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삼위일체 교리 ...................

 

   

▲ 김영수 장로

고신대에서 교무과장, 사무처장을 역임하였으며고려신학대학 및 Midwest Univ.에서 공부하였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교회 중직 자들에게 당신이 믿는 참 신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를 질문하면 우물쭈물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삼위일체 교리는 초대교회 신론 논쟁의 핵심 과제였으며 관심사였다. 간략하나마 이번에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한다.

. 서 론

가장 권위 있는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 신조(325/ Nicaea Creed 信條)와 함께 칼빈(Jean Calvin, 1509~1564)의 삼위일체 교리(Trinity doctrine)라고 본다. 니케아 신조는 개신교 교파들을 비롯한 로마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등도 권위 있는 신조로 받아들이고 있다.

 

니케아 회의와 아리우스 주의

아리우스(Arius 250년 경~336)는 초기 기독교시대에 활동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성직자이며 신학자이다. 그는 성자 예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닌, 단지 인간일 뿐이고, ‘성부에게 종속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는데,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직접 주제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자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는 몸을 입은 로고스(헬라어 말씀’, ‘진리’).

그리스도는 변하고 고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변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유월절을 지키는 문제와 아리우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독들을 니케아로 소집하고 회의를 열었다.

코스탄티누스 황제는 모든 감독들에게, 작성한 니케아 신조(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내용)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300여명의 감독 중에는 20여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아타나시우스(296~373)325년 부제 자격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를 수행, 1차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 논쟁의 현장을 목격한다.

328년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죽었을 때 젊은 나이에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주교직을 계승한다.

주교가 된 후 이 기간 동안 나일강 유역의 콥트 교회 수도사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파코미우스와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그 때부터 리코포리스의 주교인 멜레티우스와 아리우스주의의 이론을 이단으로 공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신성을 수호하고 지키기 위해 평생 투쟁의 삶을 보낸다. 이로 인해 아타나시우스는 일생에 다섯 번이나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망명자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비록 아리우스파가 패하기는 했지만, 당시 제국의 동방 지역에서는 아리우스주의가 오히려 더 우세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대체로 아리우스주의자들로 아리우스의 가장 큰 적인 아타나시우스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335년 그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을 박탈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를 티레(오늘날의 레바논)으로 추방시켰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다시 복권되었다.

339년 아리우스파는 교회회의를 열고 알렉산드리아 주교 자리에 그레고리우스라는 인물을 임명하고 아타나시우스를 해임하고 추방한다.

343년 이탈리아 반도의 주교 50명이 모인 사르디카 교회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아타나시우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유일한 주교로 선언한다.

345년 그레고리우스가 죽자 황제 콘스탄스의 비호 아래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복권되었다. 350년 아타나시우스의 옹호자였던 황제 콘스탄스가 죽자 다시 상황은 아리우스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356년 군대를 파견하여 아타나시우스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성 테오나시오 교회를 급습하고 수많은 신도들을 죽이는 유혈사태가 발생한다. 아타나시우스는 기적적으로 탈출 이집트의 사막에 있는 수도사에게로 피신했다. 6년간 계속된 도피는 박해자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고 율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하자 잠시 박해가 끝났다.

362년 율리아누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추방하였다. 그 후 율리아누스가 전사하고 발렌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자,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복권되었다.

365년 아리우스파였던 발렌스 황제는 365년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추방하였다.

366년 복권은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자, 황제는 결국 아타나시우스를 366년에 다시 복권시켰다. 4개월 만에 복권된 것이다.

그 후 아타나시우스는 3735278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지냈다. 그는 335년 이래 366년 까지 31년 동안 다섯 번에 걸친 주교직 박탈과 복권이 연속되었다. 336년 복권 이래 373년 생애를 마감하기 까지 7년간은 평온한 생활을 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 27권 체제의 목록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주교직에 복귀한 직후 367년 부활절에 그의 교구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신약 27권의 목록은 신약 정경으로 확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 성경이나 삼위일체 교리가 어떤 수난의 역사와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까지 전승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 소중함과 의미는 매우 깊다.

반면, 칼빈의 생애 또한 1517년 루터가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 조항을 발표하면서 부터 시작된, 서슬이 퍼런 로마가톨릭의 교권 하에서도 성경적 개혁주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한 55년의 생애가 수난의 역사였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우리 개혁주의교회가 사도들의 신앙고백서인 사도신경을 소중하게 여기는 반면, 그리스 정교회는 4세기 로마제국 주교회의에서 만들어진 니케아 신경을 예배 시에 고백한다. 교회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로마 가톨릭은 공식 신앙고백은 니케아 신경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로마가톨릭은 11세기 이후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신다.”고 고쳐 사용한다.

 

. 본 론

칼빈은 플라톤의 사고 영역에 서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칼빈은 인간이 영원을 사모하는 본성에 의해, 하나님을 지각(perception)하고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종교적 존재라고 본다. 우리는 모든 인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희미한 의식을 발견하며, 인간은 이런 의식을 피할 수 없다.(.3.2)

기원전 플라톤(427~347)은 이데아의 세계, 형상이론, 선천적인 지식 등을 논하면서 영혼불멸을 주창하고 인간이 종교적 존재라는 점을 언급했었다.

칼빈은 플라톤적 사고를 가진 반면, 바로 다음세대는 플라톤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조한 사실을 보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전환은 제네바에서 칼빈을 계승한 베자(Theodore Beza, 1519~1605)에게서 분명히 들어난다. 베자의 아리스토텔레스사고 구조는 후기 개혁신학의 전반적인 성격(개혁주의 스콜라 신학과 청교도주의’)에 칼빈의 사고 구조(수정된 신플라톤 주의)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칼빈이 세세한 부분 각론에서 플라톤을 따랐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후기 개혁 정통신앙(또는 스콜라 신학’) 역시 철저히 아스리토텔레스 주의 노선에 섰다는 견해도 아니다.

톤은 수평보다는 수직을 더 지향했으며, 원인적이기 보다는 직접적이었다. 플라톤은 신(데미우르고스)의 존재에 대한 내재적 논증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본체론적 세계를 강조하였다. 어거스틴, 안셀무스, 데카르트도 그랬었다.

본체론적 증명이란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존재론적 증명이라고도 한다. 신은 완전하며 그 완전성 안에는 존재라는 성질도 포함되어야 하고, 그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완전성이 결여된 셈이므로 신은 존재해야 한다는 논법이다.

추상적 존재를 좀 더 수평적이고 간접적이며 인과적으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골격인 형이상학 체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플라톤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수사학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직보다는 수평을 지향한다. 직접적이기 보다는 원인적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모든 증명은 인간의 과제로 남겨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론적 논증을 강조한다. 신의 존재를 우주론적으로 증명한다. 1운동자(Prime Mover), 목적인(Final Cause), 필연적 존재(Necessary Being), 최고 존재(Highest Being)라는 사고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영향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연역적인 연구에 관심이 있었다.

우주론적 증명이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자연이 존재하는 이상 그것의 창조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자연계의 인과 관계에 따라 거슬려 올라가서 결국 제일원인으로 신의 존재를 설정한다

 

칼빈은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 우상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특징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우상과 구분되는 점 성경을 떠나 있는 인간은 신에 대한 지각을 지닌 종교적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신이든 찾기 마련이다. 그러나 유일한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곳은 성경뿐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무한한 영적 실재이시며(13.1) 삼위로 계시는 한분이시다.(13.2) 이점이 여느 우상들과 구분되는 두 가지 특징이다.

후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본질(nature), 외연(extent, 外延-일정한 개념이 적용되는 사물의 전 범위), 완전(perfection), 속성들(attributes)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들을 객관적 본문에서 성경에 적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칼빈은 플라톤의 신빙성 개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면을 할애 한다.

칼빈의 자연신학 배척 칼빈에 의하면, 성경이라는 안경은 하나님을 알되 창조주로서만 아니라, 구속주로서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요, 만물의 유일한 원작자와 통치자로 알뿐만 아니라, 중보자의 위격을 지니신 구속주로서도 이해한다. 안경이라는 도구적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과 믿음이 없이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 나오는 유일한 인도자요 교사의 역할을 한다.

자연이라는 안경만으로는 참 신이신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자연이라는 거울이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출발점이라는 생각을 배척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자연신학이란 타락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찾기에 불가능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성경이라는 안경을 끼기 전에는 자연이란 거울이 비치는 창조주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참 하나님에 대한 설명

신앙인의 반응 칼빈의 성경 교리는 우리는 참 하나님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일단 성경 안에서 참 하나님을 알게 되면 믿음, 경건 또는 선행의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특히 칼빈은 성경에 관한 교리를 추상적으로 다루면 안 된다고 한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동안 모든 우상들과 구분되는 참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12).

창조주와 피조 인간의 본질성경의 하나님은 두 가지 특성에서 여느 인간이 만든 신들과는 구분된다. 하나님은 무한한 영적 본질이시며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 분이시다. 피조된 인간은 신적 형상을 지닌 유한한 영적 본질이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사고

어거스틴은 성경적 논증을 위한 형이상학적이고 사색적인 뒷받침들을 많이 강조한다. 어거스틴의 신학적 기초는 인간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형상은 삼위일체에 관한 유추들을 인간 자신의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절대적 구분도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구속적 관심으로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 할 수 있는 방법은 믿음, 오성, 시각이라는 사닥다리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칼빈은 형이상학적이고 사색적인 사고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런 사고는 성경의 뜻을 밝히고 더 잘 이해하는 데만 사용한다. 신학적 기초로 인간의 죄는 성경 없이 하나님을 충분히 그리고 신뢰할 만하게 알 수 있는 가능성을 파괴했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으신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라고 하는 견해를 갖는다.

칼빈의 구속적 관심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께서 우리를 구속, 재창조하시기 위해서 온전히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지 않은 채 인간이 되신 방법을 통해 구속하셨다고 본다

 

화상(畵像)에 대한 칼빈의 견해

성화의 교화 기능, 추상미술에 대한 견해 칼빈은 하나님을 형상화 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결부시키고, 따라서 그릇된 경배를 하게 되는 것이다.(.11.9) 칼빈은 화상(畵像)이 교육적으로 무익하고 보는 것이 듣는 것 보다 못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눈(화상)이 아닌 귀(말씀)을 강조한 종교개혁의 전반적인 시각과 일치한다. 이것은 신앙과 예배는 감각보다 마음에 속한다는 전반적인 자신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주장이다. 칼빈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들만 조작을 하든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눈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없는 하나님의 엄위를 추한 상징물들을 통해 하락시켜서는 안 된다.(.11.12)고 일침을 놓는다.

어떤 예술 비평가는 칼빈이 현대의 추상 예술에 대해 암시적인 반대를 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인간을 필요 이상 숭배하면 신성모독에 해당된다는 점

베드로의 바른 자세 칼빈은 인간에게 숭배에 이를 정도의 경의를 표하는 것은 신성모독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엎드려 절한 것에 대해 논하면서 고넬료가 하나님 대신 베드로를 예배할 의도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베드로는 진지하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다.”는 점을 강조한다. 진정 한분 하나님만을 섬기고 모든 영광은 고스란히 한분에게만 돌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2.3)

사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교통로가 아니다 아마 칼빈은 숭배에 이를 정도로 경의를 표하거나 사제가 좀 더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교통로를 갖고 있다는 추측 하에 기도를 부탁하거나, 그 밖의 관행들이 그릇되고 위험한 것이라고 시사하는 듯하다. “경건의 의식이 한분 하나님 이외에 다른 대상에게 드려질 때는 틀림없이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 발생한다.(.12.3.)고 지적한다.

 

삼위일체 교리

전문 용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칼빈은 대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 믿음-즉 성부, 성자, 성령이 한분 하나님이시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서로가 다른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는 믿음에 일치한다면삼위일체를 표시하고 전문 용어들을 아예 쓰지 않아도무방하다고 생각했다.(.13.5.)

인간이 제작한 부산물은 비판 가능 따라서 칼빈은 삼위일체가 무엇보다도 이 믿음에 관한 문제이며, 언어로는 그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의 단어들이나 옛 신앙고백서들의 문구들에 제한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신경에 서명하라는 페터 카롤리(Peter Caroli)의 요구를 거부했으며, 심지어는 니케아 신조의 문구를 자유롭게 비판했다.

칼빈은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자 하나님은 구속주 하나님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외적 사역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초대하시고 외적 수단들에 의해 우리를 보존하신다. 고 설명한다

 

삼위일체 위격의 자존성

세 위격의 자존성 칼빈은 삼위일체 세 위격 가운데, 각 위격의 자존성 또는 충분한 신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세 위격의 각각은 자존성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신 신이시다고 강조한다.

성부 하나님은 행위의 시작이자 만물의 원천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신적 지혜이자 만물의 통치자요, 분배 자이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은 신적 행위의 권능 또는 효과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영원성

위격의 순서는 무의미 아버지의 영원성은 아들과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이 영원에서 먼저와 나중을 찾는 것은 불가하다.(.13.18) 성부를 먼저 생각하고, 다음에 성부로부터 성자를,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는 순서를 지키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일이다.(.13.18)

 

성경의 참 하나님의 특징

두 영적 본질의 차이점 칼빈이 말한 참 하나님의 특징은 이교도들의 거짓 신들과 성경의 참 하나님은 구분된다. 하나님 안에 있는 불멸의 영적 본질과 인간 안에 있는 피조된 불멸의 본질로 구분된다. 하나님의 특성은 무한성과 영원성을 가진 영적인 본질이시다. 반면 인간은 지음을 받음으로 써 유한하고 타락함으로 써 죄악된 본질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 근거함 성경이 없다면 오류에 빠지고,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없다면 스스로 거짓 신들을 만든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적인 본질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근거한다. 하나님은 삼위성과 무한성과 영성 본성을 가진다. 칼빈은 신인동형동성론적묘사들이 하나님께는 절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칼빈과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교리 비교

인간의 산물은 궁극적 표준이 될 수 없다는 점칼빈이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용어들을 사용할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위격(person)이란 용어가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는 로잔공의회에서 옛 신조들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전통적인 진술양식이 아무리 존경할 만하고 참되다고 할지라도 기독교 교사가 그 진술양식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간주하면서 서명을 거부한 것이다. 또한 평화의 훼방자가 내미는 고대신앙고백서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전에는 교사가 이단으로 취급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로마교회에 존재하는 포악한 선례를 남기는데 도구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Warfield)

칼빈은 신조에 호소하는 대신 자기 글을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한 색인(index)으로 삼아 그것에 호소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인간의 어떠한 권위 - 비록 그것이 어떤 권위라고 할지라고 - 에 예속되기를 거부했고, 아무리 성경적인 신조라고 해도 그것을 인간 활동의 산물로 간주했으며, 궁극적인 표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칼빈은 믿음의 본질적인 문제를 이해하려고 할 때는 전통적인 신학용어들을 묻어버려야 한다고 권고한다.

세 위격은 고유성과 스스로 신적 본질을 가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분 하나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며, 성령은 아들이 아니다.” 세분은 독특한 특성에 의해 구분된다.(.13.2.)고 한다.

위 말은 얼른 보기에는 성삼위 안에서 파악한 질서가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단순히 반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칼빈은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마찬가지로 먼저 성부를, 다음에 성자를, 그 다음에 성령을 언급함으로써 삼위일체의 위격들 안에 있는 논리적 차서에 관해서 말한다.

그러나 성부께로서 나오는 건 성자와 성령의 본질이 아니다. 두 분 모두 완전하신 하나님으로서 스스로 본질을 지니신다. 오히려 성부께로서 나오는 것은 독생하신 성자의 고유성과 성령의 고유성이다. 즉 성부께로서 나오는 것은 신적 본질이 아니라, 서로를 구분하는 독특한 개성이다.

칼빈과 니케아 교부들과의 차이점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자존성과 세 위격이 본질상 지니고 계신 통일성을 강조한다. 개별성을 지닌 삼위성 -니케아 교부들과 신조가 주로 강조한 것은 본질의 통일성이 아니라 개별성을 지닌 삼위성이었다. 따라서 칼빈은 삼위일체께서 하나의 공통 본질을 지니고 계신 것을 성삼위 세분께서 나누시는 관계보다 훨씬 더 중시했던 것이다. 이것은 니케아 전승과 비교할 때도 정반대로 판도가 바뀐 샘이다.

칼빈과 어거스틴 차이점 칼빈은 고대 전승들과 교부들, 심지어는 어거스틴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태도를 견지하려고 했다. 어거스틴이 위격 개념들을 주로 신적관계들로 국한 시키려고 한 반면, 칼빈은 그 관계를 위격으로 보는데 더욱 열중했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자체 내의 관계에 주로 관심이 있었던 반면, 칼빈은 하나님 자신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시는 관계에 더욱 관심이 있었다.

칼빈이 구속교리에서 주로 다룬 문제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되는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어떻게 인간이 되셨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구속의 의미를 인간이 어떤 의미에서 신격화 하는 것으로 본 반면, 칼빈은 인간이 타락 이전에 누리던 상태로 회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성 어거스틴의 입장에서는 성령께서 사랑하시는 성부와 사랑을 받으시는 성자 사이에 사랑의 띠로 계신다. 따라서 어거스틴에게는 성부, 성령, 성자가 논리적 순서이다. 어거스틴은 성령의 사역을 주로 삼위일체 내의 사역으로 본 반면, 칼빈은 삼위일체 밖의 사역을 성령의 독특한 사역으로 보았다. 이는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성령의 사귐안에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위해 적용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자유롭게 강림하사 인간의 마음속에 거하신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맺는 말

위격과 본질의 차이 구분 칼빈은 위격(서열)과 본질(비서열, 온전한 동등)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본질의 면에서 볼 때, 삼위일체는 수적으로 한분이며 서열이 없다. 반면 위격의 면으로 볼 때, 삼위일체는 수적으로 세분이며 서열이 있다. 모든 것이 본질과 위격간의 구분에 종속된다.

성자(위격)을 구분하는 특성은 태어나셨다는 것이고(그러나 본질상으로는 그렇지 않음), 성령(위격)을 구분하는 특성은 발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그러나 본질로서는 그렇지 않음). 각 위격의 자존성과 결합된 위격들 간의 이러한 경세(economy), 질서 또는 서열은 칼빈교리 전체에 대한 느슨한 구성원칙을 제시한다. 고 보는 견해가 있다.

두 영적 본질 하나님은 무한한 영적 본질이시며 세 위격으로 계신 한분 삼위일체시다.(.13.1) 하나님은 이 두 가지 특성으로 인간과 구분된다. 하나님과 인간은 모두 불멸의 영적 본질이지만,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무한한 영적본질이시고 인간은 피조물로서 유한한 영적 본질이다.

칼빈의 삼위일체 교리는 창조론에 앞서 가중 중요한 교리이다. 칼빈의 저서를 정경화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기독교강요는 개혁주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유일한 지침이 되는 신학총서로 마음에 새겨야 할 가장 소중한 가르침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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