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일 오후 2시 부산진교회(이종윤 목사) 왕길지 기념관에서는 한국기독교선교 130주년 부산기념대회’(대회장 이인건 목사)의 행사 중 선교사 알렌 입국 130주년에 바라보는 부산지역 교회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제 3회 부산기독교스토리텔링 포럼을 열었다. 이날 포럼은 논란이 될 수 있는 주제이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은 탓에 포럼발제를 담은 책자 100부가 이미 동이 나서 받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나 되어 준비위원장 이성구 목사가 사과와 함께 양해를 구하는 해프닝이 있을 만큼 열기가 대단하였다.

▲ 포럼이 진행되고 있다.

갑자기 부산에서 선교 130주년 기념대회라고 명명하는 것은 한국선교 129주년을 뒤엎는 발언이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국선교라고 하면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를 기억하고 그들이 제물포에 발을 딛는 그 때를 선교의 기점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두 선교사가 제물포에 발을 딛은 날은 188545일이었다. 그렇게 보면 129년이 맞다. 그러나 우리는 알렌을 잊고 있었다. 알렌은 1884914일 부산에 도착했고, 920일에 제물포를 거쳐, 922일 한양에 들어갔다고 모든 기록이 증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교 130주년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산에서의 역사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주장하는 선교 130주년을 위해서는 두 가지의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 하나는 알렌이 선교사였느냐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알렌의 기착지가 부산이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 민경배 박사가 발제하고 있다.

알렌은 선교사인가?

이날 포럼의 강사로 초빙된 한국기독교의 산증인인 민경배 박사(백석대 석좌교수)와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는 일관되게 그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고 증언했다. 처음엔 중국으로 파송을 받았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8개월을 헤매다가 조선으로 선교지를 변경해 달라고 북장로교 선교부에 요청을 하게 된다.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하였든지 보낸 요청서에는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1884722일 선교부의 허락이 내려왔고 그는 914일 부산항에 도착하게 된다.

민경배 박사는 포럼 발제에서 알렌의 선교 초창기에 그는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 일약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는 선교사가 되었다고 증언했다. 그것은 한양에 짐을 푼 2개월 뒤인 188412월 어느 날, 갑신정변을 만나고 민비의 척족인 민영익이 칼에 맞아 전신이 난자된 상태였는데 한의사 14명도 포기한 환자를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술을 하여 기적적으로 살려냄으로 조선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왕궁을 출입하는 선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 공으로 받은 십만 냥을 가지고 광혜원이라는 진료소를 세워 섬기다가 제중원으로 확장하였고 이 제중원은 현재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다.

민박사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알렌 이후 들어온 복음 선교사들이 의료 선교사들을 선교사로 인정하지 않는 갈등을 일으켰는데, “왕실을 드나들고 의료사업하는 시간에 전도하라고 공격하였다.

그런데 그 도가 더욱 심하여진 것은 알렌이 선교사로 와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미국외교관인 공사가 되고 난 뒤였다. 알렌은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일이고 선교라고 믿고 있었지만 복음 선교사들은 북미 선교본부에 그의 제명(除名)을 계속 타전했는데 S. A, Moffett이 가장 극심하였다고 증언했다.

'알렌, 한국근대사의 거탑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민경배 박사는 알렌은 선교사였지만 공사로서의 활약이 더 강하였고 한국을 지극히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알렌을 제국주의자라고 후세사학자들은 비난하지만 그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 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려 한다면 투자한 자본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움직일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친일보다는 친한으로 당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심하게 다투고 돌아오는 뱃길에서 해고를 당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 작은 병원을 냈지만 당뇨로 두 다리를 절단하고 74세에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그의 장례에는 몇 사람만 지켜보았으니 인간적으로 비참하다고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을 두고 민경배 박사는 이렇게 정리했다. “시기하고 다투는 선교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천사가 아닌 인간들을 가지고서도 선교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고, 귀중하게 쓰시다가 사명이 다하면 비참하리만치 거두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 Soli Deo Gloria!”

 

▲ 탁지일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부산이 경유지인가? 기착지인가?

이 문제에 와서는 민경배 박사와 탁지일 교수, 부산의 목회자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민박사는 알렌이 선교사로서 조선에 들어와 정착한 곳은 한양이기 때문에 부산은 경유지일 뿐이라는 견해를 고수한다. 그러나 탁교수는 알렌 뿐 아니라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역시 부산에 내렸다는 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기착지가 부산이었다는 것이라고 말하여 준다고 주장했다.

이점에 대해 민박사는 탁교수의 말도 맞고 자신의 말도 맞다. 역사는 사방에서 조명해 보아야 하기 때문에 정답은 오직 이것뿐이다 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논평자로 나선 박수웅 목사(KWMA협동총무)는 알렌은 분명히 부산에 발을 내려 며칠을 묵었는지는 모르지만 주변을 살펴보았던 것이 일기로 기록물이 남아있기 때문에 기착하였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4914일 상해를 떠나 난징호 편으로 조선으로 향했다. 배멀미를 심하게 했다. 나가사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 태풍을 만났는데 많은 배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다행히 무사히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산은 완전히 일본도시이다. 주변으로 나가야 조선인들을 볼 수 있다. 하얀색의 단아한 일본영사관이 있고, 해관장인 로바트(Lovatt), 항만장 파스튜니우스(Pasthunious), 레이놀즈(Reynolds), 저지(Jersey), 크랩스(Crabs) 등의 외국인 들이 있다.

부산은 북로전선에 연결되어 있고 전기가 없고 불편하지만 훌륭한 항구이다.”(알렌의 편지 일기 중에서)

 

▲ 왼쪽부터 발제자 민경배 박사, 탁지일 교수, 논평자 박수웅 목사, 안용운 목사

알렌이 부산에 기착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첫째는 알렌이 사역지를 중국에서 조선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라는 그의 청원서가 증거한다. 한양이라는 도시를 지정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말한 것이다. 그는 조선에 도착했다. 거기가 부산이었고 부산에 첫발을 내렸다. 그것은 그가 선교지로 인식했던 땅에 기착한 것이다.

둘째, 그리고 그는 조선의 서울인 한양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당시 유일한 운송수단인 배를 타고 제물포로 가서 내렸던 것이다. 당시 철로가 있었다면 부산에서 서울로 기차를 타고 갔을 것이다. 아마 그 뒤에 오는 모든 선교사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제물포는 존재가 없지 않았겠는가?

알렌이나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지는 않았다. 다만 제물포에 내렸을 뿐인데 인천선교기념탑은 그들이 제물포에 내렸다는 것을 큰 사건으로 기억하고 기념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부산에 기착한 선교사들을 두고 경유한 것이라며 의미를 생략하는 것은 한국교회사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가 서울 중심으로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부산의 정서이며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 단체사진

그래서 한국기독교선교130주년부산기념대회 준비위원장 이성구 목사는 한국기독교선교역사에서 두 가지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알렌을 선교사로 인정하여 선교역사 129주년을 130주년으로 변경하는 일, 둘째는 선교사들의 기착지가 부산이라는 점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향후 역사학자들의 집중적인 토론과 인식전환을 통해 다시 한 번 역사가 정돈되기를 기대해 본다고 이성구 목사는 마지막 인사말에서 전했다.

한편 동 기념대회는 제 3회 부산기독교스토리텔링 포럼을 시작으로 914일 주일에는 동래중앙교회당에서 오후 3시에 역대의 연대를 기억하라는 기념주일을, 916()부터 18()까지는 부산남교회당에서 큰 구원! 큰 기쁨! 큰 능력!’이라는 주제로 기념집회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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