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는 목회 -전원교회]...

. 들어가는 글

▲ 백믿음터 목사 상내백교회담임

어느 듯 농촌에서 목회를 시작한지도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50대 중반, 사업을 정리하고 가족의 동의를 얻어 뒤늦게 시작한 신학공부와 목회자로서의 길로 들어선지 도 어언 11.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이 흘렀다. 모두가 기피하는 농촌목회에 첫발을 딛게 된 것 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이 길은 자신이 원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 전능자의 강력한 부르심에 의해서 가는 길이라고 해서 다들 소명(召命)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면 나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50대 중반, 가정이나 사회적으로 이미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창조주의 뜻을 쫒아 새로운 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내 생각이 아니라 그 분의 뜻을 쫒아 걸어 온 길이다. 나름대로 산전, 수전 공중전 백병전까지 치루며 살아온 삶이였기에 무슨 일이든 못 감당할까보냐 라고 생각하며 달려온 길이였지만 뒤돌아보니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용케도 잘 견뎌온 것 같다. 12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4시면 일어나, 교인들을 모셔와 같이 새벽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저런 교회 일과 성도들의 삶을 돌아보며 교회의 자립을 위해 가축()을 키우며 유정란을 수거하여 택배를 보내고 우리밀 국수를 주문하고 공급하는 일도 일과 중의 하나였다. 이것을 자립목회, 자비량 목회라 한다. 도시교회나 큰 교회의 도움을 받아야만 교회나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는 것이 오늘 날 농촌 미 자립교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싫어 스스로 자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함양 땅에는 65년 경, 한 때 125,000명의 인구를 자랑했는데 산업화 도시화의 정책으로 지금은 고작 외국인을 포함해 41,000명에 머물러있다. 인간의 욕심은 모두를 망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죽음의 길로 인도한다. 내겐 소박한 꿈이 있다. 자급자족과 더불어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같이 나누는 생명목회이다. 농어촌교회가 지역을 특화시켜 정직하게 각양 먹 거리를 생산하고 창조질서를 회복하여 탐욕으로 가득 찬 이 땅을 살리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이 땅은 잠시 왔다가 머물다가 본향(本鄕)으로 가는 정거장이며 우리 모두는 나그네 인생이다. 이러한 생명의 진정한 의미와 소중함을 깨달아 자연을 살리고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살리고 저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이일을 위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오늘도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주의 섭리와 인간의 생사화복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원한다. 영혼과 육신을 살리는 생명목회가 그 대안이 아닐 수 없다.

 

.전원교회

오늘 날 전원교회에 대한 말은 많고 전원교회에 대한 관심도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전원교회에 대한 논지하나 없고 전원교회에 대한 정의조차 제대로 나와 있지 못하다. 다만 도심 속에 있던 교회가 공간의 부족이나 복잡한 지역 환경을 벗어나 도시외곽지역에 옮겨와 전원교회라 부르는 것이 고작이며 더러는 도시를 벗어나 멀리 자연환경이 좋은 전원지역을 택하여 이주해 교회를 세우긴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떨어져 나가고 일부만 옮겨와 지역주민과는 별개로 농어촌지역과는 구별된 교회, 자연을 즐기거나 누리고자하는 일부계층의 차별화된 특수목회나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실질적 전원교회는 농어촌을 근거지로 한 기존농어촌교회나 또는 농어촌에서 개척한 교회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동산을 그 배경으로 잃어버렸던 에덴의 회복과 하나님의 형상회복을 꿈꾸며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를 전원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 문화가 에굽 문화의 산물이라면 도시교회는 창조질서의 회복과 일반계시에 더욱 민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교회의 모습은 전원교회이다. 전원교회 범주 안에 농어촌교회를 포함하여 설명코자한다. 성경은 모든 생명체의 질서와 인간존재 자체를 생명의 창조질서와 인류역사 가운데 포함하고 있다. 이 생명체의 창조질서는 하나님과 모든 생명체와의 계약관계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인간과 모든 생명체와 이 땅(우주)은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이다. 이 계약이 파괴된 것이 에덴의 상실이요 바벨론제국 아시리아제국 에집트제국 등이며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사건으로 상징되는 역사적 심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원교회의 특성을 논하고자한다.(도시형 전원교회5일 근무제 시대에 복합형 전원교회의 필요성 :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의 조화를 통한 복합형전원교회 / : 셀목회의 목장이동예배온전한 전원교회)

 

1. 영원한 기업 κληρονομία(상속.유업.기업)

헬라어로 시간의 개념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크로노스의 시간이고 또 하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시계가 말해주는 연속적 시간이며 카이로스는 내용으로 규정되는 질적 시간이다. 세상 사람들은 계량적시간인 크로노스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시공을 뛰어넘는 카이로스의 시간, 탕감을 통해 원래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는 영원성의 시간 속에 살아간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이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창조의 신비로운 섭리와 사랑과 은혜 안에서 천국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자연 사랑의 완전한 회복을 소망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이다. 사업의 재기를 위해 말씀을 보며 기도하던 중 베드로전서 1:3~5 말씀에 시선이 멈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영원한 기업 κληρονομία/상속. 유업. 기업: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는 삶)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비록 이 땅을 살아가지만 영원한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일시적인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은혜 안에 시공을 초월하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2. 문화명령과 선교명령 / 1:28~31, 28:19~20

.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문화명령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다스린다.’의 참 의미는 가꾸고 보존한다는 의미다. 청지기란 주인의 소유를 맡아서 잘 관리하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을 잘 관리하고 보존하는 하나님의 청지기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129~31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이 땅이 인간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받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로마서822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주신 문화명령을 잘 준행함으로서 창조질서에 합당한 누림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각자의 달란트를 개발하고 활용하여 자급자족 자립함으로서 사명자로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 구원자 예수님이 주신 선교명령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

성경에 보면 우리에게 주시는 근본적인 명령,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첫째, 문화명령이요, 둘째 선교명령이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흔히들 둘째 명령인 선교명령은 대체로 잘 아는데 문화명령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두 번째인 선교명령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명령이라면 첫째 명령인 문화명령은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다. 물론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 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문화명령이 선행 되지 않으면 선교명령 또한 감당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라고 하셨다. 우리는 누구의 형상과 닮았을까? (하나님) 맞다. 옆에 분과 인사합시다. 형제(자매)를 뵈오니 하나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웃으면 더 멋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우리를 통해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시켜 나가라는 명령이다.

 

3. 하나님은 창조주, 우리는 제조업자. (노동의 필요성)

또 하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을 어린이나 능수능란한 장년이나 노인으로 만드시지 않고 왜, 청년 아담으로 만드셨을까? 청년은 젊고 힘이 있고 아름답다. 인위적인 권력이나 돈, 명예...이런 것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순수한 기상과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님은 청년을 통해 일하시기를 좋아하신다. 그런데 농촌은 지금 청년이 없다. 청년을 오게 하라. 그래서 믿음의 기업 무지개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교회도 청년이 살아야 교회에 희망이 있다. 나라가 산다. ‘청년이란 말은 헬라어의 네아니스코스란 말이다. 이 말은 네오스란 새롭다, 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청년은 항상 새로워져야 한다. 청년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이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청년이 새롭지 않으면 그 청년은 기백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일하고, 새로운 일을 계획하는 것이야말로 청년의 기백이다. 자기가 익숙한 곳에만 맴돌면 그는 이미 노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개척자 적인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도전하는 정신이야말로 청년이 갖는 가장 큰 아름다움이다. 안 먹어본 것을 아예 먹으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도 늙었다는 증거라고 한다. 노화의 무서움은 바로 경직이다.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더욱 일찍 일어나고 더욱 많이 활동하고 실수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젊은이가 청년이다. 마음이 경직되고 정신과 사고(思考)가 경직되고, 행동이 경직되고 육체가 경직되어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고 선입관이 가로막는다면 그는 이미 청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고장 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히면 그는 이미 노인이다. 몸은 젊었어도 정신과 사고가 늙은이가 있는가하면 몸은 늙었어도 정신과 사고가 젊은이가 있다. 전도서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젊을 때 믿는 것이 복이고 하루라도 빨리 믿는 것이 복이다) / 교회학교와 젊은이들을 양육하고 창조적인 사고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노동과 출산의 고통은 하나님의 형상과 에덴동산 회복의 관문과 같은 것으로 노동을 통해 잃어버렸던 안식을 되찾고 산고를 통해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 안타깝게도 노동을 기피하고 오직 편리위주와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돈이 최고인 시대, 돈 되는 직업이 최고의 직업인 시대, 맘몬주의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잘못된 독신주의와 저 출산 및 산아기피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의 전략이며 이것은 죄악이다. 신성한 노동과 온전한 잉태는 잃어버린 하나님형상과 에덴회복의 지름길이다.

 

4. 에덴의 회복 / 에덴동산을 회복하라.

창세기 2:8 ,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우리의 보금자리를 에덴동산에 마련해 주셨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함으로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것이 죄의 근본이요 출발이다. 이 부분을 우리는 백번, 천 번 또 깨닫고 기억해서 죄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이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연구하여 이를 되찾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에덴동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죄의 본질을 올바르게 인색해야 한다. 죄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를 올려놓는 것이다. 주어의 자리에 목적어를 갖다 놓게 되면 문장은 엉망이 된다. 먼저 창세기 11절 말씀을 보면.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오늘 우리들의 삶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데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할지를 잘 알지 못하는데 근본 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신문이나 방송 TV나 인터넷 등을 보고 듣노라면 이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 혼돈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지어 주님의 몸 된 교회마저 그 방향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참이며 진리인지 그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하므로 분열과 갈등이 난무하고 있다. 이것은 말씀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생과 역사와 신앙의 첫 단추가 창세기 11절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적 안목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봐야한다. 기준이 참으로 중요하다. 성경의 기본 논지가 창세기 11절 말씀이다. 본문은 성경 전체의 핵심을 선포하는 말씀으로 이것이 성경의 대주제다. 우리가 논문을 쓰거나 논설이나 에세이를 쓸 때 기본포맷이 바로, 내 주장은 이것이라는 논지가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말하면서 성경의 대주제가 무엇이냐에 대해 서론으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셨다. 이것이 성경의 논지다. 성경의 대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나머지 구약과 신약은 창 1:1의 내용을 설명하고 보충해주고 있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은 대체로 인간의 삶이 창 1:1 말씀에서 어떻게 벗어나게 되었으며 벗어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해주며, 신약은 창 1:1의 원칙을 회복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숲을 먼저 보고 나무를 봐야한다. 그렇다면 기본구조가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기본적인 문장형식이 주어.동사.목적어로 구성된다.‘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문장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어이고, 창조하시니라가 동사이며 무엇을? 바로 천지를 이, 목적어가 된다. 하늘 땅, 모든 만물이 다 목적어다. 주어와 목적어가 바뀌면 문장이 되지 않는다. 주어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주어와 목적어를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주어와 목적어를 혼동하면 문장의 의미가 불분명해지며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오늘 날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워진 것은 주어와 목적어가 혼동되었기 때문이다. 주어의 자리에 목적어를 올려놓는 것이 타락이다.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에, 주어의 자리에 그 어떤 목적어도 올려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어의 자리에 목적어를 가져다 놓으면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자리에 피조물인 그 어떤 것도 올려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죄요 타락이다. 인본주의, 자연주의, 물질주의, 과학만능주의 등 그 모든 것도 하나님 위에 올려 질 때 다 죄가 되는 것이다./ 여기 성경책 위에도 아무것도 올려놓지 마세요. 이것은 형식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다. 에덴동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좀 더 말씀을 계속하면 성경의 시작은 이처럼 천지창조로부터 시작 된다. 창세기는 한마디로 기원의 책으로서 우주, 인간, 가정, , 민족, 언어 등의 모든 기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밝히 말해주고 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그 '순서와 질서'가 잘 나타나 있다. 성부하나님의 계획과 성자 하나님의 행위 및 성령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우주 및 인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신의 사랑 가운데서 신의 은총으로 탄생되는 장면들을 장엄하게 서술하고 있다. 창세기를 구속계시의 여명이라고 본다면 창1:1절 말씀은 그 계시의 첫 장을 여는 거대하고도 찬란한 눈부신 한줄기 빛과도 같아 창조주가 누구이며 구속의 주체가 누구이며 인간은 왜 구속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며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각종 신화나 현대의 진화론이 얼마나 천박하고 모순에 가득 찬 어리석은 인간의 사상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1:1 말씀은 신앙의 문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으로 이 말씀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한쪽 길은 유신론적 구원과 기쁨의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며, 다른 한쪽은 무신론적 허무와 죽음의 지옥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창세기는 전 우주와 모든 생명체 및 피조물은 당신께서 지으신당신의 것이라는 소유권 주장이 성경 곳곳에 명시 된 일종의 등기문서와도 같다고 하겠다. 그리고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또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줌으로써 내가 결코 목적 없이 허무하게 살다가 그저 흙으로 돌아가는 숙명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보내어졌음을 일깨워 준다. 그리고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모든 피조물 중 가장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똑똑히 보여줌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의 가치를 깊이 깨닫고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 창세기 11절이 제대로만 믿어진다면, 성경 66권 전부를 믿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지 못하시겠는가?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 먼저 빛과 어둠, 하늘과 물, 지구와 식물, 그리고 해와 달과 별, 새와 물고기, 그리고 동물들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며 여섯째 날 마지막으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강조하신 것은 창조사역의 그 핵심과 중심에 인간창조의 목적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가장 기뻐하셨다. 왜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이 에덴동산에서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1).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전능(Almighty / 全能)이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이란 뜻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으시며 불가능이란 없으신 분이시다. 그는

)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으신 일이 없으시니이다./예레미아 32:17)

) 영원히 세상을 통치하신다.(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계시록 19:6) /우리는 대한민국 백성이기 이전에 하나님나라, 천국백성이다.

) 실패한 우리 인생을 구원하신다. 누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느니라./마태복음 19:26)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을 때, 우리도 힘과 능력을 얻게 된다./ 544장 울어도 못하고, 힘쓰고, 참아도 안 되지만 믿으면 되겠네라고 노래한다 믿으면 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고난 당했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

2).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전지란 무엇이든지 다 알고 계신다는 의미다. 시편기자는 간증하기를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편 139:2~4) 하나님은 과거와 미래뿐 아니라 오늘 현재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아신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32 ,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이사야 65:24)라고 하셨다.

 

5.자연으로 돌아가라.

엿 세 동안의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 그리고 거대한 우주의 중심에 우리 인간을 지으시고 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주셨다. 그런데 오늘 우리 인간과 환경, 동식물 등 총체적으로 환경이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던 힘의 근원지인 자연은 병들어가고 있다. 경제적인 효율,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만을 추구하던 인간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모든 에너지원은 고갈되고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심리적인 면까지도 바닥이 드러나 인간성 상실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 이것은 안식을 잃어버린 인간의 욕심이 낳은 죄의 결과다.(교회마저 안식을 잃어버렸다/ 1,2..) 예배는 모든 것을 죽이는 훈련이다 / 내려놓음. 성령의 열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마지막 열매가 절제이다. 안식은 하던 일을 끝내고 쉬는 것이 아니라 하던 일을 멈추고 쉬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자연의 파괴 뿐 아니라 인간성의 상실은 이제 극에 달하여 생태계가 파괴되고 인간에게는 스트레스가 만연하여 희귀병이 난무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욕심이 낳은 죄의 결과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다시 회복해야한다. 이제 우리의 모든 욕심을 줄이고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을 우리 삶의 최 우선순위에 두어야만 한다. 일찍이 '자연으로 돌아가라' 라고 외쳤던 19세기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이며 작가인 장 자크 루소(Jean Jaques Rousseau1712628~ 177872)는 인위적인 문명사회의 타락상을 고발하면서 진정한 자유를 위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했다. / 우리 모두는 지금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시문화는 에굽문화의 산물이다. 세계적으로 지금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전원에 자리하고 있는데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원교회란~ 이름 뿐 논지하나 제대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야외예배마저 실종해 버렸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오직 황금만능주의로 너무 쉽게 돈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교회 안에서 조차도 물질 만능의 풍조가 스며들어와 기복신앙이 활개를 치고 있다. 교회마저도 그 수와 양으로 승부를 걸려고 하는 경제논리가 판을 친다. 우리 모두는 이제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개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 목사도 장로도 교회 위에서면 안 됨-군림과 지배는 사랑의 부재이다 사랑이 식을 때 음식이 변질 되듯 우리의 믿음이 변질되고 당을 짓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개혁이 무엇인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잃어버린 에덴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겸손이요 그렇지 못한 것이 교만이고 거만이다. 에굽으로 나아갔던 발걸음을 가나안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도시로 나아갔던 삶을 농촌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다. 귀농 귀촌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자연으로 돌아와 자급자족을 배우고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을 들으며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한다.(일반계시와 특별계시)

로마서 1:21~24에 보면 이 시대의 참상, 즉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해 적나라하게 열거하고 있다.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하셨으니 /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어 32,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씀하셨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불의가 만연하여 가짜가 판을 치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가 없는 영광은 알고 보면 모두가 다 가짜다. 시편기자는 우리에게 고난이 유익이라고까지 말하였다. 그렇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땅의 믿음의 선조들은 죽음마저도 바울사도처럼 기쁘게 여기지 않았는가?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오래된 궁금증을 영국 과학자들이 풀었다. 영국 셰필드 대학 연구진이 달걀과 닭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단백질을 검사한 결과, 닭이 없으면 달걀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됐다고 소개했다. 연구팀은 수퍼 컴퓨터를 동원해 달걀이 형성되는 과정을 시뮬레이션 했고, 이 단백질이 달걀 껍데기 형성과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화가 아니라 창조다. 인간의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성경은 더욱 분명해 진다. 게놈지도가 밝혀지면서 진화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개척정신의 유산 (여호수아 17:1418/ 개척하라개척정신은 에덴에서부터 명령되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12지파에게 분배하는 과정에서 독보적인 한 믿음의 인물을 우리는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갈렙이다. 그는 일찍이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부터 특별한 믿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분배의 과정에 있어서도 갈렙은 정탐꾼들이 두려워하였던 아낙사람들의 거주지인 헤브론 산지를 요구했고 여호수아는 그 땅을 그에게 허락했다. 모두가 기피하고 두려워했던 헤브론 산지를 그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믿고 쫒아갔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도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믿음의 전진과 복음의 진보를 이루어 나가야한다. 그는 언약을 굳게 믿고 약속의 땅을 지켰다. 이처럼 축복의 땅 가나안은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에 의해 새 시대가 전개될 수 있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듯 시대를 깨우는 외침은 변방에서, 광야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렛 동네에서 생활하셨으며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하셨다.

벤허에 대한 이야기가 농촌목회의 동기부여가 되었다./미국의 법률가잉거솔이라는 사람은 어느 날 그의 친구이며 그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윌리엄 윌레이스에게 권유하기를자네는 문필가이니 어디한번 연구해서 기독교가 거짓일 뿐 아니라 인류역사에 큰 해를 끼친 종교임을 글로 좀 써보도록 하게, 내가 자본금을 대어줄 것일세!”윌레이스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글을 쓰기위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읽어보고 또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예수의 행적을 일일이 답사했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읽고 자료를 하나하나 면밀히 검토하는 가운데 그의 인간적인 교만은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흘리며 고백하기를~ 예수여! 진정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 이십니다!”드디어 그는 자신이 수집한 모든 자료를 가지고 뜨거운 양심으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인들에게 소설로서 또는 영화로써 많은 감동을 준 벤허라는 작품이다. 무신론자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글을 쓰려고 하다가 오히려 성경을 읽다가 변화를 받고 기독교가 진리임을 밝히는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농촌목회가 진정한 생명목회임을 누가 인정하는가?

 

. 나의 농촌 목회이야기

1. 농촌 미 자립교회를 자립되게 하라!

1) 농촌목회의 동기/ 저는 50대 중반, 사업을 하다가 뒤늦게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신학교에 다닌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한 농촌교회의 설교를 부탁 받게 되었다. 교역자도 없는 미 자립 교회가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와서 보니 제대로 교역자를 모시기 어려운 상황임을 금방 느낄 수가 있었다. 와서 보니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이 나이에 언감생심(焉敢生心) 설교를 하며 교회 일을 맡는다는 게 가당하기나 한 일이겠는가 마는 그렇게 저의 목회는 시작 되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한다. 교인이래야 10여명 대 분분의 농촌 미 자립교회가 그러하듯 기도소로부터 교회가 세워진지는 무려 60년이 지났지만 젊은 사람은 겨우 한 두 명, 대부분이 70, 80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도 안 계실 뿐 아니라 아직 한 번도 항존 직을 세워보지 못한 전형적인 농촌 미 자립교회였다. 내가 거주하던 집은 대구였고 신학교는 경기도 양평이고 교회는 경남 함양 수동면 내백리 국도변 전형적인 농촌교회였다. 인근에는 집들도 거의 없는 전답과 비닐하우스로 둘러 쌓여있는 곳이었다. 산이 있고 강이 흐른다. 국도변이라 공사차량과 화물차량들이 과속으로 달리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서 저의 목회는 시작되었으며 이렇게 농촌과 도시를 오가는 가운데 조금씩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고 있었다.

30여년 만에 다시 공부를 한다는 일만도 내겐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특히 우리 세대는 아나로그 시대라 젊은 디지털세대를 쫓아간다는 게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다.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컴퓨터는 필수였다. A4 용지 한 장을 작성하는데 무려 1시간 이상 걸리는 일을 몇 장씩 워드작업하느라면 밤을 세는 일이 다반사였다. 논문까지 작성하랴 목회하랴 가장으로서 가정을 돌아보랴 힘든 시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가운데 전도사에서 강도사로 목사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저를 인도해 주셨다. 사실은 신학교에 갈 때도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40세 때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이 있었지만 그 땐 사업이 한창 바빴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께 앞으로 이대로 평신도로서 신앙생활 잘 하고 교회와 목회자들을 도우며 섬기는 자가 되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업에 어려움을 당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족의 동의를 얻어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내가 신학생으로 있을 때, 바로 밑의 여동생 남편인 제매가 신대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물론 사전에 아무른 상의도 없이 입학하였기에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안 그는 어떻게 이러한 어려운 용단을 내렸느냐고 하며 의아해 했다. 그리고 한 친구목사는 나는 이제 은퇴 준비하는데 지금 신학교에 가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렇게 용단을 내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내가 경영하고 있던 제조업과 금융업이 동시에 어려움을 격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기도하며 말씀을 보던 중, 베드로전서 1:3~5 말씀에 시선이 멈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을 읽던 중, 갑자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라는 글자가 주먹만큼 크게 내 눈앞에 클로즈업 되어왔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망하기도 하고 경영의 어려움을 격고 있는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이라니 도대체 어디에 이런 기업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영원한 기업/κληρονομία이란 말에, 순간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전율이 일어났다. 영원한 기업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었다, 3:18 말씀이 동시에 떠올랐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이 놀라운 말씀에 나는 두 손 두 발을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기업회생에 온힘을 쏟고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나에게 있어서 이 일은 내 인생에 대전환을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내 인생여정은 퍼즐게임과도 같이 하나하나 틀에 끼워 맞춰지듯 그렇게 흘러오게 되었다.

2) 사역의 내용/ 다행히 목회는 모태신앙으로 50여년 이상 신앙생활을 해온 저의 신앙바탕이 그나마 목회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목회 아닌 목회(전혀 목회의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담임교역자가 됨)를 하는 중에 교회는 조금씩 부흥(?) 하기 시작했다. 10명에서 20, 20명에서 30... 그렇게 조금씩 교인이 불어났다. 기적도 많이 일어났다. 중풍병으로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77세 할아버지가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그동안 간호하느라 꼼짝 못하던 할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오는가 하면,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갈비뼈가 13개나 부러져 출혈이 심하여 생명이 위독하던 청년이 수술도 하지 않고 회복되어 다음 주일 병상에서 곧바로 교회로 예배드리러 온 일이며, 젊은 부부가 이혼직전 헤어지는 마당에 마지막으로 한번 간절히 기도하던 중 부부가 회복 된 일이며, 매일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게임에 빠져 게임방에서 나올 줄 모르던 혼자 사시는 여 집사님의 한 아들을 2년여 동안이나 끈질기게 새벽기도 마치고 찾아다니며 권면한 결과 그 청년이 변화되어 직장도 얻고 결혼도 하고 지금은 집사까지 된 일이며, 아들제사를 매년 지내주다가 교회에 나오면서 제사를 지내주지 못해 죽은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던 할머니가 그만 귀신이 들어 한여름인데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고 고함치던 할머니에게 안수기도하자 귀신이 떠나간 일이며, 술을 끊지 못하던 50대 남자집사님이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되어 중환자실에서 손가락도 하나 꼼짝하지 못하던 사람이, 합심하여 눈물로 기도했더니 깨어나 의식을 되찾고 회개한 후 다시 살아난 일이며, 교회 교육관을 짓던 믿지 않던 공사업자가 공사 후에 교회를 출석하게 된 일이며, 인근 법천사 주지스님이 개종하여 교회에 나와서 간증을 한 일이며 지역출신 검사가 암으로 투병 중 회복이 되어 간증한 일이며 이처럼 우리교회 교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기적의 주인공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일은 이렇게 위기를 넘기고서도 신앙이 제대로 바로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적과 기사도 중요하지만 말씀으로 끊임없이 양육되고 성화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인 것을 날마다 체험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군대의 추격 앞에서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 쓴물이 단물로 바뀌고 바위에서 샘이 터지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날마다 먹여주시고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셨지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시험에 들어 넘어지고 불평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 하던 것과 같이 불신앙의 습관을 고치기란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을 거듭 목회를 통해 절감한다. 특히 농촌지역은 대부분이 종가집이라 심지어 한 달에도 몇 차례씩이나 제사가 있고 농번기가 되면 농사일을 품앗이로 하기 때문에 내 혼자만 교회에 다닌다고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거나 전도한다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지금까지 교회형편을 보면 대부분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못 배우고 말썽피우던 사람이거나 죽을병에 걸린 사람만 교회 나오다 보니 자연히 전도에 문이 닫힐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실정이라 농촌선교는 개인 전도보다는 동네전체를 복음 화하는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하여 지역의료 봉사 및 침술봉사. 이 미용봉사. 안경 맞춰주기. 경로잔치 작은 음악회 등 지속적인 봉사활동과 행사를 하고 있으며 교회절기 때마다 떡이나 빵을 돌리기도 하며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물론 동네 길흉사에는 가능한 한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부조도 하고 축하와 위로를 해드린다. 그리고 기존 교인의 변화된 삶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정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년말에는 이곳생활 10년을 통해 함께 교회를 중심으로 만났던 소중한 분들과 식사자리를 마련하여 정담을 나누었다. 10명이 되지 않지만 10여 명씩 나누어 몇 차례 자리를 갖기로 했다. 그곳에는 귀농인도 있고 예술인도 있고 장애인도 있고 외국인도 있고 젊은이 늙은이 듬직한 중년도 있다. 교수. 공무원. 농부. 직장인. 상업인 등 다양하다. 목사라는 직책이 불특정 다수인을 구별 없이 만나야하다 보니 다양하게도 만난다. 누구를 만나든 머피의 법칙이 마감되고 셀리의 법칙이 전개되길 기도한다. 최근에 교인 두 분의 장례를 치러드렸다. 한 분은 50대 직장인으로 퇴근길에 집으로 돌아오던 중 교통사고로 숨졌다. 가족과 함께 현장에 나가 불안에 숨죽이고 있는 그들을 대신해 현장을 확인하고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집례하고 합의와 보상 문제까지 협의하였으며 또 한분은 94세의 할머니로 호상이긴 하지만 가족이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 모두 한마음으로 장례를 집례하고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하여 같이 화장한 후 합장하여 집 부근 밭에 평장으로 모셔 드렸다. 이제 또 두 사람의 생명이 촌각에 달렸다. 한분은 고령이고 한분은 아직 젊은데 간암 말기로 온 몸에 암세포가 전이되어 입원 중이라 수시로 병원을 찾아가서 위로하며, 그에게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영생에 대한 소망을 전하여주며 평안을 안겨주었다. 병든 저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며 생에 무엇이 중요한 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두 가정에서는 남아 한명과 여아 한명이 출산하는 기쁨도 있었다. 한가정은 3째를 낳고 한 가정은 4째를 낳았다.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이 시대에 참 귀한 일이다.

3) 성과/ 서부경남지역은 기독교 보급률이 전국적으로 가장 낮으며 특히 함양지역은 유교문화가 팽배하여 제사가 많으며 지리산을 끼고 불교나 무속신앙이 활기를 띠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서 읍, 면 소재지도 아닌 한 쪽 외딴지역에서 교회가 미 자립에서 자립하여 조금씩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흔히들 이야기하기를 농촌지역 미 자립교회가 자립하고 부흥한다는 것은 안밴 아기를 낳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고 어렵다고들 한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 함양만 하드라도 한 때 125천명이 넘는 인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약 4만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 2/3 이상의 인구가 도시화에 흡수되고 만 꼴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희교회는 제가 부임하던 그 이듬해부터 교인이 늘어나 자립하게 되었으며 외부도움 없이 교회도 리모델링하고 교회사택과 부속건물을 증축하였으며 교육관을 신축하기에 이르렀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지금은 교회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믿음의 기업인 농업회사 법인 무지개나라를 설립하여 우리밀 국수와 일반국수를 OEM으로 생산하여 도시교회에 보급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교회부지 안에 평사형 양계장을 지어 무 항생제, 무성장촉진제로 특수배합사료 및 발효사료를 먹인 건강한 자연 유정란을 생산하여 전국에 보급하기에 이르렀다. 전적으로 바울의 자비량 목회와 선교방침을 바탕으로 자립함으로서 얻어진 수확이라 생각한다. 우리교회의 예배당 문은 자동문이다. 물론 노인들을 위해 편리하게 사용되도록 함이었지만 한편으론 굳게 닫힌 문이 다가가면 저절로 열리 듯 우리의 신앙이 자동문과 같아 하나님의 말씀을 쫒아 나아갈 때 스스로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하는 뜻도 담겨져있다. 가장 작은 한 시골교회가 수많은 농촌 미 자립교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모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4) 문제점 /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농촌선교의 말은 있지만 농촌선교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감을 감출 수 없다. 우리교회도 제가 처음 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몇 군데 교회에서 후원금을 보내주셨는데 4만원 1군데, 5만원 2군데, 10만원 한군데 도합 24만원의 후원금이 지원되고 있었다. 시골 교회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교회 제정집사님은 공중기도 때마다 다른 기도는 빠져도 후원교회의 고마움을 감사하며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는 빼놓지 않았다. 나는 기도하는 집사님을 불러다가 집사님! 후원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교회도 도움만 받는 교회가 되지 말고 우리도 하루속히 자립하여 도움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먼저 기도한 후에 후원교회를 위해 기도하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더니 집사님 왈 전도사님! 우리교회는 농촌 미 자립교회인데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습니까? 안 될 기도를 왜합니까? 내가 바봅니까?” 집사님은 제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런 기도는 전적으로 목회자인 저의 몫이었다. 안 될 기도를 왜하느냐는 말이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교인들에게도 제발 안 된다는 소리는 하지 말자고 거듭 당부했다. ‘나는 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이 믿음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지만 이 말을 바꾸는데 있어서도 수년이 걸렸지만 아직도 완전히 고쳐지지 않고있다. 그리고 매년 년 말이면 후원교회에서 교회 현황을 보고하고 다시 후원요청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저도 부탁을 드렸다. 후원금을 보내주셔서 고마운데 가능하면 한 번 오셔서 격려도 해주시고 후원교회 실정이 어떤지 좀 살펴 봐 주시면 고맙겠다는 당부를 드렸다. 그러나 한 번도 방문한 일은 없었으며 서서히 후원금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재정집사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은 서울로 대구로 많이 다니시니까 큰 교회에 찾아가서 후원금을 좀 많이 얻어 오시지요.” 라고 채근했다. 듣다못해 한마디 했다. “집사님! 전도사 생활비도 안주는데 후원금은 받아서 어디 쓰실랍니까?” 그 당시 교회 형편이 어려워 사례비를 전혀 받을 수 없어 무임으로 일하고 있었기에 한 말이다. 집사님 왈 우리도 좋은 일 좀 하입시더~.” 후원금 받아 우리도 좋은 일 좀 하자던 집사님의 겸연쩍어 하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가 교회건축을 하는데 소를 팔아 2천만 원씩이나 헌금하였으며 연세가 77세나 되는데도 교회 일에는 항상 앞장서신다. 이런 우리교회가 이제는 비록 협력 선교이긴 하지만 선교사를 4사람씩이나 후원하는 교회가 되었음을 감사드린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어느 듯 맘몬주의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권위주의가 팽배하고 이타주의가 아닌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교단 안에서 조차 별개의 교회가 존재한다. 간섭과 참견은 많지만 협력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세계 10대 교회가 한국에 있다고 자랑하지만 5만 한국교회의 절반 이상이 미 자립교회로 도움을 받지 아니하면 목회자생활비조차 지급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는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모습이다. 가난은 나라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하듯 하나님도 해결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다 같이 하나의 교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어느 교회가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인가 건강한 교회인가 그것이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5) 보람 / 어느 듯 목회를 시작한지도 어느 듯 10년이 되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경험하며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젊은 시절 내 자신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왔던 많은 시간들을 허송세월로 보내고 낡고 추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주의 일을 감당한다는 사실이 늘 하나님 앞에 죄송하며 부끄러웠다.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그래도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 이놈아~ 냄새나는 거름도 나무를 자라게 하는데 좋은 재료가 된단다. 걱정하지 말고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하도록 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도 졸업하고 이곳이 고신교단이라 다시 고신대학원에서 2년의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나름대로 박사과정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시골 농촌목사가 지금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미국의 유수한 전원교회들을 돌아보며 새로운 전원교회를 향한 비전을 갖게 하심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이미 도시교회는 침체되고 농촌 전원교회들이 부흥되며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잃어버린 에덴을 회복하고자하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방향성을 본 듯하다. 미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아틀란트에 있는 피치트리교회도 전원에서 시작 되었다고 한다.

6) 애환 / 늦게 시작한 목회라 늘 아쉬움이 있다. 조금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시편기자의 고백처럼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 (71:18) 오늘도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아직도 꿈쩍 않는 동토와도 같은 이 불모지의 현장을 바라보며 에스겔 골짜기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 마른 뼈들이 군대를 이루는 환상을 보며 이 농촌 땅에 봄바람과 함께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도한다. 도시교회 한 친구 장로는 네가 그곳(시골 농촌교회)에 가만히 있다는 자체가 자기에게는 은혜가 된단다. 외롭고 힘든 목회가 그나마 저들에게 은혜가 된다니 다만 감사할 뿐이다. 벌과 나비가 향기를 발하는 꽃을 찾아오듯 아름답고 향기로운 농촌교회에 많은 유리방황하는 영혼들이 몰려오는 그날이 하루속히 찾아오기를 기도한다.

7) 현황 / 이제 농촌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예년에는 농촌은 농작물을 재배하는 지역이라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개념이 지배적이었지만 최근에 농어촌 연구원에서 조사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농촌의 기능과 역할로 풍부한 자연환경과 신선한 공기, 아름다운 자연경관 등으로 국민에게 휴식과 휴양을 제공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기존 전통적인 개념보다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젊은 층으로 다가갈수록 향후 농촌의 미래상을 휴식 공간으로 인식하는 응답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놀랍게도 전체 응답자중 71.2%는 농촌에 별도의 집을 마련해 왕래하며 살고 싶다’(51.6%), ‘아주는 어렵지만 자주 방문하고 싶다' (19.6%)라고 응답했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농산물 개방 압력에 시달리는 오늘의 농촌을 새로운 농촌발전의 방향전환의 기점으로 삼아 우리 농촌의 생존 모델로 제시할 수 있도록 교회가 이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체, 미 자립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갈등하던 농촌교회가 새로운 분기점을 맞아 건강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로 거듭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러한 인식에 함께 공감하는 한국교회가 될 때, 5일 근무제에 따른 교회성장 둔화(교인감소) 및 주일 성수문제 등의 난제들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21:5)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생기를 잃어버린 한국교회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8) 앞으로의 전망

농촌사회는 급속한 산업화의 물결에 휩싸여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돈과 권력이 난무하는 도시는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문명이라는 미명하에 하나님과 멀어진 인본주의 시스템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회복해야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성경의 시작은 이처럼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창세기는 한마디로 기원의 책으로서 전 우주와 모든 생명체 및 피조물은 당신께서 지으신당신의 것이라는 소유권 주장이 곳곳에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또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줌으로써 내가 결코 목적 없이 허무하게 살다가 그저 흙으로 돌아가는 숙명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보내어졌음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모든 피조물 중 가장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똑똑히 보여줌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의 가치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삶을 살아가도록 한다. 이처럼 생명이야말로 성경의 핵심사상이다. 그러나 오늘 날 이 생명의 존엄성을 물질적 개념인 자본주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capital)이란 어원이 말해주듯 가축의 머리를 지칭한다. 인간 최초의 자본은 자연 그대로의 것이었지만 원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은 스스로 자본을 만들어 생명을 연장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떠난 원죄다. 이제 우리는 속히 자연으로 돌아와야 한다. 교회는 돌로 빵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영원한 생명의 빵인 영생을 얻는 곳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애굽이란 도성에서 히브리인을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셨다. 그들은 언약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과 아이성 그리고 수많은 도성들을 차례대로 무너뜨린 후 가인의 후예들에 의해 파괴된 하나님의 창조동산(약속의 땅)을 회복하였다. 우리도 죄의 도성에서 벗어나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도시교회가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맘몬사조가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라는 인식이 강하게 교회를 지배하면서 축복의 개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사회는 황금만능주의로 너무 쉽게 돈벌고 출세하고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교회 안에서 조차 물질 만능의 풍조가 스며들어 기복신앙이 활개를 치고 있다. 교회마저도 그 수와 양으로 승부를 걸려고 하는 경제논리가 판을 친다.

돈과 권력이 도시에 집중되면서 농촌은 도시의 필요를 채워주는 종속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농사는 완전히 상업농으로 전락하고 도시교회의 모판이 되었던 농촌교회 또한 도시교회에 의존(구걸)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 모두는 이제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개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2. 새로운 방향제시

1) 성경을 통해 본, 주님의 명령 두 가지, 문화명령과 선교명령이 그것이다. 교회는 이 두 명령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교회의 자립은 목회의 또 하나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농촌 미 자립교회라고 예외일 수 없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그 지역과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강점을 특화시켜나간다면 분명 길이 열리리라 확신한다. 노동이 기도이고 자비량을 위한 노동은 목회의 일부분임을 인식해야한다. 바울 사도의 자비량(tentmaker, 自備糧)은 저급한 목회의 단면이 아니라 한 단계 성숙한 목회자 상이다.

2) 요즈음 웰빙 시대를 맞아 건강에 관심이 매우 높다. 또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면서 생활 패턴이 많이 달라지고 있는 가운데 각 지방자체단체들마다 각종 축제와 이벤트성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리고 주말 여가 생활을 위한 콘도, 휴양림, 가족형 팬선, 가족농장, 실습농장, 별장, 전원주택 등 다양한 생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최근 크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별장형 주말농장인 클라인 가르텐(Kleingarten) 같은 것이 있다. 도시의 허파라 불리는 이 클라인 가르텐은 도시인들이 채소, 과일 등 농산물 생산을 직접 체험함은 물론이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산 농업교육 현장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농촌교회가 이러한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도·농교회가 서로 교류하며 함께 변화를 모색해 나가야 한다. 도시교회가 소비하고 농촌교회가 생산하고 도시교회가 돈을 투자하고 농촌교회는 이를 관리하고, 나아가 도시교회 항존직 직분자및 가족을 일정기간 농촌교회 선교사로 1~2년씩 파송하는 제도를 적극 권장하며 추천한다.

3) 욕심으로 가득 찬 문명화 된 인간들이 내뱉는 독가스를 묵묵히 참아내는 저 자연을 보라. 그리고 하나를 얻기 위해 열을 잃어버리는 정말 미련하고도 미개한 저 탐욕에 가득 찬 인간의 모습을 보라. 산과 강물과 숲과 모래밭이 하늘에 속한 하늘의 영지거늘, 아직도 천지인(天地人)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이것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저들은 나와 같은 피조물이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가장 소중한 벗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우리는 다시 회복해야한다. 이제 우리의 모든 욕심을 줄이고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을 삶의 최 우선순위에 두어야한다. 일찍이 '자연으로 돌아가라' 라고 외쳤던 18세기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이며 작가인 장 자크 루소(Jean Jaques Rousseau)는 인위적인 문명사회의 타락상을 고발하며 진정한 자유를 위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했다. 도시교회는 지금 맘몬주의에 병들어가고 있으며 안식을 잃어버렸다. 농촌교회는 지금 문화명령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선교명령까지 포기하고 있다.

 

3. 전원교회에 대한 비전(치유와 회복을 통한 건강한 교회가 새롭게 요청되는 시대이다)

개혁신학과 구원신학의 구조를 뛰어넘어 창조신학에 그 바탕을 두어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 땅을 창조하신 창조세계를 향한 보다 더 폭 넓은 신학적 사조를 가지고 자연 사랑과 인간 사랑을 포괄적으로 함께 바라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이 답을 한국 농촌교회의 활성화와 미 자립 교회의 부흥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듯 한국교회도 산업화와 도시화의 현상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대형화와 도시 일변도의 맘몬 사조가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시 일변도인 삶의 구조는 농촌교회를 무기력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만물을 새롭게 하시길 원하신다. 균형을 잃어버린 이 땅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며 기뻐하시던 그 창조원리를 회복하고 창조신앙을 바탕으로 농촌목회가 활성화되기를 소망한다.

1)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는 전원교회이다/새들백, 윌로크릭, 크리스탈, 레이크우드···

2) 귀농과 귀촌, 클라인 가르텐(Klein garten : 나만의 작은 정원) 운동이 일어나고 있음

 

4. 모델제시

1)엘림선교 훈련원

2)농업회사법인 무지개나라 / 프로듀스경영방식 도입 (여러 농촌교회가 동시 다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안제시)

3)연합의 중요성/하나 되는 운동(이는 자신이 청지기임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요, 다만 도구임을 깨달아 당신의 뜻을 이루는 일에 힘쓴다)

4)교회중심의 공동체 (특화시켜나감)

교회 목회자가 최고의 지도자다. /·대형 도시 교회가 농촌 미자립교회에 농촌선교사를 파송하라. /·대형 도시 교회가 농촌교회 목회자의 사역비를 전담하라. /농촌교회 발전은 국토균형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다. /신학교의 졸업생 문제가 저절로 해결 된다. /농촌교회는 선교의 전초기지다./ 미 자립교회, 농촌교회야 말로 미래교회의 희망이다.(이상적인 건강한 전원교회)

우리는 길을 가다가 방향을 잃었을 때 출발점으로 다시 되돌아와야 한다. 무언가 괘도를 이탈했을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고 다시 새로워진 정신으로 시작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안식년을 두어서 7년을 주기로 한해를 휴경하는 제도를 두어 지력을 회복케 하고 이웃을 돌아보게 하며 영육의 회복과 개선을 도모하며 물질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도록 하였으며 제 오십년을 희년으로 정해 너희는 이 오십 번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온 땅에서 두루 온 땅의 모든 거주민에게 자유를 선포하라고 했다. 한국교회는 새로운 시대(새 하늘과 새 땅)를 향해 모두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출발이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된다.

 

. 자비량 농촌목회의 사업 (목회 형 양계)

탈무드에 나오는 한 편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랍비가 설교를 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그 설교의 결론이나 중간부분에서 꼭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 회개하라. 죽기 전에 회개하라." 그 설교를 하도 많이들은 어느 교인이 하루는 그 랍비를 찾아가서 정식으로 한마디 했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언제 죽을지, 그 죽는 날을 모르는데, 어떻게 죽기 전에 회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랍비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그렇다면 오늘 당장 회개하십시오."라고 했듯이 한국교회 농촌교회를 위시한 미자립교회의 타결방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지만 유정란 양계는 농촌교회에 자립방안으로 바람직한 대안이라 생각한다.  

처음 우리 교회에서 양계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도 많은 반대가 있었다. 냄새가 많이 난다. 시끄럽다. 교인들이 바빠 도울 수가 없다. 판매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교회의 자립과 전도와 교인들의 식단에 많은 도움을 주는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닭소리를 들으며 베드로를 생각하며 회개의 기회로 삼기도 한다. 그리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기도 하고 나눌 수 있는 매개체가 되어 도농교류에 많은 유익을 안겨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1.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예 중닭 한 마리 4~5천원./ 야마게시즘 양계장 10마리에 한 평정도. 양계장은 비닐하우스도 가능하고 기존 축사를 개조하거나 판넬식으로 만들 수있다)

2. 안정적이고 수익성이 좋은 편이다. (매일 닭은 알을 낳기에 매일 고정적인 수익을 안겨주고 달걀가격은 케이지 양계에 비해 4배 정도의 가격을 받는다)

3. 미래 전망이 밝다. (먹거리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유정란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4.국민건강에 기여할 뿐 아니라 식생활개선에 도움을 준다. (좋은 계란은 완전식품이다)

5.그리고 또 하나 우리 밀 생산과 보급 식생활개선을 촉구한다.(식량부족국가. 건강한 식생활의 핵심문제이다)

6. 기타 여러 가지 지역에 맞는 가축 또는 과수, 버섯, 한과, 양어장, 고추장 된장, 특산물 등 개발하고 연구할 분야가 많다.

 

. 나가는 글

1. 창조의 원리에 나타난 21세기의 희망

21세기의 희망은 창조의 원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현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카오스(Chaos:혼란, 무질서). 우리는 21세기를 시작한 인류의 번영과 행복을 위한 진정한 열쇠를 창조의 원리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와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이 일에 모든 우선순위를 두고 헌신해야 할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 받고, 받은 말씀의 은혜를 세상과 나누는데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인류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세계인구 가운데 상위 20%가 지금 세계 소득 총액의 86%를 움켜잡고 있는 반면에, 나머지 80%의 인구는 그 나머지 14%를 나눠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세계 곡식 총생산량의 47%를 가축의 사료로 사용하여 가축을 길러 상위 20% 계층의 인간들은 고단백 육류로 배를 채우고 있는 반면에, 이 땅 지구촌에는 다섯 살 미만의 굶주리는 어린이만 해도 2억 명이나 되며, 매일 4만여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는 것이 오늘 날 21세기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교회 아니 하나님의 교회가 지금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한국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건강한 교회 상, 정립을 위해 그 어느 때 보다도 깊이 있는 관심과 연구가 필요한 때다. 향후 한국교회를 진정으로 고민한다면 먼저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먼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그의 나라와 의)이 이루어지며 밖으로 이웃을 돌보고 섬기며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뿐 만이 아니라 세상(코스모스)을 사랑하셔서 죄로 말미암아 더렵혀지고 생명을 잃어가는 이 땅에 오셔서 영생을 주시고자 하신 것이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줄 믿는다.

저는 구원신학의 구조를 뛰어넘어 창조신학에 그 바탕을 두어 보다 더 폭 넓은 신학적 사조를 가지고 자연 사랑과 인간 사랑을 함께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저는 이 답을 한국 농촌교회의 활성화와 미 자립 교회의 부흥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듯 한국교회도 산업화와 도시화의 현상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대형화와 도시 일변도의 맘몬 사조가 뿌리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도시 일변도인 삶의 구조는 농촌교회를 무기력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만물을 새롭게 하시길 원하신다. 균형을 잃어버린 이 땅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던 그 창조원리를 회복하고 창조신학을 바탕으로 농촌목회가 활성화되기를 소망한다. (보시기에 좋도록 보존해야 한다.)

 

2. 한국농촌교회의 실상

한국교회는 지금 오만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도회지 빌딩에는 1층에 교회, 2층에 교회, 3층에도 교회... 그런데 이처럼 오만상 교회라고 하는데 절반이상이 미 자립에서 벗어나지 못한 체 만성적자(?)에 허덕이고 있으며 농촌교회 또한 인구감소와 절대 빈곤에서 나아갈 방향을 잃어 버렸다. 그로 말미암아 복음증거의 절대적 명제가 퇴색되어 가고 있는 심각한 실정에 놓여버렸다. 도시교회는 한 개의 교회가 문을 닫아도 바로 옆에 교회가 있으므로 찾아갈 수 있지만 농촌교회는 한 교회가 문을 닫으면 다른 교회를 찾아가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농촌실정상 신앙생활을 지탱하기가 불가능하다.

1) 한국교회의 개 교회 중심적 이기주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으로 점철되어 부패상의 온상이 되고 있다. 도시교회는 농촌교회의 모판이라는 인식에서 끝없이 농촌교회를 사랑하고 농촌교회가 생명목회의 현장임을 깨달아야 한다.

2) 이제 한국 농촌교회는 농촌지역의 선도적 기능을 회복하여 영혼 뿐 아니라 삶의 질 향상에도 앞장서야 한다. 좋은 먹거리를 생산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끝이 좋은 사람이다. 잠시잠간 고난이 있을지라도 이는 경건에 이르는 연단의 과정이요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나면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한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모든 일에 열정이 있다. 열정을 영어로 패션(passion)’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에는 고난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우리는 더 패션(The Passion)’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온 인류에게 진정한 희망을 안겨주는 주는 열정 그 자체였다. 이 열정이 우리 인류를 향해서는 긍휼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긍휼은 영어로 컴패션(Compassion)’이라고 하는데, 이는 함께(Com)’고난(passion)’의 합성어다.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셨다. 긍휼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Compassion)이시다. 오늘도 죄로 말미암아 주님의 곁을 떠나 방황하며 육신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한 체 고난 가운데 머물러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생의 고난과 저주에 함께 동참하시는 것이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열정은 인류에게 진정한 희망을 주시려는 것이다. 이러한 긍휼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증거 되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위해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 이 행복을 가져오는 희망의 꿈은 하나님께 대한 열정(Passion to God!)’ ‘인류를 위한 긍휼(Compassion for Man!)’로 나타난다.

도스토옙스키는 꿈을 밀고 가는 힘은 우리의 이성이 아니라 희망이며, 두뇌가 아니라 심장이다.” 라고 했다. 우리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스스로 믿는 만큼 성공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농촌교회에 대한 사랑과 전원교회에 대한 꿈을 성취시켜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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