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소송: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생각하며

 

들어가며

▲ 이남규 교수

그리스도인이 소송을 한다는 것은 세속정부 곧 국가권력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자리매김이 있어야만 소송에 대해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교회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둘은 가깝게 있어야 하는가? 가능한 멀리 있어야 하는가? 국가구성원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면 교회는 국가기관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영적권세가 통치해야 하므로 교회직원이 국가를 다스릴스도 있지 않을까? 반대로 국가가 교회를 핍박하는 관계일 때, 국가는 교회의 원수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칼빈은 이 대답을 듣기 위한 좋은 예이다. 그는 개신교를 핍박하는 국가 프랑스를 떠나, 제네바 시정부와 때로 갈등하며 추방당하기도 했지만 좋은 관계를 가졌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빈이 가졌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면서 소송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추적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칼빈과 세르베투스

세르베투스의 등장

세르베투스가 고소당하고 처형당하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가 가장 처음 재판받게 되는 비엔느의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는 신학과 법률과 의학을 공부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종교개혁가들과 접촉했으며 종교개혁가들이 그의 극단적인 주장을 교정하려고 시도했으나 허사였다. 1531삼위일체론의 오류(De Trinitatis Erroribus)1532삼위일체론에 대한 대화(Dialogorum de Trinitate libri Duo)를 출판해서 이미 이단자로서 주목받았다. 그는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신분을 속이고 1540년부터 비엔느에서 빌레뇌브(Villeneuve)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15531월 그는 기독교회복(Christianismi Restitutio)이란 이단서적을 출판했다. 이 책의 복사본이 제네바에 살고 있던 기욤 드 트리(Guillaume de Trie)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귀족출신이었는데, 회심 후 칼빈과 가까이 지내며 제네바에 머물고 있었다. 프랑스에 머물던 그의 사촌이 제네바를 비난하며 로마 가톨릭으로 다시 돌아오는 마음으로 서신을 보내자, 그는 제네바의 우월성을 설명하면서 비엔느에 숨어 있는 세르베투스의 예를 들면서 가명 빌레뇌브도 알렸다. 그는 세르베투스의 경악스러운 주장들, 즉 삼위일체를 머리가 셋달린 지옥을 지키는 개로 비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이라 하며, 유아세례를 악마적인 고안으로 불렀다는 것을 언급했다.

드 트리에의 사촌이 이 편지를 신고하면서 종교재판소에 의해 처리되게 된다. 실질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한 종교재판장 마티유 오리(Mattieu Ory)는 도미니칸 탁발 수도사로 추기경 프랑수와 드 투르농(François de Tournon) 아래서 일했다. 오리는 프랑스의 종교재판소 최고 책임자로서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려고 했다. 3월에 첫 조사가 시작되고 세르베투스를 불러 조사했으나 어떤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게다가 세르베투스는 비엔느 대감독 파미에(Palmier)의 주치의였다. 결정적 증거 없었기 때문에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오리는 드 트리에의 사촌 아르네이에게 여러 번 강요해서 다른 증거들을 요청했다. 드 트리에는 어려움에 빠진 사촌을 돕기 위해 칼빈을 강하게 설득해서 세르베투스가 칼빈에게 보냈던 편지와 세르베투스의 육필이 담긴 기독교강요를 사촌에게 보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책 기독교 강요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세르베투스는 강요의 내용에 대한 반박과 결명이 포함된 메모를 여백에 써놓은 채로 칼빈에게 되돌려준 적이 있었다. 증거는 충분했다. 비엔느의 감독 파미에의 주도로 세르베투스와 인쇄업자들이 체포되었다. 대감독 파미에는 종교재판장 오리를 불러 심문하도록 했다. 세르베투스는 거짓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자신의 거짓이 거의 다 드러났을 때 탈출을 결심했다. 그리고 탈출에 성공했다. 세르베투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오리는 10주가량 더 조사했다. 그가 없이도 재판은 계속되어 오리는 세르베투스의 실체와 활동들을 밝혀냈고, 617일 비엔느 시법정은 화형을 내리도록 했다. 그는 비록 없을지라도 그를 본 뜬 인형과 그의 책들이 불에 탔다.

프랑스는 왕의 나라다. 당시 왕권을 지키는 길은 로마 가톨릭을 보호하는 일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사제들이 이 일에 협조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화염실(Chambre Ardente)로 유명한 이단재판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이단을 고소해서 심판하는 일을 교회보다 정부가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대해 성직자들이 불만을 제기해서 교회법정이 먼저 조사하고 판결하고, 공적인 물의를 일으킨 경우 시법정이 판결하는 방식이 적용되고 있었다. 세르베투스에 대한 화형은 이런 절차에 따라 종교재판장 오리의 조사에 따른 시법정의 판결이었다. 교회법정의 조사는 그해 1223일까지 계속되었다. 이때는 제네바 시법정에 의해 세르베투스가 처형당한 두 달 뒤였다. 비엔느 시법정의 판결이었다고 해서 세르베투스가 다른 도시에서 처형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프랑스 전역만이 아니라 같은 이단교리와 신성모독에 의해서 신성로마제국의 어떤 도시에서도 동일하게 처형되어야 했다.

 

제네바 시정부의 판결

세르베투스의 인형이 비엔느에서 화형에 처해진 것은 그가 이미 죽은 것과 같다는 것이며 어느 도시건 붙잡힌다면 죽으리라는 의미였다. 카를 5세는 삼위일체교리를 부정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만들었다. 따라서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네덜란드 지역이던 독일 지역이던 스위스 지역이던 세르베투스는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데 도망친 세르베투스는 웬일인지 제네바로 들렀다. 게다가 칼빈이 사역하던 교회에 1553813일 주일 오후에 찾아왔다. 세르베투스가 들렀다는 사실을 누군가 칼빈에게 알렸다. 칼빈은 시민의 의무로서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세르베투스를 신고했다. 세르베투스는 체포되고 조사를 받았다.

세르베투스가 왔을 당시 제네바는 큰 갈등과 긴장 속에 있을 때였다. “이곳은 너무나 혼란스러워 노아의 방주가 물결에 요동치듯 교회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앞뒤로 흔들리고 있다칼빈의 권위와 말이 의심받고 있었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이 의심받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오후에 맑을 것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곧바로 그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볼프강 무스쿨루스에 의하면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온 이유는 시의회와 칼빈이 갈등하고 있던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제네바의 형편은 칼빈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서 또는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서 제네바에 왔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런 긴장 속에서 세르베투스 사건이 있었다.

세르베투스에 대한 재판의 규칙에 따라 고소자도 함께 감옥에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 고소가 진실한 고소임을 책임져야 했다. 칼빈의 비서인 니콜라스 드 라 폰테느(Nicolas de la Fontaine)가 건강이 좋지 않은 칼빈을 대신해서 고소하고 감옥에 있었다. 1553814일 니콜라스는 40개의 항목으로 세르베투스의 고소의 이유들을 댔다. 그 이유들과 함께 자신이 형사소송을 위해 붙잡혀 있겠다고 했다. 고소의 이유는 세르베투스의 이단교리의 주장과 책의 출판에 대한 내용들이었다. 816일 시의회는 칼빈의 반대파인 베르틀리에에게 세르베투스의 변호를 맡겼다. 칼빈과 베르틀리에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칼빈과 베르틀리에 사이에는 다른 문제, 교회권징문제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91일 베르틀리에는 시의회에 자신의 수찬금지를 해제해달라고 청원했고, 칼빈의 반대파가 다수를 차지했던 시의회는 칼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벌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칼빈의 반대파는 세르베투스를 이용해서 칼빈에게 어려움을 처하게 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오래 걸리지 않을 재판이 길어진 점, 세르베투스의 이해할 수 없는 자만 등은 칼빈의 반대파 때문이었다.

중간에 시의회는 프랑스로 돌아갈 것인지 제네바에서 재판받을 것인지를 물었고,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있기를 원했다. 칼빈과 세르베투스의 논쟁이 있었지만 세르베투스의 심각한 이단교리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9월 시의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다른 도시들에 자문을 구했다. 스위스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주위 도시들에게 자문을 구함으로서 판단의 객관성을 띠려고 했었다. 베른교회는 세르베투스가 옛 이단들의 독들을 다시 일으켰다고 정죄했다. 취리히, 바젤, 샤프하우젠도 마찬가지로 지독한 이단성에 대해 동의했으며 세르베투스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처형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1026일 의회는 화형을 결정했고 다음날 세르베투스에 대한 판단 문이 낭독되고 화형이 집행되었다.

 

세르베투스의 오류에 대한 반박에 나타난 소송의 정당성.

세르베투스는 처형되었으나 이 일은 칼빈의 발목을 잡았다. 칼빈의 대적자들이 여러 곳에서 칼빈을 모함하는 말과 글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칼빈은 자신을 변호하는 글 세르베투스의 오류에 대한 반박을 썼다. 바로 여기서 칼빈은 그간의 여러 사정에 대한 오해들을 교정하고 세르베투스가 얼마나 심각한 이단이었는지를 밝힌다. 도시의 법에 따라 소송을 위해서 상대편이 되었기 때문에 기소자가 자기의 동의로 된 것은 인정하나, 그 일을 처리하고 처형한 것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행정관들이 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세르베투스는 살아 있을 때 행악자를 죽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위정자에게 적법한지에 대해 질문하면서, 사형보다는 교정이 있어야 하고, 큰 중죄가 아니면 사형보다는 출교와 같은 것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신앙 외의 범죄에 대해서는 시민법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즉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문제가 신앙의 문제이므로 제네바 의회가 자신을 심판해서는 안되며,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교정의 기회를 주어야 하고, 중죄가 아니기 때문에 추방시켜야 한다는 것이 깔려 있다. 여기에 대해 칼빈은 먼저 주님께서 교정을 원하셨다는 것이 형벌없이 놔두시기를 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밝힌 후 국가가 이단 문제 즉 신앙의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답한다.

국가가 이단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국가권력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정당한 수단이며 은사인가? 여기에 대해서 칼빈은 우리가 부르는 소위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이라 부를 수 있는 구분을 적용해서 위정자의 권세를 인정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일반은총을 버리지 않는다. 어부도 부르셨지만 율법을 배웠던 사도 바울도 부르셨다. 칼빈이 볼 때 지식이 신앙을 말살시킬까 두려워서 지식있는 자들을 설교단에서 내보내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를 모욕하는 것이다. 복음설교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힘을 갖지만, 설교는 인문학을 몸종처럼 사용한다. 이제 칼빈은 이것을 국가권력에 적용해서 하나님이 왕들과 군주들에게 그들의 권력을 사용하여 참된 종교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복음을 수호하라고 명하셨다고 한다.

둘째, 국가권력이 이단을 처리할 수 있는지이다. 칼빈은 이 문제마저도 시민법정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관계하는 불의보다 하나님에게 행한 불의를 중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이런 차이가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들과 위정자들이 검의 권세로 참 종교를 유지하는 것을 찬성한다. 여기에 대한 큰 반대는 실제로 종교개혁의 신앙 때문에 프랑스에서 핍박당하는 신자들의 예가 있다. 칼빈도 바로 종교의 문제로 포악한 그들과 똑같은 일을 행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칼빈에게는 박해자들이 검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진실한 위정자들이 교회를 보전하기 위해 정의의 방망이를 사용하는 것을 막지 않으며 또한 순교자들이 당한 고난은 선한 군주들이 행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보호를 막지 않는다고 답한다. 폭군들이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릴 때가 있어도, 그런 경우가 본래 있는 검의 권세를 무효화하지 않는다고 칼빈은 말한다. 칼빈이 이단의 처벌을 말할 때, 모든 이단적 가르침에 대한 죽음의 형벌을 말한 것은 아니다. 영혼들을 파멸로 이끌면서 하나님을 향해 치명적인 신성모독을 토해내고 치명적인 독과 같은 저주스런 생각을 심을 때로 제한한다.

이단의 처리 문제에 대한 칼빈의 자세에 대해 많은 토론이 있어왔으나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먼저 삼위일체에 대한 저주하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한 사람에게 관용을 베푼 도시는 적과 아군에게 모두 버림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며, 둘째 세르베투스를 처벌한 제네바 시정부는 칼빈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던 정부였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당시 시민이 가져야 하는 의무로서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시정부에 세르베투스를 고발 한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가 하나님의 선한 도구이며, 그 통치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 이남규 교수 - 한양대학교 (BA)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eq) -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Th.M.) - 네덜란드 Theological University Apeldoorn(Dr. theol.)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국가와 소송

국가관

우리는 칼빈의 국가관과 나아가 그리스도인이 위정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 즉 소송에 대해 칼빈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독교강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칼빈의 두 왕국 개념이 보인다. 그런데 영적 왕국(regnum sprituale)과 국가적 왕국(regnum politicum)으로 부를 수 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선호했던 표현은 왕국(regnum)보다는 통치(regimen)였다.인간 안에 이중통치가 있다. 하나는 영적 통치인데 이것으로 양심이 경건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위해 세워지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통치인데 이것으로 사람 사이에 지켜져야 하는 인간으로서 해야하는 의무와 시민으로서 해야하는 의무들을 교육받는다.” 그리스도인이 어느 나라의 법 아래에 살던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서 차이가 없다는 면에서 시민생활의 상태와 영적생활의 상태는 구별되며 동시에 공존한다. 그래서 이중적 통치는 구별되지만 반대되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성도의 나그네 생활에 국가적 통치는 필요하며 이것을 뺏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뺏는 것이다. 국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개적인 종교의 모습이 나타나도록 하며 인간들에게 인간성이 있도록 한다(... ut inter Chrisianos publica religionis facies existat, inter homines constet humanitas.).

칼빈은 이 국가에 통치자와 통치의 기초인 법과 국민이 있다. 이 중 국가의 통치자와 법에 대한 이해로부터 소송에 대한 판단이 따라오게 된다. 칼빈은 통치자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한다. 세워진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그들의 임무는 하나님의 보호와 선과 공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만일 큰 소명을 소홀히 하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며 세워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통치자들을 부인하거나 배척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법에 대해서 말하자면 각 족속마다 각기 다른 법을 만들 수 있으나 그 목적은 사랑이라는 영원한 규범을 드러내어야 한다.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법은 공정(aequitas)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해야 한다. 칼빈은 이렇게 통치자와 통치의 기초인 법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정하므로 소송을 받아들인다.

소송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칼빈 당대에 그리스도인의 소송이 불가하다는 주장이 있었다. 칼빈이 소개하는 당대의 소송불가주장의 근거를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에게 관원은 무용하다는 주장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세상 관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관원이 하나님이 사자(13:4)며 통치자의 도움 아래서 악인들의 악행과 불의로부터 보호받으며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다(딤전 2:2)고 하면서 통치자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 경건과 부딪히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관원의 도움은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이다”(sanctum esse Dei donum auxilium magistratus). 둘째, 그리스도인에게 복수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소송하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칼빈 자신도 소송에 복수심이 없어야 할 것을 수차례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재판에 맡기는 것이 하나님의 복수에 맡기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법관이 하는 복수는 하나님이 하는 복수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사랑하므로 소송보다는 손해를 감수하여 참는 것이 어울린다는 주장이다. 칼빈은 손해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자세라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런 마음을 속에서 가지면서, 법관의 도움을 받아 재산을 보호할 수 있으며 사회의 유익을 위하여 범죄자를 고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바울의 예를 가져와서 관원의 도움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밝힌다. 바울은 총독앞에서 자신을 향한 중상과 간계와 악의를 폭로했다(24:12). 법정에서 자기가 로마 시민인 특권을 주장했다(16:37; 22:25). 나아가 바울은 불의한 재판장 베스도를 피하고 가이사에게 상소했다(25:10-11). 이렇게 바울이 관원을 의지했으므로 그리스도인도 바울의 예를 따라 관원의 도움에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살필 때에 칼빈이 소송에 대해 열려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칼빈이 무분별한 소송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칼빈이 권하는 소송의 자세를 좇아가다보면 바른 방법과 자세로 소송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게 된다. 소송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자의 자세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상대방을 파멸로 몰아가려는 목적을 가지면서, 동시에 법적 절차를 통해 자신의 악의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칼빈은 복수, 증오, 싸움을 멀리하는 것을 소송의 바른 자세로 소개한다. 가장 공정한 주장도 복수하고 싸우려는 마음으로 하게 되면 불경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버린채로 소송하는 것이 칼빈이 권하는 자세다. 그래서 피고도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원고도 신체와 재산에 있어서 정당한 법관의 보호를 요청하되, 둘 다 평온한 상태에서 해야한다. 분쟁중인 사건이지만, 마치 평화롭게 해결된 것처럼 사랑과 성의로 상대를 대할 수 있을 때 소송할 수 있다.

고전 6장의 예를 통해서 그리스도인 신자들 사이에서의 소송에 대해서 말한다. 칼빈은 바울의 책망의 이유를 두 가지로 본다. 첫째 과격한 법정싸움으로 복음이 불신자에게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교인들 사이에 있는 싸움은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송사보다 사랑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법정에 나아가는 것보다 자기의 권리를 멀리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 더 건전하다. 화나는 것 없이 또 형제를 미워함으로 끓어오지 않으면서 법정에서 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 칼빈에게 두 가지 조건이 만날 때 교우들 사이의 소송이 가능한데, 손해가 너무 크다는 조건과 소송을 하면서 사랑을 잃지 않을 수 있을 때다. 칼빈은 사랑없이 하는 것과 동시에 사랑을 벗어나서 하는 일은 불경건한 것이라는 말로 소송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짓는다.

 

콘시스토리움

제네바 교회의 작은 분쟁들의 해결에 콘시스토리움(Consistorium)이라고 불리는 치리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콘시스토리움은 처벌보다는 분쟁이 되는 사안을 판단하고 훈계하는 자문 조직이었다.” 따라서 교회치리회를 소송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칼빈의 보고에 따르면, 옛날 경건한 사람들은 분쟁이 생기면 소송을 피하기 위해서 판단을 주교에게 맡겼다고 한다. 고대 감독들은 이런 분쟁문제를 다루는 것을 귀찮아했지만 관계된 이들이 법정에서 싸우지 않도록 성실하게 판단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교들의 성실을 믿고 보호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건한 군주들은 재판권을 주교에 넘겨주었고 타락한 주교들이 사욕을 위해 악용하면서 교회권징은 타락하게 되었다고 칼빈은 보고한다.

제네바에서 콘시스토리움이 하는 일이 갈등이 된 이유는 시의회의 일을 교회가 빼앗아간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국가의 일과 교회의 일은 구분되어야 했다. 국가에는 칼이 있고 교회에는 칼이 없다. 교회는 국가처럼 투옥과 같은 형벌을 사용할 수 없다. 나아가 국가는 죄인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형벌을 가할 수 있지만, 교회는 죄인이 자신을 스스로 징계하여 회개를 표명하게 한다. 칼빈은 과음과 음행을 예로 들어서 국가는 여기에 어떤 외형적 벌을 주는데 그친다. 교회는 그 일에 대해 회개를 요구한다. 당시는 기독국가의 형태였기 때문에 칼빈에게 두 기관의 일이 분리되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관리가 형벌과 제어의 힘으로 교회가 악행들로부터 깨끗하게 하듯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는 관리들을 도와 많은 이들이 죄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두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돕지 방해하지 않는다.”

국가와 교회의 일은 서로 돕는 관계이지만 구분되었고, 칼빈은 나아가 교회가 해야 하는 고유한 일을 국가가 간섭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칼빈이 권징과 관련해서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는, 첫째 이 영적 권세(spritualis potestas)가 칼의 권한에서(a iure gladii) 분리되는 것이고(18:18), 둘째 한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합법적 회의를 통해서 실행되어야 한다(고전 6:2)는 것이다. 그런데 칼의 권한에서 독립적으로 교회가 행사할 수 있느냐의 문제 때문에 제네바에는 오랜 갈등이 있었다. 1538년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던 이유도 성례를 국가가 통제하느냐 교회가 통제하느냐의 문제였다. 15371월 의회는 목사들로부터 제네바 교회와 예배에 대한 조항들을 받아들여 채택했다. 여기에 성만찬이 자주 행해질 것과 성만찬을 합당하기 위해 출교의 권징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교회법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153711월 시의 방침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제네바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 법을 따르지 않고 이 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자 제네바 시의회는 결정을 번복해서 15381월 오히려 목사들이 시의회보고 없이 성찬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고 결정했다. 칼빈은 성찬집례를 거부했고 4월 추방당했다.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목사로 일하다가 15419월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고 오고 개혁교회의 본이 되는 제네바교회법이 채택되도록 했다. 칼빈과 제네바 목사들은 출교권에 있어서 콘시스토리움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런데 콘시스토리움의 출교권이 시의회로부터 완전한 독립이 인정된 것은 1555124일이었다. 그 때까지 수많은 충돌과 분쟁이 있었다.

이 출동이 극심해졌을 때 세르베투스가 온 것이다. 816일 세르베투스의 변호인으로 베르틀리에게 선임되었는데, 이 사람은 칼빈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과음과 주사로 수찬금지를 당한 인물이었다. 칼빈이 베르틀리에와 세르베투스와 논쟁 중일 때, 베르틀리에는 수찬금지를 해벌해달라고 시의회에 요청했다. 칼빈이 수찬금지해벌은 교회에 속한 권리라고 설득했지만, 91일 시의회는 수찬금지를 해제했다. 다음날 칼빈은 다시 수찬금지해벌을 철회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93일은 주일이었다. 칼빈은 베르틀리에가 성찬상으로 나아오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리고 오후 제네바를 떠날 수도 있음을 예상하고 행 20장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설교한 본문으로 고별사를 하듯이 설교했다. 113일 베르틀리에는 수찬금지해벌을 다시 시의회에 요구했다. 의회는 치리권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선포했다. 117일 콘시스토리움은 시의회에 사전 통보없이 수찬금지를 선언하는 것을 금했다. 칼빈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다른 도시들에 자문을 구했어도 일치된 답변이 없었다. 1555160인회와 200인 회 앞에서 파문과 재입교의 권한이 교회에 있다는 것이 성경적임을 칼빈이 설득했고 받아들여졌다. 의회에 칼빈 지지파가 늘어났다. 5월 반대파들은 반란을 꽤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칼빈은 승리했다. 제네바 교회의 독립적인 치리는 이처럼 수많은 충돌 속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제네바 콘시스토리움은 장로들과 목사들로 이루어졌다. 6명이 200인회의에서, 4명이 60인회의에서, 2명이 소의회에서 선출되었다. 장로들이 정치적으로 선출되었을 뿐 아니라 콘시스토리움 자체가 제네바 시정부의 상설위원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독립적인 교회의 치리권을 주장했다. 제네바의 거주자 중 6퍼센트 가량이 매년 콘시스토리움의 소환을 받았다. 예배결석, 예배무시, 술주정, 도박, 욕설, 가족유기, 아내구타, 간음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154831일 모자 제조인인 마켓과 그의 부인이 소환을 받았다. 마켓이 그의 아내를 폭행했기 때문이다. 마켓은 자기 아내가 포카스 부인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아서 아내를 폭행했다고 했다. 아내는 남편의 요구를 들은 적이 없고 남편이 심하게 때려서 병까지 낫다고 말했다. 칼빈은 마켓에게 그리스도인이 아내를 그렇게 대하면 안된다고 권면하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포카스 부인 집에 가는 것을 정말 원하지 않으면 가지 말라고 권했다. 가장 잦은 소환사례는 결혼문제였다. 로마교회 시절 결혼재판관리가 하던 일을 넘겨받은 것이다. 신앙교육에 대한 문제, “나아가 콘시스토리움은 또 가족간의 불란, 이웃과의 분쟁, 그리고 사업 거래의 다툼 등도 해결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런 점에서 콘시스토리움은 일종의 필수적인 상담단체가 되었다.”

 

교회독립을 위한 싸움: 칼빈주의자들과 에라스투스

칼빈의 영향

칼빈이 주장한 교회권징의 독립성이 당시에 얼마나 파격적인 주장이었는지 하이델베르크에서 있었던 논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자들은 교회권징의 독립성을 끝까지 주장했다. 그 예를 에라스투스가 활동한 하이델베르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개혁주의로 노선을 정한 후 새로운 요리문답서와 교회법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15632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가 나왔고, 같은해 11월 팔츠교회법이 나왔다. 요리문답서를 위해선 우르시누스(Ursinus)가 교회법을 위해선 올레비아누스(Olevianus)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회법 작성에 있어서 올레비아누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칼빈이었다. 올레비아누스와 칼빈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종종 편지를 교환하곤 했다. 둘은 교회법에 대해서 1560년부터 1563년에 집중해서 논의했다. 올레비아누스는 15604월에 칼빈에게 제네바의 치리회 법을 안전하게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그것을 팔츠 교회의회의 몇 사람과 함께 살펴볼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15609월에 다시 한 번 부탁한다. 올레비아누스는 선제후와 교회의회가 교회권징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고 강하게 밝히면서, 칼빈에게 간곡하게 제네바 교회법과 형식들을 청하였다. 칼빈의 답은 그 해 11월에 왔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사들이 어떻게 세워지는지 가장 먼저 설명했다. 성만찬에 대해서는 신앙고백없이는 나올 수 없고, 일년에 네 번 심사한다고 하였다. 그 외 교회생활와 권징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올레비아누스는 1562924일 칼빈에게 교회권징의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보여주면서, 그것에 대한 하이델베르크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선제후는 마음으로 교회권징을 원하고 있고, 그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칼빈은 1027일 권징을 위한 조직에 대하여, 선제후가 자기 위원회에서 임명하는 두 명, 대학이 두 명, 시에서 네 명, 그리고 목사들이 함께하는 위원회의 구상을 조심스럽게 권했다. 이렇게 해서 다양한 부분들이 하나를 이룬다고 하였다.

 

교회권징에 대한 관점들

156311월 발표된 팔츠의 교회법에서 교회권징은 성만찬에 대한 부분 마지막에 언급된다. 여기서 교회권징은 국가의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로 표현된다. 교회권징의 주체에 대하여, 한명이나 몇 명의 교회사역자나 다른 사람들의 권력안에(in eines oder etlichen kirchendiener oder anderer personen macht)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 기독공동체(bey einer gantzen christlichen gemein)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사역자들도 교회의 가장 작은 지체로서 그 아래에 있는 것으로 진술하면서, 각 장소에서 형편과 필요에 따라 교회에서 선택된 자비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몇 사람이 교회사역자와 함께 전체 공동체의 이름으로(in namen der ganzten gemein) 권징을 행한다.

우리는 우르시누스의 <신학요목문답>에서 교회권징에 대해 확실하게 정리된 것을 만날 수 있다. 320문에서 성만찬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은 교회권징으로 교정되어야 할 것을 말한다. 계속해서 321문에서 교회권징의 형식을 묻고 장로들을 세워 실행할 것을 말한다. 개인적인 권면 후에 장로들이 지적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생활의 교정을 약속하고 보여줄 때까지 성만찬에서 제외한다. 여기서 우르시누스는 칼빈과 제네바의 방식을 따라 교회와 국가의 영역을 분리했다.

322. 교회권징이 정치적 관원의 책임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첫째, 우선적인 차이는 관원은 악한 자들에게 물리력으로 벌을 주고 교정하고, 교회는 다만 말로서 권고하고 교제로부터 제외시킨다. 둘째, 관원은 형벌을 통한 공의의 실행에 만족하고, 교회는 권고 받은 자들의 교정과 구원을 추구한다. 셋째, 관원은 형벌을 주기위해 나아가지만, 교회는 시기적절한 교정에 의해서 관원들의 형벌을 피하게 하도록 형제로서 권고한다. 넷째, 관원은 교회를 해치고 교회에 의해 책망 받아야하는 많은 잘못에 대하여는 벌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같은 방향이 나타난다. 고백과 생활에서 불신과 불경건을 나타내는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더럽히는 자들이므로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명령에 따라서 교회가 열쇠의 직무(Amt der Schlüssel)를 통해 그런 자들이 생활을 돌이킬 것을 말한다(HC 82). 이 열쇠는 교회권징(HC 83)인데, 교회권징을 통해 고백과 생활에서 권고하고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그 사실을 교회 또는 교회에 의해 세워진 자들에게(der Kirche oder denen, so von der Kirche dazu verordnet sind) 알리고, 이것도 듣지 않으면 성례에 참여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HC 8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교회에 의해 세워진 자들의 결정을, 교회의 결정과 동일화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결정과 동일화한다.

그러나 1564년의 팔츠 교회의회법(Kirchenratsordnung)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교회법과 모순된다. 이 교회의회법은 교회권징이 세속의 권력과 구분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실천에 있어서는 세속권력과 교회권력이 함께 협력하도록 되어 있다. 자기 직무를 소홀히 하는 관원이 있다면 목사가 경고하고, 이 경고는 상급관청에 알린다.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생활이 악한 교회회원의 경우에 목사에게 경고를 받으며 관원에 의해 경찰법(Polizeiordnung)에 따라 형벌을 받는다. 아무런 소용이 없을 시에는 선제후의 결정에 따른다. 선제후가 출교를 결정하면 그것은 설교단에서 선언된다. 이렇게 해서 이 법은 실제적인 실행에 있어서 경찰업무가 우위에 있는 방식이었다. 결국 1564년의 교회의회법에 권징을 포함한 치리에 대한 규칙이 포함되었어도 올레비아누스는 만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교회만이 아니라 정부가 교회의 치리에 함께 참여하고 최종적으로는 정부가 그 일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제네바와 비교하자면 제네바에서는 교회가 실제로는 세속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지만 행정적으로는 독립적으로 치리를 하고 있었다.

에라스투스가 교회의회 의원 중 한명이라고 하나, 올레비아누스도 참여했고 작성에 앞장섰던 에헴(Ehem)과 출레거(Zuleger)가 올레비아누스 편에 있었는데도 교회의회법(1564)이 위 두 문서와 모순되는 방식으로 작성된 것에 대해선 명백하게 이해될만한 설명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규정의 발전으로 보았거나 또는 교회규정에 대한 의견이 맞지 않는 상황 가운데 나온 타협안일 수 있다는 추측이 있다.

 

논쟁과 결과

어쨌거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팔츠의 교회법, 그리고 이것과 부딪히는 1564년의 교회의회법은 앞으로 하이델베르크에서 벌어질 교회권징 논쟁의 시작을 보여준다.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 그리고 다른 대학의 신학부 교수들 그리고 총리 에헴과 교회의회 회장(Kirchenratspräsident)인 출레거가 올레비아누스 편에 있었다. 에라스투스 편에는 상원의 대다수와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들과 고위관직들과 귀족들이 대부분이 있었다. 선제후의 마음은 올레비아누스와 신학부 교수들 편에 있었다. 선제후는 팔츠지역의 프랑켄탈(Frankenthal)에 있던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모습에 매우 감동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제네바의 교회의 영향을 받아 교회권징이 실행되고 있었고, 그런 모습은 가장 괜찮은 팔츠교회보다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경건자(der Fromme) 프리드리히 3세는 당연히 자기 지역 교회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길 원했을 것이다.

본격적인 교회권징논쟁의 물꼬를 튼 것은 1568610일에 있었던 공개토론이었다. 칼빈주의자 피에르 보킨이 좌장이었고 답변자는 국교회를 반대해서 영국을 떠나온 조지 위더스(George Withers)였다. 공개토론에서 발표된 위더스의 논제중 12번째와 13번째만이 알려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12.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한 선포와 성례의 합법적인 시행과 치리의 직무가 교회에서 유지되어야만 한다.

13. 그런데 이 직무를 나는 이렇게 말한다: 곧 목사들이 장로회와 함께 죄를 범한 누구라도 (왕들까지도) 고발하고 책망하고 출교하고 교회권징을 위해 관계된 다른 것들을 시행할 권한을 가질 뿐 아니라 실행한다.

늦게 도착한 에라스투스는 이 공개토론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 여겼고 위더스의 논제에 반대했다. 반대하는 내용이 길어서 좌장의 제안에 따라 하루나 이틀이 지난 후에 에라스투스의 반대와 그에 따른 신학부 교수들과 에라스투스의 공식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 후에 에라스투스는 103개의 논제로 자기의 생각을 밝혔고, 다시 이것을 75개의 논제로 정리했다. 이것이 나중에 에라스투스주의자들의 교과서가 된다.

에라스투스에게 당시 국가는 기독국가(res publica christiana)인데, 여기에 머리는 하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올레비아누스와 우르시누스의 주장을 따르면, 이 국가의 머리는 목사와 장로들이다. 에라스투스에게 이것은 교황이나 감독이 세속권력을 자기 아래 두었던 것과 같은 잘못된 모습이다. 따라서 에라스투스는 기독국가에서는 기독정부가 머리가 되어 눈에 보이는 교회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것이 합당했다. 이제 에라스투스에게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라는 말씀에서 교회에 말하라는 것은 그 무리를 다스리는 자들에게 말하라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다스리는 위원회의 역할을 하는 것은 산헤드린(외회)이었고, 따라서 교회에게 말하라는 것은 산헤드린(외회)에 말하라는 것이라고 에라스투스는 주장한다. 시민들이 뽑는 공직자들을 산헤드린과 연결시킨다. 그런데 교회가 산헤드린과 같은 그런 위원회를 택할 권한을 갖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말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은 시의회에 말하라는 것이 된다. 에라스투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할 기회를 뺏는다는 이유로 범죄자가 교회로부터 완전히 배제되는 것을 반대한다. 그래서 에라스투스에게 출교는 하나님의 법이기 보다는 인간들의 발명이다.

에라스투스를 향해 우르시누스는 출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되었다고 말한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8:17)는 말씀 외에 고전 5:5; 딤전 1:20을 증거로 삼고 있다. 우르시누스는 산헤드린이 국가에 속했다(politicum)는 에라스투스의 의견에 반대한다. 우르시누스는 성경의 문맥을 따라서,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여기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는 일은 국가에 속한 일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세리는 국가의 일원이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의 신학자들은 제네바의 방식이 옳다고 보았다.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짱키우스, 보킨, 다테누스 등이 이 논쟁에서 성만찬에 연결된 권징 그리고 장로회에 의한 권징에 찬성했다. 에라스투스와 불링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제후는 1570713일에 교회권징령을 반포하였다. 이제 선제후령 팔츠에서는 회중의 생활을 살필 수 있도록 크기와 수의 형편에 따라 인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얼마의 사람들을 교회의 크기에 따라 넷, 여섯, 여덟, 경우에 따라서는 적게 의회와 법원과 교회에서 뽑도록 했다. 장로를 통한 권징이 실현되었지만 올레비아누스가 원했던 방식, 곧 제네바에서처럼 교회가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방식은 아니었다. 출교에 대한 마지막 결정권을 선제후가 갖도록 했기 때문이다. 에라스투스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다. 올레비아누스는 이 권징령에 만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에라스투스와의 논쟁은 계속되었다. 1576년 프리드리히 3세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루드비히가 루터주의를 실행하면서 하이델베르크 안에서의 논쟁은 끝날 수밖에 없었다. 올레비아누스가 하이델베르크에서 실현하려다 실패했던, 제네바를 본받은 교회정치의 모습은 그의 다음 사역지였던 헤르보른(Herborn)에서 나타난다. 올레비아누스의 역할과 헤르보른의 통치자인 요한 6세의 교회 독립의 열망에 의해서, 교회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회의체제의 장로교회정치가 1586년 독일에서 처음으로 시작된다.

 

나가며

세르베투스를 처리할 때, 칼빈은 국가를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소송, 곧 국가권력을 의존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동시에 우리는 칼빈이 교회권징의 독립성을 위해 싸우는 모습도 보았다. 제네바의 구성원은 대부분 기독교인이고 통치그룹도 기독교인들이었다. 따라서 장로회를 구성하는 인물들도 정치적 그룹들에서 선택되었다. 그런데도 칼빈은 권징을 장로회 고유의 일, 즉 교회 고유의 일로 고집했다. 그리고 많은 고통스러운 것들을 다 인내하고 마침내 얻어내었다. 칼빈주의자들도 하이델베르크에서 에라스투스와의 갈등을 통해서 교회권징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당대에 기독국가 사회에서 교회의 권징에 있어서의 독립성이 그럴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가가 질문되어 질 수 있다.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은 국가를 일반은총으로 인정했으나 또 그리스도인들이 이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으나, 국가 업무가 교회의 특별은총을 위한 고유한 영역(말씀, 성례, 권징)까지 넘어오는 것은 금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소송의 자리는 이 두 사실 사이에 있다.

소송문제가 칼빈시대보다 더 어려운 것은 우리가 사는 곳은 기독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가 일반은총이라고 해도, 특별은총을 모르며 따라서 일반은총의 참된 사용을 아직 모른다. 일반은총의 참된 사용은 특별은총 아래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의 말, “너희가 판단할 줄을 모르느냐는 바로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교회는 특별은총아래 있어서 일반은총을 참되게 사용할 줄 아는 유일한 자들인데, 특별은총을 모르는 자에게 나아가 판단을 맡긴다는 것이니, 특별은총을 모욕하는 것이며, 특별은총의 주인이시며 기원이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치리회의 회복이 소송을 최소화활 것이다. 제네바의 콘시스토리움은 교회권징과 함께 분쟁의 해결을 시도하는 상담의 역할도 했다. 그러나 당회, 노회, 총회가 권위를 잃게 되면, 화해를 위한 권면이나 시도도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권위도 발휘하지 않을 것이고, 만일 한 당사자가 교회치리회를 통해 오히려 부당하고 손해본다고 생각할 때 결국, 소송으로 나아갈 것이다. 치리회가 모든 면에서 정당성을 확보해갈 때, 즉 누가보더라도 불편부당할 때, 그래서 치리회의 결정을 하나님의 권위로 인정할 때에, 국가에 덜 의존하게 될 것이다. 결국 치리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교회의 의가 더 높아져야 하는 큰 과제가 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따라서 소송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이 부정할 수 없다. 소송없이 이 사회는 건전하게 유지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당한 큰 손해를 보고 있는데도 아무 조치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은 악행을 그대로 두는 것으로서 건전한 사회되기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소송하는 당사자가 사적 복수심 없이 교회를 위해 또는 사회를 위한 순수한 의도로 하는지는 그 자신의 양심과 하나님의 판단에 맡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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