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의 내용

박창진 목사

사도신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성자의 사역에 대한 고백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로 하여 고난과 십자가의 역사성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원래의 사도신경에 포함되어 있는 “음부에 내려가시고”는 본문에 대한 잘못된 해석의 결과이기에 우리와 같이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벧전 3:19 -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시고 전파하시니라 -은 음부에 가심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의인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음부에 가실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한편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리로서’는 ‘그곳으로부터’로, ‘거룩한 공회’는 ‘거룩한 공교회’로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성령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동명사보다는 명사로 표현하는 것이 일관성이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성도의 교제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은 죄사함으로,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몸의 부활, 영원히 사는 것은 영생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 고백의 의의와 방식
사도신경은 교회가 함께 공적으로 같은 신앙을 고백함에 있어서 방편입니다. 일반적으로 전 교회적인 예배의 한 순서로 정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신앙고백을 한다는 의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고백이란 객관적 진리에 대한 지식적 동의를 표하는 것 이상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이란 신자의 삶의 토대입니다.

신앙고백과 삶이란 분리되지 않습니다.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전능하사 ~”라는 고백은 모든 상황과 순간에 낙심하지 않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삶에 대한 다짐되는 것입니다. 고백을 하고서는 상황과 형편에 따라 근심, 걱정, 불안, 불평에 빠지는 것은 고백이 엉터리임을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사도신경은 가능한 한 지체 간에 마주 보고 하여야 합니다. 지체가 서로에게 고백에 대한 증인이 되어 고백에 걸맞는 삶이 이루어지도록 섬기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뒤통수를 보고서 사도신경을 고백하여야 하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입니다.

 

사도신경에서는 거룩한 공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공교회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교회가 거룩하며 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교단이나 교파의 사람들을 한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거룩하며 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교제란 거룩한 공교회가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개인적인 측면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측면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교제의 대상은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느냐, 그러한 신앙고백서에 얼마나 동의하느냐가 대상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함께 거룩한 공교회의 지체로 인정하고 사랑하여야 합니다. 강단 교류는 성도의 교제의 한 내용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도신경을 예배 때에 하느냐 하지 않느냐 또는 같은 신앙고백서를 가지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로 제한하는 것은 월권입니다. 성도의 교제의 대상은 주님께서 정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에 순종하여야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단이나 교파는 결코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삼위이시며 한분이신 하나님, 한 말씀(교리), 한 교회, 한 믿음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한 고백입니다(엡 4:4-6). 교단과 교파는 성경이 그렇게 반대한 교회 분파의 확장입니다.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않은 결과입니다(엡 4:1-3).

바울 사도는 그러한 행태에 대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으로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 3:17)고 너무나도 강력하게 경고하였습니다. 교단과 교파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성경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교단과 교파가 하나님의 섭리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다르게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교회라면 거룩한 공교회가 한 교회로서 나타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사도신경이나 역사적인 신앙고백서의 소유가 진정으로 의의를 지니는 길은 그 내용에 부합되는 삶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분리를 정당하게 생각하고 계속적으로 그 노선을 따라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습니다. 귀한 전통의 소유가 진정으로 의의를 지니는 길은 그 전통에 맞는 삶이 뒤따를 때입니다. 현재는 순교자의 삶과 너무도 거리가 멀면서 순교자의 후예를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께 슬픔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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