울은 어구 '나는 고려한다'는 현재 고난(고후 11:5; 3:13)의 시기에 바울의 역할을 권위 있게 선언한다(Λογζομαι).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3) 복음을 기초로 생각되는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하여 확실히 규정하는 의미로 사용된다.(4) 그래서 바울은 옛 시대를 극복하여 그리스도가 제공하는 회복의 사건을 확실히 고려하여 볼 때, 현재의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장차 베풀어질 미래의 신자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언한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신자가 현재 당하는 고난은 아직 계시되지 않았지만 미래의 영광과 비교하여 동등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미래의 영광은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영광이기 때문이다.(5) 

2) 종말론적 고난의 기간

바울은 현재 당하는 크리스천의 고난은 미래의 영광과 비교하여 동등하게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구 ‘중요한 때의 고난’은 3:26절에서 ‘곧 그 때에’(엔 토 눈 카이로, ν τ νν καιρ) 그리스도가 자기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종말론적 기간이다.(6) 어구 ‘그 현재의 시간’(투 눈 카이우, το νν καιρο)은 전적으로 부활과 파루시아 사이에,(7) 존재하는 악한 시대다.(8) 이 현재의 고난의 시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종말론적 기간이다. 로마서 3:26절에서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낼 때다. 종말에 성도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의 기간’은 유대묵시문학의 전통적인 주제다. 용어 ‘고난’(파새마, πθημα)은 영적, 혹은 신체적 괴롭힘으로서 그리스도와 크리스천이 당하는 고난이다. 로마서 8:18절에서 바울은 고난을 복수로 사용하는데 크리스천이 일반적으로 세상의 종말론적 상황에서 당하는 고난의 여러 종류로 본다. 따라서 신자의 현재의 고난은 미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8:17).(9) 따라서 현재 신자가 당하는 것은 고난들이며 고통들이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많은 고난을 경험한다(고후 1:5, 6,7; 5:24; 3:10; 1:24). 이 타락한 세상은 죄 많은 정욕에 굴복하는 반면(7:5), 이 현재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종말론적 고난의 사인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역설적으로 비록 신자가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종말론적 승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이미 분명히 나타났다고 본다. 

그 현재의 고난-로마 교회에서

로마 교회의 현재의 고난은 로마 교회의 신자의 추방과 그로 인한 경제적, 영적 고난과 관련이 있다. 유대 역사가 요셉푸스는 클라디오스 통치 9년에 유대인들은 도시에서 추방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는 클라디오스는 "크레스투스의 논쟁으로 로마에서 지속적으로 소요를 일으킨 유대인들을 추방했다"고 보도한다.(10) 대부분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하여 유대 회당에서 소요가 있던 관계로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고 본다. 사도행전 18:2절에 따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기원후 49년 로마에서 추방되었다고 보도되고 있다. 당시 유대인은 다른 나라 백성들처럼 로마법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쉽게 추방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다루어졌다.(11) 로마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성도들이 이미 경험한 일이다. 크리스천을 향한 로마인의 조롱과 희롱은 일상생활에서 당하는 크리스천의 고난이었다.(12)

로마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와의 충돌로 인한 갈등의 고난이었다. 바울 당시 로마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BC 31-AD14)가 이룩한 황금시대와 평화와 완전히 반대가 되어 가는 세상이었다. 로마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메시야와 유사한 존재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세상에 평화를 주고 황금 시대를 연 세상의 구세주로 선전되고 복음으로 선전되었다. 로마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로마의 황금시대의 출현하고, 세상은 목가적 풍경이나 자연에서 인간이 평화를 누린다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 후에 등장한 로마 황제의 네로의 집권 아래(AD 55-68) 세상은 목가적 자연적 풍경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바울은 로마의 칼의 폭력과 네로가 군사 캠페인으로 세상은 황폐하게 되어 가는 것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세상은 피조물과 인간은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더불어 로마에서 유대인이 추방되고, 크리스천은 환란과 경제적 불이익과 희롱의 말은 고난의 상황이었다. 바울은 로마가 전쟁 캠페인으로 인해 황폐된 타락한 세상에서 모든 창조물이 인간을 포함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13) 바울은 고린도후서 4:17절에서 영원한 영광의 소망과 비교하여 현재 고난은 일시적이며 약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로마서 8:18절에서 현재 세상은 고난의 시대다. 미래 시대와 비교하여 현재 고통은 비교할 수 없다. '비교할 수 없다'(욱 아키아, οκ ξια)에서 비교(아키오스, ξιος)'무게를 가지다'는 뜻이다. 따라서 현재 고난을 미래의 영광과 비교하여 그 무게를 잴 수 없다는 뜻이다. 

3) 미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현재의 고난

미래의 그 영광은 우리를 향하여 계시된다. 그 영광은 우리에게 계시될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실제로 계시될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암시는 그 영광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분명하지 않다. 바울에 따르면, 미래의 영광은 이미 우리의 것이나, 파루시아 때에 완전히 계시될 것이다.(14) 이 영광은 신자가 취하는 종말론적 상속이다(2:7, 10; 5:2; 고후 4:17; 3:21; 3:21; 살전 2:12; 딤후 2:10).(15) '계시되어 진다'(아포카루패세나이, ποκαλυφθναι)'후에 나타나다'는 말이다.(16) 용어 '계시되다'(아포카룹토, ποκαλπτω)는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의 계시인 종말론적 사건이다. 로마서 1: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으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다. 따라서 ‘계시되는 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승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cf. 고전 3:13; 3:23). 로마제국주의의 환상에도 불구하고, 종말에 성취될 창조의 영광은 구현될 것이며, 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구 ‘장차 우리에게 베풀어질 영광’에서 ‘장차’(텐 메루산 독산, τν μλλουσαν δξαν)는 미래의 영광의 '확실성',(17) 혹은 '영광의 임박성'을 의미한다. '장차'는 미래이다. 어구 ‘우리를 향해’(에이스 훼마스, ες μς)는 우리를 ‘위해’(for)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미래의 영광은 우리에게 베풀어진다. 어구 '우리를 위해'(에이스 훼마스, ες μς), 우리에게 베풀어지기 위한 영광을 암시한다.(18) 그래서 우리는 미래의 영광을 단순히 구경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다.

어구 ‘그 미래의 영광’(텐 메루산 독산, τν μλλουσαν δξαν)은 당시 로마 황제가 주는 영광이 아니다. 그 영광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파워(14:18; 9:11; 24:8; 29:3), 장막에서 흘러나오는 영광의 광채(40:24; 9: 23-24), 시내 산(24:16-17), 혹은 성전에서 나오는 광채다(대하 7:1; 6:3-4; 10:4; 43:2). 로마서 8:18절에서 계시와 영광의 회복은 예언 문학에서 주요 주제다. 구약 이사야 24:23절에서 주 여호와가 통치할 것을 기대한다. 이사야 40:5절에서 여호와의 영광은 계시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볼 것이라고 예언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계시는 모든 민족들이 볼 것이다(60:1-3). 하나님이 악을 이겨서 온 세상에 그 영광으로 가득찰 것이다(6:3; 14:21; 72: 19). 그런데 현재 고난의 상태에서 벗어나 미래의 영광으로만 제한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이미 선포된 복음의 승리가 언젠가는 온 우주의 창조물을 채울 것이다. 이제 바울은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었고, 모든 육체가 그 영광을 볼 것임을 확신한다. 비록 현재의 고난 중에서도 미래의 영광을 기대한다. 

2. 탄식하는 피조물의 고난(8:19-27)

1) 창조세계의 우주적 고난(8:19-23)

(1) 창조물의 탄식(8:19-21)

창조물이 구속을 고대하며 탄식한다(8:19)

전치사 ‘왜냐하면’(, γρ)을 통해 8:19절은 8:18절을 설명한다. 그래서 현재 고난이 미래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비교하기 위해 그 가치를 8:19절에서 증명하려고 한다. 바울은 창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계시를 강렬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분명히 8:18절에서 소개한 계시의 개념을 발전시킨다. 어떤 것을 계시한다는 사고는 그 대상이 숨겨져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숨겨져 있으나 미래 사건으로 계시될 것이다.

19절에서 바울은 '창조물'(κτσις)이란 용어를 인용하여 하나님 영광의 우주적 범주를 설명한다. '창조물'(κτσις)은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 세계다.(19) 창조물이 간절히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이다. 명사 창조물의 ‘진지하게 강렬히 기다림’(아포카라도키아, ποκαραδοκα)는 해방을 강렬히 기대하는 내재적 상태로서 아직 구속받지 못한 창조물의 특징을 말한다(8:19; 1:20). 동사는 구약에서 신자가 하나님을 향해 진지하게 기다린다는 의미다(37:7; 10:28).(20) '간절히 기다리다'는 동사는 종말을 간절히 기다린다는 의미다(8:23; 고전 1:7; 5:5; 3:20; cf. 9:28). 피조물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계시다. 즉 미래에 성도의 영화다(3:4).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8:14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자들이다( 8:14). 하나님의 아들들은 본문에서 ‘우리’(we).

창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계시다(탠 아포카뤂??span lang="EN-US">, 톤 위온 투 데우, τν ποκλυψιν τν υἱῶν το θεο). 바울은 여기에서 창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의 계시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고 말함으로 창조물을 인격화한다. 창조를 인격화하는 것은 노아 홍수 전통에서 등장하는 모습으로 종말론적으로 취급한다. 지구는 하나님 앞에 기도로 호소할 수 없으므로 천사들이 지구 대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신음한다. 그래서 지구는 압제자들을 대항하여 고소를 취한다(에녹 17.6).(21) 바울은 자연 세계의 회복을 책임질 사람들이 등장할 것을 기대한다고 암시한다. 자연 만물의 회복을 감당하는 사명은 로마의 작은 가정 교회 그룹들이다. 그들은 그 당시 알려진 세계의 땅 끝인 스페인까지 선교 소명을 확대하는 사명을 취한다.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계시’(아포카룹시스, ποκλυψις)의 나타남을 말할 때, 복음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속에서 진전되는 것을 말한다. 이 통치권의 행사는 당시 황금시대의 재현이나 도래를 선전하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나 네로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작은 가정 교회 그룹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 승리의 권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바울은 자연 세계가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고, 그 능력으로 온 세계가 회복될 것을 기대한다. 그런데 온 세계를 지배하고 확장하는 것은 로마의 군사력의 힘이 아니라, 로마의 작은 그룹인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한 자들은 로마가 주장하는 로마의 황금시대나 군대의 힘으로 이 사명을 성취하지 않는다. 로마 군대의 칼의 힘이 아니라, 이미 승리를 거둔 십자가의 복음의 승리를 통한 영적인 세상 정복을 의미한다. 그래서 로마에서 복음으로 구속된 로마 교회 작은 그룹들이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 세계를 지배하는 바른 권세를 갖고 행진해야 함을 바울은 말한다(1:28-30; 8: 5-8).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승리로 인해, 로마 교회의 작은 그룹들이 세상과 완전히 대조된 달라진 생활 방식과 윤리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1:18-32; 5-7) 창조세계의 생태계 시스템을 회복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으로 저주받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도 이제 하나님의 의의 승리를 간절히 고대한다(1:17). 그리고 창조세계는 아담의 타락으로 발생한 땅의 저주와 타락(3:17-19)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등장하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로마 교회의 작은 그룹들(12:1-2)이 생태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길 원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래서 창조세계는 변화된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하길 간절히 원한다.(22) 

창조물의 불완전(8:20)

바울은 이제 8:20-22절에서 왜 창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미래에 나타날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지 설명한다. 

(a) 현재 상황은 과거의 사건에서 유래했다(8:20a).

새로운 절(8:20)은 ‘왜냐하면’으로 소개된 새로운 절로 설명된다: '왜냐하면' 창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한다(태 갈 마타이오태타이 해 크티시스 휘페타게, τ γρ ματαιτητι κτσις πετγη). 8:20절은 현재 상황의 근원을 설명한다. 현재 창조물이 파괴되는 상황은 과거의 사건에서 유래되었다. 동사 ‘굴복되는’(휘페타개, πετγη)은 헬라어 아오리스트 수동태다.(23) 창조물이 과거에 어떤 것에 굴복되었다. 그러나 원래 창조물은 선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창조물의 저주는 인간 조상 아담의 타락에 그 책임이 있다. 그런데 바울 당시 로마 제국주의는 전쟁 캠페인으로 다른 민족들을 침략하여 온 세상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했다고 본다. 그러나 로마가 근본적 원수가 아니다.

피조물이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생겨 이 땅에 가시와 엉겅퀴다 돋아났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들은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살게 되었다(3:17-19). 인간 타락으로 인간관계가 파괴되었고, 그 저주는 자연 세계에까지 미쳤다. 동사 '허무하다'(마타이오태티, ματαιτητι)는 전도서 교훈이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로마서 1:21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지도 않고 진리를 거부한 자들의 헛됨을 설명한다. 헛된 것은 자연 세계를 남용하는 아담과 그 후손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창조의 의도는 신의 성품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해야 하는데(19:1-4), 자연세계를 남용하는 자들에 의해 자연이 헛되게 파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바울의 독자들은 당시 로마 제국의 야망, 군사 캠페인, 그리고 경제적 착취로 인해 어떻게 자연 환경을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 당시 자연 생태계의 상황은 로마가 선전하는 황금시대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제국주의 사상의 헛됨이 황금시대 회복이라는 선전되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세상의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벗어나 헛되게 흘러가고 있는 것 시대현상을 비평한다. 이런 일은 결국 아담이 죄에 굴복한 결과다.(24) 

(b) 굴복하게 하는 하나님(8:20b)

8:20b에서 창조물이 허무하게 파괴되는 상황은 더욱 설명된다. 창조물이 허무하게 굴복되는 상황은 두 가지로 자기로 설명된다. 첫째는 자연 세계의 허무하게 파괴되는 것은 자발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욱 에쿠사, οχ κοσα). 자연의 타락은 자연의 잘못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인 인간이 자연 생태계를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연이 아담과 그 후손의 죄에 참여하길 원하지는 않는 것처럼 인격화하여 말하기를 계속한다.(25) 둘째로, 자연이 헛되게 굴복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 디아 톤 휘포타잔타 에프 엘피디, λλ δι τν ποτξαντα, φ' λπδι). 분명히 자연의 저주는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를 언급하고 있다. 이런 사고는 분명히 창세기에서 유래했고,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저주를 땅에 내리고 있다(cf. 2 에스드라 [4 에스라] 7:10-14):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땅에 임했다.

그러나 창조세계의 저주는 새 시대가 도래할 때 자연은 원래 아름다움과 영광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 ‘소망 중에’(에프 엘피디, φ' λπδι)는 동사를 수식한다. 그래서 창조물이 소망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기다린다.(26) 어구 '소망 중에는'은 자연 세계에 저주를 몰고 왔던 인간이었지만, 새로운 인간성을 가진 로마 가정교회의 그룹들은 땅에서 저주를 제거하는데 참여할 것이며, 결국 미래에 구속될 것이다. 바울은 이런 종말론적 구속은 로마 제국주의의 선전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의 작은 그룹이 영광스런 미래를 소망함으로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말한다.(27) 

창조물 자체는 구속될 것이다(8:21a).

바울은 8:21절을 접속사 '왜냐하면'(호티, τι)의 절로 시작한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왜 창조물이 미래를 소망하고 있고, 기대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유대 묵시문학에서 아담의 저주로 부터 온 피조세계가 회복되고 해방될 것이라는 것은 하나의 중요한 주제다. 구약 이사야는 메시야가 올 때 미래의 영광의 시대를 소망한다. 이사야의 소망은 메시야인 왕이 등장하여 인간들에게 의를 제공하며(11:4-5), 에덴동산을 회복할 것을 소망한다(11:6-9; 65:17, 25; 66:22). 유대 문헌인 희년서는 하늘과 땅이 회복될 것을 꿈꾼다(1:29). 에스라 4 13:26절은 메시야가 창조물을 구속하기 위해 바다에서 올 것을 기대한다. 또한 지구는 다시 우주의 어머니가 될 때 심판 후에 의로운 제국의 도래를 기대한다(Sib. Or. 3.744-45).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에덴의 소망을 이루며 아담의 저주를 이겨낼 수 있을 것으로 소망한다.(28)

미래에 창조물 자체도 파괴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될 것이다(λευθερωθσεται π τς δουλεας τς φθορς). 자연의 ‘파괴’(프또라, φθορ)는 인간 타락의 헛됨의 결과며, 그 결과는 자연 생태계의 죽음과 파괴다.(29) 자연 파괴의 ‘노예 상태’(둘레이아, δουλεα)는 죄, 율법, 그리고 죽음에 노예상태를 비유적으로 묘사하는 용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물의 구속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8:15, 21; 5:1; 2:15). 350.(30) 동사 ‘해방하다’(에류데루오, λευθερω)는 종말론적 자유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이다. 이 종말론적 자유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나타남으로 오고 있다.(31) 동사 ‘해방하다’(에류세로떼세타이, λευθερωθσεται) 미래 시제로 8:19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계시될 때 하나님이 자연세계를 회복할 것이며, 자연 세계의 회복은 하나님이 인간들을 회복하는 결과로서 하나님의 선물이 될 것이다. 자연 세계의 회복은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이 목가적적인 평화의 시대로 흘러간다는 로마의 선전과는 정반대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당시 바울은 로마 황제 네로인 가이사가 홀로 주장하는 영광과 황금시대 재현은 하나님의 영광과 정반대인 세상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본다.(32)

창조물은 영광에 궁극적으로 기여할 것이다(8:21b).

종말의 구속의 때에 창조세계는 하나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를 것이다ς τν λευθεραν τς δξης τν τκνων το θεο). 회복된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해방의 목적을 섬길 것이다. ‘자유로 해방된’은 자유로 구속되어지는 상태를 뜻한다. ‘영광의 자유’(탠 애류세리안 태스 독새스, τν λευθεραν τς δξης)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는 것과 끝을 언급한다. 영광의 자유는 종종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를 나타낸다(8:18). 그 다음에 창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위하여 마련된 영광에 참여한다. 바울의 전제는 인간과 자연세계는 상호 의존적이다. 인간 구속은 우주적임을 전제한다. 하나님 백성의 영광은 모든 창조물을 회복될 것이다(3:21).(33)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는 로마 황제 가이사의 영광과 대조된다.(34)

2) 창조물 탄식의 일부로서 인간 고난(8:22-23)

(1) 인간은 창조물의 탄식에 포함되어 있음을 인식한다(8:22)

바울은 22-23절에서 구속을 위해 창조와 인간 고통으로 논의한다. 우주의 온 창조물은 탄식하며 고통을 당한다. 22절은 '왜냐하면 우리는 안다'로 시작한다(오이다멘 갈, οδαμεν γρ). 바울은 로마 신자들이 자연의 타락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2:2; 3:19). 이 자연의 황폐함은 로마 제국주의 숭배 사상의 전쟁 캠페인으로 자연 세계가 황폐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 결과로 모든 창조물이 함께 탄식한다. 모든 창조물σα κτσις)은 땅과 하늘에 있는 숨 쉬는 것과 숨 쉬지 않는 모든 것을 말한다.

바울은 모든 창조물이 탄식하며 고통을 당한다는 의인화 용법을 계속 사용한다. 자연이 ‘함께 탄식하다’(수스태나조, συστενζω)는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구속에 대해 자유를 갈망한다는 표현이다(8:21, 19). 창조물이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것과 신자의 괴로움(8:23)과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8:26)과 일치한다. 창조물이 지속적으로 노예상태로 있는 것은 인간 타락의 결과다(3:17; 24:1; 20:2; 2 Esdr 4:26; Gen. Rab 2; 5; 12). 그러므로 창조물은 하나님의 자녀의 나타남을 통해 자신의 운명이 성취되길 강렬히 바란다.(35) 창조물이 ‘고통을 당하다’(수노디노, συνωδνω)는 모든 창조물은 현재까지 고통을 당하고 있다. 창조물이 해산의 수고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개념은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고대하는 메시야 시대의 고통의 종말론적 이미지를 나타낸다(cf. 2 Esdr 4:27; 40; 5:50; Mek. Exod 16:29; b. Sanh. 98b; 26:17; 4:9; 13:8; 16:21).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에서 창조물은 미래의 구속을 고대한다고 강조한다.(36) 해산의 고통은 하나님의 심판을 고통스런 장면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13:8; 21:3; 26:17-18; 4:31; 22:23; 13:13; 에녹 162:4; 살전 5:3). 바울은 여기에서 메시야 원수의 유대적 개념을 회상하고 있다. 메시야의 원수는 메시야가 오기 전의 기간에 더욱 강렬하게 활동을 한다.

바울이 사용하는 자연을 의인화하는 것으로서 로마제국주의 선전과 유사하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계자들은 자연의 목가적 풍경과 황금시대를 선전했다. 그러나 바울은 온 피조 세계가 탄식 중이라고 말한다. 자연이 함께 탄식하고 고통을 당하는 표현은 창세기 인간의 죄와 자연의 저주를 언급할 수 있다(3:17-18; 31:38-40). 인간의 자연 착취로 땅이 슬퍼하며, 울며, 그리고 고통을 당한다(24:4-7; 4:1-3; 에스라 4 7.1-4). 바울이 말하는 온 피조 세계가 탄식하는 탄식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37) 

(2) 심지어 성령 충만한 신자도 그 고난에 참여한다(8:23a)

바울은 이 구절에서 신자의 고난의 주제로 다시 돌아간다(8:1-17). 이 구절에서 바울의 관심은 신자의 고난의 상태로 바뀐다. 신자는 창조의 고통에 포함된다. 창조물은 홀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자도 고통을 받는다.(38) 어구 ‘그 뿐 아니라 또한 우리도’(, 모논 데, 알라 카이, ο μνον δ, λλ κα, not only, but also)(5:3; 9:10; 고후 7:7; 8:19) 현재의 고난을 창조물만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도 받고 있음을 주지하며 8:18절의 주제를 발전시킨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선물을 받은 신자도 예외는 아니라는 말이다.

신자는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에콘테스, χοντες)는 표현은 현재 시제로 성령의 첫 열매를 묘사하는 말로 현재 시제로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 성령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구 ‘성령의’ 열매는 첫 열매가 성령이라는 의미로 동격적 소유격으로 언급된다. 그 성령은 모든 신자 속에 내주하신다(8:9; 11). 성령은 신자가 미래에 구원될 것을 완전히 보장하는 보증이시다. 우리가 죽는 그 날에 즉시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고전 15:42; 살전 4:13). 성령의 첫 열매는 소유격로서 학자들은 무엇이 첫 열매인지를 밝힌다.(39)

성령의 ‘첫 열매’(아팔캐, παρχ)는 성경적 용어로 곡식이나 동물의 어떤 종류의 드리는 희생 예물을 묘사한다(23:19; 25:2; 36:6; 22:12; 12:6, 11,17; 18:4; 26:2; 44:30). 이 문맥에서 첫 열매는 식물, 동물, 흠 없는 첫 열매와 관련이 있다. 첫 열매를 하나님에게 가져오는 행동은 모든 수확물은 하나님의 것임을 인지하는 행동이었다. 곡식의 첫 열매는 다가올 추수 때를 가리키는 용어다. ‘첫 열매’는 첫 열매는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구분해 놓은 첫 번째 몫이다(8:23; 11:16; 16:5; 고전 15:20, 23; 16:15; 살후 2:13; 1:18; 14:4). 첫 열매는 특히 다가올 우리 몸의 구속의 약속이다. 8:23절에 따르면 첫 열매로서 하나님의 성령은 종말론적 약속으로서 믿는 신자에게 주어진다(고후 5:5; 1:22; 1:14).(40) 유대주의에서 부활과 성령의 도래는 종말론적 소망의 중요한 요소다. 바울에게 부활과 성령의 임재의 내주의 선물은 이미 미래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미래는 이미 도래했지만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다. 성령의 첫 열매는 신자의 정체성을 표지한다.(341) 어구 ‘성령의 첫 열매’는 성령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관계를 나타낸다.(42) 왜냐하면 성령을 인간에게 주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얼마나 은사를 많은 받은 신자이더라도, 창조물이 죄에 굴복한 고난 중에서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지속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심지어 성령을 받은 신자도 신자 안에서 깊이 탄식한다. 신자는 또한 ‘그 자신 안에서’(엔 에아우토이스, ν αυτος) 깊이 탄식한다. 신자는 탄식하는 것은 성령을 가졌기 때문에 탄식한다. 우리가 ‘탄식하다’(스태나조, στενζω)는 문자적으로 어떤 상황에 의해 힘들고 압박이 될 때 위축된 상태를 말한다. 문자적으로 내면이 슬픈 감정 상태를 의미한다. 탄식은 신체적 감정적, 영적 고통 때문에 들을 수 있게 혹은 잘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표현하는 소리를 의미한다. 동사는 현재 시제로서 지속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불만족스럽게 몹시 슬퍼하는 상태를 이며 이런 고통스런 경험에서 구원을 위해 부르짖는 것을 뜻한다. 신자는 현재의 고난 중에서 힘없는 신자로서는 깊이 탄식한다는 감정을 비유로 표현한다(고후 5:2,4; 8:23). 그러나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양자되었다는 약속을 기초로 하여 작정된 종말론적 구원에 대해 깊이 인식한다. 이런 탄식은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된 구원의 종말론 성취를 간절히 기대하고 소원한다.(43) 따라서 신자가 그 자신 속에서 탄식하는 것은 “신자가 이미 구속받은 것과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은 사이에서, 그리고 의의 희망과 죄의 타락의 무게 사이에서” 갈등하고 신자의 내적 생활을 말한다.(44)

바울은 마음은 성령이 행동하는 장소로서(5:5), 그리고 종말 때까지 내적 갈등은 진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다(7:21-24). 그런데 8:26-27절에서 어떻게 성령이 신자의 마음에서 현재의 고난을 견디도록 영적 생활을 유지시키는지 알려준다. 바울은 8:15절에서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성령은 현재의 고난의 경험 속에서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해 준다.(45) 

(3) 신자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며 탄식한다(8:23b)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됨의 양자로 채택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바울은 미래 성취로서 양자됨을 기다린다고 언급한다(8:19,25; 20:36; 3:20-21; 딤후 4:8; 2:13; 9:28; 요일 3:2). ‘아들로 양자를 삼는다’(휘오떼시아, υοθεσα)는 자신의 자녀로 양자를 삼아 지위와 권리를 두게 한다는 의미다. 로마의 상속법에 따르면, 자신의 자녀가 아닌 아들을 어떤 사람을 취하여 법적으로 자신의 자녀로 선언하고 취급하고 돌보며 상속의 권리로 완전히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상속법은 유대인에게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으나 헬라와 로마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법이었다.(46) 이 풍습은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죄인을 그의 가족에 완전한 아들로 두는 하나님의 행동을 설명한다(8:15, 23; 9:4; 4:5; 1:5). 성령의 첫 열매는 우리 안에 양자됨을 완전히 기대하게 함으로 몸의 구속을 세운다.(47)

신자는 마지막 구속인 양자됨을 ‘기다린다’(아페크데코메노이, πεκδεχμενοι)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린다는 용어를 반복하여 사용한다. 우리가 탄식하고 고통을 당할 수 있지만 간절히 그 날을 기다리는 이유는 우리는 다가올 영광을 미리 성령으로 체험하면서 고난 중에서 성령의 첫 열매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하늘의 첫 열매다. 우리는 성령을 현재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 천국을 약간 알며, 우리의 마지막 운명을 확신한다. 교회에게 준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은 미래에 하나님의 구속의 그림자이며, 현재 신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위대한 사건이다. 동사 ‘간절히 기다리다’(아포데코마이, ποδχομαι)는 인내하면서 큰 기대로 기다린다는 의미다. 따라서 근면성실하게 그리고 인내하면서 크게 기대하면서 영광의 날을 기다린다는 뜻이다(8:40; 9:11; 18:27; 21:17; 28:30; Ignatius Eph 1:1; Trall 1:2).(48) 동사 ‘간절히 기다리다’는 현재시제로서 지속적으로 하늘에 마음을 둔다는 의미이며, 중간태로서 신자가 주어가 되어서 기다리는 자가 그 유익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동사 ‘간절히 기다리다’는 중간태로서 주 예수님을 환영하며 열망하여 기다리는 것이며, 우리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예수를 간절히 기다림으로 거룩하고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양자됨을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언급한다. 왜냐하면 몸은 세상과 의사소통하고 상호작용하는 기초이기 때문이다.(49) 몸의 구속은 미래에 타락에 굴복하지 않는 변화된 창조물의 문맥 속에서 변화된 몸을 소망한다.(50) 따라서 미래 구속은 인간 개인만이 아니라, 창조세계도 포함한다.(51) 미래 구원은 전 우주를 포함하며 타락의 결과를 초월한 것이다. 선택된 자가 기다리는 미래 구속은 창조질서에 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여기에서 초점은 창조 세계 구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을 기다리는 미래 구속이다. 신자는 몸의 ‘구속’(탠 아포루트로신 투 소마토스 휘몬, τν πολτρωσιν το σματος μν)을 강렬히 기다린다. ‘구속’(아포루트로시스, πολτρωσις)은 군사적 용어다. 전쟁에서 죄수들과 포도들을 구속한다거나, 몸값(ransom)을 지불하고 승리한다는 뜻이다.(52) 용어 ‘구속’(아포로루트로시스, πολτρωσις)은 고대 근동지역에서 어떤 신이 노예를 구입하면 그 노예는 신의 소유가 된다는 개념은 바울의 구속 교리의 모델이 되었다.(53) 여기에서는 바울은 미래에 몸의 구속뿐만 아니라 탄식을 공유하는 로마 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몸의 구속을 언급하고 있다.(54)

몸의 구속은 미래의 통치가 선언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연세계를 파괴하기 보다는 치유하는 다스림의 권세를 행함으로 그들의 지위를 세상에서 나타낸다. 비록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고, 재림 때까지 극복하지 않은 상태에 있지만, “바울은 로마 교회의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르게 여기에서 행동하도록 격려하고, 타락한 세상에 동화되어 살지 않도록 격려하는 의도한다. 그리고 그들의 몸의 일부인 탄식하고 신음하는 창조물들을 향해 바르게 행동하다 결연히 권고한다.(55) 그리고 창조물을 향한 회복의 행동은 가정, 일터, 로마 교회 회중, 그리고 선교의 영역에 까지 확대된다. 그래서 교회가 궁극적 창조 회복에 기여하도록 권고한다.(56)

벤자민 마이어스(Benjamin Myers)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유산을 언급하며 창조와 구원의 관계에서 로마서 8:15-23절은 다룬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물도 새 창조를 향해 새로운 지유와 질서를 향해 움직인다. 이 새 창조의 회복을 위해 비록 하나님의 자녀인 교회가 기여한다.(57)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하나님이 창조의 계획에 있어서 문화영역의 다양성을 세웠다고 주장한다.(58)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영역 주권의 다양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신체적, 심리적, 지적, 윤리적, 가정, 사회, 과학, 예술, 땅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가 있다.(59) 카이퍼는 그리스도는 존재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고 연설한다.(60) 그래서 카이퍼와 바빙크는 영역 주권 원리는 성경적으로 동의한다.(61)

요약하자면, 바울은 일시적인 현세의 고통을 견디도록 독자를 격려한다. 여기에서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아들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다리는 구속은 분명히 역사에 나타날 것이다. 그 구속은 전 창조세계를 포함한다. 창조 세계가 아담의 타락으로 저주를 받았던 것처럼, 신자의 구속이 완성될 때 창조 세계는 변화될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신자는 미래의 소망으로 충만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고통은 일시적이며 타락한 세계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다가올 미래의 영광은 회복된 피조세계를 포함한다. 8:19-22절에서 미래의 영광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물이 그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탄식은 지금까지다(아크리 투 눈, χρι το νν). 이것은 8:18절의 종말론적 양상을 반영한다. 

2) 구속되지 못한 세상에서 희망 선포(8:24-25)

바울은 이미 현재의 고난을 미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선언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8:24-25절에서는 소망의 본질 자체를 언급한다. 왜냐하면 신자가 바라는 소망 자체는 아직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1) 신자는 소망 중에 구속될 것이다(8:24a)

‘왜냐하면’은 이전의 설명을 소개한다. 우리는 이 소망 안에서 구원을 이미 얻었다(태 갈 엘피디 에소때멘, τ γρ λπδι σθημεν). '이 소망 안에서'(τ ....λπδι)는 마지막 창조 구속과 하나님의 아들들로 양자될 미래의 소망임을 정당화한다. 여기에서 동사 ‘구원을 얻었다’(에소새멘, σθημεν)아오리스트 수동태로서 과거에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알린다. 대부분 바울은 미래의 구원을 언급한다(e.g., 5:9, 10; 13:11; 고전 3:15; 5:5; 1:19; 살전 5:9; 딤전 2:15; 딤후 4:18). 그러나 여기에서 미래 구원의 측면도 배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소망 중에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신자는 현재 구원의 완성을 즐기고 있으며, 미래의 구원을 기대하고 있다. 구원이 이미 발생했지만, 구원은 미래에 성취될 것이다.(62) 바울은 신자의 구원은 복음에 반응하여 성취된 사건으로 본다. 비록 로마 교회 신자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현재는 열악한 상황 가운데 있지만, 교회가 창조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님 자녀의 지배권을 이미 발생했음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소망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묘사한다.(63) 

(2) 보이지 않는 소망(8:24b-c)

소망은 지금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소망이 지금 실현된다면, 더 이상 소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미래 소망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특징이다. 왜냐하면 신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미래에 몸의 부활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8:25절에서 바울은 만일 신자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한다면 간절히 바라보고 인내하면서 소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망을 기대하면서 인내한다.(64) 

(3) 보이지 않는 구속에 대한 소망(8:25a)

조건문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한다면’(에이 데 호 우브레포멘 엘피조멘, ε δ οβλπομεν λπζομεν)은 부정적 답변을 가정한다. 물론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한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65) ‘우리가 소망한다’(엘피조멘, λπζομεν)은 좋은 것을 확신하며 기대한다는 뜻이다. 동사는 현재시제로 신자의 생활방식의 태도를 그린다. 따라서 소망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 미래에 좋은 일을 확신하는 절대적 확신이다. 

(4)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소망(8:25b)

바울은 세 번째로 '기다린다'(πεκδεχμεθα)를 인용한다. 동사 ‘기다리다’는 현재시제로서 하늘 시민으로서 하늘에 마음이 지속적으로 고정된 자세를 뜻한다. 이 동사는 하늘에서 그의 신부인 신자를 데려가기 위해 공중에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강렬히 기다리고 열렬히 부르짖는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모든 세상 종류의 것들을 배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여 기다리는 태도를 말한다. 믿음의 사람은 청조물이 그런 것처럼, 예수님을 강렬히 기다리는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확실하게 인내하면서 하나님이 제공하는 미래를 기다린다(휘포모내, πομον). 이런 전치사구는 히브리서 12:1절에 등장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인내는 상황이 어려울 때 견디는 능력이다. 인내는 수동적으로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참으면서 악에 직면하여 승리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바울은 수동적으로 인내하라고 말하지 않고, 적극적인 윤리 행동을 요구한다. 그리고 로마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강렬히 기대하며 적극적으로 스페인 선교에 연합할 것을 요청한다. 또한 세상의 악을 거부하고 선을 행함으로 인내하라는 적극적 명령이기도 하다. 결국 하나님이 미래에 새 창조를 이루실 목표를 향해 노력할 것을 요청한다. 

3. 적용과 결론

1)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고 미래의 영광을 고대하는 성도: 로마 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영적으로 경제적으로 고난을 당했다. 로마인들이 말로 조롱했고, 재산이 몰수, 혹은 압수를 당하는 고난을 당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영적, 신체적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 현대 교인들은 미래의 영광을 비교하여 현세에서 고난을 당하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현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좁은 길을 가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신자를 생산하고 있는가? 오늘날 교회 신자들은 종말론적인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세상에게 고난을 주고 있는가? 과연 성도들이 미래의 영광을 그리고 있는가? 과연 현재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있는가? 교단과 교회 안에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순교로 시작한 교단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주고 있는가? 그 고난의 정신을 잘 이어오고 있는가? 우리는 신도에게 한 때는 싸우면서 고난을 당했는데 우리끼리 싸우고 있으면서 허무하고, 쓸데없는 비성경적인 거짓 고난을 스스로 당하고 있지는 않는가? 

왜 고난을 극복하고 인내하라고 격려하는 것 대신 번영의 복음이 판을 치고 있는가? 우리는 번영의 복음 보다 십자가의 복음의 고난의 신학을 잊고 살지 않는가? 왜 이런 번영의 복음이 사람에게 유해한가? 어떻게 성경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가?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강단에서 십자가의 희생의 고난의 복음이 소홀히 여기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그렇다면 강단에서부터 고난의 신학을 강조하고 가르치며 선포되어야 하지 않을까! 

2) 세상 속에서 창조 회복의 사명을 가진 교회: 로마서에서 새로운 인간성을 가진 로마 가정교회의 그룹들은 땅에서 저주를 제거하는데 참여할 것이며, 결국 미래에 구속될 것을 기대한다. 바울은 이런 종말론적 구속은 로마 제국주의의 선전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의 작은 그룹이 영광스런 미래를 소망함으로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창조의 회복을 사명을 가지고 있다. 

개혁주의 교회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바빙크의 그리스도의 영역 주권의 원리에 따라, 신자는 가정, 교회, 대학, 예술, 문화, 정치 경제,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선포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성직과 세상 직업 사이에서 거룩과 세속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가르쳐 ,성직과 세속의 직업의 부르심이 모두 거룩의 영역임을 알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또한 교단에서 운영하는 대학교나 대학원에서는 탁월한 사람들을 키우는 창조된 소수를 교육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학교 경영과 기타 행정은 그 분야에 전문가 그룹들이 경영하고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3) 생태계신학: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태초에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과 바른 관계를 세웠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로서 우리는 창조물을 사랑하고 청지기로서 관리할 책임이 있다. 창조를 위한 관심은 창조주를 향한 순종과 예배의 행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청지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해왔다. 우리는 우리의 무관심, 탐욕, 무지, 자만으로 이 땅을 해롭게 했으며 창조물과 관계를 지키지 못했다. 이런 신실한 창조세계를 돌아보지 못한 관계로 현재의 지구의 위기, 기후 변화, 땅의 생태는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시다(8:21). 그리스도의 성육신, 생애,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은 자신에게 만물을 화해중이시다(1:19-20; 2:6-8). 우리는 창조세계가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처럼 신음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은 행동할 것이며, 이미 역사하고 계시고, 모든 만물을 다시 새롭게 할 것이다(8:22).

우리는 우리가 범죄했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땅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착취했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오용했다. 우리는 신학과 실천 사이에 이분법적으로 나누었다.

우리는 자기를 섬기는 창조신학을 회개한다. 그리고 창조물을 괴롭히는 개인적 공동체적 생활방식의 양상을 회개한다. 

4) 성령으로 미래의 영광을 인내하며 소망하는 교회와 신자: 신자가 만일 시련 중에서 어려울 때 소망을 잃는다면, 우리가 어떤 확실한 결과를 잃고 상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미래 영광은 영원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타락한 시대에는 현재 고난도 있다. 소망을 갖고 인내함으로 어떤 고난도 인내할 수 있다. 

바울은 현재 창조물도 신자도 고통을 당하지만, 구속의 희망은 확실하다. 그러나 신자는 영적으로 약해지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신자의 고난은 극복된다고 믿는다(8:28-30). 따라서 신자는 성령의 능력으로 현대에 닥쳐오는 세속과 싸우는 과정으로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을 이겨야 할 것이다.  

 

각주

(1) cf. Gibbs 1971: 37.

(2) Hans Wolfgang Heidland, λογζομαι, TDNT 4 : 284.

(3) Käsemann 1980: 232.

(4) H. -W. Bartsch, λογζομαι, EDNT 2: 354.

(5) Robert Jewett, Romans, 508.

(6) Jorg Baumgarten, καιρς, EDNT 2: 233.

(7) Cranfield 1975: 409; Fitzmyer 1993c: 505.

(8) Murray 1959: 300; Morris 1988: 319.

(9) J. Kremer, πθημα, EDNT 3: 1; W. Michaelis, πθημα, TDNT 5: 930-35.

(10) Suetonius Claudius 25.4, 18, 그리고 Paulus Orosius Historiarum Adversum Paganos Libri VII: Dating the Claudian Expulsion(s) of Roman Jews (JQR, 1992), 137.

(11) Leonard Rutgers, Roman Policy toward the Jews: Expulsions from the City of Rome during the First Century C.E. in JCFCR, 97-98.

(12) Dieter Georgi, "Upside Down," 155.

(13) Robert Jewett, Romans, 509.

(14) Cranfield 1975: 409.

(15) James Dunn 1988a: 468.

(16) Moo 1991: 549; Murray 1959: 301.

(17) Balz 1971: 100; Morris 1988: 319; Moo 1991: 549.

(18) Murray 1959: 301; Moo 1991: 550-51; Fee 1994: 570.

(19) G. Petzke, κτσις, EDNT 2: 326; W. Foerster, κτσις, TDNT 3: 1000-35; Cranfield 1975: 411-12; Wilckens 1980: 152-53; Dunn 1988a: 469; Moo 1991: 551; Fitzmyer 1993c: 506;

(20) H. Balz, ποκαραδοκα, EDNT 133.

(21) Olle Christofferson, The Earnest Expectation of the Creature: The Flood Tradition as Matrix of Romans 8:18-27 (Stockholm: Almqvist & Wiksell, 1990), 117-18.

(22) Robert Jewett, Romans, 512-13.

(23) Cranfield 1975: 413; Wilckens 1980: 154; Dunn 1988a: 470; Ziesler 1989: 220; Moo 1991: 551.

(24) Robert Jewett, Romans, 513.

(25) Robert Jewett, Romans, 514.

(26) Sanday and Headlam 1902: 208; Murray 1959: 303; Cranfield 1975: 414; Moo 1991: 553.

(27) Robert Jewett, Romans, 514.

(28) Robert Jewett, Romans, 514.

(29) T. Holtz, φθορά, EDNT 3: 422-23.

(30) A. Weiser, δουλεα, EDNT 1: 350; K.H. Rengstore, δουλεα, TDNT 2: 261-80.

(31) K. Niederwimmer, λευθερω, EDNT 1: 433.

(32) Robert Jewett, Romans, 515.

(33) Murray, 1:305.

(34) Robert Jewett, Romans, 516.

(35) H. Balz, συστενζω, EDNT 3: 313-14; J. Schneider, συστενζω, TDNT 7: 600-603.

(36) H. Balz, συνωδνω, EDNT 3: 311-12; G. Bertram, συνωδνω, TDNT 9: 667-74.

(37) Robert Jewett, Romans, 516.

(38) Olle Christofferson, The Earnest Expectation of the Creature: The Flood Tradition as Matrix of Romans 8:18-27 , 109-110.

(39) Cranfield 1975: 418 Käsemann 1980: 237; Scott 1992: 259; Fitzmyer 1993c: 510; Fee 1994: 573). 어떤 학자는 성령의 열매를 일부분을 나타내는 의미로 본다(Sanday and Headlam 1902: 209; Murray 1959: 307; Delling, TDNT 1:486). 용어 열매 출생증명서가 아니고(Oke 1957), 희생제물의 의미도 아니다 (Käsemann 1980: 237; Moo 1991: 556; Fee 1994: 573; 그러나 던은 반대한다; Dunn 1988a: 473).

(40) A. Sand, παρχή, EDNT 1: 116; G. Delling, παρχή, TDNT 1: 479-89.

(41) Robert Jewett, Romans, 518.

(42) G. Delling, παρχή, TDNT 1: 486.

(43) H. Balz, στενζω, EDNT 3: 272-73; cf. P. Benott, We too Groan Inwardly As We wait for Our Bodies to be Set Free, Jesus and the Gospels (1973), 40-50; J.L. Nelson, The Groaning of Creation: An Exegetical Study of Romans 8:18(Diss. Union Theological Seminary, Richmond, VA, 1969); J. Schneider, στενζω, TDNT 7: 600-3.

(44) Robert Jewett, Romans, 518.

(45) Robert Jewett, Romans, 518-19.

(46) Hugh Lindsay, Adoption in the Roman Worl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25-28.

(47) F. Hahn, υοθεσα, EDNT 3: 381.

(48) A Sand, ποδχομαι, EDNT 1: 127; W. Grundmann, ποδχομαι, TDNT 2: 55.

(49) Robert Jewett, Paul's Anthropological Terms: A Study of Their Use in Conflict Settings, 218-19.

(50) Ziesler, 222.

(51) Gibbs 1971: 34.

(52) K. Kertelge, πολτρωσις, EDNT 1: 138; F. Buchsel, πολτρωσις, TDNT 4: 351-56; Posidonius Phil. Frag. 213.20; Diodorus Siculus. Hist. 37.5.3.

(53) A. Deissmann, Light from the Ancient Near East (1927), 319-30.

(54) K. Kertelge, πολτρωσις, EDNT 1: 139.

(55)Robert Jewett, Romans, 519.

(56) Robert Jewett, Romans, 519.

(57) Benjamin Myers,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Creation, Redemption, Election in Creation and Salvation: The Dialogue on Abraham Kuypers Legacy for Contemporary Ecotheology (Leiden: Brill, 2011), 228; cf. Clifford B. Anderson, Kuyper on Civic Sphere, in Creation and Salvation: The Dialogue on Abraham Kuypers Legacy for Contemporary Ecotheology (Leiden: Brill, 2011), 148-68.

(58) Richard J. Mouw, Abraham Kuyper: A Short and Personal Introduction (Grand Rapids: Wm. B. Eerd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2: God and Creation (Grand Rapids: Baker, 2004), 610.mans, 2011), 45.

(59) James D. Bratt, Abraham Kuyper: A Centennial Reader (Grand Rapids: Eerdmans, 1998), 461.

(60) James D. Bratt, Abraham Kuyper: A Centennial Reader (Grand Rapids: Eerdmans, 1998), 461.

(61) Richard J. Mouw, Abraham Kuyper: A Short and Personal Introduction, 46.

(62) Moo 1991: 558; cf. Dunn 1988a: 475.

(63) Robert Jewett, Romans, 520.

(64) Balz 1971: 68

(65) Robert Jewett, Romans,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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