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순길 박사 전고려신학대학원 원장

영역주권 사상은 세계 칼뱅주의 3대 신학자 중 한분으로 인정되어 온 네덜란드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19세기 말에 제의하고 주창한 것이다. 카이퍼가 칼뱅의 어깨 위에서 성경이란 망원경을 통해 멀리 내다보며 개발한 칼뱅주의 사상 가운데 탁월한 것 중의 하나가 이 영역주권 사상이다.

이 사상을 줄여서 말하면 하나님은 가정, 교회, 학교, 국가 등 각 영역에 서로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주권을 주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가정의 부모에게 주신 주권영역은 교회도 국가도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된다. 적은 예를 들면 부모는 자녀의 훈육을 위해 자녀들에게 매를 댈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목사와 장로는 교인들의 자녀들에게 이런 권리를 갖지 않는다.

이렇게 부모와 교회 직분자들은 각각 자신들의 고유한 주권영역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가정과 학교,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도 원칙적으로 마찬가지이다. 한 영역이 다른 영역의 주권을 침범할 때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종교와 국가의 주권 영역이 다르다. 일제가 교회의 주권영역을 침범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무서운 혼란을 초래했다.

카이퍼가 펴낸 교리나 사상 가운데 비판받을 부분이 있지만 이 주권영역 사상만큼은 전 개혁주의 세계(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공감하고 수용하고 있다.

우리 고신 교회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구호처럼 말하면서 지금까지 영역주권 문제를 거의 무시해 왔다. 물론 영역주권 사상이 절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사상은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성경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 영역주권 사상이 교회생활에 바로 적용될 때 혼란이나 속화를 크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고신교회는 역사적으로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어 오지 않았다.

 

고신은 영역주권을 연구하지 않았다.

고신교회의 역사는 고신총회가 복음병원과 대학에 대한 총회(교회)직영을 결의하면서 이런 기관들을 교회가 직영하는 것이 개혁교회 생활원리인 영역주권 사상에 따라 합당한지 연구하거나 토론한 일이 전혀 없었다.

1951년 사립으로 개원된 복음병원을 1956년에 고신총회가 이사들을 선정하여 보냄으로 교회적 기관의 성격을 갖게 하고, 1965년에는 유지 재단에 편입시켜 교회가 운영하는 기관으로 만들었다. 이때 교회가 병원을 직영하는 것이 마땅한가에 대한 연구나 토론이 없었다.

1967년에 고려신학교 대학부의 대학인가를 위해 학교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을 때나, 1980고려신학대학을 일반대학인 고신대학으로 변경할 때에도 교회(총회)가 일반대학을 직영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연구를 하거나 토론한 일이 전혀 없다.

그 당시의 신학자인 교수들도 이에 대한 글 한 번 쓴 일이 없다. 다만 그때그때의 편이와 실리를 따라 결행한 것뿐이다. 이것이 이후 고신 교회에 혼란과 속화를 불러오는 큰 요인이 되었다. 일반 교육을 하는 학교의 영역은 그것이 기독교적 교육일지라도 교회에 속한 영역이 아니다.

자녀들의 양육과 교육의 책임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부모들의 영역이다. 그러니 학교의 운영은 제도로서의 교회(당회, 노회, 총회)가 책임 질 영역이 아니고, 교회의 직분자로서 목사와 장로가 직접 개입할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신자인 부모의 영역이요, 신자들의 임의 단체의 영역이다.

 

고신교회는 대학교와 병원에서 손을 떼야 한다.

고신 교회가 대학교와 병원을 직영함으로 교회 치리회의 속화를 가져오고, 목사 장로 직분의 속화를 초래해 왔다. 대학교와 병원이 총회 직영이기 때문에 이 기관들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총회(교회)가 바로 관련이 된다. 총회가 목사와 장로들을 학교법인 이사회의 이사로 파송한다. 이사나 이사장 선출이 있을 때 치열한 선거운동이 암암리에 진행이 된다. 이것이 영적 영역에 봉사하는 목사와 장로로 하여금 본분의 자리를 잃게 하고 직분의 속화를 가져 오게 한다.

이것이 지난날 바로 필자가 이사회 안 밖에서 체험한 일이다. 학교법인 이사장 선출이 있을 때면 표를 얻기 위해 접근해 오는 분들이 늘 있었다.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는 자리가 갑자기 표를 부탁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개혁교회 생활에 젖어 온 나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수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교회의 대학교 직영이 목사와 장로직의 속화를 가져 온다는 확신을 더욱 더 갖게 되었다. 대학교와 병원이라는 큰 기관들이 이사회의 관할아래 있기 때문에 모두가 이렇게 이사와 이사장 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후 필자는 총회가 대학교와 신학대학원을 완전 분리하여 대학교는 앞으로 교육에 관심 있는 일반 신자들이나 집단에 넘겨주고 교회는 신학교만 직영함으로 영역주권에 따른 교회생활의 재정비를 해야 한다는 더욱 강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신학대학원은 교육기관이지만 일반대학과는 달리 목사를 양성하는 영적 기관이다. 그럼으로 교회는 신학대학원을 운영하고 신학교육을 감독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신학대학원의 운영과 유지를 위해서는 목사와 장로가 이사로서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개혁교회에서는 영역주권 사상에 따른 교회와 학교의 선이 분명하다. 개혁교회가 있는 곳에는 거의 예외 없이 유치원, , , 고등학학교가 있다. 내가 지난 날 시무했던 개혁교회 건물 바로 옆에도 요한 칼뱅 초등학교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고등학교가 있었다. 그러나 당회나 노회가 그 학교를 운영하지 않는다. 교회에 속한 부모와 신자들로 이뤄진 교육연합회가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치리회(당회, 노회, 총회)가 학교의 운영이나 내부적 어려움 때문에 영향을 받는 일이 전혀 없다. 목사인 나도 운영위원이 된 일이 없다. 목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개혁교회 생활의 상식이다.

 

개혁교회는 신학교만 해야 한다.

개혁교회에서 신학교만은 교회의 직영이다. 이는 목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영적인 교회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고신교회가 대학교와 복음의료원을 직영하는 한 결코 교회적으로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기관들은 일종의 기업체이다. 기업체는 신자 기업인들에게 맡겨야 한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기업인일 때 그들이 운영하는 기업체가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귀한 기구들이 될 수 있다.

목사들은 기업경영인들이 아니고 양 무리를 돌보고 인도하는 목자들이다.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기업경쟁 세계에서 대학교와 병원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업 전문가들을 필요로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 기업인들에게 이 기관들을 넘겨주고 이들 기업으로부터 손을 떼야 한다. 교회가 이런 기관을 직영하는 한 더욱 큰 속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고신 교회는 이런 일을 몇 번 겪어왔다. 그러나 별 깨달음이 없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참된 개혁교회 건설을 위해서는 교회가 이 기관들의 직영으로부터 속히 벗어나야 한다.

 

영역주권을 재정비해야 한다.

고신 교회는 학교 뿐 아니라 다른 기관도 재평가하고 영역주권을 따라 재정비해야 한다. 2013년에 기독교보의 사장 선출 문제로 총회에서 논란이 된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교회적인 기관에 사장이 있다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들린다.

사장이라 불리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세상의 문화가 교회에 여과 없이 도입되어 있다. 개혁교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교회가 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듯 들린다.

주간 신문 기독교보도 교회(총회)가 직영할 일은 아니다.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운영위원회를 조직하여 사설기관으로 운영하여야만 한다. 우리 교회의 자매교회인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도 주간지가 있고 심지어 일간신문(Nederlandse Dagblad)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교회의 직영이 아니다. 뜻있는 분들이 운영회를 조직하여 합당한 분들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캐나다와 호주의 개혁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럴 때 사장 문제 때문에 교회가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다. 주간지나 일간신문이 교회의 직영이 아니지만 그 교파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들이 구독료를 내고 받아 본다. 심지어 다른 교파에 속한 상당수 사람들도 받아본다. 그들의 교회와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지도자들이 이런 영역주권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새로이 정립해 감으로 교회 속화의 길에서 속히 벗어났으면 한다.

 

천안 신대원 정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동안 외국에 있다 귀국하니 고신대학교를 위한 특별 대책위원회가 천안 캠퍼스를 매각하고, 영도 캠퍼스로 이전하는 방안을 결의하고 이를 이번 총회에 상정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고신대학교의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고려신학대학원캠퍼스를 매각한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게 된다.

어쩌다가 고신 교회가 이런 단계까지 왔으며, 오늘 교회지도자들이 이런 착상을 하게 되는지 당황스럽기도 하고 허탈감마저 갖게 된다. 대학구조조종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재원이 필요하다는 현실은 이해를 한다. 그러나 대학교를 위해 고려신학대학원에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교회중심의 생활이 아니다. 고신교회의 품에서 자란 분들을 누구나 SFC의 강령 중 교회중심의 우리 생활의 원리를 자주 제창해 왔고, 이것을 잊지 않고 있는 줄 안다. 개혁주의 신앙생활은 교회중심의 생활이다.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란 이름으로 대학교에 종속되어 있던 1980년대에, 고신대학교 캠퍼스에서 캠퍼스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일어난 무서운 폭력과 혼란을 겪는 중에, 고려신학교의 정체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고신대학교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목적하고 생겨진 것이다.

19888월 고신대 교무회의는 신학대학원은 목회자 양성의 독립학교로 문교부에 신청하기로 하고, 교명은 고려신학대학원(가칭)으로 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신학대학원이 내적으로 대학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이사회는 시행세칙을 만들어 뒷받침했다. 1998년 천안에 독립된 캠퍼스를 조성하여 옮김으로 옛 고려신학교의 전통을 잇는 독립된 고려신학대학원대학교로 만들기 위한 힘찬 전진을 했다.

이제 옮긴지 겨우 15년이 지난 때에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영도 캠퍼스 안으로 이전을 한다는 것은 역사의 진전을 거슬리는 일이요, 역사의 교훈을 잊는 일이다. 1980년대에 큰 대학의 덩치에 눌려 정체성마저 잃어버릴 처지에서 구조되어 나와 차츰 자리를 잡아가는 고려신학대학원을 옛 그 자리로 되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지난날의 역사를 알고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한다.

1960년대에 고신 교회가 당면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졸속하게 합동을 결의하고 강행함으로 3년도 못되어 환원이란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게 되고, 교회 3분의 1일 잃었다. 있을 수 없는 역사의 후퇴라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이런 선배들의 실수를 보고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

고신 교회는 교회의 미래를 위해 천안의 고려신학대학원을 그대로 지키고, 고려신학교의 전통을 이어가고, 정체를 지켜 나가도록 지원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을 보존하고 지키며 전하는 대 사명만을 주께로부터 받았다. 대학을 통한 문화사명은 부름 받은 신자 개인과 신자들의 임의 단체의 몫이다. 고신 교회가 교회의 미래를 위하고 개혁주의 노선을 지켜 가려면 이번 총회는 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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