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서울 서교동에 있는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이사장 박옥선) 세미나실에서 제196회 월례 학술발표회가 열렸다. ‘역사- 하나님의 섭리: 역사의 애매성이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발표회는 민경배 박사(백석대 석좌교수)가 맡았다.

민박사는 역사의 애매성은 결국 섭리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이야기라며 이는 미래와 섭리, 비전을 볼 수 있어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학교에서 가르칠 때에 하던 강의식으로 참석자들과 토의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제를 풀어나갔다.

▲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다.

그는 특히 교회사 전공자는 역사의 미스터리(애매성)를 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역사의 불확실성과 애매성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내는 것이 사명이다.“ 면서 이는 변증 신학자 폴 틸리히 철학의 기본 원리였다고 소개했다.

 

민박사의 강의내용을 요약해 본다.

역사를 해석하는 데는 적어도 네 가지 답을 찾아야 한다. 사방에서 조명해 보자는 것이다. 한양에 4개의 대문이 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嵩禮門), 홍지문(弘智門)=숙정문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한다. 이 인의예지를 가진 백성이 되려면 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중앙에 보신각(普信閣)을 세운 것이다, 믿음을 널리 가져야만 한다는 뜻이다.

기독교는 무기적 존재가 아니라 유기적 존재이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단절의 종교가 아니라 세상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유기적 종교이다. 예수님도 그런 세상에 성육신하여 유기적 관계를 가지셨다.

인간사에 최초의 살인사건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제사를 드린 후, 요즘 말로 예배를 드리고 나와 뜰에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리는 순간은 가장 순수해 지는 순간인데 인생은 그 순간에도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공로가 없이는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가 가진 66권의 성경책 뒤에 숨어 있는 역사는 더욱 애매하다. 다마수스(damasus) 교황은 정적이 많아 137명을 죽여버렸다. 그런 그가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확정하였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해답을 찾아보자. 당시 400년간 사람들이 저마다 성령 받았다면서 자기가 쓴 글을 정경으로 주장해왔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다마수스와 같은 결단력이 없었다면 아직도 우리는 정경에 대해 왈가왈부 토론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1911년 일제 통치시대 때, 105인 사건이 있었다. 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으로 실형을 선고 받은 사람이 105인어서 105인 사건이라 부른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직후에 민족의식이 높았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을 날조하여 일으킨 사건이었다. 지만 이 사건 처음에 실제로 검거된 사람은 700여명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105인만 실형을 선고 받았을까? 여기에 역사의 애매성이 있다. 역사학자라면 그것을 캐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했는가? 당시 최고 재판부였던 경성고등법원 원장과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은 변호인단의 단장이 일본인 장로였다는 사실은 숨겨진 역사이다.

그들이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최초의 총회에 찾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왜 갔을까? 아마 그들은 무대 뒤에서 장로교 최초의 총회장과 임원들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나님이 움직인 것이다.

삼일운동이 일어난 지역과 당시의 교회가 세워진 곳을 겹쳐보면 묘하게도 일치한다는 사실은 삼일운동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사실에만 눈을 돌리지 말고 숨겨진 역사를 발굴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 숨겨진 역사 속에 일하셨는가를 찾아내는 것이 기독사학자들의 사명이다.

▲ 강사 민경배 박사 영국 애버딘대학교, 런던대학교, 한국장로회신학대학, 일본 교토 동지사대학에서 한국사를 연구 한국교회사학회 명예회장, 백석대 석좌교수

또 이런 역사가 있다. 1917년은 일본 다이쇼 6,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총독으로 있던 해로 그해 5월에 사립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가 조선총독부에 조건부(10년 기한) 설립을 인가 받았다. 이는 조선역사 최초의 사립전문학교가 된 셈이다.

1910년 데라우치 총독은 조선에 기독교학교를 불허했고 7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왜 연희의학전문학교가 인가를 받은 것일까? 이 애매한 역사에 대해 답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하세가와 총독의 직속 국장들 중에 장로가 2명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하세가와를 설득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고 하세가와도 이를 거절할 수 없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 이유로 (1) 조선백성에게 숨통을 열어주어야 한다. (2) 국제적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 (3) 지난 7년을 기독교교육을 받지 않은 조선인이 전문학교 교육을 받는다고 기독인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세가와는 결국 이를 인가했고 이 학교는 오늘날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는 중요한 기관이 되었다.

인간이 얼마나 교묘한지 북한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신교의 자유가 있다고 헌법에 명시한다. 그리고 그 뒤에 반 종교를 말할 자유가 있다고 명시한다. 즉 신교를 믿을 수 있는 자유는 있으나 말할 자유(전도의 자유)는 주지 않았다. 대신에 이 종교를 반대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졌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을 찾아내 인민재판(반대하는 자유의 극대화)으로 그들을 처단한다. 말을 할 수 없는 종교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이럴 경우 역사가 흐르면 자연 사라져야 하는 기독교인데 아직도 지하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는 이 종교의 그 배후에 도대체 무엇이 역사하는가?

우리는 또 세계역사에 묻혀 있는 기록들을 찾아내야 한다. “1909국무성은 한국을 세계 기독교의 기수(旗手)'라 말했고, 1907년 평양대부흥과 이후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이 기독교를 제자리로 되돌려놓았다고 평가했다고 밝혔다. 한국기독교의 중요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는 기독교의 역사를 다시 조명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천사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용하신다. 역사 속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애매성이 있으면 사방에서 조명하여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찾아내 전해야 한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기독사학자들의 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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