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4미래교회 신재철 목사의 발표에 대한 논찬이다.

I. 문제제기 

▲ 홍성철 목사 대전주는교회

오늘날 교회가 세상 법정에 가는 일로 인해 내홍을 겪으면서 세상에서 그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고, 세상을 변혁해야 할 교회가 세상법정에 호소하는 일로 인해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짓밟히는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1) 예수님은 예수 공동체 교회가 성도 간에, 혹은 세상 사람들과 어떤 소송 문제로 법정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가르치는가? (2) 또한 어떤 학자들은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일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호소하여 법정에 가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바울의 가르침이 원조인가? (3) 어떤 학자들은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가르침을 로마서 13:1-7절에서 호소하여 정부의 관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13:4,6)이기 때문에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세상 법정에 호소해도 된다는 주석학적 입장을 밝힌다. 과연 그런가?

이에 대해 서론에 밝히는 것은 (1) 예수님은 세상 법정에 교회도 불신자와도 가지 말라고 문자적으로 가르친다. (2) 바울이 가르친 세상 법정에 가는 소송 문제의 가르침은 산상보훈 5:21-26절에서 예수님이 먼저 가르쳤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이 소송 문제를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3) 로마서 13:1-7절은 정부의 권위의 순종하라는 이웃 사랑명령의 문맥에서 살펴야지, 세상 법정에 호소해야 한다는 논지를 13:4,6절에서 세상 법정에 호소하라는 분명한 문구나 가르침이 없는데 호소해도 된다는 해석학적 주장은 주석의 해석학적 오류라고 본다. 

따라서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산상보훈은 예수 공동체와 제자들이 세상과 다른 더 나은 의가 주제이다. 그러므로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일에 예수님을 가르침을 따라야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는 더 나은 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의 의(너희의 의)가 더 탁월하거나 질적으로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경고하신다(5:20).   

필자는 5:21-26절의 마음의 미움 살인 주제를 지면상 5:25-26절의 분명한 재판 소송에 대한 구절만 살펴보기로 한다 

 

II. 마태복음 5:21-26절의 본문 개관 

예수님은 첫 번째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의 본보기 예화를 가르친다. 예수님은 제자에게 율법을 성취한 첫 번째 본보기를 제공한다. 예수님은 외부적인 살인 배후에 내면의 태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마음의 미움도 살인이며, 그 살인의 배후에는 분노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가장 심각한 죄는 분노인데, 그 분노는 마음의 살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분노는 행동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만큼 심각한 죄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의 해결책인 상호 화해를 제시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미움의 말과 마음인 살인을 버리고 화해할 때 세상과 더 나은 초월하는 의를 가진다.

문학적 형태와 메시지는 서로를 향한 분노와 경멸의 형태가 있다(5:21-22). 첫 번째 예화는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와의 화해가 출현한다(5:23-24). 그리고 두 번째는 원수와 화해를 언급한다(5:25-26). 두 개의 예화는 모두 법정으로 가는 내부적 상황과 외부적 상황이다.

아웃라인: 

1. 첫번째 대조: 살인(5:21-22)  

   1) 전통적 가르침; 살인하지 말라(5:21) 

     (1) 명령: 살인하지 말라(21a) 

     (2) 어기는 자의 형벌: 재판법정에 끌려간다(21b).  

   2) 예수님의 가르침: 화내지 말라(5:22) 

     (1) 화는 심판에 이른다(5:22a) 

     (2) 경멸은 더 큰 심판으로 이끈다(22b)  

2. 예화1: 교회 공동체 내부 형제와 화해(5:23-24) 

   1) 배경: 만일 너희가 예물을 드리려거든(23) 

   2) 취해야 할 행동: 예배 전에 화해(24) 

     (1) 예물을 남겨두고 가서 

     (2) 화해하고 

     (3)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3. 예화2: 교회 공동체 밖의 불신자와 화해(5:25-26) 

   1) 배경: 법정에 가는 도중에(5:25a) 

   2) 행동: 할 수 있는 한 화해하라(25a) 

     (1) 위험 1: 재판에 회부된다. 관리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감옥에 간다(25b) 

     (2) 위험 2: 마지막까지 갚으라(26b)  

 

III. 두 번째 예화와 적용: 법정과 화해 예화(5:25-26) 

이 구절은 법정에 고소자와 법정에 연관된 내용이다. 이 구절에서 무슨 내용으로 논쟁하고 법정에 가는지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서 합당한 행동은 분노가 아니라, 상호 화해이다. 예수님은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심각한 결과가 있을 것을 경고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화해를 다루는 이 구절과 같이 읽어야 한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형제에게 상처를 입힌 자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을 불의하게 다루는 자들과도 화해하라는 권면이다  

1) 배경: 법정에 가는 도중에(5:25a) 

이 구절은 공동체 내부의 사람과 화해뿐만 아니라(5:23-24), 외부 불신자와도 상호 화해의 중요성을 언급한다(5:25-26). 이 두 번째 예화의 경우는 법정과 고소자와 관계가 설정된다. 이 에피소드는 두 사람이 법정에서 논쟁을 해결하러 가는 과정을 소개한다. 따라서 만일 분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심각한 재판 결과가 종말론적으로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재판과정에서 채무자는 그 빚을 다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글개역개정판은 사화하라’(유노온, ενον)친구가 되라는 말이며, 화해하는 의미이다. 동사 다른 사람과 함께 친구가 되라는 신약에서 유일하게 등장한다. 피고인은 법정에 가는 고소자와 화해하라는 의미로서 친구로 만들라’(유노에오, ενοω)는 동사는 다른 사람에 향하여 마음이 서로 사이좋게 되라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친구가 되라는 것이라는 것은(5:25), 타협하든지, 돈을 갚아서라도 서로 화해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용하는 이 예화는 빚을 안 갚은 것 때문에 법정에 가서 고소하는 일반적 상황일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만일 어떤 사람이 신자를 반대하고, 신자가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가능한 한 법정 소송과 감옥에 가기 전에 서로 화해하여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해는 빨리’(타쿠스, ταχς) 하는 것이다(5:25; 28:7, 8).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희생이 있더라도 진지하게, 그리고 빨리 화해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 상호 화해의 원칙을 가르치면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끼리 법정에 고발하지 말고,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그리고 재정적 손실을 보는 것이 낫다고 가르친다(고전 6:7).  

본문의 배경이 되는 1세기 로마법에 따르면, 고소인이 고소된 자를 법정에 데려올 수 있었고, 고소자가 피고인을 강제로 법정에 끌고 올 수 있었다. 또한 로마법에 따르면, 강도나 도둑 같은 현장범은 증인 없이 법정에 끌고 올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로마법의 배경과 관습에 따라 이 구절을 언급한다. 따라서 고소자는 피고인을 강제로 구인하는 동안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싸울 수 있었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이 있었다. 그러나 고소 문제로 법정으로 간 후에는 그 소송은 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법정으로 가는 길가에서 서로 도중에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법에 따르면, 상호 간에 법적 재판 과정이 진행되면, 재판관은 상호 간에 누가 이기든지 선고를 할 것인데, 바로 그 때는 화해가 이미 늦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소송과 재판 전에 서로 화해할 수 있는 황금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5:25절의 배경이다.  

예수님은 말씀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소자는 너희를 재판관에 넘기고, 감옥의 관리는 너희를 감옥에 던져질 것이다”(22:21; 32:6; 55:6,7; 13:24,25; 고후 6:2; 3:7,13; 12:17; 왕상 22:26,27). 여기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죄가 있으면 재판 판결이 나기 전에 화해하라. 법정 판결이 나면 너무 늦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길가에서 원수와 함께 법정에 가기 도중에라도 화해하라는 것이다. 분명히 고소자는 피고인을 재판관(호 크리태스, κριτς)에 넘길 권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재판관을 피고인을 감옥에 던질 것이다(바로, βλλω).  

법정에 가는 도중에 원수와 함께 화해를 권면하는데, ‘원수’(안티디코스, ντδικος)는 고소하는 자다. 원수는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능동적으로 적의적인 태도를 갖는 사람이다. 원수는 어떤 형제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자다(5:25; 12:58; 18:3; 벧전 5:8). 원수라는 용어는 화해하지 않은 신자는 그 형제와 함께 종말의 심판에 간다는 이미지로 사용된다.  

고소자는 피고를 법정에 넘겨주다’(파라디도미, παραδδωμι)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재판에 넘겨준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동사 넘겨주다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의 권세에 넘겨주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와 같이 법정에 가는 도중인 그 짧은 시간이라도 화해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심판이 임박해 있기 때문에 서로 화해하라는 화해의 긴급성을 암시한다. 누가복음 12:57-59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문맥은 이 내용과 유사하다. 따라서 주요 내용은 긴급한 화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재판의 세 가지 과정을 언급하면서 재판으로 가는 도중에라도 화해하지 않으면 화해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무엇이 강조되는가? 그것은 화해이다. 용어 화해하다’(유노에오, ενοω)는 법정에 가는 주요 요인이 분노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해는 이 구절의 전체 주제인 분노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재판에 가는 분노가 그 주제가 아니라, 화해이다. 이 구절에서 주요 주제는 서로를 분노하게 만들고 대적하게 만드는 통제되지 못한 화와 분노이다. 그런데 그 화를 잘 통제하고, 서로 상대방과 화해하면 법정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심지어 외부의 이웃인 불신자와도 원수로 여기기보다는, 친구로 잘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의 불신자와 함께 더불어 살 때, 화해하라는 것이며, 그 화해는 예수님이 명령인 하나님의 전체적인 토라의 목적에 부합되는 다른 생활 방식으로 성취한다는 것이다.  

2) 행동: 할 수 있는 한 화해하라(25b)]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고소로 인해 감옥에 가는 상황을 피하라는 말씀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른다: 너희는 마지막 센트까지 다 갚을 때까지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리라.” 어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아멘 레고 소이, μν λγω σοι)는 지혜문학의 구전 전통을 따른다(cf. 25:7-8; Sir 18:20; 6:1-5; 5:26; 12:59).  

(1) 위험 1: 재판에 회부되고, 관리에게 넘어가고, 그리고 감옥에 간다(25b)

예수님의 말씀은 화해가 발생하지 않으면 감옥에 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해를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로마법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법령은 빚을 졌다면 지속적으로 다 갚아야 한다는 점이다(Ulpian Dig. 1.1.10). 그러나 로마법은 신의 종말론적 심판 의미가 포함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플라토에 따르면, 신은 모든 사람은 행한 대로 보응한다는 점에서 빚을 다 갚는 것을 종말론적 정의의 일부라고 말한다(Plato Rep. 10.614a, 615b-c; Plead. 113). 어떤 사람이 잘못했으면, 그 사람은 그 죄의 대가로서 열배로 고통 받는다. 어떤 사람이 착한 행동을 했으면, 그들은 같은 분량대로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Plato. Rep. 10, 615). 그러나 예수님은 만일 양자 간에 화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종말론적 심판에 갈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가 암시되어 있다. 그래서 최대한으로 마지막까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서로 화해하라는 것이다. ‘지불하다’(아포디도미, ποδδωμι)는 마태가 잘 사용하는 용어로서 의무를 세금이나 의무를 다함으로 보상해 주다는 뜻이다(5:26, 33; 6:4, 6, 18; 12:36; 16:27; 18:25f, 28ff, 34; 20:8; 21:41; 22:21; 27:58).  

(2) 위험 2: 마지막까지 갚으라(26) 

예수님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아멘 레고 소이, μν λγω σοι)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게가 있으니 잘 들으라는 것이다. 현재 문맥에서 예수님은 아멘은 그가 말하는 것의 특별한 중요성을 부각한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적 권위로 말씀한다.  

마지막까지 화해를 이루지 못하면 결단코 그곳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ομὴ ἐξλθς κεθεν ως νποδς τν σχατον κοδρντην). ‘결단코 나오지 못할 것이다에서 이 이중적 부정(ομ)은 미래에 대한 강한 부정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주 사용된다(22:67; 10:5; 13:41).나오다’(에잴코마이, ξρχομαι)어느 한 장소로부터 나오다는 의미다. 따라서 화해하지 않은 자들은 결단코 거기에서 풀려나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는데, 놓이지 못한다는 이 동사는 마태복음 8:12절에서는 이스라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쫓겨나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에서 어두운데 가서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동사와 같은 동사이다.거기에서’(에케이덴, ἐκεθεν)그 장소에서이다. 따라서 가까운 문맥에서 거기에서를 고려할 때 게헨나 지옥에서 결단코 미래에 나오지 못할 것을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래에 결코 종말론적 심판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호 간에 화해를 하지 못했다면 회개하고 화해해야 한다.  

남김없이 보상할 ’(에오스, ως)는 금전적 보상이 종결 되는 때의 시간을 뜻한다. 남김이 없이 갚아야’(아포디도미, ποδδωμι) 한다는 것은 금전적 빚을 보상해야 한다는 뜻이다(12:59).한 푼이라도 남김없이 마지막까지 화해를 위해 지불해야 할 것에서 한글개역개정번역에서는 한 푼으로 사용되었다. ‘한 푼센트’(코드란탠, κοδρντην)는 로마 데나리온의 10/1과 동등한 동전이다. 한 푼은 유대인이 사용하는 두 렙돈과 동일한 가장 작은 단위의 로마 동전이었다. 그래서 신자는 마지막까지’(에스카토스, σχατος) 이 작은 빚을 갚는다는 의미는 철저한 상호 간에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빚을 다 갚는다는 것은 비유적이다. 로마서 6:23절에서 죄의 삯은 영적 사망이다(타 갈 오포니아태스 하마르티아스 사나토스, τγρ ψνιατς μαρτας θνατος). 따라서 화해하지 않은 죄는 종말론적 죽음으로 지불된다는 것이라면, 마지막까지 그 대가가 다 지불되어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2:6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 대로 보복한다. 그런데 마태복음 5:26절에 행한 대로 보복한다는 이 경우가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상호 간에 화해하지 않으면, 종말론적 심판으로 가는 상황에 있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경고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의 잘못을 합리화하려하지 말고 다 갚으라는 것이다.

 

IV. 결론  

그러면 이 논쟁에서 얻어진 윤리적 결론은 무엇인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결론은 분명히 나타나지 않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은 율법을 재해석하신 첫 번째 교훈으로 더 나은 의를 보여 주어야 할 제자들은 공동체 내부와 외부 사람들과 상호 간에 화해해야 함을 가르친다. 살인 행동으로 이끄는 분노가 문자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사용되는데, 그들이 말하는 그릇된 말들’(words)과 적의적 인간관계(relationship)는 하늘나라 통치를 받는 제자에게 적절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과 다른 대안공동체의 제자로서 합당한 행동은 상호 간의 화해이며, 평화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5:9).  

이 논쟁에서 다음과 같은 암시를 받을 수 있다: (1) 형제를 미워하는 미움이 그 주제다. 분노의 뿌리는 형제를 미워하고 반대하는 살인이다. 그 미움은 분노로 이어진다. 형제를 향한 분노는 레위기 19:18절의 형제사랑과 반대된다. 따라서 미움에 근거한 살인의 근원은 깨어진 인간관계이다. 이 본문에서는 분명히 언급되지 않지만, 가인은 동생 아벨을 미워해서 살인한다(4:8-16).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미움이었고 아벨을 죽은 것은 분노와 미움이며, 살인의 근원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예수님이 가르치는 것은 미움은 살인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해석한 토라의 계명의 근원은 무엇인가? 살인하지 말라, 곧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2) 산상보훈에 따르면 살인의 근본 원인인 분노를 제거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윤리적 명령은 분노를 통제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노로 이끄는 상황을 피하고, 화해를 통해 이 분노를 해결하며, 그리고 평화적인 형제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분노했다는 용어는 누가복음 15장에서 큰 형은 동생이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잔치를 벌여주자 화가 났다는 용어와 유사하다. (3)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빚을 갚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 땅에서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늘나라 가치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미래에 받을 것이라는 구절이다. (4) 공동체 안에서 이 예화는 화해의 필수성을 강조한다. 이 두 사람이 법정에 가는 예화는 화해를 긴급히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다. (5) 예수님의 제자는 교회 공동체의 형제와는 물론, 불신자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여기에서 원수는 신자가 아니란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전 구절에서 형제란 표현이 있는 것을 볼 때, 원수는 주변의 불신자다. 신약은 불신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고 가르친다. 5:43-47절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명한다(12:14-21). 원수사랑은 이웃 사랑의 계명이다(19:19; 22:39). 원수사랑 의도는 머리에 숯불을 쌓아두어 선한 행위를 통해 회개에 이르도록 만들라는 것이다(벧전 2:12).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교회는 그들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화해한 화해의 공동체이며 구성원이므로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화해하는 것이 우선이다. 상호간에 화해가 이루어야하고, 교회 스스로가 화해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전문가 집단이 필요하다. 만일 교회가 이 일로 화해를 이루지 못했다면 과거나 현재의 문제를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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