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김대진 목사 스텔렌보쉬대학교 철학박사 고려신대원, 백석신대원 강사 은혜의 교회 협동목사 코람데오닷컴 연구위원.

. 들어가는 글: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불통의 사람들

. 펴는 글

1. 소통의 필요성

2. 소통의 근원적인 한계

3. 교회의 소통을 위한 제안들

1) 자기를 비우고 타자(他者)를 향해 귀를 열라!

2) 소통을 위해서 종의 자세가 필요하다.

. 나가는 글: 소통의 목회

 

3. 교회의 소통을 위한 제안들

타자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본성, 내 소리를 발하고 싶은 본성, 궁극적으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처럼 말하고 싶은 죄의 본성이 바로 소통의 근원적 한계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이런 죄의 습성이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의 소통을 방해하는 일차적인 장애물은 말하기는 속히 하고 듣기는 더디게 하는 죄의 습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소통의 문제는 말하기의 문제가 아니라 듣기의 문제라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란 말하기의 능력이라기보다는 타자를 향해 열린 마음과 귀가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말하기가 중심이 된 커뮤니케이션 이론들은 본질을 놓칠 수 있는 것이다.

 

1) 자기를 비우고 타자(他者)를 향해 귀를 열라!

전문가들에 의하면 잉태된 태아는 엄마 배속에 있을 때부터 소통을 시작한다고 한다. 누구와 소통하는가? 물론 엄마와 소통한다. 탯줄을 통해서 엄마와 소통할 뿐만 아니라, 임신 90일 정도 지나면 눈도 뜨지 못한 태아가 놀랍게도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외부와 소통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듣는 다는 것은 소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굳이 사지 선다형으로 문제를 내서 소통의 일차 기관은 귀 가운데 무엇인가? 라고 질문 한다면 4번 귀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배속에 있는 태아도 엄마의 소리를 듣는데 우리가 왜 듣지 못하겠는가? 듣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그 반대의 문제 때문에 소통에 장애가 생긴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아이를 찾는 다는 다급한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방송이 나오고 조금 후에, 공항 경찰들과 아이 엄마로 보이는 새댁이 아이를 찾기 위해서 급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앞을 향하여 뛰다 시피 걸어가던 엄마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궁금한 마음에 필자도 함께 따라가 보았다. 한 참을 뛰어가던 그 엄마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여러 항공사의 탑승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는 그 넓은 인천공항의 어느 구석에서, 울고 있는 한 아이를 찾아 덥석 끌어 않았다. 순간 필자는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어떻게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을까? 필자를 비롯해서 동행하던 경찰들과 공항 관계자들은 전혀 듣지 못했는데, 아니 들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들었을까?” 엄마는 자기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엄마만 이런 능력의 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빠들도 특별한 능력을 가진 귀를 가지고 있다. 한 아이가 아니라 쌍둥이가 동시에 온 집안이 떠나가라 울어 젖히는 중에도 류현진, 추신수의 야구 중계방송을 다 들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아빠들에게도 있다.

듣는 능력이 없어서 못 듣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자기가 듣고 싶지 않은 것은 안 들리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자세로는 타인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자기중심적인 개인에 머물러 있는 한, 참된 소통은 요원한 일이다.

부모님들을 상담하다 보면, 자녀들과 소통이 안돼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아이들과 소통하셔야 됩니다. 집에 가셔서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아빠가 오늘부터 목사님 말씀대로 우리 가족도 저녁식사 후에 모두 거실에 모여서 대화의 시간을 갖기로 하였으니 다 모여서 대화하자!” 라고 결정했다고 한다. 그 대화 모임이 얼마나 갔을까? 여러분 생각대로 오래 가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사실 그 아빠는 그래 너희들 이야기 좀 들어보자 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자기의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너희들 다 이야기 해봐 너희 소리가 다 틀렸음을 내가 증명해 줄께!” 라는 자세로 듣고 있었지 않았을까? 듣기는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대기하는 것이 아니다. 듣기는 대기가 아니라 죽기이다. 죽기란 듣지 못하게 만드는 자기중심적인 죄의 습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2:20; 5:24).

듣지 않으려는 죄의 습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릴 때 참된 소통이 시작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5-8). 자기를 비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 소통의 본질이다. 타자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마음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55:8)과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16:24).

일반적으로 소통을 이야기 할 때 언로의 개방을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게 하라는 것이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난상 토론을 정규적으로 하면 소통하는 교회가 세워진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서로 상처입고, 마음을 닫아 버리고, 원수 아닌 원수가 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자리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죄의 습성 때문이다. 언로를 개방하기 전에 청로(聽路)를 열어야 한다. 타인들을 향해 입을 열기 전에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을 향해 귀를 열고,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향해 귀를 열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교회 안에서 소통이 시작된다.

 

2). 소통을 위해서 종의 자세가 필요하다.

내가 중심이 되어 있는 구도에서는 참된 의미의 소통을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자기중심적인 왕 같은 개인에게 타인들의 소리는 엘리베이터 음악처럼 그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못하고, 백성들의 소리도 듣지 못하고, 심지어 아버지의 소리도 듣지 못했던 불통의 대명사와도 같은 인물들이 성경에 나온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홉니와 비느하스이다. 불통하다가 결국 한 날 한 시에 함께 죽음을 당한 형제들이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렇게 듣지 못하게 된 이유가 어디 있을까? 놀랍게도 성경은 그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삼상2:29).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김 받으며 말 그대로 금지옥엽으로 길러졌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내가 가장 귀하기에 나의 소리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중요하고 내 생각, 내 느낌, 내 취향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자기들을 중히 여기며 키워준 아버지 엘리의 충고도 결국 듣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상2:24,25).

불통의 대명사와도 같은 홉니와 비느하스와는 대조적으로 사무엘은 소통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않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삼상3:19). 요즈음 말로 하면 사무엘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가 소통의 대가가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로 부터 시작된다. 한나는 아이 낳지 못하는 아픔을 가진 여인 이었다. 그녀를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 엘가나도 그녀의 아픔을 위로할 수는 없었다. 한나는 그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여호와 앞에 심정을 쏟아 놓는다(삼상1:15). 한나는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위로받을 수 없었던 아픔을 위로 받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하나님과 소통하며 기도하는 한나의 모습에 관해서 영이 어두워진 엘리 제사장이 그만 실언을 한 것이다.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삼상1:14). 한나를 술에 취해 교회 와서까지 술주정하는 알코올 남용자 정도로 알았을까? 아픔을 가지고 기도하는 교인을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전혀 근거 없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나쁜 제사장이다. 요즈음 정서로 보면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교회를 옮기던지, 목사를 바꾸던지 해야 할 상황 아닌가? 그런데 한나의 반응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상황을 엘리 제사장에게 사실대로 설명한다. 한나의 사정을 들은 엘리는 급하게 말을 바꿔서 그 상황을 모면하고자 한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1:17). 어쩌면 입에 발린 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실수를 회개하며 진심을 담아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는 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엘리 제사장이 하는 말을 주의 종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에는 너무 힘든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한나는 그 영적으로 어두워진 엘리를 통한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1:18). 마침내 한나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사무엘을 잉태하게 된다. “당신의 여종이라고 스스로를 고백하는 종의 자세로 말씀을 들을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종의 자세가 사무엘에게 그대로 전수된다.

하나님께 응답으로 받은 사무엘을 서원대로 성전에서 일하는 종으로 바친다. 제사장은 제사장의 가문이 대대로 세습하게 되어있었기에, 말 그대로 종으로 바친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 사무엘의 반응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삼상3:8).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씩이나 사무엘은 엘리에게로 달려간다. 말 그대로 종의 자세이다. 엘리 제사장이 그에게 다음에 다시 부르시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9)라고 말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실 때 그는 엘리제사장이 가르쳐 준대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라고 응답함으로 하나님과의 소통이 시작되고, 하나님 백성 공동체와 소통하며, 시대를 이끄는 소통의 대가가 되는 것이다.

자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기중심적 자세로는 타자와 소통할 수 없다. 마치 종이 그 주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이, 종의 자세를 가져야 타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고 타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소통이 시작된다. 따라서 소통은 종의 자세를 가져야 가능하다.

모두가 왕이 되고 리더가 되고자 하는 이 시대에 누가 종이 되겠는가? 요즈음 꾸준한 베스트셀러들 가운데 리더십에 관한 책들이 종종 눈에 띤다. 크리스천 서적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참된 소통을 가능케 하는 사무엘 같은 리더는 리더십을 익혀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종의 자세로 타자를 향해 열린 귀를 가질 때 소통이 일어나고 참된 리더로 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리더십을 강조하기 보다는 종의 자세(followership)를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아니 먼저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하나님 백성 공동체와 소통해야 하는 설교자들부터 종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설교자들이 종의 자세로 타자를 향해 열린 귀를 가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소통되는 역사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 나가는 글: 소통의 목회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불통의 사람들을 향한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타자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본성, 내 소리를 발하고 싶어 하는 본성,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죄의 습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극복하는 일일 것이다.

먼저 예수 믿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소통해야 한다.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타자를 향해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설교자들부터 종의 자세로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을 향해 귀를 기울일 때 참된 소통이 일어 날 것이다. 설교를 듣는 청중들도 왕처럼 대접 받는 소비자의 관점에서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의 자세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며 나아갈 때 영적 소통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소통하며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통시키기 위해서는 입을 열기 전에 귀를 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종의 자세로 하나님을 향해 타자들을 향해 귀를 열고 소통하는 일은 단순한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사느냐 죽느냐에 관한 문제이기에, 소통의 문제는 더욱 더 절실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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