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수 장로 고신대 前사무처장 부평교회

시작하면서 곽삼찬 목사께서 지난 8월 9(오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목사님은 마산동광교회에서 32년간 목회를 하셨으며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과 총회장을 역임했다목사님의 호적상 존함은 곽균성이다어린 시절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고 이름을 삼찬으로 바꾼 것으로 들었다 

옛말에 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는데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다인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대개는 한 세대가 지나가면 기억에서 사라지지만한 기관의 장이나 중요한 일을 하신 분들의 업적은 길이 남는다당시대의 사건들을 소상히 기록하여 남겨두지 아니하고세월이 지나게 되면 역사(history)는 사장(rotted)되고 만다그런 의미에서 곽목사께서 고려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할 당시의 사건들을 몇 가지 회상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일모(一毛차이 정도의 관점과 사물을 서로 다른 위치와 각도에서 바라보는 인식 차이 때문에 곽목사의 마음을 늘 불편하게 하였고사랑도 미움도칭찬도 질책도 많이 받은 사람이다.그럼에도 나는목사님께서는 우리 학원을 위해 누구보다도 큰 공적을 남기셨음을 세상에 알리고고려학원 역사에 기록해 두어야 된다고 생각한다이것이 목사님을 먼저 보내는 진정한 속마음이다골똘히 생각해보면 목사님과 함께 그린 작품이 우리 학원에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을 더해준다.
 

▲ 2006년 고신역시기념관을 관람하기 위해 곽목사가 고려신학대학원을 방문했을 때 ..

목사님은 큰 거목이셨다. 

목사님은 조금 강인하신 부분이 장점이자 또한 단점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자상한 면이 있으신 반면분명하고 판단력이 매우 빠른 우리교회의 지도자이셨다필자가 생각하기로는 목사님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우리 시대보다는 후대에 더욱 높이 평가되리라고 생각한다대개 사람들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유리불리한 점만을 가지고 개인을 평가하는 경우가 있는데역사가(historian)는 그런 관점에서 글을 쓰면 안 된다. 

필자가 퇴직 후에는 여력도 없었지만목사님을 자주 찾아뵈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면서 부족했던 부분을 반성한다지금 생각해보니 목사님은 우리 고신교회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분이셨음을 확신한다 

목사님은 고려학원에 관선이사가 왔을 당시김 모 관선이사장이 꿈쩍을 하지 못하도록 압박하였고 우리는 솔직히 박수를 쳤다결국은 사임을 받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목사님은 총회장으로 계실 때우리 학원의 실질적인 주인으로서 관선이사장의 모든 직무에 대해서 강력한 제동을 걸었든 일들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관선들의 고의 부도 시에는 수협을 통해 50억 규모의 융자를 받아내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지만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허탈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필자가 주선하여 농협 동삼동 거래은행에서 총회회관을 담보물로 하고교단의 몇 몇 분이 보증을 서고김종익 장로와 함께 40억 융자금을 받아내어 목사님의 애타는 마음을 대신할 수 있었다연장선상에서 관선시대를 열게 된 사유와 원인 이해가 필요하다.

 

고려학원 이사장으로 선임된 과정은 이렇다. 

목사님을 고려학원 이사장으로 세우려고 밀었던 분은 진주의 모 원로이시다모 원로는 고려학원 산하의 산적한 여러 과제들을 고민하다가 이런 일을 추진하는 데는 곽목사가 적격이라는 판단을 하신 것 같다고신 총회가 결정한 신학대학원 이전 장소를 천안 지역으로 예정한 가운데,수도권 지역으로 신대원을 이전 조성해야 하는 새로운 역점 사업을 추진하는 데는 강력한 지도력과 판단력추진력이 있는 이사장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한 분이 아닌 두 분의 경합자를 물리치고 목사님을 이사장으로 세웠던 것이다 

증언자는 진주의 모 원로에게 자기교회 목사를 이사장으로 선임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는데도당신 같은 사람이면 가능하지만신학교 건축이라는 중대한 일이 있기 때문에 안 된다참 미안하다.”라고 하셨다고 전한다.

1차 투표 -> 곽목사 원 모 이사 = 8:7

2차 투표 -> 곽목사 원 모 이사 = 8:7

3차 투표 -> 곽목사 조 모 이사 = 8:7

 

나중에 알고 보니 부산의 경합자 한분은 최종 투표에서 자기 이름을 안 써서 한 표 차이(8:7)로 곽목사가 이사장으로 당선 선임되었다는 후문이다흔히 교회에서 직분자 투표가 있을 때 내심으로는 하고 싶은데자신이 자기 이름을 안 쓰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소극적이거나하고자 하는 사명감이 떨어지는 경우라고 보기도 한다다른 한 축은 결국 경합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1, 2, 3차에 걸친 투표 현황을 분석해 보면 포기로 볼 수도 있지만우연이 아니다하나님이 그를 세워서 사용하신 것이다. (증언자:부산노회 ㅊ원로 장로)


송도 캠퍼스 운동장지하주차장 입찰 사건의무효를 선언하다 

목사님께서 이사장으로 취임하신 후 법인 이사회는 현재의 의과대학 운동장에 지하주차장 건설 공사를 추진하였다목사님과 모 이사 한분이 자리에 같이 있는 가운데 의논을 하였다모 이사 한분은 낙찰금액이이십여 억이라는 정보를 교단의 모 건설업자에게 흘렸다입찰이 시작되었는데 단돈 5,000원 차이로 모 건설업자가 당첨 낙찰되었다이런 정보가 외부로 나간 것을 눈치 챈 이사장은 전체 이사들을 소집하여 놓은 자리에서이는 반드시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무효를 선언하였다당시 이 사건으로 목사이사 1장로이사 1명 총 2명의 이사가 해임되었고지하주차장 공사는 없었든 일로 마무리 되었다외부로 정보를 유출한 그 분 역시도 보통의 분은 아니셨는데목사님의 단호한 조치를 어느 이사 누구도 거역할 수가 없었던 사건으로 기억에 잔잔히 남는다 

이후 목사님께서는 모든 입찰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이사 전원이 참여하는 방법으로 이사 개개인이 내정 가격을 써 넣도록 한 후에공개적으로 입찰자들이 전원 참석한 가운데 그 자리에서 직접 입찰 단가 투표함을 열어서 공개하였다최고가와 최저가를 빼고 합산하여내정 가를 결정하는 방식을 택했다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목사님은 공정하고 깨끗한 입찰 방식으로 법인 운영을 주도하셨다.

 

복음병원 5병동 건축허가를 받아내었. 

법인 산하 기관들의 건축허가는 항상 법인에서 신청하고 받아내었다병원을 찾는 환자들의 수적 증가와 수용률 확대 및 의과대학병원으로서의 역할과 소임을 감당하려면 3병동만으로는 부족하여 제5병동 건축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그 동안 매번 1억 정도가 소요되는 건축설계를 해서 부산광역시장의 건축허가를 받아내려고 노력하였지만빈번히 반려 부결되었다.

이에 목사님의 지시로 당시 법인의 이정치 국장님은 적극적으로 시청을 드나들었다그런 가운데 건축과장을 면담하고 해결 방안을 강구하였지만관료들의 불가 방침 때문에 쉽게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법인 이 국장님은 건축과장 얼굴의 한 면 전체가 붉은 점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법인 사무국으로 돌아와서 목사님과 의논을 하였다우리 병원에서 한번 치료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다목사님과 이 국장님은 피부과 김상태 교수님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면서 잘 부탁드린다고 당부를 하게 된다이에 건축과장은 얼룩진 얼굴을 우리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난후고민에 빠지게 되었다부하 직원 중에서 사무관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직원에게왜 건축허가가 불가능한지 여부를 연구해 보라고 지시를 하게 된다 

허가가 내 줄 수 없었던 문제의 요소는 5병동이 들어설 부지는 대학의 자산으로 등기가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 예정부지가병원 자산이 아니라는 것이 원인이었다. “대학 부지에 병원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당초의 건축허가 불가 및 반려 입장에 대해서 다른 법리를 내놓았다.“고신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서는 가능하다는 새로운 유권 해석이다따라서건축허가를 인정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상황은 반전되었다오늘도 유익하게 사용하는 5병동 건물은 그냥 건축된 것이 아니다이정치 국장님의 지혜와 목사님의 마음이 심겨져 있는 병동이다 

지금 그냥 제3자의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 런지 모르지만이 문제의 해결은 목사님의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다면 조금 지연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천안 신학대학원 건축을 추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셨다. 

목사님은 前 복음병원 박영훈 원장님과 함께 천안시 삼룡동에 신대원을 조성할 부지를 물색하셨다목사님은 신대원 건축과 관련하여 이사회에 전권을 위임해 달라는 요청을 하셨고 이사회는 이사장님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이런 상황에서 더욱이 법인의 이정치 사무국장님은 매사에 신중하고 돌다리도 다시 확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업무를 추진하였다이 국장님은 각 기관과는 자료와 정보를 공유하면서 상호 협력하는 가운데 이사장님을 보좌했다 

당장 신대원 건축 부지를 매입하려면 계약을 해야 하는데법인이나 대학 어느 곳에도 여력이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목사님께서는 병원의 행정부장 직무대행이었던 김 모 장로를 불러서 신대원 땅 부지를 매입하려고 하는데 소정 금액의 수표를 만들어 오라고 당부를 했다당시 행정 책임자 김 모 부장 대리는 재정이 돌아가지 않는다면서불가능합니다.”라고 거절하였다 

며칠 후 다시 김 모 부장은 목사님에게 불려갔다우리 병원은 대학의 부속병원이며 현재의 송도캠퍼스 대학 부지를 이후에는 의과대학과 병원이 사용하게 되는데 그 대가를 감안하여도 병원에서 신대원 건축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설득을 한다지난날 병원이 어려울 때 항상 교단의 교회들이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주었고심어지 우리 목회자들은 한 달 치 사례금을 내 놓기도 했다는 점을 설명하신다김 부장은 재정상황이 어렵다면서 불가하다는 입장을 전한다.

 

이때 목사님께서는 김 부장에게 계약금을 가지고 오든지 아니면 사표를 써서 오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지시하셨다김 모 장로는 급하게 226백만원을 계약금으로 법인에 입금한 후이사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면서 용서를 구했다목사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신대원 건축 부지는 계약을 할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천안 신대원 건축공사는 1994년 10월에 목사님께서 시작하여 2001년 3월에 종결되었는데 곽삼찬 -> 조재태 -> 오성환 이사장 3대에 걸친 대장정의 역사가 있다사학진흥재단의 자금 차입에는 법인국장은행권의 차입은 병원 관계자들의 노고가 많았다천안 신대원 건축에는 세분의 이사장님들과 법인병원 관계자님들의 노고와 공헌이 있었음을 잊을 수가 없다 

 

천안 캠퍼스 신축자금 현황  

총투자금액 : 25,554백만원

병원전입금 : 6,396백만원

동 화 은행 : 6,150백만원

사 학 진흥 : 6,000백만원

신 한 은행 : 3,000백만원

(차 입 금액 15,150백만원)

법인부담금 : 4,008백만원

 

당시 법인은 부산광역시의 도로매입 보상금 20억원과 별도 조성비 20여억원을 신대원에 투입하였다이후 모든 차입금액은 병원이 갚았다이로 인해 병원은 재정적 어려움을 격기도 했지만 정말 소중한 일을 잘 감당했다영도캠퍼스 건축 조성비 역시도 부산은행 등에서 차입했는데 병원 재정에서 상환되었다항시 교육인적자원부 당국자들은 대학의 재정건실 여부를 수치로 관리하고 있는데관할청은 관선 직전에 법인이사장에게 교단이 병원재정 사용을 하지 않겠다는확약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 적이 있다. 

지금우리 병원의 역할 등에 대해서 소상히 잘 모르는 분들이 헐뜯거나 오도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서영애 전임 부장님에 의하면여타 병원에 비해서 복음병원은 국가유공자나 극빈자 치료비 부담 율이 가장 높은 병원으로 수익 율 저하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해 주었는데,복음병원은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는 인술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설립이념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대개 다른 종합병원들은 수익성이 없는 환자를 외면하거나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안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신대 영도캠퍼스의 청학모자원부지 무단점거 사용을 해결하였다. 

목사님의 업적 중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 하나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 놓고 난 후곧 바로 이사장 직무를 마친 일이다이런 연유로 해서(무단점유) 1982년 영도캠퍼스가 건립 조성되었으나 건축허가를 받지 못하고 매년 임시사용 허가를 받아 사용하게 되었다그런 가운데 대학부지 중 하나인 송도캠퍼스 교지 일부분을 부산광역시가 도로로 매입하면서받은 보상금 십여 억을 재판을 통해 무단 점유지의 산정가를 결정하였다이후 전액을 법인이 대학에 기부처리 해 주었다.당시 법인 사무국장 이정치 장로님의 건의와 판단도 작용을 했겠지만목사님의 결정과 배려는 아주 중요한 문제 하나를 해결하는데 큰 공을 세우셨다고 생각한다. 

청학모자원의 이사장 박모 장로님은 서울 중앙교회 박 모 집사님으로(이후 장로가 됨대학 당국자와는 서로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그 분은 아산만 십만여 평을 기증하신 분인데우리 관계자들은 당시 그 땅을 기증받기를 거부했었다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상항에서 목사님께서는 그분과의 화해를 시도하셨다서울 역삼동 모 호텔에서 그분을 만나서 화해를 하게 된다정중하게 사과하고 배려를 간청한다명절이면 작은 선물도 드렸다.

목사님은 1982년 영도캠퍼스 조성 이후수년간 가사용 허가를 받든 불합리한 점을 개선할 수 있는 요인박 모 씨의 땅을 우리 땅으로 바꿔관청의 정식 준공허가를 받아내었다박 모 장로님은 그 땅 십만여 평을 모 신학교에 기증하셨고기숙사를 호텔급 수준으로 잘 지어주셨다그 후 법인 이사장으로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륵암 사찰 측이 제기한 명도 소송 재판을 승소로 이끌었다. 

고신대학교 영도 캠퍼스 교지는 당초 7만 2천여 평 정도였는데대학교지 중에서 전망이 아주 좋은 산꼭대기 부분을 무단 점거하고 있던 미륵암 사찰은 점거 사용 20년이 되었으므로 특별조치법에 의거 미륵암 주변 일대 3,000여 평을 자신들에게 명의를이전 명도하라는 민사소송을 변호사를 선임하여 부산지방법원에 제기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미륵암 신도들의 저력은 대단했다. 그럼에도 1차 재판에서는 이정치 국장님과 곽춘호 과장님 등의 노력으로 부산지방법원 민사 재판에서 고려학원은 승소 판결을 받게 된다미륵암 사찰 측은 이를 불복하였다소송은 고등법원으로 넘어갔다미륵암 신도는 약 3,000여명에 이르는데 심지어는 미륵암에서 고시 준비를 한 관료와 법관들도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안다영도구청 경제지원과의 한 분도 미륵암 신도였는데도서관 뒤편에 산불 예방을 위해 산복도로를 낸다고 하면서정부 토지수용 령을 내기 까지 하여서 대학이 곤욕을 치룬 적도 있었다김동인 교수와 의논하여캠퍼스 조성 계획 조감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서 이 자료를 영도 구청에 제출했다이후 강력하게 항의하여 산꼭대기에 달아놓았던 산길조성 예정을 알리는 소나무 숲 여러 곳에 달았던붉은 리본은 결국 떼어내게 되었다이렇게 미륵암 사찰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위력은 대단했다 

김병원 총장님 재임 시절에 한상동 목사님의 조카인 한기완 장로님과 한 목사님이 시무하셨던 삼일교회가 협력하여 한상동 기념 홀을 조성하게 되었는데미륵암 장소에는 가칭주남선 기념 기도원을 세우기로 잠정 연구하고 있던 중이었다미륵암을 되찾아 기존 건물을 보수하는 방식으로 하고기도원은 외부에 위탁관리를 고려하고 있던 중이었다 

소송은 반전의 연속 이었다 이때 미륵암 사찰 측은 20년 전의 습자지 같은 종이의영수증을 하나 찾아서 법원에 제출하였는데일금 이십만 원에 미륵암 부지 일대를 자신들이 매입하였다는 아주 중요한 증빙 자료였다이에 필자는 前 청학모자원 원장 김인숙 여사님의 거처를 수소문한 끝에 겨우 찾게 되었다그런 가운데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당시 김 여사님과는 친구 관계였던 다른 모 여사님을 통해 미국 소재지와 연락처를 파악하게 되었다김 여사님을 뵙기 위해 이정치 법인 국장님과 필자는 미국 출장길에 올라 출국했다 

대학교지 원 주인을 상면하다∣ 우리는 극적으로 김인숙 여사님과 부군을 만나게 되었다김병원 총장님의 지시로 귀한 선물 하나를 준비했는데옷 칠을 한 고급자기 함을 박창제 장로에게 구입하여 가져갔다여사님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다미국 산호세 한인 장로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신현국 목사님의 도움이 아주 컸다처음에는 망막하고 서울의 김 서방 찾기 식이었는데,고신출신 미국의 동문들이 많이 협조해 주셔서 우리일행은 김인숙 여사님과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알고 보니 아들이 우리대학 기독교교육과 출신이고 목사님이 되셨다일들이 잘 풀려갔다.모교 일이라고 하여 적극적으로 우리일행을 돕던 미국의 동문 목사님들을 보면서 고신인의 저력과 정신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영도 캠퍼스 부지는 원래는 일제의 적산 땅(광복 이전 일본인 소유였던 재산)이었는데 김인숙 여사님이 부산시 부녀회국장으로 있을 당시절차에 따라 자신이 매입(불하 받은)한 것이다김형규 교수님이 청학 모자원 설교를 담당하는 가운데 그 정보를 알고 박영훈 원장님에게 보고하여,박 원장님의 접촉과 노력으로 고려학원 법인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영도캠퍼스 7만 2천여 평 부지가 조성된 것이다우리는 출발하기 전에 김인숙 여사에게 요청할 공증 문서를 사전에 작성하여 떠났다마침 로터리 공증을 하는 분도 재미 한국 동포(전직 경찰관)로서 아주 쉽게 일을 마치고 귀국했다. “로타리 공증” 문서는 고등법원 판결의 중요한 증빙 자료로서 승소하게 된 단초 역할이 되었다이후 대법원 판결에서도 최종 승소를 하였다이런 과정에서 목사님의 상황 판단과 대처 방법은 적중했다이후 미륵암 사찰은 대법원의 승소 판결문을 근거로 아래와 같이 강제 집행에 들어가게 된다.

 

황창기 총장님은 미륵암 사찰 철거를 강제 집행했다. 

고려학원 법인사무국은 미륵암 사찰과의 법정 논란에서 승소한 대법원 판결문을 근거로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미륵암사찰 철거 집행을 허락받았다이 작업은 2002년 11월 11일 오전 9시경 단행되었는데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황창기 총장님의 결단으로 강제집행하게 된다 

법원 집행관실 회장인 부민교회 전용덕 장로님의 협조로 법원 집행관 5인을 신자로 선발하여 집행 현장에 파견하게 되었다. 400여명의 사설 경호원(여경호원만 70명 동원)이 동원되었으며, 600여명의 전투경찰이 오전 일찍부터 대학 운동장에 집결해 있었다사복경찰관 30여명정보경찰관 수십명교직원 30여명일부 학생들도 현장에 있었다비디오카메라 촬영 10인 동원소화기30포클레인 2대가 동원되어 미륵암사찰 입구는 전쟁터를 방불하는 난장판을 이룬 가운데집행관들은 먼저 미륵암 사찰 하단구조 건물을 포클레인으로 파괴하였다이후 본당 건물 파괴를 시도하였으나 150여명의 불자들과 부산시불교연합회 사무국장이한선 주지(주인 할머니 딸) 등이 결사적으로 반항하면서 가스통을 들고휘발성이 강한 신나를 사찰 본당 및 사방에 뿌려 화염폭발 직전에 인사사고를 우려한 집행관 대표와 경찰관들이 논의하여 집행을 중단하고 하산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미륵암 사찰 철거를 위해 수고한 분들은 윤은조 장로전용덕 장로이정치 법인국장조상래 과장과 관리과 직원들의 노고가 많았다 

이후 미륵암 철거는 대학 측 대표와 불교계 대표로 구성된 협상 팀을 만들어서 사찰인수 문제를 종결지었다당시 협상 팀(윤은조옥치인김정남김영수정각승려) 5인은 매번 부산역 앞 광장호텔에서 6-7회 회동을 가지면서 철거 문제를 의논하여 해결하게 된다협상에 임하신 옥치인 목사님과 김정남 장로님은 총회 단군상 철거 위원으로서 대학 측이 특별히 위촉한 분들이다.

 

글을 마치면서 

목사님은 공적인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사리사욕에 얽매이지 않았다순간적인 판단력이 뛰어나고 의지가 강한 분이셨기 때문에 고려학원의 이사장으로 계실 당시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이사회가 일원화되어 고려학원이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유지 운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치의 속성상 법인 이사회가 대립관계를 형성한 시기에는 학원 운영 전반이 중구난방이었으나,그런 점에서 목사님의 강력한 지도력은 고려학원의 이사장의 직무를 잘 감당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본다. 

목사님을 모셨던 한 사람으로서 함께 그린 작품이 우리학원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고 여겨진다.목사님의 공적은 지금보다는 이후에 다음 세대에 가서 더욱 공정하게 높이 평가되리라고 생각한다목사님은 항상 선도적인 입장에서 시련의 풍랑을 잘 해쳐 가셨다소명을 마치고 이렇게 먼저 주님 품으로 가셨다인생무상세월이 유수와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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