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승주 목사 주님의교회담임 코닷연구위원

20084월 부산일보의 기사에 교인간의 소송은 법전 아닌 성경으로라는 판결이 나왔다. 울산지법의 김은구 판사는 울산의 어느 교회에서 교인들이 담임목사 청빙문제로 말다툼을 벌이다 서로에게 폭행을 하게 되었고 형사소송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자 민사소송을 제기한 사안에 대해 이렇게 판결했다.

법정에서 교인들이 서로 편을 갈라 앉아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인인 김판사는 원고에게 고린도전서 6장의 내용을 소리 내어 읽도록 했다. 성경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교인들끼리 송사를 일삼는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교인들끼리 세상 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고전6:6~8) 이 말씀은 당시 법정에 앉아 있던 원고와 피고 뿐 아니라 방청석에 앉아 있던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법정다툼이 성경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은 물론 교인으로써 부끄러운 행위였음을 깨닫고 결국 쌍방이 제기했던 모든 소송은 취하되었다.

이 사건은 교회가 하지 못한 화해를 법정에서 김판사가 함으로 교회에 시사해 주는 점이 많다. 오늘날 교회는 서로간의 송사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회와 교회와의 분쟁 뿐 아니라 교회지도자들의 소송 남발, 교인들의 상호간의 소송이 법원에 제기되어 진행 중인 것이 허다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5절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라고 하면서 권면한다. 오늘날 법원에 제기된 소송 중에 상당한 건은 부끄러운 내용이 많다. 특히 불신자들이 볼 때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

 

소송을 하는 이유

소송이라는 것은 법원에 법률상의 판결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형사소송의 경우는 당연히 실정법을 위반했기에 국민으로써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민사소송의 경우는 대부분 감정 대립이 많다. 가령 명예훼손이나 권리 침해, 파벌싸움으로 인한 주도권 쟁탈 등의 경우에 서로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는 사안도 감정이 대립되면 용서할 수가 없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대립을 화해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노회의 결정이나 총회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요즘에는 전권위원회를 조직해서 판결해도 불복하고 사회 법정에 고소하며 수습위원회를 통한 수습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교회 안에 소송제도가 없는 것이 아니다. 재판국도 있고 치리회도 있다. 하지만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순종의 본을 보여주지 못함

이렇게 된 이유는 일차적으로 상회의 결정에 순종의 본을 보여 주지 못한 하회의 모습 때문이다. 상회가 결정하면 비록 그 결정이 용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회는 순종해야 한다. 그리고 절차와 방법을 갖추어 정당하게 진행하면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런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부족하고 또한 상회를 신뢰하지 못하기에 불복하게 된다. 그러면 연약한 성도들이나 다음 세대의 목회자들은 그런 영향을 받아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자각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이 소송의 남용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상회의 잘못된 판결

다음으로 상회의 잘못된 판결 때문이다. 상회는 소송이 교회와 교인에게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신중히 판결해야 한다. 하지만 전문성이 부족한 목사와 장로들로 인해 소송이 졸속으로 결정될 때가 많다. 어떤 사안도 중대하지 않은 것이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인데 판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몇 사람의 의견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기에 적절한 판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서 신속히 결정해 주어야 하는데 그 일에만 매달릴 수 없기에 판결을 지연시킴으로 사회 법정에 고소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파벌과 봐주기식 판결로 공정한 판결을 하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 사안에 따라 똑같은 판결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다른 기준과 법을 제시하는 것은 판결을 신뢰하기 어렵게 한다.

 

정보와 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오늘날의 정보와 미디어 발달 때문이다. 요즘은 SNS의 발달과 정보의 홍수로 인해 교인들의 수준이 과거와 같지 않다. 요즘은 이해가지 않는 사항은 언제든지 알아보고 검색해 보면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과거에는 목회자를 신뢰하고 무조건 따랐지만 지금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도 얼마든지 비교해 볼 수 있는 시대다. 심지어 다른 교단의 헌법도 비교분석하는 교인들이 많다. 이런 교인들에 비해 목회자는 전문성이 떨어진다. 강압적으로 들으라고 하면 듣는 시대는 지났다. 그러므로 잘못된 판결이나 수긍할 수 없는 판결을 제시하면 언제든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사회법정에 고소한다.

심지어 교인들 중에는 사회법정이 더욱 정확한 판결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서두에서 제시한 예처럼 기독교인 판사를 통해 교회의 판결보다 더 합당한 판결을 하는 경우도 있다. 더 나아가서 요즘 교회의 소송제기가 늘어나니까 전문적으로 교회법을 연구하는 판사도 있고,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는 판사도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교회의 판결을 사회법정에 맡겨두는 것이 과연 옳은가? 우리는 서두에 제시한 판결에서 중요한 원리를 붙들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가 제시하는 안이 화해다.

 

권징조례 제3장 제1절 제30

권징조례는 대부분 소송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송의 세부사항을 세밀하게 규정하고 일반법 못지않은 세밀한 사항까지 관심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인다. 한마디로 소송법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화해에 대해서는 재판개정을 요하는 소송 4항에 피해를 입고 소송을 제기한 자가 마18:15-17대로 권고해 보아도 효과가 없었다는 진술을 들은 치리회가 피차 화해하도록 권유해도 불응할 때라는 조항에서 스쳐가듯 언급된다. 물론 그 기본적인 배경은 화해를 전제로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송보다 화해가 더 어렵다.

신대원에서 교회헌법을 배우면서 예배지침, 교회정치, 권징조례, 헌법적 규칙을 배우고 외워 시험을 치러본 경험은 있지만 화해에 대해서는 개인의 역량에 맡겨둔다. 목회의 일선에서 성도들의 사소한 감정대립도 해결해 주기 너무 어렵다. 결국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교회를 떠난 성도들이 많다. 화해에 대해서는 갈등관리라는 선택과목이 있었지만 수강하지 않았다. 사실 갈등관리 과목도 교인간의 분쟁보다 목회자 개인의 갈등을 많이 다루고 있어서 화해의 기법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책을 보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사람마다 감정이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달라서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화해제도가 엄연히 법조문에 들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시행에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인다.

2011년에 국민일보에서 한국기독교화해중재원을 만들어 기독법조인, 목회자, 상담학자 등이 참여하여 발족한 일이 있으나 교단이 다르고 개교회주의가 강한 한국기독교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그 실효성은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소송보다 화해에 집중하며 훈련하고 전문가를 양성하고 시행하면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6장 성도의 교제는 화해의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사랑으로 서로 간에도 연합하였기 때문에 서로의 은사와 은혜에도 참여함으로 교제한다. 이들은 공사 간에 속사람으로나 겉사람으로도 다른 지체들의 선에 서로 이바지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에서 볼 수 있듯이 선에 서로 이바지하기 위해 화해해야 한다. ‘또한 필요에 따라 힘이 닿는 대로 외적인 짐들을 서로 덜어줌으로 거룩한 친교와 교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즉 거룩한 친교와 교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화해를 활용하는 것이다.

 

화해를 적극 활용하라

화해를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목회자가 믿을 수 있고 삶이 본받을 만하면 교인들은 설득 당한다. 그 동안 목회자의 신뢰추락은 화해를 어렵게 만든 직접적인 요인이다. 아직도 과거 순교자 목사님들과 초창기 신실했던 선조들을 떠올리는 교인들이 많음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화해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목회자 중에서도 자질 있는 분들을 교단적으로 양성할 필요가 있다. 비용을 따지며 회피하는 것은 더 많은 비용부담을 초래한다. 한 번 소송할 때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전문가 양성에 투자하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셋째, 방법에 있어서 쌍방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감정을 지닌 사람들은 첫 느낌에서부터 상대방의 말을 수용할 지, 배타할 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최대한 겸손의 자세를 유지하며 상대방의 말을 들어줌으로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이 열리면 기도와 말씀으로 접근하면 훨씬 쉽다. 마음 여는 방법에 있어서 목회자는 미숙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자존심을 버리고 일반전문가에게도 겸손히 배워야 한다. 교회 내에 전문가를 활용하고 협력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화해를 적극 활용함으로 교인간의 분쟁 때문에 사회법정에 고소하여 불신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복음전파의 길을 가로 막지 말고 형제끼리 화목함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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