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1-11에 대한 주석적 연구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소송하느냐?

 

서론

▲ 길성남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고린도 교회의 소송 문제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6:1-11은 신자 간 불신 법정 송사로 분열의 아픔을 겪은 고신 교회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신 교회 안에서 지금까지 이 본문에 대한 진지한 주석적 연구가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본문의 해석과 관련해서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과연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성도 간 소송에 관한 교훈은 무엇인가?

이 글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성도 간 소송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고린도전서 6:1-11을 충실하게 주해하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과 문맥에 비추어 절별로 차례로 주해하면서 본문의 의미를 가능한 한 저자가 의도한 대로 파악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 간 소송 문제를 포괄적인 방식으로 다루기보다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특정 사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이 본문에만 근거하여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성경의 유비라는 해석 원리에 따라 위에 있는 권세들에 관한 본문인 로마서 13:1-7의 교훈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이 본문의 교훈을 고려하면서 성도 간 소송에 관한 고린도전서 6:1-11의 가르침을 규명할 것이다. 이 글이 고신 교회 안에 성도 간 소송에 관한 올바른 성경적 견해를 규명하는 활발한 연구와 토론을 위한 촉진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

고린도전서 6:1-11은 고린도 교회의 한 교인이 동료 교인을 세상 법정에 세운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본문이 제시하는 정보만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지극히 작은 일”(2), “세상 일”(3), “세상사건”(4)이라는 표현은 그 문제가 일상의 일과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돈이나 재산에 관한 문제로 이해한다. 7절과 8절에 나오는 속이다”(ποστερω)라는 동사가 다른 사람의 돈이나 재물을 속여 취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가 옳다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돈이나 재물을 속여 취한 것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재력 있는 소수 집단에 속했을 것이다. 피해자의 재산상의 손실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그 정도의 손해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교인은 손해를 감수하거나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편을 택했다. 아마도 이것은 형사소송이 아니라 민사소송이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 소유권 문제, 사기, 권리나 재산의 침해 등은 민사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대다수 민사 소송은 돈이나 재산에 관한 분쟁을 다루었다.

형사 사건을 다루는 로마 법정은 비교적 공정하고 객관적이었지만 민사 사건을 다루는 속주의 하급 법정은 그렇지 못했다. 민사 소송 대부분은 부유한 상류층 사람들이 계급이 낮은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나 약자들이 귀족이나 부자를 상대로 고소했다는 기록은 없다. 소송을 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부자들과 권력자들만이 상대방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승소하기 위해 유능한 변호사들을 고용했고, 판사와 배심원들은 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고대 로마인들의 삶을 그린 소설 사티리콘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렇게 탄식한다. “돈만이 지배하고 가난한 소송인들이 결코 이길 수 없는 법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 . . 그러나 법정 소송이란 경매에 지나지 않는다.” 아가야 속주의 상업과 행정 중심지였던 고린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디오 크리소스톰(Dio Chrysostom, 40-115)은 고린도에 판결을 굽게 만드는 수많은 변호사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Orations 8.9). 이런 정황에 비추어 볼 때 동료 교인을 고소한 고린도 교인은 재력 있는 사람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는 상대방보다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하고 소송을 시작했을 것이다

 

본문의 문맥

고린도전서 6:1-11은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는 큰 단원(5-6)에 속해 있다. 이 단원에 기록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은 글로에의 집 사람들(1:11)이나 또는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16:17)가 알려준 것이다. 바울은 음행과 법정 소송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교회의 거룩함을 훼손한 교인들과 그들을 징계하지 않은 고린도 교회 모두를 책망한다. 이 단원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자기 아버지의 아내(친모가 아니라 계모였을 것임)를 취한 교인의 문제이고(5:1-13), 두 번째는 동료 교인을 세상 법정에 세운 문제이고(6:1-11), 마지막 세 번째는 창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교인들의 문제이다(6:12-20).

이 문제들을 하나로 묶는 주제는 교회의 교회답지 못함이다. 세 가지 문제가 모두 고린도 교회가 교회답지 않은 교회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성도이며 하나님의 교회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이방 사회의 잘못된 관습과 행동 양식을 따라 살고 있었다. 어떤 교인이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것과 일부 교인들이 창녀와 잠자리를 같이한 것이 이런 사실을 웅변적으로 증명한다. 고대 고린도 사회에서 매춘은 합법적인 것이었고, 널리 받아들여진 사회적인 관행이었다. 따라서 이방 문화의 관습과 행동 양식을 버리지 않은 일부 교인들은 매춘을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런 일을 계속 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구원받고 영적인 존재들이 되었기 때문에 성적 부도덕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살고 있는 교인은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전형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동료 교인을 세상 법정에 세운 사람 역시 이방 문화의 관습에 깊이 물들어 있었고, 믿음을 가진 이후에도 그런 관습을 버리지 않았다. 고린도 교인 대다수가 법정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정상적인 일상생활의 일부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 당시 헬라 사람들은 법정에 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법정 소송 문제를 다루는 본 단락(6:1-11)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1-6, 7-8, 9-11). 첫째 부분은 첫 절과 마지막 절에 판단하다”(개역개정: “고발하다”)라는 동사와 앞에서라는 전치사가 함께 등장하여 수미상관 구조(inclusio)를 이룬다(1-6). 이 부분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이 동료 교인을 세상 법정에 고소한 것을 강하게 책망한다. 그리고 교인들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둘째 부분에서는 누가 이기든 상관없이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것 자체가 모두의 패배라는 사실을 지적한다(7-8).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성도라는 사실을 안다면, 사소한 문제로 믿음의 형제와 다툼을 벌이지 않을 것이고, 그런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불의를 당하고 속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셋째 부분에서 바울은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9-11). 또한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정결하게 되었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상기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사소한 문제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것이 그들에게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본문의 번역

1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다른 이와 더불어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감히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소송을 제기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않느냐? 2 또는 너희는 성도들이 세상을 판단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만일 너희에 의해서 세상이 판단(심판)을 받는다면 너희는 가장 작은 문제들을 판단하는 일들을 할 자격이 없겠느냐? 3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하리라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한데 하물며 일상생활의 일들이겠느냐? 4 그러므로 너희가 일상생활과 관련된 사건들이 있을 때 교회에서 가볍게 여김을 받는 이 사람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한다. 너희 가운데 그의 형제 사이의 일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그러나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소송을 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것도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너희) 자신과 더불어 소송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너희에게 이미 완전한 패배이다. 왜 차라리 너희는 불의를 당하지 않느냐? 왜 차라리 너희는 속지 않느냐? 8 그러나 바로 너희 자신이 불의를 행하고 속이고 있구나. 그리고 그것도 형제들에게! 9 또는 너희는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속지 말라. 음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나 간음하는 자들이나 탐색하는 자들이나 남색하는 자들이나 10 도둑질 하는 자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나 술 취하는 자들이나 비방하는 자들이나 남의 것을 강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11 그런데 너희 중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이런 자들이었다. 그러나 너희는 씻겨 졌고, 그러나 너희는 거룩하게 되었고, 그러나 너희는 의롭게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고린도전서 6:1-11의 주해

1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를 세속 법정으로 가지고 간 것을 책망하기 시작한다. 개역개정판에서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라고 번역한 구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다른 이라는 표현은 법정 소송 문제가 고린도 교인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것임을 알려준다.다툼이라고 번역한 프라그마”(πργμα)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행위,” “사건,” “발생,” “일어난 일등을 의미한다. 헬라 문헌에서 이 단어가 가지다라는 동사와 함께 나올 경우에 소송이나 법적 행위를 가리킨다.

개역개정판은 개역한글판에서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라고 번역한 것을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라고 고쳐 번역하였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맞지 않는 번역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고발하다는 것은 피해자나 그의 법적 대리인이 아니라 제3자가 범죄 사실을 신고하여 수사 및 기소를 요구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한 것이므로 고발하다가 아니라 고소하다,” 또는 소송하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이것이 헬라어 동사 크리노”(κρνω)의 용례와 일치한다. 이 본문에서처럼 이 동사가 중간태나 수동태로 사용될 때에는 고소하다,” “소송을 제기하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 자체보다 그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세속 법정에서 해결하려 한 고소인의 행동을 책망한다. 사도는 자신의 분노와 책망을 톨마오”(τολμω)라는 동사로 시작하는 수사의문문으로 표현한다. “어떻게 감히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소송을 제기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않느냐?” “톨마오는 일반적으로 위험이나 반대를 무릅쓸 정도로 담대하거나 용기가 있음을 의미한다. 주로 용기 있는 대담한 행동(당돌히 . . . 하다)을 표현할 때 사용하지만(15:43; 5:7), 주제 넘는 행동이나 뻔뻔한 행동(감히 . . . 하다)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한다(12:34; 20:40; 21:12; 5:13; 7:32; 15:18; 고후 10:12; 9). 이 본문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일을 세속 법정에서 해결하려는 것이 성도의 신분에 맞지 않는 무모한 행동, 또는 뻔뻔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세상 법정의 재판관들을 불의한 자들이라고 부름으로써 고소인의 행동이 무모하거나 뻔뻔한 것임을 더 분명하게 표명한다. 바울은 당시의 많은 재판관들이 뇌물이나 청탁을 받고 부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이란 표현이 재판관들 모두가 도덕적으로 불의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했을 때 아가야 총독인 갈리오가 문제를 바르게 처리하는 것을 직접 경험하였다(18:12-17). 여기서 불의한 자들이라는 표현은 성도라는 표현과 함께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기독교적 개념이다. ,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 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세속 재판관들은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며, 참된 의를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불의한 자들이다(9).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들 앞에서 소송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여기서 바울의 강조점은 세상 재판관들의 불의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 앞에서문제를 다루지 않는 고소인의 잘못에 있다. 바울은 성도 앞에서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2절과 3절에서 성도의 영예로운 특권을 언급하고 있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상과 천사들을 판단할 크고 영예로운 특권을 가진 성도들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 교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2

1절에서 동료 교인을 고소한 사람을 겨냥한 바울은 2절에서 그의 행동을 수수방관한 고린도 교회를 겨냥한다.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라는 수사의문문은 독자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무시한 중요한 진리를 상기시키는 표현양식이다(고전 6:3, 9, 15, 16, 19). 바울은 이 표현양식을 동원하여 세상 법정에 호소하지 말아야 할 신학적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으로서 세상에 대한 심판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19:28; 22:30; 14-15; 2:26-27; 20:4). 성도들이 최후의 심판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이기 때문이며(8:17), 또한 그리스도가 그들의 머리와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종말에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여 그분과 함께 세상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딤후 2:12).

성도들이 재판장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종말에 세상을 심판한다면 그들에게 이 세상의 일들을 판단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바울은 이렇게 도전한다.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개역개정판에서 판단하기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크리테리온”(κριτριον)은 법정이나 법적 행위를 의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판결이 내려지는 장소, 즉 법정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지만 이 본문에서는 법적 행위를 의미한다. 개역개정판에서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번역한 단어 엘라키스톤”(λαχστων)작은”(μικρς)이라는 형용사의 최상급 복수 소유격이다. 여기서는 명사적으로 사용되어서 가장 작은 일들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이 세상의 모든 소송들이 마지막 심판이라는 종말적 사건에 비추어볼 때 지극히 사소함을 의미한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판단하게 될 성도들의 권한은 매우 크고 중대한 것이다. 그것에 비할 때 지금 이 세상에서 교인들 사이의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세상을 판단할 큰 영예를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작은 문제들을 세상의 재판관들에게 맡긴다면, 그것은 성도의 고귀한 위상과 권한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3

바울은 다시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종말에 성도들이 세상뿐 아니라 천사들까지 판단하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천사들은 악한 천사들을 가리킬 수 있다. “판단하다”(κρνω)라는 동사의 의미를 심판에 제한할 경우, 천사들은 타락한 천사들, 즉 악한 영들임에 분명하다. 선한 천사들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락한 천사들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24:21-22; 벧후 2:4; 6; 20:10). 따라서 이 본문에서 말하는 천사들을 악한 천사들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 인간들뿐만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또한 통치하다라는 동사와 판단(심판)하다는 동사는 성경에서 유사한 의미로 종종 사용된다. 예를 들어,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19:28)는 구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열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하리라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구절 역시 성도들이 천사들보다 높아져서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성도들이 천사들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서 그의 영광스러운 통치에 동참할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통치가 악한 영들에 대한 심판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들을 최종적으로 멸하실 것이다(고전 15:24). 그리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악한 천사들에 대한 그분의 심판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다.

개역개정판에서 세상 일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비오티코스”(βιωτικς)는 파피루스 문서에서 상업적인 문제, 즉 생계를 유지하게 할 수 있는 것을 가리켰다. 하지만 더 넓은 맥락에서 이 단어의 중성 복수 형태(βιωτικ)는 생명과 관계있는 것, 즉 일상생활과 관계된 것을 의미한다. 이 본문에서도 비오티카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사건들이나 문제들을 가리킨다(참조. 딤후 2:4; 요일 2:16; 3:17).

천사들을 판단할 크고 중대한 권한을 행사할 성도들에게 일상적인 문제들을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다. 이 본문의 요지는 천사들을 판단할 고귀한 권한을 갖고 있는 성도들은 일상생활과 관련된 사소한 문제들을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나아가는 점층법, 하물며”(how much more)의 방식이다. 천사들을 판단하는 크고 중대한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물며 일상생활의 작은 문제들을 판단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성도들이 일상생활과 관련된 작은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을 스스로 포기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4

또 다시 바울은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책망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비오티카라는 단어를 헬라어 문장의 제일 앞에 배치한다(개역개정판 본문에서는 세 번째 자리에 있음: “세상 사건”). 이것은 세상과 영적 존재들을 판단하게 될 성도들의 중대한 권한과 대조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바울은 크고 중대한 권한을 가진 성도들이 어떻게 사소한 일상생활의 문제들을 세상의 재판관들에게 맡길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일부 주석가들은 이 본문을 풍자적 어조를 가진 명령문으로 번역한다. 개역개정판에서 세우느냐라고 번역한 카띠제테”(καθζετε)카띠조”(καθζω)라는 동사의 2인칭 복수형이다. 서술형과 명령형이 똑같기 때문에 명령 동사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앉다,” 앉히다를 의미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권위 있는 지위를 부여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24:45; 2:30).카띠제테를 명령 동사로 간주할 경우,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에게 일상적인 문제들이 있을 때 교회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세워라!” 성도들은 세상과 천사들을 판단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인 문제로 다툼이 일어날 경우 교회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을 재판관으로 세워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교회에서 가볍게 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세우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세워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는 풍자적인 의미이다.

하지만 이 본문을 명령문으로 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선 사도 바울이 교인들에 대해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헬라어 단어 엑수떼네오”(ξουθενω)는 어떤 사람을 무가치하게 여겨서 경멸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τος ξουθενημνους)이라는 표현은 경멸 받는 자들,” 또는 업신여김을 받는 자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만일 바울이 이런 뜻을 가진 용어를 고린도 교회의 일부 교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면, 그것은 모든 교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성경적 원리와 충돌을 일으킨다(3:28).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는 모든 지체가 소중하다(고전 12:12-27). 또한 이 본문을 명령문으로 이해할 경우, 5절과 조화시키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고린도 교회 안에 교인들의 문제를 판단할 만한 지혜로운 자가 하나도 없다면, 가장 미미한 교인들을 재판관으로 세우는 것은 부질없는 짓다. 그들은 교인들의 문제를 판단할 만한 지혜가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교인들 중 미미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법정의 재판관들을 가리킨다. 세상 법정의 재판관들은 세상과 천사들을 심판할 고귀한 위상과 권한을 가진 성도들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물론 이것은 1절에 나오는 불의한 자들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세상 법정의 재판관들을 무시하는 표현이 아니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통치자들과 관리들(재판관들을 포함)을 선을 베풀고 악한 자들을 벌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하였다(3-4). 그런데 여기서 세상 재판관들을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이라고 한 까닭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통치와 심판에 참여하지 못할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할 신분을 가진 성도들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상의 사소한 문제를 그런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은 자신들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5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갖게 만든다. 이 본문에서 헬라어 문장의 앞자리에 있는 엔트로페”(ντροπ)라는 명사는 자신이 한 일이나 하지 못한 일 때문에 갖는 당혹이나 수치를 의미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세상과 천사들을 판단할 고귀한 신분에 어긋나게 행동한 것, 즉 어떤 교인이 세상 법정에 문제를 가져가도록 방임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고 이 말을 한다. “너희 가운데 그의 형제 사이의 일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물론 고린도 교회에는 교인들의 다툼을 해결할만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이 풍족했고(1:5),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1:7). 또한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생각했다(4:10). “너희 가운데 . . . 지혜로운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라는 수사 의문문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교인들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지 못한 고린도 교회의 자기모순을 책망하는 것이다. 두 교인 사이의 소송은 고린도 교회에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없다는 것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지위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6

바울은 자신이 지적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형제가 형제와 맞서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소송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개역개정판은 개역한글판에서 송사하다라고 번역한 것(“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고발하다라고 고쳐 번역하였다(“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이 번역은 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헬라어 동사의 의미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크리네타이”(κρνεται)크리노”(κρνω) 동사의 중간태, 또는 수동태로서 고소하다,” “소송을 제기하다를 의미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형제가 형제와 맞서 소송을 한 것이다. 두 사람은 돈이나 재산 문제로 심하게 다투고 소송까지 함으로써 형제 사랑의 원리를 깨뜨린 것이다. 둘째, 형제 사이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간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잘못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것도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라고 말한다. 일상생활과 관련된 문제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진 것은 나쁜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동료 그리스도인과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것은 더욱 나쁜 것이다. 두 형제가 세상 법정에서 다툼을 벌이는 것은 교회의 문제를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고든 피가 잘 묘사한 대로, 이런 행동은 교회가 자신의 더러운 속옷을 광장에 내거는것과 같다.

 

7

5-6절에서 고린도 교회 전체를 부끄럽게 한 바울은 7절에서 소송에 연루된 당사자 두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서도 복수 2인칭 대명사와 동사들을 사용함으로써 고린도 교회 전체를 포함시킨다. 믿음의 형제들이 소송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도덕적 패배를 의미한다. 개역개정판은 7절 전반부를 이렇게 번역한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 . .” 이 번역은 고린도 교인 두 사람이 서로를 고발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1절과 6절에서 알 수 있듯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손해를 본 교인이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다른 교인을 세상 법정에 세운 것이다. 두 교인이 서로 고발하거나 고소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가 너희 자신과 더불어 소송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너희에게 이미 완전한 패배이다.”

개역개정판에서 허물”(=저지른 잘못)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명사 헤테마”(ττημα)는 신약 성경에서 이곳과 로마서 11:12에만 나온다. 이 단어는 패하다,” “정복당하다를 뜻하는 동사 헤타오마이”(ττομαι)에서 파생한 것으로서 패배,” 또는 실패를 의미한다. 이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소송에 연루된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으므로 영적이며 도덕적인 패배를 의미할 것이다.

소송의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법정 소송을 하는 것 자체가 영적이며 도덕적인 패배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특히 소송을 시작한 교인을 겨냥한다. 그가 동료 교인과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간 것이 패배이다. 예수님은 공동체 안에서 갈등을 다루는 원리를 말씀하셨다(18:15-17). 먼저 죄를 지은 형제에게만 권고해야 하고, 그가 듣지 않을 경우 증인들을 데리고 가서 말해야 하고, 그래도 듣지 않을 경우 교회에 알려야 한다. 손해를 입은 고린도 교인이 이런 단계를 밟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교회에 최종적인 중재를 요청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형제를 고소한 행동은 그가 형제사랑의 원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소송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패패배인 것이다. 설령 그가 재판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라 패배일 수밖에 없다.

바울은 법정 소송을 시작한 교인뿐만 아니라 그 소송을 유발시킨 교인 역시 자기 잘못으로 패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 사람은 동료 교인에게 불의를 행하고 그를 속임으로써 이미 형제사랑을 버렸으며 스스로 신자 됨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그릇된 행동으로 물질적인 이익은 얻었을지 몰라도 지금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특권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9).

바울의 책망은 또한 고린도 교회 전체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소송의 결과가 무엇이든 두 사람의 행동은 고린도 교회에게도 수치를 안겨준 패배이다. 소송 절차가 시작된 것이 교회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는 교인들의 소송을 방임함으로써 교회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복음의 공신력에 손상을 입히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법정 다툼으로 교회 안에 적대감과 분열이 깊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승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후반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소송을 시작한 사람에게 수사 의문문으로 도전한다. 이 의문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 차라리 너희는 불의를 당하지 않느냐? 왜 차라리 너희는 속지 않느냐?”불의를 행하다”(δικω)라는 동사는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에서부터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 전체를 나타내며,속이다”(ποστερω)라는 동사는 남의 돈이나 재물을 속여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10:19; 5:4). 전자는 일반적인 불의를 행하는 것이고 후자는 재물과 관련하여 불의를 행하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는 수동태로 사용되었으므로 불의를 당하다는 것은 부당한 처우를 받는 것을, “속다는 것은 속임수로 돈이나 재물을 상실하는 것을 가리킨다. 재물과 관련하여 불의를 당하는 것을 뜻하는 두 번째 단어는 고린도 교회의 소송이 재산이나 사업 문제에 관한 것임을 시사한다.

지금 바울은 소송을 시작한 교인에게 부당함과 불의를 당할 것을 촉구한다. 부당한 피해나 손해를 참고 견디는 것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권리 주장을 포기해야 하며, 어떤 사람에게든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한다(12:17, 21; 살전 5:15). 부당한 피해를 참고 견디는 것은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2:1-11; 벧전 2:19-21). 소송을 제기한 교인은 예수님의 본을 따라 부당한 손해를 받아들이고 견뎌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불의와 속임을 당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는 권면은 악과 불의를 저항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과 불의를 묵인해야 함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할 경우,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는 악과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 수사 의문문의 일차적 기능은 눈에 보이는 작은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 형제를 세상 법정에 세우는 일을 하지 말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악을 선으로 이길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12:17, 21).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탈리오 법칙’(ius talionis)이 아니라 사랑(13:5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이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산상수훈의 정신(5:38ff)이 권면의 배후에 갈려 있다.”

 

8

7절이 일차적으로 소송을 시작한 원고를 겨냥한 말이라면 8절은 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고 그를 속인 피고를 겨냥한 말이다. 바울은 강한 역접 접속사 알라”(λλ)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그 사람을 책망한다. 7절에서 수동태로 사용한 불의를 당하다속다라는 동사를 능동태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두 동사는 현재 시상이다. 피고가 지금도 계속해서 불의를 행하고 있고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속여 취한 돈이나 재산을 동료 교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있으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접속사 알라다음에 강조 용법의 2인칭 주격 복수 대명사 휘메이스”(μες)를 배치하고, 2인칭 복수 동사들(δικετε, ποστερετε)을 사용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악행을 고린도 회중 전체에 적용하고, 그들 모두를 책망의 대상에 포함시킨다. 교인 한 사람이 불의를 행하고 동료 교인을 속였지만 그의 행동에 교회 전체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는 그 교인의 악한 행동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것을 묵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의 악행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 모두가 불의를 행하고 속이고 있다는 질책을 들어야 한다.

개역개정판에서 그는 너희 형제로다”(κατοτο δελφος)라고 번역한 마지막 구절은 6절의 그리고 그것도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κατοτο πὶ ἀπστων)라는 구절과 매우 흡사하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것도 형제들을!” 여기서 그리고 그것도라는 표현은 바울의 탄식과 분노를 나타낸다. 그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것이 형제들, 즉 동료 교인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악행임을 말하고자 한다.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9-10).

 

9

바울은 또 다시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 불의와 악행에 대해 경고하기 시작한다. 2인칭 복수 동사 오이다테”(οδατε, “너희가 안다”)는 경고의 대상이 동료 교인을 속이고 불의를 행한 교인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전체임을 보여준다. 9-10절에서 바울이 제시하는 악행의 목록은 습관적인 행위들을 가리킨다. 단 한 번이라도 유혹에 빠져 음행이나 도둑질을 한 적이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경건한 삶을 살려는 의지 없이 의도적으로 악을 일삼는 사람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죄 안에 계속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의 경고가 실제적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계속 형제들을 속이고 해를 끼치는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이 경고의 목적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불의와 속이는 일을 중단하게 만들고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살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유업으로 받을 대상으로서 종말에 나타날 미래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가리킨다(고전 15:50). 개역개정판에서 유업으로 받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클레로노메오”(κληρονομω)는 일반적으로 유산으로 상속받다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완전히 소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다(8:17).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고, 하나님의 나라 또한 의로운 나라이기 때문에 불의한 자들은 그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

개역개정판에서 미혹을 받지 말라”(μπλανσθε)고 번역한 표현은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에 속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죄를 정당화하게 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기까지 할 것이다. 계속 죄 안에 머물게 만들려는 유혹은 사탄의 치명적인 가시와 같은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불의한 자들”(δικοι)이 어떤 종류의 죄인들인지 구체적으로 열거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음행하는 자들, 우상숭배자들, 간음하는 자들, 탐색하는 자들, 남색하는 자들이다. “음행하는 자들”(πρνοι)은 모든 종류의 부도덕한 성관계를 갖는 자들을, “간음하는 자들”(μοιχο)은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자들을 가리킨다. “탐색하는 자들”(μαλακο)은 동성연애자를,남색하는 자들”(ρσενοκοται)은 동성 연애하는 남자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남성 동성연애자 중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을, 후자는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주로 미소년들이 동성애 관계에서 여성 역할을 했다고 한다.

 

10

계속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불의한 자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그들은 도적들, 탐욕을 부리는 자들, 술 취하는 자들, 모욕하는 자들, 속여 빼앗는 자들이다. “탐욕을 부리는 자들”(πλεονκται)은 과도하게 많이 가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을, “술 취하는 자들”(μθυσοι)은 습관적으로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셔서 주정뱅이가 된 자들을 가리킨다.모욕하는 자들”(λοδοροι)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욕하고 비방하는 자들이며,속여 빼앗는 자들”(ρπαγες)은 폭력을 동원하여 다른 사람들에게서 무엇인가를 탈취하는 자들, 즉 모든 형태의 강도들이다. 회개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이런 죄를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9-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소송을 시작한 사람보다는 동료 교인에게 불의한 행동을 한 사람, 그리고 그의 행동을 방관하고 묵인함으로써 그의 불의에 동참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물론 소송을 시작한 사람도 동료 교인과 물질 문제로 심하게 다투고 자신들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기를 거절했다는 점에서 불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논증의 흐름을 고려할 때 여기서 그가 동료 교인을 속여 재물을 취한 사람과 그의 행동을 방임한 교회 전체를 염두에 두고 있음에 분명하다.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계속 불의를 행할 경우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11

마지막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개역개정판에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었더니”(καταττινες τε)라고 번역한 구절에서 부정대명사 티네스”(τινες, “어떤 자들”)는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가 과거에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대명사는 제한적인 의미가 아니라 수사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강조하기 위해 역접 접속사 그러나”(λλ)를 세 번 반복한다. “그러나 너희는 씻겨 졌고, 그러나 너희는 거룩하게 되었고, 그러나 너희는 의롭게 되었다”(λλ πελοσασθε, λλ γισθητε, λλ δικαιθητε). “씻겨 졌다는 것은 그들이 죄를 씻음 받았다는 것이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성도로 구별되었다는 것이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동사는 수동태 역할을 하는 중간태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동사는 수동태이다. 이 동사들의 주체는 모두 하나님이시다. 고린도 교인들의 의지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들의 변화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일어난 것이다. 비록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현재 행위가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에 위배될지라도 바울은 그들의 변화가 여전히 사실임을 확신한다.

이 본문의 요점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부여받은 새로운 정체성은 그들에게 과거의 불의한 행위들과 이방 세계의 잘못된 관습과 행동양식과의 단절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불의한 자들”(δικοι)처럼 행동하는 것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믿음의 형제를 재정상의 문제로 세상 법정에 세우는 것을 중단해야 하고, 동료 교인을 속이고 불의를 행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고, 교인들의 소송 문제와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문제를 묵인하고 그것에 동참하는 행동을 중단해야 한다. 더 적극적으로 그들은 죄 사함을 받은 자들답게 정결하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된 자들답게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답게 의롭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미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셨고, 의로운 자들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변화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그들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만일 그들이 불의한 행위를 계속 고집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성도 간 소송과 로마서 13:1-7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고린도전서 6:1-11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돈이나 재산에 관련된 문제로 법정 다툼을 벌인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가장 큰 이유는 교인들 사이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1, 6). 성도들이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물질 문제로 다툼을 벌이는 것은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전체에게도 부끄러운 일이다(5). 또한 그것은 그들 모두의 도덕적이며 영적인 패배이다(7). 두 번째 이유는, 믿음의 형제들이 돈이나 재산 문제로 다툼을 벌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라는 정체성에 위배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11). 세 번째 이유는,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 소송하는 것이 교회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손상을 입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이유는, 법정 소송을 시작한 사람과 고린도 교회가 성도의 영예로운 특권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성도는 그리스도가 행하실 종말의 심판에 참여하여 세상과 천사들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2-3). 소송을 제기한 교인은 자신의 문제를 종말의 심판에 참여할 교회가 얼마든지 판단하고 해결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고린도 교회 또한 두 교인의 문제를 방관하고 묵인함으로써 그들의 잘못에 동참하였다. 다섯 번째 이유는, 소송을 시작한 교인이 재정적인 손해를 감수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7). 그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6:1-11의 교훈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를 세상 법정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단호한 입장은 모든 종류의 성도 간 소송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는 믿음의 형제들이 돈이나 재산 문제로 다툼을 벌이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그런 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다툼을 벌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6:1-11의 교훈이 교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예외 없이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민사 문제와 관련하여 세상 법정을 언급할 뿐, 반역죄, 횡령, 문서 위조, 폭력, 간음과 같은 형사 문제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만일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문제가 일어났다면 그는 다른 방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6:1-11을 성도 사이의 소송 문제 자체를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본문처럼 읽고, 오직 이 본문에 근거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경솔한 일이다. 그렇게 하기 전에 사도가 다른 성경 본문에서 제시하는 교훈들도 살펴보고 신중하게 결론을 내려야 한다.

고린도전서 6:1-11은 세상 권세들과 신자들의 관계를 논의하는 로마서 13:1-7과 함께 읽어야 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이 조세 납부 문제와 관련해서 세상 권세들을 언급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성도 간 소송 문제에 끌어들이는 것에 반대한다. 물론 이런 반대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서 모든 성도가 받아들여야 하는 보편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그 교훈은 하나님으로부터 악을 행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세상 통치자들과 관원들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의 원리적인 교훈은 소송 문제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고, 적용해야 한다.

로마서 13:1에서 바울은 세상의 통치자들과 관원들을 매우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과 관원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역시 하나님이 왕들을 세우시고 폐하신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2:21, 37-38; 4:17; 5:18-20; 참조. 21:1; 27:5-7). 하나님이 통치자들과 관원들을 세우시는 목적은 그들을 통해 사회 전체의 질서 유지와 안전과 평화를 도모하기 위함이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세상의 통치자들과 관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θεοδικονς)라고 부른다(4).

통치자들과 관원들의 긍정적인 기능은 선행을 하는 자들을 칭찬하는 것이며, 부정적인 기능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따라 벌하는 것이다. 설령 통치자들과 관원들이 믿지 않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봉사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정의와 심판을 시행한다.정의(justice)는 무죄한 자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포용하며 보호하고 신원하고 자유하게 하는 것이며, 심판(judgment)은 불경한 자들의 대담함을 막고 그들의 횡포를 억제하며 그들의 비행을 벌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통치자들과 관원들이 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4). “이란 법을 위반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정부의 공권력을 가리킨다. 통치자들과 정부 관리들이 하나님의 디아코노스로서 정당하게 공권력을 행사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진노를 집행하신다. 베드로 또한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고 권고한다(벧전 2:13-14). 물론 통치자들과 관원들이 공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할 수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다. 지난 역사는 그런 경우가 매우 많았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아무리 악한 정부라 할지라도 살인, 강도, 강간, 도둑질, 사기, 기타 여러 가지 형태의 악행과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을 처벌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로마서 13:1-7에서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이 세상 통치자들과 관원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교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심각한 악행에 대한 처벌을 세상 관원들에게 맡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예컨대, 살인, 강도, 상해, 강간 등을 포함한 형사상의 문제들의 조사와 처벌은 사법기관의 고유한 권한에 속한 것이다. 그런 악행이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경우에 사법기관에 맡기지 않고, 교회가 스스로 조사하고 처벌을 시행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런데도 만일 고린도전서 6:1-11에 근거하여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를 세상 재판관들에게 맡기는 것이 절대로 불가하며, 따라서 교인들 사이의 문제는 어떤 것이든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세상 통치자들과 관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가르치는 로마서 13:1-7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특정 본문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분리하여 읽으면 이런 오류를 피할 수 없다. 어떤 본문의 교훈이든 반드시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 조화롭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확립한 신앙의 유비라는 해석 원리이다.

이 해석 원리를 주창한 칼빈은 소송을 제기하거나 법에 호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로마서 13:4을 들어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반대로 통치자가 우리에게 선을 베푸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임을 증거하고 있다(13:4). 이로써 우리는 통치자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세움을 받았고 그의 손에 보호하심을 받는 자로서 악인들의 비행과 부정한 행위들을 막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고요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자들임을 알게 된다(딤전 2:2). 우리가 그런 혜택을 누릴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면 주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통치자들을 세우신 목적이 헛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통치자에게 요청하고 호소한다 할지라도 결코 경건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더 나아가 칼빈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이 법적 소송을 완전히 정죄했다고 하는 주장이 그릇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바울은 단지 모든 논쟁이 아니라 법정에 호소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그 광적인 욕망(mad lust)을 질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법정 소송으로 인해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불신자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지경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잘 안다. 또한 바울이 고린도전서 6:5-8에서 법정 소송을 비판한 사실도 인정한다. 하지만 사도가 그렇게 한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이 복수심, 적의, 외고집 등의 마음 자세로 소송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소송한 것 자체를 사도 바울이 정죄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조롱을 당하게 된 것 역시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소송한 것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 무절제하게 분쟁을 일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손해가 너무 커서 감수할 수 없을 경우에 형제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다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법정에 호소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바울의 이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악을 악으로 갚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처지를 공적인 보호자인 재판관에게 순전히 맡긴다면 민사 문제로도 성도가 성도와 소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법에 호소한다 하더라도 형제를 미워하거나 그에게 해를 입히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형제를 상대로 법에 호소하는 것이 허락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그에게 해를 주려고 하는 미친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그를 끝없이 괴롭히는 따위의 일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칼빈이 이런 입장을 취한 이유는 로마서 13:1-7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그는 이 본문에 근거하여 세상 통치자들과 관원들이 사람들의 안전을 보호해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비로 내리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라고 하며, 그들이 형벌을 시행할 때에 자기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그 자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통치자의 보응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한다고 권고한다.

성도 간 소송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고린도전서 6:1-11을 로마서 13:1-7에 종속시켜 읽은 결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주석의 대가답게 그는 두 본문을 본래의 상황과 문맥 안에서 읽고 신중하게 해석하였다.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고린도전서 6:1-11에서 바울이 성도간의 송사 문제 자체를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다루기보다 고린도 교회의 특정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고려하였다. 또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법률가답게 세상 통치자들과 관원들이 악을 행하는 자들을 처벌할 권한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다고 가르치는 로마서 13:1-7이 신자의 소송 문제와 연관성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칼빈은 자칫 서로 충돌을 일으키거나 또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두 본문을 신중하고 조화롭게 읽는 건전한 성경 해석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칼빈의 모범을 따라 고린도전서 6:1-11에서 사도 바울이 세상 재판관들을 불의한 자들”(1),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4), “믿지 아니하는 자들”(6)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로마서 13:1-5에서 세상 통치자들과 관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4)라고 부르는 것을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믿지 않는 세상 법정의 재판관들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불의한 자들임에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선을 행하는 자들을 칭찬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벌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사역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우리의 선을 위하여 자신의 정의와 심판을 시행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를 세상의 재판관들에게 맡기는 것 자체가 절대적인 악이거나 불의일 수 없다.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일지라도 그것이 심각한 악행일 경우에는 세상의 관원인 경찰이나 검찰이나 법관들에게 맡기는 것이 마땅하다.

 

결론

고린도전서 6:1-11의 핵심 교훈은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지 말고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는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고, 손해를 감수할 수 있을 만한 비교적 사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송을 시작한 교인은 그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의 감정, 그리고 돈이나 재물을 돌려받으려는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 법정으로 문제를 가지고 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성도의 본분과 특권, 하나님의 교회의 위상과 하나 됨, 복음 증거의 중요성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포기해야 할 재산에 대한 권리는 고수한 반면, 악을 선으로 이기고 부당한 손해를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말았다. 고린도 교회는 그의 행동을 묵인하고 그의 잘못에 동참하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소송 문제를 강하게 질책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리고 로마서 13:1-7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바울이 성도 간 법정 소송 자체를 철저하게 금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급하거나 잘못된 것이다. 또한 교회 안에서 아동 학대나 간음이나 살인 등이 일어났을 때 이것을 은폐하거나 교회 안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를 정당화하는 데 고린도전서 6:1-11을 사용하는 것도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에 대한 사도의 진술과 책망을 그가 의도한 것보다 더 강한 것으로 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법정 소송을 죄악된 것이거나 불의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두 당사자와 회중 전체의 패배라고 말할 뿐이다. 또한 그는 법정 소송을 제기한 사람에 대해 권징을 시행하라고 촉구하지 않으며,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 명령하지도 않는다(참조. 고전 5:13). 적어도 이것은 그가 계모를 취한 교인만큼 심각한 죄를 지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사도가 고린도 교인 간 법정 소송을 교회가 부끄럽게 여겨야 할 심각한 잘못으로 책망하고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것과 같은 일상생활과 관련된 다툼은 반드시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돈이나 재산과 관련된 문제는 당사자들이 원만하게 해결해야 하고, 만일 교회 안에서 해결할 수 없다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편을 택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하심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한 죄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고, 그들을 의인으로 인정해주셨고, 그들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받아주셨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성도들이며, 그리스도의 심판에 참여하여 세상과 천사들을 판단할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이다. 만일 자신이 이런 영예로운 특권을 가진 존재임을 깨닫고 종말의 대망에 비추어 자신의 문제를 판단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 법정에 호소하기보다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부당한 손해를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악을 선으로 이기는 성경적인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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