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발제문(1-3)
본고는 기독연구원 느혜미야가 지난 7월 25일(금) 저녁에 발표한 권연경 교수, 김근주 교수, 김동춘교수의 발제문이다. |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뜻인가?]
내 맘대로 갖고 노는 “하나님의 뜻”
익히 아는 우스갯소리를 생각해 보자. 두 수녀 사이에서 차를 타고 가던 신부님이 못생긴 수녀 쪽으로 차가 기울면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하고 기도하고, 예쁜 수녀 쪽으로 기울면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했다는 이야기다. 가톨릭 비난하는 게 될까봐 주인공을 목사님으로 바꾸고 싶기도 한데, 그러면 개그가 그냥 다큐가 되는 것 같아 오히려 부담스럽다. 이런 농담의 핵심은 누가 봐도 뻔한 “욕망”에 신앙의 외피를 입혔다는 것이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쓰고 “아, 싫어!” 하고 읽으며, 주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쓰고 실제론 “너무 좋아요”라고 읽는다. 그런데 이런 허구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 하지만 그건 내 앞의 보험중개인이 자신이 어떤 교회 집사임을 강조하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고상한 표현이 내 의도를“신앙적인” 것처럼 보이게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 행동 자체가 신앙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 행동의 속내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혼란스런 조작이 제거되어야만 드러날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나의 삶이나 우리의 역사를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해석의 틀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분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의 역할은 최근 세간의 관심사가 된 몇몇 사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나중에 다른 분이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오늘 나의 역할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지침으로 삼아, 선악이 뒤엉키는 인간의 역사를 두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를 물어 보는 것이다.
한 가지 실험적 유비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조명” 이미지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을 조명하는 해석의 틀이라는 점에서 그리 빗나간 유비는 아니다. 조명에는 전체조명이라는 것도 있고 집중조명이라는 것도 있다. 하나는 전체를 밝히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특정 부분을 보다 명확하게 밝히기 위한 것이다. 빛을 비추는 대상이 아무 굴곡이 없는 평면이 아니라면, 전체조명이 모든 평면을 골고루 밝히는 것은 아니다. 표면에 굴곡이 존재할 경우, 오히려 그 조명은 어떤 부분에는 어두운 그늘을 만들기도 할 것이다. 그 부분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 그늘진 부분에 맞추어진 부분 조명이 필요하다. 물론 그 부분조명으로 전체를 볼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방송 카메라와 조명들이 여럿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풀샷”을 잡아야 할 때도 있고, 특정 부분을 “클로즈 업” 해야 할 경우도 있다. 모두가 다 우리 삶을 밝히는 방식들이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
원론적으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한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뜻”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는 만큼,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신앙을 고백한다. 출애굽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만큼이나 바벨론포로도 하나님의 뜻이다. 로마의 통치도 하나님의 뜻이며, 그 통치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줄 메시야를 보내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 이야기를 하자면, 일제 36년의 아픈 역사도 하나님의 뜻이고, 남북분단과 전쟁의 고통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다. 이 때 하나님의 뜻은 사실상 하나님의 “섭리” 개념과 다르지 않다. 이런 관점은 말하자면 신학적“전체 조명”에 해당한다. 인간의 삶과 역사를 큰 호흡으로 바라보며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
하지만 이 포괄적 조명이 우리 삶의 모든 구석을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걷는 삶의 구석구석에는 이런 “전체 조명”으로는 밝혀질 수 없는, 아니 오히려 더 어두운 그림자가 지는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도덕적 굴곡이 존재한다. 우리가 전체조명만을 의지할 경우, 이런 굴곡들은 자연 어두운 부분으로만,요즘 아이들 표현을 쓰자면 하나의 “흑역사”로 인식될 것이다. 문제는 전체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위치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위치는 아니라는 점이다. 요약에는 늘 세부사항에 대한 폭력의 가능성이 존재하듯, 우리의 삶을 하나의 관점으로 조망하려는 시도 속에는 늘 그 하나의 관점에 의해 가려지거나 혹은 곡해될 수 있는 복잡한 사정들이 있게 마련이다. 특정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그 굴곡의 속내를 파고들 수 있는, 국지적이지만 보다 집중된 조명이 필요하다. (신명기가 있다면 욥기도 있는 것처럼).
구체적 삶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삶이란 대개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대결의 구도 속에서 펼쳐진다. 이 구체적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을 경우, 이는 언제나 우리 삶의 도덕적 상황을 밝혀줄 도덕적 조명으로 작용한다. 이 때 “하나님의 뜻”은 사실상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라는 의미에 접근한다. 전체조명으로서의 신앙적 관점은 때로 도덕적 차원조차 넘어서는 섭리적 차원을 말하겠지만, 일상의 무대 속에서 “선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대개 삶을 향한 도덕적 관점을 지탱하고 강화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선지자는 백성들이 정의와 자비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질타하고, 의로운 영혼은 자신의 억울함을 살펴 달라고, 그래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악인을 처벌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당면한 상황 속에서 선악을 선명하게 구분함으로써 내가 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지, 관조적 태도로 이 모든 상황 배후에 놓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바울서신의 경우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의 뜻은 자주 등장한다. 우선 섭리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언급이 종종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포함하는 큰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방식을 설명하는 진술들이다. “하나님의 뜻”(경륜)이라는 개념 아래 구원 역사 전체를 조감도처럼 조망하는 에베소서 1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이방 그리스도인들)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나,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는 것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되는 일이다(1:4-5, 11). 하지만 이런 경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피조물이요 구원의 수혜자인 우리의 입장에서 이 세계를 향한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일이 간단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신약성경이 거론하는 하나님의 뜻은 실천적 삶의 문맥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 그러니까 우리가 분별하고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요구로서의 뜻을 가리킨다.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물으며 살아가라는 요구다(롬 12:1-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거룩한 삶이다(살전 4:4). 혹은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의 태도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살전 5:18).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이 두 가지 하나님의 뜻을 분리하기는 어렵다. 우리를 구원하는 경륜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이 서로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일, 곧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알게 하신 일은 자연스레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관심으로 이행한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에베소서 1장의 언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여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하며 기도한다(골 1:9).그리고 이 때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그의 구원의 계획을 깨닫는 것을 넘어,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하는 기도로 이어진다(1:10). 물론 이런 삶의 태도는 우리를 구원하고 세계를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핵심적인 과정으로 묘사된다(골 1:9-23). 아마 두 하나님의 뜻이 합류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일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약성경이 긴 역사적 호흡으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이유는 오늘이라는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어떤 걸음을 걸어야 하는가를 말하기 위해, 곧 우리 삶이 걸어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고 세계를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큰 뜻 안에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야 할 존재임을, 그리하여 그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존재임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임을 일깨움으로써,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행보를 이어가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관련한 혼란
여기서 전체조명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섭리)”와 부분조명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요구)”은 서로 다르면서도 서러 얽힌다. 성경은 결코 사람이 저지르는 악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울타리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우리의 삶 전체를 조망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말할 수 있지만, 이런 신앙적 고백이 우리 삶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덮어쓰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우리 일상의 행보를 놓고 늘 선과 악을 따지며,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틀을 짜면서도, 그 틀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삶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신학적 전체조명으로서의 “하나님의 뜻”과 실천적 부분조명으로서의 “하나님의 뜻”은 그 속내가 다른 것이다.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겪는 어려움의 한 차원은 서로 연결되지만 구분되어야 할 두 가지 하나님의 뜻을 성급하게 뒤섞은 잘못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비극적 상황 앞에서, 우리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를 묻고,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행해야 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묻는 대신, 이 상황 자체는 이미 완결된 과거로 치부하고 그 배후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큰 뜻을 물으려 한다. 부분조명으로 상황을 파악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한 걸음 물러서 전체조명에 드러난 그림을 말하려 드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성급한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이 나오기는 어렵다. 보다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큰 뜻을 불러들이는 이런 성급함 자체가 종종 당면 상황 속에서 우리가 분별하고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회피하는 기제로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언사에 대중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앙적 언사 자체가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언사가 실제로는 도덕적 무책임 혹은 심지어 비도덕적 행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두 가지 하나님의 뜻
물론 성경에서도 이 두 가지 하나님의 뜻이 얽히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큰 호흡으로 역사 배후에 놓인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 표면에 드러나는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이미 예고된 일이라는 점에서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준 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도덕적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잘못을 저질렀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진다(행 1:15-20). 예수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는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행 2:23). 오히려 사도행전의 문맥에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할 “죄”는 일반적 의미의 죄라기보다는 그들의 메시야로 오신 분을 거부하고 그를 죽게 내어주었다는 구체적 사실과 관련된다(행 2:37-38; 3:17-19). 또한 유대 지도자들이 이방세력과 결탁하여 사도들을 박해하는 일 역시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지만(행 4:28), 이는 결코 그들의 “위협”을 정당화하려는 논리가 아니다(4:29). 오히려 하나님의 큰 뜻에 대한 확신과 신뢰는 구체적 상황에서 보다 선명한 도덕적 행보를 하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한다. 지도자들의 박해 역시 하나님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알기에, 교회는 “그들의 위협을 굽어 살펴 달라”고, 그리고 사도들이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4:29). 이런 믿음 속에서 그들은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이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는 도전을 던진다(4:19). 그러니까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뢰가 구체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더욱 선명한 판단과 결연한 실천의지를 다지는 근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성도들의 고난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 곧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는 의도의 표현이다(살후 1:5). 하지만 이런 “신앙적 역사관”은 동시에 상황 자체에 대한 엄정한 도덕적 판단과 결합된다. 성도들의 고난은 동시에 “하나님이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시”이기도 하며, 따라서 성도들을 환난을 야기한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아주시고, 환난을 받는 성도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결합된다(1:5-9).
요셉 이야기
이집트의 총리가 다름 아닌 자기들의 동생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형들은 보복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요셉을 질투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고, 결국 노예로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요셉이 처음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 요셉의 말은 “나는 당신들이 애굽에 팔았던, 당신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하는 것이었다(44:4). 여기서 요셉은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된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언급한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다. 요셉은 어안이 벙벙한 형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염려하지 마세요” 하며 그들을 안심시키며, 형들의 행위에 대한 대안적인, 혹은 “신앙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45:5). 다시 말하면,요셉을 이곳으로 보내신 이는 요셉의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44:8). 그가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이었다(44:7).
아버지 요셉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금 불안이 고개를 든다. “요셉이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아버지는 죽었고, 이제 요셉의 보복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형들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했다는 아버지의 유지를 거론하며 요셉의 선처를 호소하며 지난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50:17). “우리는 당신의 종들입니다”(50:18). 여기서 요셉은 다시금 자신의 삶에 대한 신앙적 관점을 재확인한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50:19)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행해진 악에 대한 보복은 하나님의 몫이지 요셉 자신의 몫이 아니다. 요셉은 분명 악을 “당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그 악을 보복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얽히는 인간사의 스토리 그 이면을 읽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은 분명 악을 의도했고, 요셉은 그 악의 희생자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라는 관점이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상황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온다. 요셉의 고난은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이런 신앙적 관점이 인간적 삶의 도덕적 차원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 요셉의 형들은 분명 악을 의도했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말한다. 악한 일이 갑자기 선한 일로 둔갑했다는 것이 아니다. 악은 여전히 악으로 남지만, 하나님은 그 악한 일을 활용하셔서 선한 결과를 이끌어 내기로 하셨다. 요셉을 팔아먹은 형들의 악한 행동을 “선용하셔서” 이스라엘 집안을 건지는 수단으로 활용하신 것이다. 물론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 자로서는 당연한 행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악은 여전히 악이다. 악을 악으로 규정한 후, 그것을 용서하는 것과 악 자체를 부정하거나 덮으려 하는 태도는 같을 수 없다.
우리의 상황과 하나님의 뜻
우리가 겪는 혼란은 많은 부분 이런 두 용법의 혼란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세월호 침몰 이후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에 직접 연루된 당사자들의 저급한 이기심에 충격을 받았다. 개인들은 자신의 목숨만을 따지고,회사의 자기 이익만을 따지고, 해경이나 정부와 같은 다양한 조직들은 조직 유지와 확장의 본능에만 충실하다. 우리는 이런 본능이 수많은 승객들, 그것도 어린 학생들의 희생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의 적나라함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도덕적 충격이다. 당연히 우리는 그런 희생을 야기한 불법적 행태에 분노하며, 그에 대한 법적,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느낀다. “책임 규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 부분조명을 끄고, 보다 느슨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한다. 이 큰 틀 속에서 사건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곧 하나님께서 (무고한) 학생들을 희생시키셨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배후에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려고”라는 해석이 붙는다. 이런 해석의 의미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순간, 그 사건과 관련된 도덕적 책임을 묻는 일은 중단된다. 대신 우리는 더 이상 그 희생 자체에 집착하지 말고, 이런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기회에 마음을 모으고,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 새로운 기회가 무엇인지 선명치 않다는 것은 애초부터 이런 논리가 새로운 기회를 위해 착안된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이런 논리의 실질적 기능은 이런 불행한 사태와 관련된 “불편한 도덕적 물음”으로부터 서둘러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문창극씨의 사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일제 36년의 고통스런 역사와 남북분단 및 동족상잔의 비극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틀 속에서 해석했다. 한국 현대사의 이런 아픈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이미 지나간 사건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현재적 상황이기도 하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는 것처럼, 아직 도덕적 판단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은 사안, 그래서 가해자들은 도덕적 책임을 제대로지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그 피해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도덕적 차원을 사뿐히 건너뛰고, 큰 호흡으로 이 불행 배후에 놓인 하나님의 뜻을 논하려 한다. 그리고 이 “뜻”의 사례들로 종래의 미개함과 누추함 대신 서구의 발달된 문명이,한반도의 공산화 대신 분단이라는 다행스런 결과가, 그리고 일본과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경제 성장이라는 축복들이 거론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전체조명 속에 많은 진실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분노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을 통해 더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일제시대 그리고 하나님의 뜻]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여 식민지 삼았던 36년은 조선에게는 치욕적인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애써 부정되거나 모른 체 해서는 안될 역사이며, 더욱 열심히 연구하고 살피고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도 하다. 문창극씨의 문제가 되는 강연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일제 시기를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우리 민족을 영글게 한 시기로 해석하고 있으며, 애석하지만 상심할 필요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던 시기라고 풀이하고 있다. 일제와 분단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쓰시기 위해 허락하신 고난의 시기라는 식의 해석은 얼핏 들어 크게 문제가 될 것 없어 보인다. 사실 이런 식의 힘겨운 삶에 대한 해석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에 임한 고난과 고초를 해석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해석은 어쩌면 액면으로는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식민지 시절에 대한 이해 이면에 놓여 있는 것과 함께 고려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의 강연 전반에 흐르고 있는 사고를 보여주는 것들에는, ‘더럽고 지저분하고 게으른 조선’이라는 인식 그리고 그에 비해 ‘일본은 참 깨끗하구나’ 라고 보았다는 미국 선교사들의 생각에 대한 언급,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승만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묘사,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공산주의이며 미국을 통해 도우시려고 분단과 625를 경험하게 하셨다는 식의 표현 등이 있는데, 이러한 언급들은 그의 생각이 우리 민족 역사에 대한 지독한 편견과 몰상식, 노예근성, 그리고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사고로 일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창극씨의 발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발언에 대해 교계 내에 지지하는 소리들이 꽤 있었다는 점인데, 이러한 소리들에는 여러 신학자들과 유명하다는 목회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문창극씨의 발언은 단지 개인의 의견을 넘어서, 한국 기독교가 이제껏 역사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지난 4월 이래 온 국민의 슬픔의 근원이 된 세월호 참사 역시 종종 교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취지의 말로 언급되는 경우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험난한 시대 속에서 예수 믿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살아온 삶을 신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시점에 오늘의 교회가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망해 가는 나라에 살았던 예레미야는 그들을 멸망시키려 하는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촉구한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다니엘은 그렇게 망해서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을 대변하고 있으며, 역시 바벨론 체제에 저항하지 않고 바벨론 신의 이름을 따라 불리게 되는 것도 개의치 않아 보인다(단 4:8). 그들의 행동은 오늘 우리에게 규범이 되는가? 우리 역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약탈에 대해 예레미야처럼 다니엘처럼 묵묵히 순종하여 섬겨야 하는가? 여기에는 구약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해석학적인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 예레미야와 다니엘의 행동을 평면적으로 오늘을 위한 규범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가령 우리는 구약의 곳곳에서 절기나 제의와 연관된 말씀을 만나게 되지만 오늘날에 그대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두 재료로 섞어 짠 옷을 입지 말라는 규례를 보지만 오늘날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심지어 바울이 여성들은 교회에서 긴 머리이든지 머리에 무엇을 쓰든지 하라고 강력하게 권면해도(고전 11:1-16), 오늘의 교회는 전혀 그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의 교회가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은 그 때 그 시대의 의미를 깊이 드러내면서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심사숙고 되어야 한다.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로 지나간 시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풀이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예레미야와 다니엘 같은 이들을 제국주의 체제에 충성한 사람으로 그리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일제 시대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연히 그 모든 독립운동과 일제에 대한 저항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하게 된다. 사실 그렇기에 이 땅의 지배 기득권 세력들은 일제에 영합했다. 그리고 일본이 망하자 즉각 새로운 지배세력인 미국에 영합했고, 문창극씨의 발언처럼 미국이 마치 구세주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예수 믿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주어진 말씀인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추구하는 신앙, 심사숙고의 신앙이어야 한다.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촉구한 예레미야
여호야김 4년(주전 605년) 느부갓네살이 애굽왕 느고를 갈그미스에서 쳐부순 이래(렘 46:2), 유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전역의 패권은 바벨론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전까지 그 백성들을 향해 돌아오라 외치던(렘 3:1-4:4) 예레미야는 여호야김 4년 이래 유다가 바벨론에 패망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였다(렘25:1-11). 예레미야에 따르면 시드기야의 유다가 해야 할 일은 바벨론에 저항하고 국가의 독립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 항복하고 느부갓네살을 섬기는 것이었다(렘 27:12-15).
이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다의 패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한 것의 결과이다. 예레미야는 그의 사역 내내 하나님의 명령을 증거하며 여호와께 돌아오라 외쳤다.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미슈파트”)와 공의(“쩨다카”)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렘 4:1-2)
예레미야가 촉구한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며, 다윗의 이름으로 일어날 의로운 가지의 통치를 나타내기도 한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추상적인 표현의 실제적인 의미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임을 알 수 있다. ‘시드기야’는 히브리어식 발음으로 “찌드키야후” 즉, ‘야훼는 나의 공의’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이나 선언은 의미가 없다. 야훼를 신뢰하고 그 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그럴 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다윗의 의로운 가지는 ‘여호와 우리의 공의’ 즉, “아도나이 찌드케누”라 불리게 된다. 이 이름은 시드기야의 이름에 대한 풍자가 반영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야훼를 나와 우리의 공의라 고백하는 것은 야훼를 따르는 정의와 공의의 삶에 기반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드기야에게 바벨론에 순순히 항복할 것을 촉구(렘 21:8-10)한 예레미야는 곧바로 정의를 행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다.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미슈파트”)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렘 21:11-12)
멸망은 확정되었다. 그러나 언제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돌아간다는 것은 정의 즉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었던 시절, 그야말로 멸망을 목전에 둔 시점에 뜻밖에 노예 해방을 단행하였다(렘 34:8-10). 적어도 예레미야 본문상으로 노예 해방에 대한 아무런 명시적인 명령이나 촉구가 없었는데도 시드기야와 귀족들은 이 일을 단행하였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의 조치를 가리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라 칭하시며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을 행한 것이라 평가하신다(렘 34:15).
멸망은 확정된 것이로되, 그것이 지금 당장의 현실을 제약할 그 무엇이지 않다. 내일 예루살렘이 망한다 해도 오늘 마땅히 해야 할 일, 노예를 자유케 하는 일은 시행되어야 한다. 시드기야의 행동은 참으로 예레미야가 줄기차게 증거한 정의와 공의의 삶에 부합된다. 그것이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예배를 더 드리는 것이지 않고, 성전에 또 찾아가는 것이지 않고, 아침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압제하는 자의 손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건지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고 국가의 재건을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그러한 돌이킴이 없다면 시드기야가 추구하는 바벨론으로부터의 독립은 그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탐욕을 민족주의적 가치로 위장한 것일 따름이다. 예레미야의 멸망 예언에 비해,하나냐 같은 예언자는 줄기차게 민족의 회복과 바벨론으로부터의 놓여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였다(렘 28:2-4,10-12).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한다는 것이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냐는 민족의 죄악과 하나님을 떠난 현실에 대해 아무런 고려가 없이, 그저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복과 구원, 은혜로운 미래를 전할 따름이다. 지난 잘못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반성이 없는, 영광스러운 민족의 앞날에 대한 예언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든 없든 무의미한 탐욕의 소산일 뿐이다.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올바른 반성(렘 28:7-9)이 결정적이다. 예루살렘이 망하기 전까지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통치 내내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예루살렘이 망하자 자유의 몸이 되었다(렘39:11-14). 다윗의 후예가 통치하는 동안 땅 없는 가난한 이들이 바벨론이 정복하게 되자 땅을 얻게 되었다(렘 39:10). 나라보다 다윗의 후예보다 훨씬 본질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각 사람들이 마땅히 누리게 되는 자유와 해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의미할 것이다.
제국주의 패권국가의 신하로 살아간 다니엘
예레미야와 비슷한 모습을 다니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호야김 3년에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다니엘은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킨 바벨론의 관리로 살아가게 된다. 다니엘서 9장은 포로로 끌려 온 민족의 현실을 두고 민족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여기며 회개하는 다니엘의 기도를 보여준다. 그의 기도는 현재 민족의 참담함이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명백하게 고백한다. 멸망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악으로 인한 것이라 풀이하는 경향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구약 문헌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역사 반성이다. 이러한 예들은 에스라(스 9:6-15)와 느헤미야(느 9:5-38)를 비롯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다니엘 역시 여호와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한 말씀과 율법을 이스라엘이 행치 않았음을 고백한다(단9:6-10). 스가랴도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한 말씀을 듣지 않았던 과거를 고발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미슈파트”)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슥 7:9-12)
스가랴가 외친 점은 다니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느부갓네살을 섬기는 바벨론의 관리였지만, 느부갓네살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 역시 담대하게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 왕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충고하고 있는데 아래의 말씀은 포로기 이전 구약 예언자들과 포로기 이후 스가랴가 외친 말씀의 본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아람어 “찌드카”=히브리어 ”쩨다카”)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단 4:27)
이방왕을 향해 다니엘은 구약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공의를 적용하고 있으며, 그 공의는 ‘가난한 자 긍휼히 여기기’로 구체화된다. 놀라운 것은 이방왕의 가난한 자 긍휼히 여기기를 죄사함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다니엘이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진리를 지극히 이방적 현실로 풀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벨론에 대한 이해: 시편 137편
다니엘의 삶이 바벨론에 대한 충성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위에서 다루었거니와 구약 성경이 바벨론에 대해 일관되게 표현하는 바는 훨씬 강력하다. 특히 이것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것이 바벨론의 강변에서 유다 포로들이 불렀던 시편 137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멸망할 땅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37:8-9)
이러한 기도는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에 대한 보복을 말하는 것이지 않다.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에 담긴 것은 강대국 바벨론이 약소국인 유다를 어떻게 짓밟았으며, 바벨론에 끌려온 유다 백성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고발이다. 바벨론에 멸망하는 것이 유다에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었고, 이스라엘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그것이 바벨론이 유다에 저지른 짓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것이지 않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낯선 땅을 살아가면서 바벨론의 멸망을 기원하고 갈망한다. 그 점에서 이러한 표현은 원수를 향한 대적과 저주의 기도에 닿아 있다.
저주의 기도는 기본적으로 철저하게 비폭력적인 기도이다. 137편의 표현 역시 철저하게 비폭력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말을 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사람을 짓밟는 세력에 대해 심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도리어 축복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보고 죄책감까지 느끼게 만들곤 한다. 실제로 폭력을 휘두르며 약자를 짓밟는 이들이 바벨론이니, 그들을 향해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라.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힘이 있는 자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힘 없는 포로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구하는 기도뿐이다.
대적에 대한 저주의 말과 기도는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대적과 저주임도 명심해야 한다. 약자를 짓밟는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히브리 노예를 건져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약자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모든 지배 세력들에 대한 대적과 거부와 같은 선상에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저주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을 죄로 생각하지 않는 사고에 기인할 수 있다. 그들의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 표현할 때, 우리는 자칫 그들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행동조차 하나님의 뜻인 양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뜻에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라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야만적 지배를 당연시하는 노예 근성이 몸에 배어 있는 데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죄악과는 별개로, 약소민족에 대한 바벨론의 처사는 명백한 악이며 불의이다. 그리고 모든 불의는 하나님께 대한 대적이고 거역이며 불순종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의 기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과 불순종에 대한 심판이며 단호한 거부라고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바벨론에 대한 시편 기자의 표현은 시편 기자의 참담함의 원인을 무조건 내부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대적에게서 찾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비참하고 참담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종종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곤 한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스스로의 반성과 성찰을 위해 꼭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의 어떤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오늘과 같은 고통을 가져왔다고 여기며 자책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처한 이들일수록 세상에서 뒤쳐지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신을 보며 자신이 못난 탓에 이러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점에서도, 반성과 자신 탓하는 자책은 구별되어야 함을 볼 수 있다. 시편 기자가 바벨론에 관해 사용하고 있는 표현은 바벨론에 대한 명백한 적대감을 반영한다. 이것은 까닭 없는 저주가 아니라, 바벨론이 저질렀던 짓에 대해 그들도 동일한 보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 점에서 시편 기자는 바벨론이라는 대적 세력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 표현은 모든 문제가 나 자신의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나 바깥에 있는 대적 세력에서 기인한 것이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도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단순히 그들이 게으르고 부족한 탓 때문이 아니라, 그들 바깥에 있는 잘못되고 불의한 사회경제적 틀로 인한 부분도 크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신앙 공동체는 모든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만 여기기 쉽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도 바깥이 아니라 오직 내부로만 시선을 돌리게 만들기도 한다. 시편의 기도와 저주의 기도는 우리 바깥에 있는 대적 세력을 명확히 인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일제시대와 하나님의 뜻
문창극씨의 발언은 일제 시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의 시간을 풀이한다. 이러한 풀이 자체야 문제 될 것이 없을 수 있다. 정작 문제는 그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반성할 것이며 어떻게 돌이킬 것인가에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의 발언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그저 조선 민족의 게으름, 일하기 싫어함, 더럽고 지저분함에 대한 지적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역사를 반성한 것이 아니다. 조선의 역사에 대한 지극히 천박한 이해를 반영할 뿐, 선교사들의 저술에 담긴 일방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반복한 사대주의적 사고일 뿐이다. 오히려 그의 발언에 있던 바, 구한말 양반 세력들의 게으름과 무능함에 대한 지적이 의미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과거에 대한 반성은 현재에 기득권 세력들이 다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유감스럽다.
개인의 이런 저런 삶의 고초나 곤경을 하나님의 뜻으로 풀이하는 것은 어느새 우리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의 독특한 언어 습관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표현을 사용하면 마치 기독교적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특히 정치인이나 연예인 같이 유명한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든지 하나님의 뜻 같은 말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네 교회는 내용의 타당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치 그것이 우리네 신앙을 고백한 것으로 여기곤 해왔다. 그러나 고백이 기독교 신앙을 입증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참으로 보여주는 것은 고백에 기반한 기독교적 가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빛과 소금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의 고백과 동의어이지 않다는 것이 산상수훈의 명료한 결론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않는다는 비유 역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증거하는 가치에 기반한 행실과 삶을 가리키는 것이지, 입술의 고백이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적 가치에 대해 아무 내용이 없는 채 우리 역사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고 말하면 기독교적인 것인가? 우리가 겪은 식민지 시절을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특징을 보여주거나 담보하지 못한다. 여기에는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인지 아무 것도 말하는 것이 없다. 예레미야와 다니엘 본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정의와 공의’에 연관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 점에서 문창극씨의 발언이나 그의 발언을 지지하는 교계 인사들의 소리에 크게 실망하게 되는 것은, 정작 불의한 독재 정권이 판을 치던 시절 이러한 교계 인사들이 그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반대도 없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특히 문창극씨의 발언이 실제로는‘부패관리의 수탈’을 가리킨다며 그의 발언을 옹호한 샬롬나비라는 단체의 성명서는 정권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연관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말뿐이라는 인상을 줄 수 밖에 없다. 정작 그 끔찍하던 군사 독재 정권이 횡포를 부리던 힘겹던 시대에는 정의에 대해 관심 갖지 않은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던 이들이 일제 시대를 가리켜 하나님의 뜻 운운하면 빛과 소금은 커녕 악취나는 신앙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러한 성명서를 발표한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이 제시하는 “샬롬”은 ‘정의’에 대한 이해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참된 샬롬이지 않으며,정의를 외치지 않는 이들이 “나비” 즉 ‘예언자’일 수 없고,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도 찾아보기 어렵다. 여기에는 그 시절에 불의한 정권을 향해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목사들이 이제 와서 새삼 ‘정의’를 외치는 이들을 향해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할 것이다.
예레미야나 다니엘을 가리켜 그저 제국주의에 봉사한 관리로 여기는 것은 부당하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멸망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때문이라 여겼다. 다니엘을 오늘날 적용한다는 것은 우리 역사 역시 죄악의 역사임을 고백하고 기억하는 데 있다. 과거를 미화시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떠난 역사로 풀이하는 데 있다.그리고 그 율법을 떠남을 ‘하나님을 숭배하지 않았다’식으로 종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올바른 재판을 하지 않았으며 압제 가득한 현실을 방치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난 날을 올바르게 반성할 때 우리 역사에 가득했던 지배 세력들의 수탈과 착취에 주목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억압과 착취의 현실을 나 몰라라 하고 각자의 안일만을 도모했던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돌아봄을 오늘에 적용할 때, 이승만 시절과 박정희 시절을 그저 좋았던 시절로 여기는 교계 일각의 이해는 도무지 성경과 거리가 멀다는 점도 발견하게 된다.
장기 독재를 시도한 이승만의 시대나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박정희 독재 시절이 우리 민족을 책망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난 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리와 정의와 공의로 돌아가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사편찬위원장인 유영익 같은 이들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를 후진국에서 필요한 것이었다고 여기는 것은 역사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돌아봄도 찾아볼 수 없는 노예근성에 기반한 이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힘으로 지배하고 힘으로 군림하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반성한 것이 아니다. 질서와 통제가 모자란 것이 아니다. 심지어 박정희 시대를 하나님께서 교회 성장을 위해 주신 시대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이것은 박정희 독재와 결탁한 몇몇 기독교 세력들이 스스로의 정당성을 위해 만들어 낸 궤변이거니와, 그 시대에 변화가 있었다면 독재정권 때문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눈물이 교회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덧 우리네 교회는 꿩 잡는 것이 매가 되었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지배적인 집단이 되어 버렸다. 그 점에서 식민지 사관의 영향력은 여전히 우리네 안에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들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조선에 들어오게 된 문물을 통해 조선이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이 망한 것은 힘이 약해서였다고 여기고, 부국강병이 길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이 쇄국정책을 펴서 서양 문물에 뒤쳐진 까닭에 조선의 패망이 있었다 여긴다. 그러나 조선의 쇄국 정책의 근본은 조선 지배층의 기득권 수호가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수의 이익 수호를 위해 문물과 교류를 차단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 위주의 사관은 철저하게 기득권 중심이다.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정권과 정부와 나라라면 망해야 한다. 그것이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진리이다.
힘겨웠던 일제 시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에 힘썼던 이회영선생 같은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일제를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는 것에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어떻게 돌이켜야 할 것인지에 대한 반성과 숙고가 필수적이다. 나라가 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다. 심판이라면 고치고 바로잡으라. 예레미야는 멸망을 외치며 정의와 공의를 전했다. 다니엘 역시 바벨론 땅에 살면서 바벨론이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선포하였고, 이방왕을 향해 공의의 통치를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정말 죄로 인한 심판인 줄 안다면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식민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전의 불의를 고치고 기득권의 이익 도모를 철폐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왜 한국 개신교의 신앙언어는 공공성과 충돌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증거된 복음, 사도적 신앙고백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그리고 역사상 그리스도교 교회가 진술하는 신앙의 확신들은 신앙 자체로부터 오는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공적 진리(public truth)의 타당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2천년 교회의 역사속에 존재했던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성경적 가르침과 교리적 진술, 그리고 신앙고백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언어의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동시대의 공적 세계안에서 보편성과 신빙성과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나름의 시대적합한 신앙논리와 변증적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을 향해 평화와 기쁨을 주는 것이며, 열방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창조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주님이라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을 향해 들려주고, 증언하는 신앙언어 역시 게토안에 갇혀 속좁은 배타성과 고집스러움에 매몰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음논리, 즉 신앙언어는 세상 한 복판에서 모든 이들의 공명(共鳴)을 불러 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유벽한 곳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의 광장에서 불리어져야 하고, 골목에서만이 아니라 시장에서도 들려져야 하고, 문명과 문화의 중심에서 고백되어져야 한다. 결국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의 문제이며, 공적 신앙(public faith)의 문제이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공적 진리로서 기독교 신앙’에 관한 우리의 확신을 말한다.
현재의 한국개신교의 위기는 공공성의 위기이다. 그 가운데 심각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 즉 ‘공적 신앙’(public faith)의 부재와 결핍이 가져온 위기라고 진단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 개신교가 직면한 위기의 두 축은 도덕성의 상실과 공공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추락의 지표는 천주교의 상승 지표와 대비되는데, 개신교의 추락의 주요 원인인 도덕적 부패는 그 증상과 현상이 두드러지게 관찰되어 문제를 파악하는 용이한 반면, 공공성 문제는 아직 그 원인, 증상, 치유책이 잘 포착되지 않고 있다.
I. 개신교의 공공성 위기의 원인으로서 신앙언어
1. 개신교의 위기로서 공공성: 왜 공공성이 문제인가?
최근의 한국교회에 나타난 눈에 띄는 현상은 한국교회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공론장(公論場)에 대두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 문창극 발언은 사적인 차원의 신앙발언에 그치지 않고 전국민적 논쟁거리가 되는가? 정교분리가 원리적으로 규정된 우리 사회에서, 더구나 기독교국가도 아니며, 신정정치적(theocratic)사회도 아니며, 세속화적 사회로 진입한 현대사회에서 왜 ‘교회현상’이 우리 문화의 한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한 장로의 신앙발언은 역사관과 연결하여 논란이 증폭되는가?
그것은 단지 미디어 환경의 변화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한국개신교의 공론장으로의 부상은 먼저 한국교회의 사회적 위상변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더 이상 사회내의 소수종파가 아니라 주류집단이 되었고, 여론주도층으로 성장하였다. 더 이상 한국개신교는 사회내의 인적, 물리적 규모와 영향력에 있어서 핍박받는 소외집단이거나 주변부 집단이 아니라, 사회의 흐름을 선도해 나갈 책임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신천지나 구원파처럼 자기 방어적이며, 소종파적 존재/행위방식에 머물지 말 것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성이란 성장기 이후의 개신교가 우리 사회안에서 그에 합당한 종교적 기능과 역할을 보여 달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공공성이란 우리 사회의 개신교를 향한 합의적 요청개념일 수 있는데, 그것은 한국교회가 본래 종교가 당연하게 드러내 주어야 할 도덕적, 정신적, 가치관적 차원의 걸맞는 존재감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공성은 한국교회의 위기의 한 축인 도덕성의 몰락에 대한 해답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공공성 문제에서 더 중요한 것은 현존하는 사회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타당성에 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오늘의 개신교가 사회속에서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신앙행태(예를 들어 땅밟기, 저주기도, 무례한 전도방식), 신앙적 사고들, 그리고 신앙적 어법(또는 신앙언어: ‘세월호 사건은 하나님의 뜻이다’)이 인간사회의 공동선과 일치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공공성이란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적합성, 즉 사회속에서 기독교적 신앙이 보편성과 적합성, 그리고 공통점을 추구하는데 있다.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이나 신앙의 본래성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흔히 교회의 정체성에 집중할 때, “교회는 교회일 뿐, 세상과 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표현된다), 세상속에 있는 한 교회가 세상과 공통성을 의식하면서 시민적 양식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문창극 사태는 한국개신교의 공공성의 결핍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 사건이다.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 역사관이 격렬한 반응을 일으킨 것은 개신교적 신앙언어가 공공성과 충돌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왜 신앙언어에 주목해야 하는가?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사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하는 자리에서 신앙언어를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오늘의 사회는 세속적이면서, 종교적이다. 종교와 세속이 분리되지 않는다.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도 차단막이 없으므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상호 교차하고 있고, 상호 교환적이 되고 있다. 더구나 현대사회의 특성상 SNS을 통한 매체적인 언어전달의 신속성과 광범위함이 존재하고 있어, 사적 언어를 공적 담론으로, 종교적 신앙언어를 세속광장으로 신속하게 옮겨 오게 한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특성으로 한 개인의 신앙, 더구나 그것이 개인의 사적인 신앙고백적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파급력은 엄청나다. 그것이 교회적 신앙언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순전히 사적인 신앙적 신념과 확신에 근거한 발언이라 할지라도 비기독교인들과 기독교 밖의 세계, 즉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손쉽게 유포되어 공론화가 일어난다.한국사회가 비록 그리스도교세계도 아니며, 국가교회적 전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회구조는 종교와 세속의 구분이 없으므로, 공론장에서 증폭되는 신앙발언을 기독교적 특수성이라는 보호막으로 방어하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종교화된 세속사회에서 특정한 신앙언어는 그 자체가 복음선포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뜻이며, 주님의 축복의 숨은 뜻이 담겨있다’는 신앙언어는 주일예배 시간에 교회의 설교자에게 들을 수 있는 복음 메시지이지만, 때로는 교회당 밖의 수많은 익명의 청중들에게도 전달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러한 신앙언어는 개신교의 상징 메시지가 될 수 있으며, 복음전도와 교회에 대한 신뢰도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종교와 세속의 담이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 종교적인 메시지가 세속의 담론의 장으로 유입되고 있고, 사적인 신앙언어가 공적 매체를 통해 노마드적으로 넘나들고 있는 오늘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왜 최근 개신교의 신앙언어(혹은 개신교 문제)가 공론장에서 자주 출몰하는지 파악이 가능해 진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언어가 사회 일반에서 타당하게 들려지고 있는지 예민한 관찰이 필요하다.
II. 왜 개신교의 신앙언어는 공공성과 충돌하는가?
1. 한국개신교가 공공성과 충돌하는 이유는 사적인 신앙언어를 신앙의 특수성이라는 울타리안에 가두어 버리고, 사적인 신앙고백적 언어가 공론장에서 공적 담론으로 연결된다는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사적 신앙고백(신앙언어)과 공공의 영역이라는 두 영역에 실존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개신교의 위기는 신앙의 특수성을 고집하면서 기독교신앙의 공공성으로 이행되지 않을 때 초래하는 위기이다.
‘이럴 바엔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생활하고 싶다’. 이런 장탄식은 단지 교회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 현상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언어가 공론의 장에서 어이없는 논리로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두 사람의 넌센스한 신앙발언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개신교 교회와 개신교가 선포하는 복음전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발언은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이 내 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사회통념상 창피한 종교, 막장 종교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왜 교회의 신앙언어는 공론의 장에서 그렇게도 절망적일까? “일제 식민통치는 우리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식민시대의 고난은 일본의 근대문물을 수용하는 통로가 되어 민족 부국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교회의 장로가 신앙집회에서 천연스럽게 던진 이 발언은 일제의 폭압적 강점을 하나님의 섭리적 축복으로 둔갑시켜버렸다. 그런데 교회의 설교와 간증에서 이런 섭리적 언어는 일상적이다. 교회의 내부자 언어에서 ‘세월호 사건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 인도하심이요, 은혜요, 축복의 의미가 있으니 감사하라는 권면이 주된 신앙적 언어가 된다, 이런 언어들은 신앙 내부자 언어로 그들의 신학적 공간에서는 늘상 통용되는 일상의 신앙언어이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의 이런 식의 사고방식과 언어사용이 심각한 문제가 된다. “주님은 죄인을 용서하셨으니 역사적 책임자 처벌이나 진상규명이나 누굴 탓하지 말고, 증오하지 말고 다 용서하자”, “이 고난은 주님의 축복이었다”. 이와 같은 사고와 논리, 그리고 그런 류의 신앙어법은 비신자들, 교회 밖의 공공의 영역, 그러니까 공론장에서는 우수꽝스럽고, 우매하기도 하고, 도무지 납득불가한 언어행태가 되고 있다.
문창극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이를 옹호하는 샬롬나비 등의 보수권에서는 그 발언이 국무총리로서 공적 영역에서 행한 발언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그리고 장로 문창극으로서 교회의 신앙집회에서 행해진 개인적인 신앙의 확신이고 고백이므로 문제삼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런가?
첫째, 문창극의 발언은 사적 신앙언어라는 이름으로 던져진 공적 언어이다.
엄밀하게 말해 문창극의 발언은 단지 사사로운 신앙간증이 아니었다. 그가 행했던 특강은 신앙인 개인이 겪은 신비체험이나 환상이나 기적 체험과 같은 신앙인 개인적 차원에서 겪은 종교적 경험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강연은 민족사의 현실에 대한 기독교적 역사해석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발언은 결코 개인적인 신앙경험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의 강연은 도리어 그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일제식민역사를 찬양하면서 결국은 반공주의 기독교로 연결지을 수 있는 이념적인 편향성을 공교회라는 공간에서 신앙언어로 표출한 것이었다.
둘째, 교회의 사적 신앙언어가 공론장에서 증폭될 경우 교회는 자신들의 공적 담론을 사적 신앙의 자유권 보호라는 위장막안으로 신속히 도피한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사의 역사경험을 사사로운 신앙주관으로 굴절된 해석을 가한 것인데, 그럼에도 그것을 사사로운 신앙고백의 차원으로 축소할 수 없는 것이다.
빈번하게 문창극적 논리를 방어하는 그룹에서는 사적 신앙의 보호와 공적 성격의 신앙발언의 교차로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사유화된 자기 신념의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 그들은 문창극이 지극히 사적인 신앙의 신념에 따라 발언한 것이라고 변호하지만, 그러한 역사관은 수구적이며, 기득권 옹호적인 역사관을 명백하게 표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유화된 신앙언어의 형식을 빌린 것일 뿐 사실 그 역사관 자체는 공적 차원으로 확산시킬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발언된 것이다.
우리는 공공성 논의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의 개인적인 차원과 사사로운 것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앞에서 자아의 실존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개인적(individual)이지만, 신앙이 사적 종교의 도피처이거나 사사로운 욕망의 투영물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적인(private) 것은 아니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교차적으로 공존하는 현대사회.
종교인의 신앙언어는 사적 언어만이 아니라 공적 언어가 된다.
한국개신교의 신앙언어는 신앙의 개인 실존의 자기고백적 차원과 사회속의 그리스도인됨과 교회됨으로서 공공성사이, 즉 고백적 신앙언어와 공적 영역에서의 신앙적 증언사이를 구분하기도 하고, 연결하기도 해야 하는데,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만유통치적 삶의 원리’와 ‘두 왕국적 영역구분’을 의도적으로 동시에 사고해야 한다.
최근의 개신교에 있어서 사적인 신앙언어가 공공성과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는 이명박의 서울시장 재임시 행했던 신앙고백적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건은 사적인 신앙고백이 왜 공공의 차원에서 공적 담론으로 논란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명박 전서울시장은 당시 어느 기독교 집회에서“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합니다”라는 신앙고백적 발언을 했다가 엄청난 논란이 일어났다. 그 사례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고백적 발언이 서울시장이라는 공적 직분자의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문창극의 발언 역시 그러한 사례의 일종이다.
그렇다면 좌편향적 민족주의적 역사관이 보호받아야 하는 것처럼, 문창극의 우편향적 역사관도 역사해석의 다양성을 보호받아야 한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은 다원주의나 다양성의 이름아래 정당화될 수 없다. 적어도 일제식민찬탈을 찬양하는 것은 평화, 정의, 인간애 등의 인간사회가 추구하는 공동선에 위배된다. 그것은 마치 히틀러의 역사를 역사해석에 대한 다양성이라는 명분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역사관의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전혀 ‘틀린’ 역사관이다. 이 역사관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행동과 이스라엘 사회에서 수립될 토라의 법,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나라가 지시하는 방향과 내용, 세계구원에서 실현될 하나님의 우주적 정의의 실현이라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공유된 기독교적 정신에 비추어 볼 때 그렇거니와 인간속에 심겨진 양심과 인류사회가 지향하는 공동선의 측면에서 그렇다.
2. 개신교 신앙이 우리 사회에서 ‘불편한 종교’ 혹은 ‘무례한 종교’로 비춰진 것은 기독교 신앙 본래의 순수성, 본질적 가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개신교 신앙이 교회 밖의 사람과 너무 동떨어진 언어구조, 사유체계, 가치지향점을 너무 자주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인들의 신앙적 사고나 언어논법은 대부분 일반적 통념과는 거리가 먼 사고의 틀을 보여주면서, 그것들은 단지 우수꽝스럽고, 넌센스하며,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약간 ‘이상한’ 사고를 지닌 정도를 넘어서서 대단히 무례한 자들의 언어요, 폭력적인 언어가 되어버렸다.
예컨대 종교인 납세문제가 이슈로 등장했을 때, 목회자는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에서의 목회는 돈벌이를 수단으로 하는 직업군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에 따른 봉사직이므로 납세할 의무가 없다고 반론을 폈지만, 사실 이런 논리에 수긍하는 흐름은 아니었다. 편리한 방어논리, 즉 지극히 교회 내부자 논리에 근거한 신앙언어는 일반인들이 느끼기에 상당히 넌센스한 것이어서 개신교 집단이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복리와 평균가치, 그리고 사회를 선도하려는 공동의 책임의식을 전혀 갖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의 종교집단의 권익보호에 급급한 사익집단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교회 헌금 횡령을 사회법정에서 “하나님의 돈을 목사가 마음대로 사용하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는 식의 발언이나 사회법을 어기고도 마치 교회나 목회자는 사회법을 초월하는 상위의 법에 있는 것처럼 발언하는 것이나, 심지어 교회 여성도에 대한 무례한 발언 등은 사적 종교로서 기독교의 단면을 여실하게 드러내 주는 표현들이다. 문제는 소박한 수준의 사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물론 순진함으로 무장된 강한 주관적 성향의 사적 신앙언어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어느 정도 권력화된 형태의 사적 신앙언어는 무례함의 언어적 표현과 폭력적인 언어 표현을 서슴치 않는다. “누구도 주의 종을 판단하거나 거역할 수 없다” 등등, 교회안에서 목회자의 독점적 지위를 절대시하는 것은 그런 사례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의 신앙언어들이 공공성과 보편 타당성으로부터 고립되어 동시대의 사고방식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인 것과 비기독교적인 것,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교회와 사회사이의 공동의 기반들, 즉 공유점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의 신앙언어가 너무 빈번하게 비그리스도인 세계를 향해 배타적이며, 무례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달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독교적인 특수성(particularity)보다 일반성과 공통성(commonness)을 함양할 필요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그리스도인으로 자기 정체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시민의 일원이자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사회의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면서, 사회적 자산, 정보, 지식, 제도, 기관들과 소통하고 연루되어 실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공유적 언어보다 비공유적 신앙언어를 더 강렬하게 구사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예를 들어 교회는 구원기관이고, 세상은 멸망받을 비구원의 대상이라는 구획은 세상속에 실존하는 교회가 드러내는 ‘비공유적 신앙언어’에 속한다. 이것은 교회와 세상이 갖는 공동의 기반을 훼손하는 논리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논리들이 어느 순간 세상을 향해 배타적이고, 공격성을 띠는 형태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적 신앙언어도 공공성과 보편적 사고의 관점에서 재관찰되어야 한다. 기독교적 섭리신앙은 불의한 인간, 부도덕한 방식의 사건을 동원할 수 있지만, 그것을 빌미삼아 명백히 드러나는 도덕적 책임을 모면하는 면피논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뜻, 섭리, 주님의 은혜라는 교회의 언어는 이성, 보편성과 마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일제식민통치는 하나님의 뜻이며, 결국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위한 섭리적 방편이었다”는 교회적 신앙언어라는 것이 사실은 일제의 식민역사의 어두운 역사를 찬양하는 군국주의와 신민사관의 이념의 포로가 된 신앙언어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이제 개신교 신앙언어는 공공성의 맥락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 교회안과 교회 밖, 종교적 언어와 세속적 언어사이의 공동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공공성을 함양하는 신앙구조를 위해 다음과 같은 신학적 자산들을 활용할 수 있다.
- 일반은총에 근거한 공공성: 일반은총은 본래 ‘일반적인 것’(general)이 아니라 ‘공통적인’ 은총(common grace)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신자와 불신자, 교회와 세상이 공유하는 은총이며,두 영역에서 발견되는 은총이다.
성육신의 신비: 신적 현실과 인간적 현실이 분리됨이나 혼합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안에 결합하는다는 성육신의 신비는 ‘공공성의 성육신적 기반’을 제공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적 신비만이 아니라 인간적 현실안에서 만나게 된다. 인간적 현실없이 그리스도적인 것은 만날 수 없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구원과 창조, 초월성과 내재성, 영혼과 육체라는 전인적 관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제자직의 삶을 살 뿐 아니라 세상안에서 시민직으로 살아간다. 신앙과 이성, 그리스도적인 영역과 세속적 영역에 근거한 두 왕국의 원리는 제자직의 비범성과 시민직의 일반성을 양립적으로 살아간다.
3. 한국개신교의 공공성과의 충돌은 전환기 한국교회에게 요청되는 종교의 합리성과 타당성 결여에 기인한다. 사회의 변동기에 직면한 개신교가 주술신앙적 형태로부터 합리적인 설득에 기초한 신앙으로 전환되지 않을 때 충돌이 일어난다. ‘하나님 뜻’ 발언이 격론이 벌어진 것은 발생된 사건에 대한 인과론적 해석이 아닌 극단적인 섭리론적 해석에 기인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주술종교적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근대화로 이동하는 사회적 변동기에 불안정한 삶에 안정과 내면적 질서를 부여하는 삶의 원리와 정신적 의지처가 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경제성장을 달성한 한국백성들에게는 더 이상 주술신앙적 기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80년대까지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 신앙언어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라는 조용기식의 신앙논리였다. ‘불가능은 없다’는 믿음의 언어는 근대화의 성장지향의 이념이 절대화되던 시기에는 한국국민에게 일종의 ‘유사(類似) 희망의 신학’의 역할을 발휘하였으나 근대적인 것에 대한 성찰, 전통에 대한 회귀, 무분별한 성장과 풍요가 초래한 인간성의 파괴 등에 대한 반성은 개신교에 대한, 그리고 신앙의 의미추구가 더 근본적인 질문이 되었다. 이를 요약하다면 한국개신교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타계적이며, 역사초월적 종교로부터 세속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역사내재적이며, 현실의 삶에서의 유물론적이며 물화(物化)의 종교로 변모하였으며, 이러한 전환기의 한국개신교는 ‘축복형 종교’로부터 ‘의미 추구형 종교’로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점차적으로 개천에서 벼락부자로 신분상승이 가능한 우발적 축복을 기대하기 힘든 사회로 재편되어 가고 있다. 막연한 사회-경제적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고, 급속한 사회구조의 변동을 꿈꾸기에는 어렵게 된 지금에는 ‘바라볼 수 없는 중에도 바라봄’으로 기적을 유발하는 ‘불합리함의 신앙’유형은 점차 소멸되고 있고, 반대로 상식적 사고를 존중하고, 합리적 과정을 중시하며, 벼락같은 축복이 아닌 성실한 노동을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건강한 삶이라고 간주하면서, 실재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시민적 양식을 갖춘 ‘시민교양의 기독교’의 출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한국개신교의 대중적 강단 저변에는 합리와 타당성을 중시하며, 이해를 추국하는 신앙은 연약한 믿음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어느덧 개신교 신앙인들의 의식 저변에는 바로 그러한 신앙 유형이야말로 ‘불량한 믿음’으로 인식되는 시대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주술신앙의 효능은 끝났으며, 이성신앙과 도덕신앙이 요청되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몽적 신앙과 초월적 신앙은 양자 택일의 성격은 아니다.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초월성을 붙들 수 있으며, 반이성적이지는 않으면서 이성적 합리를 존중하고, 이성 너머의 신앙의 영역에 대한절대적 신뢰와 복종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좀 더 보충적으로 질문한다면, 왜 한국개신교의 신앙언어는 공공성과 충돌하는가?
그동안 한국교회에서 행해진 강단설교와 권면은 대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비약’과 ‘역설’의 신앙언어를 관행적으로 즐겨 사용하였다. 이 신앙언어는 단지 믿음에 대한 내적 태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삶의 방식에서 합리와 타당성을 무시하게 하도록 유도한 논리적 근거로 작용하여 비약과 역설의 삶의 방식을 정당화하게 한 내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것은 가톨릭적 신앙언어가 자연과 은총,교회와 사회, 그리스도인과 시민적 삶, 창조와 구원, 초월적 신적 신비와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현실을 종합하고 상보적으로 연결해 주는 신학적 이음새가 견고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과는 반대로 개신교 신앙논리에 이 양자사이의 격차와 괴리가 심각한데서 원인이 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저주시는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부인할 수 없는 교리이지만), 죄인된 자에게 더 부어주시는 은혜, 노력하지 않은 자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길, 등등의 신앙논리와 간증들은 결국 개신교인들의 신앙의식속에 노력없이 도달되는 비정상적인 축복을 동경하게 하고 일상의 생활에서 정직한 삶을 경원시하고 벼락같이 임하는 돌발적인 축복의 사건은 일상생활의 건강한 삶을 밀어내 버리게 하였다.
이러한 역설과 비약의 신앙언어 혹은 신앙의식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객관적 파악이나 진단을 어렵게 함으로써 정상적인 가치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버린다. 세월호 참사를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게 들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호이거나 뜻이며, 학생들의 죽음은 한국교회를 위해 의미가 있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일제식민강점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는 것이며, 우리 민족을 잘되게 하기 위한 섭리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역설의 신앙논법이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섭리적 해석은 역사 이해를 접근하는 객관적인 사고, 그러니까 공공성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신앙집단 내부에서 행해지고 들려진 이 신앙논법이 비그리스도인들이 들을 때, 이것이 얼마나 황망한 사고라고 하겠는가, 그야말로 기독교인들과 그곳에서 행해지는 설교, 가르침은 넌센스를 남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일반인의 보편적이고 상식적 사고와 전혀 다른 것이어서 사회적 인식은 불가능하게 된다. 결국 비약과 역설의 신앙언어는 공공성과 공적 신앙의 장애물리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무리하면서
한국개신교의 신앙언어는 공공의 장, 특히 공론장에서 격렬한 충돌을 야기시켜 왔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언어는 개신교의 존립과 우리 사회에서의 신뢰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한국개신교는 자신의 확고한 신앙의 신념과 언어표현이 사회 일반에서 적합성과 타당성을 지니는지, 그리고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 개신교는 점차 주술적이며 비합리적 축복종교의 기능은 희박해 지면서 사회의 공동선과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종교로 자리매김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신교의 믿음의 체계와 논리는 그 자신의 본래적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속에 소통하는 신앙 메시지를 제시하면서 기독교 교회와 발전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사적 신앙고백과 신앙언어의 공공성의 두영역에 실존하는 한국개신교
합리, 상식, 절차적 투명성의 문제로서 공공성
신앙영역의 사회 일반에서의 적합성과 공통성, 공동선의 문제로서 공공성
개신교의 표현은 점차 의례적 예배, 주술적, 무당행위로서 축복종교의 기능은 희박해 지면서 반대로 사회의 공동선, 보편적 가치, 중시하는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사회일반이 기대하는 개신교의 기대이것에 대한 개신교의 의식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