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와 기독교언론]


논문은 코람데오닷컴 주최 '언론의 사명과 목적'이라는 주제의 포럼에서 한국교회언론회 이병대 사무총장이 발표한 글이다.

 

들어가는 말

▲ 이병대 목사 한국교회언론회 사무총장

언론의 시발점은 BC 59년부터 발간된 로마의 ‘Acta Diurna’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원로원의 의사록인 ‘Acta Senatus’와 평민원의 의회상황 등의 발표된 기록물을 총칭하는 것으로, Acta Diurna는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을 낱장짜리로 매일 발간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한 곳에 게시함으로 오늘날의 신문과 같은 기능을 하였다.

세상에서 매일 같이 일어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소식에 목말라하는 대중의 정보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언론의 필요성은 세월이 흐를수록 증폭되어 왔다.

이러한 대중의 요구로 ‘Acta Diurna’ 같은 원시신문 형태에서 오늘날의 신문의 형태를 갖추기 까지는 1609년 독일에서 세계 최초의 주간신문인 ‘Relation’‘Aviso’가 나오고, 이어서 1618년경에 네덜란드, 1622년에 영국, 1631년에 프랑스 등에서도 주간신문이 발행되면서 발전을 거듭한다.

특히 17세기 영국 신문은 언론의 자유 확립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영국의 신문은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었는데, 이 분쟁의 와중에 요구된 것이 언론의 자유이었다. 1644John Milton‘Areopagitica’를 통하여, 사상의 공개시장 또는 자동조정 작용과 같은 현대적 언론자유의 개념을 개척하였다.

초기에는 정부의 검열과 규제 및 세금으로 인해 언론의 자유를 제한 받던 신문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과 같은 보도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신문의 독보적인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인쇄기와 인쇄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신문의 대중화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신문의 내용도 뉴스보도에서 경제, 문화, 예술, 연예 등의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었다.

전기 발명과 더불어 급속한 전자기술 발전으로 언론은 종이신문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으며, 전자 통신장비를 이용해 전 세계 대중에게 빠른 시간 내에 새로운 정보를 배포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 발달과 인공위성, 스마트폰의 등장은 기존의 언론 시장의 대 혁명으로 언론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언론 전문회사가 가지고 있는 언론을 벗어나 이제는 컴퓨터나 스마트폰만 할 줄 알면, 블로그나 카페, 팟캐스트, SNS 같은 개인 언론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SNS의 초연결성으로 세상은 좁아지고, 국경과 지역을 넘어 정보의 유통을 빠르게 함으로 언론으로서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나 일방적 주장을 담은 선동과 고발 등이 횡행할 위험성도 높아 사회를 위험성에 빠뜨리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로 하나님의 주권영역에 속한다. ‘나라는 한 왕이 그 권위를 가지고 시행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하나님의 지배,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의 용어는 대략 57(마태복음 4, 마가복음 4, 누가복음 32, 요한보음 2, 사도행전 6, 바울서신 8, 요한계시록 1)가 나온다. 또 반면에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45(마태복음 33, 요한복음 1, 히브리서 11)가 등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하늘나라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 신약성경에서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 100회 이상 나타나고 있다.

네덜란드의 대 신학자요, 정치가이며, 교육가요, 언론인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18801020, 암스테르담 새교회에서 신설 자유대학교 개교연설을 통해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 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1인치도 없습니다.”라고 선언했다.

총신대 박태현 교수의 카이퍼의 영역주권사상에 대한 글을 인용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한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이 세상 삶의 모든 영역,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예술, 교육 등에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유감없이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카이퍼의 영역주권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고백하고, 그 고백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사회생활 전반에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행동을 요구한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 선언은 당시에 교회 안팎으로 거세게 도전해 오는 계몽주의의 합리적 사고에 의한 인본주의 사상에 저항하기 위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신본주의 선언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이후로 인본주의 세계관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여 기독교 신앙마저 부정하고 상대화시킨 시대에 오직 성경에 확고한 기초를 둘 뿐만 아니라, 존 칼빈의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는 성경적 사상을 담대하게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을 의미한다. 그런데 흔히 천국은 사람이 죽은 후에나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영원하고,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미래에 속하기 때문에 일부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였는데, 그것은 미래에 되어 질 천국뿐만 아니라, 이미 임하고, 존재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천국천국 지침에 대한 가르침이다. 즉 예수님이 초림(初臨)으로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한 것이다. 성경에서도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는 말씀을 통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6:5).

특히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강림 사건은 2000년 후인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오, 구주로 믿고, 고백하며, 영접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이들에게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미 이 땅에서도 소유하고 있다.

 

2. 하나님 나라를 믿는 삶

천국은 이미 임했고, 또한 미래에 완전히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감사함으로 살며,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고,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언론인으로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믿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생각해보자. 카이퍼는 하나님 나라의 영역주권을 단지 이론으로만 외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몸소 실천했던 행동가요 실천가였다. 교육가로서 자유대학교를 설립하였고, 정치가로서 반 혁명당을 이끌었으며, 네덜란드 수상(1902-1905)으로서 국가를 섬겼으며, 수십 년 동안 두 개의 신문(De Heraut, De Standaard) 편집장으로서 기독교인들에게 개혁주의 정신을 고취시켰고, 목사로서 당시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싸웠으며, 교단 분열과 통합의 중심부에서 활동하였다. 동시에 신학자로서 2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들도 남겼다.

오늘날과 같이 인본주의와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교회를 혼란케 하고, 신자들을 영적으로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때도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교회 안팎으로 밀려드는 인본주의의 도전에 분연히 맞서서,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영역주권을 실현하기 위하여, 19세기의 카이퍼와 같이 언론을 통한 사명과 헌신이 매우 중요하다. 코람데오닷컴도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한 언론 매체로 알고 있다.

코람데오닷컴이 그저 수많은 언론 매체 가운데 하나이면, 그 중에 하나일 뿐이나,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역주권사상을 가지고 언론의 역할을 수행해 나간다면, 성도들에게는 영적 분별력을 길러 신앙을 굳건하게 하여,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케 할 것이며, 비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3. 세상의 언론 속에서 기독교 언론

지금 다양한 언론사들이 난립한 가운데 기독교 언론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누구나 원하면 쉽게 언론사를 세울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이라면 적어도 하나님의 영역 주권을 확장하기 위한 성경적 가치관 실현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언론은 현대인들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정보 전달 수단이다. 언론은 단순히 1차 전달 기능인 신문과 방송 외에 2차 전달 기관인 인터넷과 3차 전달 매체인 SNS ,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한다. 그 수많은 정보와 소식 가운데 사실에 입각한 진실은 얼마나 될까?

불행하게도 현대는 언론 매체의 다양화와 SNS의 활성화로 인한 언론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선정적 경쟁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범죄괴기 사건성적 추문 등을 과대하게 취재보도하거나, 특정한 목적에 따라 프레임을 설정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선동적, 선정적 황색 저널리즘의 홍수시대가 되었다.

언론의 첫째 의무는 진실 추구다. 그 진실은 사실을 올바르게 포착하여 사실 속에 드러나 있는 진실을 보도하는 것이다. 언론의 진실보도 기능은 숨어있는 사실을 규명하고, 그 사실들을 연관지어, 사람들이 그것을 신뢰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뉴스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유용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Fact로서는 정확하지만, 실제로는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거짓을 보도하는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 끌려온 여인을 향하여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 여기서 죄 없는 자라는 말을 빼고, “예수님,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하다라고 보도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얼마 전 문창극 총리 후보 사태에서 황색저널리즘의 극치를 보았다. 황색 저널리즘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오, 인격살인이다.

일반 언론도 그렇지만, 기독교 언론은 무엇보다 성경적 가치관에 의거하여 사실 보도가 아닌, 진실 보도를 생명으로 여겨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언론들은 얼마나 진실 보도에 무게를 두고 있을까? 또 외부 환경에 대하여 얼마나 반응하며, 진실 소유권 담보를 위해 노력할까? 이런 문제들이 기독교 언론이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사실 기독 언론과 일반 언론은 보도 기능면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추구하는 목표와 목적은 세상적 가치관과 성경적 가치관의 차이다. 기독교 언론은 복음적 가치에 충실해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언론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첫째는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나는 강의를 준비하다 코람데오닷컴이 추구하는 목적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 보니, ‘한국교회의 부흥과 갱신이 우리의 목적이란 말을 보았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추구해야 할 중요 사안이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들이 과거 70~80년대처럼 교회 간판만 걸어도 사람들이 찾아와 교회가 부흥하는 시대는 분명 아니다.

그럼 갱신을 통하여 부흥을 일으킬 것인가?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깨워 소위 말하는 한국교회 질적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고려한 듯하다. 매우 의미 있는 말이다. 그런데 갱신도 쉽지는 않다. 한국교회에서 갱신을 부르짖는 운동은 이미 1980년대 말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성패에 대하여, 그 핵심적 위치에 있는 분이 이미 지난 2010실패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바 있다. 그 만큼 갱신은 쉽지가 않다.

어떤 기독 언론 매체는 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앞세워 교회 내부의 문제에 대하여 폭로전위주의 편집방향이 잡혀 있는 듯하다. 교회 구성원 내부의 문제점을 널리 세상에 알려, 그들과 주변인에게 경종을 울리므로 변화를 유도하자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언론의 비난 강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으나, 그 언론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얼마나 갱신 되었는 지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는 아직 어렵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 비난의 빌미를 제공해줌으로 하나님 나라 영역주권 확장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코람데오닷컴이 추구하는 갱신은 교회의 본질(text)을 인정하고, 시대와 상황(context)의 변화에 맞게 한국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인데, 과연 언론이 그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제대로 짚어 주느냐하는 것이 관건이다. 시대가 변한다고 본질적인 문제까지 변화의 범주 속에 집어넣으면, 주객이 전도되는 꼴이다. 갱신과 개혁은 성경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 예로 최근 한국교회는 시대적 변화 가운데 동성애문제를 극히 일부 목회자와 교회 외에는 강단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세력들과 힘을 합하여 동성애를 통하여 세상을 뒤집어엎을 기세인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너무나도 잠잠하다. 기독언론들조차도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활동은 가끔씩 보도하지만, 그 근본적 문제점에 대한 것은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회적 변화의 기류를 기독언론들도 수용하는 추세다. 성경적 가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둘째는 진실사실은 함께 가야 한다.

언론 보도의 시작은 사실’(fact)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언론 수용자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려면,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실이 필요하다. ‘진실은 사실을 기초로 한 거짓 없는 사실을 말한다. 코람데오닷컴에서도 정보의 정확성을 강조하고 있다.

얼마 전 모 공영방송은 총리 후보자 문제를 보도하면서, 그가 교회 안에서 강연했다는 사실보도를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맛에 맞도록 내용을 왜곡/편집하여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애국적 발언과 독립운동가 후손을 친일/반민족분자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사실의 프레임은 얼마든지 짤 수 있다. 그러나 프레임에 일부러 담지 않는(왜곡편집) 사실 때문에 진실이 외면당한다면, 이는 반쪽짜리 언론에 불과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공정성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진실을 외면한 사실만의 보도는 위험해 질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기독교 언론들도 이런 위험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실보도로 진실을 왜곡하여 집요한 공격을 하는 것이다.

모 언론에서는 A교회에 대하여 2년여에 걸쳐 79건의 보도와 9건의 컬럼을, B교회에 대해서는 26건의 기사를 연속적으로 집중 게재하였다. 갱신을 넘어 혐오에 가깝다. 백번 양보하여 갱신과 개혁을 위한 선한 목적이라 해도, 성경적 가치관에 의해 사실과 진실은 함께 가야 한다.

 

셋째, 기독언론의 비판 보도 활동은 얼마나 복음적 가치를 담느냐 하는 것이다.

언론에서 비판 보도 활동은 중요한 역할의 하나이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의 비판은 분명 세상의 언론과 차별을 두어야 한다. 기독교 언론의 비판 기능은 성경적 가치를 수호하고, 교회 안에 덕을 세움으로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데 목적을 두고 비판해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울지니라”(15:2) 아무리 훌륭한 비판도 복음을 훼손하고, 교회를 허물며, 성도들을 실족케 하는 일이라면, 비판 보도를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언론사가 게재하는 기사와 컬럼을 보면 그 언론사의 경향이 드러난다. 기독언론이 카이퍼의 말처럼 하나님 나라의 주권영역의 확산에 있다면, 비판적인 기사보다는 목사나 성도, 교회의 선한 사역을 더 많이 보도함으로 교계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덕을 세우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아닐까?

천주교는 교황청의 TV나 신문을 통해, 그리고 한국의 가톨릭은 자체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자그마한 사역도 엄청난 홍보를 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하자마자 교황청 언론을 대폭 강화시켰다. 이는 영역확대를 위해서 아닌가? 단적인 예가 이태석 신부의울지마, 톤즈바보 김수환 추기경은 천주교 언론의 대대적인 홍보와 마케팅 전략에 의한 성공이었다.

우리 기독교 선교사들과 목회자, 성도들의 아름다운 사회봉사와 헌신은 타 종교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 한국교회언론회가 지난 320일 자의 보도자료 보면 한국교회가 연간 5000만원의 사회복지기금을 조성하고, 통계에 잡히지 않은 것 까지 합하면 년간 1조원 가까이 사회봉사에 헌신하고 있다. 이제는 기독언론들이 한국교회의 선행을 발굴 보도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이것이 기독언론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주권영역 확장이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2,000(신문/방송/통신사 등)가 넘는 언론이 있다. 기자 수도 엄청나게 많다. 그래서 누군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기자 밀도를 가진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소식을 전하는 매체는 더 있다. 그 형태도 신문/방송/인터넷/잡지 외에 인터넷포털/모바일 등 다양한 형태의 매체가 있다.

지난 해 초반을 기준으로 페이스북에 가입한 사람은 127천만 명이고,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좋은 카카오톡 가입자도 올 5월 기준으로 14천만 명에 육박한다. 인터넷포털에 접속하는 숫자는 매일 4~5천만 명이 넘는다. 100명의 팔로우를 가진 사람이 쓴 글을 또 다른 100명의 팔로우를 가지고 있는 두 친구에게 한번 씩 클릭하여, 3단계만 넘어가면 클릭 세 번으로 1억 명이나 되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정보가 전파되는 엄청난 세상이다.

문제는 정보 속도전에 뒤진다는 강박관념에 쫓기는 기존언론들이 SNS 여론에 너무 쉽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는데, 잘 못하면 언론으로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SNS에 떠도는 정보를 인용하는 언론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어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사회를 혼란케 한다. 이럴 때일수록 철저한 사실 확인과 진실 규명으로 기독교 언론의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여 SNS와 차별을 두어야 할 것이다.

왜곡된 보도로 인한 언론중재위원회의 중재나 구제요청이 해마다 증가 하고 있어 기독언론들은 진실 보도에 더욱 유의하여야 한다. 목적을 가지고 비판에 치우치다 보면, 왜곡된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

<별표1>2013년도 언론중재위원회 통계표에 의하면, 모든 언론에 대한 중재가 190, 조정이 2,433, 시정이 272건이며, 이 중에서 종교계 언론에 대한 조정신청은 31, 중재신청은 2건에 달한다.

그렇다면 혼란스러운 언론 환경 가운데 복음을 담은 내용은 얼마나 될까? 사실 한국 기독교는 우리나라 여러 종교 중 가장 큰 인프라를 가지고 있다. 예배당도, 성직자수도, 교인 수도, 교회 예산도, 선교사 수도, 사회봉사도, 유명인사도, 언론사도 가장 많이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역주권 확장을 위해서는 부족함이 없는 엄청난 인프라다.

그러나 영향력이나, 결집된 의견에서는 언제나 다른 주요 종교에 비하여 턱없이 모자란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도 결집된 노력이 부족하다. 마치 산만(散漫)한 빛은 많은데, 이를 프리즘으로 모아 불꽃을 일으키는 데에는 흐릿한 것과 같다. 개 교회주의와 개 교단주의, 연합기관의 분열, 기독언론의 난립 등은 최악의 상태다. 기독교 언론도 사주에 의해 그 성향이 확연히 다르다.

한국 교회에는 100여 가지가 넘는 언론 매체가 있으나, 이들이 분명한 복음적 가치를 담기위한 목적보다는,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 제각각 생존과 존재감 알리기에 급급하다. 특히 열악한 경제적 여건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애초에 다짐 했던 성경적 가치관과는 너무 동떨어진 모습을 보게 된다.

심지어는 이단마저 끌어들이는 위험한 행태를 노출시키고 있다. 얼마 전, 한 중진 기독언론인이 몇몇 기독언론인들과 함께 유병언 구원파와의 금전적 거래를 고백함으로 교계는 물론 세상 언론들 까지 기독교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그분들이 코람 데오 의식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제 기독교 언론의 숫자가 줄어들더라도, 고품질의 복음적 가치를 담은 언론 매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영역주권 사상이 투철한 기독언론인에 의한 기독교 언론의 활성화가 간절하다. 교회 안팎의 거센 도전에 대항하여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는 복음적 가치를 담은 언론이어야 진정한 기독교 언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상당수의 기독 언론들이 단순한 교계 행사 보도 나열로 일부 단체나 교회, 또는 교인의 얼굴 내주기에 급급하다. 교회나 특정인, 특정단체의 홍보가 기사로 둔갑되어 독자를 오도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100여개의 기독언론 매체가 있다 해도 교회와 세상을 향해서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카이퍼와 같이 복음적 가치에 충실한 기독교 언론들만이 목사와 성도들로부터 사랑 받고,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타종교계의 언론은 우리 기독교보다 매체 숫자는 1/10에 불과해도, 자기들의 종교 홍보에 집중하고, 더 나가 기독교 내부의 내밀한 활동까지 모니터링하고, 감시하여 기독교에 대한 트집을 잡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기독교의 언론들은 교회 보호 차원에서도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타종교 언론에 의한 한국교회에 대한 공격과 터무니없는 비난은 기독교 언론이 막아주어야 한다.

2008년 이후, 타 종교 언론들은 한국교회의 정당한 신앙행위 까지도 종교편향이라는 빌미로 맹공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공직자 신우회가 침체되고, 기독교 공직자들의 신앙이 심각한 침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독교 언론들의 대항은 공직자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공직사회에서 하나님의 주권영역이 침해를 당한 것이다.

기독교의 언론 매체로써, 분명한 복음적 가치를 담기 위한 비판은 매우 지당하지만, 현실적으로 외부 공격으로부터 교회와 복음을 지키기 위한 기독언론의 노력도 절실하다. 이런 면에서는 현재 기독언론들이 함량미달이 아닐까?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 언론은 어느 종파 못지않게 많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을 언론 매체에 담느냐에 따라 가치관과 정체성이 형성된다면 더 고민해야 할 사안이 많다.

 

4. 기독교 언론 보도의 확장

아무리 좋은 신문, 방송을 만들어도 오프라인 언론에서는 구독률, 라디오 방송에서는 청취율, TV방송에서는 시청률, 온라인 신문에서는 클릭수가 형편없는 것이라면 기독교언론으로서 가치와 기능은 이미 상실되었거나, 상실되어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각 기독 언론사가 발행부수나 독자수, 청취율, 또는 1일 클릭수를 공개치 못하는 속사정도 각사의 언론의 시장 현황을 드러낼 형편이 못되기 때문일 것이다.

모바일과 인터넷 언론의 확산으로 기존의 언론들의 소비층 확산 보다는 현상 유지도 힘든 상태이다. 언론 소비자들이 다양한 언론매체로 분산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료로 제공되는 언론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유료로 보아야 하는 언론매체에서는 이탈현상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하루 60억 건의 글이 올라오는 폐쇄형 SNS인 카카오톡이나 하루 830만 명이 접속하는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언론사에서 만든 보도가 수백만 건의 정보로 소통될 것으로 추정되어, 이로 인한 언론사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고 본다. SNS가 최근에는 왜곡된 정보 유통으로 이념·지역·계층·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고 소통 자체를 봉쇄하는 '전쟁터'로 변하고 있다. 이는 젊은 층에서 모바일을 통해 기존의 언론으로부터 정보 취득을 대신하고, 끼리끼리 정보를 유통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기존 언론사들의 피해가 확산되고 있다.

이제는 기독언론들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언론 형태를 다양화해야 할 때이다. 모바일용 컨텐츠도 제작하여 다양한 독자층을 형성시킬 필요가 있다. 이미 기독언론들도 앞 다투어 모바일용 앺??개발했거나 개발 중인 것으로 안다.

<별표2>에서 보는 것처럼 지상신문 1위인 조선일보도 ABC가 공식 집개하기 시작한 2010년에는 유가지 1,392,547부를 발행했지만, 2013년엔 1,294,239부로 4년 동안 무려 10만부 가까이 감소하였다. 별표2에서 보는 바대로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모든 신문들이 해마다 유료부수가 감소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일간지 국민일보도 2010년엔 유가지 211,632부수가 2013년엔 140,140부로 4년간 무려 71,492부나 급감한 것을 보면 기독언론 시장의 환경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로 인해 언론사들의 경영 문제가 언론의 콘텐츠의 질을 악화시키고 있다.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느냐가 사실은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ABC협회가 발표한 2013년 종교신문 발행 부수를 보면, 조계종 기관지 <불교신문>은 유가지 26,325, 무가지 4,656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945부가 늘었다. 가톨릭의 <평화신문>은 유가지 63,103부를 발행하였다. 통일교 신문인 <세계일보>2012년 기준 60,529부의 유가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신천지와 연관성이 있는 것을 보이는 <천지일보>16,005부의 유가지를 발행하고 있다.

종교신문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한국SGI(한국창가학회)가 발행하는 <화광신문>이다. 2013년 한국ABC 발표에 의하면 유가지 571,847부를 포함하여 모두 572,585부나 발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계의 유가지 발행부수가 제일 많은 국민일보 보다 무려 4배 가까운 유가지를 발행하고 있다.

한국교인 860만 명에 비하면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국민일보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교단지나 초교파 신문을 보면 부수를 공개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나마 기독언론으로서 명분을 지키는 것이 라디오 방송이다. 케이블 TV를 통해 방송되는 기독교TV 시청율은 언급하기조차 민망하다. 그나마 CTS가 종교TV 방송에서 선두에 서있는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신문이나 방송의 확산성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한국창가학회의 <화광신문> 발행이다. 2008년도 문화관광체육부의 한국종교현황 책자에 의하면 한국SGI의 신도수는 3만 명으로 나와 있다. 유가지 발행이 신도수의 20배에 가깝다는 것이다. 제보에 의하면 신도들이 일정부수의 화광신문을 구독해서 정부 각 기관은 물론 학교, 병원, 심지어는 아파트 단지 까지 전도지 또는 홍보용으로 열심히 배포한다는 점이다.

얼마나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느냐? 는 경영전략에 관한 문제이지만, 언론의 질과도 긴밀한 관계성이 있다. 언론을 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론의 확산성은 생존에 관한 문제이다. 언론의 확산성을 위해서는 정보 전달 매체도 IT시대에 맞춰 다양화 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확산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 기독언론의 존재가치라면 시대에 걸 맞는 다양한 시장개척도 시급한 문제이다.


5. 마치면서

코람데오닷컴이 설립 8주년을 맞이하면서, 처음 가졌던 정체성이나, 가치관이 잘 지켜져, 진정한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 코람데오닷컴이 밝힌 바로는, ‘겸손은 정직의 토대라 믿고, 부풀리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겠다’ ‘속도와 크기를 경쟁하는 세상에서 정직과 겸손을 가치로 걸고 일하겠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교회의 명예가 회복되길 진심으로 간구한다는 목적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이뤄질 때, 진정한 발전이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사회 전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더구나 언론의 역할과 중요성이 요구되는 현 시대에서 제대로 된 언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비판 보도에 치중하기 보다는 한국교회 선한 사역을 발굴 보도함으로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쳐 하나님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기독교 언론이 됐으면 좋겠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이 투철한 하나님의 영역주권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크게 기여하는 코람데오닷컴이 그런 역할을 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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