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7년 부흥에 관한 몇 가지 검토 --

3. 부흥에 대한 몇 가지 검토: 부흥은 어떻게 오는가?

3.1 민족 현실이 부흥의 배경이었는가?

  그간의 한국교회 부흥의 배경에 관한 논의에서 정치환경적 요인이 강조되어 왔다. 1907년 부흥은 일제하의 민족의 현실, 정치적 좌절과 불안, 주권상실에서 오는 반일감정의 표출 등을 강조하고 그것이 1907년 부흥의 동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18세기 이후의 부흥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교회 부흥은 교회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 점은 한국에서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1900년대는 점증하는 일본의 세력과 조선침략의 야욕이 구체화되어 갔고 민족적 절망감이 심화된 시기였다. 청일전쟁(1894-5), 을미사변(1895), 노일전쟁(1904-5), 을사늑약(1905), 그리고 한일합병(1910)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격변기는 조선인들의 가슴에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감리교 선교사 무즈(J. R. Moose)는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지역을 순회하면서 “의지할 곳 도무지 없소”(Wei-chi hal kot tomochi oupso, There is altogether no place to trust)라는 말이었다고 말하면서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의 아픔을 보면서 이 때야 말로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기”라고 복음의 수용성이 심화된 정황을 묘사한 바 있다.1) 윌리엄 베어드는 이런 현실에서 조선인들은 “수치감, 분노, 그리고 증오에 내몰려 그들은 무언가 영웅적인 일을 해 내고야 만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라고 해석했다.2)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신자의 책임의식이 고조되었고, 동시에 무언가 새로운 역사의 변혁에 대한 기대와 함께 암울한 현실로부터 탈출 욕구가 심화되었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절망적인 현실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문제에 책임을 느끼고 이것이 마치 믿는 자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때문이라는 책임의식이 표출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00년대 초의 정치 사회적 환경이 부흥을 가져오게 했다고 해석한다.


일견 유의한 해석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외국의 부흥의 기원과 비교해 볼 때 이런 정치적 상황 혹은 민족적 현실이 부흥의 배경이었다고 판단할 근거가 희박하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갈망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광의적 의미에서 부흥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개인적이고 집단적 회개인데, 민족의 현실이라는 정치적 상황이 집단적 회개를 유발할 수 있는 내적 연대감(in -group solidarity)의 근거가 될 여지가 희박하다는 점이다. 힘의 논리에 의한 일제에 강점 시도라는 민족현실은 민족적 적대감정을 고취할 수 있고, 그것이 다음 시기에 선명하게 나타나듯이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라는 독특한 민족주의를 형성하였고, 또 할 수는 있지만 그런 상황이 회개 혹은 회개운동이라고까지 말하는 종교적 각성으로 표출되었다고 볼 근거는 미약하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1903년 이후 한국교회 부흥에서 표출된 회개나 통회에서 조국의 현실이나 민족의 문제가 거론된 일이 없다는 점이다. 이 당시 부흥과 관련된 문서에 보고된 회개는 우상숭배, 살인, 간음, 도적질, 축첩, 노름, 상해, 거짓말, 서로원수 지내고 산일, 아내를 구타하거나 폄하한 일, 위선, 교만, 탐욕, 성수주일 미 이행 등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도덕, 윤리적인 항목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회개의 목록 속에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오는 문제의식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점이다. 회개란 근본적으로 종교적 각성이고, 그 성격상 하나님과 이웃과의 도덕적이거나 윤리적 행위와 관련된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적 상황이 종교적 각성을 재촉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18-19세기 영국이나 미국에서 발현한 부흥에서 국가가 처한 정치적 현실이 부흥의 동기가 된 사례가 없다는 점이다. 도리어 그 시대의 종교적 상황이 부흥의 주효한 동기였음이 주장되어 왔다.3) 일반적으로 부흥의 외적 요인으로는 종교적 상태, 곧 영적, 도덕적 퇴보가 있을 때 일어났다는 점이 강하게 주장되어 왔다.4) 이 점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에서도 동일한 암시를 주고 있지만5) 18세기 잉글랜드나 웨일즈, 그리고 미국에서의 부흥의 배경이었다. 헨리 존슨(Henry Johnson)은 1730년대 잉글랜드에서의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배경을 말하면서 당대의 종교적 도덕적 퇴보를 강조한바 있다.6)

  

스코틀랜드의 경우도 동일했다. 에벤에설 얼스킨(Ebenezel Erskine)에 의하면 18세기 초부터 40년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생명이 없고 미지근하고 또한 무관심한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상황에서 부흥이 일어났음을 지적했다.7) “목사들은 정확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설교했으나 성령의 능력은 없었다. ..... 외적인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참된 신앙은 거의 없었으며 ....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무신론을 자랑했고 에딘버러에서는 지옥불클럼, 유황불 협회, 매춘부집단이라는 조직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8) 웨일즈의 경우에도 도덕적 상황이 부흥의 배경으로 강조되고 있다. “18세기 초반에 있었던 웨일즈의 도덕적 종교적 상황은 아마도 잉글랜드 보다 더 나빴을 것이다. 술 취함과 모든 종류의 방탕이 평신도와 성직자들 가운데 만연되어 있었으며 반면에 더 가난한 무리들은 질이 낮은 무지와 악행가운데서 살아갔다.....”9)

  

부흥운동사에 관한 논자들에게 산업혁명 전후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미국에서 동일했다.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반 신앙클럽의 범람 등 불신적 세속주의가 팽배하였다. 에드윈 오르에 의하면 미국에서 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때 예일대학에는 크리스천 학생수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윌리암스대학(Williams College)에서는 성찬식을 조롱하는 축제를 거행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성경을 불태우는 일까지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제2차 각성운동 이전의 상황도 이와 같았다.10) 라토렛은 1750년과 1815년 사이를 ‘거절과 부흥의 시대’라고 부르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반대가 계몽사상에 의해 일어났다고 분석하고 합리주의 및 이와 관련된 이신론이 젊은 계층사이에 열렬한 동조자를 얻게 되었다고 지적했다.11) 합리주의 사상이 만연하던 시기의 영적, 도덕적 타락, 안일주의 등 신앙적 퇴보상태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부흥의 도덕적, 영적 배경을 중시하는 찰스 피니(Charles Finny)는 부흥이란 “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빠져 있음을 전재로 하여 교회를 그 타락으로 돌이키게 하고 죄인들을 회심시키는 일 가운데 있다.”고 하여12) 종교적 상황이 부흥의 배경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정치적 상황을 포함한 역사·환경적 요인이 종교적 영역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간 한국교회는 1900년대의 정치적 환경이 종교적 갈망에 어떤 영향을 주었던 가에 대해 간과하거나 소홀하게 취급해 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부흥의 역사에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강조하여 왔으나 도덕적, 영적 상태, 곧 1900년대 당시 우리 사회의 우상숭배, 축첩, 간음, 살인, 사기, 도박 등이 만연하였고, 도덕적 퇴보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 간과되었다는 점이다. 분명한 사실은 정치적 혹은 민족적 상황이 1907년 전후 한국교회 부흥을 가져온 주도적인 요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3.2. ‘부흥 역사’인가 ‘부흥 운동’인가?

  한국에서 1907년 전후의 부흥을 흔히 ‘부흥운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운동’이라고 할 때 이 말은 ‘민주화 운동,’ ‘통일운동’ 등과 같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의도된 조직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1903년 이후의 한국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는가 아니면 인간의 조직적인 활동에 의해 발의, 의도, 유지된 ‘운동’이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서 인간에 의해 의도되고 준비되는 운동성은 무의미한 것인가? 이 점에 대한 논의는 부흥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해묵은 논쟁이기는 하지만 이 ‘부흥’(revival)과 ‘부흥주의’(revivalism)의 문제는 제1차 각성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던 조나단 에드워드와 제2차 각성운동의 중심인물인 찰스 피니로 대표되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경계선이 되기도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1734년부터 1736년까지 예상치 못한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으나 1737년 부흥의 갑작스런 중단을 경험하고, 부흥의 인간 의지와는 무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기록한 1737년의『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충실한 서술』(Faithful Narrative of the Surprising Work of God in the Conversion of Many Hundred Souls in Northampton)에서 노스햄톤에서 일어난 부흥은 인간의 의지나 인간의 노력에 의해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요 성령의 역사임을 강조하였다. 요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의 돌연함과 비 규칙성은 인간의 의지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보아 부흥은 인간 의지에 의해 기원하거나 쇠해지지 않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해했다. 그는 부흥은 하나님의 역사이지 ‘운동’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하고 부흥주의를 반대했다.

  

부흥이 인간 의지와 무관하다는 점을 보여 주는 또 한 가지 사례가 웨일즈에서의 부흥이었다. 웨일즈에서는 1800년부터 1859년 사이에 실제로 매 10년마다 신앙부흥을 체험했다. 1859년에는 부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1859년의 부흥은 에이피온 에반스(Eifion Evans)의 지적처럼 “새로운 것도 아니고 기이한 현상도 아니었다.”13) 많은 이들은 매 10년마다 부흥이 있었음을 고려하여 1869년에도 상당한 부흥이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부흥은 오지 않았다. 이런 부흥역사의 발생이나 장소, 지속기간 등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다는 점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며, 인간은 부흥을 가져오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부흥은 하나님의 ‘역사’였지 인간의 의지에 의해 실현될 수 있는 ‘운동’이 아니었다. 

  

반면에 찰스 피니(Charles Finny, 1792-1875)는 “부흥은 이적이 아니며, 그것은 전적으로 자연의 능력을 바르게 사용하는데서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아 부흥이 인간에 의해 기계적으로 준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그는 선거유세에서 전략은 군중회집과 관계가 있듯이, 인간의 노력과 부흥은 유관하다고 이해했다. 그는 “부흥을 위한 방법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과 부흥의 관계는 곡식을 얻기 위한 올바른 방법과 농장물의 수확과의 관계와 동일하다”고 했다.14) 그는 신앙부흥은 인간의 의지나 운동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더 많은 결실을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새로운 방법들(new measures)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15)

  

요나단 에드워즈와 찰스 피니의 차이점을 조지 토마스는 1차 각성운동과 제2차 각성운동의 근원적 차이로 설명한다. 즉 일차 각성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의해 흘러온 것이지만 19세기의 ‘새로운’ 부흥주의는 교회와 전도자들의 의도된 노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16)

  

이들의 차이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간의 차이라고 할 수 있고, 부흥과 전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도는 전도의 방법, 도구, 전도자 개인의 차이 등이 있으므로 인적 요소가 강하나, 신앙부흥에는 인간적 요소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인 영적 각성과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 전략과 방법론이 다소간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정한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부흥의 지속기간, 발생장소, 가속력 그리고 영향력 등을 고려해 본다면 부흥의 주체 혹은 주도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인간이 부흥을 예측하거나 부흥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법칙화 할 수 없을 것이다.


3.3 한국교회 부흥은 ‘비정치화’의 실현인가?

  한국교회의 부흥을 ‘비정치화’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이것이 1907년 전후의 부흥이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라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주장되어 왔고,17) 이런 주장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왔다. 이 주장은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하는데, 첫째는 한국교회의 부흥은 독립이나 민족의 현실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신앙내적인 것으로 전환하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 부흥이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로 하여금 민족현실의 문제에 대해 냉담하게 만드는 ‘비정치화’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역사 현실에 대해 냉담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18) 이 점에 대해 많은 젊은 학자들이 동조하고 있다.19)

  

학문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원로학자들의 주장에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조심스런 일이기는 하지만, 이 주장이 사실성(事實性)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 사실성(史實性)을 필요로 한다. 즉 선교사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민족현실에 대한 관심을 신앙 내적인 것으로 전환하기 위해 부흥을 의도했고 그런 결과로 부흥이 일어났는가를 검토해야 하고, 한국교회가 민족 현실이나 역사현실에 대해 실제로 냉담했는가를 증명해야 하고, 그 원인이 부흥의 결과였는가를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 할만한 논리적 지원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제한된 글에서 이 점에 대해 토론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점들에 대해서 재론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위의 ‘비정치화론’은 일종의 가설로서 이 가설은 두 가지 전제 위에서만 가능하다. 첫째,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기보다는 인간의 의도에 따라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한다. 둘째, 민족현실에 대한 관심과 신앙내적인 심화는 양립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하다.

  

우선 한국교회의 부흥과 유관된 선교사들에게 ‘비정치화’를 모색하는 의도성이 있었는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또 그런 인위적 의도가 집단적 회개운동이라는 전대미문의 성령의 역사를 가져올 수 있었는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부흥의 연원으로 인정되는 첫 인물 하디는 한국에서의 부흥의 연원이 되는 1903년의 원산 부흥을 회고하면서 그것은 어떤 의도에서 발의된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신 일이라는 점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20) 무엇보다도 부흥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다른 선교사들은 예상치 못한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강권적인 간섭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21) 이 점은 부흥이 어떤 목적을 가진 의도성의 결과라는 계연성을 부인한다. 또 이들의 문서 속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민족현실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거나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지도 않고 있다. 선교사들의 멧세지 속에서도 그런 점을 보여주는 단서가 없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회개의 목록 속에서도 민족에의 관여나 무관심, 그 양자에 대한 회오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다른 한 가지는, 1900년 대 이후의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한국교회가 민족 현실에 대해 냉담했다는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설사 냉담했다하더라도 그것이 1907년 전후의 부흥이 가져온 결과라는 점은 입증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부흥이 한국의 비정치화를 가져왔다는 해석은 독립에 대한 관심과 영적 심화는 양립 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가능한데, 그런 전제 자체가 1900년대의 길선주의 경우에서 적용될 여지가 없다.

  

한국교회 부흥을 선교사들에 의한 ‘비정치화’로 해석하는 첫 단초로 제시되는 문헌이 1901년 장로교선교공의회의 문서인데,22) ‘정교분리’라는 일반적 원칙을 제시하는 이 문서가 소위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교회 비정치화를 위해 의도된 문서로 원용하는 것이 타당한 가에 대해서도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보인다. 정교 분리 원칙은 18-19세기 아아제국에서 시행된 선교 단체들의 공통적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3.4. 방언은 성령역사의 현저한 특징인가?

  한국교회 부흥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03-7년에 이르는 부흥에서 방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방언이 없었다는 점이 사실이라면 방언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신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 역사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방안이라고 말하지만 한국교회 부흥에서 방언이 보고된 바 없다. 이언 머레이(Ian Murrey)가 말하는 바와 같이 성령의 역사가 항상 일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불변의 보습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역사하신다. 방언은 불가피한 요소가 아니다. 이 당시 부흥은 감정에 도취된 편향된 감정주의나 자기발산적인 광신적인 요소가 없었다. 


맺는 말

  이상에서 필자는 한국교회 부흥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무엇이 부흥을 가져왔는가의 문제와 유관된 몇 가지 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핵심적인 문제는 사람이 부흥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한국과 18-19세기 부흥사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부흥은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부흥의 배경들, 곧 사경회를 통한 말씀에 대한 진지한 관심,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간구, 진정한 통회와 자복, 그리고 외국이 부흥에 대한 정보를 통한 도전과 자극이 1907년 전후의 부흥을 가져왔을까? 우리는 명백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은 그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도 부흥은 가능한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례는 부흥운동사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부흥에는 인간을 포함하는 요소와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요소가 있을 수 있다는 이중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점은 추수의 경우를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농부는 땅을 경작하고 파종하고 김을 맨다. 사람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그것으로 추수를 보장받지는 못한다. 추수란 햇빛, 바람, 비와 같은 다른 요소들에 의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는 추수를 준비할 수 있어도 그 준비가 추수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농부가 추수를 위해 경작하고 파종하고 김매는 노력 없이는 추수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23)

  

부흥은 인간의 준비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라는 점에서 농부와 추수와의 관계는 부흥에 대한 적절한 유비가 된다. 사람이 부흥역사가 현시해 주는 부흥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도 부흥을 경험하지 못할 수가 있지만, 반대로 부흥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부흥을 체험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부흥에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이런 점에서 부흥은, 서두의 부흥에 대한 정의에서 지적한바와 같이, 인간에 의해 의도되거나 기획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부흥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어떤 자동적인 원리나 법칙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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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김양선,『한국기독교사 연구』, 87; 이영헌,『한국기독교사』, 111

 12) Graham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ongyang,” KMF, Vol. 3. No. 3 (Mar 1907), 33-37. 이 글은 길진경의『영계 길선주』(종로서적, 1980), 362-367에 부록으로 재수록 되었다.

 13) George  M. McCune, Letter to Dr. Brown dated Jan. 15, 1907.

 14) Graham Lee, 33-37.

 15) W. Baird, “The Spirit Among Pyung Yang Students,” KMF, Vol. 3, No. 4 (May, 1907), 66.

 16) 이영헌, 111.

 17)『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8), 180-181.

 18) 이덕주, 113,122.

 19) 이덕주, 139.

 20) 이 점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상규, “1907년 전후 부산, 경남에도 부흥이 있었을까?,”「부경교회사연구」6호(2007. 1), 29-44.

 21) 박용규는 한국교회에서의 부흥은 성경공부(사경회), 기도, 그리고 철저한 회개와 통회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박용규,『평양대부흥』(생명의말씀사, 2000), 16ff. 필자는 이와 함께 다른 지역에서의 부흥에 대한 소식이 한국에서의 부흥에 자극과 도전을 주었음을 지적하였다.

 22) 박용규는 한국교회에서의 부흥은 성경공부(사경회), 기도, 그리고 철저한 회개와 통회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박용규,『평양대부흥』(생명의말씀사, 2000), 16ff. 필자는 이와 함께 다른 지역에서의 부흥에 대한 소식이 한국에서의 부흥에 자극과 도전을 주었음을 지적하였다.

 23)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The Shaping of Twentieth-Century Evangelism, 1870-1925 (Oxford Univ. Press, 1980).

 24) 박용규, 17. 19.

 25) W. B. 스프레이그,『참된 영적 부흥』(엠마오,1984), 133ff.

 26) 토마스, 7, 56. 마틴 로이드 존스는 자유주의 신학은 부흥의 소멸을 가져온다는 점에 근거하여 현대교회의 부흥에 대한 무관심을 개혁신학의 퇴조와 현대주의 신학의 대두를 그 한 가지 요인으로 지적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22-23.

 27) “The Religious Awakening of Korea," KMF, vol. 4, no. 7 (July, 1908), 105.

 28) W. Duewel(안보헌역),『부흥의 불길』(생명의 말씀사, 1996), 307.

 29) D. S. Wallace,『칼빈의 기독교 생활 원리』(CLC, 1996), 41; J. Leith,『칼빈의 삶의 신학』(한국장로교출판사, 1989), 72, 78.

 30) J. Goforth, By My Spirit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n.d.), 181, 189.

 31) I. D. E. 토마스,「신앙부흥운동」(여수룬, 1986), 10.

 32) George Thomas, Revivalism and Cultural Chang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9) 참고.

 33) 박용규, 182, 187.

 34) R. E. Coleman, Dry Bones Can Live Again, 16.

 35) I. D. E. 토마스, 12.

 36) J. R. Moose, “A Great Awakening,” KMF Vol. 2 No. 3 (Jan., 1906), 51. “There is indeed a golden opportunity for the Christian worker in this land. The general unrest and lack of something to which they may cling is causing the people to turn to the Missionary and the message he has; and they are trying to find out if we have something which they can trust.”

 37) W. Baird, “Pyung Yang Academy,” KMF, vol. II, No. 9 (Oct. 1906), 221.

 38) Fischer, Reviving Revivals, 63, 64.

 39) Edwin Orr,

 40) 히스기아왕 때 일어난 부흥운동의 경우, 그 이전 시대의 아하스왕 시대(735-716 BC)에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과 영적 침체가 있었다. 즉 저들은 16년간 우상숭배와 악행, 음란과 방탕이 있었다. 역대하 28:19에서는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다”고 했는데, NIV에서 이 본문을 아하스가 “유다에서 악한 일을 증가시켰고, 여호와께 가장 불충했다”고 번역했다. 영적 퇴보는 다음 시대 부흥 혹은 각성의 주된 동기였다.

 41) “..... 그들은 광범위하게 타락과 쾌락주의에 빠져들었다. 1735년 영국 알코올의 소비는 약 600만명의 인구 가운데 거의 550만 갈론이었다. 1751년에는 거의 1,100갈론에 달했고,... 도시와 마을은 범죄로 들끓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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