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3111일 수서교회(통합, 황명환 목사 시무)의 교사훈련학교, 2014114일 케이프타운 한인 초대교회(고신, 이창호 목사 시무)의 청지기 세미나, 2014225일 양주 새순교회(고신, 최영완 목사 시무) 구역장 세미나에서 소통을 주제로 강의한 내용과 그 강의를 들은 참석자들의 피드백을 참조해서 코람데오닷컴의 독자들을 위해 다시 정리한 글입니다

 

. 들어가는 글: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불통의 사람들

혁신적으로 발전하는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우리는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소통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닥친 가장 큰 숙제 가운데 하는 다름 아닌 소통의 문제라는 것이다.(1)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1)커뮤니케이션의 관점으로 살펴본 문화와 소통의 문제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다음을 참조하라. 김대진 2차 구술문화 시대의 설교를 위한 청취 해석학의 필요성”,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30(2014, 봄호): 11-21.

 

▲ 김대진 목사 스텔렌보쉬대학교에서 철학박사 고려신대원과 백석신대원 강사 은혜의 교회 협동목사 코람데오닷컴 연구위원.

이 글을 쓰는 중에 여객선 세월호 침몰이라는 비보를 접한다. 어떻게 이런 첨단의 커뮤니케이션 기술 시대에 그렇게 많은 승객들이 사망 실종되었는지? 빨리 연락해서 구출할 수는 없었는지? 조선일보 418일자의 해외선박 전문가들과의 인터뷰기사에 의하면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이 피해를 키운 원인" 이라는 것이다. 선장의 오판으로 승객들에게 잘 못된 정보를 준 것이고, 승객들은 이 방송을 듣고 선내에 머물다가 급격하게 침몰하는 배에서 미쳐 탈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탑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갑판에서 대기하고만 있었다면 이후 배가 침몰했더라도 큰 피해는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또한 현장에 출동한 해경과 각종 구조팀들의 불통이 초기구조 활동을 망쳤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위험을 전달하고 비상시 행동규칙을 따라 소통만 잘 되었어도 이와 같은 대형 참사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우리를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이러한 불통의 장벽들은 이와 같은 위기상황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요즈음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서로 모르는 척 해 주는 것이 예의인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종종 생긴다. 자리를 양보할 때도 아주머니 다리 아프신데 여기 앉으실래요?” 라고 얼굴을 보면서 말하는 것 보다는, 그저 못 본 척 하면서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사람처럼 말없이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작금의 세태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눈인사라도 하면 치한으로 오인 받을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이것이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들에게 꼭 가르쳐 주어야 할 에티켓 중에 하나라고 할 정도이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총화라 할 수 있는 스마트 폰에 함몰되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조차 관심을 갖지 못하는 불통의 사람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세상은 차치하고 교회는 어떤가? 소위 소통의 시대를 사는 교인들은 성도의 교통을 맞보며, 성령의 교통하심가운데 소통하며 살고 있는가? 교인들은 차지하고 목회자들은 어떤가? 소통 기술의 혁명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잘 소통하고 있는가? 혹은 교인들과 잘 소통하고 있는가?

설교학적 입장에서 이야기해 본다면, 설교를 위한 자료들은 과하게 소통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잘 소통되고 있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설교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2) 커뮤니케이션 기술들은 인류 역사상 전무했을 정도로 발전했으나 말씀의 소통은 오히려 더 어려워진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교우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TV를 통해서 안방에서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밤낮으로 접하고 인터넷으로 전 세계 거물급 설교자들의 설교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소통되지 않는 불통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정황 속에서 필자는 교회 공동체 가운데 소통의 문제를 짚어보고, 말씀의 소통이라는 주제로 어떻게 소통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울 수 있을지에 대해 몇 가지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2)“2차 구술문화 시대의 설교를 위한 청취 해석학의 필요성”,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30(2014, 봄호): 18-19. 을 참조하라

. 펴는 글

1. 소통의 필요성

세상에서는 소통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지만, 교회에서도 소통이라는 문제가 과연 중요할까? 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교회 내에서 소통이 안 된다면, 교회 행정에 문제가 생기고 그로인해 이런 저런 갈등이 생길 것이다. 필자도 목회를 하면서 소통의 문제는 효율성의 문제 혹은 기능의 문제 정도라고 여겼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소통의 문제가 단순한 기능과 효율성의 문제에 국한 된 것일까?

크리스천 커뮤니케이션 학자들 가운데 소통의 원형을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찾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3)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하나로 소통하는 모습에서 그들은 소통의 본질을 찾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65:2),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신 예수 그리스도(4:15),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딤후1:14)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8:26)과 같이 우리와 소통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 하나님은 소통하시는 하나님이다.

(3)Long, A 2007. Listening. London:Darton, Longman and Todd Ltd. 175.

 

그 소통하시는 하나님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소통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14).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신다. 암탉이 자기의 병아리들과 소통하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셔서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곤 했다(23:3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까지 당신의 백성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신다(1:18).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소통하시며 그분의 뜻을 따라 자기를 비우시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람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셨다(2:6-8).

함께 교회를 섬겼던 저명한 내과 전문의이신 한 장로님께서 암이라는 질병을 내과적으로 쉽게 설명해 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한마디로 암세포와 건강한 세포와의 차이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강한 간세포는 다른 세포들과 잘 소통하며 간이라는 지체를 건강하게 하고, 그로인해 전체 몸과 소통하며 온 몸을 건강하게 한다. 그런데 간에 생긴 암세포는 다른 세포들과 소통하지 않고 자신의 몸통만 불리고 또 불리다가 간을 죽이고, 더 나아가 몸의 생명자체를 죽이게 되고, 결국 자신도 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은 소통이 얼마나 잘 되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씀이다. 피가 잘 소통되고, 여러 가지 영양분들이 잘 소통되고, 세포와 세포가 소통하고, 신경과 신경이 잘 소통될 때 건강한 몸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6-27) 라는 말씀이 너무 실감나게 깨달아지는 순간이었다. 교회가 정녕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소통이라는 주제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서로 소통하지 않는 세포는 암 덩어리가 되어 몸을 죽이고 결국 자신도 죽는 것처럼, 소통하지 않는 교회는 죽는 것이다. 반면에 소통하는 교회는 다음의 말씀처럼 건강하게 자라 든든히 서게 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4:15-16).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의 소통은 단순한 기능의 문제라기보다는 본질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는 교회의 생명을 위협하는 본질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의 소통의 문제를 목회의 본질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2. 소통의 근원적인 한계

소통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먼저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서두에서 세월호의 소통의 문제를 지적했었다. 왜 세월호 선장은 움직이지 말라고 그 자리에 있으라고 방송했을까?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을 이쯤에서 던져 보아야 할 것 같다. “선장이 일부러 참사를 일으킬 작정이 아니었다면, 초기 단계에서 사태를 낙관한 것이 결정적 실기(失機)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사태 파악을 잘못한 것이다. 세월호가 처한 위기상황과 소통하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선장과 승무원들이 해야 할 기본적인 직업윤리와도 소통하지 못했다.

그들로 하여금 진실과 소통하지 못하고 왜곡된 낙관론에 빠져있게 한 원인은 무엇인가? 자신의 경험상 이정도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문제가 생겨도 구명조끼를 입고 구명정을 타고 탈출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선장과 승무원들의 소리에 불과하다. 유사시 구명정을 타고 쉽게 탈출 할 수 있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다 보니 어디로 나와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어린 학생들과 승객들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도 자기들처럼 알아서 탈출 할 것으로 생각했을까? 아니면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오면 자신들의 탈출에 지장이 될까봐 그랬을까? 우리는 모를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선장과 일부 승무원들은 수백 명의 승객들의 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남아 있으라고 수차례 자신들의 소리만 방송하고는 떠나 버렸던 것이다. 타인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입장만 거듭 말하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소통 부재의 전형적인 예이다.

야고보서 1:19에서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들으려고 하지 않는 죄성이 우리에게 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면 들으려 하지 않는 죄성의 문제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3:8-10).”  

하나님의 소리가 들릴 때 숨어 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듣지 않으려는 모습이 감지된다. 루돌프 보렌(Rudolf Bohren) 이라는 설교학자는 이것을 듣지 않으려는 죄의 본성이라고 설명한다.(4) 즉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의 피조물인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창조의 섭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음으로 나도 하나님처럼 말하는 자리로 올라가고자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어 말하고 싶어 하는 죄의 본성(die Ursüunde des Sein-Wollen-wie-Gott)의 결과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고 피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에덴동산을 거닐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소통하며 영생을 누리며 살도록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불통하며 죄와 사망의 법아래 메이게 되고 만다.

(4)R. Bohren, Predigtlehre (München: Kaiser, 1980), 22. 루돌프 보렌의 역서가 한국에 나와 있지만, 한쪽으로 치우진 신학적 용어로 번역을 하다 보니 개혁주의신학을 추구하는 신학도들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보렌의 저서를 개혁주의적 신학 용어들로 번역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저서에서 성경적인 설교론에 대한 깊은 통찰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도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1:19-20, 21, 28).

하나님은 당신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과 소통할 수 있도록 만물을 통해 계시하지시만 타락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계속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듣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의 본성이 소통의 근원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왕이고 내가 하나님이 되고 싶은데 누구의 소리를 듣겠는가? 듣는 척 할지는 몰라도 결국 내가 말할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타자로부터 듣지 않으려는 자기중심적인 죄의 본성을 해결할 수 있을 때 소통은 시작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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