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없는 나라

이성구 목사

이 지구상에 왕이라는 존재가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씨족, 부족 사회를 거치면서 사회는 자연스럽게 왕정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주전 2천년경의 아브라함의 시대를 기술하는 창세기 14장에는 이미 가나안 지역의 작은 공동체 지도자를 왕으로 부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남달랐다. 이스라엘은 왕정이 확립된 이집트에서 상당히 큰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지만 출애굽이라는 위험천만한 역사를 시도하면서도 절대권한을 가진 왕을 세우려하지 않았다. 주변국 왕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한과 능력을 가졌던 이스라엘의 국부 모세였지만 그는 자신을 ‘선지자’(신18:15)로 인식하였고, 하나님도 그를 선지자로 불렀다(신18:18, 34:10).

모세는 당시에 보편적이던 왕정을 수립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 역시 절대 권력을 안겨다 주는 왕정에 관심이 없었다.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면서도 왕이 지배하는 정치체제를 만들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물론 이스라엘은 일찍부터 장래에 나타날 왕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창35:11; 신17:14), 시종일관 왕정에 대하여서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가나안에 정착하여 지파동맹체 형태를 띠고 있던 이스라엘은 사사(士師), 혹은 판관(判官)이라 불리는 독특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 다스리는 제도를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 제도 역시 알고 보면 왕정 방지용이었다. 어느 개인도 지파도 정치적 독점권을 갖지 못하였다. 사사는 전쟁 상황이 발생할 때에 유대,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 잇사갈, 스불론, 단 등 다양한 지파에서 은사를 따라 나타났고, 길르앗, 베들레헴, 바라돈, 마하네단 등 다양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300명의 용사로 미디안을 파한 사사 기드온의 때에 이르러 마침내 왕정을 시작할 수 있는 호기(好機)를 얻게 되었다. 백성들은 기드온의 능력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왕위에 오르도록 끈질기게 회유하는 백성들의 요구를 기드온은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어떤 이유로도 왕정은 하나님의 백성이 요구할 성격의 제도가 아니었다(삿8:22-23).

‘나도, 나의 아들들도 결코 왕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릴 것이다. 그가 우리의 왕이신 사실은 변경할 수 없다.’ 이것은 기드온의 신념이자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후일 기드온의 서자(庶子) 아비멜렉이 어머니의 출신 지역인 세겜 사람들의 지역감정을 자극하고, 정치자금을 이용, 폭력배를 동원하여 70명이나 되는 아버지의 아들들 전부를 청부살인하여 자신의 정적이 될 위험성이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등 사악한 일을 저지르며 스스로 왕이 되려 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만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神政)국가를 세워가야 했다. 하나님으로 충분함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요 정치철학이었고, 신앙이자 삶의 실제였다. 오늘 우리처럼 말과 행동이 다른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절대 권력을 구사하는 고대사회의 왕정제도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음에 틀림없다(삼상8:11-18).

왕정의 거부는 인간이 절대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제적(專制的)으로 흘러갈 정치제도는 용납되지 않았다. 현대국가들이 가진 반봉건적, 반독재적 사상이 이스라엘의 뿌리를 이루고 있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아도 이스라엘은 가히 혁명적인 정치체제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의 없는 이스라엘은 늘 국세 정세에 불안을 느끼기는 했지만, ‘사람 위에 사람 없는’ 평등의 삶을 누리게 하는 선진 정치질서를 구축하고 있었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

그런데 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인 사무엘의 시대를 거치면서 역사는 돌변하였다. 전에 없던 사사의 세습이 이루어지면서 급기야는 체제가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웃한 블레셋(팔레스타인)과 잦은 전쟁을 치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전쟁을 위한 상비군도 없고, 책임질 장수도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한 사무엘의 아들들이라고 해도 노골적으로 뇌물이나 챙기며 왜곡된 재판을 하는 능력이 검증된 적이 없고 부패한 세습 사사로서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었다(삿8:1-3). 다급해진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는 집단민원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신정(神政)을 포기하고 왕정을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체제 변화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정치체제를 바꾸는 것은 곧 바로 신학적 변절을 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 결코 예사로울 수 없었다. 왕정수립요청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무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왕정의 반신정성(反神政性)을 분명히 하였다(삼상8: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흔히 오늘의 정치지도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권위주의적 경직성’과는 상관이 없었다. 하나님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왕정도입 주장에도 유연성을 발휘하셨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것은 신명(神命)이자(삼상9:15-10:1), 민심(民心)일 뿐 아니라(삼상10:17-24), 그의 탁월한 전쟁능력에 근거를 둔 당위성까지 갖추었음을 확인한 다음(삼상11장), 그를 왕으로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이스라엘 역사를 새로 쓰세 된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처음부터 왕(멜렉)으로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지도자(나기드, 삼상9:16; 10:1)로 부름을 받았다. 절대 권력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위기의 때에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기대와는 달리 사무엘과의 충돌, 다윗과의 충돌을 겪으면서 몰락을 길을 걸어갔다. 사울은 사실 외치(外治)에 성공적이었다. 숙적 불레셋을 비롯한 모암 암몬 에돔 소바 아말렉 등 동서남북에서 위협하던 주변나라들을 적절히 제압하였다. 그런 사울이 제사를 위하여 ‘진멸법’을 어겼다는, 어찌 보면 매우 사소할 뿐 아니라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이유로 순식간에 왕위에서 끌어내려지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후일의 다윗과 솔로몬처럼 자신을 위한 단단한 권력체계를 만들거나 화려한 궁궐을 짓거나 수다한 처첩을 거느린 적도 없는 사울로서는 졸지에 당한 폐위 사건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사울은 어느 새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다는 선포를 듣게 된다(삼상15:26).

스스로를 작게 여길 때는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셨으나(삼상15:17), 기존세대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 차세대인 다윗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성급함과 교만의 싹을 보이게 되자 그는 여지없이 버림을 받고 말았다. 언필칭 국가 지도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와 힘으로 나라를 융성하게 할 책임은 수행하지 않고, 야당이나 다른 영역의 지도자들, 특히 언론이나 선거관리위원회와 같은,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권력에 대한 견제세력과 싸우는 데 힘을 소진하는 것은 사울처럼 버림받는 길로 가는 행위임을 보여준다.

 

왕이 무너지는 나라

사울을 이어 나타난 다윗 왕은 통일 왕국의 위업을 달성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군사 경제적으로 대국을 이룬,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불릴만하다. 그는 남달리 세 번에 걸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 하나님(삼상16:13), 남쪽 유다사람들(삼하2:4), 마지막에는 북쪽 지파들(삼하5:3)이 각각 그에게 기름을 붓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그 때까지 여부스 족속이 다스리고 있던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수도를 유다지역인 헤브론에서 중립지역인 예루살렘으로 옮겨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통합을 이루기도 하였다. 명실상부한 통일왕국의 왕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성공한 것이다. 다윗은 후일 밧세바 사건으로 엄청난 수치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을 구체적으로 확보하는 정치군사적 성과를 거두었고, 무엇보다 ‘영원한 왕의 위’를 약속받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삼하7장).

그러나 역사의 명암은 언제나 함께 하는 법.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시작되고,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면서 더욱 조직화된 정치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의 권력 집중화 작업은 이미 왕의 독점적 지위를 거부하는 체질을 가진 이스라엘 역사에 파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왕정의 폐해는 일찌감치 신명기를 통해 경고한 바 있었고, 사무엘이 다시 한 번 확인하였던 일이었다(신16:17; 삼상8:11-18).

솔로몬은 중앙정부의 조직을 강화하면서 전국을 12개 권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이 한 달씩 왕궁의 살림을 책임지도록 조직을 완전히 개편하였다. 솔로몬의 왕실강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지파중심 체제를 현저하게 약화시켰고, 지방재정의 악화를 가져와 지역민심을 피폐하게 만들고 소외세력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과중한 세금부담으로 인한 심각한 빈부격차와 강제노역으로 인한 불만은 마침내 공개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성전건축에 7년, 왕궁건축에 13년이나 세월과 물자를 투자한 솔로몬 왕국은 겉보기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으나 안으로는 곪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의 사람’(대상22:9)이라고 불렸지만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에서 이름을 딴 솔로몬답지 않게 그는 안팎으로 반(反)평화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정략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방여인들과의 결혼은 이방종교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어버렸다. 다윗 시대 이미 여러 차례 반란의 조짐을 보인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화려함에 대한 대가로 여로보암의 반란을 불러와 마침내 왕국의 분열이라는 치명적인 역사적 과오를 남기고 말았다.

독점적 지위와 권력을 가진 전제 왕정 제도는 비록 지혜문학의 발달과 문화 창달의 꽃을 피웠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갈 수 없는 것이었다. 독재정권이후 문민, 국민, 참여정부 등 이름은 화려하게 내세웠지만 국민보다는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실현하기에 바쁜 정치인들과 정치권이 분열과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이미 다윗-솔로몬 시대로부터 지켜보아 온 셈이다.

 

왕을 기다리는 나라

분열왕국시대를 지나면서, 결국 나라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포로시대를 맞기까지 하게 된 이스라엘. 그들에게 독립왕국, 다윗이라는 걸출한 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통일된 다윗왕국에 대한 이상(理想)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분열왕국시대에 나라의 장래에 매우 비판적이고 심지어 비관적이기까지 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도 때로 주저하지 않고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묘사되는 ‘평강의 왕’이 나타나 ‘공의와 정의’의 나라를 세울 것을 예언했다(사9:6-8).

그 왕은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나타나 구원을 베풀며 땅 끝까지 ‘공의’와 ‘화평’을 이룰 것으로 믿었다(슥9:9-10). 이방인들 앞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시137:3)는 수치까지 당하던 포로시대를 보내고 엉뚱하게도 고레스에 의해 귀환을 하게 되었어도 왕국재건의 꿈을 이룰 수 없던 이스라엘은 여전히 ‘다윗 왕’의 도래를 꿈꾸고 있었다. 이스라엘에 수백 년을 두고 기다리던 그 왕은 마침내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을 통하여 다시 오셨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 땅에 다시 오사 십자가 형틀에 달리신 그 ‘유대인의 왕’(눅23:38)은 ‘만왕의 왕’(딤전6:15; 계17:14)으로서 성령님을 보내사 교회를 세우셔서 이제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나라를 세우는 작업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 왕국에서 누려야할,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인 정의와 평화(시89:14, 97:2)가 이르렀다는 소식은 아직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금년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대부분의 국민은 경제대통령이 나타기를 갈망하고 있다. 갈 바를 잃어버린 다윗의 군사 경제 대국이나 솔로몬의 도덕성 없는 선진문화 강국이 아니라, 국가적인 부(富)의 창출을 통해 경제의 양극화를 실제적으로 해소하고 배척과 대결구도를 넘어 참된 ‘정의와 평화’가 중심가치가 되는 그런 나라를 세울 지도자의 도래에 목말라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꿈은 새 하늘과 새 땅의 통치를 열어갈 메시야가 나타날 그 때까지, 목마르게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단순한 소망의 주제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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