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기의 한국농촌

▲ 한경호 목사 횡성영락교회 한국기독교생명농업포럼 대표

오늘 한국농촌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삶의 토대가 총체적으로,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이 변화의 시발은 516군사정부의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50여년 간 우리사회는 자연생태적인 농경중심의 사회에서 공업화에 의한 인위적인 도시문명의 사회로 빠르고 급격하게 이행되었다.

가장 큰 위기는 농촌인구의 급감과 고령화, 그리고 대가 끊긴 영농후계자이다. 815해방 후 받아들인 서구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516을 계기로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가면서 농촌사회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산업화에 필요한 막대한 노동력이 농촌에서 공급되었다.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던 농촌인구는 1960-80년대에 이루어진 대규모 탈농으로 농업인구는 지금 6-7% 수준으로 떨어졌다.(1) 인구의 감소도 문제지만 영농후계자가 끊긴 것은 농업의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두 번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삶은 여전히 빈곤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농업중심-농공병진-공업중심으로 정책변화를 하면서 군사정부는 농민들에게 언제나 장밋빛 청사진을 제공했지만 다 헛된 꿈이었다. 농가소득은 상대적으로 더 감소하였고, 대부분의 농가가 지고 있는 부채는 농가경제를 크게 압박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상환불능 상태에 있다. 부채는 농지를 담보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많은 농지가 농협 등 금융자본에 예속되어 있다.

세 번째, 농촌인구의 감소는 농업의 화학화, 기계화 정책으로 대치되어 죽임의 농업이 자리잡고 공동체성이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60-70년대, 아직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정부는 농업생산력 증대를 우선하였는데,(2) 영농인구가 감소하자 그 대책으로 화학비료와 화학농약 중심의 영농체계를 전국적으로 정착시켰고, 동시에 농사용 기계를 보급하였다. 그러나 화학화는 생산력 증대에 한계가 있으며, 결국 땅을 죽이고, 생산자인 농민과 도시 소비자들의 건강을 해치는 죽임의 농법임이 드러났다. 기계화는 품앗이 등 노동력의 상호부조를 약화시켜 공동체적인 삶을 붕괴시켰다.

(1)탈농은 매년 30만 명 이상, 많을 때는 50먼 명 이상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귀농, 귀촌인, 결혼이주민 등으로 농촌거주인구는 오히려 증가했다. 

(2)1970년대 초반 생산 목표는 쌀 3,000만석 돌파였다. 후에 4,000만석을 달성하기도 하였으나, 강제농정으로 노풍피해 등 많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네 번째, 가족노작 중심의 소농(小農) 구조가 기계와 화학농에 의존하는 대규모 영농 구조로 개편되고 있다. 축산의 경우 이는 더 빠르게 진행되어 구제역 사태를 통해 알게 되었듯이 대규모 공장식 축산이 기업의 형태로 등장하고 있다. 영농의 대규모화는 중산간지대가 더 많고, 농가호당 평균 경지면적이 2ha도 채 안되는 영세소농구조에 맞지 않는 정책이다. 또한 농업의 기업화는 생명체인 땅과 농산물을 물질과 상품으로 비()생명화시킴으로써 농업의 본질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된다.

다섯 번째, 농촌청년들이 해외이주 처녀들과 결혼함으로써 인종적이고 문화적인 새로운 해결 과제가 발생하고 있다.(3) 현재 농촌사회가 이 문제를 풀어가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다문화가정의 급증은 당분간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통합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여섯 번째, 1990년대 이후 진행되고 있는 도시인의 귀농, 귀촌으로 인한 농촌사회의 변동이다. 공업화, 도시화 속에서 약육강식의 경쟁적인 삶에 회의를 품은 청장년들이 나타났으며, 그것은 귀농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이후 귀농인과 귀촌인이 뒤섞이면서 농촌으로의 인구이동이 점차 확대되었다.(4)현재 마을마다 귀농, 귀촌()인들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외지인이 원주민의 숫자보다 더 많은 경우도 더러 있다. 이 도시인들의 농촌유입은 농촌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3)2000년도부터 증가한 결혼이주여성은 2010년도까지 10년간 64천명에 이른다.

(4)귀농인은 농업을 생계의 토대로 삼으며 들어오는 사람들로 청장년층이며, 귀촌인은 은퇴자들이나 질병 치유 목적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다. 귀농인보다 귀촌인들에 의해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농촌문화와 농민들의 정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우월감을 갖고 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인구이동은 크게 세 번에 걸쳐 일어났다. 첫째는 해방이후 남북분단과 625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인구 이동이다(생존형 이동). 두번째는 1960년대 이후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의 이동이고(경제형 이동), 세번째는 1990년대 이후 귀농,귀촌으로 인한 이동이다(의식형 및 생활형 이동). 

 

농촌은 수천년 간 큰 변화없이 땅을 일구면서 살아온 곳이요, 혈연과 지연(地緣) 중심으로 오순도순 공동체적으로 살아온 곳이요, 큰 욕심없이 자연에 순응하여 아이 낳고 대를 이어 온 곳이요, 국난이 있으면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나선 곳이요, 변화에 무디고 보수적이지만, 고유한 농촌문화를 오랜 기간 간직해온 곳이다. 그랬던 농촌인데 빠져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남은 사람은 늙어가고 있으며,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곳이 되었다. 생존의 토대인 농지는 금융기관에 저당 잡힌 채, 빈곤과 부채가 삶을 짓누르고, 품앗이할 이웃도 없어지고, 저 혼자 외롭게 노동해야 하는 곳, 현실을 타개할 아무런 힘도, 비전도 없는 곳, 해외 이주여성과 귀농, 귀촌으로 들어오는 도시인들이 늘어나 새로운 갈등이 발생하는 곳, 논과 밭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마음속에 희망이 아닌 절망이 싹트고 있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암울한 농촌사회 속에 서있는 대부분 농촌교회의 사정은 어떠할까? 작고 퇴락한 교회 건물, 그 안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20-30명 정도의 교인들, 대부분 60대 이상의 까무잡잡한 고령자들이다.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청년회는 이미 해체된 지 오래이다. 간혹 해외에서 이주해온 젊은 여성이 아이를 안고 오지만 아직 낯설다. 1년 예산은 500만원-2,000만원 정도의 미자립 상태이고. 목회자는 의욕을 상실한 채 선교적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2. 위기의 원인

오늘 농업과 농촌사회의 위기는 근본적으로는 자연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좀더 편리하고 풍요롭게 살아보려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에 근거하고 있다. 근대 서구 자연과학기술의 발달과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등장은 이 욕망의 충족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공업중심의 석유화학문명은 농업에 대한 의존도를 대폭 감소시켰으며, 농촌사회의 영역을 크게 축소시켰다. 동시에 농업도 화학화, 기계화, 생명공학의 발전 등 기술혁신으로 생산력을 증대시켜 적은 인력으로도 높은 생산력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한국농촌의 위기는 이러한 전 세계적인 흐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강력한 경제성장정책으로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지상최대의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문명의 전환과 그 속성에 대해 성찰할 여유가 없었으며, 따라서 농업의 가치와 지위에 대하여 경제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왜곡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농업은 본질적으로 생명산업으로서 그 과정과 결과의 90% 이상을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있다. 공업과 같이 인위의 비중이 크지 않다. 그러므로 농산물은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산물이다. 인간은 그것을 잘 나누어 먹으면서 살도록 되어 있다. 땅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독점할 수 없으며,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할 공동의 생존 토대이다. 이 엄연한 진리를 자본주의와 산업문명이 무시함으로써 농업의 위기가 초래되었다.

농업의 위기는 인간 생존의 위기이다.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두 요소는 식량과 에너지인데 에너지는 부족해도 불편을 감수하며 살 수 있지만 식량은 없으면 죽는 절대적인 요소이다. 농업이 붕괴하면 인간의 삶이 치명적인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인간의 욕망충족을 위한 끊임없는 질주와 농업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농업 위기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농업 없이는 문화도 없다”(Without agriculture, no culture)는 말이 있듯이 문화의 자양분이요 산실이었던 농경산업의 쇠퇴는 인간의 삶속에서 농경적이고 생태적인 요소를 거세시킴으로써 생명의 영성을 메마르게 만들고 있으며 이 또한 삶의 위기로 작용하고 있다.

농업의 현대화는 땅과 자연을 대상화시키고 기계론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애초에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으며, 생명의 순환, 공생, 공존의 원리를 거스르는 속성 때문에 반생명적 요소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농업의 위기는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위기에 대한 신앙고백

우리 농촌이 거의 절망적 상태에 놓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역사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화의 과정이며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신앙고백으로 실천하는 장()이라면, 오늘 한국사회의 변화와 농촌의 몰락에서 섭리사적인 뜻을 읽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정녕 농촌과 농민을 버리기로 작정하신 것인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하비루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모세를 통해서,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서 예수를 통해 가장 강하게 일어났다. 외세에 의한 억압과 수탈, 그에 빌붙은 내부 세력들의 착취와 횡포가 가장 심했을 때, 그리하여 민중의 고난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강력하게 일어났다. 예수는 당시 차별과 소외로 얼룩진 갈릴리 농어촌을 선교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 자신이 낮고 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났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였으며 목수와 농사일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공생애 때에는 소외받고, 차별받는 세리, 병자, 창기들과 어울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였다.

오늘의 한국농촌은 예수 시대의 갈릴리이다. 갈릴리 농토의 80%가 예루살렘 등 도시인의 소유요, 대부분의 갈릴리 주민들은 소작인이었다. 소외와 차별 또한 심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여 사회모순과 질곡에 의한 피해를 가장 많이, 심하게 받는 곳이 갈릴리요 농촌이다. 농촌은 오직 도시인을 위한 식량공급 기지요, 휴식처요, 투기장일 뿐이다. 갈릴리처럼 희망을 발견하기 어려운 현장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사회적 모순이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깊고 넓게 쌓여온 농촌이야말로 구원의 역사가 시급한 곳이다.

농촌은 이 시대 문명의 남은 그루터기이기도 하다. 이시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통하여 구원사역을 이어가신 하나님은 농촌에 남은 자를 두시어 다음을 준비하신다. 이 시대 농민은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남은 자들이다. 역사의 위기에 종말적 심판을 하시고 다음 세대를 이어갈 때 남은 자들은 매우 중요한 구원의 사역자들이다. 그것은 인간의 강포와 죄악이 관영했던 노아시대에 홍수심판을 예고하고 노아를 통하여 새시대를 열어가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해준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노아를 찾고 계신 것은 아닌가?

 

4. 교회의 소명-치유, 생명, 정의, 평화의 세계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실천하는 곳이다. 농촌교회는 오늘의 갈릴리인 농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실천해야한다. 그것이 예수정신에 부합하는 목회이다. 농촌목회자는 영적인 눈을 밝히 뜨고 이 역사와 문명을 바라보면서 목회에 임해야 한다. 목회자의 신학적인 입장과 신앙고백의 변화가 교회를 변화시키고 마을을 변화시킨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농촌은 갈릴리의 예수처럼 치유사역이 필요한 곳이다. 마음의 상처, 소외와 차별, 빈곤과 압박으로부터의 영적인 해방이 필요하다. 일생동안 농사짓고 자식 키우며 고생한 늙은 농민들의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다문화 가정을 이루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는 눈물겨운 모습을 보듬어 안아야 한다. 농촌에는 도시와 달리 사회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저들 또한 사랑으로 보듬고 돌보아야 한다.

농촌은 영적인 눈을 뜨면 할 일이 많은 곳이다. 특히, ()생명적인 죽임의 문명이 농촌에 까지 엄습해오고 있는 이때에 생명목회를 한다면 여러 과제들이 눈앞에 보일 것이다. 무엇보다 죽임의 농업으로부터의 해방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의 농업을 돈 때문에 버리고 반생명적인 농사를 짓는 것은 신앙적으로나 건강의 측면에서나 옳지 못한 일이다. 목회자와 교인들이 앞장서서 실천해야할 일이다.

다음,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농촌사회의 빈곤과 비인간적인 상황은 정부 정책의 잘못과 국민들의 농업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농민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면서 형성된 도시문명에 대한 성찰과 함께 그 정책을 주도한 집단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있어야 하며, 차별과 소외의 사회구조적인 원인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농촌은 또한 평화로운 마을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일그러진 농촌사회를 평화로운 공동체로 변화시켜야 한다. 혈연과 지연에 기초한 그리고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마을에서, 협동적이고 민주적인 가치에 기반한 그리고 보편적인 사랑과 정의가 지배하는 새로운 차원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평화로운 마을은 생명과 정의의 가치가 완결되는 현장이다.

 

5, 교회가 할 수 있는 과제들

1) 식량과 에너지를 자립하는 마을로

평화로운 마을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제일 중요한 것은 교회가 속한 마을을 식량과 에너지를 자립하는 마을로 조성해가는 것이다. 앞으로 닥칠 기후대재앙과 식량파탄에 대비하며 농업의 자주성과 자립도를 지켜나가려면 마을 단위에서부터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식량과 에너지를 자립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식량 자립의 경우,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식량의 수요와 생산량을 점검하고, 삶에 필수적인 농산물은 반드시 생산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지역 주민들의 수요량은 충족시키고 남을 생산량일 것이다. 문제는 필요한 농산물을 골고루 갖추는 것이다.

농사 방법은 생명농업이어야 하며 지역순환농업의 체계 속에서 경종농업과 축산농업의 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축분(畜糞)의 생산량과 수요량을 조사하여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이것은 시군 단위에서 행정적인 뒷받침을 필요로 하지만 협동조합 방식으로 축분의 수거, 발효, 공급을 위한 사업체를 주체적으로 운영할 수도 있다.

에너지의 경우, 전기에너지가 가장 필수적이다. 에너지 자립을 위해서는 많이 보급되고 있는 태양광 발전 시스템을 중심으로 도입하면서 기타 풍력, 지열, 축분에너지 등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실험단계이고 선구적인 일이어서 일반화하기에는 이르지만 발전 속도가 빠른 시대이므로 조만간에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것이다.

 

2) 마음을 하나로 모아가는 마을로

교회는 사회 통합의 기능을 갖는다. 해외 이주여성들, 귀농, 귀촌인들 등 이질적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는 오늘의 농촌사회는 자칫하면 갈등으로 인해 마음의 벽이 생기고 마을의 평화가 파괴될 수 있다. 교회가 이 다양성을 잘 조화시켜 평화로운 마을을 조성해야 한다. 독거노인, 조손 어린이, 장애인, 다문화 가정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귀농, 귀촌인 등 비교적 주민들보다 좀더 배우고, 사회적 경력을 갖고 있는 분들은 마을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하여 상호 부조하는 공동체로 형성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목적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공부방 및 지역아동센터의 운영, 청소년 문화(문학, 음악, 미술, 악기 등)교실의 운영, 도시농촌교회 청소년 연합 생태교실의 운영, 다문화학교, 주부교실, 생명농업작목반, 노인들을 위한 활동 모임(문해반, 짚풀공예 등 취미반), 지역에 자생하고 있는 들꽃 기르기와 전시회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 지역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3) 협동조합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 마을로

옛 공동체가 붕괴된 농촌마을을 새로운 공동체 마을로 세워나가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할까?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대안은 협동조합이다. 2011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었고, 201212월 시행에 들어갔다. 5인 이상이면 누구나 협동조합을 만들고 법적인 뒷받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협동조합은 출자금이 사업의 기초가 되며, 모든 일을 민주적인 토론으로 결정하고, 협동적으로 실천하는 활동 기구이다. 협동조합을 자치적으로 잘 운영하면 경제적인 도움도 되고, 민주적이고 협동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마을공동체가 한층 성숙해질 수 있다.(5)

사실 농민들은 오래전부터 향약, , 두레 등을 통해 협동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것이 단합을 두려워한 일제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망가지고 왜곡되었다. 협동조합운동은 농민들의 생래적인 협동성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치지향성과 비전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농촌현실은 협동조합운동을 위한 여건이 제대로 조성되어 있지 않다. 오랫동안 정상적인 협동조합 경험을 하지 못했으며(6) 경제적 빈곤의 지속으로 이기적인 욕망이 강하고, 상호간의 신뢰가 많이 약해져 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이 올바른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더 느끼도록 해준다. 마을마다 있는 교회들이 나서서 협동조합을 만들면 점차 협동적이고 민주적인 마을,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가치가 실현되는 마을로 서서히 변모해갈 수 있을 것이다.

(5)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된 이후 여러 단체나 지역에서 협동조합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협동조합 결성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농촌교회들도 있다.    

(6)농협은 엄밀한 의미에서 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없다. 조합원이 주인 노릇을 못하도록 되어 있는 태생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농민들은 농협을 통해 협동조합을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협동조합운동에 걸림돌이다.

 

6. 맺는말 

지금까지 위기에 처한 농촌의 현실을 살펴보고,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농촌사회는 분명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안고 있다.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경제적 지위의 향상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상황이다. 문제의 성격이 근본적이고 총체적이다.

신앙을 통한 영적인 접근이 우선되어야 한다. 내면적인 문제의 해결없는 육신과 물질 문제의 해결은 별 의미가 없다. 보다 깊은 영성으로, 보다 근본적인 접근을 통하여 문명과 농촌사회를 통찰하여 농촌과 농업을 미래의 희망으로, 구원의 터전으로 만들어 나가는 일이 앞으로 교회가 해야 할 중차대한 소명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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