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강종수 목사 늘새롬교회

설교란 문자로 기록된 신학적 논증이 아니다. 기록된 설교문(說敎文)과 설교는 구분되어야 한다. 진정한 설교는 하나님을 체험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보편적 진리를 토대로 하나님의 목적인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을 얻고 영생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대언(代言)이다.

설교는 문서화 된 설교문을 토씨 틀리지 않게 잘 읽어 내는 것으로 감당하는 일이 아니다. 설교의 중심 내용은 그 설교자의 영적인 인격(상태)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진정한 설교와 그 설교자란 매우 신령한 의미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자들이 정의 할 수 없는 명제이다. 목회에 있어서,설교는 죄인이 속죄를 얻도록 하나님의 언약을 성경의 계시로 설파하며 성도의 성화를 촉구하며 내세까지 이르는 새 역사관에 입각한 영적 세계를 보게 하는 매우 긴장스러운 분야이다.

설교와 설교자를 논함에 있어, 먼저 설교가 무엇이며 설교는 어떻게 짜여지고 설교는 어떤 방법으로 전달되는가를 대략 살펴보기로 하며,그 설교의 내용과 함께 동반하는 설교자 자신의 영성 문제를 논하기로 한다.

 

본론)

신학의 분야로 설교학이 있지만 기교와 방법을 꾸며내는 것은 각자의 신학적 견해를 따라 표현하고 그렇게 창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먼저 성경적인 설교의 정의와 설교의 유형 그리고 신구약의 설교 작성법과 설교자의 정체를 정의하려고 한다.

 

1. 설교

설교의 정의와 그 구체적 형태를 살피고 목적이 수반되는 개혁주의의 이상적 설교가 갖추어야 할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설교의 정의는 목회 철학에 수반된다. 그것은 청중의 사상을 책임져야 하는 중대한 분야이다. 교회운영에 설교는 예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주 큰 분야이므로 설교자는 설교에 대한 성경적이고도 신학적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것이다.

전도(傳道)는 설교와 그 목적에 있어서는 뜻을 같이 하지만 설교는 목회자의 정체성을 다 갖추는 분야이다. 그러므로 총회 소속의 교육기관(신학교)과 노회(老會)에서 설교자로 배출하고 세울 때 그로 하여금 설교를 바르게 감당할 수 있는지를 심도있게 평가해서 허락해야 할 사항이라 여긴다. 왜냐하면 설교는 설교자가 학습한 모든 신학과 영성으로 만들어진 설교자의 사상조직을 그대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1.1. 설교란 무엇인가?

설교(說敎)는 다분히 가르친다는 의미가 짙다. 불교에서 설법(說法)이라고 하듯 특히 구속사적 개혁주의 설교자들은 매우 논리적인 철학적 이념을 기초로 하는 설교에 익숙하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설교는 단순히 도()를 설명하거나 교시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없고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의 활동이 실재해야 하는 아주 신비한 뜻이 함의한다.

결국 설교란 진리를 성령으로 말하고자 하는 영적 언어이다. 그런즉 설교자는 계시된 진리를 성령의 역사로 나타내야 하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로서 매우 긴장스러운 위치에 놓여 있다. 공인된 조직에서 인정했거나 학문의 결과로 설교를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통합적인 지식이 있다하여도 그 자체로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자처할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설교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다른 음성으로 간주되어진다. 성경에서 축출한 일반적인 교리나 본문을 해석하는데 집중한다면 그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되어야 할 그 설교의 중심은 복음(福音)이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하여 영생을 목표하는 참 삶의 내용이다.

결국 설교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死活)을 근거로 인간의 실존적 죄악성의 해결과 구원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깨닫게 하여 영적 혁명과 삶의 가치 이념이 변하는 효과를 나타내어야 한다.

기독교 예배가 신령과 진리로 온전히 이방종교 의식과 다르다는 것이 증명되듯이(4:23) 설교는 연설, 강의, 토론 및 사설(私說) 같은 것이 아니다. '설교가 학술적인 강연이 되면 "동의한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반응 밖에는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 하지만 설교가 예배로서 제시되는 경우 청중들은 성령의 감화를 입어 전달되는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하게 된다.설교는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적 음성을 잘 알아 듣게 영혼에 호소하는 하나님의 말씀 대언(代言)이다.

어떤 설교자가 매우 영감적으로 설교 한 것을 받아 내가 다른 곳에서 그대로 설교 한다면 그 설교의 효과가 그처럼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진리의 구도란 크게 변하지 않지만 설교는 설교자와 그 설교의 시간에 밀접한 관계 속에서 완성을 이루기 때문에 타인이 그 설교문을 다른 공간에서 그대로 설교한다 하여도 그 때 이루어진 영성의 효과를 공유할 수는 없다.

설교는 항상 살아 있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음성으로 당신의 예정하신 섭리를 따라 적절히 뜻을 선포하게 하시므로 설교에 실은 당신의 의중을 아무 때에 아무에게나 선포하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설교의 선포는 항상 하나님의 시간대에서 현재적이기 때문에 과거의 환경과 때에 적절했던 설교를 또 다른 시간과 환경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설교를 듣고 감동 받은 것은 또 다른 음성으로 전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데 좋은 모티브는 되어도 그 설교 자체는 나의 설교가 될 수는 없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아직 회개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고 그리심산에는 신령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바리새인들처럼 신지식을 갖춘다 하여도 그들이 가르치거나 설교를 한다는 것은 허용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우선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르치는 자로서의 인정을 얻지 못한 위선자요 외식하는 종교자들로 꾸지람을 받았던 것이다.

 

1.2. 설교의 목적

5분의 설교라도 메시지의 주제는 분명해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곧 성경의 목적이어야 한다. 성경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시다.설교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전달하는데 있다.

5: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목표를 전달하기 위해 설교 작성을 한다.

설교는 성경에서 그 원인과 목표를 발췌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보다 설교가 우월할 수는 없다. 설교할 이유가 성경 때문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제네바에서 설교하던 존 칼빈은 일주일 후 설교할 성경 본문을 미리 알려준 적이 있다.

중세기에는 더더욱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일이 중요했고 언제라도 성경을 통한 메시지 준비는 설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20: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한 지식 자체는 예수보다 우월할 수 없다. 성경이 예수를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가령 설교에서 예수보다 성경에 관한 지식을 더 강조한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주석이나 강해일 따름이다. 설교의 목표는 예수와 그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지 성경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강해(講解)와 설교는 구분되어야 한다. 강해는 그야말로 뜻을 풀이하는 것이다. 강해는 본문에 취급된 언어와 문법적 해석 및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저자의 의도 등을 해석하는 주석적 분야이다. 그것은 설교를 위한 준비 작업이지 설교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칼빈주의적(개혁주의의) 설교자들 가운데는 설교를 한다면서 성경해석만 하며 혹은 자신의 견해(사석)를 첨가하는 말로써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설교가 아니고 강해이다. 성경에는 일반적인 교육적 가치를 위한 교훈들도 발췌가 되는데 그것은 교훈이지 설교라 할 수는 없다.

설교는 특별한 은사이다. 영적인 일에 몰두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감동과 지시 속에 설교자는 계속 성숙해져 가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설교자의 성숙도를 나타내는 교훈자의 가치 이념의 전달이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새로운 의로움에 거하며 영생을 소유하고 그 가치대로 살아 갈 수 있게 영력(靈力)을 실어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의 제 2 음성으로 화해야 하는 신령성(神靈性, spirituality)을 내포해야 한다. 설교는 그 대상과 상황따라 여러 형태의 내용으로 전달되지만 언제나 설교의 그 곳에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표가 강조되고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표와 언약에 감동이 되어야 한다.

설교가 우리 자신들의 인생에 관한 견해를 나누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심리적인 어떤 변화 자체는 꼭 설교 시간이 아니라 여러가지 세상 문화 - 일반 종교나 세상의 지도자로부터 교훈을 받으면서도 가능하기 때문에 감동의 눈물이나 기쁨 자체를 설교의 결과적 효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바울이 종교성이 많은 아덴 사람들의 정서에 맞춰 철학적으로 변호하였으나 전도의 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17:). 그 후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기로 작정하게 되었고, 그는 철학의 진정한 효용 가치란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며 배설물같이 여기고 단호히 복음적 가치를 대조적으로 높였다.

설교는 지식 전달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어야 한다. 성경이 주는 지식은 설교자로 하여금 사유를 달리하게 할 뿐 아니라 모든 인본적 가치이념과 삶 자체로부터 받는 일상의 의식마저 성령 앞에서 무너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설교는 일반적 교훈자의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감동적인 아주 특이한 어조와 제스처도 동반되며 개인적인 발성을 잘 가꾸어서 설교자의 진정한 영적호소가 충분히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이 전달되었을 때 바른 설교가 되고 바른 설교자가 되는 것이다. 설교의 목표는 신구약을 토대로 하되 어떠한 언어로든지 그리스도가 증거되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설교를 잘 들었다고 하는 평은 잘못한 설교이다. 심지어 감동 받았다는 예의에 가까운 사례도 잘못되었고 오직 하나님께 굴복하여 죄는 죽고 의()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즉 설교의 결과는 중간 역할자의 소리는 귓전에서 사라지고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서 새롭고 구체적인 변화가 생겨나야 한다. 그것을 세례요한은 실천했고 예수의 증언자의 사명으로 알았다.

 

1.3. 설교와 전도의 관계

전도(傳道)는 주의 도()를 전()한다는 것이다. 주의 도란 성경의 목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다. 여러가지로 꾸며진 성경은 결국 한 가지의 목표를 위해 기록되었다. 그것은 영생을 주시기 위한 음성이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전도는 설교의 다른 형식이다.다만 설교는 예배 중에 행해질 때 설교라 하고, 일대 일 혹은 소수를 두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도이다. 설교의 정의가 영생을 목표하는 하나님의 말씀 대언이라는 차원에서는 전도의 말도 제 3의 설교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도를 제 3의 설교라 한다면 설교는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설교자는 아무나 될 수 없다. 전도는 예수 믿어 구원받은 자의 고백의 형식으로 가능하지만 공적 설교자가 되는 것은 상당한 성경의 식견이 있어야 하며 특수한 과정의 훈련을 받은 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자로서 세우는 과정은 대개 건전한 교단에서는 신학과 고시를 통하여 그리고 인격적 무흠한 자로 강단에 설 수 있게 허락한다. 이런 조건을 토대로 하는 것은 설교자의 어떤 흠을 보고 거룩한 교회 전체를 오해하거나 영혼의 실족함을 막기 위해서이다. 근본적으로 공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함에 근거한다.

혹 이단적 교단에서는 사람의 감동에 중점하여 아무라도 설교하거나 안수하게 하는 것 등 변하기 쉬운 인간의 감정을 토대로 거룩한 교회의 활동을 지탱하려 하나 우리 인간의 경험으로 볼 때도 그것은 아주 위험한 처사이다.

하나님이 제도를 주신 것은 개인의 권위를 위함이 아니라 원칙과 약속을 잘 이행하기에 늘 고정하지 못한 인간의 인격 때문에 조직과 일정한 법을 제정하신 것이다. 전도는 예수 믿는 자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성도의 거룩한 임무에 속하나 설교는 공교회를 인도하는 특정한 자에게 맡기신 목회적 은사로 전도나 봉사의 의무를 모두 포함하는 목양의 임무이다.

 

1.4. 설교의 발췌

성경에서 발췌하지만 성경관에 따라 설교의 의도는 상당히 달리 작성되어 진다. 따라서 설교를 만들기 위해 성경에 대한 해석 문제의 신학적 정립이 우선이며 그 신학의 주류를 따라 해석되는 성경관으로 설교는 그 성질을 각각 달리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달되게 하는 것은 설교자로서 고민이며 지식의 한계를 넘게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간절히 사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설교자의 긴장 부분이다.

율법도 신학도 없는 족장시대에는 직접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성경이 주어진 이 시대라도 하나님이 주실 은혜의 영적 메시지에 관심을 가지고 먼저 기도하고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학문과 과학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영감의 지식으로 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며, 필요에 따라 적절한 주의 뜻을 밝혀주시므로 설교에는 반드시 성령의 감화로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 전하는 자는 이미 성령의 감화 가운데서 스스로 먼저 은혜를 얻고 설교자의 말이 생생한 영감의 언어요 말씀이 되게 해야 한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 성경의 본질적인 목표에 맞는 적당한 소재를 발췌하는 일에 있어서 혹은 인본적인 소치를 첨가해서 진리의 본의를 상실케 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혹은 성경이 영감적이라는 성질을 감안하여 모두 영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역사의식을 부정하게 된다.오리겐은 알레고리적 해석의 명수였다. 그런데 설교의 마지막 쯤에는 으레 공상에 가까운 비유적 해석에 빠져 들어가서 성경의 설명과 적용에서 이탈되곤 했다. 이러한 위험을 배제하기 위해서 항상 성경을 토대로 준비하며 바른 신학적 바탕에서 설교를 작성한 후에도 교리적으로나 보편진리 사상에 어긋나지 않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자기가 맡은 양들을 위한 영적 꼴을 준비하는 자로서는 타인이 만든 설교집도 많이 읽고 들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스스로 영감을 얻기 위한 성도를 사랑함과 필요충분조건들을 살피는 일상의 생활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 목회는 하나의 종교적 직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설교를 발췌하는 일에 있어서 무엇보다 성경론의 학습이 잘 되어 있어야 하며 성도를 사랑하는 목양자의 의식이 충만해야 한다. 성경의 원문과 주석적 해석은 뜻 전달의 온전한 증거를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설교의 발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내는데, 구약과 신약은 구속사적 차원에서 나뉠 수 없는 맥락이다. 이것이 바른 성경관이 자 설교의 근거에서도 그러하다. 설교의 자료를 위한 원천은 오직 성경이요 신구약 전 성경은 설교를 위한 자료의 원천이다.

구약 성경에서 가령 아브라함의 인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말하려 할 때 믿음에 대한 주제는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완전한 설교가 아니다.

반드시 성경 어디를 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적 계시를 증거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목적이고 설교의 내용이다.

5: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5: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1.4.1. 구약 성경에서 발췌할 때

구약의 특성은 여러 사람들과 사건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 공의, 구원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구약성경에서도 신약과 아주 의미 상통한 부분이 있어서 그 상황 분석에 설교자로 하여금 구약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는데 부담을 덜어주는 부분도 있으나 여러모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핵심을 전달하는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해석을 요청하는바 상당한 숙고(熟考)가 따라야 한다.

이스라엘 역사 혹은 믿음의 영웅이나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들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전하시는 계시적 은혜를 찾아내고 쉽게 이해시키며 감동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다.

구약도 신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믿음의 말씀이다는 것을 깨닫고 신뢰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설교자의 숙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 성경으로 설교를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전달하지 못하고 믿음이나 하나님의 신적 역사에 대한 소개만 하는 전혀 설교의 본질를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구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뜻을 전하려 할 때 설교자는 본문과 설명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조명을 성경신학과 영감으로 비추어 줘야 한다. 구약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의미로 와 닿기에 낯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는 말처럼(3:24) 구약이 설교로 발췌될 때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가 그 메시지의 원인이 되게 하고 구약말씀을 통해서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더욱 증진할 수 있게 하는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에 설교의 목적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부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 자체만을 소개하는 것은 성경의 목적을 벗어나 이원론적 해석이 된다. 따라서 구약은 신약에 성취된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찾아 그 그림자 된 역사를 잘 해독하여 소개하는 것이 중요한 설교의 과제이다.

 

구약 성경에서 설교가 되게 발췌하고 메시지를 정리하는 예

성경 :

창세기 3, 본문을 3장 전체로 할 필요까지 없다. 적당한 구절을 택하되 원죄와 아울러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구원에 주목하게 할 뜻이면 후반에 있는 몇 구절을 선택하면 되겠다.

 

제목 :

하나님의 구원을 전제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구원에 관련한 설교를 한다. 여기에서 죄에 대한 심도 있는 신학적 설명을 잘해야 하나 항상 비관에서 낙관으로 희망을 주는 설교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언제나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표는 인생으로 하여금 말씀 안에서 구원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표 :

먼저 설교할 성경 본문 해석에 충실해야 한다. 창세기 3장의 원죄에 대한 설명을 할 때 너무 장황하게 신학적인 논증을 하게 되면 설교가 아니라 강의가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본문의 상황 이해를 좀더 리얼하게 풀어 해석하고 대체로 청중들은 신약에 익숙하기 때문에 언제나 구약을 해석할 때는 신약을 적절히 배치해서 설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그래야 본문을 함께 보고 있는 청중들이 이해하는데 한결 편한 마음으로 습득할 수 있다.

 

내용 분석 :

1)하나님의 언약의 성질을 설명한다

하나님이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는(2:17) 행위언약의 내용이 인간의 의지에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음을 상기 시켜준다.그 하나님의 언약은 사회적인 법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인 것이었음을 이해시킨다. 단지 종교적 순종을 위한 실험적 언약이었던 것임을 이해시킨다. 그러므로 에덴에서의 시험 결과는 사회적 상식 선에서 이해할 무엇이 아님을 깨닫게 하고 동시에 우리들의 신앙은 사회학적 측면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란 점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광야 시험(11:)을 대조하여 아담과 하와는 시험에 패하였으나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에 승리하셨음 알리며 고취시킨다. 첫 아담과 둘째 아담(예수)의 시험의 상황을 이해시키고 차이를 보여서 얼마나 아담과 하와가 크게 잘못되었나를 두각 나게 한다.

 

2)변명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범죄의 자세한 내용은 성경 구절로도 충분하다(3-4). 여기서는 하나님이 금령의 실과를 먹고 두려워하는 인간을 찾았을 때 그들이 변명한 소리를 분석한다. 죄의 전가성뿐 아니라 회개하지 못하는 인간의 비굴한 모습을 말한다. 무수한 종교와 철학의 소견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불확실한 이치인가를 알게 한다.

세상의 지혜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를 말했던 성경 속의 증언들과 세상의 변화무쌍한 학문적 가치를 가볍게 평가해주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얼마나 확실한 지혜인가를 청중으로 하여금 귀하게 여길 수 있게 인식시켜 준다.

 

3)하나님이 그들의 일회성 나뭇잎 옷 대신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의 희생적 대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으로 영입시킨다. 이렇게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전적, 희생적 사랑의 구원을 강조해야 한다. 원죄의 사건 자체는 아무리 강조해도 별 소용없는 결과다. 그 속에 하나님의 구원을 떠올려야 한다.

 

마무리 :

어차피 하나님의 사랑은 주어졌다. 구약 첫 범죄(원죄)의 상황에서도 반영구적인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사랑으로 시작된 하나님 구원 작업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약속이 만방에 전파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믿음으로 의의 옷을 입자, 이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도덕주의나 신비주의나 그러한 인본적 구원론 사상을 무효하다고 곁들여 결론에서 강조한다.  

 

1.4.2. 신약 성경에서 발췌할 때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과 함께 예수 곁에서 살며 보며 느낀 사도들이 기록한 문헌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은 예수님을 직접 소개하는데 용이하며 복음적 설교를 작성하는데 손쉬워 진다. 그래서 신약 설교, 그 중에서도 4복음서의 본문으로 가장 많이 설교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현장이 있고 그 주인공 되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자기에 대한 설교를 하셨는가?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다고 하셨으며(9:35) 회당에서 가르치셨다(4:44). 그러나 우리는 그 예수님의 활동과 함께 예수의 출현과 하나님의 목표를 전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육성이나 사도들의 증거 혹은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생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직접적 내용이 많아서 설교를 발췌하는데 구약보다 현장감이 있어서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약이 복음 사상에 직접 관여하지만 그러나 신약 모든 곳이 영생의 주제로만 기록 된 것이 아니고 여러 유형의 공교회와 성도의 현실적인 삶의 패턴에 관한 교훈도 가득하다.

설교가 설교되기 위해 신약에서 그 본문을 발췌할 때도 복음 사상에 적합한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물론 한계는 있다. 같은 본문이라도 그 날에 하나님의 영적 새로운 은혜는 또 새롭게 내려질 것이다. 영적 평안과 새로운 은혜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지 또 다른 지식을 얻으려고 예배하고 설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으로 설교를 위해 본문 선택과 그 효과적 정리의 예  

성경 :

누가복음 191-10절로 삭개오의 내용을 선택한다. 본문이 길지만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 내용의 전부를 읽고 소개하는 것이 좋다.

 

제목 :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정한다. 그냥 삭개오의 신앙,혹은 삭개오에 대한 인물 연구보다는 복음적 의도를 지닐 수 있다. 인물 연구에서 복음이 나오긴 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구절이 있기 때문에(9) 다행히 제목을 정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가능한 본문에서 단어와 구절을 선택하고 제목을 삼는 것이 자연스럽고 청중이 설교 내용을 기억하는데 용이하다.

 

목표 :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은 구원 얻는 자의 변화를 목격한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어떤 분인가 보려다 주님이 불러 주셔서 그가 집으로 모시고 가서 회개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회개 장면에 집중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용 분석 :

1)인간은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며 사는 죄된 존재임을 전한다

삭개오는 직업도 좋고 부자다. 그러나 키가 작았다. 그의 약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삭개오의 신상이 인간의 죄스런 실존을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키 큰 죄인도 많으니까... 문제는 당시에 세리라면 허가증 지닌 도적이라 할 만큼 로마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백성에게 민족적 자긍심도 없이 세금을 거두면서 토색한 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그의 언변을 볼 때(8) 그렇다.

현대 사회는 풍요 속에 빈곤이라는 아이러니한 삶을 사는데 이것을 삭개오의 정서를 비추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진 자라도 맘은 언제나 가난한 처지인 인간의 실존을 말한다. 적당한 철학적 언어를 빌릴 수도 있다(에릭.프롬의 '소유와 존재'에 대한 말을 선정할 수도 있다).

 

2)회개하는 자의 진정한 양심적 고백을 강조한다

말로나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삭개오의 단호한 고백을 살펴준다(8). 이것은 얼마나 성도들이 깊이 새겨야 할 내용인지 모른다. 진정한 회개의 결과인 3번째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회개에 대한 발언과 작정을 유심히 바라봐야 한다.

회개의 진정한 문자적 의미를 소개해도 좋을 것이다. 참된 회개는 행동으로 죄의 자리에서 돌이키는 언행을 통하여 보여준다는 것으로 회개의 바른 정의를 내린다. 삭개오를 통한 회개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회개행위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3)구원의 선포로서 제목을 인식시키며 결론에 도달한다

9절로서 충분히 본문의 의도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의 선포는 삭개오의 회개가 있었다는 것을 한번 더 강조해주면서 주님이 선언한 구원의 선포를 의미 있게 전달한다.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이러한 축복의 선언이 와 닿아야 하는 것을 짚어 준다. 우리들의 가슴에 전해질 주님의 구원의 선포를 어떻게 성경은 말하고 있는지 가려서 잘 찾아 줘야 한다.

 

마무리 :

삭개오라는 사람을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구약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가시적 백성이라면 신약의 우리 이방인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가를 결론 지어준다. 우리에게도 삭개오의 회개 정신이 요구된다는 것을 강조한다.진정한 회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의 맘 속에 구원이 선포된다는 것을 말한다.

 

1.4.3. 목회 현장()에서 발췌할 때  

목회 현장에 필요를 따라 주제를 정하여 설교에 임하는 경우이다 목회의 현장에서 요청되는 예절설교나 절기설교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상으로 하되 그 삶에 구체적인 하나님의 지도를 발휘하는 것이어서 성경과 영성으로 다 할 수 없고 목회관의 철학적 의도가 동원되는 바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적용할 성경을 찾는 것은 간혹 인본적인 설교가 될 위험이 따른다. 물론 성도의 삶 자체에 하나님의 뜻이 깊숙이 내재하려면 현실을 자세히 검토하는 시사적 통계와 연구가 있어야 하나 그것은 죄와 혼돈의 시대적 모양일 뿐 과거나 지금이나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영적인 정서는 말씀으로 치유해야 하는 원리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역사는 언제나 같은 효력으로 발휘하게 된다.  

 

2. 설교자

설교는 설교자에 의해 전해지기 때문에 설교와 설교자는 인격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아무리 좋은 설교라도 설교자의 자격이나 설교하는 때에 갖추어져야 할 영성에 문제가 있다면 설교자로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영적으로 말하면 마귀의 영력(靈力)을 대항해서 우리 영혼의 승리를 위해 성령의 조명을 얻어 그 영감과 능력으로 영적 전투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란 아주 특별한 자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설교를 하도록 사람을 정할 시에는 신구약에 모두 특별히 대상을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계시하사 따로 세우셨다. 구약에서도 선별하셨고 신약에서도 따로 세우셨던 것이다. 이것을 설교자로 소명을 받는다고 한다. 물론 일정의 신학의 과정이 따르고 평신도와 영적인 격이 있으며 더욱 열심을 내는 자이다. 말씀을 사모하되 그 열심이 평신도보다 월등하며 사명감을 지니고 연구하게 된다.  

 

2.1. 설교자의 영적 상태

설교자는 영적으로 약한 자를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영적 각성을 일으키는 신령한 지도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대한 과제가 있다. 그것은 먼저 자신이 영적으로 중생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성령의 인도를 아는 자이어야 하는 것이다.

설교가 단순히 신학적 언어의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사도들이 성령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더라는 성경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설교는 구원 얻은 영적 중생자로서 설교 속에 반드시 구원을 말하는 영감의 사람이어야 한다. 구원을 얻지 못한 자가 외치는 설교라는 것은 거짓된 증언이다. 그의 말에는 영생이 없고 영원한 가치의 목표가 없다. 신령한 말을 한다 해도 영지주의나 신비주의자가 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낼 수 없다.

교회사에는 성령의 언어가 아닌 합리적이고 철학적인 기초에서 신학을 논하거나 심지어 목회자 중에도 철학적으로 설교하는 자가 많이 있다. 우리는 그 자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한다. 종교가일수는 있어도 성령이 없는 자이다. 우리는 그 자의 메시지를 설교라고 할 수 없다. 그의 메시지가 성경의 목표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필시 설교가 아닌 것이다. 사람을 위한 단순한 교훈일 뿐이다. 교훈은 설교가 아니고 철학이다.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즉흥적으로 감동을 자아내기만 한다고 바른 메시지라 할 수 없다. 오히려 바른 설교는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결단과 세속적 가치이념에서 놀라운 변화를 얻어야 한다.

복음 전도자 찰스 피니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오랜 세월 설교를 했으나 한번도 내가 설교해야 할 내용을 24시간 이전에 결정해 본 적이 없다"그는 설교를 한 후에 원고를 적어두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사적인 설교자의 힘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원고를 가지고 설교에 임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허튼 말을 혹은 중언부언하지 않도록 정돈된 내용 전달이 가능한 줄 안다.

설교는 하나님의 목표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 때마다 주시는 감동도 중요하지만 개인 감정에 치우칠 우려가 많기 때문에 미리 기도로 준비하고 점검하고 다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부자연스럽지 않게 원고를 외울 만큼의 본문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채 느낌대로 사람을 감동시키겠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1: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우리가 교단의 헌법 기준으로 일정의 신학을 수업하고 노회(老會)의 인준으로 설교를 위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제도가 꼭 그를 정상적인 설교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설교는 만들 수 있어도 설교를 설교답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상적인 것과 신령한 자질 문제는 조직이 가능케 하지 못한다. 설교자 자신의 영성 문제로 남는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연결도 되지 않는 중언부언의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당연 설교자로서 자격이 없다. 그는 설교의 기회를 가져서는 안 된다. 설교는 영적으로 활기를 찾게 하고 새 생명의 영적혁명을 불러일으키는 위대한 영적 전투이다. 어떤 주관적 기독교 이론을 정리하는 시간도 아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거듭난 경험을 해야 하고 신령한 영적 감각의 소유자로 분별력을 충분히 발휘 할 수 있어야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2.2. 설교자의 설교를 위한 수고

설교자는 고독하다. 왜냐면 설교자의 위치가 가르치는 자의 입장이기도 하므로 성경적으로 볼 때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면 아무리 설교를 잘한다 하여도 청중의 신뢰도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직분이다.

힘들어도 힘들다 할 수 없고 아파도 아픈 모습을 보이기 힘들다. 왜냐면 힘들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해야 할 위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억지로 자리 매김을 해야 한다는 변명이 아니라 평신도보다 열 배로 수고해야 하는 직분자로 감히 약하게 보일 수 없는 입장이라는 말이다. 설교자 자신은 사실 그 설교의 목표를 이미 체휼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이 감당할 수도 없는 부분을 증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영성과 인격은 늘 그 설교의 무게를 좌우한다.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 설교자가 준비해야 할 부분이 많은데,  

첫째, 성경과 영감에 충실해야 한다.

성경 읽는 생활이 평신도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 그리고 학습하는 자세로 성경의 풍성한 지식을 정립시키기 위해 계속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또한 영성 훈련이 생활화되어야 한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한다는 것은 영적인 일이다. 설교 자체만을 위해서도 영적으로 성숙하기 위해 영성 훈련의 기회를 많이 가져야 한다.

목회자는 설교에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설교자인 목회자는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시간 활용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입장을 교인들이 알아서 가능한 목회자의 시간을 예사롭게 빼앗지 않고 도와 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설교를 위해 주간 하루씩 금식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혹은 설교의 은혜를 위해 금식 기도를 정규적으로 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 태도는 진실로 설교를 위해서 희생하는 한 부분이다.기도 없이는 영감을 얻기가 어렵다.설교자가 책이나 인터넷의 남의 정보에만 의존하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목양자로서 직무유기이며 하나님 앞에서 양들을 위하는 목양자의 자격이 없다.

개인 신앙생활의 역사에 금식 기도 한번 못해보고 설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평신도 앞에 부끄러운 일이다. 주님은 성령으로 사셨지만 그래도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기도하셨다. 금식도 하셨다. 설교자가 꼭 명심해야 할 일은 기도로 영적인 무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그렇지 않고는 아무리 좋은 문구로 설교문을 작성하고 논리 정연한 설명이 된다 해도 성령의 생명역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설교자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남달리 많이 읽게 하시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그리고 애독하며 열심히 읽는 것도 기회가 있다. 그리고 평신도 때부터 많이 읽는 시간을 얻게 된다. 그에 따른 영적인 경험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도 많은 것이다. 신령한 경험을 통하여 개발된 영적 분별력을 기르고 개인적으로 성경적인 노하우를 가지게 되어 있다. 직분을 받고 준비를 해서 설교를 한다기 보다 준비가 되었기에 직분을 받아 실천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소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영적 소명은 그런 방향과 일에 대한 열정과 소질이 남달리 뛰어나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증거이다.  

둘째로, 언행에 본이 되어야 한다.

이 부분에는 일상에서의 윤리적 소행을 포함한다. 어쩔 수 없이 성도들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 목회자를 거동을 보며 인격적인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가령 목회자가 일반 성도와 다름없이 온전치 못한 생활 실태를 변명이나 한다면 무슨 존경심을 가지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힘들고 고독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지식이나 뜻을 전하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어렵지만 어쩔 수 없는 위치이다.

설교가 언어로 전달되지만 실상 전달자의 현실적 삶은 얼마나 그 설교를 평가하는데 냉정하게 작용하는지 모른다. 누가 말을 못해 설교자가 못되겠는가? 특별히 설교는 모든 종교와 도덕을 누를 만큼의 신성한 경지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는 입장에서 종교적 상식으로 사람들에게 매우 공적인 선생의 위치라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가 행치 않으면 따를 자가 있겠는가? 때문에 설교는 그 설교자의 삶과 직결되는데 설교자의 언행 일치에 대한 성도들의 평가는 냉정하므로 설교자의 생활 주변은 늘 긴장스럽다.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설교자의 행위에 있어서 온전해야 함이 원칙이다. 그러나 실수도 한다. 특별히 성도들과의 인간적 관계에서 때론 시험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가령 목회자가 성도와 싸움을 했다고 했을 때 설교자가 어떻게 강단에서 은혜로운 설교를 하겠는가? 설교자는 예수의 복사판으로 보는 성도에게 치명적인 사건이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성도들과 싸움을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단의 시험이다. 목회자와 성도의 싸움에서 어느 편이든 사실상은 이기고 패한 자는 없고 승리자는 마귀이다. 그래서 목사는 성도에게 져야 한다. 성도들이 때리면 맞아야 한다. 그 이상은 답이 없다.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이다.

일상의 문화 생활에도 금기된 장소와 방법들을 잘 고려해야 한다. 성도들과 친밀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달고 함부로 행동하면 구설수에 오른다. 행동의 반경이 좁은 편이다. 설교자는 일반 평신도가 움직이는 곳마다 모두 수용할 수는 없다. 가능한 것이라도 절제가 필요하다. 

셋째, 때를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시기에 맞는 언어로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상 지식은 별 무관하다는 생각으로 교역자가 책 읽기를 게을리 하면 청중의 시대 언어에 부응하지 못한다. 따라서 정신문화에 따른 시대 읽기를 위해 공부해야 하고 지구촌의 현실적 시사에 밝아야 한다. 그것은 선지자(히브리어, 나비, aybin;)의 해석처럼 미리 보는 자로서의 역할을 위해 가능한 세상의 철학과 시사적 지식을 함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역사 속에서 특별히 크게 보도되는 사건적인 시사 부분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건 속에 개입하셨음을 깨닫게 해줘야 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주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시키는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설교하는 자가 세계의 흐름을 묵인하고 알지 못하면 감각적으로 교통하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진리를 책임 있게 전달하는 자로서 또한 유식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 모른다는 것은 이원론자나 신비주의자가 아니고는 성도들에게 유익한 면이 될 수 없다.

대개 성도들은 목회자를 무엇이든 다 아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모든 문제의 해결사로 알고 있다는 것이 커다란 부담이다. 그러나 설교를 맡은 자로서는 어찌하든지 시대를 읽어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므로 쉴 틈이 없다.

물론 시사에 밝다고 설교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시사만 늘어놓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다만 시기를 알고 말하는 선지자적 노련미가 있어야 하는 것뿐이다. 복음을 역사와 함께 그 진수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도의 개인적 신앙에 생동감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사실은 복음의 역동성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설교의 목표이기도 하다.  

2.3. 설교자의 가정생활

성도들은 목회자의 가정생활을 엿보면서 가르치고 강조했던 설교를 자연스럽게 검정하게 된다. 가령 가정이 온전치 못할 시에는 어떤 설교를 해도 은혜를 입을 수가 없다. 또한 목회자와 그 자녀와 관계를 살피기도 한다. 그래서 설교자(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직분이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가정이어야 하겠지만 설교를 맡은 자로서는 거의 절대적으로 인식하려는 성도들 때문에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면 설교자로서는 자격이 상실된다.

성도들은 설교를 단순한 교훈으로 듣고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은 성도 중에는 목회자의 가정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하고 오직 목사의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교회를 나온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절대 그렇지 않다. 반드시 목사의 가정을 살피게 된다. 말씀대로의 삶이 주는 효과를 모델로 살피게 되어 있다.

목회자의 가정생활이 평신도보다 은혜롭지 못하다면 아무리 옥구슬 같은 이야기를 해도 신뢰도가 없어져서 결국은 그 전도(傳道)의 내용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이다.

제자 베드로의 경우에도 그가 비록 집을 나와 스승과 함께 동거를 하였으나 장모가 앓고 있을 때 주님을 모시고 치유를 하게 한 일을 보면 가정적인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못한 자가 타인을 가르칠 수야 없지 않는가?(4:38)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당연히 자식도 있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렇지 않으면 특별한 점이 오히려 주목이 되어 변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에겐 가정의 화목한 모습이 대단히 중요한 면이다. 이혼이라든가 사별하여 너무 오래 홀로 사는 것은 참으로 시험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가정 형태를 잘 이끌고 나가는 것도 어려운 숙제인데 설교자로서 그런 특별한 환경은 더더욱 힘겹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의 내용만큼이나 가정생활에 은혜가 충만해야 한다. 반듯하게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것이 생활 가운데서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목사에게 있어서는 생활이 곧 설교가 된다. 설교와 생활의 모습이 너무 다르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성도가 힘을 얻을 수 없다.  

 

결론)

설교를 잘 하는 것과 좋은 설교자는 비례한다. 설교하는 이가 어떤 인격자인지 설교를 처음 들으면서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기도 하고 이단을 따라서 방황하게도 된다.

설교자에 대해 신상이나 개인 신앙의 정도를 잘 알지 못해도 신령한 영감으로 설교를 자세히 듣게 되면 대략 건전함과 불건전한 신학의 사상적 구분이 가능해진다. 때문에 설교자는 건전한 진리를 수호하고 영혼을 위한 진정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성경 연구와 기도로 영성과 지성을 겸비하며 특히 가족으로서의 표본이 될 삶을 잘 살아야 한다.

목사로 임직 되고 교역의 선상에 있어도 설교가 매우 부진한 사람이 있다. 본문에서 이탈하거나 전혀 상관이 없는 소리로 한 시간을 지탱해 나가는 자나, 전혀 경험도 없는 이론적인 소리로 일관한 원리 강해자, 세뇌시키는 주입식 설교자, 말을 잘해서 만담같이 이야기로 끝나는 사람, 학자풍으로 혹은 교훈자로 위엄과 인격으로 내미는 자, 고함 소리로 아멘, 아멘 하면서 단순한 이방 종교식 중언부언으로 신도를 기만하는 자 등은 모두 설교도 설교자로도 가치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영혼의 소리를 불어내는 참다운 설교를 해내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설교를 위해 모든 문화에 성실할 수 밖에 없는 부담감으로 일관되게 수고하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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